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과학 Social Sciences/지리 Geography

풍수지리, 과학적 근거, 배산임수

Jobs 9 2023. 4. 2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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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읍지는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두어야 하는데 계룡산이란 땅은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어서, 동북면, 서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이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 또 신이 일찍이 아버지를 장사시키면서 풍수학에 대한 여러 서적들을 대강 읽어보았는데, 지금 계룡산의 지세를 본다면 산은 서북쪽으로 내려오고, 물은 동남쪽으로 흘러가니, 물이 장생(長生)하는 방향을 깨뜨리고 있으므로 도읍지를 건설할 땅으로는 결코 적당하지 못합니다. - 하륜


낙산은 좌청룡으로 삼기에 부족하니, 왕조의 기틀이 흔들릴 것이 우려됩니다. 반드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청룡백호로 삼아야 합니다. - 무학대사


제왕이 남쪽을 바라봐야지, 어찌 동쪽을 보고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중국의 모든 황제들이 궁을 모두 남향으로 지은 데는 이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 정도전

 


명당자리는 분지 지형을 한눈에 바라볼(조망) 수 있는 자리를 말하며, 또한 산에서 분지 지형으로 내려가는 요충지에 위치한다. 풍수지리 사상에 따른 명당은 좌청룡, 우백호로 개념 지워진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사이로 하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여건을 갖춘 곳이다. 좌청룡은 나무산, 우백호는 바위산을 뜻하며 분지 좌우에 나무와 돌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배산임수는 뒤의 산은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고 앞의 물은 사람의 생존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명당은 군사적 목적에서 개발되어 생활적 측면으로 전승되었으며 음양이론의 도입과 함께 신비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산과 땅, 물의 흐름을 읽어 이것을 길흉화복에 연결시키는 지리. 바람은 기운을 흩고 물은 기운을 모이게 하여서, (바람을 막는 것은 아니고)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 장풍득수(藏風得水)로 풍수(風水)다.



삼국시대부터 민간에 뿌리내렸던 토속신앙에서 비롯하여 현재의 풍수지리가 되어 이어져 내려왔다는 설이 대세이며, 이후 조선시대에 완전히 정착해 널리 퍼져나갔다고 한다. 다만 제도화된 풍수지리 사상 자체는 일단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풍수지리라는 말 자체가 중국어이며, 중국의 풍수 사상은 삼국시대보다 천년 이전 상주 시대에 등장했었고 이론으로 정립된 시대는 당나라 곽박의 금낭경에서 이론이 구체화되었다. 


기본적으로는 산과 물의 형세, 동서남북의 방위 등을 고려해 입지가 좋은 곳을 찾게 되며, 이렇게 지리적 조건이 좋은 장소를 명당이라고 부른다. 이런 명당에 묘나 집을 짓게 되면 자손 대대로 정기를 받아 복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보통 배산임수의 형지가 대개 명당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풍수지리 때문에 너도 나도 묫자리로 쓰기 좋은 명당 자리를 차지하려고 기를 쓰고 싸운 결과, 명당으로 점지된 장소는 순식간에 땅값이 치솟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기에 묫자리를 두고 소송이 벌어지는 건 덤. 또한 사회적 유명인물의 부모나 조상 묘지에는 반드시 이런 풍수가들이 나타나 지형을 살피며 공부(?)를 하려고 한다. 

그 외에도 일제강점기시절 일본에서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조선의 주요요지에 쇠말뚝을 박아놓았다는 소위 "일제풍수모략설"도 있다. 대만에도 비슷한 설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해당 문서로.

다만 풍수이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이유는 역시 거의 모든 명리학(서양을 포함)이 갖는 대표적 특징에 기인하는데, 첫째. 음양오행과 주역 사상을 기반으로 했고, 둘째. 이 이론이 여간 해서는 '제대로' 파악하기 쉬운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로 이 이론을 '제대로' 파악했다 해도 실제 현실에 적용하여 응용하고 풀어나가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리고 어딜가나 돈을 노리는 사람, 실력에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허다하기 때문에 과거나 지금이나 같은 지형을 놓고도 해석이 분분했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도 많았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해당 지역이 갖는 이점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니 두루뭉술하게 표현한 게 풍수지리가 아니냐는 비판마저 나오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길한 자리라고 해도 목적에 맞게 써야 한다. 이건 상식이 부족해서 불러온 참사. 그리고 사실 수맥이라는 개념은 근대 들어 서양에서 도입된 것이라 전근대 풍수학에서는 크게 다뤄지지 않는다. 그저 땅을 파봤는데 물이 나오면 다른 자리를 잡는 정도에 불과하다.

서구권에서는 중국어 발음을 따서 Feng shui라고 한다. 현대에도 풍수를 가장 진지하게 따지는 곳은 중국의 광둥성 등 남방, 홍콩, 마카오와 대만 등지이며 중국 본토는 문화대혁명과 대약진 운동을 거치고 난 이후 풍수를 따지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홍콩에서 풍수와 관련된 유명한 사례로 HSBC와 중국은행이 마천루를 짓게 되면서 일어난 해프닝인데, 중국은행이 빌딩을 칼 모양으로 지으니까 바로 옆에 HSBC가 빌딩 옥상에 대포 모양 장식을 해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사족으로 수맥은 동양의 풍수지리사상이 아닌 서양에서 유래한 개념. 그런데 자칭 풍수지리의 전문가라는 사람 중에서도 2가지를 구별하지 못하거나 뒤섞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과학적 해석
(북반구 기준) 북쪽에 산을 두고 남쪽에 물을 두는 배산임수는 과학적으로 따져도 실제로 사람이 살기 좋은 형태에 속한다. 남녘에서 햇볕이 잘 드는데다 겨울의 북풍을 막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좋은 경치가 보장되며, 앞의 강에서 물을 쉽게 길어올 수 있고, 뒷산에서는 땔감과 건축재료를 구할 수 있기에, 전통적인 농경사회 기준으로는 배산임수만한 곳이 없었다. 주변의 산과 앞의 강이 자연적 방어벽이 되기 때문에, 외적을 막는 데에도 용이하다. 이 때문에 풍수지리를 전통적인 농업경제 사회에서 자연스레 발달한 지리적 지식에 훗날 기복신앙이 덧붙여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최창조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등을 중심으로 제도권 학계에서는 이런 자연과학적 차원에서 풍수지리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론 자체로만 보면 풍수지리는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일종의 인문지리학적인 학설로 현실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풍수지리가 기본적으로 역사적 경험에 의거해 구성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특히 한반도에서 유독 양택풍수에 목을 멘 이유가 산이 많은 지형적 조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기본적으로 산을 북쪽에 끼지 않으면 살인적인 북풍을 버틸 방도가 없거니와, 풍수지리를 따르자면 도시 및 거주지를 분지 지역으로 몰아넣어 결과적으로 평야 지대의 농경지를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0년대 광주대단지, 1970년대 반월신도시 입지를 선정할 때에도 농경지 침범 여부가 큰 고려사항이었을 정도였는데, 197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사업 일명 백지계획을 추진할 때에도 실무자들에게 내린 입지선정 지침 중의 하나가 '최대한 평야지대는 (농사 때문에라도) 피하고 구릉지를 위주로 할 것'이었다. 

물론 이런 식의 접근은 어디까지나 풍수지리에서 설명하는 원리를 현대 과학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일 뿐이며, 이에 따라 앞으로도 풍수지리의 기준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과거 수맥이 근현대 풍수지리에 알게모르게 편입됐듯, 현대 풍수지리에는 난개발로 인한 스카이라인 문제, 주변 건물로 인한 빛공해 등 다른 요소도 편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리학과 교수들의 대다수가 '명당이 어쩌고 산의 기운이 어쩌고' 하는 기복신앙적 요소를 매우 경멸한다.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도 풍수지리를 현대 학문으로 해석하려고 했는데도 학계에서 이런 시선을 받다가 스스로 교수직을 내려 놓았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의 풍수지리
한국의 풍수지리의 기본개념은 땅의 형세를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련시켜 설명하는 자연관의 하나로서, 풍수지리, 지술, 음양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풍수에 의하면 땅은 생적의 존재로서 만물을 키우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인간에게 주는 혜택도 달라진다고 한다. 길한 정기가 왕성한 장소에 터를 잡으면 그 자손들이 부귀영화와 장생을 누리지만 반대로 흉기가 있는 장소를 택하면 불행을 겪는다는 것이다. 풍수에서는 인간의 성쇠가 완전히 하늘과 땅에 의해 정해진다고 믿는다. 유래는 흔히 신라 말기에 불교 선종의 승려들이 중국에서 수입했다는 설이 대세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생설, 신라 중기 도입설 등도 근거가 있어 여전히 논의되는 상태이다. 일단 물기가 샘솟는 땅에 만든 원성왕릉(괘릉)이나, 여러 신라 왕릉들이 좌북조남의 원칙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사례를 봐도 신라 하대까지는 적어도 후세 사람들이 생각하는 풍수지리는 도입되지 않았거나, 알려져 있었더라도 왕실과 귀족계층도 크게 신경쓰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도입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신라 때도 전불 7처 같은 고유 신앙의 길지라는 개념은 있었지만 중국식 풍수지리와는 기준이 달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에서 풍수지리학문이 역사적으로 눈에 띄게 성장한 것은 후삼국시대로, 신라 말기 이전 도입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 이전에는 극히 일부 지배계층만의 고급 지식이었다고 주장한다.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의 호족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선종과 함께 인기를 끌고, 사회 전환의 추진력이 됐을 때였다. 호족들은 저마다 자신의 근거지를 서라벌 못지 않은 명당이라고 주장해 자기 권위를 확립하였으며, 지방에서 어느 정도 커진 호족들은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신라에 대한 반란 루트를 타기도 했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발전하여 조선시대 초기에 하륜을 시작으로 점차 번성하게 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사람이 살아가는 땅인 양택을 중심의 풍수학설이 사람이 죽은 뒤에 묻히는 땅, 음택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설화나 야사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신라시대에는 석탈해가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호공의 집을 뺏었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는 왕건의 아버지가 도선대사의 풍수지리로 왕기를 받기 위해 패강진 송악산 부근 즉 개경에 자리잡았다고 하는데, 이는 주거 중심의 풍수지리의 학설을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묏자리가 좋았던 덕에 왕이 되었다, 세종의 묘를 잘못 써서 장손이 망했다, 흥선대원군이 묏자리를 '만 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두 사람의 황제가 나오는 자리'에 잡아서 대한제국의 말로가 비참했다는 등 묏자리 중심의 풍수학설을 반영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조선시대의 사대부 유학자들은 '풍수지리는 미신 같은 괴력난신이니, 그렇게 풍수가 중요하면 공자님이 왜 한마디도 언급을 안 했냐느니 이런 걸 추종해서야 되겠냐'고 신나게 떠들다가 조상 무덤 자리는 풍수지리 상으로 좋은 곳에 잡으려고 몇 대에 걸쳐서 산송을 일삼곤 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다. 실제로 밑에 보면 알겠지만 하륜과 정도전 모두 유학자였다. 하지만 하륜은 풍수에 유화적이었고 정도전은 강경하게 배척했다. 

현재의 풍수학설은 민간에서는 토착신앙 비스무리한 것이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묏자리 잡는 용도로 사용되는 일종의 미신 취급을 받지만,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조상 묘는 명당에 모시려 기를 쓰고 있으며 관공서나 건물의 입주 등 실생활에도 응용되고 있다. 국립묘지, 박물관, 시청과 도청 급의 건물들은 모두 풍수를 고려하여 위치를 선정한다고 하며, 홍콩은 도시 자체가 풍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에서도 풍수지리가 고려되었다. 정치에 이용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물론 정치에 이용된 것치고 좋은 결말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기업 건물이 풍수지리 자문을 받아 짓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도시전설의 영역.

위에서 풍수지리의 본격적 도입이 후삼국~고려초라고 했듯, 한국사에서 풍수지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도시는 단연 개성으로, 도시 배치 자체가 송악산 자락의 지형에 최대한 맞춰져있다. 궁궐인 만월대를 둘러싼 궁성은 시가지 서북쪽 끄트머리를 차지하고 있고, 궁궐의 정문은 동향으로 나 있으며, 도로망 역시 바둑판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 당나라 도시계획의 영향을 받아 궁궐이 도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바둑판처럼 방리 구획으로 도시를 개발한 부여군, 경주시[, 서울특별시를 생각하고 개성시가지 지도를 들여다본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체제도 어찌하지 못한 개성의 그 난개발스러움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고려는 한국 양택풍수의 최전성기였던 시기로, 묘청이 풍수지리에 입각해 천도대상지로 건설한 평양 대화궁도 드넓은 대동강변이 아닌 평양 동북쪽 입불산 기슭에 있다. 서울로 따지면 풍수지리 좋다고 경복궁을 우이동에 박아넣은 꼴이다. 


양택 풍수
사람이 사는 집을 지을 자리의 위치나 방향 등을 따져 좋은 자리에 집을 짓고 거주자와 후손들이 좋은 기운을 받는 것을 연구하는 풍수다.


음택 풍수
죽어서 묻힐 때 무덤 자리를 따져보고, 좋은 자리에 묻어 그 후손이 이익을 받는 것을 연구하는 풍수다. 대한민국은 현재 이 음택풍수가 과열되어 지나칠 정도로 호화롭게 장례를 하는 문화가 생기는 데 영향을 주었다. 


실내 풍수
홍콩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인구가 밀집하여 더 이상 음택 풍수를 논하기 힘들어지자 그 대신 실내의 가구 배치나 배색 등으로 복을 불러들이고자 하는 풍수다. 홍콩 외의 경우 일본에서 상당히 성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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