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2세
Charles II
King Charles II ...
잉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 제3대 국왕
출생
1630년 5월 29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
사망
1685년 2월 6일 (향년 54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화이트홀 궁전
재위기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
1660년 5월 29일 ~ 1685년 2월 6일
스코틀랜드의 왕
1649년 1월 30일 ~ 1651년 9월 3일
잉글랜드 왕국의 왕. 1630년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와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딸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손위로 형이 있긴 했지만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죽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장남이었다. 동생으로는 제임스 2세, 여동생으로 네덜란드 총독 오라녀 공 빌럼 2세의 아내가 되는 프린세스 로열 메리와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아내가 되는 헨리에타 앤이 있다. 루이 14세의 고종사촌이다. 또한 피츠로이 가의 시조이기도 하다.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나 잉글랜드 국내가 위험해지자 어머니, 동생과 함께 1646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1648년에는 네덜란드로 가서 매제인 빌럼 2세의 지원을 받아 함대를 출항시켰으나 별다른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도로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1649년 아버지 찰스 1세가 의회군에 붙잡혀서 처형당하자 네덜란드 의회의 압력으로 프랑스로 옮겨갔다.
통치
1649년 2월 5일, 올리버 크롬웰의 혁명에 반대하던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찰스 2세를 왕으로 추대하자 찰스 2세는 이에 호응하여 6월 스코틀랜드에 상륙했고, 1651년 1월 1일 스콘에서 대관식을 받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 다음엔 스코틀랜드군과 잉글랜드 내의 왕당파들과 함께 크롬웰의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던바 전투, 우스터 전투에서 역으로 참패하였으며 크롬웰이 스코틀랜드까지 쳐들어와서 다시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크롬웰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프랑스에서 찰스 2세는 프랑스 국왕이자 외사촌 루이 14세가 주는 생활 보조금 600 리브르로 살아갔다. 찰스 2세는 프랑스에서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으려고 노력했으나 올리버 크롬웰이 워낙 잉글랜드에서 확고하게 정권을 잡고 있다보니 그의 생전에는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그러던 중에 1658년 올리버 크롬웰이 죽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호국경이 된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잉글랜드 내부의 반크롬웰파 세력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실각해 크롬웰의 잉글랜드 연방 공화정 정부가 몰락하여 1660년,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왕위에 올랐다. 크롬웰 독재 정권에 질릴대로 질린 잉글랜드의 백성들은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말을 타고 들어오는 찰스 2세를 보고는, 남녀노소 가릴 것없이 모두 환호했고 성당의 종까지 댕댕 쳐대며 "국왕 폐하 만세,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라고 소리치면서 그의 귀국을 환호했다.
왕위에 오른 찰스 2세는 1661년 찰스 1세 처형 12주년을 맞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올리버 크롬웰을 부관참시하여, 그의 머리를 참수하고 몸통을 네 조각내어 시가지에 걸어놓아 시신에게 온갖 수치를 당하게 했다. 크롬웰은 사망 당시 왕실이나 귀족 또는 명사들이 별세했을 때 쓰인 장례 예법대로 장기와 뇌를 꺼내고 약품에 절여 방부처리 되어 관에 봉안되었다고 하는데, 이 방부처리가 쓸데없이 잘 되어 있어 찰스 2세의 명령에 따라 시신을 효수하기 위해 머리를 자르는데 30번이나 내리쳐야 했다고 한다. 뒤이어 크롬웰의 추종자들 중 찰스 1세의 사형을 주도한 26명에게 줄줄이 교수형을 내렸다. 하지만 찰스 1세가 의회를 적으로 돌려 결국 처형됐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어 나머지에 대해서는 관용을 선택했다. 사형에 소극적이었으나 크롬웰에게 은혜를 입거나 해서 어쩔 수 없이 참여했거나 역할의 정도가 크지 않았거나 소속된 당이나 여론에 휩쓸려서 찰스 1세의 사형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찬성한 정치인들의 경우 사형시키지 않고 대부분 추방 혹은 징역을 잠시 내리는 선에서 끝났고 크롬웰파가 아니라 사형에 찬성하지 않았던 의원들은 아예 건드리지 않았다. 새 왕이 당연히 아버지의 원수들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여기면서 벌벌 떨던 사람들 상당수는 숨통이 트였고, 이렇게 사형을 피해간 사람들은 모두 석방 이후에 찰스 2세의 지지자가 되었다.
사실 찰스 2세는 전제군주제를 추구하여 의회와 대립하다가 잉글랜드 내전을 초래하여 목이 날아가버린 아버지 찰스 1세와 달리, 신중한 성격인터라 아버지처럼 할 경우 자신도 최소 추방이 기다린다는 걸 깨닫고 귀족층과 의회와 협의를 하며 통치를 했다. 물론 당시 잉글랜드 의회의 위세가 크롬웰의 독재 정치를 겪으면서 크게 실추되어 있었기에, 찰스 2세 역시 의회와 크게 갈등하여 의회를 압박하거나 해산하기도 했으나, 언제까지나 정치다툼의 일환일 뿐 이들을 배제시킨 적은 없었다. 즉 자신의 아버지이자 부왕이던 찰스 1세와 달리, 의회 세력들을 완전히 적대하거나 배척하지 않으며 왕실-의회와의 협력 체계를 유지했다.
1679년에 의회는 자유에 관한 중요한 법안인 '인신 보호 영장'을 통과시켰다. 한국어로 번역되기 전 원제는 Habeas Corpus Act이며, '몸을 가지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따온 것. 판사가 고소당했음을 명시하기 전에 죄수들이 영장을 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재판이 있기 전에는 죄수를 무기한으로 억류할 수 없게 하는 법안이었는데, 이로 인해 잉글랜드의 군주들은 단순히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간단히 감옥에 넣거나 사형시키는 등의 처벌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법안에 찰스 2세는 반발했으나 힘으로 할 경우엔 부왕의 전철을 밟을까봐 마지못해서 법안을 승인한다. 물론 찰스 2세도 가만 있지 않았고 자신에게 호의적이며 충성하는 사람들을 판사로 임명하여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벌할 때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결하도록 하는 등 법을 흔드는 걸 잊지 않았다.
재위 중 두 차례의 영란전쟁을 벌였으나 기습한 2차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었던 3차까지 모두 대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책에서는 크롬웰 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고 아버지이자 전 국왕인 찰스 1세와는 다르게, 귀족들과 협력하며 안정된 국정 운영을 했다며 잉글랜드 백성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의회가 원하던 대로 입헌군주제에 상당히 근접한 형태로 통치해야 했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크롬웰에 비해서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통치를 했기 때문에 이런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표면상으로는 잉글랜드 성공회 신자였으나 실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고, 실제로도 가톨릭 신앙을 몰래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가톨릭을 국교로 재도입하는 것과 같은 비현실적인 정책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으며, 몰래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던 사람들을 잡아죽이는 짓을 안 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죽기 직전에 가톨릭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죽기를 원해서 몰래 사제가 궁정에 들어와서 임종을 지켰다. 당시 비밀이었던 왕의 진짜 신앙을 알고 있었던 프랑스 출신의 애첩이 동생 제임스 2세를 통해 중개했다고 한다.
사적으로는 대단한 호색한이어서 보통은 한두 명 두는 로얄 미스트리스를 14명이나 둬서 궁중에서 정부들끼리 신경전이 벌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수많은 사생아를 두어 '국민의 아버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정말 농담이 아니라 찰스 2세의 사생아를 조상으로 둔 영국의 귀족과 상류층들은 현재까지 대를 이어 가문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크롬웰이 펼친 청교도적인 엄숙함에 짓눌려 있던 당시 잉글랜드 국민들은 오히려 이러한 호색적인 행각을 한편으로는 반겼다고 한다. 찰스 2세 본인도 자기 할아버지처럼 꽤 유쾌한 성격에 근본적으로는 선량한 성격이라 인기는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국정운영 방식은 할아버지 제임스 1세와 비슷했다. 유연성과 의회간의 협력적인 통치방식, 재위기간도 무난하게 보냈다는 점에서 특히 비슷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찰스의 동생이자 후임 국왕인 제임스 2세는 여러모로 아버지 찰스 1세와 비슷한데, 능력과 인품은 출중했지만 독선적인 국정운영방식 때문에 의회와 대립하여 의회의 쿠데타로 축출당했다는 점이다.
찰스 2세의 정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클리블랜드 여공작 바바라 팔머인데 다른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현장을 왕에게 몇 번이나 들키고도 무사했다. 심지어 그 와중에 태어난 아이를 왕이 자식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자 화이트 홀에서 아이의 머리를 박살내 죽이겠다고 협박해 찰스 2세의 인정과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렇게 총애를 받으면서도 돈을 받고 몸을 팔겠다고 나서는 등 제멋대로라 신하들은 품위 있는 마담 케루알 쪽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다만 마담 케루알은 프랑스 귀족 출신이라 국민들에게는 나라 팔아먹는 거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도 했고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국민들은 서민 출신에 성격이 솔직하고 화통한 넬 그윈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의 공주 카타리나와 결혼하여 왕비로 맞이했으나 왕비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고, 모두 사생아였다. 사생아 아들들 중 6명은 공작위를 받았고 그 중 4명의 가문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공작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식들은 모두 서자인터라 잉글랜드 왕실의 엄격한 왕위 계승법으로 인해 결코 왕세자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유언에 따른 후계자는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였고 찰스 2세 사후 제임스 2세로 왕위를 물려받는다. 그러나 찰스 2세의 사생아 중 장남인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은 이에 불만을 품고는 왕위를 요구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고 처형되기도 했다.
한편 카타리나가 잉글랜드에 올 때 시동생되는 제임스 2세가 맞이하러 나갔는데 이때 그녀가 "차 한 잔 주시겠어요?"라는 말을 건넸다. 당시 포르투갈은 해외 식민지의 부로 왕실이 부유했고 사치품인 차를 넉넉하게 마실 수 있었던 것을 보여준 사례. 한편 당시 잉글랜드는 차 문화가 널리 퍼지기 전이었고 또 값비싼 사치품이었다.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아 왕립학회를 왕명으로 공인하였으며, 이후에도 계속 후원했다. 연금술에 관심이 많아 이 때문에 사망했다는 이야기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수은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아이작 뉴턴과 동시대 사람이다.
제임스는 가톨릭교도였는데, 토리당은 그를 지지했고 장로파였던 휘그당은 반대했는데 사실 휘그당이 생기게 된 계기가 바로 제임스 2세를 반대하기 위해 모인 일이었다. 전자는 영국 보수당의, 후자는 영국 자유민주당의 조상 격 되는 당파들이다.
재임 기간 중에는 1678년 가톨릭 교도 음모 날조 사건도 있었다. 전직 예수회 사제였던 타이터스 오츠(Titus Oates, 1649~1705)는 가톨릭 교도들이 찰스 2세를 암살한 뒤 동생 요크 공작 제임스를 즉위시키고 이후 장로파 등 개신교 신자들을 학살한다는 음모를 알아냈다고 주장했다. 이를 당시에는 '교황의 음모(Popish Plot)'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매카시즘 수준의 광풍이 불어서 곳곳에서 가톨릭 교도에 대한 린치가 발생했고, 제임스 본인도 3년간 스코틀랜드로 쫒겨나다시피 떠나야 했다. 하지만 이후 오츠의 주장은 날조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난리를 일으킨 장본인 오츠는 내란 선동 및 허위사실유포죄로 길거리에서 묶여진 채로, 사람들에게 욕설과 침과 달걀 세례를 당하고 채찍으로 맞는 등 온갖 모욕을 당한 뒤 거액의 벌금과 종신형을 받았다. 그나마 찰스 2세의 사후 명예혁명이 일어나면서 석방되었고 연금도 받았지만, 남은 평생을 거짓말쟁이 오츠라는 비웃음과 놀림을 당하며 숨어살아야 했다.
취미가 설계였다고 한다. 하루는 그가 설계한 함선의 진수식이 있어서 참석한 와중에 옆에 있던 시종장에게 "어떠하냐? 짐은 함선 설계자로서도 손색이 없지 않느냐?"로 물으니 옆의 시종장이 대답하기를 "본업보다 훌륭하십니다."라고 했다.
1685년 찰스 2세가 사망한 이후 국왕의 이름으로서 찰스라는 이름은 거의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쓰이지 않다가, 2022년에 찰스 3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왕정복고
1642년 영국 내전으로 올리버 크롬웰이 1649년 찰스 1세 국왕을 처형하고 왕정이 폐지되면서 크롬웰을 호국경으로 하는 잉글랜드 연방 정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크롬웰의 독재 체제였고 연극금지, 찬송가 외 노래 금지등 왕정시대보다 빡빡한 사회통제로 영국 국민들의 불만이 쌓이며 그나마 통제가 적었던 왕정을 그리워 하게 되었다. 크롬웰이 죽자 사후 그의 아들이었던 리처드가 호국경이 되었으나 리처드는 아버지와 달리 별 다른 정치력이 없었고 영국 국민들 역시 오랜 크롬웰의 통치에 진절머리를 내면서 영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에 스코틀랜드에 주둔 중이었던 조지 멍크 장군은 군부내 추종자들을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여 리처드와 정권내 나머지 크롬웰파 세력들을 제거하고, 런던에 들어와 임시 의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유럽에 망명 중이었던 찰스 1세의 차남 찰스 2세가 1660년 왕위에 오르면서 왕정이 다시 복고되었다. 게다가 당시 영국에는 오늘날 엄밀한 기준의 공화주의 세력 자체가 없었고, 크롬웰 정권은 부자세습을 한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왕정과 차이가 없었다. 찰스 1세의 폐위는 과거 휘그 사관에서 독재적 국왕과 민주적 의회 세력의 투쟁 결과로 미화됐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관점이 부정되고 두 세력 간의 투쟁을 보다 중립적으로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