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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 하버, 1918년 노벨화학상, 독가스, 질소 정제, 공중질소합성법, Fritz Haber

Jobs 9 2024. 12. 28.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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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 하버
Fritz Haber
1918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출생
1868년 12월 9일
북독일 연방 브레슬라우
(現 폴란드 브로츠와프)
사망
1934년 1월 29일 (향년 65세)
스위스 바젤
국적
독일 

학력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베를린 공과대학교

수상
철십자 훈장 (1915)
노벨화학상 (1918)
럼퍼드상 (1932)
종교
유대교 →개신교 (루터회)

독일의 화학자. 공기에서 빵과 죽음을 만든 과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하버는 질소 정제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인공비료의 개발을 가능케 만들었다. 이는 인류의 오랜 염원이었던 식량 생산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이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하버는 독일을 위한 비뚤어진 애국심에 사로잡혀 1차 대전 당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독가스를 개발하기도 했다. 

생전 그는 순전히 애국심으로 조국인 독일을 도울 발명에 힘썼지만, 1차대전 후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반유대주의의 광풍이 몰아치자 연구소장직을 사임하고 독일을 떠났다. 하버의 가문은 유대인 공동체를 후원하며 유대인 전통을 지켜나가긴 했지만 회당을 잘 출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군복무자였기 때문에 추방령에 따르지 않아도 됐지만, 프리츠 하버는 '조국이 원한다면 따르겠다'라고 하면서 추방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추방된 다음 해 스위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하버가 개발해놓은 독가스는 홀로코스트에 사용된 독가스의 기초가 되어 수많은 유대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연히 독일에 남아있던 하버의 친척들도 그렇게 죽었다.  

 

 

맬서스 트랩이 정설이던 시대
프리츠 하버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정설로 통하던 시대에 태어났다. 당시 인류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생산은 이를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는 맬서스의 인구론을 정설로 받아 들였으며 저소득층의 인구를 줄여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현자로 통하던 시대였다. 영국이 이 주장을 받아들여 빈민구제국의 폐지를 논의했고 예산을 대폭 깎아버리기도 했다. 이것이 정설로 통한 이유는 당시 주요 식량공급원이 농업이고, 농업은 토양의 질소농도에 따라 수확량이 결정되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는 질소-산소 기반의 대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공기 중에 넘처나는 것이 질소인 행성이지만, 공기중의 질소는 삼중결합을 가진 분자이며, 이 삼중결합을 끊는데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따라서, 최대한 쥐어짜서 살아가고 있는 몇몇 박테리아 종류를 제외하면 스스로 삼중결합된 질소를 이중결합 질소 화합물로 바꾸어 토양에 고정 시키는 생물은 없다시피하다. 

실질적으로 토양에 질소 화합물이 새로 공급되는 것은 무언가 격변 수준의 이유로 어디선가 유황 따위의 광천 질소 화합물이 생성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번개로 인해 대기 중의 삼중질소가 질소 화합물을 형성하여 토양에 공급되는 것 뿐이며, 인류가 활용한 비료들은 죄다 이미 존재하는 질소를 재활용하는 것에 가까울 뿐, 없던 질소 화합물을 새로 만들어 공급하는 것에는 굉장한 제약이 따랐다. 

전통적으로 오줌이나, 초식 동물의 똥을 정제하여 비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고, 때문에 오줌과 화장실은 징발대상 물자였을 수준이며, 오줌을 모으는 것이 애국이니 지정된 화장실만 이용하자는 공익광고가 18세기 말 ~ 19세기 초에 돌았을 정도였다.  

이렇게 획득한 비료의 효율을 끌여올리고, 비료의 원료가 될 수 있는 물질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끝없이 이어져왔다.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러 화학이 급격히 발전함에 따라 지력의 근원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가 쌓이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비료의 품질과 생산 효율도 급격히 증가했다. 

1800년대 초에 이미 암모니아 등 질소 화합물이 식물의 생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으며, 오줌에 질산 화합물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는 사실도 이미 밝혀졌다. 그에 따라, 질소 화합물이라면 대부분 비료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런 질소 화합물을 토양에 적합한 비료로 정제, 가공하는 기술도 급격히 발전하여, 빅토리아 시대에는 이미 흔히 생각하는 똥 비료와는 한참 거리가 먼, 현대적인 합성 비료에 가까운 물건들이 대량 생산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에서 질소를 창조할 수는 없었으며, 질소 화합물 기반의 공장 생산 비료들은 결국 어딘가서 퍼온 질소 덩어리에 대부분을 의존해야만 했다. 게다가 질소 화합물은 화약의 핵심 재료였기 때문에, 질소의 용도는 농업에만 국한되는게 아니라 폭약이 매우 중요한 광업에도 대규모로 필요하여 모든 산업의 병목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서구 열강들은 언제나 질소 화합물 공급처 확보에 혈안이었으며, 구아노와 초석 같은 광천 질소 화합물 공급처는 처절한 전쟁을 벌여서라도 확보해야하는 전략자원이었다. 즉, 이 시기에는 이전처럼 오줌으로 비료랑 폭탄을 만드는 고생은 필요 없고 할 의미도 없었지만, 무에서 질소를 만든다는 표현보다는 "돌로 비료와 폭탄을 만들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탐험의 시대를 거쳐 발견한 지구의 모르던 장소들에서 대량의 초석이나 구아노 등 우수한 광천 질소 화합물 매장지가 발견되었고, 이 풍부한 질소 천국을 왕창 캐낸 덕분에 일시적으로나마 엄청난 풍작을 누린 시기가 찾아왔을 정도였다. 적어도, 질소 화합물의 노천 광산이 죄다 고갈되어 땅 깊이 파고들어갈 필요가 생기기 이전까지는 비료 걱정도 폭탄 걱정도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편리한" 질소 화합물 공급처는 빠르게 고갈되었고, 질소가 일시적으로 넘치던 시간은 금방 끝나고 점점 불어나는 질소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시기가 찾아왔다. 일시적인 질소 펌핑과 그에 의존한 산업화 덕에 불어난 인구는 얼마 못가 흉작의 위협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엄밀히 말하면 평작이다) 게다가, 광산 파고 전쟁할 폭탄 값까지 오르기 시작, 생산성 하락과 인구 부양력 미달이 동시에 다가왔고, 이에 사람들이 다시금 기아의 공포에 시달리며 멜서스 트랩 같은 무시무시한 논리가 창궐하던 유럽에, 독일 제국의 한 화학자가 놀라운 사실을 발표한다.    

 

 

질소고정법의 발명: 인류의 풍요를 가져오다

프리츠 하버가 공기 중에 존재하는 질소를 인공적으로 농축해 암모니아로 합성하는 공중질소합성법을 발명함으로써 인공 질소 비료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안정적인 질소 공급이 가능해지자 더 이상 휴경지나 콩농사, 감자농사를 반복할 필요가 없어졌고, 드디어 인류는 원하는 만큼 식량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인공질소비료의 공급 3년만에 식량 생산량은 인구증가량의 2배를 기록, 사실상 맬서스 트랩을 폐기시켰다. 그의 발명 덕분에 세계 각지에서 식인, 영아살해, 노인/장애인의 유기 등 비윤리적인 전통이 사라졌고, 세계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해 1900년대에 16억에서 2000년대에 80억을 넘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프리츠 하버를 유럽의 구세주로 만들었고, '공기로 빵을 만드는 과학자'라는 명예가 그에게 붙었다. 사실상 현대인들의 태반이 그의 발견이 없었으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독성 증가나 토양 유실이 아니라 아예 지력 자체가 쇠해서 사막화가 훨씬 빨리 진행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근본적인 생산력 부족으로 인해, 19세기 초부터 심각했던 산업으로 인한 공해를 감축할 만한 여유가 생길 정도로 경제 규모가 커질 수도 없었을 테니, 오히려 지구 환경이 더 빨리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 되면 되었지, 지금처럼 환경 오염, 지구 온난화 등으로 인류가 망하네 마네 하는 이야기를 꺼낼 여력이 생길 일 따위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질소 비료가 없으면 가축의 사료로 이용할 옥수수나 콩을 마구잡이로 기를 수 있을리 없으니 지금처럼 고기가 펑펑 쏟아지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질소 비료는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이래에 수천 년 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기생충으로부터 상당 부분 해방시켰다.

또한 공중질소고정법으로 생산된 암모니아를 백금촉매로 산화시키는 오스트발트법으로 질산을 만들고 질산은 TNT 등 각종 화약의 원료가 된다. 대부분의 폭약은 질소성분이 포함되어있어 공중질소고정법은 구아노 등 제한된 천연질소광물로 만들던 화약을 값싸게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덕분에 광업에 필요한 폭약 제조 비용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광업 산출도 대폭 증가하게 된다. 그야말로 공기에서 화약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혁신으로 인해 기존은 꿈도 못 꾸었던 크고 아름다운 토목, 건축 사업이 가능해진 것은 덤이다.  

또한 이렇게 펑펑 찍어낼 수 있게된 질소 비료와 폭약은 곧 전쟁 수행력의 폭발적인 증가와 직결되었다. 인류는 이전과 비교되는 풍요와 넘처나는 식량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한 생산력은 부국강병의 근원이 되었다. 생산력이 늘어났으니 더 많은 비용을 군사력에 투입 할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답이 안 나오게 비싸던 폭약이 펑펑 쏟아지니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고화력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덕분에 인류는 무한히 성장하는 산업 역량, 무한히 증가하는 군사력 등이 보장되는 시대를 누리게 된다. 이 모든 것은 하버-보슈법 등장 이전엔 누릴 수 없던 풍요였다.  

프리츠 하버가 여기에서 멈췄다면, 그는 인류가 문명을 이루고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수십만 년 동안이나 시달려 온 기근이라는 공포를 없앤 인류 역사상 최고의 화학자로 불려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는 독가스 발명이란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

 

 

 

어둠의 발명: 독가스


인류, 그리고 그 인류를 대표하는 자국의 승천에는 끝이 없어보였고, 밝고 활기차고 영광스러운 미래가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인류는 전근대적 사고 방식을 온전히 벗어던지지 못하고 편협하고 경직된 전통적 국가관을 고수했다.

하지만 제 아무리 하버-보슈 법이 무한한 생산력 증대를 보장해도, 열강들에게 대판 깨진 소위 "비문명국"들이 그러했듯 전근대적 사고에는 한계가 있었다. 무한정 증가하고 있는 생산력이 성장하는 속도보다 인류가 생산력을 소모하는 속도가 더 빨랐던 것이다. 무한히 확장될 것 같았던 식민지들도 최후의 미개척지, 어둠의 대륙 아프리카의 분할이 끝나고 나서는 물리적 한계에 도달했고, 기존 식민지 또한 유지비가 산출량을 초과한지 오래였다. 경제, 문화, 사회, 정치적 문제점이 누적되고 누적된 결과, 인류는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을 향해 달려갔다. 

프리츠 하버는 이러한 시대상의 전형적인 유럽 국가 시민이었다. 즉, 그는 강경한 주전주의자 겸 국수주의자로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승리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면모를 보였다. 

결국 하버는 공기에서 빵과 폭탄과 총탄뿐만 아니라, 조금 다른 폭탄도 만들어 내었다. 새 시대의 새 전쟁에 걸맞은 새로운 무기, 곧 독가스가 등장한 것이다.

하버가 독가스의 제조이론을 완성할 즈음, 같은 화학자이자 부인이던 클라라 임머바르는 남편이 완성한 독가스의 위험성을 파악하고 더이상 연구하면 안된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하버는 이를 무시했고 클라라 임머바르는 비탄에 빠져 자살해버렸다. 아내의 자살은 오히려 독가스의 개발을 억제하는 사람이 없어진 프리츠 하버의 연구를 진척시키는 촉매가 되었고 하버는 독가스의 실험검증을 마치게 된다. 실험검증을 통해 유효성을 확인한 하버는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독가스를 사용해야 한다는 제안을 군상층부에 뿌리고 다녔다. 

하버가 독가스 사용을 주장한 시대엔 대량살상무기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지만 살상목적의 독극물사용은 1899년 국제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는 화포류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버는 독가스(염소 가스)를 통나무에 넣어 묻어놓고 적들이 근처에 오면 병사들이 가서 터뜨리는 방법을 제안했고 독일 제국군은 이 방법을 통해 교묘히 국제법을 피해갈 수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군도 독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최루탄을 사용한 전적이 있기에 명분도 있어 신나게 공격을 하곤 했다. 
 
국제법을 피해갈 수 있었지만 반인륜적이라는 비난은 피할 수 없었고, 후에 하버 스스로도 이를 반성했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은 1914년 7월 28일 시작되었으므로 하버는 조국인 독일이 국제법을 위반해야 한다는 강요를 하고 다닌 것이다. 하버가 대놓고 국제법을 위반하자는 제안을 하고 다닐 수 있었던 건 그의 업적으로 독일의 모든 체제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하버가 확립한 공중질소고정법은 화약을 만드는 데도 필요했고, 농업에 필수적인 비료를 만드는 데도 필요했다. 독일은 식량과 무기, 비밀병기를 모두 하버의 화학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셈. 게다가 1차 대전 당시 독일 본토는 영국 해군에 가로막혀 해상으로 물자 보급이 막힌 상태였으니 하버의 업적이 없었다면 독일은 전선유지는 커녕 빠르게 고사했을지도 모른다. 

독가스를 사용하자는 하버의 제안을 확인한 독일군 상층부는 종전 후 국제법 위반을 한 것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될 것이라 예측, 하버의 제안을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했고 최종적으론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란 고정관념을 내세워 하버의 독가스 사용 제안을 근본적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하버는 군대의 상층부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수 있는 업적을 쌓아 올린 인물이고 전선고착이 장기화되자 상층부에서도 "이길 수 있다면 무슨 짓이건 못하겠는가?" 라는 강경론자들의 주도로 독가스가 전쟁터에 투입된다. 

그리고 엄청난 효과를 거두며 하버의 뜻대로 독가스는 고착된 전선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주요 전술이던 참호전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버린 독가스의 유용성은 독일과 대치중이던 연합군도 인정해 최초의 독가스 투입 후 6개월 뒤 연합군도 독일군의 참호에 독가스를 뿌려댔다. 결국 독가스로 인해 양측은 엄청난 인명피해가 나왔고 오죽하면 1차 세계 대전에서 사용한 초탄 중 30%는 가스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처럼 하버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대량 살상병기의 제작과 국제법 위반으로 인해 전범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종전 즈음 찾아온 유럽의 식량위기를 질소비료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전 유럽이 인정해 주었고 독가스의 제작과 투입에 대한 책임문제는 연합군도 똑같이 독가스를 사용한 전적이 있어 독가스 발명자인 하버를 재판에 넘기게 된다면 독가스를 사용한 연합군이 재판에서 하버를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소리치는 웃기지도 않는 내로남불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가 전범이 되는 일은 없었다. 
 
독가스 개발이라는 원죄가 있음에도 이러한 상황과 질소비료 개발이라는 업적을 바탕으로 하버는 1차 대전이 종전한 해인 1918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한다. 

 

 

전후: 초라한 말년


조국을 위해 일한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한 독일 상층부의 움직임에도 하버의 애국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부과된 독일의 패전배상금을 해결할 방도를 찾아내기 위해 바다에서 금을 찾는 방법을 연구하고 이론을 완성시킨다. 이를 위해 발트해, 미국 연안까지 다 찾아보지만 막상 쏟아부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에 비해서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와버렸다. 그가 채산성을 계산하는 근거가 되었던 과거 논문과 자료에 있는 양보다 훨씬 작은 양의 금이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확인한 하버는 채산성 문제를 검토하여 적자가 확실시되자, 연구를 포기했다. 열성적으로 임하던 금 추출연구를 갑자기 관둬버리자 주변에선 “죽은 마누라가 말렸냐?”라고 비아냥 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나치당 집권 시기


나치당이 집권하던 때, 그에게 위험이 닥친다. 1933년까지 카이저빌헬름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임하며 독일 화학의 발달을 주도하였던 그는 나치가 유대인 공직 추방 명령을 발동하며 인생이 꼬인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말도 안 되는 요구라며 거절했고, 하버도 처음에는 거절하며 시간을 끌어 자기 휘하 유대인들을 미국이나 영국같은 나라로 탈출시키는 걸 도와준다. 이 때 하버는 1차대전 당시 독가스를 이용하게 만든 경력을 인정받아 나가지 않아도 됐으나 대부분의 훌륭한 과학자가 유대인이었던 독일인 만큼 연구소는 망했다고 판단, 조국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말과 함께 자기 연구실을 뒤집어 엎고 연구소장직을 떠난다. 그의 하야 소식을 접한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그를 교수로 초빙했고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애국심이 동난 건지 하버는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향했다. 참고로 나치가 집권한 것은 1933년 1월 30일, 사임 의사를 개인적인 편지에서 처음으로 밝힌 것은 그로부터 3달 후인 1933년 4월 30일이었으며, 독일을 떠난 것은 1933년 8월이었다. 

하지만 하필 출퇴근하는 곳 주변이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동네라 심신이 시달렸고 대학 내에서도 혹평을 받았다. 시달림을 참지 못하고 연구직에서 물러날 것을 생각하던 하버는 같은 화학자이자 이후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하임 바이츠만에게서 새로 창립되는 다니엘 시프 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아 영국을 떠난다. 

 

 

사망


영국을 떠난 하버는 다니엘 시프 연구소의 개소식에 참석하기 위한 여정 도중 스위스의 바젤에 있는 호텔에서 자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장례는 화장으로 치러졌고 유골은 바젤 근교에 있는 회른리(Hörnli) 공동묘지에 봉안되어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무리한다. 

 

 

평가


Der Gelehrte gehört im Kriege wie jedermann seinem Vaterland, im Frieden gehört er der Menschheit
전시에 학자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국에 속하고, 평시에는 인류에 속한다
- 프리츠 하버


맬서스 트랩에서 인류를 구원한 과학자이며 결과적으로 수십억의 생명을 인류에게 선물하였지만 동시에 대량살상 병기를 만들어내고 1차대전기 독일의 반인륜적 행위를 조장했다. 보는 시점에 따라서는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나 결국 조국에게 배신당한 비운의 과학자이기도 하며, 광적인 군국주의와 국수주의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가르친 상징적인 사례로 속한다.  

조국인 독일에게 엄청난 애국심이 있었고, 독일의 발전과 번영, 위상을 위해 동분서주하였고 노력과 걸맞은 성과도 거두었지만 주변국들로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반인륜적 대량살상병기를 만들었다고 평생 비판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국 중 가스병기를 사용하지 않은 진영은 없었지만 사용이 금지된 살상용 독가스를 최초로 사용한 것은 독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소비료 개발이라는 업적은 독가스 개발이라는 죄를 '위대한 과학자의 실책' 수준으로 덮어 버릴 수도 있을지 모를 정도로 엄청난 업적이긴 했다. 대다수 인류의 꿈이나 다름 없던 지속적인 식량 생산을 가능하게 하면서 기아 퇴치의 해답을 만든 하버의 업적은 지금은 물론이고 당시에도 인정받는 것이었으며,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적국이었던 영국에서도 러브콜을 보낼 정도의 과학자였다. 이런 공로로 독가스로 엄청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독가스 피해자들이 멀쩡하게 살아 있던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하고 이후 럼퍼드상까지 수상한다. 

 

 


나치가 하버를 내쫓으려고 할 때, 막스 플랑크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유대인이라도 유능한 사람들은 인정해주어야 한다"며 하버를 비롯한 과학자들을 추방시키지 말라고 탄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유대인은 뭘 해도 유대인일 뿐"이라며 플랑크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는 자신이 사실상 추방시킨 것이랑 다를 바 없는 하버가 공동 연구자로 참여한 치클론 B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하버의 친척들이 이 독가스로 학살당한다. 그야말로 사실상 토사구팽한 것이랑 다를 바 없는 대상이 남긴 단물만큼은 남김없이 빨아먹은 셈이니 나치가 얼마나 파렴치하고 비양심적인 조직이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과학사에서는 앙투안 라부아지에와 함께 과학자의 윤리를 설명할 때 단골로 나온다. 다만 약간의 차이는 있다. 하버는 전쟁범죄에 자신의 과학적 지식과 업적을 자진해서 적극적으로 이용하였고, 라부아지에는 가혹한 수탈자이되 그의 학문적 성취는 이러한 수탈과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1924년에 세계여행을 다니면서 당시 일제강점기였던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다.(#1924.12.25. 조선일보 기사)
하버의 유해가 묻힌 봉안묘에는 19년 전 독가스 개발에 반대하다 끝내 막지 못하자 이를 비관하며 먼저 세상을 등진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의 유해도 같이 묻혀있다.
미국의 역사학자로 미국 국제관계사를 연구해온 대니얼 임머바르 노스웨스턴 대학교 역사학과 부교수는 클라라 임머바르의 사촌인 막스 임머바르의 증손자다. 그는 자신의 저서 '미국, 제국의 연대기(전쟁, 전략, 은밀한 확장에 대하여)'에서 이를 직접 언급했다. 클라라가 자살한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때 유대계였던 임머바르 가문 사람들은 거의 초토화되었지만, 일부가 살아남아 대를 이었다는 것이다. 대니얼은 책에서 "다행히 모두가 수용소에서 사망한 것은 아니었다."고 적고 있다.
그의 업적과 오명을 가리켜 인구 증가라는 난제 속에서 '식량을 늘린다'와 '인구를 줄여버린다'라는 두 가지 해법을 제시한 천재과학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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