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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주의(通貨主義, monetarism) 학파-프리더먼

Jobs 9 2020. 10. 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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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주의(通貨主義, monetarism)는 거시 경제의 변동에 화폐 공급량(통화 공급량) 및 화폐를 공급하는 중앙 은행의 역할을 중시하는 경제학 일파와 그 주장을 하는 경제학자를 말한다. 이들은 통화량을 조절하는 정부의 정책 역할을 중요시 한다.

통화주의 경제학

1. 대공황과 신고전파 경제학의 파산

자본주의 경제의 자동조절적인 균형은 세계대공황으로 인해 여지없이 깨져 나아갔다. 자본주의 경제는 주기적인 과잉생산 경제위기와 경기변동을 겪게 된다는 것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그런데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케인즈경제학이 나왔다.

 

경제위기와 파국에도 신고전파 긴축정책을 고수한 후버 대통령은 미국 경제를 더욱 침체시켰으며, 또한 신고전학파적인 금융긴축정책은 은행도산을 초래하면서 금융위기를 심화시켰다. 이런 점에 관해 부적절한 해석이 있기는 하지만 테민의 해석을 통해서 확인해 보자.

 

 본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유럽경제는 전간기에 이중적 측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시경제적 측면에서 20세기 초는 진보의 시대였다. 장기적 과정으로서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전간기에도 그것은 계속되었다. 유럽국가들은 서로 다른 공업화 단계에 있었는데, 공업화 초기단계에 있던 나라들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장기성장이라고 간주한 것 중 많은 부분은 농업에서 공업경제로의 이행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거시경제적 측면에서 전간기는 어느 때보다도 더 심한 격동의 시기였다. 자본과 노동이 이용되지 못함으로 인해서 상실된 생산의 크기는 다른 어느 시기보다도 훨씬 컸다. 생산의 상실은 많은 대가를 치루었다. 그때까지 소비는 가장 뚜렷이 드러난 희생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실업 확산이 가져다 준 심리적 효과도 심각하였다.

 

실업이 증폭됨에 따라 심리적 공황도 확산되었고, 수요 감소 앞에서 사람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공동체 전체가 실업상태에 빠지면서 사회는 해체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몇몇 나라 특히 독일에서는 바라지 않았던 정치적 붕괴마저 나타났다. 경제 불황으로 기존 정당들은 신임을 잃게 되었고 유권자들은 국가사회주의자들에게 눈을 돌렸다.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독재의 길로 내달았다. 나찌는 독일 군사력을 다시 증강시키고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켜 독일인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엄청난 비용을 치르도록 했다.

 

   일본은 1931년 엔의 평가절하를 통해서 최악의 대공황은 모면했다. 그 결과 수출이 증대하여 예외적으로 번영을 이루었다. 일본 정부는 대공황기에 정치적 혼란도 겪지 않은 채 군사팽창정책에 착수했다. 군비지출 증대 결과 경제적으로는 수요가 더욱더 자극을 받았다. 일본이 인접국들을 침략하고-일본은 한국을 이미 식민지로 삼고 있었다-그 후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손잡음으로써 야기된 다른 결과들은 매우 불미스러운 것이었다.

 

   대공황과 같은 비극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었을까? 다음에 설명하는 바와 같이 대공황은 결코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진이나 화산폭발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대공황은 경제정책의 실패가 원인이었으며, 경제정책이 변화되고서야 회복이 시작되었다. 중앙은행과 재정당국의 정책방향은 금본위제에 기반을 둔 것이었는데 이것은 이미 불황기에 있던 경제를 더욱 침체시켰다. 거의 모든 주요 선진국의 지속적인 디플레이션 정책의 효과가 세계를 대공황에 빠지게 한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디플레이션 정책을 포기하자 경제는 회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책에서 자세히 다루었지만-은 또 다 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세계경제가 하강세에 있는데도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사람들은 왜 긴축정책을 고수했을까? 정책 책임자들이 어 떻게 자신들의 정책 결과를 전혀 모를 수 있었을까?

 

이 문제는 전간기 유럽경제가 오늘날 아시아와 세계경제에 시사하는 교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오늘날 정책 책임자들은 그처럼 처참하게 행동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고 싶다. 그런데 사실 일본의 정책담당자들이 1990년대 장기침체로부터 일본경제를 구해낼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 

 

  빅토리아 에드워드 시대의 미덕인 근검, 신뢰, 안정 및 사해동포주의가 통화체제의 상징으로 의식(儀式)처럼 암송되었다. 금본위제는 도덕적이며, 원칙적이며 문명화된 것이었다. 관리통화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금본위제는 디플레이션에 의해 유지되었다. 디플레이션의 구호는 임금삭감이었다. '투기꾼들'만이 견해를 달리했다. 이러한 수사는 금태환의 이점을 감히 의심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부당한 것으로 몰아세웠다.

 

   1930년대에 금본위제 이데올로기와 정책에 대한 반대가 사회일각에서, 특히 노동계급 사이에서 들끓었다. 중앙은행의 이자율 인상으로 실업의 고통을 겪고 있던 노동자들은 제1차세계대전 이전에는 자신들의 반대 의견을 인식시킬 방법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1차세계대전 후 노동자의 조직화가 진전되고, 선거권이 확대되고,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자 정당들의 선거 전망이 밝아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정치지도자들은 표준적인 디플레이션 처방을 되풀이하는 것이 자신들의 정치적 안정을 침해하지는 않을까 하고 처음으로 자문해 보았다. 그들이 일단 주춤하자 시장이 와락 덤벼들었다. 통화와 환율, 경제가 불안정해진 것이다. 디플레이션적 정책기조를 통해 금본위제를 방어할 필요성이 더욱더 절실해졌다.

 

   이 책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그 결과는 세계 대공황이었다. 우리는 앞으로 정책담당자들이 그러한 파괴적인 '종교'에 사로잡히지 않기를 기원해야 할 것이다. 전간기 유럽경제사에 대한 지식은 이런 종류의 지적 우둔함을 막는 데 있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이다.”1)

 

2. 뉴딜정책과 유효수요증대: 소득 재분배, 실질(명목)임금상승

이런 속에 루즈벨트는 당선 하자마자 은행을 영업정지 시키면서 연쇄도산을 막고, 유동성을 공급하였으며 본격적인 뉴딜정책을 시작하였다.

 

“뉴딜정책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다. 뉴딜은 흔히 경기회복과 사회적 재분배에 목표를 두고 금융, 산업, 농업, 임금결정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여러 조치들로 이해되고 있다. 이들 조치 중 중요시 되는 것들이 은행제도의 개혁, 생산에 대한 정부의 통제강화,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이다.

 

첫 두 가지는 1933년의 유명한 100일동안 시작되었다. 루즈벨트는 1933년 2 사분기에 수많은 법안으로 의회를 분주하게 만들었는 데 이들이 경기회복을 촉발하기도 하고 미국 경제의 형태를 장기간에 걸쳐 바꾸기도 하였다. 세 번째, 즉 구호정책은 나중에 시작되었다. 제2차 뉴딜은 경기회복의 이득을 모든 인구구성원에 분배하려는 시도였다.”2)

 

뉴딜정책의 다음 기조는 경제의 운행을 시장에 맡겨 둘 것이 아니라 정부가 직접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산업부흥법(NIRA)과 농업조정법(AAA)에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1933년 6월에 통과된 NIRA는 노사협의체에서 노동시간, 임금, 기타 근로조건을 정하고 이들이 NIRA규정을 준수하도록 한 것이었다.

 

노사협의의 조건은 대개 노동시간 단축에 의한 고용증가, 그리고 임금인상이었다. 물론 이런 조치는 경제를 회복시키고 실업을 축소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하였다. 하지만 이런 내용에 대해서 반대로 해석하려고 현대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노력하고 있다. 3) 사실 뉴딜의 핵심적인 정책은 실업문제의 해소이고 노동자들의 삶의 개선이었다.

 

“제 2차 뉴딜은 1933년-37년 간 경기회복에도 불구하고 10%이상의 고수준으로 유지된 실업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재분배정책이었다. 노동권 개선을 목표로 한 와그너법을 위시해 많은 조치들이 동원되었다. 농촌전기화사업, 농가부채탕감, 사회보장법, 실업자들을 구제를 위한… 구호사업에 막대한 예산을 투여하였다. 실제로 국민소득에 대한 정부예산의 비중이 뉴딜의 시작과 함께 12% 정도에서 20%이상으로 급증하였는데 이중 절반 이상이 구호사업에 투입되었다."4)

 

"1933년 3월 4일 루즈벨트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시작된 뉴딜은 유명한 최초의 100일 도안 이전 시기의 수동적이고 디플레이션적인 정채체제로부터 국가 개입적이고, 인플레이션적인 정책체제로의 분명한 전환을 통해 대공황으로부터의 회복을 시작케했다(Temin1989/1994).

 

그러나 이러한 대공황으로부터의 회복은 더디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는데, 1929년 3분기 수준의 국민총생산을 넘어서는 것은 대공황의 시작으로부터 10년이 지난 1939년 4분기에야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1940년까지도 실업률은 14%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완만한 하락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은 1930년대 내내 이처럼 높은 수준에 있었지만, 이 시기 실질임금은 상승을 거듭하여 1939년에는 1929년 수준에 비해 46%나 증가한다. 또 한 이 시기는 뉴딜의 노동관계 제입법과 함께 노동운동이 급진전하고…“

 

대공황 이후의 미국 실업률

단위: 천명, %

 

연도

민간고용

실업자

실업률

1929

46207

1550

3.2

1930

44187

4340

8.7

1931

41305

8020

15.9

1932

38028

12060

23.6

1933

38052

12830

24.9

1934

40310

11340

21.7

1935

41673

10610

20.1

1936

43989

9030

16.9

1937

46068

7700

14.3

1938

44142

10390

19

1939

45738

9480

17.2

1940

47520

8120

14.6

 

출처: U.S. Department of Commerce, Bureau of Census(1975)

 

3. 케인즈주의 한계와 통화주의 금융세력들의 반격 그리고 전쟁

 

이와같이 케인즈 경제학과 관련한 뉴딜정책은 기본적으로 경제회복을 촉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즈벨트는 소득재분배 등을 위한 정부지출 증대, 노동자들의 힘을 강화시키는 노동법 그리고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실질임금의 상승과 이자율 인하라는 정책을 통해서 신고전파 이론에 따른 후버 행정부에 의해 조장되었던 추가적이고 인위적인 경기침체를 축소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개입이 완전고용을 가져오지도 않았으며, 경제의 완전한 회복을 가져오지도 않았다. 물론 1936-7년의 연방준비은행의 통화주의적 긴축정책이 이 회복에 찬물을 끼언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과잉생산이 완전히 해소되기 전까지 경제의 본격적인 회복은 미루어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미국과 영국의 회복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서 양국이 전시경제체제로 돌입하기 전까지는 느리고 불완전하였다. 1940년까지도 미국의 회복수준은 절반에도 못미치는 것이었으며, 그 이후 에야 제 2차세계대전에 따른 재정정책이 완전고용을 달성하는 데 ‘관건’ 이 되었다.”5)

 

“케인스의 신념을 널리 알리는 데 전쟁이 도움이 된  마지막 예는, 케인스의 경제학이 국가라는 매체를 통해 무엇을 이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1972년 당시의 불변가격으로 표시한 국민총생산은 1939년의 3200억달러에서 전쟁이 최고점에 달했던 1944년의 5690억 달러로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전쟁중에 빈곤문제가 운운된 것과는 상관없이 앞에서 말한 불변가격으로 측정한 개인 소비지출은 감소하는 일 없이 2200억달러에서 2550억달러로 증가했다.

 

군인을 제외한 노동 가능한 인구 중 실업률은 1939년에 17.2%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데 1944년에는 겨우 1.2%였다. 금속을 사용한 내구재 즉 새로운 자동차와 같은 것들은 생활수준에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전반적으로 전쟁 중 마지막 1년 동안 미국인의 생활은 이전보다 훨씬 풍요로워졌다. 이것이 - 전쟁중에 연방정부의 재화와 용역의 구입이 1939년의 228억달러에서 1944년의 2697억 달러로 증가했으며 -경기를 상승시키는 이러한 공공 수요의 압력에 기인한 결과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의 신 마르스의 계략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대항하기 힘든데, 이 전쟁의 신 마르스가 케인스 학파에게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대단한 견본을 만든 것이다.”6)

 

<표> 주요국의 국민순생산 중 군비지출 비중, 1913-1920년, 1937-1951년(요소비용 기준, %)

 

 

영국

미국

소련

독일

일본

 

영국

미국

소련

독일

일본

제1차대전

 

 

 

 

 

제2차대전

 

 

 

 

 

1913

4

1

-

-

-

1937

-

-

9

17

13

1914

9

1

-

14

-

1938

7

-

-

25

-

1915

34

1

-

41

-

1939

16

2

-

44

-

1916

38

1

-

35

-

1940

49

2

21

56

17

1917

38

6

-

53

-

1941

55

12

-

69

25

1918

32

13

-

32

-

1942

54

34

75

76

36

1919

13

9

-

-

-

1943

57

44

76

-

47

1920

4

3

-

-

-

1944

56

45

69

-

64

 

 

 

 

 

 

1945

47

38

-

-

-

 

 

 

 

 

 

1946

19

10

-

-

-

 

 

 

 

 

 

1947

11

5

-

-

-

 

 

 

 

 

 

1948

8

5

18

-

-

 

 

 

 

 

 

1949

8

6

17

-

-

 

 

 

 

 

 

1950

8

5

16

-

-

 

 

 

 

 

 

1951

10

11

17

-

-

 

자료: Charles, H. Feinstein 외, 『대공황 전후 유럽경제』

 

그리고 이 2차 대전이후에 다시금 1950년에 경제가 후퇴하게 되고, 주기적인 경제위기가 찾아온다. 하지만 2차대전의 거대한 파괴와 뒤이은 초국적 자본의 세계적 확대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실질임금의 상승,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체제저항을 포섭하기 위한 복지정책 그리고 또 한차례의 베트남 전쟁은 1973년까지의 황금기를 낳는다.

 

이런 팽창은 동시에 거대한 과잉생산을 낳고 그리하여 베트남 전쟁비용 등 정부지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르고 오히려 물가상승을 수반하는 스테그플레이션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것을 참을 수 없었던 세력들이 바로 금융쪽 세력들이었고 이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통화주의 경제학이 등장한다.

 

요컨대 케인즈의 정부지출 증대는 경제위기의 파괴성을 완화시키고, 유동성공급의 증대는 신용체계의 붕괴를 막아 불필요한 기업들의 도산을 막는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물가상승 혹은 지지는 기생적인 금융채무자로부터 산업활동을 하는 자들로 부를 이전시켜 산업활동의 파괴성을 약화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업 및 고용과 유효수요의 증대의 핵심적인 요인은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조합의 강화와 이를 바탕으로 한 실질(명목)임금의 상승이었다.

 

그러나 케인즈 이론에서는 이와 반대로 명목임금 경직성을 주장했을 뿐만아니라 더 나아가서 실질임금의 결정원리에 있어서 신고전파와 동일한 이론적인 기반에 있었으며  명확치 않았다7).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경제가 완전고용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 그리고 유효수요증대를 위해서 정부가 나서면 자본주의 경제가 항상 그 상태에서 번영을 이룩할 수 있다는 케인즈의 견해는 신고전파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견해였다.

 

4. 통화주의 등장의 배경: 1960년대말 70년대 초 스테그플레이션

 

정부지출에 입각한 그것도 채권발행에 의한 정부지출의 증대는 대공황시기와는 달리 급격한  물가상승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주기적 경제위기는 지속되었으며, 1974년 전세계는 경기침체에 빠져들었다.

 

“1966년 이후 물가가 상승률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물가는 1969년부터 1970년에 걸쳐 6퍼센트 이상, 1972-73년에는 거의 8퍼센트, 1974-75년에는 거의 14퍼센트나 상승했다. 이 1974-75년의 물가상승은 미국의 경제 용어에 두 자리수 인플레인션이라는 비참한 어구를 첨가하게 만들었다. …

 

이 시절에 미국, 영국, 캐나다에서도 임금․가격의 순환적 상승을 억제하기 위한 권고적, 자발적 내지 부분적으로 법적인 노력이 있었다. 1971-1973년에 리처드 닉슨 정권은 공식적인 가격․임금 통제 정책을 도입했다. …끝으로, 1973년 말부터 이른바 석유 가격의 대폭등이 도래했다. 이것은 산유국의 카르텔 활동, 즉 OPEC의 결과였다. 1972년부터 1981년까지의 기간 중에 미국 가정용 연료의 가격지수는 (1967년을 100으로 해서)118.5에서 857.9로 거의 6배 상승했다. 이것도 케인스적인 거시경제 정책밖에 있는 미시 경제적 변화였다8).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통한 유효수요증대는 미국의 과잉생산위기의 시기는 일치한다. 즉, 베트남전쟁은 과잉생산시기를 맞이하여 민간투자가 줄어들고 소비가 위축되며 실업이 증가하는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57년과 58년을 거치면서 56년에 70억 달러이던 민간투자는 68억 달러와 61억 달러로 감소하였으며, 59년에 75억 달러에서 95년 75억 달러 60년 72억 달러로 감소했다.

 

실업률은 56년 4.1%에서 57년 4.3%, 58년 6.8%를, 그리고 59년에 5.5%에서 61년에 다시금 6.7%를 기록하였다. 경제의 이러한 악화의 과정에서  미국연방정부는 군비 지출을 늘리기 시작한다. 한국전쟁 말인 53년 49억 달러까지 올라갔던 군비지출은 55년 39억 달러까지 내려갔으나, 57년 44억 달러를 기점으로 상승하여 베트남전쟁이 끝나는 69년에 78억 달러까지 상승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쟁을 포함한 유효수요 정책에 의해 소비를 증대하는 정책은 근본적으로 한계를 갖는다. 소비를 진작시키는 이런 정책에는 막대한 자금이 들기 때문이다9). 베트남전으로 말미암아 미국은 국제수지 적자를 기록하고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71년 8월 15일 달러의 금으로의 태환을 정지하기에 이른다10). 닉슨 쇼크라고 부르는 이 조치는 1945년이래 지속되어 오던 자본주의 세계 통화체제(브레튼우즈체제)를 붕괴를 초래하는 조치였다.

 

 요컨대 과잉생산위기의 해소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사용된 전쟁비용은 세계경제체제를 붕괴시키는 정도였다. 요컨대 전쟁은 자본주의 과잉생산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원리 자체에 곧 충돌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군수수요의 감소는 69년 70년의 경제위기를 초래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간 전쟁 특수에 의한 유럽의 호황에도 종지부를 찍는 데 그것이 1973년 오일쇼크로 나타난다.

 

반면에 채권을 발행하지 않고 소득재분배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면, 재원의 문제와 인플레이션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가계급 전체의 반발로 인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5. 케인즈주의의 몰락과 통화주의의 득세

 

이런 인플레이션을 배경으로 화폐소유자와 채권자들은 반발하였고, 인플레이션의 폐해를 선전하면서 다시금 전간기 시기의 통화주의가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한다. 통화주의는 분명하면서도 영향력 있는 주창자가 있었다. 또 1970년대 중반에는 화폐정책 이외의 모든 정책수단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화폐정책은 유산상속인과 같은 지위를 부여받았고, 그러한 지위는 한층 두드러져 보였다. 그러나 아마도 20세기 후반에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가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에 걸쳐 자신의 시대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밀턴 프리드먼이 바로 그 사람이다. …

 

그러나 프리드먼이경제학의 역사에 끼친 주요한 공헌은 화폐조치가 경제, 특히 물가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강력히 주장한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물가는 수개월 간의 시차를 두고 늘 화폐공급량의 동향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화폐공급량을 억누르면 -화폐공급량의 증가를 피셔의 역사적인 방정식에서 T에 상당하는 거래액 수준으로 제한하면-  물가는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1970년대가 지나가도 인플레이션은 끈질기게 지속됐다. 증세도, 공공지출의 감축도, 임금․가격에 대한 직접개입도 인플레이션 치유책으로서는 모두 무력했다. 이미 충분히 살펴봤듯이 화폐정책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1970년대 말엽, 미국에서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자유주의파 행정부가, 영국에서는 마가렛 대처 수상의 공공연한 보수파 정부가 통화주의에 바탕을 둔 강력한 조치를 실시했다. 케인스 혁명은 끝나 버렸다. 경제학의 역사에서 존 메이너드 시대는 밀턴 프리드먼 시대에 양보했던 것이다.11)

 

6. 케인즈의 유동성선호에서 통화주의의 화폐수량설로

 

시카고 학파의 화폐 및 금융에 관한 이론 및 정책은 우선 프리드먼에  의해 주도된 통화주의로 요약된다. 통화주의는 경제활동을 결정하는 요인으로서 화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통화정책의 싱해에 잇어서 준칙주의를 주창한다. 1950년대에 프리드먼을 중심으로 시작된 통화주의의 대표적인 학자로서는 프리드먼 외에도 브루너 멜처, 케인건 풀레, 레들러 파르킨 맥칼럼 등이 있다.

 

통화주의는 경제학설사적으로 보면 케인즈 이전의 화폐이론을 부활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케인즈가 ������일반이론������을 발표하기 직전은 화폐경제학자의 관심이 고전학파적인 화폐의 장기 중립성 공준으로부터 화폐적 균형조건에 대한 연구로 전환된 시기였다. 피셔의 교환방정식과 케임브리지학파의 현금잔고설은 흄, 리카아도 등이 전개한 화폐수량설의 중요성을 다시 부각시켜 화폐의 장기중립성, 화폐적 균형에 대한 분석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경제의 내재적인 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통화공급을 과다하게 증가시켜 인플레이션을 조장할 위험은 늘 존재한다. 왜냐하면 통화의 증발이 초래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자율의 하락으로부터 오는 정치적 이득, 정부부채의 이자비용 및 실질잔액의 감소효과, 인플레이션 조세의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통화주의 학자들은 실업보다 인플레이션이 사회적으로 더 큰비용을 초래한다고 인식한다. 인플레이션은 상대가격의 변동을 수반하며, 자원 배분의 왜곡이라는 문제를 일으킨다. …통화주의 경제학자는 인플레이션의 원인을 통화공급률의 증가에 있다고 본다. 즉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통화적인 현상이다.”12)

 

7. 통화량 증대의 효과: 이자율 하락이냐 물가 상승이냐?

 

통화주의는 통화량이 재화의 소비에 미치는 직접적인 효과를 중시한다. 통화량이 소비에 미치는 영향, 부의 효과에 관해서는 피구 이래 논의되어 왔고 파틴킨은 현금 잔고효과의 형태로 일반균형분석에 도입하였다. 프리드먼 역시 통화량 변동의 효과가 자산구성의 조정에 의해 산출량에 전달되는 과정을 중시하고 있다.

 

전달경로의 분석은 기본적으로 상대가격이론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실제 통화잔고가 소망수준의 통화잔고를 초과하면 자산구성의 변동이 발생한다. 화폐는 단기 금융자산 뿐만아니라 모든 실물 미 금융자산과 대체관계에 있다. 따라서 통화량의 변동은 금융자산의 수요뿐만 아니라 재화 및 서비스에 대한 지출에도 영향을 준다.

 

케인지안이 통화의 대체자산으로 일부 금융자산, 즉 증권만을 고려하는 데 비해 통화주의자들은 보다 넓은 범위의 자산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통화량의 증가는 통화의 상대가격을 하락시키고 금융 및 실물자산의 상대가격은 상승시켜 금융 및 실물자산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킨다. 이 과정에서 산출량이 증가하고 물가 역시  상승하게 된다.

 

그러나 노동 및 원자재의 가격이 충분히 상승하면 산출량은 최초의 균형수준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와 같이 통화주의자들은 통화량의 변동이 화폐의 상대가격의 변화를 초래하며 자산구성의 변화과정에서 광범위한 경제활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보고 있다. 결국 통화주의 전달경로의 특징은 통화와 대체성을 갖는 자산의 범위를 매우 넓게 봄으로써 통화량이 소비에 미치는 직접적 효과까지 고려하는 데 있다.

 

케인지안은 사람들이 초과 현금잔고를 다른 금융자산(특히 단기 유동적인 자산)의 구입에 사용하며 이에 따른 이자율하락의 효과는 신용을 통해 구입하는 재화의 지출에만 나타난다고 본다. 즉 통화량 변동의 효과는 기업의 투자지출, 주거용 건축, 내구재에 대한 소비지출에만 나타난다. 케인지안의 이론체계는 가계의 소비행위가 이자율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보므로 통화량의 증가가 소비지출을 증가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통화주의는 실제 현금잔고가 커질 때 사람들은 재화에 대한 지출도 늘린다고 본다.13)

 

케인지안은 화폐수요량 및 공급량의 정확하고 신속한 측정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며 따라서 이자율의 변동을 통해 총지출의 변동을 예측하려고 한다. 반면에 통화주의자는 화폐수요의 안정성을 주장하며 통화량과 총지출 사이에 안정적인 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케인지안은 이자율의 변화를 통한 간접적인 전달경로를 주장하며 통화주의는 통화량이 미치는 효과를 강조한다.14) 요컨대 케인지안은 통화량 증대가 이자율 하락을 통해서 산출량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통화주의자들은 통화량증대는 일시적인 산출량증대를 제외하고는 물가상승을 야기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8. 통화주의의 모형 설명 (프리드먼의 견해)

 

C/P=f(Y/P, r)

I/P=g(r)

Y/P=C/P +I/P

Md=P×l(Y/P, r)

Ms=h(r)

Md=Ms

 

 여기에서 C는 소비지출, P는 물가수준, Y는 명목소득, I는 투자지출, r은 이자율, Md는 화폐수요, Ms는 화폐공급을 의미한다. 위의 방정식 체계에서 내생변수는 7개로 방정식의 수보다 1개가 많으므로 새로운 방정식이 추가되지 않는 한 모형의 해를 구할 수 없다.

 

 먼저 신고전학파 모형에서는 실질 소득(Y/P)이 완전고용수준에서 외생적으로 결정된다고 본다. 실물부문에서 C/P, I/P, r 이 결정되고 화폐부문에서 P가 결정됨으로써 소위 고전적 이분성(classical dichotomy)이 성립하게 된다.

 

한편 케인즈는 물가수준이 외생적으로 결정된다고 본다. 케인즈의 모형에서는 이자율이 화폐부문에서 결정되며 고전적 이분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프리드먼은 물가와 실질 소득을 따로 분석하지 않고 명목소득의 결정에 대해서만 분석함으로써 부족한 방정식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15) 먼저 경험적 연구에 의하면 화폐수요의 소득탄력성은 1과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화폐수요함수는 다음의 식으로 변환된다.

 

Md=Y×l(r)

통화량이 이자율의 함수가 아니라 외생적으로 결정된다고 가정하면 명목소득이 통화량에 의해 결정됨을 더 쉽게 볼 수 있다.

 

Y(t)=M(t)/l(r)

을 도출하고 이식을

 

Y(t)=V(r)M(t)의 교환방식 형태로 전환하자.

요컨대 프리드먼의 명목소득 결정모형에서는 화폐수요의 실질 소득 탄력성이 1이고( 예상 실질이자율과 예상 인플레이션율의 합으로 결정되는 명목이자율이 장기적 예상수준에서 일정하며 예상 실질이자율과 실질소득의 추세적 증가율의 차가 외생적으로 주어진다고 가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모형에서 명목소득은 통화량에 의해 결정되며 이는 통화주의 이론이 화폐수량설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시사 해준다. 요컨대 화폐의 유통속도가 일정하다는 것이다.

 

9. 통화주의 긴축처방: 정부개입을 배제하라-자본주의 경제의 자동조절의 환상

 

케인즈 학파가 자본주의 경제가 유효수요가 부족한 경우에 완전고용이하의 상태에서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경기침체에 빠질수도 있으나, 적절히 개입을 하면 완전고용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시카고 학파는 통화공급의 불규칙적인 변동으로 경제를 교란시키지 않는 한 자본주의 경제는 본질적으로 안정적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프리드먼은, 대공황의 원인이 케인지안들의 주장처럼 민가부문의 유효수요의 부족이 아니라 중앙은행의 갑작스런 통화량 감축에 있었다고 본다. 민간부문의 동태적 구조는 본질적으로 안정적이므로 어떤 교란이든지 자체적으로 흡수하여 안정적인 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화폐수요는 안정적이므로 통화공급만 안정되면 실물부문의 교란은 신속히 조정되어 산출량이 장기 성장경로로 조속히 회복될 수 있다고 본다.’16) 이에 대해 프리드먼은 네 가지의 구체적 예를 제시하고 있다고 한다.

 

“프리드먼과 슈바르츠(1963)는 정책적으로 통화량의 변동이 발생한 경우, 즉 통화량이 외생적으로 변동한 예를 역사상 찾고 있다. 그들은 미국 역사상 네 개의 주요한 사건을 통화부문의 교란과 결부지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통화적 교란은 실물 부분의 관련된 전개에 대해서 매우 비평상적인 화폐부문의 전개를 의미한다.

 

 예컨대 1875-78년 동안의 불황직전에 금본위제로 복귀하기 위한 정책적 목적에서 본원 통화량이 감소하였다. 또 1920-21-년 사이의불황은 중앙은행의 재할인율의 인상에 의해 유발되었다. 그 중 네 번째의 결정적인사건 a forth crucial experment은 1929-31년 동안 통화공급량이 1/3만큼 감소하였으나 중앙은행이 전혀 대응하지 않은 경우이다(프리드먼과 슈바르츠, 1963, 694쪽). 1929-33년 동안의 대공황시 중앙은행은 주식시장의 투기현상을 제어하기 위해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시행했다.

 

 이 기간동안 중앙은행은 본원통화를 유지하지 못했으며 연쇄적인 은행도산으로 민간의 현금통화비율이 급격히 상승하였고 은행의 지급준비율이 상승하여 통화량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또한 재무성이 금의 유입을 막는 과정에서 본원통화의 감소가 발생하였다. 

 

 결국 이 기간 동안 통화량은 34%센트나 감소하였다. 또한 1936-37년 동안에 연방준비은행이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개선하기 위해 지급준비율을 증가시켰는 데 그 결과 1937-38년 동안에 불황이 발생하였다. 지급준비율의 인상은 외생적인 변화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프리드먼과 슈바르츠는 이와 같은 증거를 제시하며 통화공급 증가율의 현저한 변화가 명목소득 증가율의 현저한 변화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주장하였다. ”17)

 

통화주의자는 화폐의 초과공급이 반드시 이자율의 하락을 가져오지는 않는다고 본다. 통화량이 증가하면 유동성 효과에 의해 단기에는 이자율이 하락하더라도 소득의 증가에 따른 화폐수요의 증가, 물가 상승에 따른 실질 통화공급량의 감소, 예상 인플레이션의 상승이 미치는 효과 등에 의해 명목이자율이 재상승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케인즈안이 적절한 지표로 주장하는 단기 이자율은 화폐시장의 상태를 나타내는 지표로서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통화주의의 핵심은 정부개입의 배제이며, 기업들의 자유이다. 정부개입만 없다면 자본주의 경제는 최적의 상태로 옮겨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이 제시하는 주장은 정부의 재량권의 배제를 위한 준칙이다.

 

“통화정책을 시행함에 있어서 통화량을 당국의 재량에 의해 경기 안정화의 방향으로 조절하느냐 아니면 미리 설정된 준칙에 의해 공급해야 하느냐에 관한 논란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1960년대의 케인지안 정책은 재량주의를 표방한 데 비해 통화주의는 준칙에 의한 통화공급이 경기 안정화에 더 나은 결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케인지안은…적정한 이자율을 유지하려면 통화량이 재량에 의해 변동 가능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통화주의자들은 통화량을 중간목료 변수로 선택하여 그 증가율을 미리 설정하는 것이 경기 안정화에 장기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18)

 

10. 통화주의의 결과,

 

"1970년대 후반까지 연장준비이사회의 관심은 주로 이자율이었다. …볼커의 정책은 화폐유통속도가 일정하다(또는 적어도 예측적이다)는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만약 화폐공급이 재화 생산의 증가(그리고 예상되는 유통속도의 변화)를 수용할 수 있도록 안정된 비율로 증가한다면 물가는 안정될 것이다. 유통속도(V)의 정의 (V=PY/M)를 생각해보라. 연방준비이사회는 이 정책을 고집했다. 화폐공급이 목표량보다 더 빨리 증가하면 연방준비이사회는 정부채권을 팔면서 공개시장조작에 개입했다.

 

화폐공급의 증가율도 감소했지만, 이자율이 10%, 15%, 29%로 계속해서 치솟아 오르면서 1980년과 1981-82년의 경기침체를 초래했다. 연방준비이사회는 화폐공급을 목표로 하는 이 정책을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포기하였다. 첫째 인플레이션율이 1982년에 3.8%로 급격히 떨어졌다. 인플레이션율이 매우 낮고 경제가 침체됐으므로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것보다 경제를 자극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둘째, 화폐 유통속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졌고, 금융기관들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화폐의 적절한 정의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19)

 

또는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고금리를 통한 소비자 지출과 기업투자의 억제효과가 작용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심각한 경기침체를 야기했다. 이러한 치료책은 치료받는 병의 증세보다도 작은 고통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화폐정책이 성공한 것은 이 정책과 관련이 있으면서도 경제학자들이 예견하지 못한 다음과 같은 상황 때문이었다.

 

화폐 긴축정책이 고금리를 통해 작용하고 그 결과로 달러가 강세를 보이는 일련이 상황에 대해서 현대의 산업 회사들은 대단히 취약했던 것이다. 여기에다가 기업이 점차로 노쇄해진 것이 이러한 효과를 증폭시켰고, 결과적으로 외국과의 경쟁에서 더욱 불리한 처지에 서게 만들었다. 화폐와 고금리로 유발된 실업이 노동조합의 교섭력을 약화시킨 것은 당연했다.

 

정통적 경제학자들은 실업이 임금 수준을 낮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용자인 기업에 미치는 화폐정책의 효과는 예견되고 있지 않았다. 철강, 자동차, 기계, 광업, 항공수송, 그 밖의 산업에서 화폐저책의 전체적인 효과 - 외국과의 경쟁가지도 포함해 - 는 매출액을 감소시키고 공장 설비를 대량으로 유휴화시켰으며, 도산과 조업 중지의 위험까지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조합은 임금 인상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을 분 아니라, 임금과 부대적 반대급부를 인하하는 교섭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9년 10월에 미국 연방준비은행장 볼커는 소위 <통화주의 실험 monertarist  experiment)을 할 것을 공언하였다. 그동안 치솟던 인플레이션율의 제어를 위해 통화주의 주장대로 통화량(M1)을 중심지표로 하여 매년 1퍼센트 포인트씩 증가율을 낮추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실험은 1982년 하반기에 이르러 포기된다. 그 이유는 1982년에 이르러 실질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며 국제수지 적자가 누적되고 이자율의 변동성(-이자율 급격히 상승-인용자)이 커지는 등 경제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역사적 경험을 통화주의 이론을 입증한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지 또는 기각해야 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20)

 

11. 통화주의 경제학의 정치적 계급적 이해관계- 고전적 이분성의 허구

 

일부 사람들에게 화폐정책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지금도 갖고 있다) 이 문제는 기이하게도 경제학자들이 간과했는데,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였다. 이 매력이란, 화폐정책은 사회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화폐정책은 인플레이션에 대해 금리를 인상함으로써 작용한다. 금리인상은 은행 대출과 그에 따른 예금의 창조-화폐창조-를 억제시킨다. 빌려줄 돈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기관에게 고금리는 아주 좋은 현상이다.

 

이러한 사람들이나 기관은 빌려줄 돈이 없는 사람들 또는- 예외는 많지만- 돈을 빌리는 사람들보다 통상적으로 많은 돈을 갖고 있다. 이것은 이미 충분히 강조했던 바와 같고 자명한 진리다. 화폐긴축 정책은 돈이 있는 사람이나 기관을 이와 같이 이롭게 하는 것으로서 재정 팽창정책과는 심한 대조를 보인다.

 

재정 팽창정책은 개인과 법인소득세의 징수확대에 의존하기 때문에 부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공업국들, 특히 미국과 영국의 보수파들은 화폐정책에 강력한  지지를 보내왔다. 그들의 본능은 이런 점에서 경제학자들의 본능보다 훨씬 뛰어났다. 무슨 말인가 하면, 경제학자는 일반대중과 함께 화폐정책을 사회적으로 중립적이라고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1)

 

12. 새고전학파

 

“1970년대 들어서 통화이론은 프리드먼의 통화주의 이론을 벗어나 새고전학파 이론으로 계승된다. 새고전학파의 중심인물은 루카스, 사전트, 배로 등이다. 새고전학파 거시경제학은 통화정책이 실질 GNP 및 고용에 미치는 효과를 부정하고 정부의 경기조절정책을 ks대한다는 점에서 보면 통화주의의 자유주의 경제학을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새고전학파 경제학은 다음의 세 가지를 가정하고 있다.

 

첫째, 경제주체가 미래를 예상할 때 합리적 기대를 한다고 가정한다. 둘째 모든 시장은 언제나 청산된다고 가정한다 가격기구는 매우 신축적이어서 어떤 시장에서든지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수준에서 가격이 결정된다고 본다. 시장청산의 가정은 고전학파 경제학의 경제관을 반영한 것이다 셋째, 모든 경제행위는 경제주체의 제약하의 최적화 행동으로부터 발생하다고 가정한다. 거시현상을 분석함에 있어 엄격한 경제의 제1원리에서 출발하는 분석기법은 거시경제학의 미시적 기초라고 하며, 이후의 거시경제학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1)합리적 기대

20세기 초까지 고전하가이론에서는 경제주체들이 경제변수의 미래치를 완전히 예견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Pet=Pt

 

그러나 완전예견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가정이어Te. 이를 보완하여 제기된 것이 적응적 기대 가설이다.

 

 Pet+1= Pet.+α(Pet-Pt)= αPt +α(1-α)Pt-1+α(1-α)2Pt-1 + 

 

그러나 과거의 경험에만 의존해서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매우 비합리적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등장한 것이 바로 합리적 기대가설이다. 이에 따르면 경제주체들은 현재 이용가능한 모든 정보를 활용하여 다음 기의 변수값을 예측한다. 이것을 수식으로 난내면 다음과 같다.

 

 Pet+1=E[Pt+1|Ωt)

 

합리적 기대가설은 1961년에 이미 무스(Muth)가 농산물 가격분석에 이용한 적이 있었으나 오랫동안 경제분석에 이용되지 않다가 루카스가 자신의 경기변동론의 핵심적인 가정으로 부활시켰다.

 

2)루카스 공급곡선과 루카스 비판

기업은 자신의 상품가격에 관한 정보는 가지고 있으나 다른 시장의 상품가격에 관한 정보는 불완전하게 갖고 있다. 산출량의 크기는 상대가격에 달려 있는 데 상대가격의 계산을 위해 필요한 개별가격의 평균으로서의 물가를 직접 관측할 수 없다. 즉 기업은 상대적 충격과 전면적 충격을 구별하지 못한다. 이때 기업은 합리적 기대방식으로 물가를 예상한다. 그에 따른 새고전학파의 공급곡선은 아래와 같다.

 

yt= α(Pt-Pet) +y*  α>0

 

그런데 위식에서 계수 α는 물가수준의 분산(변동폭)의 감소함수다. 계수 α는 정책의 변화에 대해 무관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즉 물가수준의 변동폭이 커지면 α가 작아진다는 것이다. α가 작아져서 0이 된다면 루카스의 공급곡선은 수직선의 형태를 띤다. 이것은 기업들이 자신의 제품가격 상승을 개별적 충격으로 파악하지 않고 일반물가수준 상승으로 파악하여 예상물가수준을 즉각적으로 상향조정하고 실질산출량은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의미다. 실증분석의 결과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던 나라일수록 α의 크기가 작게 나왔다.

 

3) 균형경기변동론

루카스는 ,관측된 가격변동에 대한 최적 대응으로서 관측된 수량(고용, 소비, 투자)의 변동을 설명하는 이론>을 구축하고자 시도한다. 특히 시장청산의 가정 때문에 새고전학파의 경기변동을 균형경기변동론이라고 부른다.

 

이제 경제에 충격이 발생하면 합리적 기대에 의한 균형가격 및 수량의 시계열이 변한다. 경제주체가 합리적 기대를 하면 예측오차는 계열 무상관과정이 된다. 즉 평균적으로 보아 한기의 예측오차는 다른 기의 예측오차와 아무런 상관성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나 현실경제에서 산출량이나 고용의 변동성은 계열 상관성을 갖는 것이 보통이다. 현실경제에서 관찰되는 경기변동 현상을 완전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계열상관적인 충격이 계열 상관적인 산출량이나 고용으로 전달되는 확산과정이 추가되어야 한다. 예컨대 기업이 자본스톡이나 노도을 조정하는 데 수반되는 비용등 마찰적인 요인들이 추가된다.

 

4)정책 무력성의 명제와 시장개입반대

루카스는 합리적 기대와 자연실업률 가설을 가정하여 단기에 우하향하는 필립스곡선이 경제주체의 합리적 행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주장한다. 그런데 새고전학파는 경제주체가 미리 예상한 통화량의 변동은 실업률이나 산출량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경제주체가 경제의 작동원리를 잘 알고 있어 통화량의 증가 인플레이션율의 상승을 야기할 것으로 예상하면 수요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상대가격, 상대임금의 변동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명제는 사전트와 왈라스가 정책무력성의 명제라는 이름으로 제기한 이래 거시경제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킨 바 있다.

 

5)새고전학파의 평가

대표적인 통화주의자인 브르너는 새고전학파의 경제학이 너무 비현실적인 제약하에서 합리적 행동을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비판한다. 현실세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거래비용, 정보비용 등 경제주체에게 주어진 제약은 새고전학파 이론이 상정한 것보다 훨씬 강하다.

 

“합리적 기대이론가들을 상대로 논쟁을 벌이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그들의 주장에는 시장이 순식간에 수급균형을 이룬다거나 모든 국민들이 거의 초능력적으로 막대한 정보를 흡수하여 분석할 수 있다는 등 위태로운 가정들이 많다. 이러한 가정들을 다 인정해 줄 경우, 합리적 기대이론은 그야 말로 난공불락일 듯하다. ⃛ 합리적 기대이론은 정부의 경제팽창정책이 경제를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또한 정부의 긴축통화 정책은 불경기를 몰고 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우선 첫째 주장부터 살펴보자 만약 합리적 기대이론이 옳다면 감세조지차가 시행되는 순간에는 국민들의 소비성향에 아무런 변화도 없어야 한다. 세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ㄴ 순간 이미 사람들은 합리적 기대에 맞춰 소비를 늘릴것이고, 따라서 몇 년 후 막상 그 법안이 시행될 무렵에는 소비량이 일정해야 한다. ⃛이제 긴축통화정책이 불경기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두 번째 주장에 주목해보자.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1982년 10.6% 실업률은 불경기 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1980년과 1981년에 걸친 통화량 감소의 영향으로 경제는 불경기의 늪에 빠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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