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과학 Social Sciences/지리 Geography

칼리닌그라드, 깔리닌그라드, 러시아 영토, 발트해 항구 도시

Jobs 9 2024. 4. 7.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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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닌그라드(러시아어: Калининград [kəlʲɪnʲɪnˈɡrat], 독일어: Kaliningrad 칼리닌그라트, 깔리닌그라드

 

발트해 연안에 있는 도시이다. 칼리닌그라드주(북쪽은 리투아니아, 남쪽으로는 폴란드, 서쪽으로는 발트해에 접해 있다)의 주도이며, 발트해에 면한 항구 도시다. 

1256년에 건설된 이 도시는 튜튼기사단 국가,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였으며, 동프로이센의 주도(州都)로서 쾨니히스베르크(독일어: Königsberg [ˈkøːnɪçsbɛʁk, 러시아어: Кёнигсберг [ˈkʲɵnʲɪɡzbɛrk] 쿄닉스베르크로 불렸다.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는 독일 북동부 변경의 중요 도시였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프로이센의 북부 1/3 가량이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었다. 1946년에 소련의 정치인 미하일 칼리닌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인구는 43만 5천 명이다. 부동항으로 선박수리·기중기·차량·어류통조림 등의 제조, 펄프, 제지업 등이 있다.

역사
본래는 발트계의 프로이센인의 땅이었다. 1256년 보헤미아의 왕 오타카르 2세의 권고로 튜튼 기사단에 의하여 쾨니히스베르크 성(城)이 건설된 것이 이 도시의 시초였다. 한자 동맹에 속한 도시가 되었고, 1457년 튜튼 기사단의 본부가 세워졌으며, 1525년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알베르티나 대학교, 1900년경
1544년 프로이센의 알베르트 공에 의해 알베르티나 대학이 세워져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고, 1701년에 이 도시에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選諸候) 프리드리히 3세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로서 즉위식을 올렸다. 쾨니히스베르크는 프로이센 왕국이 성립되어 수도가 베를린이 되기 전까지 수도였으며, 베를린으로 왕국의 수도가 이전한 뒤에도 역대 프로이센 왕들은 이곳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이 도시가 속한 동프로이센은 폴란드 회랑(回廊)에 의해 독일 본토로부터 육로가 끊기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이 도시는 영국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역사적 건축 문화재 또한 많이 파괴되었다. 또한 1945년의 쾨니히스베르크 전투에 의해 도시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봄, 1940년 37만 명이던 도시의 인구는 5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 이들 독일인 주민들은 1948년까지 거의다 추방되었다. 

수학에서 '퀴니히스베르크의 다리'문제의 장소가 이 도시 중앙에 있다.

임마누엘 칸트의 묘가 이 도시에 있다.

소비에트 연방
1945년 이 도시는 소비에트 연방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되었으며, 이듬해 소련 최고소비에트 의장 미하일 칼리닌이 죽자 그의 이름을 따 칼리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독일인이 추방된 도시에는 러시아인이 이주해 들어왔다. 소련의 서단(西端)에 위치한 이 도시는 냉전시대에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했다. 발트 함대는 1950년대에 이 도시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칼리닌그라드는 폐쇄된 도시가 되었다. 

러시아

고립된 러시아 영토이자 러시아의 유일한 발트해 부동항인 칼리닌그라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인해 칼리닌그라드와 칼리닌그라드 주는 러시아 본토와 떨어진 고립된 지역이 되었다. 칼리닌그라드는 부동항(不凍港)이기 때문에 러시아 발트 함대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고 있다. 칼리닌그라드에 이웃한 국가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2004년에 유럽 연합에 가입하면서 칼리닌그라드는 유럽 연합에 둘러싸여 버렸다. 

최근에, 이곳의 일부 사람들은 러시아의 일부 도시(상트페테르부르크와 니즈니노브고로드, 트베리 등)가 소련 시절에 변경된 이름을 다시 옛 이름으로 환원한 것처럼, 칼리닌그라드는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사용된 이름이므로 다시 이 도시의 이름을 쾨니히스베르크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계속 사용된 이름인 칼리닌그라드는 적어도 몇 년 동안은 사용된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 이름은 계속 사용되고 있다. "쿄니크"(Kyonig,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를 줄인 러시아말)는 종종 이곳의 관광사들이 사용하기도 한다. 

지리
프레골랴 강이 칼리닌그라드 석호(潟湖)로 흘러드는 하구에 자리잡고 있다. 발티스크까지는 40km가 운하로 연결된다.

주요 관광지
쾨니히스베르크 성당. 뒤에 보이는 건물은 소비에트 하우스
쾨니히스베르크 성당
자크하임 문, 왕의 문 및 브란덴부르크 문
칼리닌그라드 동물원
소비에트 하우스 (쾨니히스베르크 성터에 지음)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
승리 광장 (시 중심부)
이마누엘 칸트 국립대학 (알베르티나 대학 터에 지음)
옛 요새들
주민 및 언어
본래 이 도시의 주민은 독일인이었으나 2차 대전 후 추방당하여, 지금은 대부분의 주민이 러시아인이다. 러시아인이 82%를 차지하고, 그다음으로 벨라루스인이 5%를, 우크라이나인이 4%를 점한다. 그 외에 1.4%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 3국 출신이고, 0.8%가 아르메니아인과 독일인, 0.5%가 타타르족과 유대인, 바슈키르족, 폴란드인이다. 주민들 대부분은 러시아어를 쓴다.

산업 및 경제
러시아의 유일한 발트해에 접한 부동항이자 해군기지, 산업·어업·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군사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주는 중무장된 지역이다.

 

 

 

 

7백년간 독일 영토, 2차 대전후 소련 땅…러시아 본토서 육로로 가려면 비자 받아야

유럽 발트해 연안에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사이에 러시아 영토가 있다. 이름하여 칼리닌그라드 주(Kaliningrad Oblast)다. 면적은 1만5천㎢으로 강원도 남한지역보다 약간 좁고, 인구는 94만명이다. 

이 땅은 원래 독일 땅이었다.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의 동프로이센 지역이었는데, 2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면서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역외영토이며, 비지(飛地 , exclave)가 된다.

이 땅의 개척자는 1255년 독일인들로 구성된 튜턴 기사단(Teutonic Knights)이었다. 당시 이름은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였고, 그후 프로이센의 영지가 되었으며, 700년 가까이 독일인들이 살았던 곳이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 1724~1804t)의 고향이기도 하다. 칸트는 평생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본 적이 없다.

1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고 리투아니아가 독립하면서 1923년 이 지역의 일부를 합병하기도 했지만, 1938년 나치가 다시 원대복귀 시켰다.

하지만 1944년 소비에트 군대가 이 지역에 진주하면서 이 일대를 차지했고, 1945년 8월 포츠담 합의에 의해 이 지역은 소련의 영토가 되었다. 소련은 쾨니히스베르크에 살던 독일인을 죽이거나 추방하고 그곳에 러시아인들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소련은 독일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공산당 간부인 미하일 칼리닌(Mikhail Kalinin)의 이름을 따 도시와 주의 이름을 칼리닌그라드로 바꾸었다.
 

칼리닌그라드는 발트해에서 유일하게 겨울에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이다. 2차 대전 직후 소련은 벨라루스,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연방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칼리닌그라드의 연결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91년 발트3국이 독립하고 벨라루스도 소련에서 이탈했지만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 영토로 남았다. 그런데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와 육로로 연결되는 지점이 없는 월경지(越境地)가 되었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벨라루스와 비자 없이 지나갈수 있도록 협정을 맺었다. 따라서 러시아 본토에서 칼리닌그라드로 육로로 이동하는데 제한이 없었다. 

하지만 폴란드와 라트비아가 2004년에 EU에 가입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셍겐조약(Schengen acquis)은 회원국 국민들에게는 역내에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지만 역외국가 국민에 대해 비자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 국민과 칼리닌그라드 주민들은 그 중간지대를 경유할 때 비자를 받아야 하게 되었다. 

칼리닌그라드의 경제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러시아가 영토 욕심이 나서 갖고는 있지만 이 월경지를 지원할 여력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러시아 국민들도 이 곳을 찾기 위해 비자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찾기가 힘들다. 군사적 지위도 약화되어 러시아의 주둔 병력이 줄어들어 군부대가 떨구는 효과도 사라지고 있다. 2017년 기준 1인당 소득은 7천 달러 수준으로 러시아인들의 평균치를 크게 밑돌고 있다. 

칼리닌그라드는 1991년에 러시아 역내의 독일인들의 이주를 받았다. 우선 볼가강 유역의 독일인과 카자흐스탄 독일인을 받았다. EU의 중심국인 독일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다. 2005년에는 쾨테르스베르크 성립 750주년 기념식을 열어 독일 관광객들을 유치했다. 

독일은 2차 대전 패전국으로 더 이상 칼리닌그라드를 요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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