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위선, 위선의 진보
진보가 높은 도덕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력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최근의 경우로만 본다면 대개 진보적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 견해는 자신에게 침을 뱉는 행위와도 비슷하다. 진보의 위선이라는 말은, 도덕적인 태도가 진보의 당위이며 진보는 그 도덕적 우월 때문에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견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럼 그런 환멸을 드러내는 보수적인 너희들만 부도덕할 자유가 있는가.
왜 진보는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도덕과 진보가 병행되어야 할 필연적 이유가 있는가. 진보가 도덕적이라는 말은, 진보의 상대적 개념으로 쓰이는 보수의 부도덕을 전제로 한 말일텐데 보수의 부도덕은 진보의 부도덕보다 덜 파렴치한가. 진보가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진보가 자신의 입으로 그것을 외쳐왔기 때문이며, 보수가 도덕적이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보수가 자신의 부도덕한 기반을 시인해왔기 때문인가.
진보와 보수는 서로 대립적인 한 쌍으로 보이지만, 실은 시간적인 서열을 전제하고 있다. 이미 확립되어져 있는 보수에 대한 이견과 비판을 통해 진보적 견해가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때 진보가 공격하는 것은, 보수가 지닌 부도덕함과 몰상식과 탐욕적인 측면이었다. 진보는 이미 기득권으로 존재하고 있는 보수를 전제해야 존립근거가 생기는 상대적인 사고였다.
보수의 결함이, 진보의 존재이유다. 진보의 위선은, 그토록 공박해온 보수의 결함을 스스로도 유지 활용하고 있었으면서 진보의 우월을 표명해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보수의 비판은, 동일한 도덕성 경쟁에서의 '의문의 1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뭐 묻은 개와 뭐 묻은 개의 비유처럼 "너희도 별 수 없으면서 웬 잘난 척이야?"하는 정도의 시비일 가능성이 크다.
상식적인 대중이 느끼는 '진보의 위선'은, 이 사회에서 일정하게 기댈만한 도덕적인 언덕을 잃어버렸다는 허탈감 같은 것이다. 부도덕의 평준화 같은 것이다. 진보가 유일하게 느낄 것이라고 믿었던, 부도덕의 통증이 가짜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도덕은 그저 외형적으로 내건 기치나 인간의 근본적 위선의 산물일 뿐이라는 인식에 도달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도덕을 내건 정치의 패망은, 정치 전체를 부도덕한 영역으로 인식하게 한다.
하나의 인간 속에는, 몇 퍼센트의 보수가 있고 몇 퍼센트의 진보가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지 모른다. 인간 속의 보수는, 자신의 성취와 경험을 토대로 자아의 전반을 관리하고 유지하려 하며, 인간 속의 진보는 그것에 반기를 들고 그 관리와 유지 속에 들어있는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측면과 비판받지 않아온 독주의 측면을 견제하려 한다.
진보는 보수의 반성에 가깝고, 보수를 타격하여 수술하려는 메스에 가깝다. 진보는 보수가 잃어버린 도덕 그 자체이며, 보수가 궤양처럼 수시로 느껴온 문제들의 통증과도 같다. '위선'이라는 말에는, 진보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있는 듯 하다. 그것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돌아보는 일에는, 진보의 본질 이탈이란 존재 심문이 들어있는 것은 물론이다.
진보의 위선은, 위선이 진보한 한 양상인지도 모른다. 보수에 숨어있던 뿌리 깊은 위선이 진보라는 그럴 듯한 수레 위로 갈아타고는 여전히 활개치는 풍경인지도 모른다. 진보의 위선은, 대중으로부터 비판받을 때에도 문제의 핵심을 읽지 못한다. 즉 본질 이탈에 대한 수치감이나 문제의식이 없다. 위선으로 지목된 영역은 본질이 아니며 문제도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만 위선적인 대중이 공격을 위해 지목한 '시스템 속의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결코 그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성 기반 이론
동료 연구자 제시 그레이엄(J.Graham) 등과 함께 그가 제안한 도덕성 기반 이론(MFT; moral foundations theory)에 따르면, 사람들은 도덕적인 판단을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그 판단의 기준으로서 최대 여섯 가지 도덕성 기반에 입각하며, 여기에는 진보냐 보수냐 같은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개인이 채택하는 기반의 숫자에 차이가 난다. 이 이론에서 제시하는 도덕성 기반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돌봄 vs. 위해 (care vs. harm)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타인을 배려한다면, 그것은 올바르다.
공정성 vs. 기만 (fairness vs. cheating)
정의롭지 못하게 자원이 배분되거나 무임승차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 정의롭게 자원이 배분되거나 기만자가 처벌받는다면, 그것은 올바르다.
충성 vs. 배신 (loyalty vs. betrayal)
어떤 집단에 속한 개인이 집단에 해가 되는 짓을 한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 집단에 속한 개인이 집단을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한다면, 그것은 올바르다.
권위 vs. 무질서 (authority vs. subversion)
어떤 사회의 위계서열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전복한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 윗사람의 권위에 순종하고 경의를 표한다면, 그것은 올바르다.
정결함 vs. 오염 (sanctity vs. degradation)
인간으로서 상징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더럽힌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 스스로를 지켜 깨끗이 하고 더욱 숭고하고 고귀한 것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올바르다.
자유 vs. 압제 (liberty vs. oppression)
다른 연구자에 의해 뒤늦게 추가된 도덕성 기반인데, 2020년에도 아직 그 이론적 파급력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것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보수와 진보에 따라 생각에 차이가 날 수 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짧게 말해서 진보주의자들은 위해 기반과 공정성 기반을 중점적으로 의식하며, 특히 전자를 더 중요시한다. 그리고 이 이론이 학계의 시선을 끌었던 진짜 이유, 보수주의자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위해 기반과 공정성 기반 이외에도 다른 도덕적 기반들까지 "골고루"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진보주의자들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사회적 불의를 야기하지 않는 한) 어지간하면 다 수용하고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믿는 편이고 이것이 특유의 톨레랑스로 나타난다면, 보수주의자들은 무엇이 도덕적인가에 대해 더욱 깐깐하고 엄격한 기준들을 적용하는 편이고 이것이 꼰대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2014년에 국내에서 수행된 한 연구에서는 진보들이 추구하는 도덕성 기반을 "개인 기반", 보수들이 추가로 추구하는 도덕성 기반을 "집단 결속 기반" 이라고 분류하기도 했다.
사안에 따라서 도덕성 기반은 다양하게 적용된다. 예컨대 도널드 트럼프의 혐오발언에 대해 미국 리버럴들(그리고 교양과 상식을 갖춘 보수주의자들)이 분개하는 것은, 그가 상습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위해를 가하기 때문이다. 성향을 막론하고 조별과제 때 무임승차자가 발생하는 것에 반감을 갖는 것은, 그것이 공정성 기반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유독 국가와 사회를 위한 개인의 희생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진보주의자와는 달리 나라에 대한 충성 역시 도덕적 요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유독 달동네 철거민들에 대해서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그들이 공권력의 권위를 개인이 누려야 할 권리보다 우선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유독 퀴어문화축제나 간통죄에 대해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것은, 그런 것들이 결국 인간의 상징적인 깨끗함과 고귀함을 오염시키고 타락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당하는 상황에서 진보주의자들은 "이 부도덕하고 금수 같은 놈들!" 이라고 보수주의자들을 비난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개인의 권리 외에도 집단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까지가 도덕적 행동의 요건이라고 이해할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자들이 성 소수자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저걸 무조건 괜찮다고 하다니, 세상이 어찌 되려고..." 하면서 혀를 차더라도, 진보주의자들은 그런 것이 부도덕하다고 판단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동성애자들이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요, 무임승차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표현을 바꾸면,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보다 도덕적인 행동을 더 넓은 의미에서 판단하고, 반대로 무엇이 부도덕하다고 판단할 때에는 상대적으로 더 높은 허들을 적용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조너선 하이트가 자신의 책 제목을 왜 "(도덕적으로) 올바른 마음" 이라고 정하고, 그 부제를 "어쩌다 선한 사람들이 정치와 종교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게 되었나" 로 정한 것인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차이는 사실 진보 대 보수 같은 형태로 일차원적으로 딱 떨어지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실제로 하이트의 다른 연구에 따르면, 진보나 보수 중 어느 한쪽으로 나눌 수 없는 회색지대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를 구태여 다시 둘로 나누면, 전자는 자유지상주의자로서 모든 종류의 도덕성 기반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경향을 보이며, 모든 종류의 도덕성 기반에 과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종교적 좌파"(religious left) 부류의 사람들도 존재한다. 종교적 좌파는 클래식한 보수주의자들처럼 인간의 정결함에도 신경을 쓰지만, 한편으로는 타인의 고통을 돌보고 빈부격차와 같은 정의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이 조너선 하이트의 그 유명한 도덕성 기반 이론의 전말이고 실제로 호응도 크게 받았지만, 현실적으로 그 가치에 비해 오히려 저평가되어 있다는 호평 아닌 호평이 많다. 이미 도덕성에 대해서는 하인츠 딜레마로 유명해진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이론이 학계를 꽉 잡고 있기에 아무래도 이와 대립각을 세우는 이론은 영향력을 쉽게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콜버그의 이론은 "어떤 기준에 입각한 도덕성이 더 '우월' 한가? 우리는 어떤 도덕성을 지향해야 하는가?" 에 대해 답하지만, 하이트의 이론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도덕적 판단기준은 어떻게 '차이' 를 보이는가?" 정도만을 다루기 때문에 어떤 가치개입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보수와 진보, 도덕적 기준의 가중치
보수는 충성심·고귀함·권위 강조
진보는 배려·피해, 자유에 민
잠시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보자. 이 사람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일까?
“어떤 사람이 벽장을 정리하다가 자신이 옛날에 쓰던 태극기를 발견했다. 태극기는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었기에 그는 그것을 여러 장으로 잘라 화장실을 청소하는 걸레로 썼다.”
매우 불쾌한가? 그런 분께 재차 물을 수 있다. “이런 행위는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는 않는데 왜 잘못된 행동일까요?” “....”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렇기는 하지만 태극기를 걸레로 쓰다니 그건 말이 안 되죠”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면, 그는 보수주의자일 개연성이 꽤 높다.
도덕 기반에 대해 연구해온 사회심리학자 하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도덕 판단을 할 때 자신의 ‘직관’을 먼저 작동시키고 이유를 대야 할 때에야 비로소 생각을 시작한다. 즉, 직관적으로 불쾌, 경멸, 분노, 역겨움 등이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에 그런 감정들을 합리화하기 위한 ‘추론’이 작동한다. 도덕 판단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직관이 우선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위의 태극기 걸레 이야기에서 별다른 도덕적 불쾌감이나 분노를 느끼지 않는 직관의 소유자는 대체 어떤 유의 사람일까? 보수·진보 사이의 도덕 직관의 차이에 관한 이런 의문이야말로 총선 결과와 작금의 정치적 분열에 대한 심층적 접근이 될 수 있다.
하이트가 전 세계 13만 명 이상의 설문 조사를 통해 제시한 도덕 기반 이론에 따르면, 모든 문화권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도덕의 여섯 가지 기준이 존재한다. 그것은 피해, 공정성, 충성심, 권위, 고귀함, 그리고 자유다. 그는 도덕성이 이 여섯 가지 기반(직관) 위에서 구성된다고 보았고, 도덕 기반 설문을 통해 각 기준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예컨대 ”설사 그들의 가족이 잘못된 일을 했을지라도 가족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충성심 기반에, “군인이라면 상관의 명령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의무적으로 복종해야만 한다”는 권위 기반에, “피해를 주지 않더라도 역겨운 행위는 해서는 안 된다”는 고귀함 기반에 속한다. 위의 여섯 가지 기반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보수·진보에 따라 여섯 가지 기반의 가중치가 확연히 다르다. 보수는 여섯 가지 기반 모두를 중시하는 편인 반면, 진보는 그중 세 가지 기준에 주로 민감하다. 진보는 배려·피해 기반과 자유·압제 기반에 가장 많이 의존하며 공평성·부당성 기반도 작동시킨다. 예컨대 좌파는 우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폭력과 고통의 신호를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평등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약자가 강자에게서 억압받지 않도록 정부가 나서야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우파도 자유를 강조하지만 그들은 진보 정부 정책에 치를 떨 때가 많은데, 왜냐하면 그런 정책이 특정 약자 집단(노동자, 소비자, 환경)을 보호한답시고 또 다른 집단(가령, 중소기업 사업주)을 압제하기 때문이다. 공평성·부당성 기반의 경우에도 우파는 상대적으로 “가장 열심히 일한 직원에게 가장 많은 보수가 돌아가야 한다”는 비례의 원칙을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인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결정적 기준은 충성심, 권위, 고귀함 기반이다. 사실 이것은 개인적 차원보다는 집단적 성격을 가진다. 진보는 집단적 차원에서 작동한 이 세 가지 기반들에 대해 대단히 둔감하다. 가령, 위의 태극기 걸레 사례가 보수주의자의 심기만을 건드리는 이유는 그것이 충성심 기반을 위배하기 때문이다. 우파는 공동체를 깨면서까지 이념을 수호하고 싶지 않은 반면, 좌파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내부 총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바로 질문하지 말아야 할 문제. “우파·좌파 중 누가 더 올바른 도덕 기반을 가졌는가?” 이 물음만을 계속 던지는 진영은 ‘궁극적’으로 실패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도덕 판단을 하며, 사람들이 어떠한 도덕 기반들을 왜 더 중시하는지에 대한 민감성 없이 그들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가 없이는 왜 시골 주민과 노동 계층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줄 거 같은 진보 쪽에 서지 않고 보수에게 표를 주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진영을 표방하든 공동체 기반의 도덕 자본을 중시하지 않는 정치 세력은 승리할 수 없다.
좌파의 위선, 우파의 탐욕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2013년 출간과 동시에 금세기의 고전이 됐다. 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젊은 49세의 경제학자는 전작보다 더 두꺼운 후속작을 펴냈다. 무려 1300쪽. 세계에서 8번째로 전작이 많이 팔린 나라답게 영어판과 거의 동일한 시기 책이 번역 출간됐다. 전작이 경제학자들의 갑론을박을 가져온 책이라면, 이 책은 정치학자들에게 논쟁을 불러올 만한 지점이 많다. 불평등의 역사를 강화시켜온 정치체제에 메스를 대는 책이어서다. 피케티는 전작의 한계부터 짚으며 논의를 시작한다. 서유럽 북미 일본 등 부국에 의미를 과도하게 두어 서양 중심적이라는 지적과, 불평등과 재분배를 둘러싼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진화들을 일종의 블랙박스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는 한계를 스스로 인정한다.
"불평등은 경제적인 것도 기술공학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다."
서문부터 역사연구를 통해 얻은 결론을 제시하며 책을 연다. 피케티에 따르면 어느 시대든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구조화하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규칙을 진술하기 위한 일군의 모순된 담론과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고대사회는 '삼원사회'였다. 사제와 귀족(전사)과 평민(노동자)으로 이뤄진 사회. 이 유형의 사회는 프랑스혁명까지의 기독교 사회 전체뿐만 아니라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회, 중국과 일본 등 극동에서도 지속됐다. 사제의 임무는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것이었고, 귀족은 전쟁에서 영토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는 세금을 내고 노동력을 제공했지만 권력에선 배제됐다. 이 불평등한 체제는 끓어오르다 결국 1789년 프랑스혁명을 일으켰다. 근대 이전까지 유럽 사회에서 두 신분의 합은 5~10% 선이었다. 그럼에도 1880년 영국 토지의 80%를 인구의 0.1%에 불과한 7000개 가문이 소유했다. 프랑스는 혁명 직전 토지의 2~30%를 귀족이 소유하고 있었다. 삼원 사회야말로 역사상 가장 지배적인 불평등 유지 체제였던 셈이다.
고대 아테네와 로마, 근대 미국 남부, 서인도제도가 유지했던 '노예제 사회'와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제3세계를 착취했던 '식민사회'를 거쳐 프랑스는 새로운 사회를 고안했다. 혁명 이후 탄생한 '소유자사회'다. 혁명세력은 보수화했고 자본가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을 탄생시켰다. 과거에는 신분이 세습됐다면 이제는 부가 세습되는 시대가 됐다. 이 시대의 영웅은 자본가다. 사유재산을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소유주의, 실력주의, 비정한 사회진화론은 이 시대를 지탱한 논리다.
혁명 이후에 불평등의 수레바퀴는 점점 더 거세게 굴러갔다. 20세기 초 '아름다운 시대'(벨에포크)에 오면서 불평등은 절정에 달했다. 문화예술이 화려하게 꽃핀 이 시기,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최고 수준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 시기 소득 분배에서 상위 10%는 부의 80~90%를 가져갔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이런 배경 속에서 출간됐다.
1차 세계대전이란 위기 속에 인류는 역사상 최초로 소득 재분배 실험에 나섰다. 프랑스는 전비 조달을 위해 누진소득세를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대공황과 전후 복구를 위해 뉴딜 정책 등 진보적 정책이 시행됐고 미국은 복지를 제도화시켰다. 결과적으로 소득 불평등은 급속히 축소됐다. 분배·성장·고용이 모두 개선되는 전무후무한 일이 미국과 독일, 프랑스, 일본, 한국 등 모든 국가에서 일어났다.
피케티는 1945~1980년까지의 황금시대가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의 등장과 함께 막을 내렸다고 분석한다. 그의 눈에 현시대는 불평등이 극에 달하고 재산을 가진 백인 남성에게만 '근사했던' 1차 세계대전 직전의 '벨에포크' 시대와 흡사하다.
그가 전작에서 정의한 대로 21세기는 세습자본주의 시대다. 그는 불평등을 해결할 대안으로 사회국가, 누진소득세, 세계자본세를 제시했는데 이 책은 이런 대안을 현실로 가져올 힘이 정치에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책의 15장을 통째로 할애해 그는 보수화된 브라만 좌파(학력·지식자본 축적을 지향하는 좌파)의 문제를 꼬집는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현상 중 하나는 과거 노동자의 정당이었던 좌파 정당이 고학력-고소득자의 정당으로 변했다는 것. 진보 정당이 가난한 저학력 유권자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고 공공연한 능력주의 정당으로 변모하니 저학력자들은 보수당을 지지한다.
반면 전통적인 상위 자산 보유자들의 정당인 보수 정당도 가난한 50%를 민족주의 정서, 일자리 지키기 정책으로 유인하면서 포퓰리즘의 득세를 가져왔다. 심지어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금융자본 축적을 지향하는 우파) 모두 현행 경제체계와 지식 엘리트와 금융 엘리트 양쪽에 모두 이득이 되는 현재의 세계화 양상을 지지한다고 꼬집는다.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의 시대, 즉 다중 엘리트 체계는 지배계급을 용인하는 삼원사회로의 회귀라고까지 비판한다.
피케티는 힘겨운 여정 끝에 '사회연방주의'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모든 세금을 누진소유세로 통합해 부의 대물림을 막고 사적 소유의 개념을 일대 전환시키자는 것이다. 25세의 유럽 청년들에게 성인 평균자산의 60%인 12만유로를 지급하자는 급진적 기본소득 실험까지 제안한다. 사적 소유의 극복이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급진적 주장은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가설로 보인다. 그럼에도 경제사와 정치사는 물론이고 동서양을 아우르는 풍부한 자료까지 제시하는 기념비적 저서임을 부인할 순 없었다. 그의 철학은 무쇠처럼 단단했다. "평등과 교육을 위한 투쟁이 경제 발전과 인류 진보를 가능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