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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眞興王), 신라 제24대(재위:540~576) 왕

Jobs9 2021. 5. 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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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신라의 제24대(재위:540~576) 왕.

 

재위 540∼576.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 지증왕의 손자로, 법흥왕의 아우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이며, 왕비는 박씨로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왕태후 김씨가 섭정하였다. 신라의 대외적 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킨 왕이다.

 

즉위 초에는 왕태후의 섭정을 받았으나 551년(진흥왕 12)에 개국(開國)이라고 연호를 바꾸고,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부터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전개하였다.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듬해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된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이렇게 확보된 한강 하류유역의 전초기지를 기반으로 그 해에 백제의 성왕과 연합해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유역을 탈환하였다.

진흥왕은 거칠부(居柒夫)를 비롯해 구진(仇珍)·비태(比台)·탐지(耽知)·비서(非西)·노부(奴夫)·서력부(西力夫)·비차부(比次夫)·미진부(未珍夫) 등 8명의 장군에게 명하여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게 하였다.

553년에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 하류유역의 전략적인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를 기습공격해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유역의 전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지역의 통치를 위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阿飡) 김무력(金武力)을 초대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유역을 탈취한 사건은 백제와 맺은 결혼동맹을 파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백제 성왕은 554년 대가야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管山城)전투에서 오히려 신주 군주 김무력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해 백제군은 거의 전멸되었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물적 자원의 획득 외에도 황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였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리하여 564년 이래 거의 매년 중국 남조의 진(陳)과 북조의 북제(北齊) 두 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외교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또한 법흥왕의 가야에 대한 정복사업을 계승해 낙동강유역에까지 정복의 손을 뻗쳤다. 555년에는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가 설치되었다.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전의 어느 시기에 아라가야(阿羅加耶)와 비화가야(非火加耶)지방이 신라에 의하여 점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산성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한 후에 백제와 연합했던 대가야는 사실상 신라에 복속된 처지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그런데 562년 백제의 신라공격에 힘입어 대가야가 신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므로, 이사부를 보내어 무력으로 정복하여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낙동강유역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565년에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여 가야지역 통치의 본거지로 삼는 동시에 백제에 대한 방어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 밖에도 동북방면으로 북상해 556년에 비열홀주(比烈忽州)를 설치하고 사찬(沙飡) 성종(成宗)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이 곳을 근거로 하여 568년 이전 어느 시기에는 함흥평야까지 진출한 듯하다.

이와 같은 고구려·백제·가야에 대한 활발한 정복사업의 결과로 신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창녕·북한산·황초령(黃草嶺)·마운령(磨雲嶺)에 있는 4개의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와 최근 발견된 단양의 적성비(赤城碑)가 말해주고 있다.

4개의 순수비 중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는 창녕비는 561년에, 함경남도 함흥군에 있는 황초령비와 이원군에 있는 마운령비는 568년에 각기 건립되었다. 그러나 북한산에 세워졌던 북한산비는 건립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진흥왕의 순수관경비는 새로이 신라 영역 내로 편입된 지역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확장된 영역을 확인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진흥왕은 이같은 정복활동뿐만 아니라 대내적인 정치에 있어서도 많은 치적을 남겼다. 545년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 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국사』편찬에 관계한 이사부와 거칠부가 모두 내물왕계(奈勿王系) 후예라는 점과 당시 왕족의 혈연의식이 상당히 고조되고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국사』에는 중고왕실(中古王室) 왕통(王統)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나아가 유교적인 정치이념에 입각해 왕자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겼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법흥왕대에 공인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 544년에 흥륜사(興輪寺)를 완성하고, 사람들이 출가해 봉불(奉佛)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549년에는 양(梁)나라에 유학하였던 승려 각덕(覺德)이 불사리(佛舍利)를 가지고 귀국하자,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에서 영접하게 하였다.

553년에는 월성(月城) 동쪽에 왕궁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자 왕궁을 고쳐서 불사(佛寺)로 삼고 566년에 황룡사(皇龍寺)를 완공하였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로서 이 곳에는 574년에 신라 최대의 불상인 장륙상(丈六像)이 주조되어 모셔져 있다. 황룡사가 완공되던 해에는 지원사(祗園寺)와 실제사(實際寺)도 준공되었다. 이렇게 신라왕실의 보호를 받는 불교는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함으로써 도성불교적(都城佛敎的)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외형적인 사찰건축 외에도 565년에는 승려 명관(明觀)이 불경 1,700여 권을 진(陳)나라에서, 576년에는 안홍법사(安弘法師)가 『능가승만경 愣伽勝槾經』 및 불사리를 수나라에서 각각 가져옴으로써 교리적인 발전의 기틀도 마련되었다. 또한 572년에는 7일 동안 팔관연회(八關筵會)를 외사(外寺)에서 열어 정복전쟁기간에 전사한 장병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이것은 신라 불교가 국가의 현실적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호국불교(護國佛敎)임을 나타낸 의식이었다.

이와 같이 진흥왕은 불교의 현실적 필요성을 절감하고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그 자신도 불교에 매료되어 만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의(僧衣)를 입고 법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여 여생을 마쳤다. 왕비도 이를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거처하다가 614년(진평왕 36)에 죽었다.

진흥왕대의 업적 중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화랑도(花郎徒)의 창설이다. 진흥왕은 576년에 종래부터 있어왔던 여성 중심의 원화(源花)를 폐지하고 남성 중심의 화랑도로 개편하였다. 기록상으로는 576년에 화랑도가 창설된 듯하지만, 실제로는 진흥왕 초기에 이미 화랑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562년 대가야 정벌에 큰 전공을 세운 사다함(斯多含)이 유명한 화랑이었다는데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진흥왕은 대내외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신라 중흥의 군주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내적으로는 국가의식과 대외적으로는 자주의식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독자적 연호를 3개나 사용할 수 있었다. 551년의 개국, 568년의 대창(大昌), 572년의 홍제(鴻濟)가 그것이다. 재위 37년만인 576년 43세로 죽었다.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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