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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일본, 여진 관계 - 왜 조약, 삼포왜란, 정미약조, 임신약조

Jobs 9 2022. 5. 6.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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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조선 전기 일본과 관계된 주요 사건이다. ㈎~㈑ 각 시기에 있었던 사건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 : 부산포, 제포, 염포 등 3포를 개항하였다.
② ㈏ :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쓰시마 주의 제한적 무역을 허락하였다. 
③ ㈐ : 왜선이 침입하여 을묘왜변을 일으켰다. 
④ ㈑ : 조선은 포로의 송환 교섭을 위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해설】 정답 ① 
1426년 부산포, 제포, 염포 등 삼포를 개항하였다. 따라서 (나) 시기에 해당한다.  
② - 1443년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쓰시마 주의 제한적 무역을 허락하였다.  
③ - 을묘왜변은 1555년 발생하였다. 이후 일본과의 국교는 단절되었고, 비변사는 상설기구가 되었다.  
④ -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포로의 송환 교섭을 위해 사명당(유정)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 왜 전.후관계 - '왜! 쓰삼계삼임 사정을임 통기'
왜 왜란 
쓰 쓰시마정벌 
삼 삼포개항 
계 계해약조 50-200(세견선-세사미두) 
삼 삼포왜란
임 임신약조 25-100 1512 : 임신한 인어한둘 

사 사량진왜변 
정 정미약조 25 
을 을묘왜변 
임 임진왜란 
통 통신사

기 기유약조 광해군 1609 국교 회복, 부산포에 왜관 설치(세견선 20척, 세사미두 100석)

●왜 약조 

1. 계 요즘 잘나가 한달에 250 받는대 
     쓰시마정벌-삼포개항-계해약조 : 세견선50 세사미두200 
2. 아냐! 임신해서 절반만 받아 125 
     삼포왜란-임신약조 : 세견선25 세사미두125 1510 삼포왜란 비변사 설치 
3. 근데 계 누구? 응 25받으며 알바하던 정미(약조) 1555 을묘왜변 비변사 상설화 
     사량진 왜변-정미약조 : 세견선25 세수미두X 
4.기유(겨우) 120도 안돼? 
    임진왜란-정유재란-기유약조 : 세견선20 세사미두100 

 대일 연표

쓰시마섬 정벌 세종 1419 이종무가 병선 227척, 병사 17,000명을 이끌고 왜구의 근절 약속받음.
삼포개항 세종 1426 부산포(동래), 염포(울산), 제포(창원) 개항
계해약조 세종 1443 제한된 조공 무역(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
삼포왜란 중종 1510 3포 폐쇄, 비변사 설치
임신약조 중종 1512 계해약조의 절반(세견선 25척, 세사미두 100석), 제포만 개항
사량진왜변 중종 1544 무역 단절, 일본인 왕래 금지
정미약조 명종 1547 세견선 25척, 인원 제한 규정 위반시 벌칙 강화
을묘왜변 명종 1555 국교 단절, 비변사의 기능 강화
임진왜란 1592~1598 정유재란(1597), 비변사의 상설기구화로 왕권과 의정부, 6조 약화.
통신사 파견 1607~1811 막부 장군 취임시마다 축하사절단 파견
기유약조 광해군 1609 국교 회복, 부산포에 왜관 설치(세견선 20척, 세사미두 100석)

 


 

조선전기 여진, 일본과의 대외관계

 ● 여진과의 관계

1. 외교정책 : 交隣(교린)주의에 의한 화전 양면정책
(1) 회유책
① 성과 이름을 내리고 관직, 토지, 거주할 집을 주어 조선인으로 동화 유도
(대표적 사례 - 이성계의 의형제 퉁두란 -> 이지란으로 개명)
② 무역을 허용함
- 여진인은 조선국왕에게 肅拜進獻(숙배진헌)하고 회사물을 많이 받아갔다.
여진인이 머무는 동대문 안 북평관을 중심으로 일반 상인이 참여하는 사무역도 이루어짐
- 개시무역 : 북관쌍시(경원, 경성)로 국경지역에 개설 (무역소)
③ 무역품 : 수출(미곡, 소금, 의류, 농기구),  수입(모피류, 말)

(2) 강경책 : 국경지방 전략 마을에 진, 촌을 설치, 때로는 여진족 본거지 토벌

2. 국토의 수복
(1) 영토 확장
①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생각하지 않음
② 요동지역을 미수복된 땅이라고 생각함
③ 수복지역에는 남방 민호를 이주(북방사민정책)
④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자치 허용
⑤ 변경지역을 전략적으로 특수 편제하여 여진족 기습에 대비

(2) 4군 6진의 개척
① 4군 : 여연, 우예, 무창, 자성
- 세종 이후 4군 유지가 어려워 1455(단종3년)에 여연, 무창, 우예의 3군을 폐지하고, 자성군은 1459(세조5년)에 폐지, 조선 후기에 이르러 4군 6진의 복설운동이 일어나 숙종 말년에 남구만의 노력으로 폐4군의 일부를 다시 설치하여 압록강 연안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고, 19세기에 진보가 설치되면서 다시 복설되었다.
- 6진 : 경원, 부령, 온성, 종성, 경성, 회령, 경흥

(3) 사민정책
① 남방 민호를 북방으로 이주
② 북방으로의 사민은 태조 대부터 있어온 것이지만, 태종과 세종 16년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도내와 남도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사민이 이루어졌다.
③ 목적은 북방개척과 국토의 균형적인 발전
④ 병농일치제도를 통한 주민의 자치적 지역방어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여진족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는 것이었다.
⑤ 변경 지역의 토착 유력 세력을 포섭하여 효율적인 지방지배와 군사조직을 강화하고, 이민족과의 연결을 방지하기 위한 회유정책으로 토관직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 일본과의 관계

1. 교린정책
(1) 배경
① 조선 : 일본의 경제, 문화적 욕구를 허락해서 왜구 침입을 방지하는 목적
② 일본 : 봉건영주의 교역 간청 - 경제, 문화적 욕구

(2) 무역의 형태
① 사행무역 : 외교사절의 자격으로 한양의 동평관에 도착한 후, 조선국왕을 알현하고 진상과 회사의 절차에 의해 물품을 교환함
② 공무역, 사무역, 밀무역
- 조선 측이 발급한 내무허가증(도서)이나 대마도주가 발행한 도항증명서인 문인을 검사한 뒤 규정에 따라 진상물을 바치게 하고 그 대가로 회사물을 수여 받음
- 무역 이익을 추구하는 일본인들이 지나치게 많은 물품을 가지고 와서 공무역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워 사무역을 허락함
- 사무역은 조선 관리의 감독하에 포구와 서울의 동평관, 경상도 화원현에 있는 왜물고 등의 장소에서 조선상인과 개별적으로 거래하는 방식
- 이익이 크니 내항자와 물건이 증가하였고, 교역장소가 분산되어 일부 감독관리가 소홀해진 틈에 금지 제품에 대한 밀무역이 많아지는 폐단 발생
- 성종 25년 사무역을 폐지하고 공무역으로 환원함
③ 교역품
- 수출 : 쌀, 옷, 면포, 삼베, 서적, 대장경, 공예품
- 수입 : 구리, 황, 향료, 약재

(3) 통신사 파견
① 1429년(세종11년) 파견된 박서생이 최초의 통신사
② 조선 사신은 일본에 가서 재상과 같은 대우를 받음

(4) 조선 초기 일본 인식 정도
①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와 사행원의 보고를 취합하면
- 일본이적관이 강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실용적인 관점으로 일본의 문물 인식
- 일본의 경제와 기술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 조선에 없는 일본 특산물에 관심
- 일본 문화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자세


2. 대일관계의 변천 과정
(1) 쓰시마 정벌(기해 동정) ---> 강경책
① 1418년(세종1년) : 이종무가 보름간에 걸친 왜구 토벌작전을 벌이고 대마도 영주의 항복을 받음 - 이 정벌은 병권을 쥐고 있던 당시 상왕 태종이 주도함(병선 220여척, 병사 1만7000명 동원)
② 조선 정부는 병조판서 명의로 대마도주에게 招諭(초유)의 서계를 보내 항복을 하든지 아니면 일본 본토로 돌아가든지 택일하라는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③ 대마도주는 항복하고 동시에 印信(인신)을 줄 것을 간청
- 대마도는 조선의 속주로서 경상도의 관할 하에 두며 경상도 관찰사를 통해 書契(서계)를 올리면 인신을 하사하였다. 대마도주는 受圖書人(수도서인)이 되었고, 도주에 의한 서계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④ 대마도의 경상도 속주화 문제는 조선과 일본과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고, 조선정부와 무로마치 막부 간에 일시적인 긴장이 야기되었다. 긴장의 핵심은 대마도의 경상도 예속문제로,조선 세종이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원점으로 돌아갔다.
⑤ 정벌이후 대마도는 왜구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였고, 조선과 일본 간에 양속관계로서 중립적인 정책을 추구하였다.
(그 이유는 경제적으로 조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일본 본토보다 조선이 훨씬 지근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2) 3포 개항 (1426년,세종) ---> 회유책
- 제포(내이포, 창원), 부산포(동래), 염포(울산)
- 개항장에 무역처, 접대처, 도박처 등이 있는 왜관이 설치됨

(3) 계해약조 (1443년,세종)
- 3포 개항의 결과 왜인과 왜선의 왕래가 빈번해졌으며, 왜인들은 많은 쌀과 면포를 수입해 갔다. 이에 따른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하여 맺어짐
-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 거류 왜인은 60여명으로 제한
- 막부나 대호족의 사송선은 내왕 허락

(4) 조선의 대일 외교관계의 의의
 - 조선의 우위에서 이루어진 교역으로 조선의 선진문물이 일본의 발전에 기여


3. 임진왜란 전의 왜인들의 침탈 행위
(1) 삼포왜란(1511, 중종) - 임신약조(1512) 맺음 : 세견선25척, 세사미두100석, 제포만 허용
(2) 사량진왜변(1544, 중종) - 정미약조(1547, 명종) : 규정위반에 대한 벌칙 강화
(3) 을묘왜변(1555, 명종) - 삼포왜란 이후 세견선이 줄어든 것에 불만을 품은 일본인들은 1555년에 60여 척의 배를 끌고 전라도에 침입하여 영암, 장흥, 강진, 진도 등지를 약탈하였으나, 도순찰사 이준경의 조선군에게 격퇴 당함 ---> 국교 단절, 제승방략, 비변사


4. 류큐(오키나와 : 유구왕국) - 일본에 복속되기 전 독립국 시절
- 유구에서 우리나라에 사절을 처음 파견한 것은 고려 말
- 조선 초기 명, 일본, 여진 다음으로 많은 교류를 가진 나라가 유구
- 조선 전기 조선에 50여 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
- 임진왜란 때 명군에 합류하여 구원군으로 도와주는 등 조선과 우호 관계를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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