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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자국어 보호 정책, 투봉법, 프랑글레

Jobs 9 2022. 1. 16.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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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선 도로 위 표지판에도, 대중교통 안내판에도, 어디에서도 ‘영어’를 찾아볼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행인에게 영어로 길을 물으면, 일부는 프랑스어로 몇 마디를 던지고 가던 길을 마저 가기도 한다. 이 때문에 여행객들에게 프랑스는 다소 불친절한 나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어가 한마디도 쓰여 있지 않은 길 위의 표지판은 프랑스의 ‘자국어 보호 정책’의 한 부분으로, 외국인에게까지도 프랑스어를 고집하는 행인의 태도에선 프랑스인의 깊은 ‘자국어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사투리까지 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만큼 자국어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깊은 프랑스. 이들의 자국어 보호 정책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프랑스 왕실은 언어를 왕국 통합의 도구로 삼았다.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했던 프랑스 국민들이 전부 같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소속감을 느끼고 프랑스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끔 했다. 이에 1539년 국왕 프랑수아 1세가 공문서 및 법률에 라틴어 대신 프랑스어 사용을 강제하는 빌레르-코트레 칙령을 선포함에 이어 163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설립되어 프랑스어 사전 작업이 시작되었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프랑스의 언어 정책은 더욱 체계적이고 강력한 면모를 갖추었다. 현대에 완성된 언어 정책 법률은 1975년 프랑스어 고등위원회에서 만든 ‘프랑스어 사용법’과, 1994년 같은 이름으로 기존의 법을 대체한 법률이 있다. 1975년에 발표된 법에 따르면 게시물과 광고, 심지어 언론 매체에서까지 외국어는 사용할 수 없다. 1994년에 발표된 법 역시 시민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모든 정보를 프랑스어로 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이 법은 프랑스어가 교육, 노동, 교류, 공공 서비스 분야의 언어이자 ‘프랑스어권 공동체를 구성하는’ 국가 간의 주요한 매개어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두 법률 모두 프랑스어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제적이고 권위적인 정책을 채택한 것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 지나친 완고함 때문이었을까. 94년도에 제정된 프랑스어 사용법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헌 판결을 받아 1996년 개정된다. 개정된 법은 “프랑스어의 풍부화를 독려하고…다언어 주의를 진흥시킨다.”라는 문구를 서두에 내 걸며 기존 법보다 더 완화된 인상을 주었다. 기존의 강제성은 사라지고, 프랑스어를 지키는 과정에서 그 밖에 외래어도 수용하고 프랑스 국민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말로 순화시키겠다는 취지가 엿보인다.  
     
그렇다면 현재 프랑스는 어떤 언어 정책을 구체적으로 시행하고 있을까? 프랑스 언어총국 국장 자비에 노르트는 “프랑스 국민은 자기 의사를 표하고 대답받을 권리가 있고, 국가는 국민들이 그 권리를 행사하도록 돕는 것이 프랑스 언어 정책의 핵심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국민들이 외국어를 배우지 않아도 프랑스 내에서 편리한 언어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프랑스 언어 정책의 취지로, 대표적인 정책으로는 ‘프랑스어의 풍부화’ 정책과 ‘투봉법’을 들 수 있다. 

‘프랑스어의 풍부화’ 정책은 국민들에게 바른 프랑스어를 보급하고, 새로운 프랑스어를 만들어 외국어 유입에 대응하는 정책이다. 이 정책들 중엔 외국어에 대응하는 독특한 방식의 정책도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신조어 전문위원회’이다. 프랑스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은 외국어 중 프랑스어로 바꿔 사용할 수 있는 쉬운 단어를 선별하는 것이 이들의 주 업무로, 신조어 전문위원회에서 선출된 신조어는 총괄위원회로, 총괄위원회에서 프랑스어로 검토한 신조어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총 검토를 받은 후 국민들에게 보급된다. 책은 국민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책의 형태로 출간되며, 프랑스 국민이라면 누구든 무료로 그 책자를 받을 수 있다. 
 
또 다른 정책인 ‘투봉법’은 정부의 공식 문서, 광고, 기업 계약 등에 의무적으로 프랑스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자국어 보호법이다. 투봉법은 강제적으로 프랑스어 사용을 추진했던 75년도 법과는 달리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한다는 목적을 가진 법으로, 모든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프랑스어가 자국의 건강과 안전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에서부터 출발한 법이다. 
 
프랑스 국민 대부분은 자국어에 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국어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를 표한다. 그러나 외국어 사용을 피하는 건 힘들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다. 실생활에선 프랑스어만을 사용해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특정 분야의 전문 용어의 경우 영어나 외래어를 쓰는 편이 훨씬 더 실리에 맞는다. 전문 용어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나 외국의 방송 프로그램이 프랑스로 유입될 때엔 영어나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그 나라의 문화적 개성을 살리고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다. 프랑스어로 언어를 순화하려는 기존의 정책은 유지하되, 특정 분야의 전문성이나 문화적 특수성을 고려해 몇몇 외국어를 남겨 두는 등의 적절한 타개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프랑스 정부가 새로운 신분증에서 프랑스어와 영어를 나란히 표기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평소 프랑스어에 대한 자부심이 큰 시민들은 “영어의 침투를 막아야 한다”며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29일(현지 시각) 일간 르피가로에 따르면, 오는 8월부터 프랑스 정부가 보급할 예정인 새로운 국민 신분증(주민등록증 개념)에는 프랑스어와 영어가 나란히 표시된다. 이름은 ‘prénoms/given names’라고 하고, 출생지는 ‘lieu de naissance/place of birth’라고 표기하는 방식이다. 신분증이라고 하는 표현도 프랑스어(carte nationale d’identité)로 쓴 다음 영어(identity card)로 나란히 썼다. 프랑스어를 앞에, 영어를 뒤에 쓴다. 영어는 이탤릭체로 표시한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프랑스어 위상이 낮아진다며 불만을 표시하는 여론이 상당하다. 소셜 미디어에는 “앵글로색슨에 대한 굴복” “언어를 둘러싼 항복”과 같은 표현이 등장했다.
저술가인 로랑 에르블레는 일간 르피가로에 기고문을 보내 “프랑스어가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고 영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정부가 강조해야 한다”며 “영어 병기를 포기하라”고 주장했다.
2019년 등장한 새로운 수도권 교통카드인 ‘나비고 이지(Navigo Easy)’도 영어로 돼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프랑스인들이 아직도 꽤 있다.
2019년 등장한 새로운 프랑스 수도권(일-드-프랑스) 교통카드 '나비고 이지'. 영어로 된 명칭이 잘못됐다며 바꿔야 한다는 프랑스인들이 있다.
프랑스어 전통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1994년 제정된 이른바 ‘투봉법’이 유명무실해졌다며 프랑스어를 보호하는 입법 조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투봉법은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자크 투봉의 이름을 딴 것으로, 모든 정부 문서와 상업용 거래 문서 등에서 프랑스어만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한 법률이다.
 
그러나 영어 사용이 점점 흔해지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여 신분증 영어 병기를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법 있다. 소셜 미디어에는 “해외에 자주 나가는 사람에게는 영어 표기도 해줘야 신분증 사용이 편리해진다” “다국적기업에서 일하는 프랑스인이 많은데 그들에게 프랑스어만 쓰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등의 반응이 나온다.
영어가 뒤섞인 프랑스어를 프랑글레(franglais)라고 한다. 프랑스어(français)와 영어(anglais)의 합성어다.
신분증 영어 병기 논란을 다룬 르피가로 기사의 댓글 중에는 “프랑스어는 끝났다. 할머니랑 대화할 때 쓰기 위한 언어”라는 거친 표현도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상에서 영어를 쓰는 이가 제법 많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도 영어로 페이스북 글을 띄우거나 영어 강연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코로나 백신과 관련해 영어로 써서 띄운 포스팅/페이스북


프랑스인 중에서는 마크롱이 예전 대통령들과 다르게 영어를 능숙하게 하기 때문에 호감을 느낀다는 이들도 있다. 마크롱은 올해 초 EU 정상회의에 참석했을 때 프랑스어로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코로나 예방 백신을 영어로 ‘백신(vaccine)’이라고 발음했다가 서둘러 프랑스어로 ‘박생(vaccin)’이라고 정정하기도 했다.
EU에서는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로 영어의 위상이 낮아진 게 아니라 오히려 높아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브렉시트로 EU 27회원국 가운데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는 아일랜드와 몰타뿐이며, 두 나라를 합친 인구는 EU 전체 4억4500만명 중 1.2%에 그친다. 하지만 여전히 EU집행위원회에서는 영어로 회의를 하고 EU 회원국 정상들끼리 만났을 때도 영어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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