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출문제/한국사

한국사 기출 문제 해설 [조선] #10

Jobs 9 2022. 4. 20.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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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조선 시대의 관청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사간원 – 교지를 작성하였다.

② 한성부 – 시정기를 편찬하였다.

③ 춘추관 –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다.

④ 승정원 – 국왕의 명령을 출납하였다.

【해설】 정답 

④ 승정원은 국왕의 비서 기관으로 국가 기밀과 왕명 출납

① 사간원은 3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중 한 곳으로 간쟁과 정사의 잘못을 논박하는 직무를 관장하였다. 교지 작성을 담당한 곳은 예문관

② 시정기는 춘추관에서 각 관청들의 업무 기록을 종합하여 편찬. 한성부는 서울의 행정과 치안, 사법을 담당

③ 춘추관은 역사서 편찬과 보관을 담당하였다. 외교 문서 작성은 승문원에서 담당

 

 


 Q 
(가)~(라) 국왕 대에 있었던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조선 시대 국가를 운영하는 핵심 법전인 『경국대전』은 세조 대에 그 편찬이 시작되어 (가) 대에 완성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국가 체제를 수습하고 새로운 정치·사회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법전 정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나) 대에 『속대전』을 편찬하였으며, (다) 대에 『대전통편』을, 그리고 (라) 대에는 『대전회통』을 편찬하였다.

 

① (가) - 홍문관을 두어 집현전을 계승하였다.

② (나) - 서원을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하여 대폭 정리하였다.

③ (다) -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고 화성을 축조하였다.

④ (라) -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했다.

【해설】 정답 

제시된 (가)는 성종, (나)는 영조, (다)는 정조, (라)는 고종

④ 철종 대 임술 농민 봉기가 발생하자 정부에서는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삼정이정절목을 반포(1862)
① 성종은 왕과 신하가 함께 모여 유학을 논의하고 시책을 나누는 경연을 활성화시켜 언로를 넓혔으며, 이를 위해 세조 대에 폐지된 집현전을 대체하여 홍문관을 설치

② 영조는 탕평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붕당의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었던 산림(山林)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이와 함께 영조는 붕당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

③ 정조는 수원 화산(팔달산) 아래로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그리고 정약용으로 하여금 화성을 세우도록 하여 정치적·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Q 
밑줄 친 ‘사건’의 명칭은?

 

중종에 의해 등용된 조광조는 현량과를 통해 사림을 대거 등용하였다. 그는 3사의 언관직을 통해 개혁을 추진해 나갔고, 위훈 삭제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중종도 급진적인 개혁 조치에 부담을 느껴 조광조 등을 제거하였다. 이 사건으로 사림은 큰 피해를 입었다.

 

① 갑자사화 ② 기묘사화 ③ 무오사화 ④ 을사사화

【해설】 정답 

조광조 등 사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통해 밑줄 친 ‘사건’이 1519년 중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
② 조광조가 반정 공신들의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 공신의 위훈을 삭제하자, 이에 반발하여 일어난 사화는 기묘사화(중종 14, 1519).
① 갑자사화(1504)는 연산군이 능상(陵上)의 풍조를 일소한다는 명분 하에 조정 신료들을 도륙했던 사건

③ 김종직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항우와 의제에 빗대어 「조의제문」을 저술하였는데, 이것을 김일손이 사초에 실으면서 이후 무오사화(1498)의 원인

④ 명종 때에는 왕실의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권력 다툼이 계기가 되어 대윤 세력과 인종을 지지한 사림 세력이 화를 입은 을사사화가 발생(1545)

 

 


 Q 
다음 주장을 한 실학자가 쓴 책은?

 

토지를 겸병하는 자라고 해서 어찌 진정으로 빈민을 못살게 굴고 나라의 정치를 해치려고 했겠습니까? 근본을 다스리고자 하는 자라면 역시 부호를 심하게 책망할 것이 아니라 관련 법제가 세워지지 않은 것을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 (중략) … 진실로 토지의 소유를 제한하는 법령을 세워, “어느 해 어느 달 이후로는 제한된 면적을 초과해 소유한 자는 더는 토지를 점하지 못한다. 이 법령이 시행되기 이전부터 소유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광대한 면적이라 해도 불문에 부친다. 자손에게 분급해 주는 것은 허락한다. 만약에 사실대로 고하지 않고 숨기거나 법령을 공포한 이후에 제한을 넘어 더 점한 자는 백성이 적발하면 백성에게 주고, 관(官)에서 적발하면 몰수한다.”라고 하면, 수십 년이 못 가서 전국의 토지 소유는 균등하게 될 것입니다.

 

① 반계수록 ② 성호사설 ③ 열하일기 ④ 목민심서

【해설】 정답 

제시된 자료는 박지원의 『한민명전의』에 실린 한전론에 대한 내용. 박지원은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설정해야 한다는 한전론을 제안

③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청나라에 다녀온 후에 작성한 견문록이다. 그는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

① 『반계수록』은 유형원의 저서이다. 그는 『반계수록』 에서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는데, 관리, 선비, 농민 등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토지를 재분배하고, 조세와 병역도 조정할 것을 주장

② 『성호사설』은 이익의 저서이다. 이 책은 천지, 만물, 인사, 경사, 시문 등 5개 부문으로 나누어 우리나라 및 중국의 문화를 백과사전식으로 소개

④ 『목민심서』는 정약용의 저서이다. 정약용은 민생 안정을 위해 수령의 행동 지침서인 『목민심서』를 저술

 

 


 Q  조선 시대 신분제에 대한 다음 설명 중 옳은 것은 모두 몇 개인가?

 

◦ 조례, 나장, 일수 등은 상민에 속하였다.
◦ 공노비에게 유외잡직이라는 벼슬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 양반은 과거를 통하지 않고는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 세종 때 서얼차대법이 제정되어 서얼의 문과 응시가 제한되었다.

 

① 1개
② 2개
③ 3개
④ 4개

【해설】 정답 

∙ 수군, 조례 등은 신량역천(칠반천역)으로, 상민(양인) 신분이지만 사람들이 꺼리는 천역(賤役)에 종사

∙ 공노비의 경우 상의원·사복시·군기시 등의 관서에서 요리사, 바느질, 말 기르기, 무기 제작, 건물 수리 등을 맡는 유외잡직(流外雜織)이라 불리는 하급기술직에 임명

∙ 과거 외에도 음서나 천거(고관의 추천을 받아 간단한 시험을 치른 후 관직에 등용) 등을 통해 관직

∙ 서얼 차대법은 태종 때 제정



 Q  임진왜란 중 일어난 다음 전투를 시기순으로 옳게 나열한 것은?

 

㉠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대파하였다.
㉢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 김시민은 진주성에서 왜군에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① ㉠-㉡-㉣-㉢
② ㉠-㉢-㉣-㉡
③ ㉢-㉠-㉣-㉡
④ ㉢-㉣-㉠-㉡

【해설】 정답 

㉢ 한산도 대첩에 대한 내용으로 이 전투는 1592년 7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쳐 왜의 수군을 격파한 전투

㉣ 1592년 10월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을 맞아 진주성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을 중심으로 한 관군이 싸워 승리하였으나 김시민은 전사

㉠ 1593년 1월 조선과 명나라가 연합한 조⋅명 연합군이 왜장인 고니시 유키나와가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을 탈환

㉡ 1593년 2월의 사건이다.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남진하다가 벽제관에서 패퇴하고 명군이 평양성까지 후퇴한 상황에서 권율의 부대는 행주산성에서 왜군에 포위되었다. 그러나 권율을 중심으로 한 관군과 백성들은 9차례에 걸친 왜군의 공격을 모두 물리쳤다.



 Q  (가), (나)의 현실 인식을 가진 세력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 오늘날에 시세를 헤아리지 않고 경솔히 오랑캐와 관계를 끊다가 원수는 갚지 못하고 패배에 먼저 이르게 된다면, 또한 선왕께서 수치를 참고 몸을 굽혀 종사를 연장한 본의가 아닙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굳게 정하시기를 ‘이 오랑캐는 임금과 아버지의 큰 원수이니, 맹세코 차마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다.’고 하시어 원한을 축적하십시오
(나)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진실로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면서 지금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산천은 비린내 노린내 천지라고 나무라고, 그 인민은 개나 양이라고 욕을 하고, 그 언어는 오랑캐말 이라고 모함하면서, 중국 고유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마저 배척해 버리고 만다.

 

① (가) - 명 황제의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② (가) - 북벌에 필요한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③ (나) - 화이론에 따라 국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④ (나) - 청의 중국 지배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해설】 정답 

(가)는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의 북벌론, (나)는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 박제가의 북학론에 대한 내용

① 서인의 북벌론은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 기초한 것으로, 조선=소중화(小中華)라는 인식에 바탕. 17 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화로 인정되던 명나라의 멸망으로 중화의 명맥이 소중화인 조선으로 넘어와 계승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멸망한 왕조인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일과 조선의 정체성을 중화의 계승자로 파악하는 일은 분리될 수 없었다. 창덕궁 내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한 것이나 송시열이 만동묘(萬東廟)를 설치한 것 등은 이러한 의식의 소산

②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1649~ 1659)은 서인인 송시열, 송준길 등을 중용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등 북벌을 준비했다. 북벌론은 병자호란의 책임을 져야 했던 서인들이 계속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

④ 북학파는 청나라에도 중화(中華)의 문물이 남아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의 발전상을 유연한 사고 방식으로 수용함으로써 조선의 현실을 개혁할 방안을 찾자는 입장

③ 북학론은 청을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입장. 화이론은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주장. 북벌론은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 기초



 Q  (가)∼(라)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 보 기 >
㉠ (가) - 계미자 주조
㉡ (나) - 『고려사절요』 편찬
㉢ (다) - 도첩제 폐지
㉣ (라) - 소수서원 사액

 

① ㉠㉡
② ㉠㉣
③ ㉡㉢
④ ㉢㉣

【해설】 정답 

㉡ 문종 때에는 편년체의 『고려사절요』(1452)가 편찬

㉢ 성종 때에는 강력한 억불책을 실시하여 도첩제마저도 폐지하고 출가를 금지

㉠ 태종 때 주자소를 설치하고 구리로 계미자를 주조

㉣ 중종 때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은 명종 때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고 최초의 사액 서원



 Q  다음 주장을 펼친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지금 우리나라 안에는 구슬을 캐는 집이 없고 시장에 산호 따위의 보배가 없다. 또 금과 은을 가지고 가게에 들어가도 떡을 살 수가 없는 형편이다. …… 이것은 물건을 이용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용할 줄 모르고, 생산할 줄 모르니 백성은 나날이 궁핍해지는 것이다. 대저 재물은 우물과 같다. 퍼 쓸수록 자꾸 가득 차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비단을 입지 않아 나라 안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다.

 

① 『열하일기』를 저술하였다.
②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하였다.
③ 대동법의 확대 실시에 기여하였다.
④ 토지 소유에서 한전론을 주장하였다.

【해설】 정답 

박제가의 ‘우물론’. 그는 『북학의』 에서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

② 정조 때에는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 서얼 출신들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

① 『열하일기』를 저술한 인물은 박지원

③ 대동법 확대 실시에 기여한 인물은 한백겸, 이원익, 조익, 김육, 허적 등

④ 한전론을 주장한 인물은 이익과 박지원이다. 이익의 한전론은 한 가정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한 다음, 영업전에 대해서는 법으로 매매를 금지하고, 나머지 토지만 매매를 허용하자는 것이었고, 박지원은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설정하는 한전론을 주장

 

 


 Q  <표>와 같은 변화가 나타나게 된 원인에 대한 탐구활동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보 기>
ㄱ.납속의 혜택에 대하여 조사해본다.
ㄴ.공명첩을 구입한 사람들의 신분을 조사해본다.
ㄷ.선무군관포의 부과 대상에 대하여 조사해본다.
ㄹ.서원 숫자의 변화를 조사해본다.

 

① ㄱ,ㄴ
② ㄱ,ㄷ
③ ㄴ,ㄷ
④ ㄴ,ㄹ

【해설】 정답 ①

자료는 조선 후기에 양반의 수는 늘어나는 반면에 상민과 노비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상황

ㄱ. ㄴ 납속은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거나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돈이나 곡식을 납부한 사람에게 특혜를 준 정책으로, 면천, 면역은 물론 관직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공명첩은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해 부유층에게 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명예직 임명장이다. 조선 후기에는 납속이나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어 면역하는 자가 늘어났으며 족보를 위조하여 신분을 상승키는 경우도 있었다.

ㄷ. 영조 때에는 균역법 실시에 따른 재정 보충책으로, 일부 상류층(부유한 상민)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고 군포 1 필을 납부하게 하였다.

ㄹ. 서원 숫자의 변화는 조선 후기 양반 수의 증가 및 상민과 노비의 감소와 관련이 멀다.

 


 Q  다음과 관련된 인물의 주장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비유컨대, 재물은 대체로 우물과 같은 것이다. 퍼내면 차고, 버려두면 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비단옷을 입지 않아서 나라에 비단을 짜는 사람이 없게 되면 여공이 쇠퇴하고, 찌그러진 그릇을 싫어하지 않고 기교를 숭상하지 않아서 장인이 작업하는 일이 없게 되면 기예가 망하게 된다.

 

<보 기>
ㄱ.수레와 선박의 이용을 확대해야 한다.
ㄴ.사농공상은 직업적으로 평등해야 한다.
ㄷ.청에서 행해지는 국제 무역에 참여해야 한다.
ㄹ.자영농을 중심으로 군사와 교육 제도를 재정비해야 한다.

 

① ㄱ,ㄴ
② ㄱ,ㄷ
③ ㄴ,ㄷ
④ ㄷ,ㄹ

【해설】 정답 

박제가의 『북학의』에 수록된 우물론에 대한 내용.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

ㄱ. 박제가는 상공업의 발달, 청과의 통상 강화, 수레와 선박의 이용 등을 역설

ㄷ. 박제가는 무역선을 파견하여 청에서 행해지는 국제 무역에도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

ㄴ. 유수원은 『우서』를 저술하여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

ㄹ. 유형원은 자영농을 바탕으로 한 병농일치의 군사 조직과 사농일치의 교육 제도도 주장

 



 Q  다음 상소가 작성되었던 시기에 볼 수 있었던 모습으로 가장 옳은 것은?

 

작위의 높고 낮음은 조정에서만 써야 할 것이고 적자와 서자의 구별은 한 집안에서만 통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 공사천 신분이었다가 면천된 이들은 벼슬을 받기도 하고 아전이었다가 관직을 받은 이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도 하는데 저희들은 한번 낮아진 신분이 대대로 후손에게 이어져 영구히 서족이 되어 훌륭한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임에도 그저 버려진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

 

① 외래문화 수용에 선구적 역할을 한 역관
② 포구에서 상품 매매를 중개하며 성장한 덕대
③ 왕의 명령으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하는 관리
④ 대규모 통청 운동으로 중앙 관직 진출이 허락된 기술직 중인

 

【해설】 정답 

서얼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비판하는 내용. 따라서 (서얼 차별에 대한 상소를 올릴 수 있을 만큼) 서얼의 사회적 위상이 상승했던 조선 후기에 해당

① 조선 후기에는 청에 왕래했던 역관들이 외래문화 수용에 적극적이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통상개화론자로 성장(대표적 인물 – 오경석)

② 포구에서 상품 매매를 중개하며 성장한 상인은 객주, 여각이며, 덕대는 민영 광산의 책임자

③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태종 때 이 회 등이 편찬한 세계 지도 (태종 2, 1402)

④ 철종 때 기술직 중인들은 대규모 통청운동을 전개하였으나, 통청에는 실패



 Q  다음 밑줄 친 부분과 관련 깊은 통치 기구에 해당하는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유교 이념에 바탕을 둔 정치를 강조한 조선은 국정 운영 과정에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하는 한편, 권력이 어느 한편으로 집중되는 문제를 막기 위한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보 기>
ㄱ.사간원 ㄴ.승정원 ㄷ.사헌부 ㄹ.춘추관

 

① ㄱ,ㄴ
② ㄱ,ㄷ
③ ㄴ,ㄷ
④ ㄴ,ㄹ

【해설】 정답 

조선 시대에는 권력이 한쪽으로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 사간원, ㉢ 사헌부와 같은 권력 견제 기구 존재

 

 


 Q  밑줄 친 ‘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는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던 군역 부담을 줄여주었고, 형벌 제도를 개선하여 가혹한 형벌을 금지하였다.

 

<보 기>
ㄱ.청계천 정비
ㄴ.속대전 편찬
ㄷ.탁지지 편찬
ㄹ.초계 문신제 실시

 

① ㄱ,ㄴ
② ㄱ,ㄷ
③ ㄴ,ㄷ
④ ㄴ,ㄹ

【해설】 정답 

균역법을 실시하고 가혹한 형벌을 금지한 왕은 영조

영조는 ㉠ 청계천을 정비하고, ㉡ 『속대전』을 편찬

㉢ 탁지지의 편찬, ㉣ 초계문신제의 실시는 정조 때

 

 


 Q  (가)∼(라)를 제작된 시기의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① (라)-(가)-(다)-(나)
② (라)-(나)-(다)-(가)
③ (라)-(다)-(가)-(나)
④ (라)-(가)-(나)-(다)

【해설】 정답 

(라)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 토기인 빗살무늬 토기

(가) 고려 시대의 청자 상감 운학 무늬 매병(상감청자)

(나) 분청사기 철화어문 항아리로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

(다) 청화 백자 홍치명 송죽문 호이다. 제작 시기는 15세기 후반이나 문제를 풀 때에는 조선 후기에 청화 백자가 유행했음에 집중하여 조선 후기로 접근




 Q  다음 주장을 한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무릇 1여의 토지는 사람들에게 공동으로 경작하게 하고, 내 땅 네 땅의 구분 없이 오직 여장의 명령만을 따른다. 매 사람의 노동량은 매일 여장이 장부에 기록한다. …… 국가에 바치는 공세를 제하고, 다음으로 여장의 녹봉을 제하며, 그 나머지를 날마다 일한 것을 기록한 장부에 의거하여 여민들에게 분배한다.

 

① 열하일기를 저술하였다.
②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③ 성호사설을 저술하였다.
④ 목민심서를 저술하였다.

【해설】 정답 

정약용의 토지 개혁론인 여전론

④ 정약용은 지방관의 수신 교과서인 『목민심서』를 저술

① 박지원의 열하일기 ② 유형원의 반계수록 ③ 이익의 성호사설



 Q  밑줄 친 ‘그’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의 사상은 사림이 구체제를 비판하고 훈척과 투쟁하던 시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왕 스스로가 인격과 학식을 수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의 사상이 일본에 전파되면서 일본에서는 그를 ‘동방의 주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①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② 강화학파를 형성하였다.
③ 성학집요를 저술하였다.
④ 성학십도를 저술하였다.

【해설】 정답 

자료 중 “왕 스스로가 인격과 학식을 수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일본에서 “동방의 주자”라고 불렸다는 점을 통해 밑줄 친 “그”는 이황

④ 성학십도는 이황의 저술

①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사람들이 기호학파를 형성

② 정제두의 학통을 계승한 양명학자들이 강화학파를 형성

③ 성학집요는 이이의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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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밑줄 친 ‘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이 교서를 내리기를, “태조께서 제정하여 놓으신 법에 의하여 6조에서는 각각 맡은 직무를 의정부에 먼저 여쭈어 논의하고, 의정부에서는 옳고 그름을 의논한 후에 임금께 아뢰어서 분부를 받고 도로 6조로 돌려보내서 시행하게 하되, 이조와 병조에서 관리를 제수하는 것, 병조에서 군사를 쓰는 것, 형조에서 사형수 이외 죄인의 형벌을 결정하는 일은 해당 6조로 하여금 직접 아뢰어서 시행하고 이를 의정부에 즉시 보고하는데, 만일 합당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의정부에서는 이에 따라 심의·논박하고 다시 계문해서 시행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보 기>
가. 4군 6진을 개척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나. 농민부담의 경감을 위해 공법을 제정하였다.
다.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진관체제를 실시하였다.
라. 신문고를 설치하여 반란음모를 고발하게 하였다.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가, 라

【해설】 정답 

세종 때 의정부 서사제 시행

(가) 조선 세종 대 최윤덕이 4군,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함으로써 현재의 국경선이 확정

(나) 세종은 공법을 제정하면서 지방의 촌민에 이르기까지 18만 명의 의견 청취

(다) 세조 이후에는 진관 체제가 실시되면서 국방상 요충지인 고을에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성을 쌓고 거진의 수령이 주변 군현의 군사 지휘를 담당

(라) 태종 때는 신문고를 설치하였는데, 본래 신문고는 반대 세력 제거를 목적으로 설치되어 의금부에서 관할



 Q  대동법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진상이나 별공은 유지되었다.
② 토지가 많은 부호에게 유리하였다.
③ 광해군대에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④ 토지 결수에 따라 미곡만을 부과하였다.

【해설】 정답 

① 대동법이 실시된 뒤에도 농민들은 진상이나 별공을 통해 토산물이나 특산물을 여전히 부담하였고, 지방 관아에서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징수

② 대동법은 집집마다 부과하여 토산물을 징수하던 공물 납부 방식을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였다. 따라서 토지를 많이 가진 토호 등의 반대가 심하여 전국으로 확대 실시되는 데에 100년 가까이 걸렸다.

③ 대동법은 광해군 때 최초로 경기도를 대상으로 시범적으로 시행되었고 이후 숙종 때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확대

④ 대동법은 집집마다 토산물이나 특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던 방식을 소유한 토지의 면적(결수)에 따라 쌀 12두,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차등 있게 납부하게 한 제도



 Q  다음 ‘가’∼‘라’를 일어난 시기 순으로 옳게 연결한 것은?

 

가. 명군이 출병하여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나.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왜군에 대패하였다.
다. 신립은 충주의 탄금대에서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막아내지 못하였다.
라. 이순신은 노량 앞바다에서 후퇴하는 적선 수백 척을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① 가–나–다–라
② 나–다–가–라
③ 다–나–가–라
④ 다–가–나–라

【해설】 정답 

(다) 1592년 왜군이 침략을 개시(1592. 4)하였고, 부산 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이끄는 육군이 분전하였으나 부산진과 동래성에서 패하였다. 이러한 급보가 조정에 전해지자, 조정은 신립을 도순변사, 이일을 순변사에 임명하여 대비하였다. 하지만 이일이 상주에서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에게 패배하여 충주로 물러서고, 이일의 뒤를 이어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분 패하였다.

(가) 만주에 있던 이여송의 5만 명나라 군대가 조선 영내에 진입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조・명 연합군은 왜군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여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1593. 1. 6~1. 9).

(나) 1597년 7월 왜군의 급습으로 경상도 고성에서 통제사 원균, 전라 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이 전사하였다(칠천량 해전).

(라) 1598년 11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노량 앞바다에서 패주하는 왜선을 격파하였고, 이 전쟁에서 패전한 왜군은 부산을 거쳐 완전히 철수
 


 Q  ‘가’, ‘나’ 사이 시기의 사실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

 

가. 국왕이 도원수 강홍립에게 지시하였다. “원정군 가운데 1만은 조선의 정예병만을 선발하여 훈련했다. 이제 장수와 병사들이 서로 숙달하게 되었노라. 그러니 그대는 명군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
나. 화친을 맺어 국가를 보존하는 것보다 의를 지켜 망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이는 신하가 절개를 지키는 데 쓰이는 말입니다. ···(중략)··· 자신의 힘은 헤아리지 아니하고 경망하게 큰 소리를 쳐서 오랑캐의 노여움을 사서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더 클 수 있겠습니까?

 

① 서인은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②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평안도 가도에 주둔하며 요동탈환을 내세웠다.
③ 환국 정국에서 최종적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송시열계의 노론이 집권하였다.
④ 후금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 지역까지 쳐들어왔다가 화의를 맺고 돌아갔다.

【해설】 정답 

(가)는 1619년 부차 전투, (나)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주화파 최명길의 주장

③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허적의 ‘기름 천막 유용 사건’이 발생하자(1680), 숙종은 이에 크게 노하여 군권을 서인에게 넘기는 전격 조치를 취하였으며,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을 서인으로 교체

① 서인 세력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와 인목대비 폐위에 반발하며 인조반정을 일으켰다(1623).

② 후금에 쫓긴 명의 장군 모문룡이 이끄는 군대가 조선의 압록강 하구에 있는 섬인 가도에 주둔하였다(1622).

④ 1627년 정묘호란의 결과 후금은 조선과 형제 관계를 맺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것, 조선과 후금 사이에 위치한 중강 및 회령에서 공무역의 성격을 갖는 개시를 허용할 것, 후금에 세폐(歲幣)를 바칠 것 등을 조건으로 조선과 강화를 체결

 


 Q  조선 후기 문화와 관련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일정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사설시조가 등장하였다.
② 풍속화는 백성의 다양한 생활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③ 판소리와 탈춤이 널리 인기를 얻어 서민문화의 폭을 크게 확대하였다.
④ 박지원은 허생전, 양반전 등 당시의 사회를 풍자하는 한글 소설을 썼다.

【해설】 정답 

박지원은 『허생전』, 『양반전』, 『호질』 등 한문 소설을 저술하여 양반의 부패를 풍자

① 조선 후기에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을 자유로이 나타낸 사설시조가 널리 유행

②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인 김홍도는 정감어린 풍속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며, 신윤복은 양반과 부녀자의 생활과 유흥, 남녀 사이의 애정 등을 묘사한 풍속도

③ 조선 후기에는 한글 소설이 보급되고, 판소리, 탈춤, 가면극 등이 유행하여 서민들 문화생활

 



 Q  (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가장 옳은 것은?

 

(가)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이 피해를 입었다.
(나) 서인이 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하였다.
② 환국을 거치며 노론과 소론이 갈라섰다.
③ 1차 예송에서 승리한 서인이 집권하였다.
④ 조광조가 훈구 세력의 위훈 삭제를 주장하였다.

【해설】 정답 

(가)는 1519년의 기묘사화, (나)는 1623년의 인조반정

①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우의정에 특배된 송강 정철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확대하여 동인을 사사하면서 동인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후 건저 문제(세자 책봉 문제)로 선조의 미움을 받아 양사에 의해 탄핵될 때 정철의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동인은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의 분파

② 숙종 때인 1680년 경신환국 후 서인 정권은 남인 처리 문제와 국가 운영 정책을 둘러싸고 노론(노장 세력)과 소론(신진 세력)으로 분파

③ 효종 사망 후 자의대비의 상복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기해예송이 일어났다(1659). 기해예송 결과 서인이 주장한 기년복이 채택

④ 조광조 등 사림 세력이 반정 공신들의 비리를 척결하고자 공신의 위훈을 삭제해야 한다는 부분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기묘사화(1519)의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

 

 


 Q  (가), (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숙종 때에 이르러 여러 차례    (가)   이/가 발생하면서 붕당 간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숙종은 집권 붕당이 바뀔 때마다 상대 당의 인사들을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숙종 말년에 노론과 소론은 왕위 계승을 놓고 대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권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연이어 즉위한 영조와 정조는 붕당 정치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나)   을/를 시행하였다.

 

< 보 기 >
ㄱ.(가)에 들어갈 용어는 예송이다.
ㄴ.(나)에 들어갈 용어는 탕평책이다.
ㄷ.(가)의 과정에서 송시열이 죽임을 당하였다.
ㄹ.(나)의 정책을 펴기 위해 5군영을 설치하였다.

 

① ㄱ,ㄴ
② ㄱ,ㄷ
③ ㄴ,ㄷ
④ ㄴ,ㄹ

【해설】 정답 ③ 

환국(가)과 탕평책(나)

ㄴ. 영조와 정조는 붕당 정치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탕평책을 시행

ㄷ. 숙종 때 일어난 기사환국은 1689년 숙종이 후궁인 소의 장 씨(장희빈)의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려는 문제를 두고 서인 송시열 등이 반대하자 이들을 정권에서 몰아내고 다시 남인을 대거 기용한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송시열과 김수항 등이 처형

ㄱ. (가)에 들어갈 용어는 환국

ㄹ. 5군영 체제는 숙종 때 금위영 설치(1682)로 완비되었기 때문에 영조·정조 대의 탕평책 실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Q  자료에 해당하는 시기의 경제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내 조금 시험해 볼 일이 있어 그대에게 만 금(萬金)을 빌리러 왔소.” 하였다. 변씨는 “그러시오.”하고 곧 만 금을 내주었다. …… 대추, 밤, 감, 배, 석류, 귤, 유자 등의 과실을 모두 두 배 값으로 사서 저장하였다. 허생이 과실을 몽땅 사들이자 온 나라가 잔치나 제사를 치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지 얼마 아니 되어서 두 배 값을 받은 장사꾼들이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치렀다.

 

① 지대 납부 방식이 타조법으로 바뀌었다.
② 상품 작물 재배가 늘면서 쌀에 대한 수요가 줄었다.
③ 상인 자본이 장인에게 돈을 대는 선대제가 성행하였다.
④ 정부에서 덕대를 직접 고용해 광산 개발을 주도하였다.

【해설】 정답 

조선 후기 경제 상황을 묘사한 박지원의 『허생전』

③ 조선 후기에는 관영 수공업이 쇠퇴하고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상인이 수공업자에게 원료와 자금을 미리 주고 물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하는 선대제도 유행

① 조선 후기의 지대 납부 방식은 일정 비율로 지대를 납부하는 타조법에서 일정 액수를 납부하는 도조법으로 변화되어 갔다(하지만 여전히 일반적인 지대 납부 방식은 타조법)

② 쌀은 조선 후기에 주곡으로 자리잡아 그 수요가 크게 늘어나 장시에서 가장 많이 거래. 이로 인해 쌀 생산이 늘어나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증가

④ 조선 후기의 광산 경영은 경영 전문가인 덕대(德大)가 대개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와 채굴 노동자, 제련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제련하는 것이 일반적



 Q 
(가)에 들어갈 기구로 옳은 것은?

 

○ 무릇 관직을 받은 자의 고신(임명장)은 5품 이하일 때는 (가) 과/와 사간원의 서경(署經)을 고려하여 발급한다. 
 (가) 는/은 시정(時政)을 논하고, 모든 관원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르게 하는 등의 일을 맡는다.
- 『경국대전』 - 

 

① 사헌부 ② 교서관
③ 승문원 ④ 승정원

【해설】 정답 

① 조선 시대 사헌부는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고 정책을 감시·비판하며 시정을 올바로 이끄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사간원과 사헌부를 합쳐 양사, 혹은 대간이라고 하였으며, 이들은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② 교서관은 서적의 간행과 관리, 제사나 축하 전문을 보내는 것을 관장하던 기구로, 운각(芸閣)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③ 승문원은 조칙과 사대교린 관련 문서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④ 승정원은 국왕의 비서 기관으로 국가 기밀과 왕명 출납을 맡아보았다.



 Q 
(가), (나)에 들어갈 이름을 바르게 연결한 것은?

 

(가) 는/은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과 상공업 육성 등을 역설하였다. 한편, (나) 은/는 중국 및 일본의 방대한 자료를 참고하여 『해동역사』 를 편찬함으로써, 한·중·일 간의 문화 교류를 잘 보여주었다.

 

      (가)  (나)
① 박지원 한치윤
② 박지원 안정복
③ 박제가 한치윤
④ 박제가 안정복

【해설】 정답 

③ 박제가는 4차례나 청나라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한치윤의 『해동역사』는 기전체 형식의 역사사로서 『동국문헌비고』 등 국내 서적은 물론, 중국 사서 523종과 일본 사서 22종 등 총 550여 종의 다양한 외국 자료를 광범위하게 인용하여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였다.



 Q 
밑줄 친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은 노론과 소론, 남인을 두루 등용하였으며 젊은 관료들을 재교육하기 위해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다. 또 서얼 출신의 유능한 인사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하였다.

 

① 동학이 창시되었다.

② 『대전회통』이 편찬되었다.

③ 신해통공이 시행되었다.

④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였다.

【해설】 정답 

제시된 자료의 밑줄 친 ‘왕’은 조선 정조이다. 

③ 정조는 재정 수입을 늘리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허락하는 통공 정책을 시행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제도와 그것의 운영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① 동학은 철종 때인 1860년 최제우가 창도 하였다. 

② 정조 때 편찬된 법전은 『대전통편』이다. 『대전회통』은 고종 때 편찬되었다. 

④ 홍경래의 난은 순조 때인 1811년에 일어났다.

 


 Q  다음 <보기> 중 조선 성리학의 학설이나 동향을 시기 순으로 가장 바르게 나열한 것은?

 

<보기>
㉠ 현실 세계를 구성하는 기를 중시하여 경장(更張)을 주장하였다.
㉡ 우주를 무한하고 영원한 기로 보는 ‘태허(太虛)설’을 제기하였다.
㉢ 정지운의 『천명도』해석을 둘러싸고 사단칠정 논쟁이 시작되었다.
㉣ 향약 보급 운동과 함께 일상에서의 실천 윤리가 담긴 『소학』을 중시하였다.

 

① ㉡ - ㉠ - ㉣ - ㉢

② ㉡ - ㉣ - ㉠ - ㉢

③ ㉣ - ㉡ - ㉢ - ㉠

④ ㉣ - ㉢ - ㉡ - ㉠

【해설】 정답 ③

㉣ 16세기 초 중종 대 활약한 조광조(1482∼1519)의 개혁 정치와 관련된 서술이다. 조광조는 성리학적 사회 윤리를 정착하고자 성리학적 생활 규범을 규정하여 생활화는 차원에서 『소학』 및 향약 보급 운동 등을 추진하는 등의 정치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1519년(중종 14) 훈 구파들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전라도로 유배를 당하였다가, 결국 사사되었다. 

㉡ 이(理)보다는 기(氣)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던 서경덕(1489∼1546)에 대한 내용이다. 서경덕은 우주의 본체를 태허(太虛)로 파악하고, 태허의 담연무형(淡然無形)한 것을 선천(先天)의 기(氣)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만물로 형상화된 것을 후천(後天)의 기로 인식하여 모든 것이 하나의 기 운행으로 보았다.

㉢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에 대한 서술이다. 명종 14년 (1559)부터 21년까지 8년 동안 지속된 이 논쟁의 발단은 정지운이 권근의 『입학도설』과 권채 의 『작성도』 등의 영향을 받아 작성한 『천명도』를 이황이 수정하면서부터이다. 뚜렷한 결말을 보지 못하고 끝난 이 논쟁은 양자가 서로 강조하는 바가 달랐으며 동시에 주자의 심성론 자체 가 완전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기대승이 주자의 이론 자체에 충실하고자 했다면 이황은 주자의 이론에 조선의 현실을 반영시켜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 율곡 이이(1536 ∼1584)에 대한 내용이다. 이이는 경험적 현실 세계를 중시하면서 국가도 달라진 시대에 맞게끔 제도를 고쳐야 하며 바로 이것이 경장(更張)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이는 선조 초반부터 자신의 경장론을 담은 『동호 문답』이나 『만언봉사』 등의 시무 관련 상소를 올렸다.

 



 Q  다음 중 19세기 중반에 일본에서 기록한 사서로,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영 토임을 확인받은 안용복에 관한 기록이 있는 문서는?

 

① 은주시청합기 ② 통항일람 ③ 태정관 문서 ④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해설】 정답 ②

② 『통항일람』은 19세기 중반에 일본에서 기록한 사서인데, 여기에는 막부 정권이 안용복에게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해 주었고, 이와 관련된 외교 문서가 조선 조정에 도착하였어며, 일본 어부들에게 독도 접근을 금지시켰다는 사료가 기록되어 있다.

① 『은주시청합기』는 일본 은주 지방의 ‘사이토 호센’이 지은 역사서로 울릉도와 독도는 고려 영토이고 일본의 경계는 은기도까지임을 명기하였다(1667).

③ 1877년 일본 메이지 정부의 최고의사결정기관인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취지의 지령을 내 무성에 하달했고, 이 결정은 4월 9일 자로 시마네 현에 전달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정 체계 속에서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공문서로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확인했던 것이 다.

④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는 당시 일본 메이지 정부의 외무성이 태정관의 내탐 지령을 받고 작성한 보고서로 여기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부속으로 여겨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1883년 조선 조정은 간도 지역 관리를 위해 어윤중을 서북 경략사로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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