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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崔忠獻), 무신정권, 교정별감

Jobs 9 2021. 5. 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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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에 이어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교정별감을 역임한 관리.무신집권자.

 

본관은 우봉(牛峰). 초명은 최난(崔鸞). 아버지는 상장군 최원호(崔元浩)이다.

 

음보(蔭補)로 양온령(良醞令)이 되었다가 1174년(명종 4)조위총(趙位寵)의 난 때 원수 기탁성(奇卓誠)의 휘하에서 용감히 싸워 별초도령(別抄都令)에 발탁되었으며, 뒤이어 섭장군(攝將軍)에 올랐다.

1196년에 아우 최충수(崔忠粹), 생질 박진재(朴晉材) 등과 함께 미타산(彌陀山) 별장에서 이의민(李義旼)을 제거하는 한편, 그 일당과 잔당으로 지목된 문무관(文武官)을 대량 학살 또는 귀양 보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적신(賊臣) 이의민이 일찍 시역(弑逆)의 죄(의종을 경주에서 살해한 죄)를 범하고 백성을 포학하게 침해하며 왕위를 엿보므로 신(臣) 등이 미워한 지가 오래였습니다. 이제 국가를 위하여 토벌하였으나 다만 일이 누설될까 두려워서 감히 명을 청하지 못하였으니 죽을죄입니다.”

또한, 아우 최충수와 함께 그 동안 누적되었던 폐정(弊政)의 개혁을 요구하는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올려 집권의 명분을 삼으려 하였다. 그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① 구기(拘忌)의 설을 믿어 새로 짓고 사용하기를 꺼리는 궁궐에 입어(入御)할 것, ② 중요하지 않은 벼슬아치를 도태시킬 것, ③ 대토지 소유자가 겸병한 공사전(公私田)을 문적(文籍)에 비추어 환원할 것, ④ 공사(公私) 조부(租賦)의 공정을 기하고 권세가의 백성들의 재산 침해를 금할 것, ⑤ 왕가의 제도(諸道) 공진(供進)주 01)을 금할 것, ⑥ 승려의 왕궁출입과 왕실의 민간에 대한 고리대업을 금할 것, ⑦ 염직(廉直)한 주·군리(州郡吏)를 채용할 것, ⑧ 조신(朝臣)들의 사치생활을 금할 것, ⑨ 비보사찰(裨補寺刹) 이외의 것을 삭거(削去)할 것, ⑩ 성대(省臺)의 기능을 바로잡을 것 등이다.

그리고 왕의 측근 50명을 추방한 뒤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197년에는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에 봉해졌고, 아버지 최원호에게는 봉의찬덕공신(奉議贊德功臣) 칭호와 수태위 문하시랑(守太尉門下侍郎)이 증직되었다. 그 해 9월에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국고를 낭비하자 왕을 창락궁(昌樂宮)에 유폐한 뒤 왕의 아우 평량공 왕민(平凉公 王旼: 神宗)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삼한대광대중대부 상장군(三韓大匡大中大夫上將軍)의 관직과 주국(柱國)의 작위를 주었고, 아버지에게는 영렬우성공신(英烈佑聖功臣)에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이 증직되었다. 이로써 최씨 독재정권이 확립되었다. 이 때 아우 최충수가 자기 딸을 태자(太子)의 비(妃)로 삼으려는 것을 만류하자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형을 치려하였다.

이에 박진재·노석숭(盧碩崇) 등과 함께 1,000여 명을 이끌고 나가 흥국사(興國寺) 남쪽에서 그 무리와 싸워 굴복시켰다. 최충수는 파평현(坡平縣) 금강사(金剛寺)에서 피살되었고, 그 해 최충헌은 추밀원지주사 지어사대사(樞密院知奏事知御史臺事)에 올랐다.

1198년(신종 1)에 만적(萬積)의 난을 평정하고, 그 이듬해 병부상서 지이부사(兵部尙書知吏部事)가 되어 문무관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그 해 황주목사(黃州牧使) 김준거(金俊琚) 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으며, 1200년에는 삼중대광 수태위 상주국(三重大匡守太尉上柱國)에 올랐다.

이 때 도방(都房)을 설치하여 문무관과 한량·군졸 중에서 월등하게 힘쎈 자를 선발, 6번(番)으로 나누고 교대로 자기 집에 숙식시키면서 신변을 보호하게 하였으며, 외부에 출입할 때는 6번을 합쳐 지키게 하였다. 1201년에 추밀원사 이 병부상서 어사대부(樞密院使吏兵部尙書御史大夫)가 되었고, 1202년에는 자기 집에 있으면서 문무관의 전주(銓注)주 02)를 행하였다.

이 때 왕은 아뢰는 대로 머리만 끄떡일 뿐이고, 전주를 맡은 이부와 병부의 판사(判事)도 정당(政堂)에 앉아 검열만 할 뿐이었다. 그해 수태부 참지정사 병부상서 판어사대사(守太傅參知政事兵部尙書判御史臺事)를 거쳐 1203년에는 중서시랑 평장사 이부상서 태자소사(中書侍郎平章事吏部尙書太子少師)가 되었다.

1204년 신종을 폐하고 태자(희종)를 옹립한 뒤, 벽상삼한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상장군 상주국 판병부어사대사 태자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上柱國判兵部御史臺事太子太師)에 올랐다. 왕은 최충헌을 특수한 예로써 대우하고 항상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불렀다.

1205년(희종 1)에 내장전(內莊田) 100결(結)이 하사되고, 특진우모일덕안사제세공신(特進訏謀逸德安社濟世功臣)의 호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으며, 진강군개국후(晉康郡開國侯)의 관작과 식읍(食邑) 3천호에 실봉 3백호를 받았다. 이듬해진강후(晉康侯)가 되고 흥녕부(興寧府)를 세웠다. 이때부터 궁궐을 출입함에 있어서 평시 의복을 입고 일산(日傘)을 받들고 시종하는 문객(門客)을 3,000여 명이나 거느렸다.

1207년(희종 3)에 진강공(晉康公)을 더하였다. 이 해에 자신에게 불만을 품어오던 생질 박진재를 백령진(白翎鎭)으로 귀양 보내고 박진재의 문객들도 대거 유배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이규보(李奎報)를 등용하여 무신정권으로 쇠퇴했던 문운(文運)의 진흥을 꾀하기도 하였다.

1209년에 청교역(靑郊驛)의 이(吏) 3인이 자기 부자(父子)를 살해하려 한 사실이 발각되자 영은관(迎恩館)에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고 그 무리를 숙청하였다. 이 교정도감은 그 뒤에도 인사·감찰·징세(徵稅) 등 국정 전반을 장악할 수 있는 최씨 정권의 최고기관으로 존속하였으며, 최충헌은 스스로 그 장(長)인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었다.

1211년에 내시낭중 왕준명(王濬明) 등의 계책으로 궁궐에서 죽을 뻔하였으나, 도방의 구출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 일로 왕을 폐위하여 강화(江華)로 내쫓고 한남공 왕정(漢南公 王貞: 康宗)을 즉위시켰다.

이듬해에는 흥녕부를 고쳐 진강부(晉康府)라 하였고, 자신은 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文經武緯嚮里措安功臣)에 봉해졌다. 1214년(고종 1)에 최충헌의 처 임씨(任氏)는 수성택주(綬成宅主), 왕씨(王氏)는 정화택주(靜和宅主)가 되었다. 1218년에 나이 70세가 되어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1219에는 고종이 왕씨(王氏) 성을 내려 주었다.

평가와 의의

무신정권 수립 이후 빈번해진 하층구조와 사원 세력에 의한 반란은 최충헌이 집권한 뒤에도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1198년에는 개성에서 만적의 난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에는 명주(溟州) 및 동경(東京)에서 도둑이 창궐해 주군(州郡)을 침범, 약탈하였다.

또한, 1200년에는 진주의 이(吏) 정방의(鄭方義)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금주(金州)에서는 잡족인(雜族人)이 난을 일으켜 호족을 죽였으며, 경주에서는 최대의(崔大義) 등이 난을 일으켰다.

1202년에는 탐라(耽羅)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경주에서는 별초군(別抄軍)이 난을 일으켰다. 이듬해에는 영주 부석사(浮石寺)와 대구 부인사(符仁寺)의 중들이 반란을 꾀하다가 잡혀 유배되었다. 1217년에는 흥왕사(興王寺)··홍원사(弘圓寺)·경복사(景福寺) 등의 중들이 최충헌을 살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이렇게 거듭되는 반란에 대해 강경책으로 토벌을 강행하는 한편, 관작(官爵)을 주거나 혹은 향(鄕)·소(所)·부곡(部曲) 등을 현(縣)으로 승격시켜 하층민을 달래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함으로써 강력한 집권체제를 수립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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