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루베 대회
북쪽의 지옥
클래식 대회의 여왕
파리-루베(Paris–Roubaix) 대회는 하루 동안 열리는 클래식 대회 중에서 가장 유명한 대회다. 이 대회는 ‘모든 클래식 대회의 여왕’으로 불린다.
이 대회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근대 올림픽이 열리던 1896년에 처음 시작돼 1백 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부활절이었던 1896년 4월 19일 새벽 5시 30분 1백 명의 선수들이 프랑스 북부의 루베를 향해 출발했다. 부활절에 시작됐기 때문에 이 대회를 ‘부활절 경기’라고도 부른다.
파리-루베는 무엇보다도 코스가 험난하기로 악명이 높다. 파리(Paris) 북부에서 출발해 프랑스 북부의 탄광도시 루베(Roubaix)에서 끝나는 이 대회는 돌이 깔린 오래된 도로를 지나는데 이곳이 가장 힘든 구간이다.
‘파베(Pave)’라고 불리는 이 도로는 빗물이나 진흙을 견딜 수 있도록 도로에 포석을 깔아 놓은 것이다. 돌로 된 구간에서는 자전거가 쉽게 펑크가 나고 고장이 난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미끄러운 돌 위에서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 일쑤다. 좁은 길에서 앞에 가는 선수들이 넘어지면 뒤따르는 선수들도 잇따라 넘어지고 선수들은 그 사이에서 꼼짝할 수가 없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경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 대회를 ‘북쪽의 지옥’이라고도 부른다. 파리-루베 대회는 마치 초기의 자전거 대회처럼 악조건 속에서 경기가 진행됐다.
파리-루베의 코스는 조금씩 변경됐지만 항상 루베의 야외 벨로드롬에서 끝이 난다. 이 벨로드롬은 파리-루베의 가장 중요한 상징 중 하나다. 1895년 벨로드롬을 세울 때 이곳에서 방적공장을 하던 두 명의 공장주가 경기장을 건설하는 데 재정지원을 했다. 파리-루베 대회가 탄생하는 데도 두 사람의 역할이 컸다. 두 사람은 모두 자전거를 좋아했는데 이들은 이 지역의 가난한 노동자들과 자전거 팬들을 위해 트랙 경기뿐 아니라 도로 대회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파리-브레스트 대회를 보고 이 대회를 개최하는 <르 벨로>지에 편지를 보내 루베에서 끝나는 대회를 개최해 줄 것을 요청했다. <르 벨로>는 사이클 담당 편집자인 빅터 브레이어를 보내 길을 살펴보라고 했다. 브레이어는 동료 한 사람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아미앵까지 간 뒤 그곳에서 루베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는 빗속에서 추위에 떨면서 이틀 동안 달렸다. 도로는 형편없었고 브레이어는 그런 길에서는 도저히 자전거 대회를 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회를 개최할 생각을 버리라고 전보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루베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하고 나서는 결국 대회를 열기로 생각을 바꿨다.
루베의 챔피언들
첫 번째 대회에서는 참가하기로 한 선수들이 절반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투르 드 프랑스를 창시한 앙리 데그랑주도 참가하지 않았다. 루베에 도착한 선수들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파리-루베 대회는 험한 코스와 나쁜 날씨 때문에 대회 중에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실력이 뛰어난 선수도 운이 없으면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위대한 챔피언들은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며 이 대회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룩했다. 루베의 챔피언들은 그 시대 최고의 선수들이었다. 투르 드 프랑스 1회 우승자인 모리스 가랭, 옥타브 라피즈, 앙리 펠리시에, 파우스토 코피, 루이종 보베, 릭 반 로이, 에디 메르크스, 베르나르 이노, 로제 드 블레밍크가 모두 루베의 우승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909년 옥타브 라피즈(Octave Lapize)의 우승은 가장 극적인 승리 중 하나다. 스물두 살의 옥타브 라피즈는 독자적으로 출전했기 때문에 경기 중에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그를 도와줄 선수도 없었다. 그는 경기 중에 네 번이나 펑크가 나 시간을 많이 잃어버렸다. 그러나 무엇도 이 강인한 선수를 막을 수는 없었다. 세 명의 선수들이 루베에서 마지막 스프린트에 나섰는데 앞에서 달리던 선수가 미끄러졌고 라피즈는 마지막 스프린트를 펼치며 우승을 차지했다. 라피즈는 그다음 해인 1910년과 1911년에도 우승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군의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비행기가 격추돼 사망했다.
1919년과 1921년에 우승을 차지했던 앙리 펠리시에는 그다음 해 경기에서 최악의 상황을 겪었다. 처음에 너무 힘을 많이 쏟는 바람에 저혈당으로 탈진 상태에 빠진 것이다. 결승선에 가까이 왔을 때 그는 속도를 줄이고 길가에 서 있는 관중들에게 빵을 달라고 부탁했다.
북쪽의 지옥
이 대회에 ‘북쪽의 지옥’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다. 전쟁 동안 프랑스에서는 9백만 명 이상이 죽고 북부지역과 루베 지역은 황폐해졌다. 전쟁이 끝나자 대회조직위원회는 대회를 열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루베로 떠났다. 과연 도로가 제대로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전장이었던 이 지역에는 곳곳에 포탄이 떨어진 구덩이와 피로 물든 참호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을은 파괴되었고 악취가 진동했다. 사람도 거의 없었고 온통 진흙이 뒤덮여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파리의 기자들이 이곳을 ‘북쪽의 지옥’이라고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도로를 개선하기 시작해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돌이 깔린 도로는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런 도로가 사라지는 것은 파리-루베 대회의 상징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험한 도로에서 열리는 이 대회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파리-루베가 잘 닦인 도로에서 열리면 다른 대회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대회조직위원회도 남아 있는 오래된 도로를 찾아 나섰으며 이런 구간을 코스에 포함시켰다.
그중에서도 1968년에 포함된 아렌버그숲은 승부를 결정짓는 가장 무시무시한 구간으로 꼽힌다. 한 선수가 이 구간을 코스에 포함시키자고 제안하자 대회 조직위원장 자크 고데는 “나는 돌이 깔린 길을 말하는 것이지 진창을 말하는 것이 아니네”라고 말했다.
현재 파리-루베는 약 260km를 달리는데 그중에 50km 정도의 파베 구간이 포함된다. 예전에 파베가 남아 있는 지방에서는 이런 도로가 자기 고장이 낙후된 지역이라는 표시가 된다며 도로를 포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파베를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여기며 보존하려고 한다. 파리-루베 대회의 조직위원장이었던 자크 고데는 이 대회를 가리켜 "사이클링에서 마지막 남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다. 그의 말은 파리-루베가 초기의 자전거 대회와 같이 어려운 여건에서 치러지는 힘든 경기지만 가장 순수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루베의 사나이
파리-루베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선수들이 있다. 바로 벨기에의 로제 드 블레밍크(Roger De Vlaemink)와 프랑스의 베르나르 이노(Bernard Hinault)다. 블레밍크는 ‘루베의 사나이’, ‘미스터 루베’와 ‘집시’ 같은 여러 별명을 갖고 있다. 그는 1969년부터 1982년 사이에 한 번을 제외하고는 매년 출전해 네 번 우승을 하고 네 번 2등을 했다. 1973년에는 경기 1주일 전에 부상을 입어서 팔을 스물다섯 땀이나 꿰맨 상태로 출전했다. 그가 네 번째 우승했을 때 에디 메르크스는 블레밍크에 대해 “나는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블레밍크는 돌 하나하나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처럼 돌을 부드럽게 넘어 간다”고 말했다. 블레밍크는 루베에서 강한 힘과 뛰어난 기술을 보여줬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겨울 동안 출전한 사이클로크로스(Cyclo-Cross) 경기에서 연마한 것이었다. 사이클로크로스 경기는 비포장도로와 산길을 달리는 경기로 오늘날 산악자전거 경기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파리-루베 대회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어떤 선수들은 이 대회를 찬양하지만 어떤 선수들은 몹시 싫어한다. 이 대회의 우승자 중 한 명인 앙리 펠리시에는 “이것은 대회가 아니다. 이것은 순례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반면 베르나르 이노는 이 대회를 아주 싫어했다. 그는 “이 대회는 도로 경기가 아니라 비포장도로에서 열리는 사이클로크로스 경기”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대회가 겁이 나서 피한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출전했다. 이노는 1981년 세계챔피언으로 레인보우 저지를 입고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 중 하나다. 그는 대회 중에 두 번이나 펑크가 나고 세 번이나 넘어졌다. 그러나 벨로드롬에서 마지막 전력질주를 하며 로제 드 블레밍크와 프란체스코 모세르 같은 역대 챔피언들을 모두 물리쳤다. 하지만 파리-루베 우승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생각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이노는 “이 대회는 존재해서는 안 될 대회이며 가장 나쁜 대회”라고 말했다.
파리-루베의 험난한 코스에 대한 혹평에도 불구하고 대회의 명성은 변함이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돌로 덮인 도로가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과거의 험한 길에 대한 향수를 느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