Ⅰ. 고려・조선
최승로(927~989) |
최충(984~1068) |
◦ 신라 6두품 출신으로 927년 후백제 겸훤이 신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시해하던 해에 출생
◦ 광종 때에는 중국 유학파 출신의 학자를 우대 하였기에 순수 국내파 출신인 최승로는 주요 요직에 발탁되지 못함
◦ 왕명에 따라 사회개혁 및 대중국관(對中國觀)의 시정 등에 관한 시무책 28조의 상소를 올림(982, 성종 1) → 군제(軍制)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의 중시, 무역의 절제, 지방관제의 확정, 관복의 제정, 승려의 횡포 엄금, 공역(貢役)의 균등, 우상 철폐, 신분제도의 확립 등 전반적인 폐단의 시정 및 제도의 제정 따위를 건의 |
▹ 국사수찬관에 재직 시(1013, 현종 4) 태조에서 목종까지「칠대실록」 편찬에 참여
▹ 문하시중으로서 법률관들에게 율령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1047, 문종 1)
▹ 서북면도병마사 때 농번기의 공역(工役) 금지와 국가 재정의 낭비를 막도록 상소하여 시행
▹ 벼슬에서 물러나 송악산 아래에서 사숙을 열고 많은 인재를 배출[문헌공도(文憲公徒)]
▹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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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1316~1388) |
이성계(1335~1408) |
◦ 서북면병마부사가 되어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수복(1354, 공민왕 3)
◦ 서경을 함락시킨 홍건적을 이방실 등과 함께 물리침(1359, 공민왕 8)
◦ 흥왕사의 변을 진압(1363, 공민왕 12)
◦ 삼남지방을 휩쓴 왜구를 홍산에서 대파(1376, 우왕 2)
◦ 명(明)의 철령위를 설치하고 북변 일대를 요동에 귀속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시도했으나 이성계 등의 위화도회군을 좌절됨(1388, 우왕 14)
⊕ 시조:「녹이상제(綠耳霜蹄) 살지게 먹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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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경을 함락시킨 홍건적을 사병 2,000여 명을 거느리고 수도를 탈환한 전공으로 동북면병마사로 승진(1362, 공민왕 11)
▹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가 되어 황산에서 왜구를 소탕(1380, 우왕 6)
▹ 최영의 명으로 우군도통사가 되어 요동정벌에 출전하였으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 (1388, 우왕 14)
▹ 수문하시중으로 섭정을 하여 창왕을 보위에서 내쫓고 공양왕을 보위에 추대(1389, 창왕 1)
▹ 조선을 건국하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됨(1392, 태조 1)
▹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정함(1393, 태조 2)
▹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김(1394, 태조 3) |
정도전(1342~1398) |
정몽주(1377~1392) |
◦ 친명정책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에게 공격을 받아 전남 나주로 유배(1375, 우왕 1)
◦ 유형(流刑)을 마치고 고향 영주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1377, 우왕 3)
◦ 함경도 함주로 찾아가 이성계와 교류(1383, 우왕 9)
◦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적극 가담하여 봉화현충의군에 책봉(1389, 공양왕 1)
◦ 한양 천도 때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였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함(1394, 태조 3)
◦ 1395년(태조 4) 정총이 가지고 간 표문(表問)의 언사(言辭)가 불손하다고 명제(明帝)에게 트집을 잡혀 정총이 현지에 억류됨 → 명나라 태도에 격분한 정도전과 남은을 중심 으로 태조의 호응을 받아 군량미를 비축하고 병력을 증강해 요동정벌을 계획
⊕ 저서:「삼봉집(三峰集)」,「경제문감(經濟文鑑)」, 「진법서(陣法書)」등 |
▹ 문과에 장원하여 예문검열・수찬・위위시승을 지냄(1360, 공민왕 9)
▹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1363, 공민왕 12)
▹ 성균대사성으로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으로 유배(1376, 우왕 2)
▹ 유형에서 풀러나 사신으로 일본에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킴(1377, 우왕 3)
▹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1392, 태조 1)
⊕ 저서:「단심가(丹心歌)」,「포은집(圃隱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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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1417~1475) |
성삼문(1418~1456) |
◦ 통신사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시명(詩名)을 떨치고, 귀국 도중 쓰시마 섬에 들러 계해약조를 체결(1443, 세종 25)
◦ 성삼문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 때 음운 분야에서 큰 공을 세움
◦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정난 1등 공신이 됨(1453, 단종 2)
◦ 남이 장군과 함께 여진족을 토벌(1460, 세조 6)
⊕ 저서:「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사성통고(四聲 通考, 음운서)」,「화기(畵記)」등 |
▹ 한글의 창제 시, 정인지・최항・박팽년・이개・ 신숙주・강희안 등과 함께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건너가 음운 연구 를 겸하여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하는 등 훈민 정음 반포하는 데 큰 공을 세움
▹ 명나라 사신이 귀국하는 환송연 자리에서 세조 일파를 척결하고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가담자 전원이 처벌당함(1456, 세조 2)
⊕ 저서:「성근보집(成謹甫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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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1570~1652) |
최명길(1586~1647) |
◦ 이괄의 난이 일어난 직후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붕당을 타파하고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1624, 인조 2)
◦ 정묘호란 때, 진주사로 명나라를 갔다가 구원병을 청함(1627, 인조 5)
◦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여 선전 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1636, 인조 14)
◦ 1641년 심양(瀋陽)에 끌려가 이후 4년여 동안 청에 묶여 있음(인조 19)
⊕ 저서:「야인담론(野人談論)」,「독례수초(獨禮隨 鈔)」 |
▹ 병조 좌랑으로 있다가 국내 정치 문제와 조선인의 명 사신 일행과의 접촉 금지를 둘러싼 말썽으로 관직에서 물러남
▹ 정묘화란과 병자호란 때 후금(청)과 강화론(講和 論)」를 내세워 청의 군신과계 요구에 대해 명분 보다는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조선의 현실적・ 실질적 이익을 중시
⊕ 저서:「지천집(遲川集, 시문집)」- 병자봉사(丙子 封事, 청과의 주화론을 주장하는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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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1501~1572) |
송시열(1607~1689) |
◦ 유일(遺逸)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음(1538, 중종 33)
◦ 전생서 주부・단성현감・조지서 사지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1548~1559) → 단성현감 사직 때, 국왕 명종과 문정왕후에 대한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상소를 올림
◦ 진주 덕천동으로 이거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말년까지 강학에 힘씀
◦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한 ‘무진봉사(戊辰封事)’ 라는 상소를 올림(1568, 선조 1) → 서리의 폐단을 극렬하게 지적
⊕ 저서:「남명집(南冥集)」,「학기유편(學記遺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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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종에게 ‘정유봉사(丁酉封事)」라는 상소를 올려 그의 북벌정책을 비판(1657, 효종 8)
▹ 자의대비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 (朞年說: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킴(기해예송, 1659, 현종 1) → 3년설을 주장한 남인을 제거하여 서인이 정권 을 잡음
▹ 인선왕후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자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갑인 예송, 1674, 현종15) → 남인이 주장한 기년설이 채택되어 서인이 실각함
▹ 제자 윤증과의 감정 대립이 악화되어 서인이 분열 →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
⊕ 저서:「송자대전(宋子大全)」,「우암집(尤庵集)」, 「송서습유(宋書拾遺)」 |
※ 회퇴변척(晦退辨斥)
: 정인홍이 스승 조식이 퇴계 이황으로부터 무함 받은 것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차자(箚子)를 올려 이황을
비판하고 아울러 회재(晦齋) 이언적의 과오까지 지적한 일(1611, 광해군 3)
→ 이묵 등 500여 명 유생이 단체로 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을 옹호하면서 정인홍의 ‘회퇴변척’을
공격하고, 그의 이름을 성균관 유적(儒籍, 청금록)에서 삭제하고 스승 조식을 문묘에서 삭제함
조광조(1482~1519) |
흥선대원군(1829~1898) |
◦「여시향약」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
◦ 천거(薦擧)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의 실시를 주장(1518, 중종 13) → 사림파 인물이 다수 선발됨
◦ 도교 신앙이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난다 하여 ‘소격서(昭格署)’를 혁파
◦ 중종반정에서 공신들이 부당하게 많음을 지적하여 공신 중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 (1519, 중종 14)
◦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 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기묘사화, 1519 중종 14)
⊕ 저서:「정암집(靜菴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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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종이 승하하고 조대비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 (1863, 고종 1)
▹ 안동 김씨의 주류를 숙청하고 당파를 숙청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
▹ 사액서원 중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사원과 만동묘를 철폐
▹ ‘육전조례(六典條例)’,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
▹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두어 정치 와 군사업무를 분리시킴
▹ 세제(稅制)를 개혁하여 양반과 상민의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
▹ 조세 운반과정에서 일어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뿌리를 뽑기 위해 ‘사창(社倉)’을 세움
▹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백전을 발행하고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 →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면서 여론이 악화되고 최익현의 상소로 탄핵됨(1873, 고종 11)
▹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다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썼으나 명성황후의 책동으로 청나라 군대가 출동하고 흥선대원군이 텐진[天津]으로 연행됨
▹ 청나라의 위안스카이[遠世凱]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손 준용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 실패(1887, 고종 25) |
김육(1580~1658) |
채재공(1720~1799) |
◦ 음성 현감 재직 시, 민생고의 원인과 그 타개책을 연구하여 문과에 장원 급제(1624, 인조2)
◦ 충청도 관찰사 때, 대동법을 충청도까지 확대 실시를 건의하여 관철시키고, 이후 전라도까지 확대 주장(1657, 효종 8)
◦ 수차(水車, 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하고, 아담 샬 의「시헌력」을 채택 및 주전론(鑄錢論)을 역설
⊕ 저서:「구황벽온방(救荒僻瘟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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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세자를 미워한 영조가 세자를 폐위하는 명령 을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건의하여 철회시킴 (1758, 영조 38)
▹ 정조가 즉위(1776)하자 형조판서 겸 의금부판서 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자들을 처리하는 일을 처리한 후, 공노비의 폐단을 바로잡을 절목을 마련하는 등 국왕의 정책을 보필
▹ 대상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소상인의 활동 자유를 늘리는 ‘신해통공’을 주도해 시행(1791, 정조 15)
▹ 천주교・불교 등을 이단으로 배척하였으나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처형하기보다는 교화의 목적으로 온건하게 대처함
⊕ 저서:「번암집(樊巖集)」 |
박규수(1807~1876) |
최익현(1833~1906) |
◦ 박지원의 손자로 연행사절의 부사(副使)로 중국에 가서 당시 국제정서의 흐름과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을 접함
◦ 진주민란(1862)에 안핵사로 활동
◦ 평안 감찰사로 재직 중, 미국 무장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대동강에서 격퇴시킴(1855.7.)
◦ 운요호사건(1875)을 빌미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 하자 최익현 등의 강력한 척화(斥和) 주장을 물리 치고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
⊕ 저서:「환재집」,「환재수계」 |
▹ 이항로의 제자이며, 대원군을 탄핵으로 상소문 (계유상소)를 올려 대원군을 하야시킴(1873)
▹ 강화조약 때, 왜양일체론의「5불가소(지부복궐척 회의소)」(1876)
▹ 을미개혁 때, 단발령에 반대(1895)
▹ 을사조약 때,「포고팔도시민 격문」을 발표(1905)
⊕ 저서:「면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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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한말・일제시대
※ 황현(1855~1910)
- 을사조약 직후(1905)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 관리들이 잇달아 자결하자 오애시(吾愛詩)를 지어 이들을 추모함
- 대한제국의 폐망(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
⊕ 저서:「매천야록(梅泉野錄)」
지석영(1855~1935) |
주시경(1876~1914) |
◦ 수신사의 통역관으로 일본에 가서 구가 가쓰야키 의「종두귀감(種痘龜鑑)」을 전해 받음(1876)
◦ 우리나라 최초의 우두서인「우두신설(牛痘新說)」 을 저술(1885)
◦「신정국문(新訂國文)」6개조를 상소(1905)
◦ 국문연구소 회원으로 재직(1908)
◦ 한글 보급에도 힘쓴 국어학자로 주시경 선생과 더불어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 |
▹ 배제학당에 입학(19894)
▹ 독립신문 제작에 활동하면서 조선문동식회를 결성 하여 한글 기사체(記事體) 통일과 연구 및 한글 보급에 기여(1907)
▹「국어문법(1910)」을 지어 국어의 특성을 음운・ 품사・구문・어휘 4부로 구분하는 독창적 견해를 주장(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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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1842~1896) |
김옥균(1851~1894) |
◦ 예조참의로 수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옴(1880) → 황준헌의「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져와 소개
◦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위한 한성조약을 전권대신 으로서 체결(1885)
◦ 김홍집 내각 구성 및 성향 ┌ 제1차 김홍집 내각(동학농민운동 이후) : 일본 세력의 표면화 ├ 제2차 김홍집 내각(청일전쟁 이후) : 친일성향이 강한 인사로 구성 → ‘홍범14조’를 발표 ├ 제3차 김홍집 내각(삼국간섭 이후) : 친러파를 기용 └ 제4차 김홍집 내각(을미사변 이후) : 친일파 인사를 재차 구성
◦ 아관파천(1896)으로 친러파 내각이 재기용되면서 김홍집 내각은 붕괴
⊕ 저서:「이정학재일록(以政學齋日綠)」 |
▹ 1869년 박영교의 소개로 박규수를 만나 그의 문하 에서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음
▹ 서광범・홍영식・서재필 등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충의계’을 조직(1878)
▹ 고종의 허락을 얻어 근대화된 일본을 직접 시찰 (신사유람단, 1881)
▹ 수신사 박영효의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에 다시 건너감(1882)
▹ 민씨 일파의 수구적(守舊的) 성향에 불만을 품고, 우정국 청사의 낙성연을 계기로 거사를 단행(갑신 정변, 1884)
▹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에게 살해당함(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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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파의 분열
┌ 온건개화파(사대당, 수구당, 동도서기파)
: 민씨 일파와 타협하면서 기존의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서양의 근대 과학 기술문명을 받아들여 점진적
으로 개혁을 수행하자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는 청(淸)이 실시한 양무운동(洋務運動)과 연관됨
→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할 것을 주장(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민영익, 박정양 등)
└ 급진개화파(독립당, 개화당, 변법자강파)
: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삼아 서양의 과학기술・문명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사상・제도
까지 적극 도입해야 한다는 사상
→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종식하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이승만(1875~1965) |
김구(1876~1949) |
◦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만민공동회에 참여, 중추원 설치를 주장
◦ 프린스턴대학에서「미국 영향하의 중립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음(1910)
◦「한국 태평양」을 발간, ‘대한인 국민회’를 지휘
◦ 한성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 다가 탄핵을 당함(1922)
◦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주장 (19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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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운동, 의병활동에 참여
▹ 신민회에 참여, 105인 사건(1911)으로 형무소에 복역
▹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제4차 개헌 이후 주석을 역임,
▹ 애국단을 창설(1931)하여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지휘
▹ 장개석의 중국 무관학교에 한인 무관 양성소를 특설(1933)
▹ 한국광복군 조직 및 한국독립당을 창설(1940)
▹ 남북협상(남북한 연석회의)을 주도(1948.7.)
▹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불참,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1948.7)
▹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피살(1949.6.) |
홍범도(1868~1943) |
김좌진(1889~1929) |
◦ 삼수・갑산 지방 포수들의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에 유격전을 벌여 격파(1906)
◦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국내에 진입하여 갑자・혜자 등의 일본군을 급습(1919)
◦ 봉오동전투에서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대승을 거둠(1920.6.)
◦ 청산리대첩에 제1연대장으로 참가(1920.10.)
◦ 러시아령 흑하자유시로 이동하여 고려혁명군관 학교를 설립(1921)
◦ 스탈린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1937) |
▹「한성신보」의 간부로 지냈고, 안창호 등과 함께 서북학회를 조직(1909) → 서북학회 산하교육기관인 오성학교 교감을 역임
▹ 비밀결사 조직인 대한광복회에 가입(1915)
▹ 만주로 건너가 무오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1919)
▹ 청산리대첩에서 나중석・박영회 등과 함께 일본군 에 맞서 3회 적전으로 대승을 거둠(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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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1869~1940) |
이동휘(1872~1935) |
◦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상설 등과 망명하여 북간도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설립(1906)
◦ 상동 청년회를 중심으로 안창호・김구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1907)
◦ 남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등과 신흥강습소와 경학사를 설립(1907)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광복회정부를 수립(1915)
◦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및 내무 총장을 역임(1917)
◦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이사장에 피선(1929) |
▹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이어 서북학회를 결성(1908)
▹ 105인 사건으로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노령으로 망명하여 한인사회당을 조직(1907)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1919)을 거쳐 이듬해 국무총리 지냄
▹ 한인사회당을 모체로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창당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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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1879~1910) |
윤봉길(1908~1932) |
◦ 을사조약을 체결 후, 상점을 팔아 삼흥학교를 세움(1906)
◦ 연해주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1907)
◦ 동지 7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1909)
◦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러시아군 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1909)
◦ 뤼순 감옥에서 수감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집행됨(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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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계몽・독서회운동 등 농촌사회운동을 전개 (1926)
▹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부흥군(復興郡)’이라는 단체를 설립(1929)하여 농촌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
▹ 상해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하고 한인애국단 에 입단(1932)
▹ 일본군이 상하이사변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는 훙커우 공원 행사에서 수류탄을 던져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 등을 즉사시킴(1932.4) → 중국 정부의 지원과 협조가 이루어져 김구 선생은 뤄양 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 (1934)하여 군사 간부를 양성 |
이준(1859~1907) |
이상설(1870~1917) |
◦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으나 관리들의 비행을 들추어 파헤치다가 면직 당함(1896)
◦ 대한보안회를 조직(1904)하여 황무지 개척권을 얻으려는 일제의 음모를 폭로
◦ 일진회에 대항하여 공진회를 조직(1904)
◦ 국민교육회를 조직하여 보광학교를 설립(1904)
◦ 서우학회를 발전시켜 오성학교를 설립(1906)
◦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로 발전시킴 (1906)
◦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자 순국(1907) |
▹ 보안회의 후신인 대한협동회 회장을 지냄(1904)
▹ 간도 룽진춘[龍井村]에서 서전서숙을 설립(1906)
▹ 고종의 밀지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하려 했으나 일본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함(1907)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인석 등과 성명회를 조직 (1910)
▹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이동녕과 등과 권업회 를 조직(1911) →「권업보(勸業報)」,「해조신문(海潮新聞)」등을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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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1867~1932) |
안창호(1878~1938) |
◦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 ‘신민회’ 발족 및 ‘헤이그 밀사’ 파견을 주도(1907)
◦ 이주동포 정착과 농업지도를 위한 ‘경학사’를 조직 하고, 광복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신흥무관 학교)’를 설립(1911)
◦ 신채호, 이을규, 이정규 등과 무정부주의운동을 전개(1923)
◦ 항일운동 행동조직 ‘의열단’을 후원하고 제2의 행동조직인 ‘다물단’을 조직(1924)
◦ ‘재만조선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김좌진 장군 과 함께 ‘재만한족연합회’를 조직(1929)
◦ ‘남화한인연맹’을 결성 및 비밀행동조직인 ‘흑색 공포단‘을 조직(1931) |
▹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 남녀공학인 점진학교를 세움(1899)
▹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노동과 공부를 병행 (1902) → ‘한인공동협회’를 만들어「공립신보」를 발간
▹ 을사조약 체결 후 귀국하여 신채호, 양기탁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1907)
▹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1908)
▹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1923)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을 더욱 강화시킴(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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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1871~1938) |
조만식(1883~1950) |
◦ 영국인 E.T.베델(Bethel)과 영자신문「코리아 타임스」를 발간(1904)
◦ 국한문으로「대한매일신보」를 창간(1904)
◦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1907)
◦ 미국의회의원단 내한 시, ‘독립진정서’를 제출 (1921)
◦ 만주로 망명하여 의성단(義成團)를 결성(1923)
◦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과 국무위원회의 주석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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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의 오산학교 교장으로 재직(1915)
▹ 오윤선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1920)하여 국산품장려운동을 전개
▹ 김성수・송진우와 함께 ‘연정회’를 발기하여 ‘민립 대학기성회‘를 조직(1923)하였으나 일제의 탄압 으로 실패
▹ 신간회 결성에 참여(1927)
▹ 조선일보사 사장(1932)이 되어 민족언론창달에 공헌
▹ 광복 이후 평남건국준비위원회・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활약
▹ 조선민주당을 창당(1945)하여 당수로서 반공노선 을 세우고 반탁운동을 전개 |
조소앙(1887~1958) |
안재홍(1891~1965) |
◦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국무위원 겸 외무부장관을 역임
◦ 임시정부의 내분을 수습하려고 김구・안창호 등과 ‘시사책진회’를 결성(1922)
◦ 한국독립당을 창당(1923)
◦ 한국독립당 대표로 한국광복진선 결성에 참가 (1937)
◦ 8・15광복으로 국민의회를 조직(1945)
◦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김구 등과 남북협상에 참가(1948)
◦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득점으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됨
⊕ 저서:「한국문원(韓國文苑)」,「소앙집(素昻集)」 |
▹ 일본 도쿄로 건너가 조선인 기독교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를 조직(1910)
▹ 이회영・신채호 등이 조직한 상하이 ‘동제사’에 가담(1916)
▹ 물산장려운동을 주도 및 신간회의 총무로 활약
▹ 광복 후 여운형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곧 탈퇴하고 (조선)국민당을 결성(1945)
▹ 한국독립당의 중앙위원을 거쳐 좌우합작위원회 위원 및 남조선과도입법위원 등을 지냈으나 6・25 전쟁 남북됨
⊕ 저서:「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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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1881~1950) |
여운형(1886~1947) |
◦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약소민족대회에서 한국대표 로 참석(1918)
◦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직을 맡아 파리강화 회의에 전권대사로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 침략을 규탄(1919)
◦파리에서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항일전선을 구축
◦ ‘신한청년당’을 조직(1918)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탄원서를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
◦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설립 하고 회장직(1927)을 맡아 기관지인「동방민족」 을 창간
◦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이 되어 김구 주석과 함께 광복군을 양성(1944)
◦ 중도파 인사들이 주도하여 좌우합작위원회를 수립 (1946.7.)
◦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의장을 역임(1946.12.)
◦ 국제연합 하에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 → 김구・조소앙 등과 북한에 가서 남북협상을 시도하지만 실패 |
▹ 조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김규식을 파리강화 회의에 대표로 파견 및 신한청년당을 발기
▹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이 됨(1919.4.)
▹ 상하이 고려공산당에 가입(1920) →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제공한 자금을 이동휘, 김립이 가로채 독단적 으로 처리하자 고려공산당이 와해됨
▹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1933)
▹ 조선총독부에 5개 조항을 요구(1945.8.)
▹ 광복 직후, 안재홍・정백 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1945.8.)
▹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1945.9.) → 우익 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
▹ ‘조선인민당’을 창당(1946.12.)
▹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 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 한지근에 의하여 암살됨(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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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1898~1958) |
지청천(1888~1957) |
◦ ‘의열단’을 조직(1919)하여 국내의 일제 수탈기관 파괴, 요인 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함
◦ 황푸군관학교를 졸업(1925)
◦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면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 해방운동을 주도 및 중국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편성(1935)
◦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1942)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국무부장을 역임 (1944)
◦ 남북협상 때, 월북(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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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이 되어 독립군 간부 양성 에 진력함(1919)
▹ 서로군정서가 조직(1920)되자 그 간부에 취임
▹ 양기탁・오동진 등과 정의부를 조직(1925)
▹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군사위원장을 지냄 (1930) → 그 산하에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을 역임
▹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잠입하여 한・중 연합군의 총참모장으로 항일지하운동을 지휘(1933)
▹ 충칭 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1940)
▹ 광복 후, 귀국하여 ‘대동청년당’을 창설(1945)
▹ 단독 정부 수립론을 지지하면서 임시정부를 탈퇴 하고 독립촉성국민회에 입당(1948) |
⊕ 김두봉(1889~1960)
- 한글을 연구하여 광문회(光文會)에서 조선국어사전「말모이」편찬사업에도 참여
-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
- 임시정부 산하 임시사료편찬위원회에서 편찬위원으로 활동
→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1919.4.)
-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비서장에 취임(1929)
-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을 맡았으며 내무부장 겸 선전부장을 역임(1935)
- 예안[延安]에서 활동하면서 조선독립동맹에 가담하여 주석에 취임(1943)
양세봉(1896~1934)
- 3・1운동 이후 최시흥 휘하의 천마산대에 입대하여 일본의 행정기관 파괴, 친일파 암살 등 항일무력
투쟁을 전개
- 육군주만참의부 소대장과 제3중대장을 역임(1923)하다가 조선혁명군 총사령에 취임
- 중국의용군 총사령관 이춘윤과 한중연합군을 조직(1932)
→ 융링제성[永陵街城(영릉가성)]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상징현성[興京懸城(흥경현성)]을 함락시킴
유길준(1856~1914) |
서재필(1864~1951) |
◦ 민영익의 천거로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서 개화사상을 섭렵(1881)
◦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발탁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미대통령 체스터 아서(Chester Alan Arthur)에게 고종의 국서를 전달(1883) → 민영익의 권유로 미국에 남아 대학에 진학을 준비함
◦ 고종의 친서를 받고 대서양을 건너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귀국(1885)
◦ 러시아의 조선 남하를 막기 위한 구실로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1885~1887)을 계기로 조선을 둘러싸고 열강의 대립이 가열되자 조선 중립화론을 제기
◦ 갑오개혁 때(1894) 외부참의 등을 역임하여 개혁 을 주도
◦ 독립신문 창간(1896)에 적극 후원
◦ 내부대신으로 개혁의 주도적 노력이 아관파천( 1897)으로 내각이 해산되어 일본으로 망명
⊕ 저서:「서유견문(西遊見聞)」,「대한문전(大韓 文典)」 |
▹ 김옥균이 주도하는 갑신정변에 가담(1884)했으나 정변의 실패로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
▹ 미국으로 망명하여 컬럼비아 의과대학에 졸업 (1893)하고 병원을 개원
▹ 박영효의 권유로 귀국(1895)하여 중추원 고문에 임명
▹ 정부예산을 지원받아 ‘독립신문’을 창간(1896.4.)
▹ 이상재・윤치호・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결성 (1896.7.)
▹ 청의 의존성을 혁파하고자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 에 독립문을 세움(1897)
▹ 3・1원동 소식을 전해 듣고 한국 선전활동 활발히 전개 → 잡지 ‘The Evening Leisure’와 제휴하여 한국 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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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1904~1944) |
윤동주(1917~1945) |
◦ 의열단에 가입(1925)
◦ 귀국(1927)하여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름 → 그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음
◦ 출국 후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고,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함
◦ 귀국(1943) 후,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
⊕ 저서:「육사시집(유고시집, 1946)」,「청포도」, 「교목」,「절정」,「광야」등 |
▹ 평양의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학교가 폐쇄되자 중국 용정(龍井)에 있는 광명 학원 중학부로 편입하여 졸업
▹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1941)하고 일본 으로 건너가 릿쿄[立敎] 대학・도시샤[同志社] 대학의 영문과에서 수학
▹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1943) →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하다가 건강이 약화되어 생를 마감
⊕ 저서:「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유고시집, 1948 )」,「청포도」,「자화상」,「또 다른 고향」,「별 헤는 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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