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한국사능력검정시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 문제 해설-제51회

Jobs 9 2021. 4. 1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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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01 – 신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

정답> ①

'(가) 시대로 떠나는 시간 여행'이라는 제목 아래 모시는 글로 ' 우리 박물관에서는 농경과 정착 생활이 시작된 (가) 시대 특별전을 마련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덧무늬 토기, 흙으로빚은 사람 얼굴상, 갈돌과 갈판 등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신석기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가락바퀴를 이용하여 실을 뽑았다.

오답 해설>② 주로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에서 산 것은 구석기 시대이다.

③ 지배층의 무덤으로 고인돌을 축조한 것은 청동기 시대이다.

④ 거푸집을 이용하여 세형 동검을 제작한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이다.

⑤ 쟁기, 쇠스랑 등의 철제 농기구를 사용한 것 역시 초기 철기시대이다. 참고로 이때 철제 무기도 만들어 사용하였다(청동기는 의식용 도구로만 사용).

 

 

 Q  02 – 초기 국가, 부여

정답> ①

'이 유물은 중국 지린성 쑹화강 유역의 둥퇀산 유적에서 출토된(가)의 금동제 가면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가)에는 여러 가(加)들이 별도로 관할하는 사출도가 있었으며,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 풍습이 행해졌다고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초기 국가, 부여임을 알 수 있다. 부여는 매년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오답 해설>

② 신지, 읍차라고 불린 지배자가 있었던 나라는 삼한이다.

③ 제사장인 천군과 신성 지역인 소도가 존재한 나라 역시 삼한이다.

④ 대가들이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린 나라는 초기국가, 고구려이다.

⑤ 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소나 말로 변상한 나라는 초기 국가, 동예이다(책화).

 

 

 Q  03 – 신라 지증왕의 업적

정답> ②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신(新)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羅)는 '사방(四方)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또 살펴보건대 옛날부터 국가를 가진 이는 모두 제(帝)나 왕(王)을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 지 지금 22대에 이르기까지 방언으로만 부르고 높이는 호칭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마음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이를 통해 밑줄친 '왕'은 신라의 제22대 왕인 지증왕(재위 500-514)임을 알 수 있다. '신라'라는 국명을 정하고 '왕(王)'의 호칭을 사용하게 된 것은 지증왕 4년인 503년의 일이다.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복속시킨 것은 지증왕 13년인512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병부를 설치한 것은 법흥왕 4년인 517년이고, 율령을 반포한 것은 법흥왕 7년인 520년의 일이다.

③ 대가야를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한 것은 진흥왕 23년인 562년의 일이다.

④ 국학을 설립하여 유학 교육을 진흥시킨 것은 신문왕 2년인682년의 일이다.

⑤ 자장의 건의로 황룡사 구층 목탑을 건립한 것은 선덕 여왕12년인 643년의 일이다.

 

 

 Q  04 – 백제 공주 무령왕릉

정답> ⑤

'학술 대회 안내'라는 제목 아래 '올해는 백제의 고분 중 피장자와 축조 연대가 확인되는 유일한 무덤인 (가) 발굴 50주년이되는 해이다. 우리 학회는 이를 기념하여 '(가) 출토 유물로 본동아시아 문화 교류'를 주제로 학슬 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발표 주제로는 '진묘수(제시된 자신)를 통해 본 도교사상, 금동제 신발의 제작 기법 분석, 금송으로 만든 관을 통해본 일본과의 교류'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백제 공주의 무령왕릉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무령왕릉은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벽돌로 축조하였다(벽돌무덤). 벽화는 발견되지 않았다.

오답 해설>

① 서울 석촌동 고분군에 위치한 것은 백제 한성 시대 고구려계통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② 나무로 곽을 짜고 그 위에 돌을 쌓은 것은 신라의 통일 이전 무덤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도굴이 어려운 구조로 많은 껴묻거리[부장품]가 출토되었다.

③ 국보로 지정된 금동 대향로가 출토된 곳은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이다(1993년 발견, 국보 제287호).

④ 무덤의 둘레돌에 12지 신상을 조각한 것은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의 일이다. 김유신 묘가 대표적이다.

 

 

 Q  05 – 고구려 부흥 운동

정답> ④

'검모잠이 국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당을 배반하고 왕의 외손 안순[안승]을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당 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보내 동주도(東州道) 행군총관으로 삼고 병력을 내어 그들을 토벌하니,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검모잠(?~670)이 고구려 부흥 운동을 펼치다 피살된 것은 670년의 일이다(고구려 부흥 운동은 670~674).평양성이 함락된 668년(고구려 멸망)과 매소성 전투가 벌어진675년 사이의 시기인 '(라)'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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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06 – 원묘국사 의상

정답> ④

'부석사 창건 설화'라는 제목 아래 '당에 유학했던 대사가 공부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자 그를 사모했던 선묘라는 여인이 용으로 변하여 귀국길을 도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신라에 돌아온 대사는 불법을 전파하는 중 자신이 원하는 절을 찾았는데 그곳은 이미 다른 종파의 무리들이 있어 선묘룡이 나타나 공중에서 커다란 바위로 변신하여 절의 지붕 위에서 떨어질듯 말 듯 하자 많은 무리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이러한 연유로 이 절을 '돌이 공중에 떴다'는 의미의 부석사(浮石寺)로 불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친 '대사'는 원묘국사 의상(625~702)임을 알 수 있다. 의상은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에 (경북 영주에서) 부석사를 세웠다. 의상은 또한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어 화엄 사상을 정리하였다(668, 문무왕 8).

오답 해설>

① 향가 모음집인 삼대목이 편찬된 것은 진성 여왕 2년인 888년의 일이다.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② 무애가를 지어 불교 대중화에 힘쓴 이는 화쟁국사 원효(617~686)이다.

③ 화랑도의 규범으로 세속 5계를 제시한 이는 원광(555~638)이다(601, 진평왕 23).

⑤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다녀와서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이는혜초(704~787)이다(727, 성덕왕 26).

 

 

 Q  07 – 원종과 애노의 난

정답> ②

왼쪽 말풍선에 '김헌창의 난을 진압한 녹진에게 대아찬(5관등)의 관등을 내리노라'는 말이 나와 있다. 김헌창의 난이 일어난 것은 (통일) 신라 헌덕왕 14년인 822년의 일이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시무 10조를 바친 최치원을 아찬(6관등)으로 삼겠노라' 는 내용이 나와 있다. 최치원(857~?)이 진성 여왕에게 시무10조를 바친 것은 894년(진성 여왕 8)의 일이다.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에서 봉기한 것은 진성 여왕 3년인 889년의 일이다(사벌주는 지금의 경북 상주)

오답 해설>

① 이차돈(506~527)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신라 법흥왕 14년인 527년의 일이다.

③ 관료전을 지급한 것은 (통일) 신라 신문왕 7년인 687년이고, 녹읍을 폐지한 것은 신문왕 9년인 689년의 일이다.

④ 거칠부(502~579)가 왕명을 받들어 국사를 편찬한 것은 신라 진흥왕 6년인 545년의 일이다.

⑤ 최고 지배자의 칭호가 마립간으로 바뀐 것은 내물왕[내물마립간] 대(재위 356-402)의 일이다(제17대).

 

 

 Q  08 – 발해

정답> ③

해외 소재 우리 문화유산(일본 편)이라는 제목 아래 '사진은 해동성국이라 불렸던 (가)의 함화 4년명 불비상(佛碑像)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상 등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비문이 있다. 비문은 함화 4년에 허왕부(許王府) 관리인 조문휴의 어머니가 불비상을 조성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이를 통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던 (가)의 국왕이 '허왕' 등의 제후를 거느린 황제와 같은 위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발해임을 알 수 있다. 발해는 선왕 대(재위 818-830)에 이르러 5경 15부 62주의 지방 행정 제도를 갖추었다.

오답 해설>

① 9서당 10정의 군사 조직을 운영한 국가는 (통일) 신라이다(687, 신문왕 7).

② 성균관을 설치하여 유교 경전을 교육한 국가는 고려와 조선이다. 고려 공민왕 11년인 1362년에 성균관으로 복구하면서(1308년 충선왕이 복귀하면서 '성균감'을 '성균관'으로 개칭)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 등의 기술학부를 완전히 분리시켜 따로 교육시키게 함으로써, 성균관은 명실공히 유학 교육만을 전담하는 최고 학부가 되었다.

④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한 국가는 신라이다. 상수리 제도는 각 주의 지방 세력의 자제들 중 한 명을 뽑아 중앙에 볼모로 와 있게 함으로써 지방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시행되었다(5세기 이전부터 실시 추정). 고려의 기인 제도, 조선의 경저리 제도로 이어졌다.

⑤ 내신좌평, 위사좌평 등 6좌평의 관제를 마련한 국가는 백제이다. 6좌평 중 내신좌평이 정사암 회의 수장 역할을 겸하면서상좌평으로 불렸다.

 

 

 Q  09 – 익산 미륵사지 5층 석탑

정답> ③

'국보 제11호'로 '전라북도 익산시'에 소재하며 '현존하는 삼국시대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목탑 양식을 반영하여 건립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탑의 중심에는 여러 개의 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아 올린 기둥(심주)이 4층까지 연속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1층 심주석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의 기록을 통해 석탑의 건립 연도가 639년(무왕 40)으로명확하게 밝혀졌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백제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임을 알 수 있다(선지 ③은 2018년 6월에 복원된 것임).

오답 해설>

① 백제의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다(7세기 제작)

② 신라의 경주 불국사에 위치한 다보탑이다(751, 경덕왕 10).

④ 발해의 영광탑이다. 중국 지린성 창바이조선족자치현 서북쪽탑산에 위치해 있다. 8~10세기에 건립된 발해 시대의 누각식전탑(모전 석탑)으로 창바이 영광탑 또는 발해 전탑으로도 불린다. 1908년 장펑타이라는 청의 관리가 이 탑에 대해 공자 사당의 영광전(靈光殿)처럼 오랜 세월 속에서도 의연하게 남아있다고 평한 뒤로 영광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⑤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이다(고려 전기, 백제계 석탑, 국보 제289호).

 

 

 Q  10 – 후삼국 통일 전쟁

정답> ④

(가)에 '날이 밝아오자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곡식더미 위에 앉히고는 군신의 예를 행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사람을 시켜 말을 달리며, 왕공(王公)께서 이미 의로운 깃발을 들어 올리셨다 라고 외치게 하였다. ····· 궁예가 이 소식을 듣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미복(微服)* 차림으로 북문을 빠져나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왕건이 신하들의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는 일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려 건국, 918).* 미복(微服): 지위가 높은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남의 눈에 잘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입는 남루한 옷(나)에는 '여름 6월 견훤이 막내아들 능예와 딸 애복, 애첩 고비 등과 더불어 나주로 달아나 입조를 요청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도착하자 그를 상보(尙父)라 일컫고 남궁(南宮)을 객관(客館)으로 주었다. 지위를 백관의 위에 두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견훤이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자식들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해) 왕건에게 투항한 일과 관련된 것임을 알수 있다(935).(고려군과 후백제군 사이에) 공산 전투가 벌어진 것은 927년의 일이다. 이때 고려군은 후백제군에게 크게 패하였다[개국 공신이자 충신인 신숭겸(?~927)이 왕건을 탈출시키려고 대신 전사). 공산은 지금의 대구 팔공산 일대이다.

오답 해설>

① 견훤(867~936)이 완산주(지금의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것은 900년의 일이다.

② (왕의 장인인) 김흠돌(?~681)이 반란을 도모한 것은 (통일) 신라 신문왕 원년인 681년의 일이다.

③ 장보고(?~846)가 청해진을 설치한 것은 (통일) 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의 일이다[~851(문성왕 13)].

⑤ (견훤의 장자인) 신검(?~?)이 일리천에서 고려군에게 패배한 것은 936년의 일이다(936.9). 이로써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Q  11 – 고려(도병마사)

정답> ③

'목종 5년(1002)에 6위의 직원을 마련하여 두었는데, 뒤에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의 2군을 설치하고, 6위의 위에 있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뒤에 또 중방을 설치하고, 2군·6위의 상장군과 대장군이 모두 회합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의 중앙군인 2군 6위와 중방의 설치에 대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고관들의 합좌 기구인 도병마사가 설치된 것은 고려 성종 8년인 989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중정대를 두어 관리를 감찰한 국가는 발해이다(즉 중정대는 발해의 감찰 기관).

② 9주 5소경의 지방 제도를 운영한 국가는 (통일) 신라이다(685, 신문왕 5).

④ 인재를 등용하기 위하여 독서삼품과를 시행한 국가 역시(통일) 신라이다(788, 원성왕 4).

⑤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이 지배층을 이룬 국가는 발해이다.

 

 

 Q  12 – 여진에 대한 고려의 대응(별무반)

정답> ⑤’

이 그림은 윤관이 (가)을/를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설치한 후고려의 경계를 알리는 비석을 세우는 장면을 그린 척경입비도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여진'임을 알 수 있다. 윤관(?~1111)은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 등으로 구성된 별무반을 조직하였다(1104, 숙종 9).

오답 해설>

① [최무선(1325~1395)의 건의로] 화통도감을 두어 화포를제작한 것은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의 일이다. 화포를 제작한것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서이다.

② 박위(?~1398)를 파견하여 근거지를 토벌한 대상 역시 왜구이다(1389, 고려 창왕 원년). 이후 조선 태조 5년인 1396년(김사형), 조선 세종 원년인 1419년(이종무) 때도 쓰시마섬을 정벌하였다.

③ 연개소문(?~665)을 보내어 천리장성을 축조하게 한 것은중국 당(唐)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631(영류왕14)~647(보장왕 6)].

④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을 간행한 것은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1236(고종 23)~1251(고종 38)].

 

 

 Q  13 – 고려 시대의 (경제) 모습

정답> ④

'주전도감에서 해동통보 발행'이라는 제목 아래 '일전에 왕께서 화폐를 주조하여 재추와 문무 관료 및 군인에게 지급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이에 따라 주전도감에서 해동통보를 발행하였다' 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 숙종에 의해 해동통보가 발행된 것은 재위 7년인 1102년의 일이다. 벽란도는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국제 무역항이다. 대송 무역의 거점이었고, 아라비아 상인들이 왕래하였다.

오답 해설>

① 구황촬요는 조선 명종 9년(1554)에 간행된 일종의 구황서(救荒書)이다(흉년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책).

② 시장을 감독하는 동시전이 설치된 것은 신라 지증왕 대의일이다(509, 지증왕 10).

③ 초량 왜관이 설치된 것은 조선 숙종 4년인 1678년의 일이다. 동래 상인인 내상이 왜관 개시를 통해 대일 무역에 종사하였다.

⑤ 낙랑군(과 왜 등)에 덩이쇠를 수출한 나라는 초기 국가, 변한이다.

 

 

 Q  14 – 정방[만적의 난]

정답> ⑤

'만적 등 6명이 북산에서 땔나무를 하다가, 공사(公私)의 노복들을 불러 모아 모의하며 말하기를, 국가에서 경인년과 계사년 이래로 높은 관직도 천예(賤隸)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상(將相)에 어찌 씨가 있겠는가? 때가 되면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라고 어찌 뼈 빠지게 일만 하면서 채찍 아래에서 고통만 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고려 신종 원년인 1198년에 일어난 만적의 난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제시된 자료에서 '경인년'은 무신 정변이 일어난 1170년(의종 24)을 가리키며, '계사년'은 김보당의 난이 일어난 1173년(명종 3)을 가리킨다. 최우가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한 것은 고려 고종 12년인 1225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묘청이 서경 천도를 주장하여 난을 일으킨 것은 고려 인종13년인 1135년의 일이다.

② 쌍기가 과거제의 시행을 건의하여 과거제가 처음으로 실시된 것은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의 일이다.

③ 왕실의 외척인 이자겸이 난을 일으킨 것은 고려 인종 4년인1126년의 일이다.

④ 정중부가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차지한 것은 고려 의종 24년인 1170년의 일이다(무신 정변).

 

 

 Q  15 – 이성계(위화도 회군)

정답> ③

'이것은 황산 대첩비의 탁본이다. 비문에는 당시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였던 (가)이/가 고려군을 이끌고 전라도 황산에서 적장 아지발도를 사살하는 등 왜구를 크게 물리친 일이 기록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성계(1335~1408)임을 알 수 있다[황산대첩(1380, 고려 우왕 6)].이성계는 고려 우왕 14년인 1388년 (요동 정벌을 위해 출정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하였다(위화도 회군).

오답 해설>

① 처인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친 인물은 김윤후(?~?)이다[몽골의 제2차 침입(1232, 고종 19)].

②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한 인물은 강조(?~1010)이다[강조의 정변, 1009(목종 12)].

④ 교정별감이 되어 국정 전반을 장악한 인물은 최충헌(1149~1219)이다(1209, 희종 5).

⑤ 전민변정도감의 책임자로서 개혁을 이끈 인물은 신돈(?~1371)이다(1366, 공민왕 15).

 

 

 Q  16 - (불일)보조국사 지눌

정답> ③

'이 목판의 글은 '불일보조국사'라는 시호를 받은 그가 지은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는 화두를 바탕으로 수행하는 참선법을 강조하고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그'는 (불일)보조국사 지눌(1158~1210)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지눌은 정혜결사를 통해 불교 개혁에 앞장섰다.

오답 해설>

① 화왕계를 지어 국왕에게 바친 인물은 원효의 아들로 알려진 설총(655~?)이다.

② 천태종을 개창하여 불교 통합에 힘쓴 인물은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다(1097, 숙종 2).

④ 심성의 도야를 강조한 유불 일치설을 제창한 인물은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이다.

⑤ 불교 관련 설화를 중심으로 삼국유사를 저술한 인물은 보각국사 일연(1206~1289)이다(1285, 충렬왕 11).

 

 

 Q  17 – 제왕운기

정답> ③

왼쪽의 말풍선에 '이승휴가 지은 이 책의 상권에는 중국의 역사가, 하권에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오른쪽의 말풍선에는 '이 책은 중국과 구별되는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책'은 이승휴(1224~1300)의 제왕운기임을 알 수 있다(1287, 충렬왕 13). 제왕운기에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오답 해설>

①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책은 영재 유득공(1748~1809)의 발해고이다(1784, 조선 정조 8).

② 사초와 시정기를 바탕으로 편찬된 책은 '실록'이다.

④ (충북)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본으로 간행된 책은 직지심체요절이다(1377, 우왕 3).

⑤ 유교 사관에 입각하여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한 책은 삼국사기이다(1145, 인종 23).

 

 

 Q  18 – 고려의 성리학(자)

정답> ②

'인물로 보는 고려의 성리학'이라는 제목 아래 '우리 박물관에서는 인물로 보는 고려의 성리학을 주제로 한국사를 이해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강좌 순서로, '제1강 안향, 제2강 이제현, 제3강 이색, 제4강 정몽주, 제5강 정도전'이 나와 있다. (원의)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유한 인물은 익재[역옹]이제현(1287~1367)이다. (일종의 독서당인) 만권당은 상왕이 된 고려 충선왕이 원의 연경에 세웠다(1314, 충숙왕 원년).

오답 해설>

① 봉사 10조를 올려 시정 개혁을 제안한 인물은 (안향이 아니라) 최충헌(1149~1219)이다(1196, 고려 명종 26).

③ 9재 학당을 세워 유학 교육에 힘쓴 인물은 (이색이 아니라)최충(984~1068)이다(1053, 고려 문종 7).

④ 경제문감을 저술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한 인물은(정몽주가 아니라) 삼봉 정도전(1342~1398)이다(1395, 태조4).

⑤ 성학십도에서 군주의 도를 도식으로 설명한 인물은 (정도전이 아니라) 퇴계 이황(1501~1570)이다(1568, 선조 원년).

 

 

 Q  19 – 세조 재위 기간의 사실

정답> ⑤

'육조 직계제 부활하다'는 제목 아래 '계유년에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후 즉위한 왕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고자 육조 직계제를 부활시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번 조치는 형조의 사형수 판결을 제외한 육조의 서무를 직접 왕에게 보고하도록 한 것으로,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육조 직계제가 시행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계유정난(1453, 단종 원년)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즉위한 세조에 의해 단행된 육조 직계제 부활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1455, 세조 원년).현직 관리에게만 수조지를 지급하는 직전법이 시행된 것은 세조 12년인 1466년의 일이다(조선 제7대 국왕인 세조의 재위기간은 1455년에서 1468년까지). 참고로 태종 14년인 1414년에 육조 직계제가 처음 시행되었다가 세종 18년인 1436년 다시 채택됨으로써 폐지된 바 있다.

오답 해설>

① 주자소가 설치되어 계미자가 주조된 것은 태종 3년인 1403년의 일이다.

②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난 것은 연산군 4년인 1498년의 일이다.

③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대전회통이 편찬된 것은 정조 9년인 1785년의 일이다.

④ 제한된 범위의 무역을 허용한 계해약조가 체결된 것은 세종25년인 1443년의 일이다.

 

 

 

 Q  20 – 승정원일기

정답> ②

국보 제303호로, 2001년에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사실이제시되어 있다. '조선 시대 왕명의 출납, 행정 사무, 의례 등에 관해 기록한 일기로, 편년체로 기록되었으며, 승지가 이를 국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아 최종 완성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국왕과 신하들의 국정 논의 내용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어 실록 편찬의 기본 자료로도 활용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승정원일기는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에서 작성하였다.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로, 임진왜란 때 이전의 기록이 소실되어 인조 원년인 1623년부터 고종 31년인 1894년까지 270여 년간의 일기만이 남아 있다.

오답 해설>

① 비국* 등록이라고도 불린 문화유산은 비변사등록이다. 비변사등록은 조선 중·후기의 국가 최고 회의 기관이었던 비변사의 활동에 대한 일기체 기록이다(국보 제152호). 임진왜란 당시다른 기록과 함께 소실되어 이전의 것은 사라지고, 현재는 광해군 9년인 1617년부터 고종 29년인 1892년까지 총 276년 간의기록만 남아 있다. * 비변사(備邊司)를 비국(備局)·묘당(廟堂)·주사(籌司)라고도 하였다.

③ 세가, 지, 열전 등으로 구성된 문화유산(역사서)은 고려사이다(1451, 문종 원년).

④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1145, 인종 23).

⑤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쓴 일기에서 유래한 문화유산은 일성록이다(정조의 존현각일기에서 유래, 영조 36년인 1760년부터 기록되기 시작).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일기로 대한 제국이 망한 1910년까지 약 150년간 기록되었다.

 

 

 Q  21 – 유향소

정답> ①

'교활한 아전이 여러 가지로 폐단을 일으키는 것은 수령이 듣고보는 것으로써 다 감찰할 수가 없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중앙의 경재소와 지방의 (가)이/가 서로 들은 대로 규찰하여 교활한 아전을 억제시키고 향촌의 풍속을 유지시킨다면 풍속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유향소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수 있다. 또 출처가 『성종실록』인 것에서 성종 대의 '유향소복립 운동'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1488, 성종 19).** 세조 14년인 1468년에 폐지되었다. 태조 6년인 1406년에 유향소가폐지되었다가 새종 10년인 1438년에 부활된 것이 세조 때에 다시 폐지된 것이다(즉 세종 대도 '유향소 복립 운동'이 있었음).유향소는 선발된 좌수와 별감에 의해 운영되었다.

오답 해설>

② 지방의 행정·사법·군사권을 행사한 기구는 수령이다.

③ 5품 이하의 관원에 대한 서경권을 가진 기구는 사헌부와 사간원이다.

④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의 건의로 혁파된 기구는 소격서이다. 소격서는 도교의 보존과 도교 의식을 위하여 설치된 기관으로조선 중종 13년인 1518년에 폐지되었다(이후 복설되었으나 임진왜란 뒤 다시 폐지).

⑤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나 훈도가 파견된 기구는 향교이다.

 

 

 Q  22 – 율곡 이이

정답> ⑤

'이곳 파주 자운 서원에는 (가)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는 군주가 수양해야 할 덕목과 지식을 담은 성학집요를 집필하여 임금에게 바쳤으며, 해주 향약 등을 시행하였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율곡 이이(1536~1584)임을 알 수 있다(성학집요를 집필하여 바친 것은 선조 8년인 1575년의 일). 이이가 다양한 개혁 방안을 담은 동호문답을 저술한 것은 선조2년인 1569년의 일이다(그 외 만언봉사, 격몽요결 등 다수 저술).

오답 해설>

① 불씨잡변을 지어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불교(의 교리)를 비판한 인물은 삼봉 정도전(1342~1398)이다(1394, 태조 3).

② 노론의 영수로 북벌론을 주장한 인물은 우암 송시열이다(1607~1689)이다. 효종 즉위년인 1649년, 효종에게 올린 기축봉사에서 송시열은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讎雪恥)를 주장하였다.

③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 학파를 형성한 인물은 하곡 정제두(1649~1736)이다.

④ (금석과안록에서)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처음으로) 고증한 인물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이다(1852, 철종3).

 

 

 Q  23 – 명량 대첩

정답> ①

'조·명 연합군, 평양성을 탈환하다'는 제목 아래 '며칠 전 우리 군사들이 명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으로부터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번 승리는 불리했던 전세를 역전시킬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1월의 일이다. 이순신(1545~1598)이 명량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선조 30년인 1597년 9월의 일이다(명량 대첩).

오답 해설>

② 최무선(1325~1395)이 진포에서 왜구를 격퇴한 것은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의 일이다.

③ 신립(1546~1592)이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과) 싸운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의 일이다.

④ 김종서(1383~1453)가 6진을 개척하여 영토를 확장한 것은 세종 16년인 1434년부터의 일이다(이후 10여 년에 걸쳐 개척).

⑤ 배중손(?~1271)이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에서 항전한 것은 고려 원종 11년에서 12년까지의 일이다(1270.6~1271.5).

 

 

 Q  24 – 인조반정

정답> ②

(가)에 '양사(兩司)가 합계하기를, 영창 대군 이의(李㼁)를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는 설이 이미 역적의 입에서 나왔는데 이에 대해 자복(自服)한 역적만도 한두 명에 그치지 않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왕법은 지극히 엄한 만큼 결코 용서해주기 어려우니 유사로 하여금 법대로 적용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광해군 재위 당시 대북파가 영창 대군과 반대파인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계축옥사)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있다(1613, 광해군 5). 이로 인해 영창 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1562~1613)이 반역죄로 사사되고, 영창 대군도 폐서인(廢庶人)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나)에는 '앞서 왕에게 이괄 부자가 역적의 우두머리라고 고해바친 자가 있었다. 하지만 임금은, 필시 반역은 아닐 것이다라고 하면서도, 이괄의 아들인 이전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전은 그때 이괄의 군영에 있었고 이괄은 결국 금부도사 등을 죽이고 여러 장수들을 위협하여 난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조선 인조 2년인 1624년에 일어난 이괄(1587~1624)의 난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인이 (광해군을 폐위하는) 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것은 1623년의 일이다(인조반정).

오답 해설>

①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이 조직된 것은 정조 17년인1793년이다.

③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옥사가 발생한 것은 선조 22년인 1589년의 일이다(기축옥사).

④ 허적과 윤휴 등 남인들이 대거 축출된 것은 숙종 6년의 일이다(경신환국).

⑤ (인조의 계비인) 자의 대비(장렬 왕후, 1624~1688)의 복상 문제로 예송이 전개된 것은 현종 대의 일이다. 1차 예송(1659, 기해예송) 때는 서인의 1년설(기년복)이, 2차 예송(1674, 갑인예송)때는 남인의 1년설(기년복)이 받아들여졌다.

 

 

 Q  25 – 조선 숙종이 추진한 정책

정답> ①

'명릉*은 이 왕과 왕비인 인현 왕후의 무덤이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이어 대화 창에 '경신환국 등 여러 차례 환국을 통해서정국을 주도하였다는 점', '대동법을 황해도까지 확대 시행하였다는 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친 '이 왕'은 조선의 제19대 국왕인 숙종(재위 1674-1720)임을 알 수 있다. 숙종 3년(1677)에 경상도, 숙종 34년(1708)에 황해도에 대동법을 확대시행함으로써 비로소 대동법이 전국에 걸쳐 시행되었다(1608~1708).* 명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 안에 있다. 수도 방어를 위하여 금위영이 창설된 것은 숙종 8년인 1682년의 일이다. 이로써 5군영 체제가 완성되었다. 오답 해설>② 국가의 통치 규범인 경국대전이 반포된 것은 성종 16년인1485년의 일이다. ③ 청의 요청으로 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를 파견한 것은 효종대(재위 1649-1659)이다. 효종 5년인 1654년(변급), 효종 9년인 1658년(신류) 두 차례 파견되었다. ④ 농민들의 군역 부담을 줄여주고자 균역법이 시행된 것은 영조 26년인 1750년의 일이다. ⑤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초계문신제가 실시된 것은 정조 5년인 1781년의 일이다.

 

 

 Q  26 –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

정답> ①

왼쪽 말풍선에 '며칠 전 전하께서 형조와 한성부에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철폐하고 이를 어길 경우 처벌하라는 지시를 내리셨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나도 들었네. 다만 육의전은 이번 조치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말은 조선 정조 15년인 1791년에 단행된 신해통공임을 알 수 있다. 고액 화폐인 활구가 주조된 것은 고려 숙종 6년인 1101년의 일이다. '은병'이라고도 한다.

오답 해설>

② 담배, 면화 등 상품 작물이 재배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③ (대동법의 시행으로) 관청에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貢人)이활동한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④ 송상, 만상이 대청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것도 조선 후기의일이다.

⑤ 광산을 전문적으로 경영하는 덕대(德大)가 등장한 것도 조선 후기이다

 

 

 Q  27 – 혜원 신윤복

정답> ④

왼쪽 말풍선에 '이 그림은 조선 후기 풍속화가 (가)이/가 그린 미인도인가요?'라는 질문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맞아요. (가)은/는 이 그림 외에도 양반들의 풍류와 남녀 사이의 애정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어요'라는 대답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은/는 혜원 신윤복(1758~?)임을 알 수 있다. 제시된 선지 중에서 신윤복의 작품은 ④(작품명: 월하정인)뿐이다.

오답 해설>

①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작품이다(씨름도).

② 인재 강희안(1417~1464)의 고사관수도이다(조선 전기).

③ 김득신(1754~1822)의 파적도(야묘도추)이다.

⑤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영통동구도이다.

 

 

 Q  28 – 진주 농민 봉기

정답> ④경상도 안핵사 박규수가 아뢴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금번 진주의 백성들이 변란을 일으킨 것은 오로지 전 경상 우병사 백낙신이 탐욕을 부려 수탈하였기 때문이며 변란을 격발시킨 죄를 물어 그를 엄중히 처결하도록 하소서'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친 '변란'은 철종 13년인 1862년에 일어난 진주 농민 봉기임을 알 수 있다. 단성, 진주에서의 농민 봉기는 이후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임술 농민 봉기). 진주 농민 봉기 발생의 주된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었기 때문에 삼정이정청이 설치되었다.

오답 해설>

① 홍경래(1772~1812)가 주도하여 봉기한 것은 순조 11년인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다(1811.12).

② 청군이 파병되는 결과를 가져온 '변란'은 임오군란이다(1882.6). 갑신정변 때는 청군이 파병된 것이 아니라 주둔해있었다.

③ 흥선 대원군의 집권 시기는 1863년 12월에서 1873년 11월까지이다.

⑤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기치로 내건 것은 동학 농민 운동이다(1894).

 

 

 Q  29 – 강화도(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정답> ⑤

'답사 계획서'라는 제목 아래 주제와 일시, 경로가 제시되어 있다. 주제는 '섬에서 만나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과 저항'으로 나와 있고, 경로는 '외규장각 → 연무당 옛터 → 광성보 → 정족산성 → 초지진'으로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주제 및 경로는 모두 강화도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영국군이 불법으로 점령한 곳은 초지진이 아니라 거문도이다(1885.4~1887.2). 초지진을 공격했던 군대는 신미양요 떄의 미군이다(1871.5).

오답 해설>

① 프랑스군은 병인양요 때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를 약탈하였다(1866.10). 옳은 연결이다. ② 강화도 연무당은 조일 수호 조규가 체결된 곳이다(1876.2). 옳은 연결이다.

③ 광성보는 신미양요 때 어재연 부대가 결사 항전한 곳이다(1871.5). 옳은 연결이다.

④ 정족산성은 병인양요 때 양헌수 부대가 적군(프랑스군)을 물리친 곳이다. 옳은 연결이다.

 

 

 Q  30 – 조미 수호 통상 조약과 조일 통상 장정

정답> ②

(가)의 제5관에 '미국 상인과 상선이 조선에 와서 무역을 할 때 입출항하는 화물은 모두 세금을 바쳐야 하며, 세금을 거두는 권한은 조선이 자주적으로 행사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관세자주권을 명시한 조항으로 1882년 5월 미국과 체결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임을 알 수 있다.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 때는 빠졌던 관세 자주권을 이로써 회복하였다.

(나)의 제37관에는 '조선국에서 가뭄과 홍수, 전쟁 등의 일로국내에 양식이 부족할 것을 우려하여 일시 쌀 수출을 금지하려고 할 때에는 1개월 전에 지방관이 일본 영사관에 통지하고, 미리 그 기간을 항구에 있는 일본 상인들에게 전달하여 일률적으로 준수하는 데 편리하게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방곡령을 명시한 조항으로 1883년 7월 일본과 체결한 조일 통상 장정임을 알 수 있다. ㄱ.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제3관은 최혜국 대우와 관련된 내용이다. ㄷ. 조일 통상 장정 제37관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방곡령 시행에 대한 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오답 해설>

ㄴ. 갑신정변의 영향으로 체결된 조약으로는 조선과 일본과 맺은 한성 조약을 들 수 있다(1885.1). 또 청과 일본은 별도로톈진 조약을 맺었다(1885.4).

ㄹ. 재정 고문을 두도록 하는 조항을 담고 있는 조약은 1904년8월에 대한 제국과 일본이 맺은 제1차 한일 협약이다(외교 고문도 포함, 고문 정치 시작).

 

 

 Q  31 - 보빙사

정답> ⑤

'(가), 서양의 근대 문물을 직접 목격하다'는 제목 아래 기획 의도와 장면별 구성이 제시되어 있다. 기획 의도로는 '미국 공사의 부임에 대한 답례로 파견된 (가)의 발자취를 통해 근대 문물을 시찰한 과정을 살펴본다'가 나와 있고, 장면별 구성으로는 '#1.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워싱턴에 도착하다, #2. 뉴욕에서미국 대통령 아서를 접견하다, #3. 보스턴 만국 박람회를 참관하다, #4. 병원, 전신 회사, 우체국 등을 시찰하다'가 나와 있다. 보빙사는 전권대신 민영익(1860~1914)과 부대신 홍영식(1855~1884), 종사관 서광범(1859~1897) 등으로 구성되었다(1883.7.16.~1884.5.31).

오답 해설>

① 수신사라는 이름으로 보내진 사절단으로는 김기수(1832~?)[1차]와 김홍집(1842~1896)[2차]이 있다.

② 조선책략을 들여와 국내에 소개한 이는 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이다(1880.9).

③ (청의 근대적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국에서 무기 제조 기술을 배우고 돌아온 사절단은 영선사이다(1881.9~1882.11).

④ 개화 반대 여론을 의식하여 (일본에) 비밀리에 파견된 사절단은 조사 시찰단이다(1881.4.10~윤7.2). 조사 시찰단은 사실상 제3차 수신사라 볼 수 있다.

 

 

 Q  32 - 임오군란

정답> ④

맨 왼쪽 말풍선에 '개화 정책에 대한 불만과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 대우로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해 말해 보자'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가운데 말풍선에는 '구식 군인들이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도시 하층민도 가담했다'는 말이 나와있다. 마지막으로 맨 오른쪽 말풍선에는 '고종은 흥선 대원군에게 사태 수습을 맡겼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 이 사건'은 고종 19년인 1882년 6월 9일(음력)에 일어난 임오군란임을 알 수 있다(~7월 13일까지 진행). 임오군란 결과 조선과 일본은 같은 해 8월에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였고, 여기에는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할 수 있게 허락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이 외 배상금 지급, 일본에 사죄단파견 등).

오답 해설>

① 김옥균(1851~1894)과 박영효(1861~1939) 등의 급진[변법] 개화파가 주도한 사건은 갑신정변이다(1884.12).

② 입헌 군주제 수립을 목표로 전개한 것으로는 독립협회의 자강 개혁 운동을 들 수 있다. 임오군란에서는 입헌 군주제 수립과 관련된 어떠한 주장도 제기되지 않았다. 참고로 이후 애국계몽 운동 단체 중에 입헌 군주제 수립을 목적으로 창설된 '헌정 연구회'가 있다(1905.5).

③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된 것은 고종 17년인 1880년 12월의일이다.

⑤ 전국 각지에 척화비가 건립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신미양요이다(1871.5).

 

 

 Q  33 – 동학 농민 운동

정답> ③

왼쪽 그림에 '이제 화약을 체결하였으니 전주성에서 해산하시오'라는 말과 '알겠소. 대신 우리 농민군의 안전을 보장해 주시오' 라는 말이 나와 있다(전주 화약, 1894.5.8, 이하 모두 음력).오른쪽 그림에는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였으니 왜적을 몰아내는 데 온 힘을 다합시다'(제2차 봉기, 1894.9.18)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동학 농민 운동에 관한 것임을 알수 있다. 일본이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한 것은 1894년 7월 23일의 일이다(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

오답 해설>

① 농민군이 고부 백산에서 4대 강령을 발표한 것은 1894년 3월 25일~26일의 일이다(고부 백산 대회).

② (공주) 우금치에서 농민군과 일본군이 격전을 벌인 것은 1894년 11월 15일부터 일주일 간의 일이다(공주 우금치 전투).

④ (충북) 보은에서 교조 신원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린 것은1893년 3월의 일이다.

⑤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해 (전북의) 고부(현 정읍)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난 것은 1894년 1월의 일이다.

 

 

 Q  34 –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정답> ①

(가)의 위 1에 '문벌, 양반과 상인들의 등급을 없애고 귀천에 관계없이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아래의 1에는 '공노비와 사노비에 관한 법을 일체 혁파하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신분제를 혁파한다는 내용으로, 이를 통해 '(가)'는 제1차 갑오개혁 때의 일임을 알 수 있다(1894.7~1894.12).

(나)의 위 1에 '청나라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 버리고 자주 독립의 기초를 튼튼히 세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아래의 1에는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는 반드시 분리시켜 서로 뒤섞지 않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나)'는 제2차 갑오개혁의 방향을 제시한 '홍범 14조'임을 알 수 있다(1895.1).

(다)에는 '대군주 폐하께서 내리신 조칙에서, 짐이 신민(臣民)에앞서 머리카락을 자르니, 너희들은 짐의 뜻을 잘 본받아 만국과 나란히 서는 대업을 이루라라고 하셨다. 을미개혁 때(1895.8~1896.2) 시행된 단발령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1895.12).

이상을 발표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나)-(다)'가 된다.

 

 

 Q  35 – 광무개혁(원수부, 지계)

정답> ②

'이제 지계사무(地契事務)를 강원도에서 실시하여 영동은 울진군부터 시작하고, 영서는 춘천군부터 시작하여 토지를 개량(改量)한 후 관계(官契)를 발급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전답가사(田畓家舍)를 강원도에 두고 있는 인민은 구권(舊券)을 가지고 음력 8월 15일 내로 토지가 있는 군에 가서 관계로 바꾸어 가시기 바랍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광무'와 '지계아문'이 제시되어 있는 바 이를 통해 밑줄친 '관계(官契)'는 곧 광무개혁에서 양전 사업을 펼치면서 발급한 지계(地契)임을 알 수 있다(1899~1904).

원수부가 설치된 것은1899년 6월의 일이다.

광무개혁 시기는 보통 고종 33년(1896)에서 광무 8년(1904)까지로 본다.

오답 해설>

① 영남만인소가 올라온 것은 1881년(고종 18) 2월의 일이다.

③ 남연군 묘가 독일 상인 오페르트 일당에게 도굴당할 뻔한일이 발생한 것은 1868년(고종 5) 5월이다.

④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서 관민들에 의해 불텨워진 것은 1866년(고종 3) 7월의 일이다.

⑤ 통신사가 일본으로 파견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태종13년(1413)을 시작으로 순조 11년(1811)까지 모두 20회(조선전기 8회, 조선 후기 12회) 파견되었다.

참고로 일본 막부의 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은 일본 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Q  36 – 관민 공동회(중추원 신관제)

정답> ⑤

제1조에 '중추원은 아래에 열거한 사항을 심사하고 의정(議定)하는 곳으로 할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1. 법률, 칙령의 제정과 폐지 혹은 개정하는 것에 관한 사항, 2. 의정부에서 토의를 거쳐 임금에게 상주(上奏)하는 일체 사항'이 나와 있다. 제3조에는 '의장은 대황제 폐하가 글로 칙수(勅授)하고, 부의장은 중추원에서 공천에 따라 폐하가 칙수하며, 의관은 그 절반은 정부에서 나라에 공로가 있었던 사람을 회의에서 상주하여 추천하고, 그 절반은 인민협회(人民協會) 중에서 27세 이상되는 사람이 정치, 법률, 학식에 통달한 자를 투표해서 선거할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1898년10월 개최된 관민 공동회 결과를 반영하여 당시 의정부 참정이었던 죽천 박정양(1841~1905)이 같은 해 11월 4일에 반포한'(의회식) 중추원 신관제'임을 알 수 있다. 관민 공동회 결과 헌의 6조가 결의된 바 있다.

오답 해설>

① 105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신민회의 국내 활동이 사실상 중단되었다(1911.9).

② (흥선 대원군에 의해) 사창제가 실시된 것은 1867년(고종4)의 일이다.

③ 13도 창의군이 활동한 것은 1908년 1월의 일이다(서울 진공 작전).

④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가 파견된 것은 1907년 4월의 일이다(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여 7월까지 활동).

 

 

 Q  37 – 하와이의 민족 운동

정답> ⑤

'사진은 제물포에서 (가)(으)로 수차례에 걸쳐 이민자를 수송한 갤릭호와 이민자 여권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1902년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자로 첫 이민자 백여 명이 떠난 이후 3년간 약 7천 명이 넘는 한국인이 (가)에 이주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미주의 하와이임을 알 수 있다. 하와이에서 박용만(1881~1928)의 주도로 대조선 국민군단이 조직된 것은 1914년 6월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한인 애국단원인 이봉창이 일왕이 탄 마차에 폭탄을 투척한 곳인 일본 도쿄이다(1932.1.8.).

② 한인 자치 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된 곳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이다(1911.12).

③ 민족 교육을 위해 (이상설 등에 의해) 서전서숙을 설립한 곳은 북간도(동만주) 용정이다(1906.8).

④ 독립군 양성을 위해 신흥 강습소가 세워진 곳은 서간도(남만주)이다(1911.6)

 

 

 Q  38 - 을사늑약

정답> ③

'국권 침탈의 아픔이 서린 중명전'이라는 제목 아래 소개글이 제시되어 있다. 소개글에는 '지상 2층 지하 1층의 붉은 벽돌 건물인 중명전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하였는데, 황실의도서관으로 사용되다가 1904년 경운궁의 대화재 이후 고종 황제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곳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가)의 체결을 강요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1905년 11월 17일에 강요된 '을사늑약'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고종 황제는 퇴위 후 계속 경운궁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때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을사늑약 제3조에는 '1명의 통감'을 둔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따라 이듬해인 1906년 2월 1일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오답 해설>

① 아관 파천이 일어난 것은 1896년 2월의 일이다(1896.2.11). 그 전해에 일어났던 을미사변이 직접적인 배경이라 볼 수 있다(고종의 신변 불안).

② 청일 전쟁 발발의 원인이 된 것은 동학 농민 운동이다. 갑신정변 종결 후 청과 일본이 맺은 톈진 조약이 '출병'의 계기[빌미]로 작용하였다(1885.4).

④ 대한 제국의 군대 해산을 규정한 것은 1907년 7월 24일에체결된 한일 신협약이다('정미 7조약'이라고도 함).

⑤ 천주교 포교를 허용하는 조항이 들어간 것은 조불 수호 통상 조약이다(1886.5)

 

 

 Q  39 –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

정답> ③

'이 정부는 지도에 표시된 충칭으로 근거지를 옮기며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후 이 정부가 전개한 활동에 대해 말해 보자'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을 알 수 있다. 중국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이 창설된 것은 1940년 9월의 일이다(1940.9.17.).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삼균주의를 기초로 하는 건국 강령을 공포한 것은 1941년 11월의 일이다(1941.11.28.).

오답 해설>

① (북로 군정서군 중심의 독립군 연합 부대가)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 것은 1920년 10월의 일이다.

② 소련 연해주에서 해조신문이 발간된 것은 1908년 2월의 일이다.

④ 신민회는 평북 정주에 오산 학교를, 평양에 대성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을 전개하였다(각 1907년 12월/1908년 9월).

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임시 사료 편찬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한 것은 1919년 9월의 일이다(1919.9.23).

 

 

 Q  40 – 1910년대의 사실(범죄즉결례)

정답> ④

제2조로 '즉결은 정식 재판을 하지 않으며 피고인의 진술을 듣고 증빙을 취조한 후 곧바로 언도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제11조로 '제8조, 제9조에 의한 유치 일수는 구류의형기에 산입하고, 태형의 언도를 받은 자에 대하여는 1일을 태5로 절산*하여 태 수에 산입하며, 벌금 또는 과료의 언도를 받은 자에 대하여는 1일을 1원으로 절산하여 그 금액에 산입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한일 병탄 직후인 1910년 12월, 제령 제10호로 제정된 '범죄즉결례'임을 알 수 있다. * 절산(折算): 타산(打算)과 같은 말로, '이해 관계를 셈쳐 본다'. '이득과 손실을 헤아려 본다'는 뜻이다. 일제는 1910년대 내내 강압적 통치를 목적으로 헌병 경찰제를 실시하였다.

오답 해설>

① 박문국을 설치하여 한성순보를 발행한 것은 고종 20년인 1883년 10월의 일이다.

② 황국 중앙 총상회가 상권 수호 운동을 주도한 것은 광무 2년인 1898년 7월의 일이다.

③ 근대적 개혁 추진을 위해 군국기무처가 설치된 것은 고종 31년인 1894년 6월 25일의 일이다(~1894.12.17.).

⑤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된 것은 광무 11년인 1907년 2월의 일이다(~1908.7).

 

 

 Q  41 – 기미 독립 선언서(3·1 운동)

정답> ⑤

'조선 청년 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를 쟁취한 세계 모든 나라 앞에 독립을 성취할 것을 선언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우리 민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민족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나, 만일 이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해 뜨거운 피를 흘릴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재일본 동경 조선 청년 독립단 대표 11인'의 명의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1919년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에 의해 발표된 '2·8독립 선언서'임을 알 수 있다. 민족 대표 33인 명의의 독립 선언서가 발표된 것은 1919년 3월 1일의 일이다(기미 독립 선언서).

오답 해설>

① 박상진(1884~1921) 등이 (대구에서) 대한 광복회를 결성한 것은 1915년 7월의 일이다.

② 황성신문에 [장지연(1864~1921)]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한 것은 1905년 11월 20일의 일이다.

③ 독립 협회가 중심이 되어 독립문을 건립한 것은 1897년 11월의 일이다.

④ 고종의 밀지를 받은 임병찬(1851~1916)에 의해 (대한) 독립 의군부가 조직된 것은 1912년 9월의 일이다.

 

 

 Q  42 – 형평 운동

정답> ②

'진주에 있는 이곳은 독립운동가 강상호(姜相鎬) 선생(1882~1957)의 묘입니다. 그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라는 취지 아래 백정에 대한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전개된 이 운동에 앞장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운동'은 일제 강점기 경남 진주에서부터 전개된 형평 운동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923년 4월 경남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가 조직되어 백정(白丁)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 맞섰다. 참고로 강상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례는 형평장(衡平葬)이란 이름으로 치러졌다고 한다.

오답 해설>

① 어린이날을 정하고 잡지 어린이를 발간한 것은 소년 운동이다(각 1923.5/1923.3). 천도교 소년회가 주도하였다.

③ 계몽 서적의 보급을 위해 태극 서관(출판사)을 설립한 것은 1908년 5월로 신민회의 산업 경제 활동에 속한다(애국 계몽운동의 일환).

④ 일제가 이른바 문화 통치를 실시하는 결과를 가져온 운동은'3·1 운동'이다(1919/3/1).

⑤ 라이징 선 석유 회사의 조선인 구타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운동은 원산 총파업[(노동 운동]이다(1929.1~4).

 

 

 Q  43 - 이육사

정답> ②

'민족을 이끌 초인을 염원한 ○○○'라는 제목 아래 생몰년(1904~1944)과 생애 및 활동이 제시되어 있다. 이어 '본명은 이원록으로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1927년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그는 1932년 중국으로 건너가 김원봉이 세운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 학교 제1기생으로 입교하여 독립운동에 힘썼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인물은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저항 시인이자 항일 독립운동가인 이육사임을 알 수 있다. 이육사는 저항시 광야, 절정 등을 발표하였다.

오답 해설>

①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인물은 의열단원 김상옥(1890~1923)이다(1923.1).

③ (서울 명동 성당 앞에서) 친일파 이완용을 습격하여 중상을 입힌 인물은 이재명(1886~1910)이다(1909.12).

④ 영화 아리랑의 제작, 감독, 주연을 맡은 인물은 나운규(1902~1937)이다. 영화 아리랑은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면서 2년 6개월 동안 전국을 돌며 상영되었다.

⑤ 조선 국혼을 강조하는 한국통사를 저술한 인물은 민족주의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암 박은식(1859~1925)이다(1915.6).

 

 

 Q  44 – 조선 혁명군

정답> ①

'우리 학회는 1929년 (5월에) 조직되어 남만주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던 (가)을/를 조명하는 학술 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발표 주제로 '1. 영릉가 전투의 전개 과정', '2. 1930년대 한중 항일 연합 작전의 성과', '3. 총사령 양세봉에 대한 남과 북의 평가'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조선 혁명당 소속의 조선 혁명군임을 알 수 있다. 영릉가전투가 벌어진 것은 1932년 3월에서 7월까지이다. (조선 혁명군과 중국 의용군이 연합하여) 흥경성 전투를 벌인 것은 1933년 6월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② 호가장 전투가 벌어진 것은 1941년 12월의 일이다. 호가장전투는 조선 의용대(화북 지대)와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호가장은 중국 하북성 태항산 줄기에 닿는 작은 마을이다.

③ 대전자령 전투가 벌어진 것은 1933년 7월이다.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싸웠다.

④ 중국 팔로군에 편제되어 항일 전선에 참여한 부대는 조선의용군이다(1943년 이후부터 군정학교 학생과 교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팔로군에 배속).

⑤ 연합군과 함께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활동한 부대는 한국 광복군이다. 한국 광복군은 영국군의 요청으로 1943년 8월 10여명의 비전투 대원들(인면전구공작대)을 인도·미얀마 전선에 파견하였다(한·영 군사 상호 협정서 체결). 이들은 인도 캘커타에서 특수공작전과 대적선전방송과 관련된 훈련을 받고 1944년 2월부터 그와 관련된 활동을 펼쳤다.

 

 

 Q  45 – 한인 애국단

정답> ②

왼쪽 말풍선에 '이 사진은 1945년 9월 2일 일왕을 대신하여 일본의 외무대신이 연합군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장면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서명하는 인물은 시게미쓰 마모루인데, 그는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당시 폭탄에 맞아 다리를 다쳤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친 '의거'를 일으킨 단체는 김구에 의해 1931년 10월에 만들어진 한인 애국단임을 알 수 있다. 윤봉길(1908~1932)이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킨 것은 1932년 4월 29일이다. 한인 애국단은 백범 김구(1876~1949)를 단장으로 하여 활발한 의열 활동을 펼쳤다.

오답 해설>

①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은 단체는 의열단이다(1919.11).

③ 조선 총독을 저격한 강우규가 단원으로 활동한 단체는 (대한 국민) 노인 동맹단이다(1919.3, 소련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 강우규 의사(1855~1920)는 1919년 9월 2일서울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를 폭살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현장에 있던 신문기자, 경찰, 철도 및 차량 관계자 등 37명이 중경상, 최종적으로 3명 사망).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구서울 구치소)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④ 이상재 등의 주도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전개한 단체는민립 대학 설립 기성회이다(1922.11).

⑤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지원한 단체는 신간회이다(1927.2).

 

 

 Q  46 –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결정문)

정답> ③

'군정 장관 아놀드 소장은 12월 29일 오전 10시 30분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신문 기자단과 회견하고 신탁 통치에 관한 질문에 대략 다음과 같은 견해를 표명하고 일문일답을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신탁 통치는 조선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코자 함이 목적일 것이다. 우선 조선인이 당면한 경제 산업에 있어 유의하여 신탁 관리 문제로 모든 기관이 중지 상태로 들어가지 않기를 요망한다. 현 단계에 이르러 진실한 냉정이 필요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1945년 12월 채택된 모스크바 삼국 외상(삼상) 회의 결정문(일명 '모스크바 협정-한국에 관한 결정')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것은 1945년 12월 16일의 일이다(~28일). 여기서 모스크바 삼국 외상(삼상) 회의 결정문이 채택되었다.

오답 해설>

① (좌우 합작 위원회에 의해) 좌우 합작 7원칙이 발표된 것은 1946년 10월 7일의 일이다.

②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된 것은 1946년 5월의 일이다(1946.3.20.~5.9).

④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이른바 '반민특위')가 구성된것은 1948년 10월의 일이다(1948.10.23.).

⑤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결의된 것은 1948년 2월 26일의 일이다.

 

 

 Q  47 – 6·25 전쟁(흥남 철수 작전)

정답> ②

(가)에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한 제1사단은 다부동 일대에서 북한군 제2군단의 공세에 맞서 8월 3일부터 9월 2일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전투에서 제1사단 12연대는 특공대를 편성, 적 전차 4대를 파괴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1950년6·25 전쟁 초에 치러진 낙동강 방어전 전투들 중 국군 제1사단(학도병 500여 명도 포함)이 북한군 제2군단(3개 사단 규모)의 총공세를 물리친 '다부동 전투'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당시다부동 전투의 승리는 대구를 일정 기간 고수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나)에는 '개성에서 열린 첫 정전 회담에서 UN군 대표단은 어떠한 정치적 또는 경제적 문제의 논의를 단호히 거부하는 동시에 침략 재발의 방지를 보장하는 화평만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공산군 대표단에게 경고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개성에서 첫 정전 회담이 열린 것은 1951년 7월 10일이다. 이후 이듬해인 1952년 7월에 개성에서 다시 본회담이 시작되었고 같은 해10월 판문점으로 회담 장소를 옮겼으나 전쟁 포로 문제 등으로 인해 9개월 간 회담이 중지되었다.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 의해) 흥남 철수 작전이 전개된 것은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3일까지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애치슨 선언이 발표된 것은 전쟁 직전인 1950년 1월의 일이다(1950.1.10).③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48년 10월의 일이다.

④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된 것은 전쟁 직후인 1953년 10월의 일이다(1953.10.1.).

⑤ 부산에서 발췌 개헌안이 통과된 것은 전쟁 중인 1952년 7월의 일이다(1952.7.4).

 

 

 Q  48 – 박정희 정부 시기의 경제 상황

정답> ①

'이것은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도표로서 분야별 주요 계획, 국토 건설 현황 등이 그림과 그래프로 표현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계획이 실시된 시기의 경제 상황에대해 말해 보자'는 내용이 나와 있다.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계획이 추진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67년에서 1971년까지이다. 경부 고속 도로가 개통된 것은 1970년 7월 7일의 일이다(1968년 2월 1일 착공).

오답 해설>

② 귀속 재산 처리법이 제정된 것은 이승만 정부 시기인 1949년 12월의 일이다(1949.12.19). 귀속 재산을 유효적절하게 처리함으로써 산업 부흥과 국민 경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참고로 '귀속 재산'이란 미군정에 몰수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소유의 재산(농지, 주택, 기업 등)을 일컫는 말이다.

③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한 것은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6년 12월의 일이다.

④ 미국과 자유 무역 협정(FTA)을 체결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7년 6월의 일이다(발효는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12년 3월).

⑤ 대통령의 긴급 명령으로 금융 실명제가 실시된 것은 김영삼정부 시기인 1993년 8월의 일이다(1993.8.12).

 

 

 Q  49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정답> ⑤

'노래로 읽는 한국사'라는 제목 아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시되어 있다. 해설에서 '이 곡은 (가) 당시 계엄군에 맞서 시민군으로 활동하다 희생된 고(故) 윤상원과 광주에서 야학을 운영하다 사망한 고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에 헌정된 노래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1997년 (가) 기념일이 정부 기념일로 지정된 이후 기념식에서 제창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통해 제시된 '(가)'는 1980년 5월에 일어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와 무력 진압에 저항하였다(항쟁 기간 → 1980년 5월 18일~27일,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를 취한 것은 1980년 5월 17일)

오답 해설>

① 3·1 민주 구국 선언이 (재야 인사들에 의해 서울 명동 성당에서) 발표된 것은 1976년 3월의 일이다. 유신 헌법에 규정되어있는 악소 조항인 '긴급 조치'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② 4·13 호헌 조치 철폐를 요구한 민주화 운동은 1987년의 6월 민주 항쟁이다.

③ 장면 내각이 출범하는 계기가 된 민주화 운동은 1960년의 4·19 혁명이다.

④ 시위 도중 대학생 이한열(1966~1987)이 희생된 민주화 운동은 6월 민주 항쟁이다. 1987년 6월 9일, 다음날 열릴 예정인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의 시위 도중 전투 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만 20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Q  50 – 노태우 정부 시기의 통일 노력

정답> ①'대한민국 대통령, 중국 최초 방문'이라는 제목 아래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가)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중국을 공식 방문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베이징에서진행된 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지난달 성사된 한중 수교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면서 우호 협력 관계를 발전시키자고 하였다'는내용이 나와 있다. 여기서 한중 수교가 체결된 것은 1992년 8월 24일이므로, (가)는 결국 '노태우(1932~)' 대통령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노태우 정부 시기 → 1988년 2월~1993년 2월).남북 기본 합의서가 채택된 것 역시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1년 12월의 일이다(1991.12.13).오답 해설>②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1972년 7월의 일이다. ③ 남북 정상 회담이 처음으로 성사된 것은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0년 6월의 일이다[6·15 (남북) 공동 선언].④ 이산가족 고향 방문이 최초로 실현된 것은 전두환 정부 시기인 1985년 9월의 일이다. ⑤ 경제 협력을 위한 개성 공단 건설이 추진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3년 6월의 일이다(개성 공단 착공식 거행). 참고로 개성 공단 착공 추진이 최종 합의된 것은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2년 8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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