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누트 대왕
Cnut the Great
출생
990년
덴마크 왕국
사망
1035년 11월 12일 (향년 45세)
잉글랜드 도싯 샤프츠베리
재위 기간
잉글랜드 국왕
1016년 ~ 1035년 (약 20년)
덴마크 국왕
1018년 ~ 1035년 (약 17년)
노르웨이 국왕
1028년 ~ 1035년 (약 8년)
덴마크 크누트 왕조의 제5대 국왕, 노르웨이 크누트 왕조의 제3대 국왕, 잉글랜드 크누트 왕조의 제2대 국왕이다.
덴마크, 노르웨이, 잉글랜드를 하나로 통합함으로서 앵글로-스칸디나비아 제국을 세운 대왕이었다.
일생
즉위 이전
덴마크의 왕 스벤 1세 트베스캐그와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의 딸 시비엥토스와바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크누트는 아버지 스벤 1세와 함께 잉글랜드 정복전에서 맹활약했다. 1014년 2월 아버지가 승하하자 1015년에 옛 덴마크 바이킹(데인족)이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것(데인로)을 명분으로 삼으며, 잉글랜드를 다시 침공하여 에드먼드 2세를 몰아내고 왕위를 손에 넣었다.
치세
뒤를 이어 형 하랄 2세가 승하하자 덴마크 왕위도 물려받아 덴마크 국왕 '크누드 2세'로 즉위했다. '크누드 1세'가 아닌 이유는 고름 왕 이전의 전설속 군주들 중 '하르다크누드'(또는 크누드)3라는 왕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1028년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일부, 스코틀랜드의 일부도 정복했다. 이로써 크누트는 당대 영국에서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걸쳐 있고, 북해를 마레 노스트룸으로 삼다시피 한 앵글로-스칸디나비아 대제국을 건설했다.
사망
1035년 잉글랜드 도싯의 샤프츠베리에서 승하했다. 시신은 올드민스터 사원에 묻혔으나 노르만 정복 이후에 임명된 첫 번째 윈체스터 주교였던 왈켈린(Walkelin)이 철거해버렸다. 대신 옆에 새 성당을 지은 뒤 크누트를 포함해 묻혀있는 유해들을 수습해 이장했다.
중세라고는 하나 국왕으로서는 꽤 이른 45세로 사망했기에 대제국이 분열되면서 크누트의 영광은 당대에 그치고 말았다. 슬하에 아들이 세 명 있었으나 세 아들 모두 20대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기 때문에 막내 아들인 하레크누드가 덴마크와 잉글랜드의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하레크누드 역시 자식 없이 사망하며 크누트 왕조는 단절되었고, 덴마크 왕위는 외조카 스벤이 물려받았다.
가족
아직 북유럽의 기독교화가 완전히 되지 않은 시대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일부다처제의 전통에 따라 왕비가 두 명이었다. 첫 번째 왕비는 잉글랜드 귀족인 노샘프턴의 엘프기푸(Ælfgifu)로 장남인 잉글랜드의 해럴드 1세와 차남인 노르웨이의 스베인을 낳았다.
두 번째 왕비는 애설레드 2세의 왕비였던 노르망디의 엠마로 3남인 덴마크의 하레크누드를 낳았다. 엠마와 애설레드 2세의 아들인 참회왕 에드워드는 이부동생인 하레크누드가 승하한 후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의 영어 이름 Canute에서 온 단어인 Canutism은 변화에 대해 끝까지 저항하려는 완고한 태도를 뜻하는데, 유래가 된 일화가 있다. 크누트가 신하들을 데리고 어느 바닷가에 갔는데, 파도가 밀려오는 곳에 왕좌를 놓고 앉아 파도에게 자신의 땅을 깎아내는 것을 꾸짖었고, 내 발과 옷을 적시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래도 파도는 계속 밀려왔고, 크누트는 이에 지상의 왕이 제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자연의 이치를 관장하는 신의 섭리에는 미치지 못함을 말하며 왕관을 벗어 십자가 위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이 일화는 사실 크누트가 신의 힘과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벌인 일종의 퍼포먼스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후대에 들어서는 이 일화가 곡해되어 마치 크누트가 파도를 멈추려 드는 정신병자처럼 해석되는 일도 왕왕 있다.
다만 크누트는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기독교도였다. 이는 조부인 하랄 1세 블로탄의 기독교 개종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하랄 1세가 아들인 스벤 트베스케그에게 패배해 독일로 망명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스벤이 북유럽 이교 신앙을 부활시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