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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中庸), 자사, 신독(愼獨), 성(誠), 사서(四書)

Jobs 9 2021. 5. 6.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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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의 하나로, 유교의 철학적 배경을 천명한 유교경전.

 

『대학』·『논어』·『맹자』와 더불어 사서(四書)라고 한다. 유교에서 사서라는 일컬음이 생긴 것은 중국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이다. 주희(朱熹)가 『예기』 49편 가운데 「대학」·「중용」을 떼어내어 『논어』·『맹자』와 함께 사서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후 사서는 유교의 근본 경전으로 반드시 읽어야 하였다.

『중용』은 이와 같이 『예기』 속에 포함된 한 편이었지만 일찍부터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 왔으며, 한나라 이후에는 주해서가 나왔으며 33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송나라 정이(程頤)에 이르러 37장이 되었다가 주희가 다시 33장으로 가다듬어 독립된 경전으로 분리시켰다.

『중용』의 작자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종래에는 『사기 史記』의 「공자세가 孔子世家」에 “백어(伯魚)가 급(伋)을 낳으니 그가 자사(子思)였다. 나이 62세에 송나라에서 곤란을 겪으면서 『중용』을 지었다”라는 대목이 있어 공자의 손자 자사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청대에 고증학이 대두되면서 자사의 저작이라는 정설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학자는 진(秦)·한(漢)시대의 어떤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저작이라 고증하기도 하고, 또는 자사의 저본(底本)을 바탕으로 후세의 학자들이 상당기간 동안 가필해 완성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여 아직까지 유력한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중용』을 흔히 유교의 철학 개론서라 일컫는데, 그것은 유교의 철학적 배경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장(首章) 첫머리에서 “하늘이 명(命)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대목은 유교 철학의 출발점과 그 지향처를 제시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삶을 누리자면 끊임없이 배워야 하고 그 배움에는 길[道]이 있고 길은 바로 본성(本性)에 바탕하며, 본성은 태어나면서 저절로 갖추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태어나면서 저절로 갖추어진’ 본성을 유교에서는 맹자 이후 ‘순선(純善)’한 것이라 생각하였으며, 송대에 와서 정립된 성리학은 이에 기초해 전개되고 있다.

『중용』은 33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전반부·후반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전반부에서는 주로 중용 또는 중화 사상(中和思想)을 말하고, 후반부에서는 성(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中)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며,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不偏不倚無過不及)을 일컫는 것이고, 용(庸)이란 떳떳함[平常]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희는 설명하였고, 정자(程子)는 기울어지지 않는 것[不偏]을 중이라 하고 바꾸어지지 않는 것[不易]을 용이라 하였다.

중화 사상은 중용을 철학적 표현으로 달리 말한 것인데, 이 때의 중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발로되기 이전의 순수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마음이 발해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중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라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우주 만물이 제 모습대로 운행되어 가는 것을 뜻한다.

성(誠)은 바로 우주 만물이 운행되는 원리이다. 그 원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꿰뚫어 있다. 그래서 “성은 하늘의 도이고 성되려는 것은 사람의 도”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성실한 것은 우주의 원리이고, 성실해지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라는 뜻이다. 결국, 사람은 우주의 운행 원리인 성을 깨닫고 배우고 실천하는 데에서 인격이 완성되며, 결국에 가서는 천인합일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신라 원성왕 4년(788) 관리 등용법인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태학(太學)에 설치할 때 그 과목 중에 『예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삼국 시대에 『예기』의 한 편으로서 『중용』을 접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고려 말 정주학을 수용한 이후에는 사서의 하나로 『중용』을 극히 존숭하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권근(權近)은 사서에 구결(口訣)을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모든 유학자들이 『중용』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성리학이 바로 『중용』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 사회에 있어서의 학술의 전개와 민족 문화 발달에 중용적 철학 사상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중용


중용은 상황에 따라서 말과 행동(감정표현)을 해야 되는지, 해선 안되는지를 아는 판단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상황에서 그 말과 행동이 지나친 것인지 모자른 것인지.. 그 적절함을 판단하는 것이 중용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중용은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성인들이 미리 그 기준을 만든 것이 예(禮)인 것이다. 보통은 예(禮)를 따르면 그 적절함을 얻는다. 하지만 성인이 정해 놓은 예(禮)라 할지라도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중용이다. 이러할 때에는 형식보다 본질과 감정이 우선하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서 윗사람을 존경하고 아랫사람을 아끼는 그 형식에 부족함이 생길지라도, 그 마음이 충분히 전해진다면, 그것 또한 예(禮)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공자는 말한다. 

여기서 중(中)이란 갑골문에서 깃대를 뜻한다. 깃대에 달린 깃발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지만 그 중심에 있는 깃대는 굳건히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중용도 마찬가지다. 옳은 신념은 깃대처럼 중심을 잡고 있어야 되며, 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쳐도 기울어지지 않고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중용이다.

여기서 '자신의 중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를 들자면, 감정표현을 상황에 맞게 잘하여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도, 상대의 큰 잘못에 대해서 충고(忠告)를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 또한 중용이라는 것.  즉, 중용은 '상대방에게 맞추라'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용이란, 자신이 살아오면서 심사숙고 끝에 '옳다'고 생각한 것들을, 상황에 맞춰서 남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세련되게' 말할 줄 아는 것이다. (또는 그러한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것.)

공자는 '지나친 것은 모자른 것과 같다(과유불급)'이라 말했는데, 중용의 뜻을 잘 말해주고 있다.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 지나치게 공격적이거나 설득하려고만 한다면 제대로 된 말과 행동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상대의 기분이 상할까봐 남에게 너무 무르게만 얘기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남의 불행 앞에서 상대에게 충고를 해주려고 한다면 그것 역시 제대로된 말과 행동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남의 분명한 잘못 앞에서 상대에게 충고해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각이 전달되지 않을 뿐더러 똑같은 잘못을 또 행할 것이다.  

종종 '중간만 가라'는 말이 중용으로 쓰이는데, 이것은 중용이 될 수 없다. 남들이 한다고 우르르 몰려가서 똑같이 따라하는 것은 분위기에 휩쓸리는 자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가치판단의 중간에 있으면서 회색분자처럼 아무 생각없이 중도를 지키는 것 역시 중용이 아니다. 상황이 계속 변한다고 지나치게 신중해서 시간이 지나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그 상황을 고민하기 싫어서 판단을 미루는 것이기 때문이다.[10] 또한 서로 다른 판단을 지켜보고 있다가 최후에 유리한 쪽을 "적절하게" 선택하는 것도 기회주의자이지, 중용이 아니다. 

공자의 사상이 여자를 부정적으로 인식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 적어도 중용의 사상 앞에서는 여자를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기본 개념 자체가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마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남자는 여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받기 싫은 말과 행동들을 여자에게 하면 안되고, 여자는 남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받기 싫은 말과 행동들을 남자에게 하면 안된다. 이렇게 양쪽의 두 관점을 전체적으로 살핀다면 남녀의 문제 뿐아니라 빈부, 인종, 이념, 종교 등에서 대립되는 현대적 문제들에 있어서도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현대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중용의 필요성이 다시금 강조되고 있기도 하다. 

 

 

 

신독(愼獨)


'신독'이란, 혼자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을 말한다.

남이 안본다고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남이 안볼 때도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전자와 후자는 외부적으로 보이는 평가가 비슷해 보일지는 몰라도,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른 실제 '삶'에서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중용의 제일 처음에서 「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하고 염려한다. 감추는 것보다 더 잘 보이는 것은 없으며, 작은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은 없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삶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남이 안 볼 때 마음대로 해버린다면 결국 남이 볼 때에도 무의식적으로 그 행동이 드러날 것이다. 언제까지 숨기고 살 수 없다는 것. 

이러한 행동은 또한,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해서이다.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과 사물에 함부로 대한다는 것의 결론은, 결국 자신 스스로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도 그렇게 함부로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誠)


중용을 이루는 방법. 정성스러움. 성실해야함을 말한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과 행동'(중용)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될까? 오로지 훌륭함(善)을 선택하여 그것에 정성스럽게 한마음으로, 될 때까지 하는 것이다. 남들이 한번에 해내면 자신은 10번을 하고, 남들이 10번만에 해내면 자신은 100번을 해서, 결국 그것을 해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정성스러우면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의 이치에 통달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치는 점점 확장되어, 세상 돌아가는 이치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사과나무를 갖은 정성을 들여 키우기를 수십년을 하게 된다면, 사과가 자라나는 이치에 대해서 능통하게 될 것이며, 그 사과가 자라고 병드는 이치와 비교해서, 다른 사회생활이나 연애 등의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게 되어, 해보지 않고도 그 적절한 정도를 잘 해낼 수 있다는 것. 

중용은 사서 중에서도 제일 마지막에 배우는 것이다. 이는 유교에서 가장 어렵고 핵심적이라는 얘기다. 수천년의 유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말이 "성실" 이라니... 얼마나 맥이 빠지는 결론인가? 하지만 그렇기에 더 대단한 것이다. 성실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알 수 없다. 자신을 알 수 없으면 사물의 이치도 알 수 없다. 사물의 이치를 알 수 없으면 세상의 이치를 알 수 없다. 자신의 행복, 가족과 재산, 사회생활, 연애와 부부관계, 권력과 명예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람이든 성실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리며 살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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