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이란 한 국가의 힘을 뜻한다. 역사 속 대표적인 패권국가로는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을 꼽을 수 있다. 스페인은 로마제국에 버금가는 영토를 가졌지만 빈약한 재정에도 끝없이 전쟁을 강행해 쇠락했다. 네덜란드는 무역으로 경제 성장을 거둬 패권을 얻었지만 이후 중상주의에 맞게 무역 변화를 이루는 데 실패했다. 영국은 노예무역과 산업혁명을 발판으로 패권을 잡았고, 미국은 두 차례의 세계 전쟁에서 군수 기지의 역할을 자처하며 패권국가로 자리매김했다.
G1, G2란 말이 있다 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패권을 가진 국가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G1은 미국이고 G2라 하면 미국과 중국을 뜻한다. 패권이란 무엇일까?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행사하는 힘을 말한다. 헤게모니라고도 부른다. 압도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나라 혹은 지배적 위치에 있는 나라를 패권국가라고 한다. 패권을 갖기 위한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작은 나라들이 희생당하는 것도 옛일이 아니다.
패권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오늘은 패권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책 『패권의 대이동』을 소개한다. 한 나라가 영원히 패권을 가질 수는 없다. 한때의 패권국가는 무너지기 마련이고, 그 패권 역시 끊임없이 이동한다. 패권이 떠오르는 과정뿐 아니라 몰락하는 과정도 살펴야 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패권국가마다 그 패권의 속성도 조금씩 다르다. 『패권의 대이동』을 통해 역사 속 패권 국가들이 어떤 변곡점을 맞이해 패권을 손에 쥐었는지 살펴보자.
드넓은 영토의 스페인, 무리한 전쟁으로 몰락
먼저, 스페인이다. 16세기 초 카를 5세 시대 이후 스페인은 로마보다 넓은 영토를 가졌다. 본토와 합스부르크 영토, 오늘날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포함한 저지대 국가, 이탈리아반도 절반이 모두 카를의 영토였다. 아메리카 식민지도 그의 것이었다. 카를의 아들 펠리페 2세는 필리핀까지 손에 넣었다. 스페인은 전쟁이 아닌 결혼과 상속, 외교를 통해 여러 나라를 자신들의 세력 범위 안에 편입시켰다.
당시 스페인은 중앙집권이 아닌 여러 나라가 황제 개인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결합한 ‘복합 왕국(Composite monarchy)’ 체제를 고수했다. 영토 확장에는 유리한 체제다. 그러나 재정 자원을 관리하고 동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나의 재정 체제도 없고 통일된 이념도 없다. 돈이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지역 엘리트와 갈등하고 타협하면서 문제를 해결했다. 군사력을 가진 영주들이 농노들로부터 경제적 잉여를 강압적으로 짜내는 봉건적 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스페인은 수차례 파산을 거듭했다. 왜 그럴까? 종교에 대한 집착이 가장 큰 원인이다.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가 1492년 알람브라 칙령이다. 그 내용은 당시 스페인 경제에 강력한 힘을 행사하던 유대인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든지, 아니면 스페인을 떠나라는 것이다. 종교개혁을 저지하길 바랐던 그는 다른 국가와 갈등했고 전쟁까지 불사했다. 전쟁은 곧 돈 문제로 이어진다. 카를 5세가 프랑스, 독일 등과 싸울 때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카를 5세는 세금을 담보로 독일의 푸거 가문에 엄청난 돈을 빌렸다. 그러나 빚을 갚을 여력이 없던 스페인 왕실은 1557년 결국 지급 정지를 선언했다. 그 와중에도 카를 5세의 아들이자 그의 왕위를 이은 펠리페 2세는 전쟁을 계속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다. 엘리자베스 1세가 해적을 지원해 스페인을 견제하자 스페인 무역은 큰 타격을 입었다. 엘리자베스가 개신교를 지원한다고 의심한 스페인은 1580년부터 전쟁을 준비했다. 스페인이 통치하던 네덜란드에서 독립을 위한 반란이 일어났고 영국과의 전쟁이 결정타로 작용했다. 80년이나 계속된 네덜란드와의 전쟁, 무적함대의 패배 등으로 펠리페 2세는 42년 재위 동안 네 번 파산을 선언하는 수모를 당한다. 그럼에도 스페인은 전쟁을 계속했다. 겉은 화려했지만 속은 썩어 들어가며 스페인의 패권은 저물어갔다.
경제의 전환점에 흥망, 네덜란드
1623년 3월9일 인도네시아 작은 섬 암보이나에서 네덜란드인들이 영국인 10명, 일본인 9명, 포르투갈 1명 등을 잡아 처형했다. 네덜란드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명으로 외교 문제로까지 확대됐지만 배상금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정향의 원산지를 둘러싼 통제권이 핵심이다. 이미 향료 무역을 꽉 잡고 있던 네덜란드가 잠재적 경쟁자인 영국의 기세를 제압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영국은 향료 무역에서 한발 물러나 인도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그만큼 당시 네덜란드는 패권국가였다.
유럽에서 가장 도시화를 빠르게 이룬 나라가 네덜란드다. 16세기 중반 펠리페 2세가 네덜란드를 다스렸는데 1568년 17개 주가 반란을 일으켰다. 최강 육군을 가진 스페인이 반란을 진압하지만 홀란트를 비롯한 7개 주는 저항을 멈추지 않고 1581년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세웠다. 그 이후 약 70년간 독립운동을 하다 마침내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독립했다. 스페인이 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스페인은 전쟁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반면 네덜란드는 전쟁을 하면서 오히려 경제 성장을 이뤘다.
예나 지금이나 네덜란드는 해운의 나라다. 1497∼1530년 사이 발트해를 지나면서 통행세를 낸 선박의 70%가 네덜란드 소속이었다. 네덜란드는 발트해 무역으로 돈을 벌었다. 대규모 선단, 선박의 효율성, 낮은 운송비 덕분이다. 시작은 청어잡이다. 청어의 내장을 제거해 소금에 절이는 기술을 개발하고, 기동력이 좋고 안정적인 ‘뷔스’라는 배를 이용해 청어잡이에 주력했다. 청어잡이 어선이 1500척, 어부는 1만2000명에 달했다. 어업과 무역의 성장으로 네덜란드는 조선업이 발달한다. 소형 범선 카라벨을 개량해 원양에 적합한 범선 캐럭(carrack)1 등을 만들었다. 선체가 볼록해 많은 상품을 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스페인과는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을까? 종교적 이유가 가장 크다. 16세기 중반은 개신교와 가톨릭이 대립하던 시대다. 네덜란드가 스페인에 맞선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종교 갈등이다. 펠리페 2세는 아주 전투적으로 가톨릭을 옹호했다. 악명 높은 종교재판소를 세워 1300명이 넘는 이단자를 처형했다. 또 다른 하나는 재정 문제다. 전쟁 비용을 위해 무리하게 세금을 요구했다. 결국 1571년 스페인의 군인이자 벨기에 플랑드르 총독인 알바 공작은 네덜란드 주 의회의 반대를 무시하고 모든 물품에 거래세 10%를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이것도 모자라 1576년 세금 구조를 바꾼다. 모든 재산에 대해 1%의 세금을, 부동산 거래에 5%의 세금, 모든 상품에 거래세까지…. 상공업으로 먹고사는 네덜란드 도시민의 세금 부담이 15배 커졌다. 원래 상인은 정치적 저항을 매우 꺼린다. 그들이 저항한다는 건 그만큼 제국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후 80년간 전쟁을 한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하는 전쟁이다.
그런데 전쟁이 되레 경제의 선순환을 가져왔다. 세금 대신 장기 공채를 발행해 시민으로부터 전쟁 자금을 모았고 그 결과 채권 시장이 발달한다. 특히 동인도회사를 만든 게 결정적이다. 이름은 회사지만 실제 국가와 비슷하다. 여러 나라와 조약 체결, 적대 세력에 대한 전쟁 선포, 요새와 상관을 건설할 권리, 자체 군사를 육성해 동원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졌다. 자본과 권력의 결합인데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한 목적이다. 사실 네덜란드 교역의 핵심은 군사력이다. 상대 뜻과 상관없이 힘으로 교역을 했는데 암보이나 학살 사건도 그중 하나다. 무력은 네덜란드 상업 패권의 핵심 요소 중 하나다. 반면 네덜란드는 영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네덜란드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1650∼1680년 사이 네덜란드와 영국은 세 차례 전쟁을 한다. 이후 프랑스와도 전쟁을 한다. 그 결과 북아메리카에 세운 뉴암스테르담, 오늘날의 뉴욕을 영국에 넘기고 북아메리카에서 손을 떼야 했다. 무력과 상업 위에 세워진 패권국가는 왜 오래 가지 못했을까? 첫째, 이들은 사치품 무역을 통해 이윤을 냈다. 그런데 17세기 소빙하기로 인한 농업 위기가 발생하자 사람들의 구매력이 떨어졌다. 둘째, 국가 형성 과정에서 일어난 중상주의 전략에서 다른 국가들에 밀려났다. 규모가 큰 프랑스와 영국과 게임이 되지 않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새로운 무역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방법을 썼다. 차 무역의 경우 네덜란드는 향료 제도에 있던 약소 부족에게 썼던 방법을 아시아의 거인 중국에도 쓰려고 했다. 물론 중국 정부는 가만있지 않았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차 무역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 사이 영국 동인도회사는 차 시장에 뛰어들어 인도산 면직물과 중국산 차를 맞바꾸는 새로운 무역을 시작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무력과 강압으로 큰 성공을 거뒀으나 과거의 성공에 도취한 나머지 변화하는 세계 경제 환경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무역과 산업혁명으로 일어난 영국,
전쟁 속에 웃는 미국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이기며 자타공인의 해상 강국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그 패권이 바로 영국으로 온 건 아니다. 다음 패권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네덜란드로 갔다. 영국의 정치적 혼란 때문이다. 17세기 제임스 1세부터 찰스 1세까지 종교와 헌정 질서 문제를 두고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내전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런데 크롬웰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이 바뀐다. 그는 개신교였지만 미래가 경제에 달려 있다는 걸 인지한 현실적인 사람이다. 본격적으로 중상주의를 실천했고 항해법을 만들었다. 영국이나 영국 식민지로 상품을 나를 때는 영국 배를 이용하거나 상품 생산국의 선박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를 겨냥한 법이었다. 네덜란드는 반발했고 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영국이 네덜란드를 이긴다. 뉴욕을 빼앗고 본격적으로 해군을 키워 해운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항해마다 자본과 이윤을 배분하던 방식을 버리고 대신 자본을 계속 유지하는 주식회사의 모습을 갖춘다. 네덜란드가 꽉 잡고 있던 향료 대신 면직물에서 미래를 발견했다. 특히 인도산 면직물인 캘리코는 가볍고, 습기를 잘 흡수하고, 내구성도 좋았다. 빨아도 색이 변하지 않았고 문양도 다양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면직물 교역은 차 교역이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모직물 업자들이 인도산 면제품의 수입과 소비를 규제하는 조치를 내자 면제품 대신 찾은 게 바로 중국 차다. 영국 사람들은 17세기 후반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17세기 초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담배, 설탕 등 플랜테이션 농업을 시작하는데 핵심은 노예무역이다. 영국 상인은 왕립 아프리카 회사를 통해 노예를 대거 수입하면서 영국, 아프리카, 아메리카 세 축을 잇는 삼각 무역을 시작한다. 런던이나 브리스톨, 리버풀 같은 곳에서 출발한 배는 인도산 직물이나 술, 총, 각종 제조업 제품을 싣고 서아프리카에 도착한다. 현지 노예 상인으로부터 노예를 산 뒤 아메리카로 간다. 아메리카에서 노예를 팔고 설탕이나 담배, 커피, 염료 등으로 배를 채워 다시 영국으로 떠난다. 세 단계로 이뤄진 여정은 한 차례에 18개월쯤 걸렸다. 1662∼1807년 이들이 실어 나른 노예는 330만 명쯤 된다. 15% 정도는 병이나 자살로 죽었다. 노예무역과 노예제는 영국이 누린 부의 근원이다. 플랜테이션의 지주는 누구보다 부유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축적된 자본은 그 자체로 패권 형성의 요인이 됐다. 이후 자본은 군사력으로 전환되며 패권 쟁취에 힘을 보탰다.
또 다른 이유는 산업혁명이다. 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났을까? 노동자들의 이동 때문이다. 여러 이유로 토지 소유권을 잃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렸다. 영국 노동자의 임금이 다른 나라보다 세 배쯤 됐는데 자본가 입장에서 이윤을 내려면 노동 비용을 줄여야 했다. 이 점이 산업혁명이 일어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가장 노동집약적인 면직물 공장에서 혁명이 일어난 걸 보면 알 수 있다. 기술 혁신도 원인이다. 지식이 활발히 생산되고 공유됐다. 제임스 와트는 새로운 동력원인 증기기관을 발명했다. 방적 기술, 직조기도 발명됐다. 실제 18세기 영국 귀족들 사이에는 집에 실험실을 갖추고 여러 실험을 하는 게 유행이었다. 1648년 출판물 사전 검열이 폐지되면서 온갖 출판물이 쏟아져 나왔다. 도서관도 많았다. 순회 도서관, 커피 하우스 등 지식에 대한 접근 비용도 낮았다. 순회 강연도 자주 열렸다. 새로운 기술을 알려주는 강습도 등장했다. 혁신의 중요한 전제 조건인 광범위한 지식의 교류가 활발했다.
영국 의회와 정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역을 방해하는 규제를 폐지하고 적극적인 보호정책을 폈다. 특허 제도도 큰 역할을 했다. 증기기관 관련 특허를 31년이나 행사했던 제임스 와트, 표백공정 특허로 유명한 찰스 테넌트는 부와 명예를 누렸다. 또 영국 정부는 필요한 기술에 상금을 걸고 독려했다. 경도계 개발에 걸린 상금이 2만 파운드나 됐다. 방적기를 발명한 새뮤얼 크롬턴, 역직기를 발명한 애드먼드 카트라이트, 제지기계를 발명한 헨리와 실리 푸어드리니어 형제 등이 다 나라에서 주는 보상금을 받았다. 정부는 영국 기술이 유출되는 일을 막는 데도 힘을 썼다. 숙련공의 이민과 기계류 유출을 막았다. 장인의 이민을 부추기는 일을 범죄로 간주했다. 이민을 시도한 장인은 벌금이나 징역형을 받았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1851년쯤 거의 마무리됐다. 그러자 영국은 보호무역에서 자유무역으로 전환했다. 산업혁명이 진전돼 제조업 경쟁력이 높아지자 보호할 이유가 사라졌다. 호혜주의를 버리고 일방적으로 관세를 낮추는 모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주와 자치 농을 보호하기 위해 곡물량의 수입을 제한하는 곡물법 폐지가 대표적이다. 런던 박람회를 개최해 자신들의 기술을 온 세상에 알렸다. 해군력을 크게 키워 아편전쟁에서 승리했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이미 영국을 크게 앞질렀다. 미국은 무역에 의존하지 않았다. 대신 거대한 대륙의 광활한 영토와 많은 인구가 만들어낸 국내 시장이 미국의 산업혁명을 뒷받침했다. 그러다 대공황을 거치면서 달라졌다. 대공황은 늘어난 생산을 수요가 뒷받침을 하지 못해 일어났다. 이때 전쟁이 터지면서 새로운 시장이 열린다. 고립주의를 버리고 자유무역을 선택하면서 패권국가가 된다.
미국은 13개 식민지를 크게 셋으로 나눈다. 첫째, 남부 식민지다. 영국에 수출할 담배나 쌀, 인디고 같은 환금작물과 해군에 필요한 물자를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예를 이용해 경작했다. 둘째, 중부 식민지다. 넓고 비옥한 평원이다. 밀 같은 곡물을 대규모로 재배해 유럽 남부에 수출한다. 셋째, 북부다. 춥고 땅이 척박하다. 생계를 위한 농사만 짓고 목재를 이용해 배를 만든다. 영국 식민지에 어류를 수출하고, 당밀을 수입해 럼주를 만들어 판다. 처음 영국의 식민지 정책의 방향성은 유익한 방치(Salutary neglect)다. 미국은 영국이 필요로 하는 원료와 농산물 공급처 역할을 하고, 동시에 영국 물건을 소비할 시장이 되면 그만이다. 나머지는 알아서 자생하면 된다.
사실 미국은 전쟁의 덕을 많이 봤다. 미국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제조 강국으로 성장했고 군수 기지로도 재미를 봤다. 전쟁을 피해온 기술자들을 대거 받아들임으로써 기술까지 갖게 됐다. 핵기술을 포함한 수많은 기술 개발에는 유럽에서 건너온 기술자들이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풍부한 자원을 갖춘 지리적 요인도 한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