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기출 문제 해설, 서울시(2차) 9급, 2024
Q 1. <보기>의 사건을 시간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보기> ㄱ.장수왕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한 후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ㄴ.진흥왕은 고구려와 백제를 모두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ㄷ.근초고왕은 마한의 여러 소국을 복속시키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ㄹ.가야 연맹은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였고, 마지막으로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됨으로써 해체되었다. |
①ㄱ−ㄴ−ㄷ−ㄹ ②ㄴ−ㄷ−ㄹ−ㄱ
③ㄷ−ㄱ−ㄴ−ㄹ ④ㄹ−ㄷ−ㄱ−ㄴ
【해설】 정답 ③
ㄱ. 고구려 장수왕(재위 413-491, 제20대)이 백제의 수도 한성[위례성]을 점령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은 재위 63년인 475년(백제 개로왕 21)의 일. 이때 백제의 개로왕(재위 455-475, 제21대)이 전사(웅진 천도)(475~538, 웅진 시대 개막).
ㄴ.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 제24대)이 백제 성왕(재위 523-554, 제26대)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 유역을 확보한 것은 재위 12년인 551년(백제 성왕 29/고구려 영양왕 7)의 일이고, 이어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 유역까지 차지한 것은 재위 14년인 553년(백제 성왕 31)의 일(신주 설치, 북한산 순수비를 세운 것은 555년의 일). 백제 성왕은 진흥왕의 배신에 보복하기 위해 싸우다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 복병의 기습 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554, 성왕 32)(관산성은 지금의 충북 옥천 지방으로, 『일본서기』에는 함산성으로 표기됨).
ㄷ.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 제13대)의 재위 2년(347)부터 21년(366) 사이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이 시기에 마한 지역을 복속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후 근초고왕은 재위 26년인 371년에 한강에 접한 한산(위치와 관련해 여러 설 있음)으로 도읍을 옮기고 북쪽의 고구려와 계속해서 싸우는 한편 중국의 동진과 외교 관계를 수립(372, 근초고왕 27) 하기 때문(『삼국사기』). 이와 같은 행보는 남쪽의 마한 지역이 복속되지 않았다면 불가능. 그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재위 331-371, 제16대)을 전사시킨 것은 재위 26년인 371년(고구려 고국원왕 41)의 일.
ㄹ. 가야 연맹이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어 해체된 것은 562년(신라 진흥왕 23)의 일.
시간 순으로 나열하면, ㄷ-ㄱ-ㄴ-ㄹ
Q 2. <보기> 이후 발생한 사건으로 가장 옳은 것은?
<보기> 나라 안의 모든 주군(州郡)에서 공물과 부세를 보내지 않아, 창고가 텅텅 비어 나라 재정이 궁핍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하니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때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
①견훤이 경주를 침략하고 경순왕을 옹립하였다.
②당나라가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임명하고 군대를 동원하였다.
③백제 의자왕이 신라의 서쪽 지역을 공격하여 대야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④혜공왕을 마지막으로 무열왕계가 단절되었다.
【해설】 정답 ①
① '나라 안의 모든 주군(州郡)에서 공물과 부세를 보내지 않아, 창고가 텅텅 비어 나라 재정이 궁핍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하니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때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에서 봉기한 것은 신라 진성 여왕 3년인 889년의 일이다(사벌주는 지금의 경북 상주).
후백제의 견훤(재위 900-935)이 신라의 도읍인 경주[금성]를 침략하여 경애왕(재위 924-927, 제55대)을 죽게 하고 경순왕(재위 927-935, 제56대)을 옹립한 것은 927년의 일(927.11). 이 사건 직후 공산(지금의 대구 팔공산 일대)에서 후백제군과 신라를 도우러 온 고려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왕건의 고려군이 대패하였다(공산 전투).
② 당[당 고종]이 문무왕(재위 661-681, 제30대)의 동생 김인문(629~694)을 신라왕으로 임명[책봉]하고 군대를 동원한 것은 나당 전쟁 중이던 674년(문무왕 14) 1월의 일(문무왕의 관작을 삭제). 신라가 노골적인 대당 항쟁을 계속하자 이와 같은 조치를 취 한 것이다. 이에 문무왕이 당에 형식적인 사죄사를 보내고, 김인문도 도중에 돌아가 임해군으로 봉해졌다.
③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제31대)이 장군 윤충을 보내 신라의 서쪽 지역을 공격하여 대야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킨 것은 642년(백제 의자왕 2/신라 선덕 여왕 11)의 일. 대야성은 지금의 경남 합천 지역으로 당시에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④ 혜공왕(재위 765-780, 제36대)을 마지막으로 무열왕계의 직계 왕통은 단절되었다. 이때 신라 중대가 끝나고 내물왕계의 하대가 시작된다(통설). 하지만 신라는 혜공왕 피살(780) 이후 150여 년 동안 20여 명의 왕이 교체되는 등 진골 귀족의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져 사회가 극히 혼란해졌다.
Q 3. <보기>의 사건을 시간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보기> ㄱ.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지방을 공격하였다. ㄴ.정혜공주묘, 정효공주묘를 만들었다. ㄷ.전성기를 맞이하여 중국인들이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
①ㄱ−ㄴ−ㄷ ②ㄱ−ㄷ−ㄴ
③ㄴ−ㄱ−ㄷ ④ㄷ−ㄱ−ㄴ
【해설】 정답 ①
ㄱ. 발해 장군 장문휴의 수군이 당의 산둥 지방[산둥반도의 등주]을 공격한 것은 발해 무왕 14년인 732년의 일
ㄴ. 정혜 공주(737~777)는 발해 문왕(재위 737- 793, 제3대)의 둘째 딸이고, 정효 공주(757~792)는 문왕의 넷째 딸이다. 정혜 공주 묘는 육정산 고분군 (중국 지린성 돈화시 육정산)에 위치하며(고구려 문화의 영향), 정효 공주 묘는 용두산 고분군(중국 지 린성 화룡현 용두산)에 위치한다(당 문화의 영향). 정혜 공주 묘를 만든 것은 정혜 공주 사망 시인 777년경, 정효 공주 묘를 만든 것은 정효 공주 사망 시인 792년경으로 추정
ㄷ. 전성기를 맞이하여 중국인들이 해동성국(海東盛 國)이라 부른 것은 발해의 제10대 왕인 선왕 대(재위 818-830, 대인수)의 일이다(발해의 전성기).
사건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면, ㄱ-ㄴ -ㄷ
Q 4. <보기>에서 무신정변 이후 나타난 사건을 옳게 짝지은 것은?
<보기> ㄱ.최충헌이 교열도감을 설치하여 권력 기관으로 삼았다. ㄴ.일부 무신들은 왕실과 혼인을 시도하였다. ㄷ.서방이 설치되어 행정 실무 능력을 갖춘 문신들이 등용되었다. ㄹ.정변을 축하하기 위해 연산에 개태사를 세웠다. |
①ㄱ, ㄴ ②ㄱ, ㄷ
③ㄴ, ㄷ ④ㄴ, ㄹ
【해설】 정답 ③
ㄱ. 무신 집권자인 최충헌(집권 1196-1219)은 국정 총괄 기구인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력 기관으로 삼았다(1209, 고려 희종 5).
ㄴ. 일부 무신, 즉 정중부(집권 1170-1179)는 왕실과의 혼인을 시도한 바 있다. 또 최충헌은 강종(재위 1211-1213, 제22대)의 서녀를 취하여 아예 자신이 직접 왕실과 통혼하였다. 최우 대(집권 1219-1249)에도 최우의 사위인 김약선의 아들이 왕실과 혼인하였고, 김약선의 딸은 원종(재위 1260-1274, 제24대)의 왕비가 되었다. 최 씨 집권자들은 이처럼 왕실과의 통혼을 통해 왕실과 밀착하였다. 참고로 최 씨 집권자들을 포함한 무신들은 문벌 귀족 가문들과도 폭넓은 혼인 관계를 맺었고, 이들은 원 간섭기에 권문세족으로 변화하였다.
ㄷ. 서방이 설치되어 행정 실무 능력을 갖춘 문신들이 등용된 것은 최우 집권기인 1227년(고종 14)의 일이다. 서방은 일종의 문인들의 숙위 기구이다(~1270). 문인들을 숙위하게 하고 국정에 대해 자문을 받았다(문한 작성).
ㄹ. (충남) 논산 개태사(開泰寺)는 고려 태조 왕건(재위 918-943)이 신검의 후백제를 제압한 후(일리천 전투)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사찰이다(936, 태조 19).
옳은 사건은, ㄴ과 ㄷ
Q 5. <보기>의 사료에 해당하는 국가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보기> 12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 대회로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춘다. 이름을 ‘영고’라 하였다. 이때는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주었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모두 얼음을 넣어 장사 지낸다. 사람을 죽여서 순장하는데 많을 때는 백 명 가량이나 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
①국읍에 천군을 두어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였다.
②국왕을 중심으로 가장 유력한 대가인 우가, 마가, 저가, 구가 등이 주요 국가 정책을 논의하였다.
③혼인 풍속으로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④왕 아래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등의 관료 조직이 있었다.
【해설】 정답 ②
② '12월에 지내는 제천 행사는 국중대회로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춘다. 이름을 영고라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때는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주었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모두 얼음을 넣어 장사 지낸다. 사람을 죽여서 순장하는데 많을 때는 백 명가량이나 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에 해당하는 국가는 초기 국가, 부여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부여에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가장 유력한 대가인 우가, 마가, 저가, 구가 등이 주요 국가 정책을 논의하였다(제가 회의). 대가들은 각 사출도*를 주관하였으며 대사자, 사자, 대사 등의 관리를 두었다. *사출도(四出道): 부여의 지방 관할 구역을 가리킨다. 부여는 수도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위에 따라 지방을 4개 의 구역으로 나누었다, 중앙에는 가장 강력한 부족이 있고, 사방에는 그 지방에서 우세한 부족이 다스렸다. 부족 장인 제가(諸加)[대가]가 관할하였는데 큰 부족으로는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 加) 등이 있었다. 처음에 제가는 부족의 대표적인 역할만 했으나 점차 귀족화되며 국가의 지배층이 되었다. 세력의 크기에 따라 수천 가(家) 또는 수백 가의 호(戶)를 지배하였다.
① 국읍에 (제사장인) 천군을 두어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한 국가는 초기 국가, 삼한이다. 천군은 신성 지역인 소도에서 제사를 지냈다.
소도(蘇塗): 『삼국지』 동이전에 다음과 같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마다 한 사람을 세워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니 천군이라고 하였다. 또 나라마다 별읍이 있으니 소도라 하였다. 그곳에서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 그 안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은 모두 돌려보내지 않았다.
③ 혼인 풍습으로 민며느리제가 있었던 국가는 초기 국가, 옥저이다.
④ 왕 아래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등의 관료 조직이 있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고구려이다. 고구려에는 왕이 있고, 벼슬로는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부·우태·승·사자·조의·선인이 있으며,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
Q 6. 고려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전민변정도감에서 노비 소유권 소송을 처리했다.
②응방을 통해 왕실에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③전시과 제도를 통해 관료에게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였다.
④호장은 국가에서 경제적 보수를 받지 않았다.
【해설】 정답 ④
④ 호장(戶長)은 고려 시대 향직의 우두머리로서 부호장과 더불어 호장층을 형성하였다. 지방의 실무 행정을 총괄하는 지방의 실질적 지배자이다. 호장은 또한 제도적으로 문과에 응시할 수도 있었다. 호장이라는 명칭은 성종 2년(983)에 호장, 부호장과 같은 향리 직제를 마련하면서 처음 등장하였다(당시의 최고위직인 당대등을 호장으로, 장대등을 부호장으로 개칭). 그리고 호장은 외역전이라고 하여 직역에 대한 대가를 지급받았다. 외역전은 직역 세습을 대가로 세습 가능한 영업전이기도 하다. ① 전민변정도감은 고려 후기에 권세가의 대토지 불법 소유 및 농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이다. 처음에는 숙청되거나 실각한 권세가들의 자산을 정리하는 데에 1차적인 목적이 있었으나 고려의 관습과 다르게 풀린 노비를 추쇄하는 등 노비 제의 정비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전민변정도 감에서는 토지와 노비 소유(권)의 소송과 관련한 일을 주로 취급하였다.
전민변정도감: 권세가에게 점탈된 토지나 농민을 되찾아 바로잡기 위하여 설치된 임시 개혁 기관으로, 역대에 걸쳐 여러 번 설치되었다가 혁파되곤 하였다. 차례로 살펴 보면, 원종 10년인 1269년, 충렬왕 14년인 1288년, 충렬왕 27년인 1301년, 공민왕 원년인 1352년(권문세족의 반발로 폐지), 공민왕 15년인 1366년, 마지막으로 우왕 7년인 1381년에 각 설치되었다. 전민변정도감을 이처럼 여러 번 설치한 것은 부원파(친원파)를 비롯한 권문세족의 힘을 약화시키고, 더불어 국가 재정 수입의 기반을 확대하고자 한 데 있었다. 하지만 재차 설치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만큼 원 간섭기 이후 권문세족의 권세가 막강하였음을 의미한다.
② 응방(鷹坊)은 몽골에 해동청[사냥매]을 조공품으로 보내기 위해 설치한 기구이다(1275, 충렬왕 원년). 몽골에서 매를 보내라는 요구가 잦자 충렬왕 9년인 1283년에 응방을 관장하는 응방도감을 두기도 하였다. 그리고 응방에서 길들인 매는 몽골뿐 아니라 고려 왕실에도 바쳤다. 그리하여 응방에 속한 관원들은 왕의 권력을 배경으로 횡포가 극심하였다(부원 세력화, 부원배화, 응방은 여러 부원 기구 중 하나). 응방은 단순히 매를 잡고 사육함은 물론 원에 매를 헌납하는 행사, 왕의 사냥 행사에도 참여하고 왕과 왕비에 자주 향연을 베풀어 총애를 받는 기구였다. 따라서 면역· 면세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많은 사전(賜田)을 받고, 수많은 노비와 소작인을 거느렸다. 자연히 왕실도 응방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참고로 충렬왕은 응방을 통해 민간으로부터 은을 수집하여 국제 교역[무역]의 자금으로 삼으려고까지 하였다. 응방은 폐해가 심해 폐지와 (재)설치가 반복되다 조선 중종 12년인 1517년에 이르러 평안도·함경도에만 응방을 두고 남부 지방은 매의 진상과 응방을 최종 폐지하였다.
③ 전시과 제도를 통해 관료에게 전지와 시지를 (차등 있게) 지급한 것은 고려 시대이다. 전시과 제도를 처음으로 시행한 것은 고려 경종 원년인 976년의 일이다(시정 전시과). 이후 목종 원년인 998년에 개정 전시과가, 다시 문종 30년인 1076년에 또다시 경정 전시과가 시행되었다(전시과의 완성).
전지(田地)와 시지(柴地): 전지는 말 그대로 논과 밭을 이르는 말이고, 시지는 땔나무를 공급하기 위해서 지급했던 토지를 가리킨다. 시지는 땔나무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대개 수도인 개경 부근에 위치하였다.
Q 7. <보기1>과 <보기2> 사이에 발생한 사건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보기 1> 몽고군이 이르니 우종주와 유홍익은 양반들과 더불어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다. 다만 노비군과 천민들이 힘을 합하여 몽고군을 물리쳤다. -고려사절요- |
<보기 2> 6월 원나라 연호인 지정을 쓰지 않고 교지를 내렸다. -고려사- |
①화통도감을 설치하여 각종 화약 무기를 제조했다.
②일본 원정을 위해 정동행성이 설치되었다.
③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권문세족이 출현했다.
④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의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해설】 정답 ①
<보기 1>에 '몽골군이 이르니 우종주와 유홍익은 양반들과 더불어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다. 다만 노비군과 천민들이 힘을 합하여 몽골군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충주 부사 '우종주'와 판관 '유홍익'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주어진 <보기 1> 은 몽골의 제1차 침입 시 있었던 충주(산)성 전투를 가리킨다(1232, 고종 19)('충주 노군의 항전'이라고도 함)
<보기 2>에는 '6월 원나라 연호인 지정을 쓰지 않고 교지를 내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기철(?~1356) 등 친원파를 제거 한 고려 공민왕 5년인 1356년에 있었던 일이다[『고려사』 세가 권제39, 공민왕 5년(1356) 6월 '원 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역모 평정을 기념하여 사면을 베풀다']. 무신 최무선(1325~1395)의 건의로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각종 화약 무기를 제조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의 일이다. 이후 최무선은 화통도감에서 만든 화포로 진포 대첩[해전]에서 왜구를 물리쳤다(1380.8, 고려 우왕 6). 진포는 오늘날 금강 하류 일대로 충남 서천 남쪽이다(전북 군산이라는 소수설도 있음). *1232년 정월에 전투가 벌어짐
② 일본 원정을 위해 정동행성이 설치된 것은 충렬왕 6년인 1280년의 일이다. 정동행성의 정식 명칭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으로, 여기서 '정동' 은 일본 정벌을 뜻하고, '행중서성'은 중앙 정부 기관인 (원) 중서성의 지방 파견 기관을 뜻한다. 일본 원정 실패 이후에도 폐지되지 않고 남아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기구로 기능하였다.
③ 권문세족은 대몽 항쟁 이후인 고려 후기에 새롭게 형성된 지배 세력이다. 권문(權門)과 세족(世族) 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대체로 원 간섭기에 출현한 것으로 본다.
원 간섭기 - 원종의 환도령으로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1270년(원종 11)부터 시작되어(개경 환도), 공민왕의 반원 정책이 '성공'한 1356년(공민왕 5)까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
④ 보각국사 일연(1206~1289)이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를 수록한 역사서, 『삼국유사』를 지은 것은 충렬왕 11년인 1285년의 일이다. 또 이승휴(1224~1300)가 『제왕운기』를 저술한 것은 충렬왕 13년인 1287년의 일이다. 『제왕운기』는 단군부터 충렬왕까지의 역사를 서사시(7언과 5언의 운율) 로 서술한 역사서
Q 8. <보기>의 글이 작성된 시대의 정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보기> 7조 왕이 백성을 다스린다고 해서 집집마다 가거나 날마다 그들을 살펴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령을 나누어 보내어 백성의 이익과 손해를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 요청하건대 외관을 두시옵소서. -「시무 28조」- |
①5도 양계를 기틀로 한 지방 제도를 마련하였다.
②향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오가작통제와 호패법이 시행되었다.
③군현을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과 파견되지 않는 속현으로 구분하였다.
④향·부곡·소는 향리가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다.
【해설】 정답 ②
② 7조로 '왕이 백성을 다스린다고 해서 집집마다 가거나 날마다 그들을 살펴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령을 나누어 보내어 백성의 이익과 손해를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 요청하건대 외관을 두시옵소서'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재상이자 문신인) 최승로(927~989)가 고려 성종에게 건의한 시무 28조 임을 알 수 있다(982, 고려 성종 원년).
향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오가작통제와 호패법이 시행된 것은 조선 시대의 일이다. 오가작통제는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은 제도로 촌락 주민에 대한 통제[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하여 시행되었다. 세종 10년인 1428년 이후 단종 연간에 처음 실시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국대전』이 완성된 성종 대에 더욱 정비되어 법제화되었다(1485, 성종 16). 그리고 마침내 속종 원년인 1675년에 윤휴(1617~1680)의 건의에 따라 비변사에서 '오가작통사목'이 제정되면서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또 일종의 신분 증명서인 호패법은 태종 13년인 1413년에 처음 실시되었다.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전국의 인구 동태를 파악하고,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의 대상자를 알아보기 위해 시행하였기 때문에 일반민들 로부터 호응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숙종 초 까지 5차례나 시행하다 중단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① 5도 양계를 기틀로 한 지방 제도를 마련한 것은 현종 대(재위 1009-1031, 제8대)이다[현종 3년(1012)과 현종 9년(1018)에 대폭적으로 개편]. 이때 전국을 5도와 양계로 크게 나누었으며(광역 조직), 5도 아래에 4도호부, 8목, 주·군·현을, 양계 아래에는 진을 설치하였다(기초 조직).
③ 고려 시대 군현은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과 파견되지 않는 속현으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현까지 지방관이 파견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실제로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보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훨씬) 더 많았다. 따라서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이 몇 개의 속현을 관할하였다. 참고로 지방의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어 행정을 담당한 것은 조선 시대의 일이다. ④ 향·부곡·소는 주·군·현과 구분되는 고려 시대의 특수 행정 구역이다. 향과 부곡은 농업 생산에 치중하였으나 소(所)는 고려 시대에 신설된 구역으로 수공업 생산을 담당하였다. 향리[호장(戶長)]가 (주·군· 현의 행정 기관을 매개로 하여)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이곳의 주민들은 일반 군현의 주민들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다.
Q 9. <보기>의 글이 작성된 시기의 학문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보기>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과 밖의 구별이 있겠느냐? 그러니 각각 자기 나라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고, 자기 임금을 높이며, 자기 나라를 지키고, 자기 풍속을 좋게 여기는 것은 중국이나 오랑캐나 마찬가지다. -의산문답- |
①정약용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세계관을 거부하고 지구 자전설을 주장했다.
②박지원은 서양 서적을 참고하여 거중기 등 건축 기계를 제작했다.
③홍대용은 청나라에 다녀와 쓴 열하일기에서 청 문물을 소개했다.
④이긍익은 우리나라 역대 문화를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하였다.
【해설】 정답 ④
④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과 밖의 구별이 있겠느냐? 그러니 각각 자기 나라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고, 자기 임금을 높이며, 자기 나라를 지키고, 자기 풍속을 좋게 여기는 것은 중국이나 오랑캐나 마찬가지다 '는 내용이 나와 있다. 출처가 『의산문답』으로 되어 있는 바 이 책에서 무한 우주론('다른 별들에도 우 주인이 있을 수 있다')과 지전설[지구 자전설]을 주장한 인물은 담헌 홍대용(1731~1783)이다(1766, 영조 42). 이로써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였다. 완산 이긍익(1736~1806)은 우리나라 역대 문화를 『연려실기술』에서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하였다(1776, 영조 52). 『연려실기술』은 백과사전식으로 구성된 기사 본말체 사서이자 일종의 정치 야사집
①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세계관을 거부하고 지구자전설을 주장한 인물은 담헌 홍대용(1731~1783)
② 서양 서적(『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중기 등 건축 기계를 제자한 인물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1789, 정조 13)
③ 청에 다녀와 쓴 『열하일기』에서 청 문물을 소개한 인물은 연암 박지원(1737~1805). 박지원은 연행사(燕行使)를 수행한 후 귀국한 직후 『열하일기』*를 저술하였다(1780년 10월 말 귀국 후 3년에 걸쳐 완성).
『열하일기』: 정조 4년인 1780년에 청 건륭제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하는 삼종형 박명원(1725~1790)을 수행하여 청 황제의 피서지인 열하까지 여행하고 돌아온 일들을 소상하게 담은 사행일기이다(일종의 여행기인 '연행일기').
Q 10. <보기>의 ㈎ 시기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보기> ㈎ (이)란 종래의 붕당 정치가 변질된 형태인 일당 전제화마저 거부하고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 형태를 말한다. 순조, 헌종, 철종의 3대 60여 년 동안 왕정과 왕권은 이름뿐이었다. 정권은 안동 김씨 또는 풍양 조씨 등 외척의 사유물이 되었다. |
①인간주의, 평등주의를 부르짖은 동학이 농촌 사회를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했다.
②부유한 농민들은 군포를 피하기 위해 양반 신분을 위조하거나 사들였다.
③지방민의 불만이 평안도와 삼남지방에서 민중 봉기로 표출되었다.
④노비 인구를 제도적으로 줄이기 위한 노비종모법이 확정되었다.
【해설】 정답 ④
④ '(가)(이)란 종래의 붕당 정치가 변질된 형태인 일당 전제화마저 거부하고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 형태를 말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순조, 헌종, 철종의 3대 60여 년 동안 왕정과 왕권은 이름뿐이었다. 정권은 안동 김씨 또는 풍양 조씨 등 외척의 사유물이 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가)'는 세도 정치(기)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노비 인구를 제도적으로 줄이기 위한 노비종모법이 확정된 것은 영조 7년인 1731년의 일이다. 노비종모법이란 아버지가 노비여도 어머니가 양민이면 그 자녀를 양민으로 삼는 법이다. 양인 인구를 확보하기 위한 법으로, 노비 해방에도 기여하였다.
세도 정치기: 정조 사후, 순조-헌종-철종에 이르는 60 년 간 소수 가문(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풍양 조씨, 대 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반남 박씨 등 6대 가문) 이 권력을 장악한 시기를 말한다. 특히 순조, 철종 대의 안동 김씨와 헌종 대의 풍양 조씨의 세도가 강하였다.
① 인간주의, 평등주의를 부르짖은 동학이 수운 최제우(1824~1864)에 의해 창시된 것은 조선 철종 11년인 1860년의 일이다. 최제우는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시는 시천주(侍天主)를 강조하였다.
② 조선 후기에 부를 축적한 농민들[부농층]은 그 재력을 바탕으로 하여 양반의 족보를 사거나 위조하는 방법으로 양반의 신분을 얻었다. 양반의 신분을 얻게 되면 자신과 자손의 군역 부담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양반 지배층의 수탈을 피하고 부철 축적하는 과정에서 편의를 얻을 수 있었으며, 향촌 사회에서 나름대로 행세할 수도 있었다(신향층으로 성장). 19세기 전반 세도 정치기에는 이러한 추세는 더욱 확대되었다.
③ 지방민의 불만이 평안도에서는 순조 11년(1811) 홍경래의 난으로[1811.12~1812.4(음력)]으로, 삼남 지방에서는 철종 13년(1862) 임술 농민 봉기로 표출되었다. 지역 차별과 지배층의 수탈, 즉 삼정의 문란[폐해]에 항거하여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Q 11. 조선과 후금의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①후금은 조선에 숙질 관계를 요구했다.
②조선은 후금의 사신 용골대를 참수하고 항전 의지를 보였다.
③후금은 시장을 열어 교역할 것을 조선에 요구했다.
④후금이 황제를 칭하자 조선은 명과 연합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해설】 정답 ③
③ 후금은 대기근과 명과의 전쟁 등으로 부족한 물자를 조선으로부터 최대한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세력이 커질수록 더욱 더 많은 물자를 조선에게 세폐 (歲幣)[해마다 보내는 공물]의 명목으로 요구하였다. 또한 압록강과 두만강 부근에서 시장 교역을 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정묘호란 직후에는 압록강변에 중강 개시를 열었고, 병자호란 직후에는 두만강변에 회령 개시를 열었다.
① 후금이 조선에 요구한 관계는 숙질(叔姪) 관계가 아니라 형제 관계이다. 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1627, 정묘약조). 참고로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과 맺은 관계는 군신 관계이다(1616년 건국한 후금은 1636년 4월 (정식으로) 칭제건원하면서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침).
숙질(叔姪): 삼촌과 조카를 아울러 이르는 말
② 용골대(1596~1648)는 청[후금]의 장수로 병자호란 직전인 1636년(인조 14) 2월에 사신으로 와서 청 황제의 존호를 쓰고, 군신의 의(義), 즉 군신 관계를 맺을 요구하였다(용골대는 이전과 이후 고려에 사신으로 수시로 옴).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지금의 서울 송파)에서 청 태종(재위 1626-1643, 제2대, 홍타이지)에 게 항복의 예를 행하도록 안내하였다. 항복의 예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 즉 '삼배구고두례 (三拜九叩頭禮)' 또는 '삼궤구고두례 (三跪九叩頭禮)'를 행하였다. ④ 후금이 1636년(인조 14)에 황제를 칭하고 조선에 대해 군신 관계를 요구하면서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하자(2월에 용골대가 사신으로 왔을 때) 조선은 청에 대해 선전 포고[선전의 교서 내림]하였다(명과 연합하지 않음). 하지만 준비가 없는 가운데 내린 선전 포고는 결국 이듬해 1월 삼전도의 굴욕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Q 12. 조선후기 노비제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균역법 실시 이후 공노비의 신공은 점진적으로 감소되어 노가 1필로 줄고, 비의 신공은 폐지되었다.
②공노비의 신공과 양인의 군역 부담이 동일해지면서 공노비 유지의 실익이 없어졌다.
③노비의 해방과 양인의 확대가 종모법을 통해 촉진되었다.
④1894년 노비세습제가 폐지되었다.
【해설】 정답 ④
④ 노비 세습제가 폐지[혁파]된 것은 조선 고종 23년인 1886년의 일(1886.1)[사가노비절목(私家奴婢節目) 제정]
① 조선 시대의 노비는 크게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뉜다. 또 공노비는 다시 그들의 의무에 따라 선상노비(選上奴婢)[또는 입역노비(立役奴婢)]와 납공노비 (納貢奴婢)로 구분되었다. 16세 이상 60세까지의 공노비 중 선상노비는 매년 일정 기간 동안 소속 관청에 무상으로 노역에 종사하였고, 납공노비는 매년 일정액의 신공(身貢)을 바쳐야 했다. 신공은 태종 8년(1408)에 추포(麤布)로 노는 5필, 비는 4필로 규정하였다가 세종 7년(1425)에 대폭 삭감되었고, 세조 때는 노면포 1필과 쌀 2말, 비는 면포 1필과 쌀 1말로 정해졌다(『경국대전』에 법제화). 이후 면포로 통일되어 노는 2필, 비는 1필 반을 바치도록 하였다. 사노비의 경우 외거노비도 그에 준해 상전 에게 신공을 바쳤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노비의 신 공을 덜어주기 위한 조치가 때때로 취해졌고 영조 20년인 1744년에 이르러 『속대전』에서 노비의 신공 액 중 각 반 필씩 덜어주기로 한 것이 법제화되었 다. 균역법 실시 후인 영조 31년(1755)에는 다시 반 필씩을 삭감, 노는 1필, 비는 반 필씩 바치도록 하 였다. 그리고 드디어 영조 50년인 1774년에 비공 (婢貢)을 혁파하고 단지 노에게만 1필을 바치도록 하였다.
Q 13. <보기>의 내용을 주도한 세력이 취한 정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보기> 1.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합심하여 황제권을 공고히 할 것. 2.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해당 부처의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함께 날인하여 시행할 것. 3.재정은 탁지부에서 전담하여 맡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
①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문을 건설하였다.
②태양력과 ‘건양’ 연호를 사용하고 단발령을 실시하였다.
③중대한 범죄는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을 주장하였다.
④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의 내정 간섭을 규탄하였다.
【해설】 정답 ②
②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합심하여 황 제권을 공고히 할 것'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해당 부처의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함께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담하여 맡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이라는 내용이 차례로 나와 있다. 주어진 <보기>는 독립 협회 주도로 열린 관민 공동회에서 결의된 6개 항의 국정 개혁안인 ' 헌의 6조'임을 알 수 있다[1898년(광무 2) 10월 30일](관민 공동회, 1898.10.28~11.3). 이를 통해 <보기>의 내용을 주도한 세력은 독립협회임을 알 수 있다(1896.7~1898.12).
태양력과 '건양' 연호를 사용하고 단발령을 실시한 것은 을미개혁(이른바 '제3차 갑오개혁') 때의 일이다(1895.8~1896.2) 고종 32년인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면서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정하였다(~1897년 8월 16일까지 사용). 또 이때 단발령도 시행되었다(음력 1895년 11 월 15일 공포).
① 독립 협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한 것은 고종 33년인 1896년 4월의 일이다(1896.4.7, 같은 해 7월 2일 독립 협회 설립 이전임) 『독립신문』은 창간 이듬해인 1897년 1월부터 한글판[국문판]과 영문판으로 분리하여 발행되었다. 그리고 독립 협회의 주도로 독립문이 건설된 것은 광무 원년[고종 34]인 1897년 11월의 일이다(1897.11.20)(사적 제32호). 왕실과 국민의 성금을 모아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자리 부근에 세웠다.
③ 중대한 범죄는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이라는 주장은 헌의 6조에 규정된 내용이다(제4조).
④ 독립 협회는 광무 2년[고종 35]인 1898년 3월에 처음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열강[특히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을 규탄하였다(~1898.12).
Q 14. <보기>의 ㈎에 들어갈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보기> ㈎ 은/는 본래 우리와 혐의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연히 남의 말만 듣고 틈이 생기게 된다면 우리의 위신이 손상될 뿐 아니라, 이를 구실로 침략해 온다면 장차 이를 어떻게 막을 것입니까? -일성록, 영남만인소- |
①거문도를 불법 점령하였다.
②일본과 포츠머스강화조약을 맺었다.
③외규장각의 문서와 문화재를 약탈하였다.
④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해설】 정답 ②
② '(가)은/는 본래 우리와 혐의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 연히 남의 말만 듣고 틈이 생기게 된다면 우리의 위신이 손상될 뿐 아니라, 이를 구실로 침략해 온다면 장차 이를 어떻게 막을 것입니까?'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1811~1891)을 소두 (疏頭)로 한 1만여 명의 영남 유생들이 『조선책략』* 의 유포에 반대하여 올린 영남만인소에 나오는 내용 이다[1881.2, 고종 18)(위정척사 운동의 하나인 1880년대의 개화 반대 운동). 『조선책략』은 도원 김홍집(1842~1896)이 고종 17년인 1880년에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청의 외교관인 황준헌(1848~1905)으로부터 얻어 고종에게 복명하면서 바친 책으로(1880.8), 조선에게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이라는 외교 정책을 권장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가)'은/는 러시아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러일 전쟁 결과 러시아는 대한 제국에서 일제의 독점적 우위권을 인정한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맺었다 (1905.9.5)(제1조).
『조선책략』: 청의 주일 참사관 황준헌(1848~1905)이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청의 초대 주일 공사인 하여장(1838~1891)의 구상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었다. 당시 청은 이리(伊犁: 중국 위구르·신장 지역) 문제로 러시아와의 전쟁이 현실로 다가서자 일본과 손을 잡고 조선을 이용하여 러시아에 대항하고자 했다. 또 속국으로 여기는 조선에 미국과 일본 등을 끌어들이면 미국, 일본 등이 중국 편에서 함께 간섭해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하는 걸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으로 황준헌에게 『조선책략』을 작성하게 하였다(조선에게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 정책 권장).
①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국가는 영국이다. 고종 22년인 1885년 4월의 일이다(~1887.2)(거문도 사건).
③ 외규장각의 문서와 문화재를 약탈한 나라는 병인양요 때의 프랑스(1866.10~11).
④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진무중군 어재연(1823~1871)이 지킨 (강화도의) 광성보를 공격한 나라는 신미양요 때의 미국(1871. 5).
제너럴 셔먼호 사건: 고종 3년인 1866년 7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경내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횡포를 일삼은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평양 관민이 불태워 격침시킨 사건
Q 15. <보기>의 사설이 나온 이후 일어난 사실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보기> 오호라!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 대신이란 자들이 영달과 이득을 바라고 거짓된 위협에 겁을 먹고서 머뭇거리고 벌벌 떨면서 달갑게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어, 4천년 강토와 5백년 종사를 남에게 바치고 2천만 목숨을 몰아 다른 사람의 노예로 만들었으니, ……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우리 남의 노예가 된 2천만 동포여! 살았느냐? 죽었느냐? 단군 기자 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별안간 망하고 끝났도다! 아!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
①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가 파견되었다.
②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임명되었다.
③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개시했다.
④일본이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해설】 정답 ③
오호라!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 대신 이란 자들이 영달과 이득을 바라고 거짓된 위협에 겁을 먹고서 머뭇거리고 벌벌 떨면서 달갑게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어, 4천년 강토와 5백년 종사를 남에게 바치고 2천만 목숨을 몰아 다른 사람의 노예로 만들었으니'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우리 남의 노예가 된 2천만 동포여! 살았느냐? 죽었느냐? 단군 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별안간 망하고 끝났도다! 아!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제2차 한일 협약, 이른바 '을사늑약' 강요에 반발하여 황성신물의 주필인 위암 장지연 (1864~1921)이 작성한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 [사설]이다(1905.11.20).
일본이 뤼순[여순] 군항에 있던 러시아 군함을 공격하여 러시아와의 전쟁(러일 전쟁)을 일으킨 것은 1904년 2월 8일의 일이다(~1905.9).
Q 16. <보기>에서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모두 고른 것은?
<보기> ㄱ.민족유일당운동의 결과 「조선의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가 발표되었다. ㄴ.고종의 밀칙을 받아 대한독립의군부가 조직되었다. ㄷ.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민중직접혁명론을 주장했다. ㄹ.「대한민국건국강령」은 안창호의 삼균주의를 이론적 틀로 삼았다. |
①ㄱ, ㄴ ②ㄱ, ㄹ
③ㄴ, ㄷ ④ㄷ, ㄹ
【해설】 정답 ③
ㄱ. 민족 유일당 운동은 1920년대 중반 이후 만주 와 중국 지역에 분립되어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기 위해 전개한 운동이다. 그리하여 만주에서는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차례로 조직되었으며(1924년 6월 참의부, 1924년 11월 정의부, 1925년 3월 신민부 조직), 이후 다시 3부 통합 운동이 벌어져 1928년 12월에 혁신 의회(개인 본위 통합 주장, 한국 독립군 결성)가, 1929년 4월에 국민부(단체 본위 통합 주장, 조선 혁명군 결성)가 조직되었다. 중국에서는 북경에서 '한국독립유일당 북 경촉성회'가 창립된 것을 시작으로(1926.10), '한국 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한국유일독립당 광둥촉성회', '한국유일독립당 난징촉성회' 등이 차례로 창립되었다(각 1927.4/1927.5/1927.9). 국내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 1927년 2월 민족 협동 전선인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그런데 『조선의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는 1928년 12월 코민테른 집행 위원회 정치 서기국이 채택한 조선 공산당 재조직에 관한 결정서로, 일명 '12월 테제'이다(1928년 7~8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6차 대회 결정서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에서의 혁명 운동에 대하여'에 기초). 주요 내용은 조선 공산당은 종전과 같은 인텔리 중심의 조직 방법을 버리고, 공장·농촌으로 파고들어가 노동자와 빈농을 조직해야 하며, 민족 개량주의자들을 근로 대중으로부터 고립시켜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전의 코민테른의 방침과는 달리 좌편향적이었다.
ㄴ. 고종의 밀칙을 받아 대한 독립 의군부가 조직된 것은 1912년 9월의 일이다(~1913.5). 돈헌 임병찬(1851~1916)이 고종의 밀지를 받아 조직하였으며, 복벽주의(復辟主義)*를 표방하였다. *복벽주의(復辟主義): '복벽'이란 물러났던 임금을 다시 왕위에 올리는 것을 뜻하는 바 대한 제국의 군주정 회복을 목표로 한 운동이나 사상을 가리킨다.
ㄷ. 단재 신채호(1880~1936)가 중국 상하이에서 의열단을 위해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한 것은 1923년 1월의 일이다. 『조선 혁명 선언』에서 신채호는 민중 직접 혁명론을 주장하였다.
ㄹ. 『대한민국 건국 강령』은 [도산 안창호(1878~1938)가 아니라] 조소앙(1887~1958)의 삼균주의를 이론적 틀로 삼았다. 대한민국 건국 강령이 발표된 것은 1941년 11월의 일이고, 조소앙(호 소앙, 본명 용은)의 삼균주의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이념으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강조한 것이다.
옳은 설명은, ㄴ과 ㄷ
Q 17. <보기>의 강령을 발표한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보기> 본 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써 원수이며 적인 일본의 침탈 세력을 박멸하여 5천년 독립 자주해 온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고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에 기초를 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국민 전체의 생활 평등을 확보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 |
①의열단을 중심으로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등이 참여하여 만들었다.
②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만든 중국 관내 최대 규모의 통일전선 정당이었다.
③민주공화국 수립, 토지 국유화 등을 내걸고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④김구 등 임시정부를 고수하려는 세력이 탈당하면서 통일전선 정당으로서의 성격이 약해졌다.
【해설】 정답 ④
④ '본 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써 원수이며 적인 일본의 침탈 세력을 박멸하여 5천년 독립 자주해 온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고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에 기초를 둔 진정한 민주 공화국을 건설하여 국민 전체의 생활 평등을 확보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 해 주어진 <보기>는 1935년 7월 중국 난징에서 결 성된 (조선) 민족 혁명당의 당의(黨義)의 전문(前文) 임을 알 수 있다. 삼균주의는 1930년 1월 중국 상하이에서 결성된 한국 독립당의 당의에 처음 들어갔는데, 이를 기초한 조소앙이 민족 혁명당의 당의 제정 의원으로도 참여하였기 때문에 비슷한 문구가 당 의에 들어가게 되었다. 김구 등 임시 정부를 고수하려는 세력은 탈당한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족 혁명당이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계가 당권을 장악하자 이에 불만을 느낀 조소앙의 한국 독립당계가 1935년 9월 하순 이탈하였고, 1937년 3월에는 지청천계도 이탈하여 4월 조선 혁명당을 (재)결성함으로써 통일 전선 정당으로서의 성격이 약해졌다[이른바 '민족대당(民族大黨)'으로서의 성격 상실].
① (조선) 민족 혁명당은 의열단을 중심으로 조선 혁명당, 한국 독립당, 신한 독립당, 대한 독립당의 5당 대표 14명이 모여 결성된 민족 연합 전선의 성격을 띤 독립운동 단체이다.
② 민족 혁명당은 참가한 5개 단체들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만든 당시 중국 관내 최대 규모의 통일 전선 정당이었다.
③ 민족 혁명당은 당의, 당강에서 밝혔듯이 민주 공화국 수립, 토지 국유화, 대규모 생산 기관의 국유화, 민주적 권리의 보장 등을 내걸고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Q 18. <보기>의 자료가 공포된 이후에 일어난 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보기>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 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 |
①제주4·3사건이 발생했다.
②친일청산을 위해 ‘반민특위’가 설치되었다.
③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④‘유상매수,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농지개혁이 실시되었다.
【해설】 정답 ①
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 국민은 기미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 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1948년 7월 12일 제헌 국회에서 통과된 제헌 헌법의 전문(前文)임을 알 수 있다. 헌법의 제정 이유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같은 해 7월 17일 서명·공포되어 그날 로 발효되었다(제헌절).
제주 4·3 사건은 미군정기였던 1947년 3월 1일 경찰 의 발포 사건*에서 시작되어 한라산 금족 구역이 해제된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가리킨다. 4·3 이라는 명칭은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대규모 소요 사태(남로당의 '무장 봉기')에서 유래한다. '는 1948년 4월에 일어난 제주(도) 4·3 사건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0년 1월,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2000.1.12). 특별법의 명칭은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에 관한 특별법으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인권 신장과 민주 발전 및 국민 화 합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② 친일 청산을 위해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이른바 '반민특위'가 설치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의 일이다(1948.10.23). 이듬해인 1949년 1월 5일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차리고, 8일 친일 기업인이었던 박흥식(1903~1994)을 체포함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1949.8.31).
③ 북한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수립된 것은 1948년 9월 9일의 일이다.
④ '유산 매수, 유상 분배'의 원칙에 따라 농지 개혁이 (실제로) 실시된 것은 1950년 3월부터이다(농지 개혁법이 제정·공포된 것은 이승만 정부 시기인 1949년 6월).
Q 19. <보기>의 사건을 시간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보기> ㄱ.5·18 민주화 운동 ㄴ.12·12 군사 반란 ㄷ.부마 민주 항쟁 ㄹ.4·13 호헌 조치 |
①ㄷ−ㄱ−ㄴ−ㄹ ②ㄷ−ㄴ−ㄱ−ㄹ
③ㄹ−ㄴ−ㄷ−ㄱ ④ㄹ−ㄷ−ㄴ−ㄱ
【해설】 정답 ②
ㄱ. 전남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것은 최규하 정부 시기인 1980년 5월의 일(1980.5.18-27).
ㄴ.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에 의해 12·12 군사 반란이 일어난 것은 최규하 정부 시기인 1979년 12월의 일이다(1979.12.12).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1929~20 02)을 '김재규 내란에 방조한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강제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유혈 충돌이 발생하였다(하극상 사건).
ㄷ. 부마 민주 항쟁이 일어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79년 10월의 일이다(1979.10.16~20). 유신 체제가 붕괴되는 계기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 시기인 2019년에 민주화에 기여한 점이 인정되어 시위가 시작된 날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ㄹ. 기존의 헌법을 유지하는 4·13 호헌 조치가 선언된 것은 전두환 정부 시기인 1987년 4월의 일이다 (1987.4.13). 전두환 정부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직선제 개헌]를 거부하고,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다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였는데, 이러한 호헌 조치는 오히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불을 댕기는 역효과를 낳았다(6월 민주 항쟁 발발 계기로 작용).
사건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면, ㄷ-ㄴ-ㄱ-ㄹ
Q 20. <보기>의 사건을 시간 순으로 나열할 때 세 번째에 해당하는 사건은?
<보기> ㄱ.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 ㄴ.6·15 남북 공동 선언 ㄷ.남북 동시 유엔 가입 ㄹ.남북조절위원회 설치 |
①ㄱ ②ㄴ
③ㄷ ④ㄹ
【해설】 정답 ①
ㄱ.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즉 '남북 기본 합의서'를 채택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1년 12월의 일이다(1991.12. 13).
ㄴ. 6·15 남북 공동 선언이 채택한 것은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0년 6월의 일이다(2000.6.13~15). 당시 김대중 대통령(1924~2009)은 2000년 6월 13일에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1942~2011)과 여러 차례 회담하였고, 그 결과 6월 15일에 남북 공동 선언을 채택하여 발표하였다(5개 조항으로 구성).
ㄷ. 남북한이 유엔(UN)에 동시 가입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1년 9월의 일이다(1991.9.18).
ㄹ. 7·4 남북 공동 성명을 실천하기 위해 남북 조절 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72년 11월의 일이다(1972.11.30). 이듬해 박정희 정부의 '6·23 선언'과 8월 8일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회담이 중단되었다.
사건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면, ㄹ-ㄷ-ㄱ-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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