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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昌德宮)

Jobs 9 2022. 8. 29.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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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昌德宮)

사적 제122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199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창덕궁(昌德宮)의 역사적 배경】

이 궁은 태종이 즉위하여 한양천도 문제가 거론되면서부터 건립하기 시작한 이궁(離宮)으로 출발하였다. 이궁인 창덕궁은 태종 4년 10월 6일 왕명에 의하여 영건(營建)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공역은 이궁조성도감제조(離宮造成都監提調) 이직(李稷) 등의 설계와 감독으로 진행되었다.

이미 태조가 건립한 경복궁(景福宮)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이궁을 신축한 이유는 역시 풍수지리설의 견지에서 본궁에 대한 피방(避方)의 처소가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피방이란 흉을 피하여 길의 방향으로 잠시 자리를 옮긴다는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관념이다.

건설 중인 창덕궁의 역사(役事)를 돌아보고 준공도 되기 전에 이궁의 정전에서 청정(聽政)을 하기도 하였다. 이 궁이 준공된 것은 공사를 명한 지 만 1년이 지난 태종 5년 10월이었다.

개경으로부터 한양으로 천도한 지 10일 후인 10월 20일에 왕이 새로 단장된 신궁에 입어(入御)하게 되었으니 이 날은 바로 환도와 신궁의 낙성 축하가 서로 겹치는 격이 되어 한양 성내의 시민들은 경축의 기분으로 온통 충만되어 있었다.

정문은 돈화문(敦化門)으로 여기서 다시 인정문(仁政門)을 거치면 수조정전(受朝正殿)인 인정전(仁政殿)에 당도하는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이 이 곳에서 즉위하였다. 동쪽의 편전인 선정전(宣政殿)을 비롯하여 수십 채의 전각, 누정 등 건축물이 궐내에 산재해 있었고, 그 중의 대조전(大造殿)은 왕비가 거처하는 정당(政堂)으로서 역대 국왕 중 여기서 탄생하고 승하한 왕이 많았다.

창덕궁의 후원 약 62,000평이 지금의 이른바 비원(秘苑)으로 경복궁의 남성적 장려함에 비하여 창덕궁은 여성적인 섬세함을 자랑하고 있다. 창덕궁은 후원을 합하여 약 15만여 평으로 면적은 경복궁보다 넓으나 그 궁궐의 규모는 경복궁에 비할 수는 없었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에 화재를 입었으나 광해군초에 다시 중수되었다. 그 뒤로도 대소의 화재가 여러 번 일어났지만 그 때마다 곧 중수, 개축되어 전각의 수에는 증손(增損)이 심한 편이었다. 창덕궁은 고종이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하기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정궁으로 사용되어 국왕이 상주한 기간이 가장 길었던 궁궐이었다.

 

【창덕궁 연혁 개설】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이궁(離宮)으로 태종대에 창건되었다. 창건시의 궁은 큰 규모는 아니었으나 세조 때에 왕이 이 곳으로 이어(移御)하면서 궁역(宮域)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되었으며 광해군 때에 중요 전각(殿閣)이 복구되었다.

이후로 창덕궁은 정궁(正宮)이던 경복궁을 대신한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으로 조선 말기까지 사용되었으며 다사다난했던 역사의 무대가 되었다. 따라서 창덕궁은 잦은 피재(被災)와 재건이 반복되었는데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는 내전(內殿)이 모두 불타고 순조 때는 정전인 인정전(仁政殿)과 내전 일곽이 화재를 당하였고 금세기초에도 대조전(大造殿) 등 내전이 불에 탔었다. 그러나 이들 전각은 대개 피재 후 바로 복구되었는데 이는 창덕궁이 왕실의 왕궁으로 당시 어소(御所)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창덕궁은 창건 후 순조로이 궁성이 확장되다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전소되고 그 후 재건되고부터는 왕조의 정궁으로서 피재(避災)와 복구가 반복되어온 것이다. 이를 몇 차례의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 전기의 창덕궁 보수】

세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으나 바로 수리 중에 있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였으며 인정전의 개영을 마친 후에는 창덕궁내에 경연청(經筵廳)과 집현전(集賢殿), 장서각(藏書閣)을 새로 지었다. 인정전은 태종 말년에 개영하였으나 단종 때 또 한차례 개수가 있었다. 이 공사는 창덕궁의 전반적인 수리와 함께 시행되었는데 <단종실록>에는,

“창덕궁은 처음은 수보(修補)라고 말하였으나 일초일주(一礎一柱)를 모두 개(改)하고 인정전은 완고(完固)하여 잉구(仍舊)하여도 좋은데 진철(盡撤)하여 개(改)하니 말이 수보이지 모두 신작(新作)입니다.”

라고 하여 이 때 대대적인 개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 때에는 궁내 전각의 개명이 있었는데 조계청(朝啓廳)은 선정전, 후동별실(後東別室)은 소덕당(昭德堂), 후서별실은 보경당(寶慶堂), 정전은 양의전(兩儀殿), 동침실은 여일전(麗日殿), 서침실은 정월당(淨月堂), 누는 징광루(澄光樓), 동별실은 응복정(凝福亭), 서별실은 옥화당(玉華堂), 누하(樓下)는 광세전(廣世殿), 광연루 별실은 구현전(求賢殿)이라 하였다.

연산군대에 들어와 왕은 창덕궁내의 많은 전각의 개수를 명하였으며 특히 그의 재위말년에는 무리한 명을 내렸다. 그러나 실록에는 실제로 영건(營建)이 이루어진 건물에 대하여는 기록하지 않았다. 연산군이 공사를 명한 창덕궁내 전각을 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연산군 2년에 대조전의 중수, 수문당의 개작(改作), 대조전 전랑(前廊)의 개작을 명하였다. 이 때 중신들은 공역을 벌이지 말 것을 요청하였고 왕은 대조전이 당(堂)은 낮고 낭(廊)은 높아 집에 바람이 통하지 않음을 이유로 중수를 주장하였으나 공사의 착수 여부는 미상이다.

연산군은 재위 말기인 연산군 8년 이후로 왕명에 반대하는 신하는 모두 처형하는 폭정을 하였는데 이 때 수많은 전각의 개조를 명하였던 것이다. 즉 연산군 8년 1월에는 선정전을 수리하도록 하고 돈화문에서 인정전까지 단청(丹靑)을 고치도록 하였으며 선정전 월랑(月廊)의 수리를 명하였다. 연산군 9년에는 금호문(金虎門)과 서행랑(西行廊)의 병문(屛門)을 고쳐세워 높고 크게 하도록 했고 이듬해에는 연영문(延英門)을 고치고 선인문(宣仁門)에서 숙장문(肅章門)까지 어로(御路)를 만들도록 하였다. 연산군 11년에는 인정전과 선정전을 모두 청와(靑瓦)로 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말년은 국정이 극도로 혼란한 때였으며 연산군 11년에 반정(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그가 벌인 공사가 모두 중지되었으므로 연산군 말년에 명한 창덕궁내 조영은 대부분이 실현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창덕궁의 외전(外殿)】

창덕궁(昌德宮)은 태종 5년에 창건된 이래 근 500년 간 왕조역사의 주무대가 되어 왔던 만큼 전각에 많은 변개(變改)가 있어 왔다. 그러나 정전(正殿)을 중심한 궁의 기본 건물들의 위치는 큰 변화없이 제자리를 지켰고 이에 따라 전각의 배치도 기본적으로는 창건 이래의 모습을 현재까지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창덕궁은 창건 때 경복궁(景福宮)의 동쪽으로 당시의 향교동(鄕校洞)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따라서 동궐(東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 지세는 경복궁과 같은 넓은 평지가 아니고 뒤로 구릉을 두고 전방에도 낮은 언덕이 있고 좌우로 평지가 열린 모양으로 대지의 서변(西邊)으로는 북에서 작은 개천이 남으로 흘러 청계천으로 모아진다. 이와 같은 대지의 형세에 따라 전각의 배치도 경복궁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즉 경복궁이 전조후침(前朝後寢) 즉 전면에 외전의 정전(正殿) 일곽(一廓)을 두고 후면에 침전(寢殿)이 배치되는 것과는 달리 창덕궁에서는 지세에 적절히 대응하여 전각을 배치시켰던 것이다.

창덕궁의 기본적인 배치 형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궁의 정문은 대지의 서남우(西南隅)에 남향하여 있고 정문을 들어서서는 일단 우측으로 꺾이어 나아가다가 다시 좌측으로 꺾인 곳에 정전 일곽이 남향하여 자리잡게 되며 정전의 동편에 편전(便殿)이 놓인다. 침전은 편전의 동북방에 자리잡고 있으며 침전 일곽의 북으로는 구릉이 있어 전각이 더 이상 뻗어 나갈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정전의 서측은 개천에 연(沿)하여 각종 궁사(宮舍)가 있고 편전 및 침전의 전방의 낮은 언덕에 면하여 동서로 역시 궁사가 길게 뻗어 있다. 이와 같이 창덕궁은 그 배치에 있어서 전후 관계를 뚜렷이 하거나 대칭을 중시하지 않고 각 전각의 기능에 맞추어 자연 지세(地勢)에 따라 자연스러운 형태를 취하였던 것이다.

창덕궁은 이러한 기본적인 배치를 준수하면서 임진왜란 때의 피재(被災)를 비롯하여 수차례의 화재와 재건을 거치면서 부분적으로는 전각의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각 시대에 따른 부분적인 변화에 대하여 자세한 상고(詳考)는 불가능하나 현재로서는 <동궐도(東闕圖)> <동궐도형(東闕圖形)> 및 <궁궐지(宮闕志)> 등을 통하여 조선 후기 순조대 이후의 배치에 대하여 만은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그 중 <동궐도>는 순조 26년(1826)경에 편찬된 것이며 <동궐도형>은 순조 30년의 내전의 대화재 이후의 것으로 그 사이의 변모가 자세히 드러난다. 이제 <동궐도>를 중심으로 순조 연간(年間)과 그 이후의 창덕궁의 전각 배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순조 연간의 창덕궁의 궁장(宮墻)은 남으로는 정문인 돈화문에서 출발하여 현재 종묘 뒷면의 작은 언덕을 따라 이어지고 그 동단(東端)은 창경궁에 연결되며 서변의 궁장은 작은 개천의 밖으로 개천을 따라 북으로 뻗었으며 궁장의 북방은 후원으로 되고 동은 창경궁에 닿아 있다. 돈화문을 들어서서 우절(右折)하면 금천교가 있고 다리를 건너면 진선문이 있다. 진선문의 좌우 행각(行閣)은 각 6칸으로 이 문을 들어서면 남쪽에 행각 39.5칸이 있어 내병조(內兵曹), 호위청(扈衛廳) 등이 들어 있다.

진선문(進善門)의 반대쪽으로는 숙장문(肅章門)이 있고 문 우측에 행각 13칸이 있다. 이 부분의 행각은 안으로 좁아진 방형(方形)의 공간을 형성하는데 그 북변이 인정문과 좌우 월랑(月廊)이 된다. 남향한 인정문을 들어서면 품관(品官) 표석(標石)이 남북으로 늘어서고 그 뒤로 월대(月臺) 위에 남향하여 정전(正殿)인 인정전(仁政殿)이 우뚝 자리잡고 있다. 인정전의 전정(前庭)은 모두 돌로 깔렸으며 전정을 둘러싸고 동서남방에 월랑이 있다.

인정전의 동쪽에 편전인 선정전이 역시 남향하여 있으며 4방에 행각이 있고 특히 남행각 중앙의 문에서 선정전 중앙 바로 앞까지 복도 4칸이 나 있다. 이와 같이 정문에서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을 지나 인정문을 거쳐 인정전과 선정전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창덕궁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외전(外殿)의 핵심이 된다.

이 밖에 외전을 형성하는 건물은 크게 보아 인정전의 서쪽 일대의 건물군과 인정전의 동남, 즉 선정전의 전면의 건물군이 있다. 인정전 서쪽에 있는 건물은 선왕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던 선원전(璿源殿)이며 어재실(御齋室)인 양지당과 양방ㆍ옥당 등이 계속되고 개천 건너에 수문장청(守門將廳)이 있다. 선정전의 전면은 대청ㆍ상서성ㆍ공상청 등의 궁사(宮舍)가 목자형(目字形)으로 구성되고 그 동쪽에 누상고ㆍ재은원ㆍ수자성과 내반원이 있다. 이 주변은 〈동궐도형〉에서는 상이한 부분이 많다.

대청ㆍ재은원이 있는 이 부분의 동쪽으로 계속하여 많은 전각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부분은 주로 동궁 즉 왕세자를 위한 건물이 많으며 후에 낙선재(樂善齋)가 그 끝부분에 지어졌다. 우선 재은원(載恩院)의 동쪽으로 춘궁주연지소(春宮冑筵之所)라고 한 성정각이 있고 그 남문인 영현문(迎賢門) 옆에 양성재(養性齋), 그 동쪽에 무예청, 그 남쪽에 장직소(將直所)ㆍ금위군번소(禁衛軍番所) 등이 있다. 성정각(誠正閣) 동쪽으로는 중희당이 있으며 <동궐도형(東闕圖形)>에는 중희당지 앞으로 승화루가 있고 그 남쪽으로 낙선재가 묘사되어 있다.

 

【창덕궁의 내전(內殿)】

창덕궁의 내전 중 정침(正寢), 즉 곤전정전인 대조전은 인정전의 동북방에 남향하여 있다. 그 동쪽에 흥복헌, 서쪽에 융경헌이 접하였으며 정면 중앙에 작은 월대(月臺)가 있고 그 남쪽에 선평문과 좌우 행각이 전정(前庭)을 둘러싸고 있다. 대조전의 남에는 희정당이 있다. 이 건물은 본래 침전이었으나 후에 편전으로 이용되었다. 대조전의 북쪽으로는 동서로 전각이 둘 있는데 서쪽은 2층

누각으로 상층이 징광루(澄光樓), 하층이 경훈각(景薰閣)이며 동쪽은 집상전(集祥殿)이다. 징광루에서는 숙종이 피서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집상전은 인선대비(仁宣大妃)를 봉한 곳이라고 <궁궐지(宮闕志)>에 기록되어 있다.

집상전은 대조전과 같은용마루가 없는 건물이었으나 피재(被災) 후 재건되지 않아 <동궐도형>에서는 빈터로 두었다. 경훈각과 집상전 사이는 후면의 경사지에 길게 화계(花階)를 꾸미고 괴석(怪石)과 화목(花木)을 꾸미어 조원(造苑)이 뛰어났던 곳으로 보이며 집상전 동편의 화계는 남쪽으로 연장되어 대조전ㆍ희정당이 동원(東苑)을 이루었다. 이들 침전 외에 창덕궁에는 내전에 속하는 건물로 순조 때 대왕대비의 어소(御所)로 지은 경복전(景福殿)과 효종 때 장열왕후(莊烈王后)를 위하여 지은 만수전(萬壽殿)이 있었다.

만수전은 인정전의 북쪽에 있었던 건물로 <동궐도>에도 이미 그 자취가 사라진 것이지만 효종이 이 곳에서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만수전을 지을 때 대신들은 태후의 처소는 대내(大內)의 동쪽에 있어야 하며 북쪽에 있는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하였으나 효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인정전 북쪽에 건립하였다. 만수전은 그 후 숙종 때 피재되었다. 경복전은 선원전의 북쪽에 있었으며 <동궐도>에는 기지(基址)만이 남아 있다.

이상은 주로 <동궐도>에 묘사된 순조 연간의 창덕궁의 주요 전각의 배치를 간략하게 적은 것이다. <동궐도형>의 그림과는 그 대부분이 일치하고 있으며 주변 행각들이나 궁사 등에 변동이 엿보일 따름이다. 그런데 창덕궁이 현재와 같이 크게 달라진 것은 일제 강점 이후의 일이다. 내전은 1917년에 피재되었다가 1920년 재건되면서 희정당 경훈각이 변조되었으며 그 이후 진선문과 주변 행각, 선정전 앞의 대청ㆍ내반원, 인정전 서쪽의 제 전각(殿閣), 성정각 전방의 궁사 등이 모두 철거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창덕궁 경훈각 삼선관파도(昌德宮 景薰閣 三仙觀波圖)】

등록문화제 제245호. 왕실이 후원한 미술교육기관인 서화미술원에서 교육받은 대표적 신진 화가인 이상범(李象範)에 의해 1920년경 제작되어 경훈각에 부착된 벽화로, 장승업(張承業) 이후 안중식이 이룬 반복적 형태의 산수화의 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형상의 표현과 기술묘사에 충실하여 화려한 구성을 담고 있다.

궁중 벽화로는 다른 5점과 더불어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으며, 단순한 장식이 아닌 전각의 기능과 연계되어 추락한 왕실의 안녕 및 권위의 회복, 왕실의 역량을 재확인하는 길상적,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어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있다.

 

【창덕궁 경훈각 조일선관도(昌德宮 景薰閣 朝日仙觀圖)】

등록문화재 제244호. 왕실이 후원한 미술교육기관인 서화미술원에서 교육받은 대표적 신진 화가인 노수현(盧壽鉉)에 의해 1920년경 제작되어 경훈각에 부착된 벽화로, 장승업(張承業) 이후 안중식이 이룬 반복적 형태의 산수화의 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형상의 표현과 기술묘사에 충실하여 화려한 구성을 담고 있다. 궁중 벽화로는 다른 5점과 더불어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으며, 단순한 장식이 아닌 전각의 기능과 연계되어 추락한 왕실의 안녕 및 권위의 회복, 왕실의 역량을 재확인하는 길상적,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어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있다.

 

【창덕궁 금천교(昌德宮 錦川橋)】

보물 제1762호.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위에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하여 궐내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태종 11년(1411)3월 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규모는 의장(儀杖)을 갖춘 국왕의 행차 때 노부(鹵簿)의 폭에 맞도록 설정되었으며, 상면은 길이12.9m, 너비 12.5m로 정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폭이 넓다. 구조는 하천 바닥의 중앙과 물가에 놓인 기반석을 토대로 홍예를 2개 튼 형식으로 물가의 축대는 부벽(扶壁)구실을 하고 있으며, 홍예 위에는 장대석 모양의 멍에돌을 얹었다. 다리의 상면은 불룩하게 곡면으로 만들고 바닥을 3칸으로 구분하여 칸마다 장대석을 고르게 깔았으며, 다리 가장자리에는 그 위에 동물상을 조각한 이주석이 세워져 있다.

난간은 머리 부분을 연화보주형(蓮花寶珠形)으로 장식한 법수와 그 사이에 세운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판석은 하엽동자기둥(荷葉童子柱)모양의 부조를 중심으로 2칸으로 분절되었고 칸마다 안상을 투각하여 놓았다. 법수 밑에는 멍엣돌 위치에서 돌출된 석재에 짐승머리모양을 환조(丸彫)로 조각하였다. 다리 측면의 홍예 사이 벽에는 귀면형(鬼面形)이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쪽의 홍예 기반석 위에는 남쪽에 해태상, 북쪽에 거북이상 등 환조로 만든 동물상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금천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며, 궁궐의 위험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각상과 아름다운 문양,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 기술 등이 돋보이는 이중 홍예교로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보물 제1764호.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맨 좌측에 낙선재가 크게 자리 잡고 그 우측으로 석복헌과 수강재가 연이어져 있으며, 이들 뒤편에는 화초ㆍ석물ㆍ꽃담 굴뚝 등으로 가꾸어진 아름다운 화계와 그 위의 꽃담 너머로는 상량정ㆍ한정당ㆍ취운정이 위치해 있다. 원래 왕의 연침공간 조성을 목적으로 낙선재가 지어지고 이듬해에 빈의 처소를 위하여 석복헌을 짓고 수강재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궁궐 안에 사대부주택형식으로 지은 건물로는 낙선재와 연경당뿐이다.

낙선재는 헌종 13년(1847)에 왕이 왕비와 대왕대비를 위해 마련하여 조선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하고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 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여사가 기거하였다. 낙선재는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나 석복헌과 수강재는 상당 부분이 변형되어 있다.

낙선재는 남행각에 나있는 정문인 장락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에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로 자리 잡고 그 좌측에 서행각이 남행각과 직교로 연접해 있다. 맨 좌측에 앞으로 돌출한 1칸이 주형 초석 위에 놓여 누마루가 되면서 시선을 끈다. 누마루 뒤로는 온돌방 1칸을 두고 그 우측으로 대청2칸, 온돌방 2칸, 다락방 1칸을 배열하였으며, 다락방 배면에도 흔치 않은 온돌방을 돌출되게 두었다. 2칸 대청과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가 시설되어 있고,건물 뒤에는 쪽마루가 길게 깔려 있어 공간 간 이동이 편리하다. 이 건물에는 궁궐의 권위와 위엄을 보여주는 수준 높은 다양한 문양의 창호들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누마루와 그 뒤 온돌방 사이의 만월문은 단연 돋보이는 백미로 누마루 공간의 위계를 읽게 한다.

구조양식은 잘 다듬은 화강석 바른 층 쌓기 한 기단 위에 방형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물익공 겹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물익공은 당초문양으로 세련되게 초각하고 보머리와 보아지도 같은 수법으로 품위 있게 장식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게 했다. 주간은 소로로 수장하고, 누마루의 머름대 아래에는 아름답게 초각한 낙양이 장식되어 있어 누 부분이 더욱 돋보인다. 상부가구는 몸채는 5량가, 누마루는 3량가로 가구하고 미려하게 다듬은 대량 위에 당초문양을 양각한 화려한 제형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했다.

낙선재는 궁궐 내의 침전건축과는 달리 단청을 하지 않고 사대부주택형식으로 건축되었으나, 궁궐침전형식이 응용되면서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문양의 장식이 특히 주목되며, 조선 후기 건축 장인(匠人)들의 축적된 기량을 엿볼 수 있어 건축적인 가치가 높다. 또한 조선왕가의 실제 침전으로 사용된 역사성도 중요한 건물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 단층 팔작기와지붕의 익공(翼工)집이다. 낙선재는 본래 창경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었으나 근래에 창덕궁에 속한 것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헌종 12년(1846)에 건립한 것으로 본 건물에 접속된 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 등 3개의 건물을 총칭하여 낙선재(樂善齋)라 부르고 있다.

정문은 장락당(長樂堂)으로 낙선재 남행각(南行閣) 12칸에 설치되었다. 이 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뒤로 낙선재가 있다. 정면 6칸 중 우측 한 칸이 전면으로 돌출되어 누마루가 되었고 몸채는 장대석 기단 위에 방형(方形) 초석과 기둥을 한 일반적인 주택풍으로 세워졌다. 즉 기둥 위 주두(柱頭) 위에 대량(大樑)을 걸고 그 틈에 도리를 얹었으며 창방(昌枋)과 도리받침장혀 사이에 소로를 끼웠고 창방머리는 초각(草刻)하였다. 누마루는 사다리꼴 높은 석주형(石柱形) 초석 위에 방주(方柱)를 세우고 머름창방 위에 사분합을 달았다. 누마루의 아래 분구(焚口) 있는 주변은 불규칙한 선의 모자이크 장식이 독특하며 주간의 문짝의 무늬가 다양하다. 집 뒤로는 큰 석재로 쌓아 만든 화계(花階)가 있고 굴뚝과 각 단의 꽃나무, 괴석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조원(造園)이 뛰어나다.

낙선재에 연접한 석복헌은 역시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안사랑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3급 장대석 기단에 계단이 둘 설치되어 있다. 사다리꼴 초석 위에 방주가 섰다. 전면의 주간에는 세장(細長)한 장지문이 달렸는데 그 중 중앙 1칸은 머름을 하여 낮고 문살 모양도 다른 문과 다르다. 건물 주위로 행각이 둘렸으며 밖으로 외행각(外行閣)이 나 있고 이것이 수강재에 이어진다. 수강재는 15칸 규모이며 5량 가구(架構)의 홑처마 단층기와지붕을 한 건물이다.

수강재 뒤로 장대석을 쌓은 높은 대(臺)가 있고 석계를 오르면 후원이 된다. 후원에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의 소박한 정자형(丁字形) 건물인 취운정(翠雲亭)이 있다. 정면은 중앙 2칸과 좌우 툇간 2칸으로 구성되었다. 측면도 중앙 1칸을 두고 전후에 퇴(退)를 두었다. 내진(內陣)에 방 2칸을 만들었으며 외진(外陣) 기둥 사이는 교란(交欄) 이 설치되었다. 이상의 건물구성에 대해 <궁궐지(宮闕誌).1908>에는,

‘樂善齋十七間半二間五樑有縣寶蘇柱八尺三寸樑通二間八尺式道里通六間八尺式前退四間’

에 이어 남행각, 서행각, 외행각을 적고, 그 북쪽에 '육우정즉평원루(六隅亭卽平遠樓)'가 있다고 하였다. 그 다음,

‘錫福軒十六間半二間五樑柱長八尺二寸樑通十兩尺前退四尺道里通六間八尺式後退四尺’

에 동행각, 서행각, 남행각, 중행각, 외행각과 그 동쪽으로,

‘壽康齋十五間二間五樑柱長八尺二寸樑通十兩尺前退四尺道里通六間八尺式後退四尺’

이며 그 북쪽에 취운정 6칸이 있고 주변에 행각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창덕궁 다래나무(昌德宮 다래나무)】

천연기념물 제251호. 다래나무는 덩굴나무로 중국, 일본과 우리나라의 깊은 산속 토질이 좋은 곳에서 잘 자란다. 잎은 타원형이며 봄에 돋아 가을에 떨어지고 꽃은 흰색으로 5월에 3∼10송이가 피며, 열매는 10월에 황록색으로 익는데 맛이 좋아 옛부터 우리민족이 즐겨 먹었다.

창덕궁의 다래나무는 나이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9m, 가슴높이의 둘레 15~18㎝이며, 6개 정도의 굵은 줄기가 사방으로 길게 뻗어 있다. 이 나무는 창덕궁 안에 있는 대보단 옆에서 자라며, 특별히 타고 올라갈 지지대 없이 이리저리 엉키면서 자라는 모습이 매우 독특하고 또 줄기의 껍질이 얇게 벗겨져 일어나는 점도 특이하다.

창덕궁의 다래나무는 창덕궁이 세워지기 전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우리나라의 다래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크다. 또한 궁궐 속에서 자라온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ㆍ보호하고 있다.

 

【창덕궁 대조전(昌德宮 大造殿)】

보물 제816호.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었다. 1917년 또 화재를 당하여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그 부재로 이곳에 옮겨지어 ‘대조전’이란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차례에 걸쳐 다시 지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 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대조전은 현재 36칸으로 앞면 9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가운데 3칸은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 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하여 현대적인 실내 장식을 보이고 있다.

【창덕궁 대조전 백학도(昌德宮 大造殿 白鶴圖)】

등록문화재 제243호. 왕실이 후원한 미술교육기관인 서화미술원에서 교육받은 대표적 신진 화가인 김은호(金殷鎬)에 의해 1920년경 제작되어 대조전에 부착된 벽화로, 채색 화조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형상의 표현과 기술묘사에 충실하여 화려한 구성을 담고 있다.

궁중 벽화로는 다른 5점과 더불어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으며, 단순한 장식이 아닌 전각의 기능과 연계되어 추락한 왕실의 안녕 및 권위의 회복, 왕실의 역량을 재확인하는 길상적,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어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있다.

 

【창덕궁 대조전 봉황도(鳳凰圖)】

등록문화재 제242호. 왕실이 후원한 미술교육기관인 서화미술원에서 교육받은 대표적 신진 화가인 오일영(吳一英)과 이용우(李用雨)에 의해 1920년경 제작되어 대조전에 부착된 벽화. 채색 화조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형상의 표현과 기술묘사에 충실한 그림이다.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돈화(敦化)’라는 말은 원래 중용에서 인용한 것으로 ‘공자의 덕을 크게는 임금의 덕에 비유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여기에서는 의미가 확장되어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 한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보물 제 383호인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1412년 5월에 세워졌으며, 1609년(광해원년)에 중수(重修)했다고 한다.

돈화문에는 원래 현판이 없다가 성종 때 서거정에게 분부하여 이름을 지어서 걸게 하였다. 2층 문루에는 종과 북이 있어 정오(正午)와 인정(人定), 파루(罷漏)에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정오를 알리기 위해 북을 치는데 이것을 오고(午鼓)라고 하며, 인정은 통행금지를 알리기 위해 28번 종을 치는 것이고, 파루는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기 위해 33번의 종을 치는 것을 말한다.

돈화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남향 건물이고, 좌우 협칸을 벽체로 막아 3문형식 이다. 중앙은 어문으로 왕의 전용 문이고, 좌우문은 당상관이상 높은 관료가 드나들던 문이지만, 3사(三司: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언관은 관직은 낮아도 좌우 문을 드나들게 한 특별한 혜택이 있었다.

 

보물 제383호.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우진각기와지붕의 다포(多包) 건물이다. 창덕궁의 정문으로 처음 창건된 것은 태종 12년 5월이었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이 문의 2층 문루(門樓)에는 15,000근의 대종(大鐘)을 걸었다고 한다. 문종 즉위년(1450)에 개구(改構)한 바 있으며 연산군 12년에는 돈화문의 개조(改造) 명(命)이 있었으나 실시 여부는 알 수 없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진(燒盡)되고 광해군 원년에 재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궁궐지(宮闕誌).1908>에는,

‘二層二間通五間內七包外五包柱長十六尺樑通十兩尺式道里通御間十七尺左右挾門十五尺式左右挾門 十兩尺五寸式’

이라고 하였다. 현존 건물은 본래 넓은 석계(石階)가 있는 장대석(長臺石) 기단(基壇) 위에 지어졌으나 지금 기단은 아스팔트 밑에 덮여 버렸다. 기둥은 전후측면에 12개의 평주(平柱)가 있고 중앙에 4개의 고주(高柱)가 있으며 상층은 12개의 병연주와 2개의 고주가 세워졌다. 공포(慊包)는 상하층이 모두 내3출목, 외2출목이고 외부는 삼제공(三提慊)이 중첩하고 그 위에 운각(雲刻)된 도리받침부재가 있다. 내부 공포는 행공첨차처럼 끝이 직절(直絶)하고 바닥을 굴렸으며 삼제공부터는 운궁(雲宮)처럼 되어 주간에서는 뻗어 올라가 천장에 이르렀고 보 아래에서는 보아지가 되어 대량(大樑)을 받았다.

하층 대량(大樑)은 좌우 2개의 고주에서는 2개의 고주몸에 합장(合掌)되고 중앙칸에서는 바로 건너질러 고주가 대량을 받게 하였다. 상층의 축부는 멍에창방 위로 중방목을 중첩하고 조그만 판문(板門)을 돌려 달았다. 판문 위로 창방(昌枋)이 짜여지고 그 위로 평방(平枋)이 놓여 공포(慊包)를 받았다. 대량은 우측칸에는 고주(高柱)에 주두(柱頭)가 놓여 지지되었으며 대량(大樑) 위에는 짧은 동자주(童子柱)를 놓아 중도리와 종량(宗樑)의 짜임을 받았다. 종량상에 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고 천장은 연등천장을 하였다. 처마는 겹처마,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두(龍頭)․잡상(雜像)을 배치하고 용마루 끝에는 취두(鷲頭)를 올렸고 사래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창덕궁 부용정(昌德宮 芙蓉亭)】

보물 제1763호. 창덕궁에서 후원으로 가는 길은 현재는 내의원으로 불리는 건물군을 왼쪽으로 끼고 담으로 좌우를 막은 통로를 이용하게 된다. 이 통로는 약간 오르막길로 되어 있으며 길은 좌측으로 꺾이면서 내리막길로 변하는데 그 지점에서 부용지 일대의 모습이 내려다보인다. 3면이 경사지이며 경사가 모이는 한가운데에 방형(方形)의 연못인 부용지가 있다. ‘부용(芙蓉)’은 ‘연꽃’을 뜻하는데,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방지(方池)이다. 동서 길이가 34.5m,남북 길이가 29.4m에 이르는 방형의 연못이다.

부용지의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연못은 장대석으로 쌓아올렸고, 남쪽 모서리에는 물고기 조각이 하나 있다. 잉어 한마리가 물 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새겼는데, 이것은 왕과 신하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빗댄 것이다.

이 연못의 남쪽 변에 부용정이 자리 잡고 있는데, 부용정의 남쪽은 낮은 언덕에 면하고 있다. 현판이 걸려 있는 동쪽이 건물의 정면인데, 이는 이곳의 지형이 남·북·서 삼면이 낮은 언덕으로 둘려있고, 동쪽만이 훤하게 트여 있기 때문이다.

건물주변을 보면 남쪽 언덕에는 3단의 화계(花階)를 설치하고 꽃을 심고 수석을 배치하여 정원을 꾸며 놓았으며, 북쪽 연못에는 가운데에 섬 하나를 쌓고 그 뒤로 높은 언덕에 어수문(魚水門)과 주합루(宙合樓)일곽이 보이도록 하였다. 주합루의 왼쪽으로는 서향각(書香閣)이 있으며 주합루의 뒤 2단의 석대 위에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이라는 편액의 작은 건물이 있다. 서향각의 뒤 높은 곳에 희우정이 있다. 연못의 서측에는 서정기비각(西井記碑閣)이 있다.

부용정은 궁궐지에 따르면 조선 숙종 33년(1707)에 이곳에 택수재(澤水齋)를 지었는데, 정조 때에 이를 고쳐 짓고 이름을 ‘부용정(芙蓉亭)’이라 바꾸었다고 한다.『동국여지비고』에는 “주합루 남쪽 연못가에 있다. 연못 안에 채색하고 비단 돛을 단 배가 있어, 정조 임금께서 꽃을 감상하고 고기를 낚던 곳이다”라고 하여 이곳에서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했으며, 신하들과 어울려 꽃을 즐기고 시를 읊기도 하였는데, 1795년 수원 화성을 다녀온 정조가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고 전한다. 기둥에는 이곳의 풍광을 읊은 시를 적은 주련(柱聯)10개가 걸려 있다.

부용정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누각으로 연못 남쪽 위에서 봤을 때 열 십(十)자 모양을 기본으로 구성되었으며, 남동과 남서쪽에 반칸을 덧대서 소통을 원활히 하였다. 남북 중심축을 기준으로 할 때 동쪽과 서쪽이 좌우대칭이다. 연못 안에 2개의 팔각 석주를 세운 다음 그 위에 가느다란 원기둥을 세우고 건물의 비례에 맞게 앙증맞은 2익공(二翼工)공포를 짜 올렸다. 정자안은 네 개의 방을 배치했는데, 배면의 방이 다른 방들보다 한 단계 높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이다.

외관을 보면 북쪽은 간결하고 남쪽은 화려한 형식을 취하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나타나며, 풍부한 형태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난간과 창호도 위치에 따라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난간은 평난간과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었는데, 특히 북쪽 연못 부분의 난간은 다른 곳보다 한단 높게 하여 변화를 주었다. 창호를 보면 외부 창은 연못으로 내민 부분에만 亞자살문을 달고, 그 밖의 다른 곳은 모두 띠살문 으로 하였으며, 들쇠에 매달면 사방으로 트이게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부에는 정자살문과 팔각형 교살창을 낸 불발기창을 두어 안팎 공간의 구분을 분명하게 하였다.

부용정은 창덕궁 후원 초입에 천원지방의 조형원리에 따라 조성한 대표적 연못인 부용지에 지은 마루식 정자로 연못에 인접하여 자연의 선경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풍류를 통해 수양을 하는 한국 정자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다. 열십(十)자 모양의 독특한 평면 형태, 공간구성, 건물의 장식 등이 뛰어난 비례와 대비로 건물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으로 보존가치가 높다.

【창덕궁 뽕나무(昌德宮 뽕나무)】

천연기념물 제471호. 창덕궁 뽕나무는 창덕궁의 관람지 입구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담 주위에 위치하며 나무높이 12.0m, 가슴높이 줄기둘레는 239.5㎝로 뽕나무로서는 보기 드문 노거수일 뿐만 아니라 창덕궁 내 뽕나무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수형이 단정하고 아름답다.

예로부터 조선은 농본사회로 ‘농상(農桑)’이라는 말에서 전하듯 농사와 함께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쳐 비단을 짜는 일은 조선시대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였다. 나라에서는 궁의 후원에 뽕나무를 심어 가꾸며 일반인들에게 양잠을 권장하였는데, 조선조 궁에 뽕나무를 심었다는 최초의 기록은 「태종실록」(태종 9년 3월 1일)으로 창덕궁 건립 후 태종 9년(1409) 중국 주(周)나라 성왕(成王)의 공상제도(公桑制度)를 본따 궁원(宮園)에 뽕나무를 심도록 명한 것이 공식적인 최초의 기록이다.

<태종실록> 외에 <성종실록>에도 왕이 승정원에 양잠의 중요성을 말하며 후원에 뽕나무를 식재토록 하고, 후원에서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고 인간에게 처음으로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는 양잠의 신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를 지내는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양잠은 예로부터 나라의 귀중한 산업으로 왕실에서는 뽕나무를 매우 중요시 여겼왔다. 1911년, 창덕궁 후원 주합루 좌측 서향각에서 조선총독부가 양잠소로 만들고 친잠례를 거행하였으며, 주합루에서도 1925년 6월 17일, 1929년 6월 15일, 1939년 6월 26일 친잠례가 거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기록처럼 창덕궁 뽕나무는 친잠례 거행 등 궁궐 역사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수목으로 우리가 보호 관리하여야 할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큰 소중한 문화재이다.

【창덕궁 선원전(昌德宮 璿源殿)】

보물 제817호. 선원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궁궐 밖으로는 종묘를 두었고, 궁 안에는 선원전을 두었다고 한다. 원래 춘휘전이었던 건물을 조선 효종 7년(1656) 광덕궁의 경화당을 옮겨지어 사용하다가, 숙종 21년(1695)에 선원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에는 숙종ㆍ영조ㆍ정조ㆍ순조ㆍ익종ㆍ헌종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 1921년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왕의 초상을 옮긴 뒤부터 구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새로 지은 선원전에 옮긴 왕의 초상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되어 아쉬움을 더 한다. 구조적으로 간결하고 불필요한 장식을 꾸미지 않은 건물로, 조선시대 왕실 제사용 건물의 유례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창덕궁 선정전(昌德宮 宣政殿)】

보물 제814호. ‘선정(宣政)’이란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며, 선정전(宣政殿)은 임금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다. 편전이란 임금과 신하가 정치를 논하고, 유교경전과 역사를 공부하는 곳을 말하며,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는 것을 ‘상참(常參)’이라고 한다. 상참에 참여할 수 있는 신하는 3품의 당상관 이상이다.

이처럼 그 용도가 매우 중요해서인지 다른 전각들과 달리 지붕도 청색 유리기와로 덮은 청기와인데 이 기법은 중국에서 도입한 것으로 ‘회회청(回回靑)’이라는 비싼 안료를 외국에서 수입하여 청기와를 구웠다고 하며, 선정전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집이다. 지금의 선정전(宣政殿)은 인조 25년(1647)에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에 세웠던 ‘인경궁(仁慶宮)’의 광정전을 헐어다가 중건한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목조건물이다.

선정전에서 임금과 신하가 국사를 논할 때에는 사관이 임금의 좌우에서 회의내용을 기록했으며 이를 사초(史草)라고 한다. 사초를 토대로 선왕이 죽은 뒤 새로운 왕이 실록을 편찬하는데 이것이 현재의 조선왕조실록이며 473년간의 분량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창덕궁 연경당(昌德宮 演慶堂)】

보물 제1770호. 주합루와 영화당 구역을 감싸고 있는 작은 능선을 지나면 골짜기에 연경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 환경은 아름다운 숲과 연못 및 정자 등이 어우러져 이상적인 경관을 이루고 있다. 우측의 솟을 대문인 장양문은 사랑채로 통하고, 이 문을 지나 사랑마당에 들어서면 좌측에는 안마당과 사랑마당을 경계 짓는 담장이 꺾여 있으며 담장 가운데에 문인 정추문이 있다. 그리고 좌측의 평대문은 안채로 통하는 수인문이다.

사랑채와 안채가 담으로 구분되어 있기는 하나 한번 꺾여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전체 공간구성은 서로 연결된 만(卍)자 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경당이란 이름은 원래 사랑채를 가리킨 것이었으나 지금은 이 건물들을 통틀어 연경당이라 부르고 있다. 사랑채의 오른편으로는 서재 구실을 하는 선향재가 위치해 있으며, 선향재 뒤편의 경사진 언덕에는 화계를 설치하고 제일 높은 곳에 농수정을 배치하였다.

‘연경(演慶)’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 <궁궐지>에는 순조 28년에 총 120칸으로 건립하였다고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비고>, <한경지략>에는 순조 27년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한 잔치를 베풀고자 1827~8년(순조 27~8)경 지은 효심이 담긴 집이다. 창건 직후 연경당에서는 효명세자가 신하를 접견하거나 진작례를 거행하였다. 헌종 대 이후에는 익종(효명세자)의 어진과 모훈을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다가 1857년(철종 8)에 터가 서늘하고 습하다는 이유로 익종의 초상화를 다른 곳으로 옮겨 한 동안 빈 집으로 남아 있었다. 그 후 고종 대에 이르러 외국 공사를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중요한 정치 공간으로 이용하였다.

사랑채 건물은 장대석기단 위로 사다리꼴의 초석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평주 위에는 장여가 도리를 받고 있는 굴도리집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안채는 납도리로 되어 있으나 사랑채는 굴도리로 되어있다는 점과 안채, 사랑채 모두 각기둥을 사용했다는 점으로 조선시대의 남녀유별과 가옥규제에 대한 법령을 충실히 따랐음을 볼 수 있다.

사랑채 평면은 정면6칸, 측면2칸으로서 맨 우측에 누마루가 있고 가운데 4칸은 툇간을 개방하였는데, 4칸 중 우측2칸이 대청이고 좌측2칸이 방이다. 그리고 안채에서 뻗어 나온 온돌방 2칸은 이 마루 뒤로해서 사랑방에 1칸이 연결되어 있다. 안방의 서쪽과 뒤편으로는 사랑채까지 쪽마루가 연결되어 있어 사랑채에서 안채로 갈 수 있게 되어 있고, 이 경계부분에는 판문을 달아서 개폐할 수 있게 하였다. 평면구성에 있어서는 왼쪽 끝에 누 1칸이 있으며 전면에 반 칸의 툇마루가 대청에 나 있다.

연경당은 건물배치와 공간구성 등에서 당시의 유교적 철학이 적용된 궁궐 내 사대부 집으로 당시의 주택과 비교해 볼 수 있는 한국주택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궁전의 조영법식과 기술력으로 건축되어 세련되면서 단아한 세부양식이 궁궐건축 고유의 품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연경당은 조선시대 궁궐 내 사대부 건축으로서 그 가치가 뛰어나다.

【창덕궁 인정문(昌德宮 仁政門)】

보물 제813호.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가장 소박하게 꾸몄다.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

국보 제225호.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이다. ‘인정(仁政)’은 ‘어진정치’라는 뜻이며,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法殿)이 된다. 법전은 왕의 즉위식을 비롯하여 결혼식, 세자책봉식 그리고 문무백관의 하례식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 때의 중요한 건물이다. 광해군 때 중건된 이후 순조 3년(1803)에 일어난 화재로 인한 재건, 그리고 철종 8년(1857년)에 보수공사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의 넓은 마당은 조회가 있었던 뜰이란 뜻으로 조정(朝廷)이라고 부른다. 삼도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은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로 문무관으로 각각 18품계를 새겼다. 그러나 정(正)4품부터는 종(從)을 함께 포함시켰으므로 정1품에서 시작하여 정9품으로 끝나며 각각 동, 서로 12개씩 있다.

정조 때 조정의 위계질서가 문란해졌다고 하여 신하의 품계에 따른 비석을 세우게 된 것인데, 3품 이상을 당상관(堂上官)이라하고, 3품 이하를 당하관(堂下官)이라 한다. 품계석에 맞추어 동편에는 문관, 서편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서는데, 문관은 동쪽에 위치하므로 동반, 무관은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반이라 하였으며 이를 합쳐서 조선시대의 상류 계급인 양반이 된다. 문무관은 임금님을 향해 바라보는 게 아니라 문관은 무관을, 무관은 문관을 서로 마주보며 종렬로 서게 되는데 임금님께 절을 하라고 “배(拜)-”하는 구령이 떨어지면 홀을 든채 국궁배례하며 서있는 채로 마주보며 절을 하고, 이것을 ‘곡배(曲拜)’라고 부른다.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ㆍ서ㆍ남ㆍ북ㆍ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 이것은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온 것이며,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참고로 5대궁 중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곳은 1887년 경복궁이다.

【창덕궁 주합루(昌德宮 宙合樓)】

보물 제1769호. 창덕궁 후원에 부용지와 부용정, 영화당, 주합루가 있는데 이 중에서 북쪽에 주합루가 위치하고 있다. 주합루 주변은 3단의 화계(花階)에 정원을 꾸며 놓았으며, 화계 첫 단에는 어수문(魚水門)을 두고 주합루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은 임금을 물에, 신하들은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져 있다. 어수문은 임금이, 그 옆 작은 문(협문)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창덕궁 주합루(昌德宮宙合樓)는 정조 즉위년(1776) 창덕궁 후원에 어제·어필을 보관할 목적으로 건립한 2층 건물이다. 기단은 네벌대의 장대석을 바른층 쌓기하고 맨 위의 갑석에는 쇠시리를 넣어 마무리하였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건물로 기둥은 모두 상하층 통주로 사용하였고, 사방을 외부 기둥에서 1칸씩 물려서 퇴를 두었으며, 내부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하였다. 공포는 궁궐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되는 이익공으로 주두와 익공살미, 행공이 짜여지고 그 위에 재주두가 놓이며 운공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처마는 부연을 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으로 마감하였고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에는 용두를,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얹어 권위가 높은 건물임을 나타내고 있다. 

정조의 정책개발과 개혁정치, 조선 중기 문예부흥의 산실로서 정약용과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다양한 인재들이 활동하던 중요한 공간이며, 정조가 지은 어제와 어필, 어진, 인장 등을 보관하였던 장소로 그 원형이 잘 남아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또한 건물은 경사진 높은 지형에 배치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으며, 1층은 왕실도서 보관에 적절한 퇴와 사분합 들문을 설치하였고 내부는 온돌을 두었다. 2층 열람실은 사방의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치하는 등 건물의 기능에 맞는 실 배분이 충실히 반영되었다. 이처럼 주합루는 역사적,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창덕궁 측우대(昌德宮 測雨臺)】

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昌德宮 測雨臺)는 조선시대에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올려 놓았던 대석(臺石)이다. 높이 30.3㎝, 가로 45.3, 세로 45.5㎝의 대리석으로 만든 이 측우대는 정조 6년(1782) 6월부터 7월 사이에 계속되는 가뭄에 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뜻을 하늘에 알리고 비를 기다리는 의식적인 의의를 담고 있다. 측우기는 한국전쟁 때 없어지고 현재 측우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대석의 4면에 새겨진 글에는 측우기의 제작 경위와 그 뜻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하고 있어 조선 기상학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측우기와 측우대는 영조 때 전국적인 정비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중앙이나 지방에서 제작되었다. 남아 있는 유물은 1782년에 제작한 측우대와 1811년의 측우대, 그리고 1837년의 측우기가 있다.

【창덕궁 향나무(昌德宮 향나무)】

천연기념물 제194호.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상나무ㆍ노송나무로도 불린다. 이 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도 쓰이며 정원수·공원수로 많이 심는다.

창덕궁의 향나무는 나이가 약 750살 정도로 추정되며, 2010년 태풍의 피해로 인해 손상은 되었지만, 뿌리부분 둘레 5.9m이다. 가지는 동서남북으로 1개씩 뻗어나갔는데 남쪽 가지는 잘라졌고, 북쪽 가지는 죽었으며, 동쪽 가지는 꼬불꼬불한 기형으로 자랐다. 나무의 모양은 마치 용(龍)이 하늘을 오르는 모습처럼 생겼다.

창덕궁의 향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창덕궁 회화나무군(昌德宮 회화나무群)】

천연기념물 제472호. 창덕궁 회화나무는 창덕궁 돈화문을 들어서자마자 관람로 양 옆에 나란히 자라고 있는 회화나무 8그루로 나무높이는 15.0~16.0m, 가슴높이 줄기직경은 90~178㎝에 이르는 노거수이다.

회화나무는 궁궐 입구에 특별한 사유를 가지고 심어 가꾸어 왔는데, 창덕궁 돈화문 주변은 궁궐의 삼조(三朝) 중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외조(外朝)의 공간에 해당되는 곳으로 궁궐 입구 주변에는 예로부터 중국 궁궐 건축의 기준이 되는 「주례(周禮)」에 따라 회화나무를 심었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외조(外朝)는 왕이 삼공(三公)과 고경대부(孤卿大夫) 및 여러 관료와 귀족들을 만나는 장소로서 이 중 삼공(三公)의 자리에는 회화나무(槐)를 심어 삼공(三公) 좌석의 표지(標識)로 삼았다고 하며, 이 때문에 회화나무는 삼공 위계(位階)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창덕궁 회화나무는 위와 같은 사유로 궁궐 앞에 심겨진 회화나무 중 남겨진 것으로 추정하며, 1820년대 중반에 제작된 <동궐도(東闕圖)>에도 노거수로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수령은 300~400여년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들 회화나무 8그루는 조선시대 궁궐의 배식 기준과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노거수로 판단된다.

【창덕궁 희정당(昌德宮 熙政堂)】

보물 제815호. 희정당은 본래 침전으로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부터 임금님의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건물을 지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연산군 2년(1496)에 수문당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어 이를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희정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몇 차례의 화재로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불에 탄 것을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1920년에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11칸·옆면 4칸으로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앞면 9칸·옆면 3칸을 거실로 하고 주위는 복도로 사용하였다. 앞면 9칸 중 3칸은 응접실이며 서쪽은 회의실로 꾸미고,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었다. 응접실에는 김규진의 금강산총석정절경도, 금강산 만물초승경도의 벽화가 걸려있다. 건물 앞쪽에는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이 생겼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게 설비되었다. 이는 마차나 자동차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채택된 서양식 구조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시대에 왕의 사무실과 외국 사신 등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하면서 한식과 서양식이 어우러진 건물로, 시대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창덕궁 희정당 금강산만물초승경도(彰德宮 熙政堂 金剛山萬物肖勝景圖)】

등록문화재 제241호.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에 의해 1920년경 제작되어 희정당 벽에 부착된 벽화. 금강산의 기세와 빼어난 절경을 전통 궁중화법과 근대적 화법을 절충하여 그린 그림이다.

【창덕궁 희정당 총석정절경도(彰德宮 熙政堂 叢石亭絶景圖)】

등록문화재 제240호.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에 의해 1920년경 제작되어 희정당 벽에 부착된 벽화. 금강산 총석정의 파노라믹한 승경을 전통 궁중화법에 근대적 화법을 절충하여 그린 그림이다.

(창덕궁 전경)

 

 

 

 

 

(금천교)

 

 

 

 

 

 

 

 

 

(낙선재)

 

(낙선재 후편 화계)

 

(낙선재 편액)

 

 

 

 

(대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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