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창립한 독립운동단체이자 광복 이후 건국운동에 참여하고 제1공화국 때 몰락하였다가 1962년에 재건된 보수정당.
약칭 한독당이라고도 한다.
1930년 당의 결성식에 조완구(趙琬九)·윤기섭(尹琦燮)·김구(金九)·엄항섭(嚴恒燮)·김홍숙(金弘叔)·이시영(李始榮)·옥성빈(玉成彬)·김철(金澈)·안공근(安恭根)·한진교(韓鎭敎)·김갑(金甲)·김두봉(金枓奉)·선우 혁(鮮于赫)·송병조(宋秉祚)·조상섭(趙尙燮)·이유필(李裕弼)·차이석(車利錫)·김붕준(金朋濬)·백기준(白基俊)·박창세(朴昌世)·최석순(崔錫淳)·장덕로(張德櫓)·이탁(李鐸)·강창제(姜昌濟)·박찬익(朴翊翊) 등 26명이 참석하여 독립투쟁전선 통일과 지방파벌 청산을 목표로 내세웠다.
당의 조직으로는 이사장에 이동녕(李東寧), 당무이사에 김구·조소앙(趙素昻)이 선출되었으며, 이동녕·안창호(安昌浩)·이유필·김두봉·안공근·조완구가 당의와 당강을 기초하였다.
이 때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당의 및 당강으로 채택함에 따라 이 당은 주의와 정강을 갖춘 정당으로서 반일적 민족운동과 무력적 파괴운동을 투쟁방식으로 하는 혁명적 정당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당은 직할단체로서 상해한인청년당·상해한인애국부인회·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상해한인소년동맹을 두고 있었고, 지방조직으로 항저우[杭州]·상해·난징[南京]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초기 활동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중심으로 대일투쟁을 적극 전개한 점은 주목된다. 그러나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義擧)로 안창호가 체포되어 한국으로 압송된 뒤, 당의 지도력은 무너지고 분열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그 해 6월 항주이사회에서의 당내 결속 도모를 위한 최종 모색이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독립운동 진영은 항주파[조소앙·김철], 가흥파[嘉興派, 김구], 상해파[이유필]로 나누어졌고, 결국 당은 조소앙·송병조·차이석 등 10여 명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 나갔다.
이러한 여건에서도 난징·광둥(廣東) 지부와 베이핑[北平]·항저우의 당원들은 꾸준히 활동하였다. 상해사변과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중국본토침입이 본격화되자, 조소앙은 당을 이끌고 그 해 10월 25일 난징에서 조선혁명당·조선의열단·한국혁명당·광복동지회 등과 연합하여 좌파 인사들이 발기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1933년에는 뤄양[洛陽] 분교를 설치하여 훈련된 청년간부 100여 명을 한국혁명군 건립을 위한 기간으로 배출시켰다.
한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서는 처음에는 선전공작에 주력하였으나, 1933년 대동단결을 위한 단일당조직을 도모하게 되자 한국독립당은 신당 참가문제와 임시정부 존립문제로 찬·반 양파가 대립하였다.
그러나 5월 27일 개최된 당대회에서 신당참가 찬성파가 승리함에 따라 반대파인 송병조·차이석·조완구 등을 제외하고는 조소앙 및 대부분의 당원이 한국민족혁명당에 합병할 것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한국민족혁명당에 병합된 뒤 김원봉(金元鳳)[일명 김약산(金若山)]의 의열단이 중심이 된 좌파 인사들의 전횡이 극에 달하고, 공산주의운동을 주목표로 활동함에 따라 의열단계에 반감을 품은 조소앙은 문일민(文逸民)·박창세(朴昌世) 등을 이끌고 그 해 9월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하여, 그 달 25일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재건 당시 당원수가 10여 명에 불과하였고, 경제적으로도 곤궁한 처지였기 때문에 사실상 김구의 한국국민당에서 지원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이념상 뚜렷한 정의와 정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937년 7월부터 1939년 9월까지의 민족단일대당결성운동이 실패한 뒤 민족진영만의 3당통합[김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이 추진됨에 따라 1940년 5월 8일 3당 해체선언을 계기로 민족진영의 대표당으로서 김구를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하는 한국독립당의 창립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한국독립당은 명의상 한국독립운동의 주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계속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집권당 구실을 담당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상해·난징의 함락으로 임시정부와 함께 충칭[重慶]으로 이동하였다가,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당원들과 함께 환국한 한국독립당은 김구를 중심으로 국내에서의 기반을 확충 강화하여 이듬해 1월 전국적인 반탁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그 해 2월 1일 임시정부 명의로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과도정권 수립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중적 기반을 확대 강화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1946년 3월한국민주당·조선국민당·신한민족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한국민주당과의 연합에는 실패하고, 4월 18일 한국독립당·조선국민당·신한민족당의 3당 합동이 이루어져 한국독립당으로 합당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내 조직 및 인사개편이 단행되었지만 주도권은 구한국독립당 계열의 임시정부 요인들이 계속 장악하였다.
이러한 여건은 후일 국민당계와 신한민족당계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김규식(金奎植)을 비롯한 몇몇 요인들이 당을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당의 정치노선은 반탁·좌우합작·남북협상통일정부수립·단일정부반대 등으로 민족적 견지에서는 당연한 노선이었다. 그러나 당시 반탁운동에 있어서는 이승만(李承晩)과 공동전선을 형성하였으나, 단독정부수립에는 반대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당세가 쇠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49년 6월 26일 지도자격인 김구가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되고, 6·25전쟁이 일어나 당의 중진이 납북됨에 따라 당은 일시에 몰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은 과거의 한국독립당계 인사들에 의하여 다시 재건되었다.
1962년 10월 13일 김홍일(金弘壹) 등이 중심이 되어 구태의연한 정치인들이 재등장하는 혼란한 정국 속에서 진실·희생·충성을 입당의 정신으로 삼고, 구국일념으로 야당노선을 걷겠다고 결의한 창당대회에서 김홍일을 대표최고위원에, 조각산(趙覺山)·최용덕(崔用德) 등을 최고위원으로 추대하였으며, 49개 지구당 결당을 완료하고 10월 30일 정당등록을 마쳤다.
1964년 6월 김홍일이 대표최고위원을 사퇴함에 따라 조각산이 직무대리로 선임되었으나, 1967년의 제5차 전당대회에서 신공제(辛公濟)를 대표최고위원에 선출하였다.
1968년 전당대회에서 당기구를 종래의 집단지도체제에서 단일지도체제로 당헌을 개정하고, 당대표직을 당의장으로 개정하여 당의장에 이태구(李泰九)를 선출하였다.
당의 주요 정책은, 첫째 부정·폭력·억압 등 반민주적 처사의 배격과 정보기관의 정치사찰 금지를 통한 참된 민주주의를 확립한다.
둘째 철저한 선거공영제를 통한 공무원의 정치적 엄정중립을 보장하며, 셋째 농어촌의 근대화와 유축농업을 장려하여 낙농가공업을 국책으로 기업화하고, 넷째 어업장비 및 기술의 현대화로 수산왕국을 지향하며, 다섯째 정치적 특혜금융제도를 근절하고, 여섯째 불안정한 교육정책을 시정하는 것 등이다.
1962년 제5대 대통령선거에는 당조직이 미약하여 후보자공천을 하지 못하였으며, 그 해의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는 131개 지역선거구 중 13개 지역구 및 전국구 7명을 공천하였으나 전원 낙선하였다.
이어서 1965년의 보궐선거에서 김두한(金斗漢) 후보가 당선하여 원내의석을 가진 정당이 되었으나, 이른바 국회오물사건에 의한 의원직 자진사퇴로 유일한 원내의석을 상실하고 말았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전진한(錢鎭漢)을 만장일치로 대통령후보로 지명하여 선거에 임하였으나, 23만2179표로 낙선하였다. 그 해 11월의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지역구후보 38명, 전국구후보 8명을 공천하였으나 전원 낙선하였다.
1970년 제7대 대통령선거를 1년 앞두고, 재야민주세력을 총집결하여 국민대중의 여망에 부응하는 참신하고 강력한 단일야당을 형성한다는 야당통합노력에 따라 1월 25일 신민당에 흡수, 합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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