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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전 소극장, 學田, 배울 학(學), 밭 전(田), 대중 문화를 만드는 못자리

Jobs 9 2025. 2. 26.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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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전(學田) 소극장은 '배울 학(學)'과 '밭 전(田)' 자를 써서 지은 이름으로, '못자리 농사를 짓는 곳'이라는 뜻
학전 소극장은 가수 김민기가 1991년 3월 15일에 대학로에 개관한 소극장으로, 한국 공연예술의 역사를 함께 해왔다. 

김민기는 실제 농부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농사를 지었다.

 

 

학전 소극장의 의미


모내기할 모를 기르는 조그만 논에 빗대 나중에 크게 성장할 예술가들의 디딤돌 구실을 하겠다는 뜻 
문화예술계 인재들의 못자리를 만들겠다는 뜻 
아이부터 어른까지 전 세대가 한 곳으로 모일 수 있는 소통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 뜻 
학전 소극장은 연극, 뮤지컬, 콘서트 등 다양한 공연을 열며 수많은 예술인의 디딤돌이자 버팀목



학전 소극장은 대중 문화를 만드는 못자리다.
김민기
학전(學田)은 김민기가 창단한 극단이자 본 극단이 공연하는 소극장을 말한다.


1991년 3월 15일, 김민기가 사비를 털어 ‘학전’이라는 이름의 소극장을 개관했다. 대학로에 위치한 이 공연장은 연극, 뮤지컬, 콘서트 등 다양한 공연을 열며 수많은 예술인의 디딤돌이자 버팀목이 됐다.

이어서 1994년, ‘극단 학전’을 창단하고 초연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학전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독일 뮤지컬 'Linie Eins'을 김민기가 번안해 연출했다. 이 뮤지컬은 ‘학전 독수리 오형제’라 불리는 황정민, 설경구, 김윤석, 조승우, 장현성을 비롯해 유명 배우를 대거 배출한 산실이기도 하다. 기사 또한 유리상자, 윤도현, 권진원, 김광석, 조규찬. 여행스케치, 들국화, 장필순, 강산에, 낯선 사람들, 노영심, 이적, 정재일, 장기하 등 한국 가요계의 쟁쟁한 가수가 다 학전에서 주로 콘서트를 했으며 또 거기 서고 싶어 했을 만큼 90년대 소극장 문화의 시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전은 1991년 개관한 극장을 ‘학전블루소극장’으로 두고 1996년 ‘학전그린소극장’까지 열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2010년 이후 공연 시장의 중심이 대극장 뮤지컬로 바뀌면서 대학로 소극장 관객은 점점 줄어들었다. 2013년 그린소극장이 먼저 폐관했다.  

2024년 3월 14일, 재정난 및 김민기 대표의 건강 악화로 33년 만에 폐업했다. 마지막 공연은 2024년 2월 28일부터 폐관일인 3월 14일까지 열렸던 '학전 어게인 콘서트'.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학전의 정체성을 잇고자 리모델링을 거쳐 2024년 7월 17일 어린이, 청소년 중심의 공연장인 아르코꿈밭극장을 개관하였다.

개관 이후인 7월 21일에 김민기 대표가 사망했다. 장례식 당일에 구 학전 앞에서 노제를 지냈다.

보도에 따르면, 학전은 폐관하였으나 학전의 기획실 인력들을 주축으로 역대 학전의 발자취를 보존하기 위한 아카이브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작품 목록


1994년 초연,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 독일 'Linie Eins'의 번안극
1995년 초연, 록 뮤지컬 <개똥이>: 원작 - 윤기현의 동화 '서울로 간 허수아비' 중 '사랑의 빛'
1997년 초연, 록 뮤지컬 <모스키토>: 독일 'Die Moskitos sind da'의 번안극
1998년 초연, 뮤지컬 <의형제>: 영국 'Blood Brothers'의 번안극
2004년 초연, 어린이 무대 <우리는 친구다>: 독일 'Max Und Milli'의 번안극
2008년 초연, 어린이 무대 <고추장 떡볶이>: 독일 'Spaghetti mit Ketchup'의 번안극
2008년 초연, 어린이 무대 <슈퍼맨처럼!>: 독일 'Stronger than Superman'의 번안극
2008년 초연, 어린이 무대 <그림자 소동>: 원작 - 강정연의 동화 '바빠 가족'
2009년 초연, 어린이 무대 <진구는 게임 중>: 독일 'Flimmer Billy'의 번안극
2009년 초연, 어린이 무대 <무적의 삼총사>: 독일 'Bella, Boss und Bulli'의 번안극
2009년 초연, 청소년 뮤지컬 <굿모닝 학교> 뮤지컬 <모스키토>의 대본과 연출을 새롭게 바꾼 작품
2010년 초연, 뮤지컬 <분홍병사>: 프랑스 'Le Soldat Rose'의 번안극
2010년 초연, 뮤지컬 <도도>: 원작 - 강정연의 동화 '건방진 도도군'
2012년 초연, 연극 <더 복서(복서와 소년)>: 독일 'Das Herz eines Boxers'의 번안극
2014년 초연, 연극 <유령놀이>: 원작 - 서화교의 동화 '유령놀이'
2016년 초연, 영상 노래극 <연이의 일기>: 김민기의 노래 '엄마, 우리 엄마' '백구' '아빠 얼굴 예쁘네요' 총 3곡을 엮어 만든 극

 

출신 배우 


ㄱ) 강신일 / 구원영 / 권재환 / 김국희 / 김대명 / 김무열 / 김비비 / 김선화 / 김솔은 / 김원해 / 김윤석 / 김은영 / 김의성 / 김재범 / 김종구 / 김중기 / 김지윤 / 김태겸 / 김히어라 / 김희원 / 김희창 /
ㄴ) 남문철 /
ㅁ) 민채원
ㅂ) 박근식 / 박두희 / 박명훈 / 박성일 / 박윤신 / 박윤희 / 박정표 / 박한돌 / 박혁권 / 박현선 /박형수 / 박형주 / 방기범 / 방은진 / 방진수 / 방진의 / 배성우 / 배해선 /
ㅅ) 서미소 / 서범석 / 서영희 / 서율 / 서지영 / 설경구 / 손현정 /신성록 /
ㅇ) 안내상 / 안세호 / 오지혜 / 유선 / 유선봉 / 윤선희 / 윤민형 / 이기성 / 이두일 / 이문식 / 이상근 / 이선빈 / 이성욱 / 이소영 / 이일진 / 이정은 / 이정헌 / 이종혁 / 이칸희 / 이하정 / 이호용 / 이황의 / 이혜민 / 임규한 / 임문희 / 임유영 / 임형준
ㅈ) 장현성 / 전배수 / 정문성 / 정욱진 / 정재혁 / 조련 / 조승우 /
ㅊ) 채국희 / 최덕문 / 최민철 / 최영우 / 최재웅 / 최정기 /
ㅎ) 한규금 / 홍석천 / 홍성희 / 황기석 / 황예영 / 황정민 / 황지영 /

 


학전의 정산 체계는 지금 봐도 굉장히 신선하고도 획기적이었다. 다른 극단에서는 연극배우의 대우가 굉장히 안 좋았던 반면 학전은 설립 직후부터 수많은 극단 중에 최초로 공연 계약서를 작성했고, 모든 배우와 스태프에게 공연의 기여도, 연차를 구분하여 한 명도 빠짐없이 세밀하게 유료 관객 입장 수익의 몇 퍼센트 식을 나누면서 급여를 30만 원 이상을 기본으로 지급했다. 그것도 심지어 수익을 공개하면서. 그럼에도 김민기가 배우들에게 한 요구는 '다른 건 우리가 다 할 테니 연기만 고민하라'는 개방적인 요구였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엔 상상도 못 했던 것이 있는데, 바로 극단에서 소득세와 4대 보험까지 적용해 준다는 것이다.
어린이 대상 아동극 구상할 때 초등학교 전 학년 교과서와 아동문학 서적을 참고했다고 한다.

 

 

 

 

김민기

金敏基

1951년 3월 31일

전라북도 이리시 중앙동

사망

2024년 7월 21일 (향년 73세)

경기도 고양시

묘소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신덕리 천안공원묘원

 

서울재동국민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 65회)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 69 / 학사)

병역

육군 제12보병사단 병장 만기전역

데뷔

1971년 《김민기》

가족

배우자 이미영

장남 김종화

차남 김소윤

종교

무종교

직업

가수, 작곡가, 뮤지컬 제작자, 극단 학전 대표

 

 

 

김민기는 1951년 전라북도 이리시 중앙동(現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중앙동)에서 5남 5녀 중 막내이자 유복자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중앙동 삼산의원에서 조수로 일하다 의사면허를 취득한 의사였고 1940년대 말 중앙동에 삼펜사이다 공장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퇴각하던 북한군에게 부르주아로 몰려 뱃속에 있던 김민기를 두고 살해 당하고 만다.

 

어머니 김하련(1907-1996)은 함경도 원산 출신으로 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에 1기로 입학한 당시로서는 대단한 엘리트였다. 그러나 졸업을 앞두고 4학년 때 기숙사내 조선인 차별에 맞서다 퇴학을 당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산파) 자격증을 땄고, 남부지방 여러 곳을 다니며 진료활동을 벌이다 삼산의원에서 일하면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전쟁 중 남편을 잃고 난 후 조산원 일을 하면서 남편이 생전 운영하던 간장공장과 사이다공장을 운영해 자식들을 키웠다. 훗날 한국여전도회(기독교) 회장을 맡아 대외적인 활동도 활발히 하기도 했다.

 

작고한 남편 대신 많은 자식들을 먹여살려야 했던 어머니는 늘 바빴고 형제들은 모두 직장이나 학교에 갔기 때문에 어린 김민기는 서너 살 때부터 늘 집을 혼자 지켜야 했다. 텅빈 집에서 하루 종일 혼자 지내야 하는 어린 그에게 있어 유일한 즐거움은 작대기를 가지고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6.25 전쟁 직후의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그의 유년시절의 체험은 외로움과 공포의 기억으로 마음속 깊이 자리잡게 된다.

 

 

이리중앙국민학교 시절, 남매들과 간 아버지 산소에서 스케치하는 어린 김민기

 

그가 이리중앙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초등학교 5학년 때 그의 어머니는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상경하였고 김민기는 서울재동초등학교로 전학 가 졸업 후 당시로서는 전교권 성적의 학생들만 진학할 수 있었던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경기중학교 시절, 김민기 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 것은 미술반과 보이스카우트 활동이었다. 그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미술실에 틀어 박혀 그림을 그렸고, 주말이면 보이스카웃 대원들과 어울려 캠핑을 다니곤 했다. 마침 그가 있던 보이스카우트 활동실에 버려져 있던 우쿨렐레가 있었는데 재미삼아 연주하다 보니 이는 곧 그의 첫 악기가 되었고 캠핑을 가면 늘 그가 반주를 도맡게 되었다.

 

1966년 김민기 는 경기고등학교 에 입학하게 되고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던 셋째 누나로부터 입학선물로 처음으로 클래식 기타를 받게 된다. 가르쳐줄 사람이나 교재가 딱히 없어 그는 누나의 피아노 악보를 보고 연주하여 독학하게 되었고 얼마 안 가 그는 학교 내에서 소문난 기타 연주자가 되어있었다. 

 

그는 1967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가세'(미발표곡)라는 곡을 작사, 작곡하게 된다. 이후 그는 동해로 간 보이스카우트 야영 중에 절친한 후배를 잃는 사고를 겪게 되고 이를 학생 대표로서 후배의 부모님께 소식을 전하러 가는 길에 참혹한 심경과 무책임한 어른들에 대한 분노을 담아 기차 안에서 즉석으로 '친구'라는 곡을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들기도 하였다.

 

 

대학 시절

 

1969년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였지만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려왔고, 중고등학교 내내 그림만 그리다시피 해왔던 그에게 입문자에 가깝게 맞춰져 있었던 교과 과정의 미술 수업은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고 흥미롭지도 않았다. 따라서 학교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못 되었고 결국 그는 1학기 낙제를 한 뒤 2학기 휴학계를 제출하게 된다.

휴학 휴 집안 사정이 어려워 그림 물감을 살 형편조차 되지 않아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그에게 같이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고교시절 친구인 김영세로부터 노래를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고교시절부터 기타를 잘 쳤던 김민기는 김영세 듀엣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곧 관객이었던 여학생들로부터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그룹 이름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작곡 활동과, 음악 활동을 동시에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가 낙제를 하고 두 번째로 1학년에 다니던 1970년 어느 날, 고교 동창 임문일의 소개로 양희은을 만난다. 집안 사정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던 양희은이 가수 활동을 시작하며 기타를 잘 치기로 소문나 있던 그에게 노래 반주를 부탁했고 김민기는 양희은의 노래 반주를 해주며 그녀를 위해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1970년 양희은의 데뷔작으로 발표된 아침 이슬을 비롯하여 그녀가 부른 많은 노래가 이때 만들어졌다. 양희은의 첫번째 앨범의 통기타 반주 또한 그가 맡았다.

 

양희은과 김민기

양희은의 노래에 기타 반주를 해주고 있는 김민기

 

 

이후 같이 활동하던 김영세가 군에 입대한 후 김민기의 재능을 아끼던 당시 CBS PD이던 김진성과 최경식의 주선으로 김민기는 자신의 1집이자 인생을 바꿔놓은 앨범인 '김민기'를 내게 된다. 음반 <<김민기>>는 미국 민요를 번안한 '저 부는 바람'과 한대수가 준 곡인 '바람과 나'를 제외하면 전부 김민기 본인의 자작곡으로 되어 있어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음반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음반은 발매된 지 얼마 안 가 압수조치를 당하는데, 그것은 김민기가 1972년 봄 서울대학교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부른 '우리는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 '해방가', '꽃 피우는 아이'와 같은 노래들 때문이었다. 이튿날 새벽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되었고 시중에 남아 있던 그의 음반들은 전량 압수되었으며 그의 노래 꽃 피우는 아이는 그의 노래 중 처음으로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1971년 무렵, 김민기는 시인 김지하를 처음으로 만나고 그가 만든 문화 연합회 '폰트라(Poem ON TRAsh)'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그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의식에 대해 틀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함께 서울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친구인 초중고 동창 이도성과 신정동에 '신정야학'을 열어 가난해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과 노동자들을 가르쳤고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에도 참여하여 노동자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탄압과 고된 그의 20대

 

하루는 서울대학교 미대 수업의 일환으로 창경궁에 가서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그림을 수정하기 위해 캔버스를 칼로 긁어내다가 뚫린 구멍 사이로 나무를 보고 '도대체 이런 그림을 그려서 무엇 할 것인가. 조금만 움직이면 저 나무를 내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김민기는 서양화 붓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학교도 더 이상 나가지 않게 된다. 그동안 그렇게 좋아하던 기타라는 악기에 대해서도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 전통 국악기나 민요, 판소리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김민기는 이후 단소와 장구를 배우고 전통음악을 접한 후 1973년 초에는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의 극음악을 작곡해 무대 공연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1974년 4월에는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쓴 뒤 작곡가 이종구가 곡을 붙여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소리굿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제재를 받고 상연 금지 처분을 당했지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체포 위협을 무릅쓰고 재공연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1974년 10월, 김민기는 카투사로 입대하게 된다. AFKN에 배치돼 그가 비교적 편한 군 생활을 보내고 있던 1975년 전국이 소위 유신찬반국민투표 문제로 온통 들끓고 있던 때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신찬반투표 거부 집회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주 레퍼토리로 채택되었고 김민기는 영문도 모른 채 국군방첩부대에 소환되게 된다. 그곳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은 그에게 '유신에 찬성하는 노래를 만들라'라고 지시했지만 김민기는 도리어 사회 상황으로 인해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는 내용의 노래인 '식구생각'을 만들어 제출했고 곧이어 사단 영창으로 보내진 뒤 최전방으로 전출되었다.

 

김민기는 강원도 원통에 있었던 그곳에서 나머지 군 생활을 보내며 그가 복무하던 연대의 수색중대장으로 있던 고등학교 선배의 부탁으로 '수색중대가'와 그곳의 정년 퇴임을 앞뒀던 하사의 부탁으로 막걸리 서 말을 대가로 늙은 군인의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군에서 제대했을 때 김민기는 자신이 이미 운동권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음과 그의 노래 대부분이 전부가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본격적인 고난 또한 이때부터 시작된다. 김민기는 여기저기 소환되며 조사를 받아야 했고 심지어는 고문까지 당하게 된다.

 

옛날 보안사에 한 번 끌려 들어갔는데, 거긴 정면이 유리창이라 반대편에서만 안을 볼 수 있었지. 누군가가 취조받다 자살한 얘기도 심심찮게 들리고. 진짜 잘 패더라. 이만 한 공사장 각목 가지고 배를 한 대 치고, '욱' 하니까. 어느새 얼굴을 치더라고. 다시 위에서 '팍' 찍는데 아픔을 느낄 겨를이 없어. 성냥개비로 만든 인형이 후다닥 사그라져 가듯이 정신이 가물가물하는데 나를 패는 놈들이 갑자기 슬로비디오가 되는 거야. 정신을 잃어기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나면, 나 때문에 공연히 이 사람들이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 너무 죄송하더라니까. 내가 없었으면 이 사람들이 죄를 지을 리가 없잖아. 예수가 죽어가면서 이 사람들 용서해달라고. 이들은 자신의 죄를 모른다던 그 말,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더라... (중략)

주철환과의 대담(2005) 중

 

눈에 수건을 가리고 시내를 한참 돌아다녔기 때문에 어떤 기관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이제 들어가니까 연행된 이유는 그 당시에 각 대학에 노래 서클들이 많이 생겨날 때였습니다. (중략) 좀 넘기다 보니까 아침이슬이 나왔어요. 노래에 전체적인 주석이 있었는데 그것은 '긴 유신 시대를 마감하고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주석을 열렬히 환영하자' 그런 것이 노래의 개요다, 이렇게 주석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노래가 공식적으로 음반으로 출반된 것이 1970년도였습니다. 그럼 10월 유신은 몇 년도입니까?" 그렇게 제가 반문을 해봤죠.

 

KBS 다큐멘터리 '유신시대 3부, 아침이슬의 수난' 인터뷰 중

 

이미 볼온한 자로 정권에 찍힌 김민기는 당시 소위 'KS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장 어디에도 취직할 수 없었고, 어딜 가든 형사들과 기관원들이 따라붙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는 길거리에서 친한 친구를 만나도 모른 척해야 했으며 그의 지인인 양희은, 임진택 등도 김민기에 대해 불라는 협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의 어머니는 한밤중에 방문을 걷어차며 집으로 들이닥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놀라 심장병까지 앓기도 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24살이었다.

 

일할 곳을 찾지 못하던 김민기는 가까스로 부평의 한 봉제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공장에 다니던 중에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상태였던 그는 당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의 배려로 중등교사 자격증과 함께 9년만의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된다. 그는 공장 제품에 붙어있는 라벨의 알파벳조차 읽지 못하는 공장의 어린 여공들과 배우지 못한 노동자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출근하기 전 회사에 나 그들을 가르치는 '조학'을 열었다. 그는 점심시간이면 공장의 앞뜰에서 기타를 치며 노동자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고 자신보다 어린 노동자들에게 '계산적으로 살지 말고 느끼는 삶을 살아라', '꿈은 얻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와 같은 말을 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당시 공장에는 형편이 안돼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함께 사는 부부가 많았는데 그들을 위한 합동 결혼식의 축가로 김민기는 상록수를 작곡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해지고 공장 사측에서도 노동자들을 교육하는 것을 소위 '의식화 교육'으로 여기며 썩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얼마 안 가 결국 김민기는 공장을 떠나게 된다.

 

정말로 갈 데가 없어진 김민기가 선택한 일터는 막노동판이었다. 여러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노동꾼으로 살던 그에게 선배 한 명이 찾아온다. 그 선배는 그에게 '노래 안 만드냐, 공장 다닐 때 생각 안 나느냐'고 물었고 그는 다시 노래를 한두 곡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들다보니 노래들의 흐름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결국 그는 두 달만에 하나의 작품, 공장의 불빛의 수록곡들을 모두 작곡하였다. 김민기는 이에 그치지 않고 공장의 불빛을 녹음하고 배포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상으로는 약자 중의 약자인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을 비추고 이들에게 노동조합을 설립할 것을 말하는 내용의 공장의 불빛은 발매가 허가되지 않을 것임을 넘어서 이와 관련된 사람들이 고초를 겪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민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에 이골이 나있던 상태였고 또 자신이 직접 봐온 노동자들에게 위로를 주고 나아갈 희망을 주기 위해 당시 서울대학교 민중가요 동아리 '메아리' 등 여러 대학교의 민중가요 동아리들을 모아 송창식의 배려로 그의 녹음실에서 공장의 불빛 테이프를 녹음해 배포하였다.

감옥 아니라 그보다 더한 처지에 놓이건 말건 달려들어 만들기 시작한 것이 노래굿 <<공장의 불빛>>이었다.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칠 필요도 없는 이 명백한 불법 카세트테이프에서 나는 비로소 내 이름 석자를 떳떳이 밝힐 수 있었고 내용과 형식면에 있어서도 기존의 상업 가요의 틀을 마음껏 벗어던질 수 있었다.

김민기의 친필메모 중(1994년 경 추정)

 

김민기는 공장의 불빛을 만든 뒤 당국의 탄압을 피해 자신의 고향이자 아버지의 묘가 있는 곳인 익산으로 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김민기는 경찰서에 소환돼 몇 번의 조사를 받는 것 외에는 별다른 고초를 겪지 않았다. 김민기는 이후 '아예 음악을 잊어버려야 겠다'라는 생각으로 농사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익산에서 소작을 하며 농사를 짓던 김민기는 10.26 사건 이후인 1979년 12월에는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유아원 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를 익명으로 기획하고 직접 출연도 하면서 일시적으로 음악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으로 전두환이 정권을 잡자 다시 농사를 지으며 대외 활동을 삼갔다. 1981년 5월에는 국풍81 개최를 앞두고 정부에서 자신을 회유하려고 하자 농사일이 바쁘다면서 끝까지 참가를 거절했다.

 

그는 농사를 더 크게 짓고 싶은 마음에 김제로 가 2년 동안 머무르다가 1981년 경기도 전곡으로 가 5000평 규모의 참깨 농사를 시작했다. 그때 모 비료 회사에 그 일대를 맡아 액체 비료를 살포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싹들이 모두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 김민기는 홀로 원인 조사를 해 결국 비료 회사에서 정량의 5배나 과다 살포한 탓임을 밝혀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비료의 필요량과 실제 살포량, 토지의 산화도에 대해 철저한 데이터를 작성해냈고, 이를 근거로 회사에 손해배상을 청구, 끝내 배상을 받아내는 집념을 보이기도 했다.

 

그 해 겨울, 그에게 약 5000평의 논을 소작할 기회가 생겼고 그는 충남 보령의 탄광에서 일을 해 50만 원을 벌어 강원도 연천군 민간인통제선 안의 유촌리 마을의 한 폐가를 매입 후 그곳에서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김민기는 그 마을에서 단순한 농사꾼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농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농촌지도자'로서 살았다. 동네의 옛 이름을 딴 '두개마을 청년회'를 조직해 마을의 여러 일을 도맡았고, 마을에서 생산된 쌀을 도시의 소비자들에게 직접 배달 형식으로 팔아줌으로써 중간 유통 과정의 부조리를 없애고 농민과 소비자가 함께 이익을 얻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마을의 농민들로 하여금 큰 이윤을 얻을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의 행복했던 유촌리 생활은 3년으로 끝을 맺게 된다. 그 당시 김민기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유촌리에 머물며 농사를 짓고 추수 후 겨울에는 전라남도로 내려가 김 양식하는 노동을 하거나 서울로 가 지내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하필 그가 집을 비운 사이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고 김민기가 달려왔을 때는 이미 불이 커져 집 안의 모든 것을 건질 수 없을 때였다. 김민기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불 타는 집 앞에서 밤새도록 막걸리만을 마셨고 그의 수많은 책과 메모들, 악보 뭉치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마을을 떠날 생각이 별로 없었고 마을 사람들도 그를 도와 다시 집을 지어주겠다고 했길래 마을에 머물려고 했지만 때마침 9년 전 '소리굿 아구'를 같이 공연했던 김석만이 김민기를 찾아와 공연 활동을 다시 재개하자고 설득했고, 결국 1984년, 농부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와 김석만, 오종우와 함께 어린이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울로의 귀환, 그리고 해금과 학전의 설립

 

33살의 나이에 다시금 서울로 돌아온 김민기는 <엄마, 우리 엄마>, <개똥이> 등의 아동용 뮤지컬을 만들어 레코드로 출반하려 했지만 김민기의 작품이라는 이유 때문에 심의를 위한 접수 자체가 거부되어 수포로 돌아갔고, 1984년에는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를 비롯한 대학들에서 활동하던 노래패들의 노래를 모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제작했다. 하지만 이 음반도 공윤위에서 김민기의 노래를 모두 삭제하라고 지시했고, 우여곡절 끝에 발매 뒤에도 음반사에 대한 기관원들의 압력 때문에 시중에 배포되지 못해 판매가 거의 안되는 초라한 신세를 겪었다.

 

1985년, 김민기는 34살의 나이에 아동극을 함께 만들던 당시 사무실 직원이었던 서강대 영문과 출신 이미영과 서울미술관에서 전통 혼례식을 올렸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발표된 6.29 선언으로 인해 김민기의 인생은 큰 전환을 맞게 된다. 지금까지 만들었던 그의 모든 노래가 금지곡에서 해제되고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 또한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였다. 그는 창작 활동에 박차를 가해 자신의 탄광 생활과 그곳 아이들의 일기를 바탕으로 만든 아동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와 과거 심의가 거부되었던 <개똥이>의 노래를 담은 음반을 낸다. 그러나 공연윤리위원회는 여전히 김민기의 활동에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었고 심지어는 <아빠 얼굴 예쁘네요>에서의 '까맣다'라는 표현도 문제 삼을 정도였다. 탄광이 까맣다라고 묘사하는 것조차 문제 삼는 것에 기가 찬 김민기는 '검다'라는 표현을 모두 탄광은 하얗다로 전부 바꿔버리겠다고 선언했고 결국 수록곡 몇몇을 빼는 선에서 타협할 수 있었다.

 

여전한 공윤의 행태에 의욕을 잃은 김민기는 창작 대신 사회운동에 발을 들이고 1989년 장일순, 김지하 등과 같이 한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한다.

1990년에는 한겨례 신문사에서 주최한 '겨레의 노래' 사업의 총감독을 맡아 중국, 프랑스, 일본 등지를 돌아다니며 한민족의 노래를 찾는 활동을 하고 수집한 노래들을 모아 음반 <겨레의 노래 1>을 발매하였다. 이후 전국을 순회하며 <겨레의 노래> 공연이 이루어졌는데 김민기는 이 공연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노래를 대중들 앞에서 부른다




1991년 김민기는 드디어 대학로에 학전 소극장을 열고 대표를 맡는다. 사실 이 과정에서도 사연이 있었는데 서울대학교 출신들이 만든 극단인 '연우무대'가 원래 그 소극장에 입주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연우무대는 그 과정에서 보증금 5000만 원을 마련하지 못했고 건물주와 연우무대 사이를 중재하던 김민기가 지하 소극장 시설을 다 마련해놓은 건물주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대신 입주하기로 한 것이었다. 김민기는 그 5000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한 음반사를 찾아가 나중에 자신의 음반을 낼 것을 약속하고 선불로 돈을 받았다.

 

그는 서태지의 등장으로 갈 곳을 잃은 포크 뮤지션들에게 선뜻 극장을 빌려줬고 김광석, 들국화, 시인과 촌장, 장필순, 강산에 여행스케치, 윤도현 등 수많은 뮤지션들이 학전에서 성장해나갔다. 이 중 김광석은 학전에서 단독 콘서트 1000회 돌파 기념공연울 하기도 했다.

 

1993년 김민기는 마침내 22년만에 자신의 모든 작품 39곡을 집대성한 음반 네 장을 발표한다. 이는 학전 보증금을 갚기 위한 것이었으며 <<김민기 1집>> 이후 22년 만에 나오는 솔로 음반이었다. 그는 이 음반 발매를 끝으로 공식적으로 가수 생활 은퇴를 선언한다. 

 

 

지하철 1호선, 그리고 제 2의 전성기

 

대관료를 많이 받지 않았고 좌석 수도 적었기에 학전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곧 극장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는 위기에서 김민기는 독일문화원으로부터 독일 '그립스 극단'의 창작 뮤지컬인 <지하철 1호선>의 공연 영상을 보게 된다. 이를 우리나라 정서로 번안하여 적용해보겠다는 결심을 한 김민기는 당시 무명이었던 황정민, 설경구, 나윤선 등을 끌어모아 '극단 학전'을 설립하고 '지하철 1호선'을 학전 무대에 올린다. 결과는 초대박이었고 이로 인해 학전은 폐관 위기에서 벗어나 1996년 2호 극장인 '학전 그린 소극장'을 오픈할 수 있었다.

 

<지하철 1호선>의 성공에 탄력을 받아 김민기는 그립스 극단의 또다른 뮤지컬을 번안한 <모스키토>, 영국의 원작 뮤지컬을 6.25 시대의 한국 배경으로 번안한 <의형제>, 창작 뮤지컬 <개똥이> 등을 올릴 수 있었고 이중 '<의형제>'는 우리나라 정서에 잘 적용시킨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아 백상예술대상 등 큰 상을 여럿 수상하였다.

 

<지하철 1호선>은 1996년 좌석 점유율 100%를 넘고 11개월 동안 연속 공연하는 진기록을 세운 끝에 2000년 2월 6일, 그립스 극단의 원작보다 먼저 1,000회를 돌파했고 2003년에 2,000회, 2006년에 3,000회 돌파 기록을 세우고 원작지인 독일, 일본, 홍콩, 베이징 등 수많은 해외공연을 이뤄낸 끝에 2008년 마침내 4,000회를 달성한다. 그리고 김민기 대표는 독일 최고의 문화 훈장인 괴테 메달을 수여받았다.

 

괴테메달

2007년 괴테 메달을 수상하는 김민기

 

 

그러나 김민기는 승승장구하고 있던 <지하철 1호선>을 무대에서 과감히 내려버리는 결정을 한다.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자신이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아동청소년극을 하기 위해서, 둘째는 돈만 벌다 보면 돈 안 되는 일을 못할 거 같아서였다.

 

 

 

아동극에 전념, 그리고 한국 문화의 별이 되다

 

절대 (장례식을) 화려하게 하지 마라. 추모 공연도 하지 마라. (조문객들) 밥은 배불리 먹여라.

생전 마지막 유언

 

 

김민기는 이후 '우리 모두 어린이이던 시절이 있었고, 결국 미래는 어린이들이다'라는 일념으로 어린이극에 몰두한다. 초기에는 번안 작품인 '우리는 친구다(2006)', '슈퍼맨처럼!(2008)', '그림자소동(2008)', '고추장떡볶이(2008)', '무적의 삼총사(2009)', '복서와 소년(2012) 를 대부분 무대에 올렸고, 이후에는 본인이 직접 창작하고 연출한 '도도(2011)', '유령놀이(2014)', '연이의 일기(2016)', '아빠 얼굴 예쁘네요(2016)', '진구는 게임 중(2017)' 등을 학전에서 공연하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장애아, 광부를 아버지로 둔 탄광의 아이들, 고아, 왕따 등 우리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또한 김민기 대표는 아이들의 삶 그 자체를 보여주는데 주력했으며 학전의 어린이극들에서는 전형적이고 자극적인 요소들은 거의 없었으며 '아이들에게 생 악기 소리를 들려줘야 한다'라는 그의 신념 때문에 학전의 어린이극은 전부 라이브 음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어린이극은 애초에 돈이 안되는 일이었고 심지어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도 연극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김민기 대표의 신념에 학전 어린이극의 입장료는 시세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었고 학전엔 적자가 한없이 늘어 몇 억으로 불어났다. 거기에 2020년에 닥친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학전은 직격탄을 맞은 거에 그치지 않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민기는 위암 말기 진단까지 받게 된다.

 

결국 학전은 2024년 3월 15일을 끝으로 1991년 3월 15일 개관으로부터 딱 33년 만에 폐관을 하게 된다. 이후 2024년 4월 21일부터 5월 5일까지 그의 일생과 학전의 역사를 다룬 SBS 스페셜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가 방영되었다.

 

김민기는 이후 자신이 연출했던 어린이극들을 좀 더 손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항암 치료를 이어갔지만 자신의 인생을 바친 학전이 폐관된 후 불과 약 4개월 만에 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2024년 7월 21일, 결국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기 며칠 전인 2024년 7월 17일에 기존 학전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서 정부 주도로 어린이, 청소년 중심의 공연장인 아르코꿈밭극장으로 개관했다.

 

 

추모

 

정치권

 

윤석열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김민기 선생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참 많은 것을 남겨주셨습니다. 당연한 것을 새롭게 보려는 '순수한 열정'으로, 세상을 더 밝게 만드셨습니다"라고 올렸다. 또한 "동숭동 학림다방에서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열정이 마음에 울림을 주었습니다. 역사는 선생님을 예술과 세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지닌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어린이를 사랑하셨던 선생님의 뜻이 '아르코꿈밭극장'에서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편히 영면하시기를 기원하며, 유가족께 위로를 전합니다"라고 전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이날 오후 빈소를 찾아 "김민기 선생은 우리 시대를 잘 대변하는 예술가였다. 후배들을 위해 훨씬 더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 세상을 떠나시게 되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라고 밝혔다. 이어 학전 극장의 후신인 아르코꿈밭극장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통해 잘 가꾸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페이스북에 "아침이슬은 세상에 나온 지 2년 만에 유신 정권이 금지곡으로 지정했습니다. 이 곡을 작곡한 김민기 역시 오랜 세월 탄압받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아침이슬은 세대를 넘어 온 국민이 애창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국민을 탄압하고 자유를 억압한 정권은 반드시 심판받는다는 사실, 역사는 생생히 증언합니다"라며 "부디 편안히 잠들기를"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김민기 님은 엄혹한 시대에 끝없는 고초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열망과 함께 영원한 청년정신을 심어줬던 분”이라며 “‘상록수보다 푸르고, 아침이슬보다 맑은’ 김민기 님은 멀리 떠나셨지만,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고 썼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자신의 SNS에 "김민기 선생은 자신이 장르였던 예술가이자 광대"라며 "1970년대 한국 포크 록의 시동을 걸었고, 출중한 기타 실력을 보유했다. 민중의 피와 땀과 눈물을 빼곡하게 채워놓은 가사는 당대 청년의 가슴을 쳤다"고 올렸다. 또한 아침 이슬을 언급하며 "박정희 정권의 유신 폭압을 목도하며 청년 김민기가 만든 노래"라며 "첫 소절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코끝이 쨍해진다면, 당신은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던 청년이었을 것”이라고 말했고, 빈소를 방문하여 조문하였다.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문체부 장관 재임 당시, 김민기에게 예산 지원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일화를 소개하고 고인을 다시 보지 못한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면서 "인생은 짧고 김민기 예술은 길이 빛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장관은 MBC 기자 시절 김민기와의 인터뷰를 추억하며 "김민기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더욱 구슬프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고 차라리 비가 내려주는 것이 위로가 된다."라고 추모했다.#

이해식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을 통해 "김민기는 시대의 진실을 노래했고, 낮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했다"며 "앞으로도 민주주의 현장에서 목청껏 불려 살아 숨쉴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아침 이슬과 상록수 등 시대의 정서를 담은 수많은 명곡을 만드셨고, 지하철 1호선을 비롯한 여러 극작품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전해 주신 시대의 거장"이라며 "고인은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그가 남긴 노래와 작품들은 우리의 마음에 영원토록 남아있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김부겸 전 국무총리는 김민기와 야학 시절에 인연을 맺었으며 "재야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형님"이라며 "술자리에서 말도 없이 씩 웃던 모습과 '뭘 하려면 제대로 해'라고 꾸짖는 모습이 기억난다"고 추억했다.

김민기의 경기고-서울대 선배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본인을 위한 일은 하지 않고 주기만 한 사람, 온 세상을 빚지게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김민기의 신정야학 시절 동료 교사였던 김준규 전 검찰총장을 비롯해 이해찬 전 국무총리, 김용균 전 행정법원장, 전병헌 새로운미래 대표 등도 조문했다.

 

 

문화예술계

 

평소 김민기와 가까웠던 가수 박학기는 자신의 SNS 계정에 김민기와 생전에 함께 찍은 사진과 "형님 감사했습니다. 아름다운 곳에서 평안하세요."라고 글을 남겨 애도를 표했다. 

학전 출신 배우 장현성은 빈소를 찾아 "조금 더 오래 저희 곁에 계셔주셨으면 감사했을 텐데 마음이 아주 황망합니다."라고 밝힌 후 "선생님 덕분에 저희가 건강히 좋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며 "부디 편안하게 좋은 곳으로 가시면 좋겠다"고 애도했다. 이후 발인식 날 김민기의 영정이 마지막으로 학전을 돌 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크게 오열하는 모습을 보였다.

배우 황정민도 이날 저녁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눈시울을 붉힌 채 장례식장 바깥에 있던 취재진들의 질문에 답도 하지 못하고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가수 조영남은 빈소를 방문해 "우리 친구 중엔 민기가 막내인데..."라며 말을 잇지 못하다가 "김민기는 73세에 죽었어도 요절"이라며 "세상에서 가장 늙게 요절한 천재"라고 김민기를 칭했다. 이후 중앙일보에 추모글을 기고하였다.

배우 오지혜는 페이스북에 "나의 영원한 뒷것. 나의 아저씨. 편히 쉬세요. 고마웠어요."라고 남겼다.

가수 이적은 김민기와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을 게재하며 "형님, 하늘나라에서 맥주 한잔하시면서 평안하시리라 믿습니다, 나의 영웅이여, 감사했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글을 남겼다. #

가수 윤도현은 인스타그램에 "저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이자, 존경하는 음악가 김민기"라며 "언제나 제 마음속에 살아 계실 김민기 선생님", "학전도, 선생님도, 대학로도 많이 그리울 것 같다"고 추모했다.

가수 알리는 "노란 머리 시절, 공연을 마치고 뒤풀이 장소에서 선배님 맞은편에 앉아 수줍게 술 한 잔 받은 날이 처음 선배님과의 만남이었다"며 "선배님 예술 인생의 발자취를 알게 되고, 느끼고, 노래로 조금이나마 체감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이제 주님 곁에서 평안과 안식을 마음 편히 누리시길"이라고 애도했다.

가수 김광진은 "존경하는 김민기 선배님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대학 시절 저희의 많은 부분을 이끌어 주신 음악들 감사드린다"며 "많은 것을 배우고 싶은 분이었다. 음악도, 삶도, 저희한테 주셨던 따뜻한 격려도 기억한다. 사랑합니다"라고 글을 남겼다.

배우 고현정은 인스타그램에 “김민기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고 방금 알았다. 아… 너무 슬프고 먹먹하다. 어쩌지. 마음이 마구 꿀렁거린다. 울렁거린다”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었다.

가수 정태춘은 빈소를 찾아 "김민기가 없었으면 나도 없었다"며 "막힌 시대를 뛰어넘는 상상력과 뒤통수를 치는 표현력에 큰 영향을 받았어요. 위대한 사람은 남은 이들에게 뜨거운 영감을 주고 떠납니다"라고 말했다.

소리꾼 장사익은 조문을 와 김민기를 "안개꽃처럼 뒤에 서서 음악을 아름답게 빛내주신 분"이라고 추억하며 "모든 진영이 '우리 것'이라고 우길 만큼 영향력 있는 음악을 만들고도 세상에 폼 한 번 잡지 않은 크고 높은 분", "아침 이슬을 참 좋아했다. 황망하다"고 했다.

밴드 다섯손가락의 이두헌은 "김민기 선생께서 돌아가셨다. 한없이 슬픈 날"이라며 "거장 김정호 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거의 일주일을 식음 전폐했었다. 오늘 김민기 선배님 부고를 들으니 같은 심정"이라고 밝혔다

시인 류근은 페이스북에 "갖은 고난을 이기고 상류에 이르러 그 육신마저 마침내 내어주고 스러지는 연어처럼, 온 생애가 저절로 타인과 나누고 베푸는 삶이었다"며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라고 썼다. 이어 "그곳에서는 부디 평화로우시길 빈다"면서 "우리 시련의 동산 위에 영원히 진주보다 고운 아침이슬 김민기"라고 덧붙였다.

배우 조승우, 류승범, 문성근, 김대명, 최덕문, 이황의, 강신일, 이병준, 배성우, 설경구, 감독 이창동, 방은진, 가수 김창완, 송창식, 정태춘, 윤형주, 이장희, 이은미, 권진원, 장기하, 유리상자 박승화,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등도 조문하였다.

가정음악의 신윤주 아나운서는 방송 진행 중 김민기의 별세 소식을 듣고 청취자들과 함께 그의 부고를 애도하였다.

세상의 모든 음악의 전기현도 <저녁에 쉼표, 하나>에서 평생 무대 뒤에 있으며 주목받기를 꺼린 김민기의 일생을 소개하였는데, 설명 중 울컥했는지 한참 동안 오디오가 비었고 울먹이며 힘들게 설명을 끝내었다. 뒤이어 그의 노래인 봉우리를 틀며 김민기를 추모하였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배철수는 7월 21일 당시 병원에 있었고, 방송에 복귀한 7월 22일 마지막 곡으로 아침 이슬 연주곡 버전을 틀며 김민기를 추모하였다. 또한 7월 26일 배철수의 음악캠프 3~4부 시간대에 김민기 추모방송인 '이종환의 밤으로의 초대-김민기 스페셜'을 긴급 편성했다. 1993년 3월 28일 방송된 '이종환의 밤으로의 초대' 재방송이고 배철수가 나레이션을 맡았다.

최백호의 낭만시대의 최백호는 7월 21일 방송을 김민기 헌정 방송으로 꾸며 이날 김민기의 노래만 틀며 고인을 추모하였다.

김민기의 서울대 후배인 이수만은 빈소를 찾아 "역경과 성장의 혼돈 시대, 대한민국에 음악을 통해 청년 정신을 심어줬던 김민기 선배에게 마음 깊이 존경을 표하며 명복을 빈다"며 발인식 하루 전인 7월 23일 조의금으로 5,000만 원을 건넸지만 유족들은 마음만 받는다고 밝히며 정중히 거절했다.

평소 김민기의 페르소나라고 불렸던 양희은은 여성시대 양희은, 김일중입니다의 7월 24일 방송분에서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선곡한 뒤 “가수이자 작사, 작곡가, 공연 연출가, 그런 수식어로도 부족한 김민기 선생이 돌아가셨다”며 “선생의 음악을 아끼는 당당이(청취자 애칭)님들과 함께 선생의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기도한다”고 말하고, 고인과 자신 사이의 깊었던 인연을 회상했다. 

김민기와 경기고-서울대 미대 동창이자 김민기의 가수 활동의 시작 '도비두'의 멤버였던 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는 김민기와 함께 듀엣으로 부른 음악 '친구'를 페이스북에 공유하며 "가장 사랑하면서도 존경하는 친구를 하늘나라로 보내며 만감이 교차한다."며 아무리 주위에서 김민기를 ‘운동권의 대명사'처럼 이야기해도, 고등학교 때부터 내가 보아온 민기는 그냥 순박한 예술가다."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이후 한국경제에 추모글을 기고하였다. 친구여, 설움 없는 새 세상에서 영면하시게

 

 

학계

 

노래를 찾는 사람들 출신이자 책 '김민기'의 작가 김창남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페이스북에 추도사 요청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어 "(민기) 형에 관해 참 많은 글을 써왔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쓸 수 없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썼다.

김민기와 50년지기인 유홍준 명지대학교 석좌교수는 "겸손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밖으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다"며 "하지만 그가 문화예술을 고집하며 이룩한 것들은 우리의 어마어마한 문화유산이 됐다"고 강조했다.

김민기와 경기고-서울대 동창인 유재원 그리스협회 명예회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잘 가시게, 친구야, 자네와 우정을 나눌 수 있어 영광이었던 삶이었네. 고맙네. 이제 고통없는 저 너머 세계에서 편히 쉬시게. 안녕히... 마지막 인사네."라며 추모글을 남겼다.

 

 

 

 

한국스카우트연맹은 고인이 17살부터 스카우트에 가입하여 활동했던 이력을 언급하며 "소년을 위한 스카우팅을 몸소 실천해 오셨던 김민기님의 조의를 표하며, 그의 가족과 가까운 분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며 애도글을 올렸다. #

김민기가 초대 사무총장을 맡기도 했었던 한살림은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에 한살림 활동 중의 김민기의 여러 사진을 올리며 "육체의 고통도, 삶의 시름과 기쁨도, 음악과의 깊은 사랑도, 한살림과의 작은 인연도 훌훌 털어 버리시고 한없이 한없이 자유로우시길 기원합니다."며 애도하였다. 



노래를 작곡할 때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즉석에서 작곡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산문을 쓰고 악상이 떠오르면 바로 쓴다고 한다. 상록수, 친구, 기지촌,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그렇게 작곡된 노래들이며, 이는 김민기의 지인에 의해 밝혀진 내용이므로 아직 밝혀지지 않는 즉석곡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른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민중가요인 아침 이슬과 상록수를 작사/작곡한 전설적인 민중가수임에도 정치적 의견을 직접적으로 피력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의 운동권 예술가들은 현실 정치로 진출한다든지 하다못해 성명서에 동참하며 정치적 의견을 직접적으로 피력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김민기는 간접적으로만 정치적 표현을 했을 뿐 직접적으로는 본인의 정치적 의견을 전혀 밝힌 적이 없다. 물론 그의 노래가 군부정권 시절 미친 영향력은 수도 없이 크지만 정작 김민기 본인이 공식 석상에 나오기를 꺼리는 것과 더불어 직접적으로 본인이 정치적인 인물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던 것은 김민기의 오랜 특징으로 꼽힌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학살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광주로 향했으나 장성에서 계엄군에 막혀 실패했다고 한다. #

광주광역시와는 또다른 인연이 있는데 당시 5.18 민주화운동 참여자이자 신예 작곡가였던 김종률과 무등산을 함께 등반한 후 '이곳이 무등산 타잔 박흥숙이 살았던 곳이고 어제가 그의 사형이 집행된 날이다' 라며 김종률에게 '민중과 민주화, 자유를 위해 노래하라' 고 당부했고 김민기와 헤어진 이후 김종률이 틈틈이 작곡하던 노래집 중 한곡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2016년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국의 노벨문학상 후보로 잠시 언론이 뜨거워기도 했다. 같이 언급된 것은 일본의 하루키 작가이며, 어떤 기사는 한국의 밥 딜런으로 한대수를 언급하기도 했다. #

윤이상, 백남준과 더불어 국내의 세 번째 괴테 메달 수상자다. 수상 작품은 뮤지컬 지하철 1호선.

김민기가 창단한 극단 학전이 배출한 배우들이 꽤 유명하다. '학전 독수리 오형제'로 널리 알려진 김윤석, 황정민, 설경구, 조승우, 장현성 등 모두 대학로의 학전을 한 번씩 거쳐간 인물들이다. 학전은 동명의 직영 소극장도 대학로에 33년 가까이 운영했었지만, 2023년 말년을 바라보는 김민기 본인의 병세 악화와 경영난으로 인해 극장 문을 닫게 되었다. 그 외에도 전배수, 이정은, 배성우, 배해선, 김희원, 안내상, 김원해, 방은진, 나윤선 등 열거 할 수 없이 많은 이들이 학전을 거쳐갔다. 노래로 유명한 학전 출신 가수는 김광석, 유재하, 김민기 본인 등이 있다.

 

김광석추모사업회의 회장이다. 김광석 다시부르기 프로젝트도 그의 소관이라고. 생전에 김광석은 김민기 덕에 대학로의 스타가 될 수 있었고, 김민기 또한 그의 등장으로 학전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서로가 은인인 셈. 김광석 관련 사업을 생전 그의 멘토였던 김민기가 맡는 것에 이의를 품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김광석 다시부르기 프로젝트로 약 4억 3000만원이 모였고, 혹여 가능하다면 이를 통해 2018년이나 혹은 그 다음 해에 김광석의 이름을 딴 장학 재단을 만들겠다고 김민기가 직접 언급했다. 

 

휘파람을 잘 분다. 1971년 김민기 첫 앨범에 수록된 연주곡 '눈길' 의 휘파람 반주도 본인이 직접 불렀고, 22년 뒤 녹음한 그사이와 천리길의 휘파람 반주도 본인이 직접 불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낮은 것을 단점으로 여기는 듯하다. JTBC 뉴스룸의 인터뷰에 등장했을 때, 자신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손석희에게 자신은 목소리가 낮아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대답했다. 김민기의 노래인 봉우리, 친구, 가을편지 등이 낮고 나긋한 목소리로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던 것을 생각하면 의외인 점이다.

김민기의 팬 사이트 격으로 김민기 마이너 갤러리가 개설되었다. 김민기 마이너 갤러리

김민기의 추모사이트 아름다운사람, 김민기가 24년 7월 29일 개설되었다.

 

 

인간관계

 

양희은

양희은이 김민기의 재동초등학교 1년 후배. 아침 이슬을 양희은에게 건넴으로써 양희은의 히트적인 데뷔에 도움을 주었다. 이외에도 양희은의 많은 히트곡들을 작곡하여 양희은이 70년대의 일약 스타로 도약하는 것에 크게 공헌했다. 사실상 지금의 양희은을 만든 것이 김민기라고 말하는 것도 과하지 않다. 양희은의 동생 연극배우 양희경과도 친분이 있다고 한다.

 

한대수

녹음불

'행복의나라 2013' 뮤비에서 한대수가 자신과 전인권, 김민기를 '녹음불가 3형제'로 칭하고 있다.

세 사람 모두 이제는 나이가 들어, 현역에서 은퇴하여 더 이상 음반 녹음이 힘들다는 뜻.

김민기와는 절친한 관계. 한대수와 김민기 모두 대한민국 포크 음악을 발전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했으며, 음악이 메시지를 띠고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실제로 1971년 김민기의 앨범에 한대수의 음악 '바람과 나' 가 실리기도 했고, 한대수도 2013년에 부른 '행복의 나라' 에서 '이제 나이 들어서 (음반을) 녹음할 수 없는 사람들' 로 김민기와 전인권을 뽑았다. 이를 통해 전인권과의 커넥션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영세

김민기의 대학시절, 김민기가 만든 2인조 밴드 '도비두' 의 멤버였던 인물. 김민기와는 절친한 관계라고 한다. 현재는 산업 디자이너로 이노디자인의 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김지하

김지하와도 제법 연을 맺었는데, 김민기는 시인 김지하를 고평가하며 그가 가수가 되는 과정에서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에 쓰일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다만 그의 정치적 성향과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김지하가 말년인 2010년대 한동안 박근혜를 지지하는 등 정치적 행보를 보인 것에 대해 김민기는 사적인 정도 섞어서 김지하와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예전에도 문화운동 쪽에서는 김지하 옆에 내 이름이 늘 따라붙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꼭 하는 말이 있었다. 내가 김지하한테 무한한 고마움을 가지는 건, 내게 우리말의 생동성을 처음 깨우쳐준 선배라는 점. 문자에 갇혀 있지 않고 살아 있는 말의 생동성. 그게 판소리하고도 통하는 건데… 그래서 내가 학전 배우들한테도 유난히 강조했던 게, 배우는 ‘모국어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이었다. 그 점에 있어선 여전히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난 그 양반의 사상적인, 정치적인 입장에는 전혀… 그건 나와 무관한 일이고 영향을 준 바도 없어. 최근 몇 년 동안 그 양반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도 난 뭐 코멘트 할 게 없지. 그건 그 양반 생각이고.”

한겨레 인터뷰

 

김광석

김광석이 처음 데뷔를 하게 된 것이 김민기의 극단 '학전'의 배우로서였다. 처음에 김광석이 김민기 앞에 왔을 때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학전이 빚을 떠안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불렀는데, 의외로 큰 히트를 거두었다고 한다. 땡볕 아래 사람들이 모두 학전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고 할 정도. 김민기는 그를 보고 '싱어송라이터들은 대개 자신들의 노래만 진창 부르려고 하는데, 그는 다른 이들의 좋은 노래도 부르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그의 좋은 점이었다' 라며 그를 칭찬했다. 김광석 사후, 김광석 추모사업의 회장을 맡았다. 김광석 추모사업 중 하나였던 '김광석 다시부르기' 콘서트로 인하여 학전에 사람들이 쏠리니, 밖의 대형 극장으로 콘서트를 옮겼다. 한 기자가 '오는 돈도 마다하는 것 아니냐' 라고 물어보니, "나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지, 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일언했다. 김민기는 사망 몇주 전 후배 가수 박학기와의 통화에서 마지막으로 "광석이 추모 공연을 김광석추모재단과 잘 진행해 달라"는 부탁을 남겼다고 한다.

 

송창식

공장의 불빛을 만들 때도 송창식의 개인 녹음실에서 송창식이 직접 녹음해주었고, 김민기 앨범 1에 수록된 송창식 작곡의 '내나라내겨레', 송창식이 부른 김민기 작곡의 이 세상 어딘가에 등, 김민기와 굉장히 많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둘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뉴스, 기사는 없지만 굉장히 친했던 듯. 사실 자칫 발각되면 함께 연행될 수 있었던 공장의 불빛의 녹음을 도와주었다는 것 자체가 어지간히 믿는 사이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희은이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송창식은 김민기에 대해 이야기하길 "아마 김민기가 세상에 나왔다면 나는 없었을 거다"라고 말했다고... 반면에 김민기는 송창식을 형님으로 칭하면서 대인이시며 자신에 대한 송창식의 평가에 매우 쑥스러워하는 인터뷰가 있다. 한수진의 선데이클릭.

 

이수만

이수만이 1살 어린 동생으로, 같이 동아리 활동도 한 서울대 후배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수만이 평소 김민기를 형님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1978년 유신 정권 시절 가수였던 이수만이 밤무대에서 김민기가 만든 금지곡 아침 이슬을 불렀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을 뻔한 적도 있었다. 김민기가 사망한 2024년 7월 22일에도 직접 빈소를 찾아 "역경과 성장의 혼돈 시대, 대한민국에 음악을 통해 청년 정신을 심어줬던 김민기 선배에게 마음 깊이 존경을 표하며 명복을 빈다"라고 애도했다고 전해진다. 발인식 하루 전인 7월 23일엔 조문객 식사비용하라며 조의금으로 5000만원을 건네기도 했지만 유족 측이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며 받진 않았다. 이전에도 이수만은 생전 고인이 운영하던 학전이 폐관할 당시 1억 원 이상을 쾌척했다고 알려졌다. 많이 존경했던 모양.

 

전인권

들국화의 전인권은 김민기가 프로듀싱한 겨레의 노래 음반에 참여해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다. 당시 곡 해석을 둘러싸고 김민기와 의견이 달랐다고 한다. 전인권에게 김민기는 우상이자 컴플렉스고 대한민국에 둘도 없는 천재다. 관련 기사.

전인권이 필로폰 복용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을때 김민기가 증인으로 출석해 전인권에 관해 증언한 바 있다.관련글 관련기사 관련기사

 

정운찬

전 국무총리인 정운찬에게 부인될 사람(서울대 미대 동문)을 소개해주었다고 한다 

 

조용필

음악평론가 강헌의 주선으로 조용필과 방배동 근처에서 만나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조용필이 노래방 기기로 아침이슬을 불렀다고 한다. 당시 만남에 대해 강헌이 다소 과장된 어법으로 흥미진진하게 얘기한 바 있다. '김민기와 조용필의 만남' - 강헌. 조용필이 아무래도 김민기보다 늦은 시기에 활동한데다가 주요 음반이 현대가요이기 때문에 김민기보다 젊을 것 같지만, 알고보면 김민기가 조용필보다 1년 후배이다.

 

설경구

설경구는 무명 시절 지하철 1호선에 출연을 하면서 연기 경력을 쌓았고, 당시 연출자였던 김민기를 은인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설경구 말고도 황정민, 김윤석, 장현성, 조승우는 학전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학전의 독수리 오형제’라는 호칭과 함께 신인 시절 대학로에서 주목을 받았다.

 

조영남

조영남과는 젊었을 때부터 친한 사이로 술을 같이 자주 마셨다고 한다. 관련기사. 조영남과 쎄시봉 멤버들이 김민기의 환갑잔치를 해주었다고 하며, 이와 관련해 조영남이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때 TV 출연이 손에 꼽히는 김민기가 무려 공중파 방송에서 전화연결로 깜짝 출연한 적이 있다.

 

최성원

들국화의 최성원에게도 김민기는 우상이자 존경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들국화 1집 이후 매니저 김진성씨와 함께 했던 이유가 바로 김민기의 음반을 제작했기 때문이라고.. 더 나아가 음악적 사상이나 철학에도 영향을 미친 듯 하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사회적 의식은 백기완 선생과 김민기 형으로 끝났다고 할 정도. 













긴 밤 지새운 아침이슬… 그는 한 시대의 ‘금지곡’이었다

 

나의 별 운운하는 글이 신문에 실렸을 때 가장 화를 낼 친구는 바로 김민기다. 그는 수틀리면 화를 낸다. 나는 그의 어린 아들한테 용돈을 건네줬다가 된통 혼난 적이 있다. 돈 좀 있는 내 친구를 앞세워 화려한 술을 샀다가도 혼난 적 있다. 그가 화를 낼 땐 잠시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가 왜 벼락같이 화내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어설픈 돈 자랑이나 힘자랑을 하는 인간을 싫어한다. 타협할 줄 모른다는 얘기다. 그만큼 바른 결을 타고났다. 나는 이날 이때까지 그처럼 결 좋은 인간을 만나 본 적 없다.



몇 달 전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동숭동에서 만나 뮤지컬 한 편을 보고 큰길가에 있는 학림다방 2층에 올라가 오전 1시(?)경까지 술을 마셨다. 헤어질 때가 되어 강남행 택시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가 아무 말 없이 앞자리에 타는 게 아닌가. 나는 급해서 소리쳤다. “야! 맹갈아(우리는 옛날부터 그를 맹갈이라고 불러 왔다. 그냥 그렇게 불렀다.) 너는 집이 일산 방향이잖아. 나는 지금 강남으로 가는 거야. 너는 길 건너가서 일산 가는 택시를 잡아야지.” 맹갈이가 답했다. “형, 알아, 알아. 그냥 가자고. 내가 강남까지 모셔다 드리고 다시 일산으로 가면 될 것 아냐. 걱정 말라고.” 세상 어느 누가 김맹갈의 고집을 꺾을 수 있으랴. 우리는 그렇게 갔다. 나는 몇 차례 맹갈이에게 물은 적이 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처음 만났지?”



우리는 첫 만남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없다. 내 기억엔 군대생활 막판에 그를 집중적으로 만났던 것 같은데 확실치 않다. 그는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를 막 내놓은 서울대 미대 2년생이었다. 군부통치 시절이라 장발 파동, 대마초 파동, 금지곡 파동 등 온갖 우스꽝스러운 일로 뒤숭숭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맹갈이와 나를 변함없이 묶어 준 건 다름 아닌 술이었다. 세상에 그자처럼 술을 맛있게 마시는 인간이 또 있을까.



그는 삐쩍 말랐지만 남미 혁명가 체 게바라를 방불케 하는 체력과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세 한번 흐트러지지 않고 3박 4일 논스톱으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나는 그자에게 단 한 번도 술을 적게 마시라는 소리를 해 본 적이 없다.



누가 술 마시지 말라고 해서 안 마실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 나는 어차피 술 만 마시다 생을 마감할 녀석, 나중에 괜히 ‘어이구, 살아 있을 때 그렇게 좋아하던 술이나 실컷 사줄걸’ 하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원 없이 술을 사주었다.



내가 미술로 가는 길을 터 준 것도 사실은 김민기였다. 군대 시절 그를 만나러 동숭동 서울대 미대 캠퍼스로 가서 널려 있는 미대생 실습작을 보며 “야, 내가 발가락으로 그려도 이것보다 잘 그리겠다” 했을 때 그자가 ‘우핫핫핫하’ 웃으며 “형이 그려야 해. 우리보다 잘 그릴 거야” 하는 바람에 그때부터 캔버스와 유화물감을 잔뜩 사 가지고 부대에 들어가 짬만 나면 그림을 그려 담았다. 그는 평소에 조용하다가도 한번 냅다 웃으면 그 웃음소리가 임꺽정이나 장길산을 방불케 했다. 나는 늘 그의 티없는 웃음소리에서 한없이 곧은 결을 보곤 했다.



내가 주말 휴가를 나오면 둘이 함께 미아리 근처 내 여자친구 집으로 몰려가 나는 마루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김민기는 기타만 둥둥 쳐 댔다. 온종일 음대생은 그림을 그리고 미대생은 기타를 쳐 댔다. 아주 우스꽝스러운 자리바꿈이었다.



나는 그가 평생 노숙인으로 살아갈 줄 알았는데 어쩌다 지금은 문화경영자가 되어 여간 다행이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타고난 예술성에 경영력까지 겸비한 매우 드문 타입의 인간이었다. 그의 탁월한 예술성은 그가 만든 ‘아침이슬’이라는 노래 하나만을 뜯어봐도 알 수 있다. 감히 말하건대 그의 노랫말은 김소월 윤동주 정지용에 손색이 없고 작곡 솜씨 또한 김동진 윤이상에 버금갔다. ‘아침이슬’을 쓴 음률시인이 대학 시절 졸업 학점이 모자라 한 학기 낙제했다는 일화를 윤병로 서울대 미대 교수한테 듣고 한참 웃었던 적이 있다.



내가 군에서 제대한 뒤 생전 처음 미술전시회를 열게 해 준 것도 김민기였다. 그는 일개 미대생에 불과했는데 탁월한 경영력으로 안국동 골목에 있던 ‘한국화랑’을 빌려 아마추어 화가 ‘조영남 전시회’를 열어 주었다. 팸플릿에는 그가 미술평론까지 썼다. 그때의 필명이 ‘김맹ㅱ’이었다.



내가 미국으로 간 뒤 우리의 친교는 편지로 이어졌다. 젊은 날 그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쫓기는 신세로 일관했다. ‘아침이슬’이 화근이었다. 그 노래가 이른바 운동권 주제가로 둔갑하는 바람에 자동으로 찍힌 몸이 되었던 거다. 그때 그가 시골로 내려가 농사도 짓고 야학도 하고 빵공장에 취직한 걸 편지로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편지가 끊겼다. 나는 7년 뒤 귀국하는 길에 비행기 안에서 소식이 끊긴 친구를 위한 노래를 하나 지었다. 외국 곡에 가사를 붙였는데 ‘김 군에 관한 추억’이라는 노래다. 그때 마침 김민기가 고생고생하다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아 추모가를 만들었던 거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그는 멀쩡했다. 그 노래는 사장됐고 그로부터 20여 년 뒤 내 가수 생활 ‘30주년 기념음악회’ 무대에서 공개되었다. 관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20여 년 만에 그 노래를 불렀다. “여러분! 제 친구 김민기가 죽었다 치고 노랠 들어 주십시오.” 그날 밤에도 우리는 오전 4시까지 술을 퍼마셨다. 그의 웃음소리와 심성의 결도 여전했고 술 마시는 솜씨도 여전했다.



조영남 가수

 

김민기 1집 (1971年)
친구 아하 누가 그렇게 바람과 나
저 부는 바람 꽃 피우는 아이
아침 이슬 그날 종이연
눈길(연주곡) 세노야* 4월**
김민기 전집 1 (1993年)
가을편지 내 나라 내 겨레 두리번 거린다
꽃 피우는 아이 아침 이슬(연주곡) 아침 이슬
잃어버린 말 아름다운 사람 그날
친구 잘가오 Morgentau
김민기 전집 2 (1993年)
새벽길 나비
혼혈아(종이연) 그사이 고향 가는 길
철망 앞에서 눈산 차돌 이내몸
아무도 아무데도 바다 눈길(연주곡)
김민기 전집 3 (1993年)
상록수 기지촌 가뭄
식구생각 서울로 가는 길 늙은 군인의 노래
강변에서 주여, 이제는 여기에 소금땀 흘리흘리
밤뱃놀이    
김민기 전집 4 (1993年)
봉우리 아하 누가 그렇게 백구
작은 연못(연주곡) 날개만 있다면 작은 연못
인형 고무줄 놀이 천리길
아침(연주곡)    
그 외 나무위키에 등재된 작품
소리굿 아구 공장의 불빛 이 세상 어딘가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 1 지하철 1호선 의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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