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와 한나라를 통칭하여 진한제국이라고 하며, 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에서 중세 로마까지의 기간
진한제국과 로마제국은 둘 다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제국으로 역사에 큰 영향
진한제국 (秦漢帝国):
진나라 (秦国):
기원전 771년 주나라 제후국 시기에 등장하여 기원전 221년 최초로 중국을 통일
한나라 (汉朝):
진나라가 멸망한 후 기원전 206년 시작하여 동한이 멸망한 기원후 220년까지 지속
중국 역사에 큰 영향:
진나라는 통일 중국을 만들고, 한나라는 중화 문화를 발전시키고,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마제국 (罗马帝国):
고대 로마 (古代罗马):
기원전 753년 로마 왕국이 시작되어 기원후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
중세 로마 (中世罗马):
476년부터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
유럽 역사에 큰 영향:
로마제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뛰어난 법, 건축 기술을 바탕으로 유럽의 문화를 형성하고, 서양 문명의 근간
비슷한 점:
넓은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
진한제국과 로마제국은 모두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통치
통치 시스템:
진한제국은 법치주의와 중앙집권적 통치 시스템을 도입했고, 로마제국은 로마 공화정과 황제제라는 다양한 통치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문화 유산:
진한제국은 춘추 전국 시대에 영향을 받아 유교와 법가 철학이 발전하고, 로마제국은 그리스 문화와 법을 접수하여 고유한 문화를 형성했다.
다른 점:
문화적 차이:
진한제국은 유교, 법가 등 동양적인 문화가 발달했고, 로마제국은 그리스, 로마 문화를 바탕으로 서양 문화가 발달
멸망 원인:
진한제국은 내부 반란과 외부 침입으로 멸망했고, 로마제국은 내부 분열, 외세의 침입,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멸망
한(漢)나라와 로마제국의 비교
기원전후의 수백년간, 고대세계에는 두 개의 '초강대국'인 한나라와 로마제국이 병존하고 있었다.
기원전2세기에서 기원후2세기까지는 고대세계사상의 중요시기이다. 이전 100년간 유라시아대륙에는 풍운이 일었다. 마케도니아 알렉산더대왕의 제국,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인도통일, 중국 진나라의 짧은 흥성: 이 셋은 모두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 세 제국이 해체된 후, 서로는 지중해에서 동으로는 중국동해에 이르는 광활한 유라시아대륙은 어떻게 세계질서를 새로 세울 것인지의 이슈에 직면하게 된다.
한나라(서한과 동한)는 기원전3세기말에 흥성하여, 기원후3세기초에 멸망한다. 중국을 약 400년간 통치한다. 거의 동시에 로마제국이 흥기하고, 점차 지중해문명지역을 장악하며, 대제국을 건설한다. 기원3세기부터 쇠퇴하여 467년에 노르만의 침입으로 멸망한다.
한나라는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했다. 서한과 동시에 흥기한 흉노제국은 한나라를 위협했을 뿐아니라, 하서주랑의 서역각족을 위협했다. 월지는 이들의 위협하에 서쪽으로 이주하고, 이는 중앙아시아 셈족의 이주를 유발시키며, 결국 쿠샨왕조를 만든다. 한나라는 흉노와의 장기적이고 험난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기원1세기말, 북흉노는 서쪽으로 이주하고, 남흉노는 한나라에 귀부하여, 점차 농경생활로 전환한다. 북흉노는 동유럽까지 치고 들어가, 4세기말에 노르만의 대이동을 낳고, 결국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이끈다.
한나라와 로마제국의 비교
기원1세기 내지 2세기에 세계에는 로마, 파르티아(安息), 쿠샨, 한나라의 4대제국이 존재했다. 영토, 인구, 경제, 문화의 발전수준으로 보아, 로마제국과 한나라의 실력이 가장 컸고, 서로 비슷했다. 인구는 각각 5천만명이상이었다. 다른 두 제국은 이 둘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였다.
본문에서는 기원전후 수백년간 세계에 웅거했던 한나라와 로마제국이라는 두 초강대국을 비교해보자:
로마제국은 정복으로 만들어지고, 한나라는 통일로 만들어진다.
로마제국과 한나라는 모두 개척형이고 대외통상을 중시했다.
로마제국은 행성제(行省制)를 채택했고, 한나라는 군현제(郡縣制)를 채택했다
로마제국은 다민족다문화이고, 한나라는 한민족과 한문화가 절대우세를 점했다.
로마제국은 노르만등 이민족에 망했지만, 한나라는 흉노를 제압했다.
로마제국의 창건은 정복으로, 한나라의 창건은 통일로
한나라와 로마제국은 모두 전쟁과정에서 탄생한다. 다만 로마제국의 경우는 무력정복이라면, 한나라는 무력통일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로마제국의 광대한 판도는 로마공화국후기의 정복으로 확보한 영토를 기반으로 계속 확장하여 얻은 것이다. 일찌기 공화국전기에 로마는 하나의 도시국가로 성과 주위의 사람을 '공민'으로 불렀다. 그리고 패전후에 로마와 동맹을 맺은 라틴인과 이탈리아인들이 동맹자였다. 기원전227년에 시칠리아에 행성을 건립할 때 시칠리아인들을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공화국말기, 라틴인과 이탈리아인은 모두 로마공민권을 취득한다. 행성의 수도 대폭 증가한다. 로마제국이 정식 형성된 후에도, 공화국시기의 전통을 이어간다. 로마는 정복자이고, 법률상 로마공민이 국가권력의 ?이다. 행성의 신민은 피정복자이고, 행성은 '로마공민의 재산'이다. 행성의 도시는 왕왕 서로 다른 대우를 받았는데, 통상적으로 지방자치권을 누렸다. 행성 도시주민의 지위는 거의 동맹자에 상당하였다. 신민과 공민의 중간상태였다. 기원 1세기 내지 2세기에 로마공민권은 점차 행성의 더 많은 주민들에게 부여된다. 기원 3세기초, 로마제국의 경내의 모든 자유민은 공민권을 취득한다. 다만 이때 로마제국은 이미 군벌통치하에 있었고, 공민권은 이미 의미가 크지 않았고,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공민은 군에 입대하는 의무가 있었음).
한나라는 진나라의 계승자이다. 진시황이 6국을 멸망시킨 후, 진나라백성은 다른 6국의 백성들보다 높은 신분적인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진나라의 백성은 모두 '검수(黔首)'라고 불렀는데,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구분이 없었다. 한고조 유방은 원래 초(楚)나라 사람이고, 반란군을 이끌고 관중으로 들어가서 진나라를 멸망시킨다. 그리고 관중의 지지를 받아 동방의 항우를 패퇴시키고, 마침내 관중의 장안에서 건국한다. 유방은 초나라사람들을 '정복자'로 삼고, 진나라사람을 '피정복자'로 삼을 수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한나라의 경내에, 왕후귀족과 노예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편호제민(編戶齊民)'하였다. '편호'는 호적을 만들어 편입시키는 것이고, '제민'은 백성을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뜻이다. 편호제민은 로마공민처럼 참정특권을 갖지도 못했고, 로마행성신민들처럼 정치권리가 배제되지도 않았다. 한나라의 백성은 서로 다른 '작위(爵位)'를 받았다. 작위가 낮은 자는 민(民)이고 작위가 높으면 관리가 되었다. 절대다수의 작위가 있는 '제민'은 그저 '민'이었다. 그러나, 원칙상 작위는 단계가 있었고, '제민'에게도 개방도어 있었다. 그러므로, 한나라의 건립으로 각지의 편호제민은 통일된 것이고 정복당한 것이 아니었다.
로마제국과 한나라는 모두 개척형이고 대외통상을 중시했다.
로마제국은 그리스화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의 기초위에서 계속하여 외부로 확장했다(특히 지중해서부 카르타고등의 지역). 한나라도 진나라의 영토기반위에서 계속 외부로 확장했다(특히 서역지역)
고대에 동서간에는 중요한 상업도로가 있었다. 즉 '비단길(silk road)'이다. 이는 한나라와 로마제국의 교통명맥이었다. 기원전2세기이전에는 파미르고원의 서쪽은 길이 열렸으나, 파미르고원의 동쪽인 중국경내는 아직 개척되지 않았었다. 기원전 138년, 한무제의 명을 받들어, 장건이 월지국에 사신으로 가다가, 중간에 흉노에 붙잡혔다 기원전 126년에 비로소 귀환한다. 기원전 121년, 119년에 곽거병, 위청은 한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두 차례에 걸쳐 흉노를 대파하고, 하서주랑(河西走廊)을 확보하며, 흉노를 멀리 막북으로 쫓아보낸다. 이때 장건은 다시 명을 받아 오손국(오늘날 Balkash호수 동남쪽의 이리강 유역)에 사신으로 떠난다. 사마천의 <<사기>>는 장건의 두 차례에 걸친 사신행을 "착공(鑿空, 구멍뚫기)"라고 표현했다. 이는 바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건이 개척한 "비단길"의 동쪽부분은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두 갈래로 나뉜다. "옥문, 양관(돈황서쪽)에서 서역으로 나가는 길이 두 갈래이다. 선선(오늘날 신강 약강일대) 방남산(오늘날 아르긴산, 곤륜산), 북파(순착)강(두 산의 북쪽의 여러 강이라는 뜻임)으로 서쪽으로 가서, 사차(지금의 신강 사차)로 가는 남쪽길: 남쪽길은 서쪽으로 파미르고원을 넘어 즉 대월지, 파르티아로 간다. 차사의 앞에서 왕정(지금의 신강 투루판서쪽), 수북산(지금의 천산), 파하(지금의 타림강)으로 서쪽으로 가면, 수륵(지금의 신강 카슈카르시)에 이르는 북로가 된다: 북로는 서쪽으로 파미르고원을 넘어 대완(지금의 Farghana), 강거(지금의 Balkash호수와 아랄해의 사이), 엄채(지금의 아랄해와 카스피해의 중간쯤) 언기로 나간다. 이 두 갈래의 길은 모두 천산이남이다. 북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이북으로 타림강을 따라 서행하는 것이고, 남로는 타클라마칸사막의 남쪽으로 아르긴산, 곤륜산의 북록의 강물을 따라 서행하는 것이다. 장건이 처음 사신으로 갈 때는 흉노로부터 벗어나 대완, 강거, 대월지를 지나 대하(大夏)에 이르렀다. 그가 갔던 길은 <<한서. 지리지>>에서 말하는 북로이다. 돌아올 때는 '병남산'으로 왔다고 되어 있으니, <<한서. 지리지>>에서 말하는 남로임에 틀림없다. 두 길은 모두 장건이 연 것이다. 사실 이 두 길 외에 천산이북에도 또 하나의 길이 있다. 장건이 두번째 사신으로 나갈 때에는 내지에서 직접 오손으로 갔고, 오손에서 각각 부사를 나누어 대완, 강거, 월지, 대하로 보낸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다시 천산이북의 길을 하나 더 뚫었다. 다만, <<한서. 지리지>>에는 이 천산북로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동한시대에 반초가 서역을 경영했는데, 일찌기 기원97년에 감영을 대진(로마제국)에 보낸다. 감영은 파르티아서쪽까지 이르고, 강을 건너고자 하나(비잔틴을 향하여), 안식의 서쪽에 있는 뱃사람들에게 저지당하여 실현되지 못한다. 이는 한나라의 사신이 '비단길'을 따라 가장 서쪽까지 간 기록이다.
'비단길'이 개통된 후, 한나라의 비단은 대량으로 서방에 팔린다. 로마제국에서는 귀족들과 부호들이 옷과 장막용으로 많이 사용했다. 이외에 중국의 철기, 칠기등도 서방에 수출된다. 로마제국의 유리제품, 모직품, 인도의 보석, 향료등도 '비단길'을 통하여 한나라에 수입된다. 이외에 불교도 이 길을 따라 한나라때 중국에 유입된다. 동시에 유입된 것은 간다라미술이다.
육로이외에 <<한서. 지리지>>의 끝부분에는 한나라가 서방과 통한 '해상비단길'을 소개하고 있다. 이 해로는 아주 중요하다. 특히 육상 '비단길'이 막혔을 때는 그렇다. 예를 들어, 인도(천축)는 한화제때 여러차례에 걸쳐 사신을 육로로 중국에 보내는데, 동한후기에는 서역길이 끊긴다. 기원 159년, 161년에 인도사절은 해로로 바꾸어 중국으로 온다. 기원166년, 동로마제국의 사절이 동한제국을 방문한다. 역시 해상 '비단길'로 왔다.
한나라가 파견한 장건, 반초가 서역으로 가고, 동로마제국의 사신이 중국을 왔다. 중국과 서양은 육로와 해로의 두 '비단길'을 열었던 것이다. 중화문명과 서방문명이 교류를 시작하였으니 시대를 긋는 의미가 있다. 아쉽게도, 한나라와 로마제국이 모두 멸망한 이후, 중서방의 교통은 장기간 막히게 된다.
한나라의 군현제, 로마제국의 행성제
한나라와 로마제국은 모두 광활한 영토를 가진 대국이었으므로, 행정구역을 나눌 필요가 있었다. 로마는 행성제를 실시했고, 한나라는 군현제를 실시했다. 둘은 모두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지방을 통치하는 것이어서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구체적인 점에서는 양자간에 뚜렷한 차이도 있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군현제를 계승하여, 중앙이 지방을 직접 통치하는 일련의 행정시스템을 갖춘다. 군에는 군수(郡守, 나중에는 太守라 함)와 군의 관리 약간명을 두었다. 군의 아래에는 현(縣)을 두고, 큰 현에는 현령(縣令), 작은 현에는 현장(縣長)을 두었고, 각각의 현에도 관리를 약간명 두었다. 관리는 모두 국가가 임명한다. 그리고 제도에 따라 국고에서 봉급을 받는다(오수전과 양식). 현이하의 향(鄕)은 향의 삼로(三老)가 다스리는데, '삼로'는 지방관리가 현지백성중에서 선발한다. 명을 받아 현을 관리하고, 국가로부터 봉록을 받는다. 한나라때의 중국에는 자치 혹은 반자치의 도시는 없었다. 한무제이후, 제후왕국도 이름뿐이었다. 그저 서역과 같은 변방지역에서만 군현제가 시행되지 않았을 뿐이다.
로마제국에서는, 각 행성의 상황이 크게 차이가 있었다. 그들이 받는 대우도 서로 달랐다. 예를 들어, 시칠리아에 설치된 행성은 로마에서 총독을 한 명 파견하여 그 곳의 로마군대를 통솔했고, 그곳의 최고재판권을 장악했다. 이외에 2명의 재무관을 파견해서 재정세수를 담당했다. 총독과 재무관은 모두 매년 임명되고, 그들의 아래에는 일련의 관료조직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현지의 일은, 여전히 로마총독에 종속하는 각각의 소국이 스스로 관리했다. 행성의 로마제국에 대한 최대의 의무는 로마에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었다. 시칠리아는 거둔 금액의 1/10이었다. 또한 이집트는 황제의 개인재산으로 되어, 황제가 직접 총독을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총독과 재무관등 고급관리는 로마인이 맡았지만 사람수는 적었다. 그들은 그리스출신의 관리와 세금징수인을 두어 보조하게 하였다. 이집트인들의 원래 기구는 그대로 존속시켰다. 기원 1세기 내지 2세기때, 적지 않은 행성은 모두 자치 혹은 반자치의 도시를 둔다. 각각 크고 작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로마의 행성체계에서는 정도는 다르더라도, 지방자치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이렇게 하여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보면, 로마제국은 한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로마제국의 다민족다문화, 한나라의 한민족한문화 절대우세
로마제국과 한나라는 모두 다민족국가이다. 각각 1 민족이 정치적으로 주도적인 지위에 있었다. 이것은 양자간에 비슷한 점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을 보면, 양대국은 민족구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로마족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로마족은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이다. 이탈리아인은 언어, 경제와 문화적으로 로마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공동으로 천하를 정복한 핵심역량이다. 그리스인은 로마문화의 선구자이다. 그리고 일정한 사회적인 지위가 있다. 로마인은 이탈리아인과 그리스인 이외의 신민을 '야만족'이라고 불렀다. 로마민족은 제국통치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점한다. 그러나, 열세에 처한 부분도 있었다. 먼저, 그들은 로마제국에서의 인구비율이 소수였다. 한 추측에 의하면, 전체로마제국의 인구는 약 5400만이며, 그중 로마족은 600만이라는 것이다. 겨우 1/9을 점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로마제국에서, 유구한 문화전통을 지닌 동부각족이 있고, 걸출한 문화공헌을 한 그리스족이 있다. 로마족 자체는 법학에서 공헌을 한 것을 제외하면, 문화적인 면에서는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하물며, 제국의 '로마화' 정도도 그다지 심화되지 못했다. 제국의 동부는 그리스어를 통용했으니, 그리스화한 지역이다. 서부는 라틴어를 통용했으니, 로마화지역이다. 또한 동부, 서부를 불문하고, 라틴어 혹은 그리스어는 정부와 도시에서나 통용되었고, 농촌에서는 여전히 각지의 현지언어를 사용했다. 로마제국은 문화적으로 통일되어 있지 못했으며, 결국 서(라틴어지역)와 동(그리스어지역)의 큰 두 조각 및 그외 일부 작은 조각들로 갈라진다.
한나라는 한족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족은 선진시기의 화하족(華夏族)과 이적(夷狄)각족이 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원래 중원지구는 화족과 이족이 섞여서 하는 현상이 보편적이었고, 춘추시대까지는 화족과 이족간의 풍속이 서로 달랐고, 언어도 서로 통하지 않는 곤란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들어, 화족과 이족의 구별이 중원지구에서 기본적으로 사라졌다. 예를 들어, 중산국(中山國)은 원래 이족의 하나인 선우인(鮮虞人)이 건립한 ㄳ인데, 하북 평산에서 발견된 전국시대 중산왕묘의 명문을 보면, 그들은 화하족과 이미 차이가 없게 되었다. 화이의 교류와 융합으로 형성된 민족공동체가 한나라에 이르러 합쳐서 "한인(漢人)"으로 불리게 된다. 한나라에서 한족은 총인구의 대다수를 점유한다. <<한서. 지리지>>에 다르면 기원2년(평제 원시2년)의 전국인구총수는 59,594,978명이고, 여기에는 각군,국의 인구수가 나와 있다. 중원한족거주인 각군의 인구총합계는 한족과 소수민족이 혼거하는 변방지역의 인구총수보다 훨씬 많다. 게다가 서한초기에 일찌기 북방을 위협했던 흉노를 보더라도 그들의 총인구는 한나라의 군(郡) 하나만도 못했다고 하고 있다. 나중에 남흉노가 한나라에 귀부하여 한나라의 중요한 소수민족의 하나로 되었는데, 총인구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적었다. 한족인구는 한나라의 절대다수를 점했고, 이러한 점에서 로마제국과는 차이가 있다.
한족은 인구적으로 국가의 주체일 뿐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국가의 주류였다. 선진의 찬란한 문화와 한나라의 문화는 일맥으로 전승되어 온 것이다. 한무제는 유가학설을 정통으로 확립하고, 사상 통일로 국가를 통일시켰다. 이는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이 하지 못한 일이다.
서로마제국은 노르만족에 멸망당하나, 한나라는 흉노를 제압했다.
로마시대의 세계 3국(로마, 중국, 제3 세계 국)
로마시대라 함은 로마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지중해를 지배했던 시대를 말한다. 지중해는 오늘날의 세계가 대두되는 과정에서 그 어떤 바다보다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한 바다이다. 지중해는 서쪽으로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대서양과 연결되어있고 동쪽으로는 인도양의 두 군데 후미(홍해와 페르시아 만)와 거의 맞닿아 있다. 지중해에서 이스탄불을 통해 연결되어 있는 흑해는 아시아 내륙까지 뻗어 있고, 지중해의 두 바다는 이탈리아 양옆을 지나 눈 덮인 유럽 알프스의 산자락 근처까지 뻗어 있다. 로마시대의 지중해는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등을 하나로 이어주었다. 지중해는 바다가 길고도 폭이 좁았으며 깊은 만이 여러 개 있었기에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나라가 넓은 지역을 호령할 수 있었다.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로마인이 실제로 지중해를 그런 용도로 사용했다.
로마시대에는 세계가 3국, 즉 로마, 중국, 제3 세계 국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로마는 일곱 개의 언덕 위에 세워졌지만, 초기만 해도 그 모든 언덕에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도시 자체가 너무 작았기에 그렇게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군주 한 명이 이 소도시와 인근의 작은 영토를 다스렸지만, B.C. 509년에 이르러 토지를 소유한 여러 가문이 득세하면서 이후 거의 5세기 동안 공화국이 지속되었다.
그리스인은 바다를 자연적인 도로로 사용했지만, 로마인은 자신들만의 도로를 육지에 만들었다. B.C. 312년에 로마의 공학자들은 최초의 동맥을 만들기 시작했다. 최초 건설 당시 로마의 도로는 훗날 자동차 시대의 유럽 고속도로보다 훨씬 뛰어난 수준이었다. 급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특사가 도로로 오갔는데 홍수나 폭설 등과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지 않는 한, 마차는 대체로 시간을 엄수했다.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도로를 통해 보낸 메시지는 해로로 보낸 메시지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 로마의 도로망을 따라 기수, 군인, 상인, 노예, 모험을 좇는 젊은이들이 오고 갔다. 로마를 중심으로 모든 도로가 주변국들로 퍼져나갔다.
중국에도 로마에 못지않은 큰 도시가 있었지만, 로마는 10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한 사상 최초의 도시였다. 산자락에서 계속 흘러내린 물이 아치 형태의 긴 다리를 통해 도시까지 수로로 연결되어 공중목욕탕과 수많은 가정의 물동이 및 주전자를 채웠다. 로마 시에만 무려 800개의 공중목욕탕이 있었다고 한다. 로마가 패망한 이유 중의 하나로 공중목욕탕이 많았다는 사실을 꼽는데, 이것은 확증되지 못하고 있다.
로마는 공화국으로 시작했으며, 당시에는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공유했다. 나중에는 이탈리아에 거주하며 선거권을 지닌 시민 유권자가 무려 1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국가의 수장조차도 비밀선거로 선출했다. 로마의 넓은 영토에다가 계속 확장되는 제국을 통치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고, 새로운 세금을 징수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늘어만 가는 군 복무 기간을 시민군으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기에 용병을 고용하거나 심지어 노예까지도 병사로 모집했다.
병사들은 로마가 아니라 직속상관인 장군을 향해 충성을 바쳤다. 누군가가 대단한 승리를 거두거나 대중 사이에서 너무 큰 인기를 누릴 경우에는 현재 권력을 쥐고 있는 민간 지도자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위협이 되었다. 로마의 지속적인 정치적 긴장 상태를 해결할 방법으로 황제 제도를 도입하여 B.C. 63년에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황제로 등극했다. 공화정에서 군주정으로 이행하는 과정에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덕분에 로마 제국에는 새로운 안정이 깃들었다. 제국은 이미 확보한 영토를 보유하면서 계속적으로 새로운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중국에서는 로마시대에 한나라가 진나라에 이어 강력한 통일국가로 부상했다. 한나라(서한과 동한)는 기원전 3세기 말에 흥성하여 약 400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고 기원후 3세기 초에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군현제를 계승하여 중앙이 지방을 직접 통치하는 일련의 행정 시스템을 갖췄다. 군에는 군수(郡守와 군의 관리 약간 명을 두었다. 군의 아래에는 현(縣)을 두고 큰 현에는 현령(縣令), 작은 현에는 현장(縣長)을 두었으며 각각의 현에도 관리를 약간 명 두었다. 관리는 모두 국가가 임명했다. 한나라 때의 중국에는 자치 혹은 반자치의 도시는 없었다.
중국 서부에서 흑해의 가장 가까운 항구까지 이어져있는 육로는 기원전부터 전 세계에서 가장 긴 길이었다. 이 길은 산맥과 고원, 돌 투성이 평야와 소금기 어린 사막을 지나고 개울과 협곡과 거대한 초원을 가로지르며 줄곧 이어졌다. 이 길을 오가는 상인들의 모습은 꾸준한 행진이기보다는 릴레이 경주에 가까웠다.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부자들은 중국의 비단옷을 매우 탐냈고,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비단을 생산하는 나라였다.
중국의 경제생활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여 워낙 앞서 있었고 다양했기 때문에, 서쪽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저 레바논과 이집트에서 만들어져서 교역로를 따라 아시아로 운송되는 우수한 유리 제품을 약간 얻는 데 만족했다. 비단길을 따라 운송되는 물품은 대황과 계피 같은 귀중한 약재도 포함되었고, 씨앗과 살아 있는 식물도 있었다. 복숭아나무와 배나무를 최초로 재배한 곳도 중국으로 추정되며, 이 두 나무는 A.D. 2세기가 지날 무렵 인도에도 도입되었다. 또한 오렌지가 처음 재배된 곳도 중국이었다.
중국인과 로마인의 사고방식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자신의 문명이 다른 어떤 문명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중국은 방대한 영토를 소유했다는 점이 로마와 비슷하고, 중국 황제는 여러 언어와 문화와 민족으로 이루어진 인민을 통치했다는 점이 로마 황제와 비슷했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다민족과 다문화였지만, 한나라에서는 한민족과 한문화가 절대 우세하였다. 또한, 로마제국은 한나라와 달리 지방자치제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로마시대의 제3 세계 국들은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로마제국의 라이벌로서 튀니지 해안의 카르타고는 기원전 814년에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세워졌다고 간주되지만 확실하지 않다. 시리아 지방에는 로마제국과 서아시아 패권을 다퉜던 파르티아가 있었다. 아시아 지역에는 B.C. 20년경부터 5세기 중엽까지 인도 북서부에서 중앙아시아를 지배한 쿠샨 왕조가 있었다. 로마시대 당시의 우리나라는 고조선 시대로서 다른 강대국들과 비교하여 강력한 군세를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로마시대에는 이들 국가 외에도 제3세계 국가들이 많이 존재했을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나라의 수는 소수에 불과하다.
진나라 vs 로마제국, 누가 이겼을까
진나라는 전국시대 나라 중 기병을 활용한 전술이 가장 발달했다. 로마군단은 단검과 긴 창, 방패를 쓰는 보병이 강했다.
2500년 전 동서양 문화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요? ‘인간혁명’은 지난 두 차례에 걸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같은 시기에 세계 4대 성인인 소크라테스와 공자, 석가모니가 함께 활동을 했고, 또 동시에 정신문화의 꽃을 화려하게 피웠는지 말이죠.
먼저 그리스에선 BC 5세기 도시국가(폴리스)의 발달과 소피스트의 등장으로 인문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200여개의 폴리스가 선의의 경쟁을 통해 서로를 발전시키면서 생산력이 급증하고 ‘시민’이란 계급이 나타났죠. 시민은 인류 역사 최초로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하면서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런 시민을 키우는 소피스트의 등장은 학문과 사상의 다양성이 꽃을 피우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같은 시기 중국에선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졌습니다. 농업혁신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기존에 없던 새로운 계층이 생겨났죠. 바로 ‘사(士)’의 등장입니다. 중국 역사에 처음으로 나타난 ‘지식인’ 집단으로 제후의 통치를 돕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의 선생이 되기도 했습니다. 바로 ‘제자백가’입니다. 유가, 법가, 도가 등 동아시아 철학과 사상의 원류가 이 때 모두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이처럼 동서양 모두 같은 시기에 소피스트와 ‘사(士)’ 같은 지식인 계층이 등장할 수 있던 건 당시 일어난 기술혁신 때문입니다. 농사에서 철제 농기구가 확산되고 ‘우경(牛耕·소를 농사에 이용하는 것)’이 시작된 거였죠. 이전 시대의 청동기로는 불가능했던 농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생산력이 급증하고 단순히 ‘먹고 사는 것’을 넘어 세계의 근원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활동이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동서양은 또 다시 비슷한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제국의 등장입니다. 동양에선 진(秦)나라가, 서양에선 로마제국이 출현합니다. 150~200개의 작은 나라들이 경쟁을 하던 시대가 끝나고 하나의 거대 왕조가 들어선 것이죠.
십보일살(十步一殺)의 협객, 진왕을 노리다
사마천(司馬遷, BC 145년 ~ 86년)이 지은 ‘사기(史記)’에는 ‘자객열전’이 나옵니다. 사마천은 20세 때부터 중국 전역을 돌며 자료를 수집하고 태사령이 돼 국가의 장서를 섭렵했죠. 그는 황제와 제후의 이야기뿐 아니라 이들을 암살하려 했던 자객의 이야기까지 따로 묶었습니다. 그중 으뜸은 진시황을 죽이려 했던 형가(荊軻, 미상 ~ BC 227년)의 이야기죠.
사마천 사기의 &39;자객열전&39; 86권에는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형가의 이야기가 자세히 소개돼 있다. 네이버
형가는 전국시대 말기 위(衛)나라 사람입니다. 진(秦)이 위(衛)를 멸하면서 연(燕)나라에 가서 살았습니다. 원래 무예에 출중했으나 나라 잃은 설움을 표현할 길 없던 그는 매일같이 술독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에겐 고점리(高漸離)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축(筑, 현악기의 일종)’을 잘 다루는 예술인이었습니다.
형가는 객잔에서 술을 마시고 취하기 일쑤였습니다. 그 때마다 고점리가 켜는 축의 선율에 맞춰 저잣거리 한 복판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습니다. 자신의 조국을 멸한 진(秦)을 비판하며 어지러운 시대를 한탄했죠. 이런 그의 행동은 마치 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펼쳐졌습니다. 훗날 형가의 이런 모습은 ‘방약무인(傍若無人)’이란 고사로 남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예와 음주가무 못지않게 학문이 깊었습니다. 연(燕)의 내로라하는 현인과 호걸이 그를 찾았죠. 그러던 어느 날 형가는 연(燕)의 왕으로부터 진(秦)의 왕 영정을 죽여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당시 진(秦)은 천하를 통일하기 직전이었고 진왕 영정은 아직 시황제로 등극하기 전이었습니다.
형가를 모티브로 한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영웅’에 나오는 것처럼 형가는 무림의 고수였습니다. 영화에선 이를 ‘십보일살(十步一殺)’이라고 표현했죠. 열 걸음 앞에만 있으면 누구든 한 번에 죽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형가는 천하를 피로 물들이는 진왕을 암살하기 위해 그와 교분이 두텁던 협객(俠客)들과 머리를 맞댑니다. 형가는 진왕을 죽이고 그 또한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다고 결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궁중의 무수한 호위무사를 뚫고 진왕에게 다가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마침 진왕은 과거 진(秦)의 장군이었던 번어기의 목을 가져온 사람에겐 십보(十步) 안에서 자신과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했습니다. 형가는 번어기를 찾아가 자신의 뜻을 설명했고, 번어기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목을 쳐 형가에게 바칩니다.
형가는 번어기의 목을 들고 진왕을 찾아갑니다. 크게 기뻐한 진왕은 온갖 환대를 하며 형가를 반깁니다. 진왕의 앞에 다가선 형가는 숨겨온 비수를 꺼내 진왕을 찌르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갑니다. 소년시절부터 전쟁에서 단련된 진왕 역시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던 거죠. 장이머우 감독은 ‘영웅’에서 왕궁에서 벌어지는 진왕과 형가의 싸움을 특유의 영상미로 담아냈습니다. 영화에선 두 사람의 수준 높은 무예 실력이 막상막하인 걸로 나오죠.
그러나 형가는 결국 무참히 살해되고 맙니다. 진노한 진왕은 죽은 형가의 시체를 참수에 처합니다. 이듬해인 BC 226년 진왕은 자신에게 자객을 보낸 연(燕)으로 쳐들어가 멸망시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형가의 암살 시도는 결국 진(秦)의 천하통일을 앞당긴 꼴이 됐습니다. 이후에도 몇 번의 암살 시도를 겪은 진왕은 갈수록 잔악하고 흉포해졌습니다.
영토와 사상까지 통일하려 했던 진(秦)
중국 최초로 통일을 이룬 진왕은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 칭합니다. 차이나(China)라는 중국의 영문명도 이때 유래했죠. 진시황은 전국시대까지 실시됐던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도입해 중국 전역을 황제의 직할 아래 둡니다. 강력한 병권과 법가 사상을 바탕으로 엄격하게 백성을 다스렸죠. 특히 나라마다 문화와 생활 방식이 달라 분쟁과 갈등이 생겼다고 생각한 진시황은 영토 뿐 아니라 사회·경제·문화적 통일을 시도합니다.
먼저 각 나라마다 다르게 쓰인 화폐를 모두 폐지하고 진(秦)이 만든 통일 화폐를 쓰도록 했습니다. 또 전국시대엔 각 지역마다 문자의 차이가 많았는데 진(秦)은 천하의 문자를 소전(小篆, 진시황 등극 이후 나라별로 다른 글씨체를 간소화해 만든 통일 서체)로 정하고 다른 문자는 모두 못 쓰게 했습니다. 이는 군현제 실시와 함께 중앙집권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죠.
아울러 도량형을 통일해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킵니다. 또 수레바퀴의 크기와 폭을 규정하고 도로까지 표준화 하죠. 이 때 만들어진 진(秦)의 표준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어진 중국 왕조의 기본 체제로 자리 잡습니다. 진(秦)에 이어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도 사실상 진시황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게 되죠.
그러나 넘치는 것은 늘 부족함만 못한 법이죠. 진시황의 통일 의지는 학문과 사상에까지 뻗칩니다. 과거 제자백가로 활동했던 선비들로부터 진(秦)의 정치·사회·문화 체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거였죠. 그 때 승상을 맡고 있던 이사(李斯, 미상 ~ BC 208년)가 과격한 제안을 합니다. 바로 분서갱유(焚書坑儒)입니다.
“봉건시대엔 제후들이 전쟁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지만 이제는 통일이 돼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 과거의 것만 옳다고 여겨 새로운 제도와 문화를 반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실생활에 필요한 의약, 농업 등에 대한 실용서적과 진(秦)의 역사서 외에는 모두 불태워 없애버리소서.”
진시황은 이사의 제안에 따라 천하의 책들을 모아 불태워 없애 버립니다. 당시는 아직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라 대나무로 만든 ‘죽간(竹簡)’에 글씨를 써 책을 만들었는데 이 때 없어진 희귀한 자료들이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이 일을 ‘분서(焚書)’라고 부르죠.
이듬해 진시황은 아방궁이 건립되자 불로장생을 연구하는 도인들을 불러 후하게 대접했는데 이중 몇몇이 진시황의 재물을 빼돌리고 종적을 감췄습니다. 이 일로 항간에는 진시황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죠. 그러자 진시황은 자신을 비방한 관리와 유생을 모두 잡아 산 채로 구덩이 파묻었는데, 그때 죽은 사람이 500명 가까이 됐습니다. 이를 ‘갱유(坑儒)’라고 합니다. 이처럼 진시황의 공포정치는 갈수록 심해졌고 형가처럼 그를 원수로 삼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무적군대 진나라 기병
하지만 진시황의 힘은 막강했죠. 불사를 꿈꿨던 그는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며 강력한 군사력과 중앙집권을 바탕으로 중국 전역을 통치합니다. 통일 직전까지 진(秦)의 군대는 우는 아이도 멈추게 할 만큼 무서웠습니다. 다른 6개의 나라가 범접하기 힘들만큼 용맹하고 강력했던 것입니다.
진나라의 군대는 탄탄한 조직력과 엄격한 군기를 바탕으로 적군을 제압했습니다. 중국 시안의 진시황 무덤에서 발견된 실물 크기의 병마용 8000개는 당시 진(秦)이 군사국가로서 얼마나 큰 위용을 자랑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로 침략전쟁을 펼치다보니 진(秦)의 군대는 공성전(攻城戰)에 능했습니다. 상대 진영은 성을 사수하고 방어하기에 바빴습니다. 진(秦)의 군대는 1m 간격으로 병사들이 대열을 형성해 성을 에워싸고 전투를 펼칩니다. 그 덕분에 성벽을 타고 오르는데 필요한 운제(雲梯)나 성벽을 부수기 위한 충차(衝車) 같은 무기들이 발달했습니다. 운제는 구름까지 갈 만큼 높이 오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활과 같은 원거리 무기도 발달합니다. 특히 병사 개인 무기인 궁과 달리 일종의 기계식 활인 ‘노(弩)’라는 무기가 많이 쓰였습니다. 진나라는 1개조별로 수십개의 활을 쏠 수 있는 ‘노(弩)’ 부대가 따로 있었죠. 영화를 보면 비가 내리듯 활을 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이 ‘노(弩)’였습니다.
발달한 무기와 함께 군사의 전의를 높이는 진(秦)의 군공작(軍功爵) 제도는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는 핵심 비결 중 하나였습니다. 바로 군사적 공로에 따라 작위를 주는 것이었죠. 전쟁에서 세운 공로에 따라 복식과 토지 등을 분배했고 공로가 큰 이들은 가족이 법을 어겨도 면제를 해줬습니다. 반면 군영에서 이탈하면 그 옆 사람까지 처벌하는 엄격한 기강을 설립해 서로를 견제하게 했죠.
또 진(秦) 뿐 아니라 전국시대의 모든 나라들은 잦은 전쟁을 겪어야 했기에 각종 병법서가 발달했습니다. 오기의 ‘오자(吳子)’, 손빈의 ‘손자(孫子)’, ‘사마양저’의 ‘사마법(司馬法)’ 같은 전문서적이 많이 간행됐죠. 넓은 평야에 모여 백병전투를 벌이는 싸움뿐만 아니라 기상천외한 전술과 전략을 다루면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게 됐죠.
진나라와 로마제국이 맞붙는다면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상상을 해봅니다. 만일 비슷한 시기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던 로마와 진(秦)이 맞붙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말이죠. 도시국가로 시작한 로마는 BC 2세기 영토를 대폭 넓히며 제국의 기틀을 다집니다. 특히 그 유명한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맞서 싸운 포에니 전쟁을 통해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죠.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0년 ~ 44년) 같은 걸출한 영웅들이 출현하면서 ‘팍스 로마나’를 일굽니다. 로마의 영토는 북쪽으로는 현재 영국 영토의 중북부까지, 유럽 대륙에서는 라인강을 시작으로 북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국경선을 긋습니다.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인근까지 뻗어가며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리비아 등 북부 아프리카에 이릅니다. 서쪽에는 오늘날 스페인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를 로마제국에 편입하면서 ‘팍스 로마나’를 이룹니다.
로마가 이처럼 거대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던 건 ‘로마군단(Legion)’이라고 불리는 무적의 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단의 규모는 적게는 3000~4000명에서 많게는 6000~7000명까지 다양했습니다. 로마제국 전성기에는 이런 군단이 수십개가 존재했죠. 각각의 군단은 중무장을 한 보병이 군단의 주축을 이뤘고 기병이 이를 지원했습니다.
중장보병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길이가 50cm 정도 되는 단검인 ‘글라디우스’였습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주인공인 러셀 크로우가 사용하던 무기입니다. 단검과 함께 자주 쓰던 무기는 스피어라는 길이가 긴 창이었습니다. 군단은 긴 창과 몸 전체를 덮을 수 있는 큰 방패로 전쟁에 나섰습니다.
전장에서 병사들은 마치 오늘날 전경들이 진압작전을 하듯 방패로 빈틈없이 대열을 짜고 그 사이 좁은 틈으로 창을 내밀어 공격했습니다. 수백 수천명의 병사들은 지휘관의 지시에 맞춰 마치 하나의 유기체라도 된 것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이 같은 강력한 군대가 뒷받침이 됐기 때문에 로마는 거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죠.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에서 각자 패권의 자리를 쥐고 있던 진나라와 로마제국이 전쟁을 벌였다면 어땠을까요?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하지만, 이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기도 합니다. 만일 이들이 함께 했던 시대, 즉 BC 3세기를 전후로 두 나라가 전쟁을 벌였다면 진나라가 좀 더 우세했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사병들의 용맹함과 전투 기술만의 차이가 아니라, 싸우는 방식에서 두 나라는 매우 달랐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진나라는 전장에서 기병이 중심이었고 각종 공성 무기와 원거리 무기가 발달해 있었습니다. 로마제국 역시 기병과 활을 쓰긴 했지만 군단의 핵심은 보병이었죠.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보병이 글라디우스와 스피어를 들고 싸우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진나라의 군대도 보병의 숫자가 훨씬 많았지만 실제 싸움의 주축은 말을 탄 기병이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와 진나라, 그리고 진나라 말기를 다룬 초한지 등의 영화를 보면 말을 타고 전장을 휘저으며 싸움을 벌이는 장수들의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또 수백년간 전쟁이 계속되면서 각종 병법서가 활개를 치고 다양한 전술이 사용된 점도 진나라가 군대가 유리할 수 있는 장점이 될 겁니다. 한 가지를 더 고려한다면 진나라가 있던 시절엔 로마제국은 이제 막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때였다는 것이죠. 로마의 전성기는 중국으로 치면 한나라 시대인 기원후 1~3세기입니다.
권력이 아닌 문화의 힘
이처럼 군사적 측면에선 진나라가 로마제국을 이겼을 겁니다. 하지만 진나라는 진시황으로부터 불과 3대에 이르러 멸망했고 로마는 1000년을 번영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때문일까요? 국제평화연구소를 설립한 노르웨이의 석학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그의 책 ‘제국주의의 구조(The Sturcture of Imperialism)’에서 제국의 3가지 조건으로 군사력과 경제력, 문화력을 꼽고 있습니다. “피지배민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진정한 제국이 완성된다”는 설명이죠.
이런 측면에서 진나라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췄지만 세 번째 요소인 문화력을 갖지 못했죠. 진나라는 8000개의 병마용이 있는 불가사의한 진시황릉을 조성하고 북방에 만리장성을 쌓을 만큼 엄청난 경제력을 지녔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역대 최강의 군대 또한 갖고 있던 진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엔 문화력이 없었습니다. 분서갱유로 대표되는 사상과 학문의 탄압이 피지배민들로 하여금 원한과 분노의 마음을 강하게 키웠습니다. 개방적이지 못하고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진나라의 정치 체제도 문화력을 키우지 못한 요인 중 하납니다.
단검인 글라디우스를 들고 출전하는 로마군단. 게임 토탈워
반면 로마제국은 ‘로마군단’ 못지않게 ‘로마문화’라는 강력한 지배 도구가 있었죠. 로마가 군사력과 경제력만 있고 문화의 힘이 없었다면 1000년 역사와 ‘팍스 로마나’를 구가하지 못했을 겁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는 말처럼 오랜 세월 자신의 문화와 이민족의 문화가 결합돼 제국의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식민지를 건설할 때도 자국의 정치 체제를 받아들이고 충성을 맹세하면 그 지역의 생활양식과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했죠. 특히 초기 로마가 제국을 건설해 갈 때는 단순히 무력을 통한 군사적 정복 활동만을 하진 않았습니다. ‘동맹’과 ‘편입’을 통한 로마적인 정치 방식이 있었죠. 요약하자면 전쟁에선 진(秦)이 이겼을지 모르나, 문화력에선 로마의 압승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은 비단 과학과 산업의 발전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미래엔 기술이 곧 군사력이고 경제력입니다.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이를 뒷받침하는 문화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세계를 제패한 혁신기업과 패권국가라도 진나라처럼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즉 물질적 성장에 걸맞게 제도와 의식 같은 정신적인 성숙이 뒤따라야 한다는 거죠.
그 중에서도 핵심은 다양성을 중시하고 개방·관용의 정신이 밑바탕 되는 문화를 키우는 일입니다. 어느 한편으로 쉽게 여론이 쏠리고 나와 다른 사람은 ‘적’으로 배척하는 문화 속에선 과거 아테네의 소피스트와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와 같은 인문의 꽃이 필 수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다양한 생각보다 하나의 주관이 강조될 때 우리는 다시 진(秦)의 분서갱유와 같은 일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진ㆍ한제국, 로마제국,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 양쪽에서 패권을 잡고 있던 ‘용’ 진ㆍ한제국과 ‘독수리’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를 비교 분석한 역사서다. 진ㆍ한제국에 대해선 기원전 771년 주나라 제후국 시기의 진부터 최초의 중국 통일이 이뤄진 기원전 221년을 거쳐 동진이 멸망한 기원후 419년까지, 로마는 기원전 509년 로마공화정 성립부터 기원후 476년 서로마제국이 북방 게르만족에게 멸망할 때까지 다룬다.
장장 1200여년에 달하는 장대한 역사
중국의 토대가 되는 진ㆍ한제국과 서구 문화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로마제국을 정치체제와 경제, 종교, 철학, 문화적 특색부터 재정관리, 조세제도, 군사전략, 대외정책 등 다방면에 걸쳐 꼼꼼하게 비교 분석한다. 이해하기 쉬운 소박한 문장 서술 속에 치밀한 자료 조사를 통한 정교한 논리, 독창적인 시각이 자리잡고 있어 술술 읽힌다.
용과 독수리의 제국
두 제국은 초기에 주변국과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지점에 있었으며, 권력과 부가 중앙으로 집중되면서 북방 야만족의 압력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로마제국이 서로마 멸망 이후 다시 통일제국을 이루지 못한 반면, 중국은 당 송 명 청 등 대제국이 계속 이어졌다는 차이점도 있다. 빈부의 극심한 격차가 진ㆍ한제국을 쇠퇴하게 만든 주원인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부의 집중도는 로마제국이 20배 이상 심했다는 비교가 흥미롭다. 놀라운 건 이 같은 책을 평생 물리학에 몸담았던 미국의 중국계 과학자가 썼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