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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 토마스 복음서, Gospel of Thomas, 전문, 의미, 논쟁

Jobs 9 2025. 1. 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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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복음서, Gospel of Thomas


그리스어: Ευαγγέλιο του Θωμά
라틴어: Evangelium secundum Thomam
영어: The Gospel According to Thomas

114개의 어록 형식으로 구성된 외경 복음서이다. 옛스럽게 도마복음이라고도 한다. 1945년 콥트어로 적힌 온전한 문서가 발견됐다. 이후 연구를 통해 1898년 이집트에서 일부가 발견됐던 그리스어 문헌과 내용이 일치함을 확인했다. 통설상 2세기 중반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기적으로 공관복음서는 물론이고 요한복음서보다도 훨씬 늦게 집필된 책이며 공관 복음서와 겹치는 구절들을 통해 이 책이 공관 복음서에 의존하는 책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구절들이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갔을 가능성도 있는 중요한 문헌으로 인정받고 있다. 도마복음은 공관복음과 공통된 내용이 있고 어록으로 구성되어 있어 Q 문서 가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두 출전 가설'을 바탕으로 Q 문서를 재구하면 도마복음과 상당히 일치한다. 

 

발견 경위


1945년 이집트의 나그함마디(نجع حمادي, Nag Hammadi)에서 콥트어로 기록된 그리스도교 계통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퇴비를 찾던 농부 무함마드 알리 알삼만(محمد علي السمان, Muhammad Ali al-Samman, ? ~ ?)이 발견했는데, 이 문서들이 돌고 돌아서 카이로의 시장에까지 나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발견된 것이다. 이후에 문서가 발견된 도시인 나그함마디의 이름을 따서 나그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라 부르게 됐다.  

토마스 복음서가 있었다는 사실은 초대교회 교부들의 기록을 보고 신학자들도 알고 있었으나 책이 실전된 상황이었으므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비록 단 한 개지만 실물 사본이 나타난 것이다. 이집트 고문서성이 공개하지 않다가 1956년에 영인본을 출판하여 신학자들이 연구에 들어갔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1898년 이집트의 고대 로마 유적지에서 발견된 그리스어로 된 옥시링쿠스 파피루스 중에 토마스 복음서의 일부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장~37장까지 앞부분이 3, 4개 묶음으로 나뉘어져 일부가 사라진채 나머지는 순서대로 남아 있다. 내용이 나그함마디와 비교하면 사실상 똑같다. 그나마 2장과 36장에 아주 조금 내용이 추가되어 있는데 추가된 내용이 기존 내용의 의미를 해치지도 않는다. 37장 이후 내용도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데, 이는 이집트 나그함마디 문서보다 약 150년 이전에 똑같은 내용의 사본이 그리스에 온전히 존재했다는 것을 뜻한다. 

 

 

저술 연대와 역사적 예수


1991년 크로산(J. D. Crossan)과 마이어(J.P. Meier)는 토마 복음의 역사적 가치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크로산은 토마 복음서 말씀들 가운데 일부는 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았다. 62년 야고보 사도의 죽음 뒤 토마 사도가 에데사로 갔으며 거기서 60-70년대에 만든 토마 복음 일차 자료에다 이차 자료를 추가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크로산이 토마 복음의 친저성을 옹호한 반면, 마이어는 토마 복음을 2세기 영지주의 작품으로 결론 내렸다. 토마 복음에 담긴 예수님 말슴들은 신비주의·금욕주의·범신론·다신론의 렌즈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토마 복음이 공관 복음서에 의존하므로 역사의 예수님 구에 독자적 사료가 되지 못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라이트(N.T. Wright)와 알리슨(D.C. Allision)도 토마 복음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역사적 자료로는 가치가 없다고 보았다.
페터슨(S.J. Patterson)은 토마 복음이 공관 복음서보다 먼저 생겨났다는 주장에는 반대하지만 이 복음서의 몇몇 말씀들은 역사의 예수님 연구에 도움이 된다고 여긴다. 토마 복음서에서 묵시주의적 말씀들을 걸러내고 예수님을 지혜의 스승으로 그리는 말씀들을 선별하였다. 이 지혜의 말씀들이 역사의 예수님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카에스틀리(J.-D. Kaestli)는 크로산과 마이어 둘 다 비판한다. 마이어에 대해서는 그가 토마 복음의 영지주의적 특성을 과장하여 너무 후대 작품으로 미뤘다고 비판하였다. 토마 복음에서 발견되는 영지주의 흔적은 후대 편집의 산물이지만 그 골격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크로산의 경우 자기 취향에 의해 예수님을 현자의 모습으로만 부각시켰다고 비판하였다.
유럽 학자들 중에도 토마 복음이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본 이들이 있다.[ 죄클러(T. Zöckler)는 쾨스터-패터슨-크로산의 노선을 유지하면서 토마 복음에서 두 단계의 편집층을 구분하였다. 곧 토마 복음에는 예수님 활동 당시에 유래한 초기의 독자적 말씀들과 후대에 추가된 말씀들이 한데 얽혀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슈뢰더(J. Schröter)와 드코닉(A.D. DeConick은, 토마 복음이 나온 시점을 2세기 경으로 잡는다. 토마 복음은, 예수님 전승에서 전기적 요소를 제거하고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만 중점적으로 전하고자 했던 배경에서 나온 산물이라는 것이다. 결국 역사의 예수님과 그리스도교 기원을 재구성하는 데는 토마 복음이 별로 유용하지 않으리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실 토마 복음을 역사의 예수 연구 자료로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일은 아직도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 토마 복음이 초기의 독자적 예수님 전승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 학자들이 토마 복음에서 초기 말씀을 골라내어 그 진정성을 입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토마 복음의 1세기 기원설을 부정하면서 예수님에 관한 증거 자료로서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토마 복음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든 안 하든 실제로는 토마 복음을 역사의 예수님 연구에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토마 복음이 성경 연구에 도움이 되고 실제 예수님 말씀과 관련된 내용을 담았을 가능성은 있으나 역사의 예수님을 재구성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송혜경 박사 역주, 《신약 외경 1》, 한님성서연구소, 2021, 144-147쪽.


토마 복음서 콥트어 사본(나그 함마디 Codex II)이 4세기 것으로 추정되므로 그 대본은 4세기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리스어 사본(P. Oxy. 654)이 2세기 말-3세기 초의 것이니 최초 본문은 2세기 말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 토마 복음의 최종 편집 시기는 2세기 중엽이 유력하다. 핵심 내용은 1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졌으며 예수님의 실제 말씀들을 담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본문에서 드러나는 헤르메스주의나 영지주의 관점은 2세기 초반 이전 것으로 보기 어렵다. 더구나 네 복음서와 병행하는 말슴들에서 디아테사론 류의 조화 복음서와 비슷한 특성이 나타나는데, 조화 복음서가 발전한 시기는 2세기 중반 이후다. 따라서 토마 복음이 현재 모습으로 편집된 것도 2세기 중반 이후일 것이다. 결국 토마 복음의 일부 말씀들은 1세기에 형성되었고 예수님에게서 유래한 말씀일 가능성은 있으나 2세기 중반 다른 복음서 전승들과 헤르메스주의나 신비주의, 금욕주의, 영지주의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추가되어 현재 모습으로 가닥을 잡고 편집되었을 것이다.
-송혜경, 같은 책 167쪽.


Im Gegensatz dazu geht die Mehrheit der deutschen Exegetinnen und Exegeten von der literarischen Abhängigkeit des EvThom von den synoptischen Evangelien aus und datiert es dementsprechend spät.
대부분의 독일 주석가들은 토마스 복음서가 공관 복음서에 의존한다고 생각하며 그 작성 시기를 비교적 늦은 시기로 추정한다. 
-Silke Petersen, Adolf Jülicher und die Parabeln des Thomasevangeliums, 184.

사도시대보다 좀 더 후기에 쓰인 자료들의 특징이나 신학적 관점을 보이고 있어서 토마스 복음서가 완전한 어록 전승일 가능성은 낮다. 게다가 발굴된 건 콥트어 번역본이라 이미 변개가 가해진 것이기 때문에, 현존하는 토마스 복음서는 어록 전승을 온전히 보존하진 못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토마스 복음서의 의의는 초기 전승시대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시대에 그리스도교와는 다른 관점으로 예수를 해석하는 부류가 있었다는데 있다. 

통설에 의하면 토마스 복음서는 기존 복음서의 어록 부분만 짜집기하여 만든 것이며 2세기 중반의 책이다.토마스 복음서가 공관 복음서 구절에 의존한다는 것과 비유의 비정상성이 정상적으로 교정된 것 등을 근거로 한다. 또한 영지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다는 것도 문제인데, 1세기 복음서들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는 종말론적 유다인 예언자로 나타나기 때문에, 희랍 철학의 냄새가 너무나 진한 영지주의적 책인 토마스 복음서의 연대를 1세기로 잡는 것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Richard Valantasis에 의하면 학자들은 토마스복음의 연대를 토마스복음이 원본 말씀으로부터 저술되었는지, 콥트어나 희랍어 텍스트 혹은 다른 저자의 텍스트로부터 저술되었는지 등의 여부에 따라 성립시기가 빠르면 서기 40년이나 늦으면 서기 140년으로 추정한다. Robert E. Van Voorst에 의하면 전기설은 50~100년, 후기설은 2세기를 지지한다. Valantasis는 토마스복음이 서기 30~60년대전기자료의 일부를 참고하여 서기 100-110년대에 성립하는 것으로 추정하며 J. R. Porter는 서기 250년으로 추정한다. 바트 어만은 토마스복음이 종말론 테마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톰 라이트는 토마스복음이 전기 기독교인들의 세계관과 관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후기설을 지지한다. 

토마스 복음서의 원문에 대해서는 희랍어로 기술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통설이지만, 소수설로는 시리아어설이 있다. Nicholas Perrin이 시리아어설을 주장하는 학자인데, Perrin에 의하면 토마스 복음은 2세기 말에 기록된 문학적 단일체이며 개별 구절들이 여러 표제어(catchword)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단, 이 긴밀한 연결은 시리아어 원문을 상정할 경우에만 드러나므로, 토마스 복음서의 원문은 희랍어가 아닌 시리아어라는 것이다. Craig A. Evans는 Perrin의 의견에 찬동하여 이 학설에 합류하였다.

 

 

기존 복음서와의 비교


마르코(마르), 마태오(마태), 루카(루)
토마스 3 // 루카 17, 20-21
토마스 4 // 마태 19, 30; 마르 10, 31
토마스 5 // 마태 10, 26; 루카 12, 2
토마스 6 // 루카 11, 1
토마스 8 // 마태 13, 47-48
토마스 9 // 마태 13, 3-8; 마르 4, 3-8; 루카 8, 5-8
토마스 10 // 루카 12, 49
토마스 13 // 마카 8, 27-30
토마스 14 // 마태 15, 11; 마르 7, 15; 루카 10, 7
토마스 16 // 마태 10, 34-36; 루카 12, 51-53
토마스 20 // 마태 13, 31-32; 마르 4, 30-32; 루카 13, 18-19
토마스 22 // 마태 19, 14; 마르 10, 14; 루카 18, 16
토마스 24 // 마태 6, 22-23; 루카 11, 34-36
토마스 26 // 마태 7, 3-5; 루카 6, 41-42
토마스 30 // 마태 18, 20
토마스 31 // 마태 13, 57; 마르 6, 4; 루카 4, 24
토마스 32 // 마태 5, 14
토마스 33a // 마태 10, 27; 루카 12, 3
토마스 33b // 마태 5, 15; 마르 4, 21; 루카 8, 16; 11, 33
토마스 34 // 마태 15, 14; 루카 6, 39
토마스 35 // 마태 12, 29; 마르 3, 27; 루카11, 21-22
토마스 36 // 마태 6, 25-28; 루카 12, 22-27
토마스 38 // 마태 13, 17; 루카 10, 24; 요한 7, 34
토마스 39a // 루카 11, 52
토마스 39b // 마태 10, 16
토마스 40 // 마태 15, 13; 요한 15, 6
토마스 41 // 마태 13, 12; 25, 29; 마르 4, 24-25; 루카 8, 18; 19, 26
토마스 43 // 마태 7, 16-20; 루카 6, 43-45
토마스 44 // 마태 12, 31-32; 마르 3, 29; 루카 12, 10
토마스 45 // 마태 7, 16-20; 루카 6, 43-46
토마스 46a // 마태 11, 11; 루카 7, 28
토마스 46b // 마태 18, 13; 마르 10, 15; 루카 18, 17
토마스 47a // 마태 6, 24; 루카 16, 13
토마스 47b // 마태 9, 16-17; 마르 2, 21-22; 루카 5, 36-37
토마스 48 // 마태 18, 19; 마르 11, 23-24
토마스 54 // 마태 5, 3; 루카 6, 20
토마스 55 // 마태 10, 37; 루카 14, 26-27
토마스 57 // 마태 13, 24-30
토마스 61 // 마태 24, 40; 루카 17, 34
토마스 62 // 마태 6, 3
토마스 63 // 루카 12, 16-21
토마스 64a // 마태 22, 2-10; 루카 14, 16-23
토마스 64b // 마태 19, 23; 마르 10, 23
토마스 65 // 마태 21, 33-39; 마르 12, 1-8; 루카 20, 9-15
토마스 66 // 마태 21, 42; 마르 12, 10; 루카 20, 17
토마스 68 // 마태 5, 10-11; 루카 6, 22
토마스 69 // 마태 5, 6; 루카 6, 21
토마스 71 // 마르 14, 58
토마스 72 // 루카 12, 13-15
토마스 73 // 마태 9, 37-38; 루카 10, 2
토마스 75 // 마태 22, 14
토마스 76a // 마태 13, 45-46
토마스 76b // 마태 6, 19-20; 루카 12, 33
토마스 78 // 마태 11, 7-9; 루카 7, 24-25
토마스 79 // 루카 11, 27-28; 23, 29
토마스 86 // 마태 8, 20; 루카 9, 58
토마스 89 // 루카 11, 39-40
토마스 90 // 마태 11, 28-30
토마스 91 // 루카 12, 54-56
토마스 92 // 마태 7, 7; 루카 11, 9
토마스 93 // 마태 7, 6
토마스 94 // 마태 7, 8; 루카 11, 10
토마스 95 // 루카 6, 34-35; 14, 12-14
토마스 96 // 마태 13, 33; 루카 13, 21
토마스 99 // 마태 12, 47-50; 마르 3, 32-35; 루카 8, 20-21
토마스 100 // 마태 22, 17-21; 마르 12, 14-17; 루카 20, 22-25
토마스 101 // 마태 10, 37; 루카 14, 26-27
토마스 103 // 마태 24, 43; 루카 12, 39
토마스 104 // 마태 9, 14-15; 마르 2, 18-20; 루카 5, 33-35
토마스 106 // 마태 17, 20; 21, 2; 마르 11, 23
토마스 107 // 마태 18, 12-13; 루카 15, 3-7
토마스 109 // 마태 13, 44
토마스 113 // 루카 17, 20-21

 

 

 

 

2010년을 전후로 한국에 쏟아져 나온 ‘도마복음’ 관련 서적들은 당시 교계에 열띤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도마복음’ 논란의 중심에는 <예수는 없다>로 잘 알려진 오강남 교수의 <또다른 예수>(예담, 2009년)와 도올 김용옥 교수의 <도마복음 한글역주1,2,3>(통나무, 2010년) 등이 있었다.

최근 이들은 SNS와 언론을 통해 도마복음에 대한 소개와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면서 2차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오강남 교수는 자신의 SNS와 모 기독언론을 통해 도마복음 114개의 어록에 대한 소개와 재해석을 연재하고 있으며, 도올 김용옥 교수는 자신의 유투브 채널인 ‘도올TV’를 통해  <도올 김용옥 기독교 성서 이야기: 도마복음 강해>를 현재 28강까지 소개하고 있다. 


“도마복음은 새로운 복음이다”

특히 김 교수는 도마복음 강해를 시작하기 전 ‘도마복음을 말한다’는 제목으로 한신대 명예교수 김경재 목사, 오강남 교수 등과 함께 2010년 대담한 내용을 ‘도올TV’에 소개하면서 도마복음 논쟁을 시작했다.   

한신대 명예교수인 김경재 목사는 이 대담을 통해 ‘도마복음’에 대한 개신교인들의 열린 자세를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일반사람에게는 (도마복음이) 외계인의 담론으로 들릴 수 있다.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에 경전의 종교가 되었다. 이렇게 4-5백년을 지내온 사람에게 도마복음은 외경 내지는 위경으로 평가절하 될 것이다. 경전종교에 세뇌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열린 마음으로 풍요로운 정신적 문화의 향상을 위한 자료로 환영할 것 같다. 두 그룹으로 나눠질 것 같다.”고 평했다. 

또한, 기독교의 사회적 위기를 지적하며 호불호를 떠나 초기 말씀 어록을 읽어 볼 것도 권유했다.

그는 “한국 기독교가 최근에 일반 사회에서 신뢰를 잃고, 인기가 없는 종교가 된 것은, 기독교가 너무 딱딱한 교리적 종교로 변해버렸다는 것과 예수를 엄격한 도덕적 훈계자로 가르치든지, 삼위일체 존재 속에 넣어서 초자연적 신적 존재로 세뇌를 시키는 것에 대해서 코드가 안 맞으니까 외면하고 떠난 것이다”라며  “일단 교리나 도덕체계에 포장되기 이전에 실제적으로 역사 속에서 살았던 솔직한 예수를 만나보고 싶다면 그의 초기의 말씀 어록을 집대성한 것을 찾았으므로 호불호를 떠나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없다’의 오강남 교수는 ‘도마복음’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것을 주문했다.

오 교수는 “기독교에 이런 전통이 있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도마복음에서 발견되는 예수는 공관복음에서 다루는 예수와 너무나 다르더라. 공관복음에서는 ‘나를 따르라’, ‘나의 제자가 되라’, 요한복음에서는 ‘나를 믿으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도마복음에서는 ‘깨달아라’,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을 찾으라’ 라고 말한다. 이건 기독교에서 듣지 못했던 새로운 복음, 새로운 예수님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도마복음이 4복음서에 선행하는 자료로 예수께서 아시아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도올은 “도마복음 자료는 현행 4복음서의 핵심자료와 거의 중복이 되고, 114개의 말씀자료라는 것이 워낙 치밀한 구성자료를 가지고 있다. 중간 몇 개는 후대에 성립할 수 있으나, (도마복음이) 4복음서 이전 자료로서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이 자료를 참고해 가면서 어떻게 변형시켜갔는가를 (제 책을 통해) 상당히 치열하게 다뤘다”라며 “도마복음에 기초해서 역사적 예수의 상을 철저하게 새로 그려야 할 필요가 있다. 그 핵심은 예수는 아시아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분이라는 점이다. ”고 주장했다. 


“위경으로 순진한 기독교 신자를 유혹하지 말라”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대해 교계 내부에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주류이다.

한일장신대 차정식 교수는 김용옥 교수의 ‘도마복음’에 대해 일부 학자들의 의견을 대세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차 교수는 “김씨는 도마복음이 영지주의 사상에 기초해 기존 복음서의 내용을 짜깁기한 후대의 외경문헌이 아니라 그것들 본래의 원형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로빈슨, 크로산 등 서구 학자들의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라며 “도마복음이 예수의 본래적 원형을 담아내고 있다는 주장은 도올의 말대로 학계의 대세가 아니며 일부의 주장일 뿐이다. 그가 대부분 의존하고 있는 크로산을 비롯한 학자들은 북미 성서학계의 지극히 적은 일부 신약성서학자들 및 고대기독교문헌학자들이다”고 반박했다. 

장신대 김철용 교수는 ‘도마복음’이 왜 정경과정에서 퇴출되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복음서가 네 권으로 형성된 것에는 ‘정경의 형성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도마복음’은 정경에서 제외됐다. 오늘날 ‘위경이라고 한다. ‘도마복음’은 왜 퇴출되었는가? 다양성만 이야기 하지 말고, 통일성도 말해야 한다. 무조건 다양하다 해서 좋은 게 아니라, 전체가 동의하고 공감할 수 있으며 역사적 예수와 초대교회 성장과정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있을 때 다양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교계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서울 큰나무교회 박명룡 목사는 모 기독교 매체에 실린 ‘기독교 안티에 답한다’라는 글을 통해 도올의 ‘동양적 범신론’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목사는 “그(도올)는 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일까? 그 표면적 이유는 기독교가 너무 기득권층이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올바르게 전파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보다 심층적 이유는 그의 철학적 전제 때문이다”라며 “도올의 신관과 기독교의 신관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는 기독교를 철저히 비판한다. 도올의 신관은 ‘동양적 범신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중국의 일원론 사상에 근거해 우주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신이고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로서의 전 우주 자체가 신이라고 믿는 범신론적 신관을 가지고 있다. 도올은 이 동양적 범신론적 신관의 잣대로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들소리신문의 발행인인 조효근 목사는 “기독교의 보편적 신학에서는 오강남 교수의 이원론에 기초한 영지주의(Gnostic)적 견해와 단성론(예수는 피조물이다) 신학은 비(非)기독교 신학으로 이미 단정한지가 1천6백 여년이 지났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강남 교수는 자기의 비교종교학 실력으로 착하고 순진한 기독교 신자를 유혹하려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경고했다.

도마복음은 1945년 12월 무함마드 알리라는 이집트 농부가 다른 몇사람과 함게 나일강 상류 나그 함마디(Nag Hammadi)라는 곳에서 땅을 파다가 토기 항아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곳에서 52종의 문서와 함께 발견된 것으로 예수의 열두제자 중 한 사람인 디두모스 유다 도마가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짜 예수는 사복음서에만 있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박명룡 목사는 '진짜 예수'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우리는 오직 사복음서를 통해서 진짜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사복음서에는 실제 역사 속에 사셨던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진짜 예수의 이야기는 구전 중심의 유대문화 속에서 가장 짧은 구전 전승 기간을 거치면서, 그 목격자들의 증언이 변형되지 않고 매우 정확하게 후대에 전달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박 목사는 "예수에 관한 목격자들의 증언은 교회공동체 내에서 수백 번 또는 수천 번씩 반복적으로 전파되었으며, 그 내용이 문자로 기록될 때까지 예수 사건을 직접 본 목격자들이 살아 있었다"라며 "목격자들이 살아 있을 때에 교회공동체 내에서 매우 조심해서 전달한 복음서의 내용은 가장 탁월한 역사적 신뢰성을 가진다. 따라서 사복음서에는 예수의 실제 가르침과 삶이 온전히 담겨 있다. 지금 사복음서를 통해 만나는 예수가 실제 역사적 예수이며 진짜 예수이다"라고 강조했다
 
박 목사는 이날 발표를 시작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회의주의자들은 신약성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며 그들은 실제 역사 속에 사셨던 예수님을 인간 예수로만  보고,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등 예수를 믿지 말고 본받으라고만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반기독교를 표방하는 도울 김용옥은 신약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역사 기록이 아니며,  AD367년에 신약 27권이 확립되기 전에는 권위 있는 전통과 성경은 존재하지 않았고, Q자료와 도마복음서만이 진짜 예수를 말하며 참 예수는 지혜자 인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며 "김용옥의 주장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전설이나 신화라고 주장하는 등 정통 기독교 신앙과는 정면으로 상충된다"라고 비판했다. 박 목사는 따라서 신약성경이 실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온전히 담았다는 사실을 논증하면서 예수 사건은 전설이 아닌 역사임을  강조하면서 Q문서와 도마복음서에서는 진짜 예수를 만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왜, 예수를 전설이나 신화로 여길까?


박 목사는 그동안 출판된 「예수는 신화다」, 「예수는 없다」 등의 책은 예수는 실제 역사적 인물이 아닌 신화적 인물로, 사복음서에 나오는 기적과 부활 등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면서 특히 도울은 「요한복음 강해」와 「기독교 성서이해」에서 예수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을 전면 부인한다고 설명했다. 그 이유에 대해 박 목사는 미국의 급진적 학자들이 만든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 단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했다. 이 단체에 소속된 학자들은 예수 사건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예수의 신성을 제거한 채 인성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박 목사는 " 그들은 복음서 대부분 내용은 후기 교회공동체가 자기들의 관심에 따라서 심각하게 변형시켰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고백하는 신적인 예수는 본래적 예수와 상당히 다른 모습이라고 주장한다"라며 "그래서 예수의 신성은 후대 교회들이 첨가했거나 로마 교황의 지원을 받은 교회가 인간 예수를 신격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인정하는 역사적 예수는 순전히 인간 예수일 뿐이다"라고 비판했다. 박 목사는 불트만 등 '양식 비평'의 방법론을 추구했던 신약학자들은 예수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만 파악하려고 시도했다면서 양식 비 평가들은 초기 구전으로 전달된 예수의 전통이 후기 교회공동체의 필요에 따라서 심각하게 변형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즉, 초기 예수에 관한 사실적 정보들이 후대에 전달되면서 변형되고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박 목사는 "그들은 예수 사건에 관한 구전 전승 과정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순수하게 인간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이 후대 공동체로 전달되면서 신적인 존재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결과물이 사복음서이며 신약성경이라고 주장한다"라고 설명했다.  
 
양식비평 학자들의 문제점"구전 사회 전통을 무시했다"


하지만 박 목사는 "예수 사건이 전설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역사적 사실인가에 대한 양식비평 학자들의 연구는 예수에 관한 구술 역사가 얼마나 신뢰성 있게 전달됐는지의 여부에 초점을 맞췄다"며 "그들은 구술 전통은 긴 이야기를 전달한 능력이 없으며, 구전 위주의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관심이 매우 적고, 개인들은 구전 전통의 시발과 전통, 구술 전통의 관리 등에 큰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의 관한 구전은 신화이며 전설로 여겨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은 실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박 목사는 "고대 사회의 역사는 주로 구전 전통(oral tradition)에 의존했다. 불교의 불경도 약 230년에서 600년의 오랜 구술 전승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이슬람의 하디스도 약 150여 년 동안 구전에 의존하였으며, 공자의 생애도 약 300년 이상의 구술 역사를 가지고 있다"라며 "알렉산더 대왕의 생애도 약 400년 동안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가 역사에 기록되었다. 또한 로마의 황제들도 대개 약 100년에서 200년 이상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를 후대 역사가들이 역사로 기록했다"라고 강조했다. 특히 고대 사회의 보편적 교육수단은 '암기'였기 때문에 예수 시대의 유대문화는 가르침을 암기해 전달하는데 가장 탁월한 구전문화를 갖고 있었다면서 탁월한 구전문화 속에서 예수 이야기는 확실하게 후대에 전달됐다고 강조했다.  또한 박 목사는 "구전을 기초로 하는 공동체는 역사적 사실을 보존하는데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라며 "초기 교회공동체는 예수 사건에 관한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구술 전통을 형성하고 그것을 유지하는데 상당히 노력했다. 처음부터 역사 속에서 살아간 예수의 삶, 가르침, 죽음, 그리고 부활을 정확히 증언하고 전달하는 데 전적으로 헌신했다"라고 피력했다. 따라서 "구전 중심 사회의 특성을 감안할 때, 예수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의 뼈대가 복음서 저자들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소설적 창작물이라고 의심해야 할 어떠한 역사적 이유가 없다"라며 "오히려 구전 위주의 초기 교회가 예수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교회의 전통 속에서 매우 정확히 보존했다고 볼 수 있는 역사적 근거는 너무나 많다"라고 설명했다. 박 목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그 공동체적인 기억과 더불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목격한 12명의 사도와 수많은 사람들 등 개인적인 목격자들의 증언이 예수의 역사적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라며 "이러한 협력은 초기 교회공동체의 기억이 후대에 정확히 전달되고 보존되었다는 사실을 매우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바울은 초기 교회의 권위자들로부터 그 전통을 전수했으며, 그 전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온전히 전하는 등 그의 공식적인 전통 전달 과정은 기독교 역사의 아주 초기에 일어난 사실로서 예수의 구술 전통이 후대에 매우 정확히 전달되었음을 방증해 주고 있다. 따라서 예수 사건은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다"라고 피력했다. 
 

Q자료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할까?

특히 박 목사는 Q문서와 도마복음을 근거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인간 예수로만 규정하는 도올의 주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먼저 박 목사는 "Q문서는 마가복음에는 없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겹쳐서 나오는 예수의 말씀(sayings, 어록)이 기록돼 있기 때문에 굳이 존재 가능성을 부인할 필요가 없는 매우 가치 있는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다"라며 "지혜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심판의 말씀, 그리고 기독론적인 말씀이 기록된 Q자료는 예수를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신적인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 또는 '심판의 주'로서 '인자'의 모습을 드러내지만 자유주의 신학자의 경우에는 기독론은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예수의 생애와 그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의 어록과 함께 그 어록의 상황적 배경을 설명해주는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다"라며 "따라서 Q 자료와 함께, 예수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의 증언인 사복음서를 통해 상황 설명과 그분의 삶 전체를 고려하여 진정한 예수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라고 강조했다. 박 목사는 "도올의 주장처럼 Q문서만 진짜이며, Q를 담고 있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다른 이야기는 모두 가짜라고 평가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적합한 기준이 없다. 만약 Q문서를 인정한다면, Q 자료의 뜻을 분명히 설명해 줄 수 있는 내러티브도 인정해야만 한다"라며 "결국 도울은 Q문서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또한 "급진적인 학자들은 Q문서만이 진정한 예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데 그 자료가 제시하는 예수상은 지혜로운 말씀을 가르치는 순전한 인간 예수만이 진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라며 "이러한 인간 예수 외의 신적인 예수, 메시아 예수, 그리고 기적을 일으키는 초자연적인 예수는 Q문서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그것은 교리로 포장된 신앙의 예수라고 주장한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박 목사는 "Q문서는 오직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신적인 예수의 모습, 기독론의 증거, 병 고침과 귀신 축출의 이적을 행하는 역사적 예수, 종말론적 심판의 주와 인자가 되시는 예수 등 예수에 관한 초기 자료인 Q문서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지지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도마복음서, 무엇이 문제인가?


박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예수 세미나' 소속 학자들은 도마복음서를 4복음서와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있으며, 심지어 도마복음서가 사복음서보다 훨씬 더 역사적 예수와 가깝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도마복음이 사복음서보다 더 이른 시기에 쓰인 보다 원시적인 예수의 말씀이기 때문이며, 도마복음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는 초월자가 아닌 지혜로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박 목사는 "도마복음이 먼저 쓰여졌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학자들은 도마복음의 저술 연대를 1세기 중반으로 보고 있지만 도마복음은 신약성경에 매우 의존적이다"라며 "만약 도마복음서 저자가 신약성경을 알고 있었고 신약성경의 내용을 베꼈다(copy)면, 도마복음서는 최소한 2세기 초나 중반 이후의 작품인 게 확실하다"라고 설명했다. 박 목사는 "도마복음의 내용에서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을 베낀 증거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도마복음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 빌립보서, 요한계시록 등 최소한 신약성경 14권과 평행구절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도마복음이 신약성경의 절반 이상의 책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라고 피력했다. 이어 "도마복음에서 사복음서와 바울서신들을 임의로 편집하여 기록하였다는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고, 누가복음의 영향을 받았고, 바울서신을 인용했다는 증거도 있다"라며 "결국 도마복음은 신약성경을 참조했음이 분명하다. 또한 도마복음서는 2세기 후반의 시리와 전통과 일치한다는 증거들이 있다. 결국 도마복음은 2세기의 작품이며, 신약성경에 의존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준다"라고 덧붙였다.   


Q문서와 도마복음의 차이점도마복음서의 예수와 사복음서의 예수
한편, 박 목사는 Q문서와 도마복음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첫째, Q문서는 이야기 구조 속에서 주제별로 구성되는 특성이 있지만, 도마복음은 어떠한 주제별 장르의 구조도 없이 말씀만 모아 놓았다. 둘째, Q문서에서는 영지주의적 사상을 찾아볼 수 없지만, 도마복음서에는 영지주의(Gnostic)의 특성이 많이 나타난다. 셋째, Q문서의 예수는 기적 행함과 귀신 축출 사역을 통하여 초자연적인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주며, 종말의 날에 심판의 주로서 초월자임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의 예수는 기적을 행하지도 않고, 예언적으로 종말을 선포하지도 않는다. 또한 박 목사는 도마복음서의 예수와 사복음서의 예수에 대해서도 비교했다. 첫째, 도마복음의 예수는 메시아가 아닐뿐더러, 심지어 그 제자들의 선생도 아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예수는 메시아이며, 그 제자들의 선생이다. 둘째, 도마복음에서 예수는 도마에게만 비밀스러운 지식을 전수한다. 그러나 사복음서에서는 12제자들과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 그 복음의 비밀을 공개한다. 셋째, 도마복음에서 구원은 말씀에 대한 ‘이해’와 관련이 있지만, 사복음서의 구원은 예수에 대한 ‘믿음’과 관련이 있다. 넷째, 도마복음의 예수는 범신론적인 성향을 보인다. 그러나 사복음서의 예수는 범신론과는 거리가 멀다. 다섯째, 도마복음은 구원에 있어서 성차별의 성향을 명확히 나타낸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성차별을 지지하지 않는다. 특히 박 목사는 "도마복음과 신약성경은 여러 면에서 차이점을 드러낸다"라며 "신약성경에는 종말에 대한 예수의 예언자적인 말씀이 자주 나타나지만, 도마복음에는 종말론적 말씀이 빠져 있다. 또한 도마복음은 '성육신적인 관점'이 결여돼 있다"라고 설명했다. 

 
도마복음서에는 진짜 예수가 없다


박 목사는 "초기 교회는 도마복음서를 허위 저술 또는 이단 문서로 배척했다"라며 "도마복음서를 통해서 실제 역사 속에 사셨던 예수의 모습을 온전히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도마복음은 2세기 중반의 문서로서 신약성경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 성향을 지닌 문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신약성경보다 역사성이 떨어지는 도마복음을 통하여 참된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기 매우 어렵다"라고 강조하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역사적 예수 연구, 경계해야
한편, 이날 월례포럼에 앞서 진행된 개회예배에서 '역사인가? 신화인가?'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이일호 목사(전 칼빈대 교수, 근동고고학회장)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부활에 대한 역사(성)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소위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 연구는 예수님의 신성을 전제하지 않기에 경계해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이 목사는 "예수 부활에 대한 성경 기록은 일관성의 기준과 부합한다. 예수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서술은 서로 간에 모순이 없다. 복음서에서 발견하는 부활 기사는 서로 간에 모순이 없고 다만 서로를 보완한다"라며 "예수님의 빈 무덤은 죽은 자들 가운데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최고의 설명이다. 역사적, 육체적 예수님의 부활 없이는 기독교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개회사를 전한 기독교학술원장 김영한 박사는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해석학적 성찰의 방법이다. 사복음서와 초대교부들이 공인한 문서를 기준으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사복음서와 모순되는 나그 함마디 문서들 같은 영지주의 문서들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 박사는 "도마복음은 역사적 예수를 영지주의적 깨우침의 현인으로 왜곡하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믿음이 아닌 지식으로 추구하고 있다"라며 "오늘날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 공교회가 전하는 사복음서와 사도적 전통이 전하는 문서들에 따라서 역사적이고 신앙적 성찰을 통해서 접근해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도마복음의 진실 (+ 한글번역)

 

'도마복음' 이라고 불리는 문서가 있다. 이것은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 문서인데, 약 백년 전 이집트 나그함마디라는 곳에서 발굴된 것이다. 이 문서는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을 디두모 유다 도마가 기록한 것' 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이 문서의 저자가 의심의 대명사였던 예수의 제자 도마의 기록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이 문서는 연대 추정 결과 4세기 즈음에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전통 복음서들이 1세기 전후에 작성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위서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이 문서를 도마'복음' 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논란거리일 수 있다. 중립적으로 부르자면 '도마문서' 등으로 부르는게 더 적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편의상 널리 알려진대로 '도마복음'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로 하겠다.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굴된 문서. 이 중 소위 '도마복음'이 포함되어 있었다.]http://www.geocities.com/athens/9068/

 

위서의 가능성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몇몇 학자들은 이 문서가 진짜 도마의 기록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나그함마디에서 발굴된 문서는 카피본일 뿐이며, 동일한 내용의 기록은 훨씬 오래전에, 심지어 전통 복음서보다 더 이전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니지만 - 대체로 영지주의자들 (그리고 탈신화화를 통해 기독교와 교회를 공격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김용옥과 같이 무언가 이단적인 이슈만을 골라서 찾아다니는 이슈메이커들) 이다. 



이 글의 목표는 도마복음이 위서인지 아닌지 (즉 진짜 예수의 제자 도마의 기록인지 아닌지) 따져보려는 것도 아니고, 도마복음을 선전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을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야기 하려는 것은 도마복음을 선전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신념이 도마복음이라고 부르는 문서에 의해 지지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이 글에서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구체적 비판을 제시하지는 않겠지만,  도마복음 문제의 핵심에 있는 그들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하는 것은 불가피할 것 같다. 영지주의는 기독교 초기 시절부터 있었던 하나의 사조로서, 인간의 신성을 '깨닫는 것'이 구원의 열쇠라고 가르친다. 물론 영지주의에는 매우 다양한 버전이 있으며, 서로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영지주의' 자체가 어떤 하나의 사상을 말한다고 보기는 사실상 힘들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대체로' 공유하는 특징들이 있다. 예를 들면: 구원에 있어서 실제적 사건이나 역사성 보다는 개인의 인식을 강조한다는 점,  은혜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나의 능력(특히 지적 능력, 혹은 깨닫는 능력, 아니면 여타의 영적인 틍력)에 의해 구원이 획득된다고 믿는다는 점 등이 있겠다. 



  구체적인 부분으로 들어가면 영지주의마다 상당히 다르다. 현대판 영지주의자들은 대체로 '인격신' 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창조주를 어떤 영적 에너지로 간주한다. 이들은 그 에너지의 힘을 깨닫는 것, 또는 내 본질이 그와 같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구원의 열쇠라고 가르친다. 한 때 베스트셀러였던 '시크릿' 도 그러한 흐름에 속한 책이다. 언뜻 보면 기독교와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독교와 가장 반대되는 가르침이다. 물론 기독교의 성경 역시 구원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기독교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오직 예수에 의해 우리의 죄를 대속받을 때에만 가능하다. 현대판 영지주의와 기독교는 사실 첫 출발부터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영지주의는 인간의 무지가 죄의 전부(만약 죄라는게 있기나 하다면) 라고 말한다. 그래서 깨달으면 그걸로 끝인 것이다.  반면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무지의 문제를 포함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의지의 문제이다. 성경에 따르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데, 이는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 왕, 신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본질적인 인간의 죄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죄에 대한 해결이 없으면 하나님을 아는 것도, 그와 함께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편 영지주의 중에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부류가 있었다. 기독교 역사 초기에 존재했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이 땅에 온 하나님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들은 매우 특이하게 결합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에 따르면 물질세계는 악한 신(사탄)에 의해 창조된 것이고, 따라서 물질은 모두 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하나님의 아들이 물질인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온다는 것은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가 신이지만 육체를 갖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단지 (마치 오늘날의 홀로그램처럼) 육체처럼 보일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성경에서 "영이라고 다 믿지 말라.  예수가 육체를 입고 온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해있고, 부인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속해있지 않다" 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부류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해 둔 것이었다. 이들은 예수가 육체로 왔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가 인간을 위해 '죽었다' 는 것도 믿을 수 없었고, 따라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죄의 대속도 믿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종교였던 것이다. 

 

  영지주의의 가르침은 일견 불교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 이 때문에 영지주의가 아시아 쪽으로부터 유래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흥미롭게도 영지주의자들이 도마복음의 저자로 추정하는 예수의 제자 도마는, 예수 사후 인도로 복음을 전하러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도마가 정착한 곳은 인도 동남부의 항구도시 첸나이(마드라스)인데, 이곳에는 실제로 도마라고 생각되는 사람의 무덤과 그가 박해를 피해 숨었던 동굴, 그가 보낸 편지와 그가 사용한 십자가 상징등의 유물이 다량으로 보존되어 있다 (첸나이 St. Thomas Church). 현재까지도 첸나이는 인도에서 기독교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에 속한다. 이 사실 때문에 도마가 실제로 아시아쪽, 특히 인도 쪽 배경을 갖고 있었다는 가설이 있다. 실제로 성경에도 도마가 '이방인' 이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이방인지는 알려진 바 없다. 만약 도마가 아시아 배경을 가지고 있고, 불교 문화의 전통에 어느정도 친숙했었다면, 도마가 기록한 문서 역시 어떤 형태로든 그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것은 그럴듯한 추측이며, 내가 도마복음을 살펴본 바로는 최소한 문체나 용어, 스타일에서 그러한 영향이 드러난다고 볼만한 측면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분위기상 그러한 영향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할 법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분위기나 스타일이 아니라 내용과 메세지이다. 그리고 내용과 메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역시 문서를 직접 확인하면 된다. 내가 읽고 내린 결론은 도마복음의 내용과 메세지를 불교적 영지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완전히 오도적이라는 것이 다. 

 

 시간이 된다면 각 구절에 대해 구체적인 주석을 달고, 전통 복음서들의 내용과 비교/대조를 제공하고 싶지만, 이 글에서는 도마복음이 위서건 아니건, 그 내용은 영지주의자들의 일반적 주장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몇 가지 포인트로 나눠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1. 우선 도마복음을 통해 반기독교적 주장을 하려는 사람들 중 일부는 도마복음 안에 안에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과 같은 일대기적 사건이 기록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도마복음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원형을 담고 있는데, 그 도마복음 안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같은 일대기적 사건이 빠져있으므로, 기독교 신앙의 원형 속에는 그런 사건들이 없었다는 것이 이들이 하고 싶은 말이다. 이들이 도마복음을 기독교 신앙의 원형으로 주장하는 근거는 그것이 전통 복음서들 보다 더 먼저 작성되었다는 믿음이다. 물론 연대 추정을 해본 결과 그들의 바램과는 달리 전통 복음서들보다 최소 200년 이상 나중에 만들어진 문서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원래 내용은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을 수도 있다. 이 주장에 작은 설득력이 있다면, 그것은 Q 문서라는 가설적 문서 때문이다.

  Q 문서란, 도마복음이 발견되기 이전에 몇몇 자유주의, 영지주의 신학자들이 그 존재를 가설적으로 제시한 성경의 원형에 해당하는 예수의 어록이다. 이 신학자들은 복음서들 간의 공통된 부분들이 주로 예수의 어록에 있다는 점을 토대로, 복음서들이 함께 참조한 예수의 어록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그 가설적 어록을 Q 문서라고 이름붙였다. 그 어록은 4복음서들보다 오래되었으며, 살아있는 예수의 육성에 보다 가까운 자료라는 것이 이들의 추측이었다. 그러던 중에 이집트에서 예수의 어록만으로 구성된 도마복음이 발견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도마 복음이 바로 Q 문서이며, 다른 복음서들보다 더 먼저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 주장에는 사실상의 실증적 근거가 전혀 없지만, 여전히 참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것이 설사 사실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 어록 속에 일대기적 사건이 빠져있다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끄집어 낼 수 있는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최초의 작성자는 당연히 어록만 받아 적었을 수 있다. 실제로 도마복음을 보면, 말의 순서도 없고, 문맥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마치 누군가가(이를테면 도마가)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그 때 그 때 적어 둔 메모장 정도로 보인다. 이런 메모장 속에 일대기적 사건이 기록되어있지 않다고 해서 기독교 초기 신앙 속에 그러한 일대기적 사건이 빠져있었다는 주장은 너무나도 터무니 없다. 도대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부터 무엇을 이끌어낼 수 있겠는가?

   다른 복음서들은 도마복음 같은 어록, 혹은 제 3, 제4의 메모들을 바탕으로,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목격자들의 기억을 토대로 작성되었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의 저자는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누가복음 1장에서 누가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 처음부터 목격자들이 전해준 그대로의 내력을 저술하려고 펜을 든 사람이 많았다.' 고 기록하고 있다. 즉 복음서 이외에도 예수의 사건에 대해 기록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며, 도마복음도 그 중 하나일 수는 있다. 그리고 정말로 예수의 제자 도마의 기록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예수의 기적과 부활 등의 사건을 믿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도마복음의 존재 때문에 믿지 않을 수는 없다. 도마복음은 그에 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1-1. 위의 논지에 한 마디 더 추가하겠다. 도마복음이라는 문서느 전통적 복음서들 처럼 하나의 책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메모이다. 구성도 없고, 순서도 없고, 문맥도 없다. 타인에게 공개하거나 설명하려고 썼다기 보다는, 개인 소장용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따라서 이 문서 전체에 어떤 일관된 주제가 드러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물론 최소한 몇 개의 주제로 단편들이 묶일 수는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문서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의 언행의 극히 일부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며, 심지어 최초의 기록에 비교하더라도 일부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다. 그 증거로서 첫 구절부터 '그는' 이라는 대명사로 시작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이는 앞에도 내용이 있었으나 소실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예수의 실제 언행 중 상당 부분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곳에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있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어떤 종교적 주장을 끄집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나 김용옥 등의 주장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곳에 기록된 내용이 성경과 상충하는 지만 살펴보면 된다. 그럼 몇 부분을 한 번 살펴보자. 

 

2. 도마복음은 예수를 만물의 창조자로 기록하고 있다. (도마복음 77 "...나로부터 모든 것이 태어났고, 나에게로 모든 것이 이르리라.") 이는 요한복음의 기록(요한복음 1장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과 같은 내용이며, 예수의 신격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의 한 갈래와 양립할 수 없다. 단지 인간일 뿐인 자가 세계를 창조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소한 예수를 인간(선지자)으로 간주하는 영지주의는 도마복음과 양립할 수 없다.

 

3. 도마복음은 죽은 자들의 '부활' 을 이야기 한다. (도마복음 5 "또한 땅에 묻힌 자 중에 다시 살아나지 않을 자가 없다.") 이는 부활 신앙이 도마복음에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다는 주장과 상치되는 것이다.

 

4. 부활 외에도 '기적' 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도마복음 14 "너희가 어느 지역에 가서 그 교외를 거닐 때나 사람들이 너희를 안으로 인도할 때에나 그들이 너희에게 제공하는 것을 먹고, 그들 가운데 병든 자를 고쳐라") 병든 자를 고치라는 명령을 기적과 분리시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성경에서도 제자들에게 같은 명령을 하며, 제자들은 예수와 같이, 즉 기적적인 방법으로 병든 자들을 고친다. 이는 도마복음에 기적에 대한 믿음이 포함되어있지 않다는 주장과 상충하는 것이다. 

 

5. 뿐만 아니라 도마복음은 성경에서 종말을 묘사한 것과 유사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도마복음 79. "군중들 속의 한 여인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을 나은 여자의 배와 당신에게 젖을 먹인 가슴은 얼마나 복됩니까!”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복된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진실되게 지키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임신하지 않은 배와, 젖을 물리지 않은 가슴에게 복이 있도다!“

 이는 성경에서 마지막 종말의 재앙을 이야기하면서 "(마태복음 24장)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는 구절과 정확히 같은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언젠가 그렇게 말할 날이 올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도마복음에 종말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주장과 다른 것이다.

 

6. 예수와 구원의 관계에 대하여.  도마복음 82. 예수께서 말했다.“누구든지 나와 가까이 있는 자는 또한 불과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로부터 멀리 떠난 자는 아버지의 나라로부터 멀리 떠난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도마복음에서는 예수의 지위를 결코 선지자 쯤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구원과 무관한 존재로 기술하고 있지도 않다. 82절은 예수로부터 멀리 떠난 자는 천국으로부터 멀리 떠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예수와 가까이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건 간에, 도마복음이 예수와 구원을 연관시키지 않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6-1. 구원의 문제를 좀 더 이야기 해보자. 종교적인 문제, 특히 기독교와 관련된 문제에서 구원보다 더 중요한 이슈는 흔치 않을 것이므로, 좀 더 길게 상술하더라도 지나친 일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영지주의자들은 도마복음이 구원에 대해 전통 복음서와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상식적으로 전통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구원의 필요 충분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도마복음에는 정확히 이에 해당하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전통 복음서의 구원론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한 결과이다. 전통 복음서에도 구원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구원론들은 하나의 구원에 대한 다른 묘사들이라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즉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이에 대해 다양한 설명들이 등장한다. 예컨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도 있고,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 또한 자신의 소유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이 구원에 대한 다양한 이설들, 혹은 다양한 길이나 옵션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이것들에 대한 이해는 "예수를 믿는다" 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성찰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이 성찰이 선행 되어야만 성경의 구원론과 도마복음의 구원론에 대한 비교를 운운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전통 복음서의 핵심은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그와 본질상 하나임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마치 입을 열어 음식을 받아들이듯, 마음을 열어 예수를 먹으라는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며 예수는 해독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독제를 먹으면, 다시 말해 예수를 <정말로> 믿으면, 모든 것을 창조한 존재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이다. 오직 그 때에만 인간은 온전히 옳바르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게 되며, 오직 그 때에만 인간은 어린아이 처럼 순수해지며, 오직 그 때에만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입으로만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서로 온전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구원에 대한 언급은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으로 환원된다. 바로 그 믿음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나머지 모든 것은 그 믿음의 결과로서 주어지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마복음에서 언급하는 구원에 관한 내용이 표면상 "예수에 대한 믿음" 과 다르다고 해서, 다른 구원론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곧바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도마복음에서 구원과 관련하여 반복되는 테마 중 하나는 "둘로 나뉜 것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는 것이다. 도마복음은 "안과 밖을, 높은 것과 낮은 것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마음과 행위의 동일성을 이야기하는 전통 복음서의 내용이나, 예수가 가장 높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것과 낮은 것을 하나되게 하기 위해 가장 낮은 형태로 이 땅에 왔다는 바울 서신서의 주장과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더욱이 구약과 신약에 관해 조금 깊이 성찰해본다면, '둘로 나뉜 것을 하나로 만들기' 가 얼마나 성경을 관통하는 구원론과 맞닿아있는지 알 수 있다. 구약의 중심 계명은 십계명인데, 이는 다시 처음 네 계명과 후반부의 여섯 계명으로 나뉜다. 처음 네 계명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말하고 있고, 뒤의 여섯 계명은 다른 사람들(이웃)에게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예수는 구약의 모든 계명이 (1) 하나님을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 와 (2)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계명 안에 다 담겨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1)은 십계명 중 앞의 네 계명을, (2)는 뒤의 여섯 계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실제로 모세가 받은 십계명을 기록한 돌판은 두 개로 이루어져있는데, 자연스럽게 첫번째 돌판에는 앞의 네 계명 (즉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 두번째 돌판에는 뒤의 여섯 계명(즉 이웃에 대한 계명)이 적혀있었다고 추측된다. 

 재미있는 것은 신약에서 예수가 "새(new)" 계명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새 계명이란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라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단지 위의 (2)를 되풀이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새 계명인 이유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이 '너희(제자들)'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역시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신약에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라는 계명은 (1)과 (2)가 합쳐진 계명이고, 이는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반면 구약 시대에는 아직 분리되어있으므로 계명도 분리되어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둘을 하나로 만든다" 라는 테마가 전통 복음서 안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언급되는지 볼 수 있다. 전통 복음서 안에서도 그것은 구원과 직결된 것이며, 이 사건이 그리스도라는 다리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둘이 하나가 되는 사건' 은 단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자와 낮은 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과 이방인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사건이며 이 모든 것이 인류 구원이라는 역사의 한 과정이라는 것이 성경의 설명이다. 따라서 도마복음에서 "둘이 하나가 되는게 구원이다" 라고 가르친다고 해서 전통 복음서와 다른 구원론을 펼치고 있다는 주장은 전혀 따라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전통 복음서를 이해하면, 도대체 둘이 하나가 된다는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성경의 구원관과 도마복음의 구원관을 '믿음 vs 깨달음' 으로 대조시키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통 복음서에서도 '믿음' 이라는 말이 그렇게 간단하게, 맹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이미 어떤 앎을 전제하고 있다. 제자들의 경우도, 예수가 온갖 기적을 행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즉, 예수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상당 부분이 그들이 알 수 있게끔 그들에게 '드러났다'. 그러나 모든 것이 드러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무한하고 인간은 유한한데, 무한이 유한 안에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 또는 신뢰란 무한한 존재에 대해 유한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이다. 신이 자신을 아무리 드러내더라도, 여전히 무한한 부분은 베일에 쌓여있고, 인간은 영원히 의심하거나 불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이 얼마나 많은 부분을 드러내느냐는 문제의 초점이 될 수 없다. (아무리 많이 드러내더라도 무한과 유한의 비율은 사실상 동일할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극히 작은 부분만 보고서도 신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 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그의 극히 작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무한한 존재가 존재한다면, 그가 얼마만큼의 앎을 허용하더라도 여전히 믿음은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성경에서 믿음이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가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항상 어느 정도의 드러남 (즉 계시, 앎)을 항상 포함하고 있다. 드러난 것을 기초로, 드러나지 않은 것을 믿고 신뢰하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믿음은 앎의 겸손한 표현이다. 흔히 앎(knowledge)은 '정당화된 참된 믿음' 으로 정의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지 못하는 한, 우리는 단지 믿고 있을 뿐이다. 모든 앎은 또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앎과 믿음은 개념적으로도 경쟁적인 것들이 아니다.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앎' 이 믿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교만 밖에는 없다. 실제로는 영지주의자 역시 자신의 믿음에 대해 어떤 궁극적 정당화를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 뿐 아니라,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 논리건 과학이건 상식이건 그 어떤 지식도 궁극적 정당화는 불가능하고, 바로 이 점에서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어디까지나 믿음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이 세계의 존재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믿고 있을 뿐이다. '믿음 vs 앎' 이라는 구도로 전통 복음서와 도마복음을 대비시키려는 시도는 따라서 문헌학적인 몰이해 뿐 아니라, 앎과 믿음이라는 개념들에 대한 성찰의 결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7. 도마복음은 기도와 금식, 구제를 금지한다? 도마복음 14의 내용, 즉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금식한다면, 너희는 죄를 너희 위에 불러오는 것이다.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비난 받을 것이다. 너희가 자비를 배푼다면, 너희는 스스로의 영혼에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를 근거로 도마복음에서는 기도, 금식, 구제를 금지하며 이 점이 성경과 명백히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 문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인용했지만, 그 바로 아래에 다음과 같은 말이 이어진다.

"너희가 어느 지역에 가서 그 교외를 거닐 때나 사람들이 너희를 안으로 인도할 때에나 그들이 너희에게 제공하는 것을 먹고, 그들 가운데 병든 자를 고쳐라. 너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희 입에서 나오는 것이 너희를 더럽히는 것이다.“

 예수는 병든자를 고치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위에 나온 '자비를 배푼다면' 과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아래 부분을 잘 읽어보면, 14번의 요지는, 가식으로 금식하고, 가식으로 기도하고, 가식으로 구제하지 말라는 것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나오는 말이 더럽히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확히 동일한 내용이 성경에도 존재한다. 실제로 성경에도 남들 앞에서 큰소리로 기도하는 사람,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금식하는 사람들을 나무라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도마복음의 다음 구절을 보라. 104. 그들이 예수께 말했다. “오십시오. 함께 기도하고, 함께 금식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으며, 내가 어찌 타락하였는가? 그러나 신랑이 신혼방을 나가고 나면, 그 때에 사람들을 기도하게 하고 금식하게 하라.”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 금식을 거부했지만, 때가 되면 금식할 것이라는 성경의 내용과 동일한 부분이다. 마지막 구절에서 보듯이, 도마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는 때가 되면 기도하고 금식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을 근거로 성경과의 차이를 주장하는 사람은, 성경과 도마복음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확인해보지 않은 사람이다.


   다른 지적 사항에 대해서는 차후에 추가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도마복음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그것이 신약 성경과 상치되지 않으며 오히려 매우 정합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밝히진 못했지만, 도마복음은 4복음서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4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으면서 중 바울 서신과 거의 유사한 내용도 곳곳에 있다. (어쩌면 바울도 도마 복음서의 내용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도마복음을 근거로 기독교 초기 신앙의 모습에 대해 비전통적인 주장을 하거나, 어떤 식으로건 영지주의와 연결시켜보려는 시도는 모두 타당하지 않다.

  또한 도마복음을 어떻게건 불교와 연결시켜보려는 시도들도 많이 있는데, 직접 읽어보면 알겠지만 상당히 어이 없는 시도이다. 극히 일부분을 문맥에서 독립시켜 연결시킨다면, 세상의 모든 문서가 서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도마복음 까지 갈 것도 없이, 전통 성경 안에서도 불교와 연결시킬 수 있는 내용은 얼마든지 집어낼 수 있다. (예컨대 전도서 1장에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말을 문맥에서 분리시켜 보면 얼마든지 불교와 상통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불교 종파에서 예수를 만물의 창조자라고 주장하는가?(물론 불교의 종파 안에 창조자를 인정하는 종파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여호와, 또는 예수라 부르지는 않으며, 그가 육신이 되어 물질 세계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또한 마치 불교적인 색체를 띄는 것 같은 부분들 (예컨대 천국이 이미 이곳에 있다.) 역시 이미 전통 복음서에 등장하는 내용들이며, 실제 문맥은 불교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독교계는 이런 영지주의자들의 공격에 대해 제대로 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한 채, 단지 도마복음이 위서라는 주장으로만 방어해 온듯 하다. 사실 관심이 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던 것 같고, 뭐 그것이 오히려 유익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 몇몇 답변을 하려는 사람이 있었다면, 제대로 답변을 했어야 했다. 도마복음은 충분히 위서일 수 있다. 위서가 아니라는 실증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설사 진짜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영지주의를 지지하거나 불교적이지 않으며, 전통 복음서들과 매우 정합적이라는 점을 제대로 지적했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도마복음을 한번쯤은 깊게 읽어봤어야 할텐데, 아마도 대부분 읽어보질 않은 것 같다.  혹 읽어본 사람들이 있다면 영지주의자들일텐데, 도마복음은 성경과 겹치는 내용이 많기 때문에 전통 복음서와 대조해보지 않는다면 제대로 읽을 수 없고, 영지주의자들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것 같다. 

 


 
 

The "Scholars' Translation" of the Gospel of Thomas

English Translation by Stephen Patterson and Marvin Meyer



이것들은 살아있는 예수의 숨겨진 가르침이며, 그, 즉 디두모 유다 도마가 기록한 것이다.

 

1. 그리고 그가 말했다. “누구든지 이 가르침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2. 예수께서 말했다. “찾는 자는 찾을 때 까지 그 찾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찾게 되면, 그들은 동요될 것이다. 동요되고 나면, 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고, 모든 것 위에 군림할 것이다. 군림한 뒤에 그들은 안식할 것이다.”

 

3. 예수께서 말했다. “만약 너희 지도자들이 말하길, ‘보라, 아버지의 나라가 하늘에 있다.’ 라고 하는 말이 옳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만약 그들이 말하길, ‘아버지의 나라는 바다 속에 있다.’ 라고 하는 말이 옳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일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너희가 너희 스스로를 알면, 너희는 알려질 것이고, 너희가 살아있는 아버지의 자녀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너희 스스로를 알지 못하면 너희는 궁핍함 가운데 살 것이며, 너희가 그 궁핍함이다.

 

4. 예수께서 말하길, “나이 든 노인이 일곱 살 난 어린 아이에게 생명의 땅에 대해 묻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면, 그 노인은 살게 될 것이다.

 

먼저 된 자중 많은 수가 나중 될 것이고,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예수께서 말했다. “네 얼굴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깨달아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감추어진 것이 드러날 것이다.

 

감추어진 어떤 것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땅에 묻힌 자 중에 다시 살아나지 않을 자가 없다.)

 

6.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묻고 말하길, “당신은 우리가 금식하기를 바라십니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합니까? 우리는 자비를 배풀 어야 합니까? 우리는 어떤 식단을 준수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말했다. “거짓을 말하지 말라. 그리고 네가 싫어하는 일을 행하지 말라.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늘 앞에선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엔 감춰진 어떤 것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느니라. 또한 가리워진 어떤 것도 벗겨지지 않은 채로 남겨질 것이 없느니라. ”

 

7. 예수께서 말했다. “사람이 잡아먹을 사자에게 복이 있도다. 그 사자도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사자가 잡아먹을 사람에겐 화가 있지만, 사자는 여전히 사람이 될 것이다.

 

8. 그리고 그가 말했다. “바다에 자신의 그물을 던지고 작은 고기들로 가득 채워 그것을 거두는 사람은 현명한 어부이다. 이 현명한 어부는 물고기들 중 크고 좋은 고기 한 마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다른 모든 작은 고기들을 바다로 다시 던지고, 큰 물고기만을 주저없이 택했다.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

 

9. 예수께서 말했다. “보라, 농부가 씨를 한 움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가 그것을 뿌렸다. 어떤 것들은 길가에 떨어졌고, 새들이 와서 그것들을 취했다. 어떤 것들은 바위 위에 떨어졌고, 그것들은 흙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다른 일부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고, 가시들은 씨를 질식시키고, 이내 해충이 그것들을 삼켰다. 다른 것들은 좋은 흙 위에 떨어졌고, 좋은 열매를 맺었다. 그것은 육십배, 백이십배의 열매를 맺었다.

 

10. 예수께서 말했다. “나는 세상 위에 불을 던졌다. 보라, 내가 그것이 타오를 때 까지 그것을 지키리라.”

 

11. 예수께서 말했다. “이 하늘은 지나가 버릴 것이고, 그 것 위의 것도 그러할 것이다.”

 

죽은 자는 살지 않고, 산 자는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죽은 것을 먹는 날 동안에는 네가 그것을 살아있게 하였다. 네가 빛 가운데에 있을 때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네가 하나였던 날에 너는 둘이 되었다. 그러나 네가 둘이 되면,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12.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떠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이끌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어디에 있든지 너희는 James the Just 에게 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위하여 하늘과 땅이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13.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를 어떤 것과 비교해보라. 내가 누구 같은지 말해보아라.”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당신은 전령 같습니다.”

마태가 말했다. “당신은 현명한 철학자 같습니다.”

도마가 말했다. “선생이여, 내 입은 당신이 무엇 같은지 도저히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했다. “나는 너희의 선생이 아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술에 취했고, 내가 준 거품 이는 물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는 도마를 데리고 뒤로 물러나 세 가지 가르침을 그에게 말하였다. 도마가 다시 그의 친구들에게로 돌아왔을 때, 친구들이 물었다.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나?”

 

도마가 그들에게 말했다. “만일 내가 예수께서 내게 말씀하신 것들 중 하나라도 말한다면, 너희는 돌을 들어 나에게 던질 것이며, 그 돌들로부터 불이 나와 너희를 집어 삼킬 것이다.”

 

1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금식한다면, 너희는 죄를 너희 위에 불러오는 것이다.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비난 받을 것이다. 너희가 자비를 배푼다면, 너희는 스스로의 영혼에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너희가 어느 지역에 가서 그 교외를 거닐 때나 사람들이 너희를 안으로 인도할 때에나 그들이 너희에게 제공하는 것을 먹고, 그들 가운데 병든 자를 고쳐라.

 

너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희 입에서 나오는 것이 너희를 더럽히는 것이다.“

 

15. 예수께서 말했다. “너희가 여자에게서 나지 않은 자를 보거든, 너희의 머리를 떨구고 그를 예배하라. 그가 너희 아버지니라.”

 

16. 예수께서 말했다.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세상에 분쟁을 던지러 온줄 알지 못한다. 불과 칼과 전쟁을.

다섯 사람이 한 집에 있다면, 셋이 둘을 향해, 둘이 셋을 향해,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대적하며, 그들은 모두 홀로 설 것이기 때문이다.

 

17. 예수께서 말했다. “나는 너희에게 그 어떤 눈도 보지 못한 것을, 어떤 귀도 듣지 못한 것을, 어떤 손도 만져보지 못한 것을,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떠오른 적이 없는 것을 줄 것이다.”

 

18.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마지막 때는 어떻게 오겠습니까?”

 

예수께서 말했다. “네가 마지막을 기대하는 것의 처음을 찾아 보았느냐? 보라, 끝은 처음이 있는 곳에 있으리라.

시작 위에 서 있는 자에게 복이 있도다. 그는 끝을 알고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

 

14. 예수께서 말했다.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한 자에게 복이 있도다.”

 

너희가 나의 제자가 되려 한다면, 이 돌들이 너희를 섬길 것이라는 나의 가르침을 주의깊게 들으라. 천국에는 너희를 위한 다섯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여름이건 겨울이건 변하지 않으며, 그 잎은 떨어지지 않는다. 누구든지 그들을 아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20.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다. “하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말씀해주십시오.”

 

그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하늘 나라는 모든 씨 중 가장 작은 겨자 씨 한 알과 같다. 그것은 작지만 준비된 토양 위에 떨어지면 그것은 커다란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에게 쉴 곳이 된다.”

 

21. 마리아가 예수께 말했다. “선생님의 제자들은 무엇과 같은지요.”


그가 말했다. “그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들판에서 사는 작은 아이들과 같다. 그 들판의 주인들이 돌아오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우리의 들판을 다시 돌려주어라.’ 그들은 자신들의 옷을 돌려주기 위해 그들 앞에서 벗어 줄 것이며, 그 들판을 돌려줄 것이다.

 

이러므로 내가 말한다. 만일 한 집의 주인들이 도둑이 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도둑이 다다르기 전에 보초를 설 것이고, 도둑이 그들의 집 안으로 들어와 소유물을 훔쳐가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을 향한 보초가 되어라. 너희 자신을 강한 힘으로 준비케 하라. 그리하면 강도들이 너희에게 다다를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이는 너희가 예상하는 근심이 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들 가운데 깨닫는 자 한명이 있게 하라.

 

작물이 익으면, 그가 낫을 들고 신속히 와서 곡식을 거둘 것이다. 여기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23. 예수께서 아기들이 젖을 물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말했다. “젖을 물고 있는 이 아기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들과 같으니라.”

제자들이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 나라에 아기가 되어 들어가게 됩니까?”

 

예수께서 말했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안을 밖과 같게 만들고, 밖을 안과 같게 만들 때, 높은 것을 낮은 것과 같게 만들 때,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들 때, 그리하여 남자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는 여자가 아니게 될 때, 너희가 여러 눈을 하나의 눈으로 만들 때, 손을 손의 자리에, 발을 발의 자리에, 형상을 형상의 자리에 있게 할 때, 그 때에 너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리라.”

 

23. 예수께서 말했다. “나는 너희들을 택할 것이다. 천 명 중 하나를, 만 명 중 둘을 택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사람처럼 될 것이다.”

 

24. 그의 제자들이 말했다. “당신이 있는 곳을 보여주십시오. 우리가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여기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빛의 사람 안에 빛이 있고, 그 빛은 온 세상을 비춘다. 그 빛이 빛나지 않게 되면 세상은 어두울 것이다.”

 

25. 예수께서 말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의 영혼처럼 사랑하라. 그들을 너희 눈의 눈동자처럼 보호하라..”

 

26. 예수께서 말했다. “너희는 너희 벗의 눈에 있는 작은 조각은 보면서, 너희 자신의 눈 안에 있는 기둥은 보지 못하는구나. 너희의 눈에서 그 기둥을 빼내면, 그제서야 너희는 친구의 눈에서 작은 조각을 빼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잘 보게 될 것이다.”

 

27. “너희가 세상으로부터 금식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아버지의 나라를 찾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안식일을 안식일로서 지키지 않는다면, 너희는 아버지를 보지 못할 것이다.

 

28. 예수께서 말했다. “나는 세상의 가운데에서 나의 자리를 취했다. 그리고 나는 육체를 입고 나를 드러내었다. 나는 세상이 모두 취한 것을 보았으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목말라 하는 자를 찾지 못했다. 내 영혼은 사람의 자녀들로 인하여 아파하였다.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이 세상에 빈 손으로 왔기 때문이며, 또한 이 세상에서 빈 손으로 떠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분간 그들은 취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술을 끊고 나면, 그들은 자신의 길을 바꿀 것이다.“

 

29. 예수께서 말했다. “말일 영혼으로 인하여 육체가 존재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그러나 육체로 인하여 영혼이 존재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신비 중의 신비이다.

 

나는 이 커다란 풍요로움이 이 궁핍함 안에 거하게 되었는지 놀라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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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예수께서 말했다. “세 신성이 있는 곳에서 그들은 신성하다. 둘이나 하나가 있는 곳에, 나는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31. 예수께서 말했다. “선지자가 자신의 지역에서 환영받는 일이 없다. 의사들은 자신이 아는 자들을 치료하지 않는다.”

 

32. 예수께서 말했다. “높은 언덕 위에 지어진 도시는 굳건하고 무너지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숨겨질 수도 없다.”

 

33. 예수께서 말했다. “너희가 너희 귀로 듣게 될 것을 너희 지붕 위에서 다른 귀에 선포하라.

결국, 누구도 등불에 불을 붙여서 바구니 속에 넣거나, 숨겨진 장소에 놓지 않는다. 등불에 불을 붙인 사람은 등잔 걸이에 그것을 두어 오고 가는 모든 이가 그 불빛을 볼 수 있게 하느니라.“

34. 예수께서 말했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한다면, 둘 모두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35. 예수께서 말했다. “누구도 힘 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그의 두 손을 묶지 않고서는 그집을 힘으로 취할 수 없다. 손을 묶으면 그 집을 취할 것이다.”



 

36. 예수께서 말했다. “아침에서 저녁이나, 저녁에서 아침이나, 너희가 먹을 음식과 입을 의복에 대해 염려하지 하지 말라. 빗지도 의복을 짜지도 않는 백합보다 너희가 더 나은 존재가 아니냐?

너희가 의복이 없을 때, 무엇을 입겠느냐? 누가 너희 키를 조금이라도 크게 할 수 있겠느냐? 바로 그 분이 너희에게 너희의 의복을 주리라.

 

37. 그의 제자들이 말했다. “언제 저희에게 나타나실 것입니까? 언제 우리가 당신을 다시 보게 될까요?”

예수께서 말했다. “너희가 수치스러워하지 않고 옷을 벗어 어린 아이처럼 그 옷을 가져다 너희 발밑에 두고 밟게 될 때, 그 때 너희는 살아있는 분의 아들을 볼 것이고,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38. 예수께서 말했다. “너희는 나에게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 가르침들을 듣고자 하였고, 나 이외의 그 누구도 너희에게 그러한 것을 들려주지 않았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찾지 못할 날들이 있을 것이다.

 

39. 예수께서 말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지식의 열쇠를 쥐고 그것들을 숨겨놓았구나. 그들은 스스로도 들어가지 못하였고, 들어가길 원하는 자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너희들은 뱀 같이 똑똑하고, 비둘기 같이 순결(단순)하라.“

 

40. 예수께서 말했다. “한 포도나무가 아버지를 떠나 심겨졌다. 그것이 강하지 못하므로, 그것은 그 뿌리째 뽑혀 썩어 없어질 것이다.”

 

41. 예수께서 말했다. “누구든지 손에 무언가를 갖고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요, 갖고 있지 않은 자는 그의 작은 소유마저 빼앗길 것이다.”

 

42. 예수께서 말했다. “증인(목격자)이 되어라.”

 

43.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다. “이것들을 우리에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으로부터 내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차라리 유대 지방 사람들 같이 되었다. 그들은 나무는 사랑하나 그 열매는 미워하고, 또는 열매는 사랑하나 그 나무는 미워하기 때문이라.“

 

44. 예수께서 말했다. “누구든지 아버지를 모독하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아들을 모욕하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성령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자는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45.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포도는 가시나무로부터 수확되지 않는다. 무화과는 엉겅퀴나무로부터 얻어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은 자신이 비축한 것으로부터 선을 만들어낸다. 악인은 자신이 그 마음에 비축한 불의함으로부터 악을 만들어내고, 악한 것들을 말한다. 마음에서 넘쳐흐르는 것으로부터 그들은 악을 만들기 때문이다.“

 

46. 예수께서 말했다. “아담에서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여자에게서 난 자들 중 그 누구도 세례 요한 만큼 큰 자가 없으므로, 그의 눈을 피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하였듯이, 너희 중 누구든지 자녀가 되는 자는 아버지의 나라를 깨달을 것이고, 요한보다 더 큰 이가 될 것이다.“

 

47. 예수께서 말했다. “한 사람이 두 말을 타거나 두 활을 구부릴 수는 없다.

또한 한 노예가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그 노예는 한 주인을 공경하고 다른 주인을 화나게 할 것이다.

 

누구도 숙성된 포도주를 먹고 나서 곧바로 새 포도주를 먹고자 하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담지 않는다. 만일 담으면 부대가 찢어질 것이다. 오래된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지 않는다. 만일 담으면 포도주를 망칠 것이다.

오래된 천조각으로 새 의복을 기우지 않는다. 그것이 찢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48. 예수께서 말했다. “두 사람이 한 집에서 서로 화평하면, 그들이 산더러 여기에서 움직여라! 라고 말하면 움직일 것이다.”

 

49. 예수께서 말했다. “혼자이고 선택받은 이들에게 복이 있도다. 너희가 아버지의 나라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곳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50. 예수께서 말했다. “만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길, ‘너희가 어디에서 왔느냐’ 라고 하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라. ‘우리는 빛으로부터 왔다. 빛이 스스로에 의해 존재한 곳에서, 스스로를 세운 곳에서, 그리고 그들의 형상으로 나타난 곳에서 왔다.

만일 그들이 너희에게 이르길, ‘그 빛이 너희인가?’ 라고 하면, 이렇게 대답하라. ‘우리는 그 빛의 자녀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는 아버지의 선택받은 자들이다.

만일 그들이 너희에게 묻길, ‘너희 아버지가 너희 안에 있다는 증거가 무엇이냐?’ 라고 하면, 그들에게 말하라. ‘그것은 움직임과 안식이다.’“

 

51.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다. “죽은 자들을 위한 안식이 언제 오며, 새로운 세상이 언제 옵니까?”

그가 말했다. “너희가 기대하는 것이 이미 왔도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52.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다. “스물 네 명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말하였고, 또한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너희 앞에 있는 살아있는 자를 경시하고, 죽은 자들에 대해 말하는구나.”

 

53.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다. “할례는 유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만일 그것이 유익했다면, 그들의 아버지께서 아이들을 애초에 할례된 채로 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에 행하는 진정한 할례는 모든 면에서 유익하다.”

 

54. 예수께서 말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도다. 너희에게 하늘의 나라가 속하였기 때문이다.”

 

55. 예수께서 말했다. 누구든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고서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또한 누구든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지 않고,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이 십자가를지지 않는 자는 나만큼 귀하지 않을 것이다.“

 

56. 예수께서 말했다. “누구든지 세상이 시체를 발견했음을 알게되는 자에게는, 그리고 누구든지 그 시체를 발견하는 자에게는 세상이 귀중하지 않다.”

 

57. 예수께서 말했다. “아버지의 나라는 좋은 씨앗을 지닌 사람과 같다. 그의 밤중에 그의 적이 와서 좋은 씨앗들 가운데에 가라지를 심어놓았다. 그 사람은 일꾼들에게 그 잡초를 뽑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하길, ‘안된다. 만일 가라지들을 뽑으면 너는 그와 함께 밀도 함께 뽑게 될 것이다.’ 추수의 날이 오면 가라지들은 확연히 드러날 것이고, 뽑혀서 태워질 것이다.”

 

58. 예수께서 말했다. “수고하여 생명을 찾은 자에게 복이 있도다.”

 

59. 예수께서 말했다. “너희가 살아있는 한, 살아있는 자를 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죽을 것이요, 살아있는 자를 보려고 애써도 볼 수 없을 것이다.”

 

60. 그가 한 사마리아인이 양을 몰고 유다 지방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저 양 옆에 있는 저 사람에게 말하여 양을 죽여 먹게 하라. 그는 그것이 살아있는 때에는 먹지 못할 것이요, 오직 그가 그것을 죽여 시체로 만든 후에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이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먹지 못하지요.”

 

그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너희를 위하여 쉴 곳을 찾으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시체가 되어 먹힐 것이다.”

 

61. 예수께서 말했다. “두 사람이 침상에 기대어 있다.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 것이다.”

살로메가 말하였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나의 침상에 올라와 스스로가 마치 다른 자로부터 온 것처럼 내 식탁에서 먹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온전한 것으로부터 온 자이다. 나는 아버지의 것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나는 당신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나니, 어떤 자가 온전하면, 그는 빛으로 가득찰 것이나, 어떤 자가 나뉘어 있으면, 그는 어둠으로 가득찰 것이다.”

 

62. 예수께서 말했다. “나는 나의 비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에게 나의 비밀을 열어보인다.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네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

 

63. 예수께서 말했다. “아주 많은 돈을 가진 부유한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이 말하길, ‘내 돈을 투자하여 내가 뿌리고, 거두고, 심어서 내 곡식창고를 그 산물로 가득 채울 것이다. 그러면 나는 부족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그 청년이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으나, 바로 그날 밤 그 청년은 죽게 되었다. 여기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64. 예수께서 말했다. “한 사람이 손님들을 받고 있었다. 그가 저녁 준비를 마쳤을 때, 그는 하인을 시켜 손님들을 초대하게 하였다. 하인들은 첫 사람에게 가서 말하였다. ‘제 주인이 당신을 초대하십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몇몇 상인들이 나에게 빚을 졌습니다. 그들이 오늘 밤 내게 올 것입니다. 나는 가서 그들을 훈계해야 합니다. 내가 저녁식사에 가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하인은 다른 사람에게 가서 말하였다. ‘제 주인이 당신을 초대하십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내가 집을 샀는데, 그래서 하루 종일 불려 다녔습니다. 아마도 시간이 안 될 것 같습니다.’ 하인은 다른 사람에게 가서 말하였다. ‘제 주인이 당신을 초대하십니다.’ 그가 대답하였다. ‘내 친구가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연회에 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녁 식사에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하인은 또 다른 사람에게 가서 말하였다. ‘제 주인이 당신을 초대하십니다.’ 그가 노예에게 대답하였다. ‘내가 땅을 사서 임대자를 모으러 갈 것입니다. 그래서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하인은 돌아가서 그 주인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저녁에 초대한 사람들이 양해해달라고 합니다.’ 주인이 그 하인에게 말했다. ‘길거리에 나가서 누구든지 저녁을 먹기를 구하는 자를 데려오거라.’

 

구매자와 상인들은 내 아버지의 처소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65. 그가 말했다. “포도 농장을 소유 한 어떤 자가 그것을 농부들에게 빌려주고 그들을 통해 수확물을 거둘 수 있게 하였다. 그는 그의 하인을 농부들에게 보내 수확물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 농부들은 그 하인을 잡아 때리고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하인은 되돌아가 그 주인에게 이를 고했다. 주인이 말했다. ‘아마도 그들이 그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다른 하인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그 역시 때려 눞혔다. 그러자 그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며, ‘아마도 그들은 내 아들에게는 존경을 표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농부들은 그 아들마저 때리고 죽여버렸다. 왜냐하면 그 농부들은 그 아들이 포도 농장의 상속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66. 예수께서 말했다. “나에게 건축자들이 거부한 돌을 보여다오. 그것이 종석이다.

(*종석(keystone): 아치 꼭대기에 올려 놓는 쐐기돌)

 

67. 예수께서 말했다. “모든 것을 알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자들은 궁극적으로 결여한 자들이다.”

 

68. 예수께서 말했다. “너희가 미움을 받고 박해받을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너희가 박해받은 곳이 어디이건 간에, 그곳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69. 예수께서 말했다. “자신의 마음 안에서 박해받은 자들에게 복이 있도다. 그들은 진실로 아버지를 알게 된 자들이다.

굼주리며 나아가는 자들에게 복이 있도다. 그들의 굼주린 배가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70. 예수께서 말했다. “만일 너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 밖으로 드러내어 열매를 맺게 한다면, 너희가 가진 것이 너희를 구할 것이다. 만일 너희가 그것을 너희 안에 갖고 있지 않으면, 너희가 갖지 아니한 것이 너희를 죽일 것이다.”

 

71. 예수께서 말했다. “나는 이 집을 부술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그것을 지을 수 없을 것이다.[뒷부분 소실]}

 

72. 한 사람이 예수께 말했다. “내 형제에게 말씀하셔서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재산을 나와 나누게 하여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했다. “형제여, 누가 나를 나누는 자로 만들었는가?”

그가 돌아서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나누는 자가 아니다. 안 그런가?”

 

73. 예수께서 말했다. “수확할 것은 많으나, 일할 사람은 적구나. 그러므로 농장 주인에게 일할 사람을 들판으로 급히 보내달라고 간절히 구하라.”

 

74. 그가 말했다. “주여, 물 여물통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나, 우물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75. 예수께서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문가에 서 있다. 그러나 혼자인 사람들만 신혼 방에 들어갈 것이다.”

 

76. 예수께서 말했다. “아버지의 나라는 진주를 찾은 상인과 같다. 그 상인은 현명하여, 자신의 모든 물품을 팔아버리고 그 자신을 위하여 그 진주 하나를 구입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들 역시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그의 보물을 구하라. 그곳에서는 어떤 입도 너희 보물을 빼앗아 먹는 일이 없고, 그것을 부패케 하는 벌레도 없느니라.“

 

77. 예수께서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을 비추는 빛이다. 내가 모든 것이다: 나로부터 모든 것이 태어났고, 나에게로 모든 것이 이르리라.

나무 한 조각을 나누어 보아라. 내가 그곳에 있도다.

저 돌을 들어보아라. 너희는 나를 그곳에서 찾을 것이다.“

 

78. 예수께서 말했다. “너희가 왜 교외로 나왔느냐?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기 위해서이냐? 너희의 지도자들과 권력자들과 같이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해서이냐? 그들은 부드러운 옷을 입었고, 그래서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79. 군중들 속의 한 여인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을 나은 여자의 배와 당신에게 젖을 먹인 가슴은 얼마나 복됩니까!”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복된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진실되게 지키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임신하지 않은 배와, 젖을 물리지 않은 가슴에게 복이 있도다!“

 

80. 예수께서 말했다. “누구든지 이 세상이 육체를 발견했음을 알게 되는 자에게는, 그리고 누구든지 그 육체를 발견하는 자에게는, 이 세상이 귀하지 아니하리라.”

 

81. 예수께서 말했다. “부유해진 자에게 통치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힘을 가진 자가 그것을 포기하게 하여라.”

 

82. 예수께서 말했다. “누구든지 나와 가까이 있는 자는 또한 불과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로부터 멀리 떠난 자는 아버지의 나라로부터 멀리 떠난 것이다.

 

83. 예수께서 말했다. “형상은 사람의 눈에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빛은 아버지의 빛의 형상 안에 숨겨져 있다. 그는 드러날 것이지만, 그의 형상은 그의 광채 안에 숨겨져 있다.”

 

84. 예수께서 말했다. “너희가 너희의 닮음을 볼 때, 너희는 행복해한다. 그러나 너희가 너희보다 먼저 지어졌으며, 죽지도, 보이지도 않는 너희의 형상들을 보게 될 때, 너희가 얼마나 견딜 수 있으랴!”

 

85. 예수께서 말했다. “아담은 큰 힘과 큰 부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그는 너희만큼 귀하지 않다. 만약 그가 더 귀했다면,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았을 것이다.”

 

86. 예수께서 말했다. “여우들은 자신의 소굴을 가지고 있고, 새들은 자신의 둥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누워서 쉴 곳을 갖고 있지 않도다.”

 

 87. 예수께서 말했다. “육체에 의존해 있는 육체는 얼마나 비참한가. 또한 육체와 혼에 의존해 있는 혼은 얼마나 비참한가.”

 

88. 예수께서 말했다. “전령들과 선지자들이 너희에게 올 것이며, 너희에게 속한 것을 줄 것이다. 너희는 그 대가로 너희가 가진 것을 주고 너희 스스로에게 말하라. ‘그들은 언제 와서 그들에게 속한 것을 가져갈 것인가?’”

 

89. 예수께서 말했다. “왜 너희는 컵의 바깥 면을 씻느냐? 너희는 안쪽을 만든 자가 또한 바깥 쪽을 만들었음을 깨닫지 못하느냐?”

 

90. 예수께서 말했다. “나에게 나오라. 내 멍에는 편안하고, 나의 집은 가볍기 때문이다. 네가 너를 위해 안식할 곳을 찾게 될 것이다.”

 

91.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당신이 누군지를 말해주어, 당신을 믿게 해 주십시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하늘과 땅의 얼굴을 시험하면서도, 너희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며, 지금 이 순간을 시험할 방법을 알지 못하는구나.”

 

92. 예수께서 말했다.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너희가 나에게 물은 것들에 대해 내가 말하지 않았다. 이제 나는 그것들을 너희에게 말할 것이나, 너희가 그것을 구하지 않는구나.“

 

93. “신성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라. 개들은 그것을 똥 더미에 던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소실..]”

 

94. 예수께서 말했다. “구하는 자는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다.”

 

95. 예수께서 말했다. “너희가 돈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이자를 받고 빌려주지 말아라. 차라리 너희에게 그것을 돌려주지 않을 사람에게 그 돈을 주어라.”

 

96. 예수께서 말했다. “아버지의 나라는 한 여자와 같다. 그녀는 작은 양의 효모를 취하여 밀가루 반죽에 숨겨 놓았다. 그리고 그 반죽을 커다란 빵 덩어리로 만들었다. 여기 두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97. 예수께서 말했다. “아버지의 나라는 항아리에 곡식을 가득 담아 이고 가는 여자와 같다. 그녀가 먼 길을 가는 동안, 항아리의 손잡이가 부러졌고 곡식은 그녀 뒤 길가 위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항아리를 바닥에 내려놓았고, 그것이 텅 비어있음을 발견했다. ”

 

98. 예수께서 말했다. “아버지의 나라는 힘 센 장사를 없애려고 하는 한 사람과 같다. 그가 집에 있는 동안, 그는 벽에 칼을 찔러서 그의 손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장사를 찔렀다.”

 

99.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형제와 어머니가 밖에 서 계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여기에 있는 자들 중 아버지가 원하는 바를 행하는 자가 나의 형제이며 나의 어머니이다. 그들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이다.”

 

100. 그들은 예수께 금화 하나를 보이며 말했다. “로마 제국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세금을 요구합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로마) 황제에게 속한 것은 (로마) 황제에게 주어라. 하나님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주고, 나에게는 나에게 속한 것을 주어라.”

 

101. “누구든지 나와 같이 부모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으며, 누구든지 나와 같이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어머니는..[소실] .. 그러나 나의 진정한 어머니는 나에게 생명을 주었다.

 

102. 예수께서 말했다.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으리라! 그들은 마치 소의 여물통에서 잠을 자는 개와 같도다. 개는 자신도 먹지 않고, 소도 먹지 못하게 한다.”

 

103. 예수께서 말했다. “반역자들이 어디를 공격할지 아는 자들에게 복이 있도다. 그들은 나아갈 수 있고, 왕의 자원을 모을 수 있고, 반역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예비할 수 있다.”

 

104. 그들이 예수께 말했다. “오십시오. 함께 기도하고, 함께 금식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으며, 내가 어찌 타락하였는가? 그러나 신랑이 신혼방을 나가고 나면, 그 때에 사람들을 기도하게 하고 금식하게 하라.”

 

105. 예수께서 말했다. “부모가 누군지 아는 자들은 모두 창녀의 자식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106. 예수께서 말했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너희는 아담의 자식이 될 것이요, 너희가 이 산더러 저리로 움직이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

 

107. 예수께서 말했다. “하늘 나라는 백 마리의 양을 가진 목자와 같다. 그들 중 가장 큰 하나가 무리를 이탈했다. 목자는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남겨두고 그 한 마리를 발견할 때 까지 찾아다녔다. 그가 힘들게 수고한 끝에 그는 한 마리 양을 찾아 그 양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를 다른 아흔 아홉의 양보다 더 사랑한다.“

 

108. 예수께서 말했다. “누구든지 내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것이다. 나 자신이 그 사람이 될 것이며, 숨겨진 비밀들이 그에게 드러날 것이다.”

 

109. 예수께서 말했다. “아버지의 나라는 보물이 숨겨진 들판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과 같다. 그가 죽고 나서 그는 들판을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 아들도 보물에 관해 알지 못했다. 그는 들판을 물려받고 나서 그것을 팔아버렸다. 들판을 구입한 사람은 그 들판을 경작하였고, 보물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돈을 원하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이윤을 남기고 빌려주었다.

 

110. 예수께서 말했다. “세상을 발견하고, 부유하게 된 자들이 세상을 부인하게 하라.”

 

111. 예수께서 말했다. “하늘과 땅이 너희 앞에서 뒤집어 질 것이고, 살아있는 분으로 인해 살아있는 자들은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찾은 자들에게는 세상이 귀하지 않도다.” 라고 예수께서 말하지 않았는가?

 

112. 예수께서 말했다. “혼에 의지한 육체에게 화가 있도다. 육체에 의지한 혼에게 화가 있도다.”

 

113.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나라는 언제 옵니까?”

 
“그것은 너희가 주의깊게 지켜본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보라! 하늘 나라가 여기 있다!“ 혹은, ”보라! 하늘 나라가 저기 있다!“ 라고 말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나라는 온 땅에 뿌려져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후대에 추가된 구절] 114.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했다. “마리아를 우리로부터 떠나게 해라. 여자는 영생을 얻을 자격이 없다.” 예수께서 말했다. “보라, 내가 그녀를 인도하여 그녀를 남자로 만들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 역시 너희와 같이 살아있는 영이 될 것이다. 어떤 여자든지 자기 자신을 남자로 만드는 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붓다의 연결 고리 도마복음

 

인도 첸나이 성도마성당의 사도 도마 무덤 앞에서 경배하는 인도 기독교인들.



1945년 지구엔 두개의 폭탄이 투하됐다. 하나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이었다. 또 하나는 이집트의 나일강 상류 나그함마디 산 근처 파코미아수도원의 밀봉된 항아리 속에서 발견된 열세 뭉치의 고문서였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기록한 <도마복음> 등으로, 기독교를 로마식으로 윤색한 성서가 아니라 그 이전의 기독교의 원음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었다. 

22살에 옥스퍼드대 교수가 된 앤드류 하비는 이 문서들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버금가는 문헌’이라고 평가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도마가 저술한 이 책은 예수가 전하는 ‘비밀의 메시지’가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기독교가 기복에 치우진 것과 달리 도마복음은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도마복음은 기독교 신학을 도그마에서 해방시켜 우주적 기독교로 지평을 넓힐 매혹적인 문서로 지목되기도 한다. 

예수의 12사도 중 한명으로 성서에도 기록돼 있는 사도 도마는 1세기경 인도에 가서 활동했다. 도마가 인도에 가게 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50년경부터 70년경 사이에 인도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 남쪽 첸나이 마살라에 있는 성도마 성당은 인도에서 기독교를 전하다 근본주의 힌두교도들에 의해 순교당한 도마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기독교 순례지다. 

도마는 인도에 복음을 전파하고, 기독교 교회를 세워 ‘인도의 사도’라고도 불린다. 또한 도마는 힌두교와 불교, 이슬람교와 같은 다른 종교와 교류를 통해 인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따라서 기독교와 불교, 기독교와 인도의 접점을 찾는데 핵심고리가 바로 도마복음이다.  

‘살아계신 예수’라는 것은 시공과 생사를 초월하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 즉, 진리(One)를 가리킨다. 누구나 내면의 살아계신 영이 깨어 있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깨어나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영생)을 통하여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는 불생불멸의 생명이 된다(생사해탈).

디두모(Didymos)는 그리스어로, 도마(Thomas)는 아람어‧시리아어로 쌍둥이(하나 됨)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디두모(Didymos)라는 유다 도마’는 영적 쌍둥이, 즉 예수처럼 ‘하나(One)의 진리’를 깨달은 유다라는 뜻이다. 예수는 변하는 거짓 나(ego)의 목숨을 버리고 영원불변하는 참나(One)의 목숨을 얻었으며, 유다 도마도 하나님을 깨닫고,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본 것이다. 깨달음이란 몸과 마음을 자기와 동일시하던 거짓 나(ego)가 꿈과 그림자와 같은 허상이며, 신성(불성)인 진정한 나(참나)가 영원한 실상(진리)임을 자각하는 하나(One) 됨이다. 따라서 도마복음의 가르침은 이원성인 거짓 나(相, ego)를 제거하면 하나인 참나(진리)를 회복하여 온 세상에 충만한 하나님(如來)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금강경). 

‘비밀의 말씀’은 하나(One)인 ‘궁극적 진리’를 성경과 다른 영적 표현을 나타내는 것으로 개인적이며 은밀하게 말씀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진리를 가리킨다. 성자들의 가르침은 항상 일반인을 위한 공개된 가르침과 영적으로 준비된 사람을 위한 비밀의 가르침으로 구분되어 왔다. 궁극적 진리인 하나님과 하나(One)가 되기 위한 영원한 신성(불성) 깨달음의 복음을 전해준 예수의 영적인 가르침도 그 예외가 아니다.  

모양이 없는 궁극적 진리(One)는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예수, 신성, 성령, 천국 등으로 불교에서는 부처, 법신, 여래, 보리, 열반, 실상, 불성, 空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도의 베다서에서 “우리는 모양이 없는 진리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신(佛)이 전체로서 하나(One)라는 것을 지혜로운 자는 잘 안다”고 하였다. 현대물리학은 온 우주는 둘이 아닌 하나(One)의 에너지 파동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였다. 모양이 없는 ‘영인 창조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분리된 존재가 될 수 없으므로 창조자와 피조물은 전체로서 하나(One)인 순수생명의 에너지(빛)로 보아야한다. 우주는 시간 속에서 창조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창조되는 것은 신의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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