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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붕당(朋黨)정치 정리 - 두문자 : 사화→이기→예송→환국→탕평→세도

Jobs 9 2024. 1. 2.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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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붕당 전개

사화→이기→예송→환국→탕평→세도

 

조선의 전체 붕당사를 개괄하면...

조선시대 훈구와 사림의 죽고 사는 대립 즉 사화

무갑기을 4대 사화이후 사림 집권

사림은 동서분열

동인은 다시 남북분열

동은 움직임動 있고(분열)

서인은 서서 그자리 쭉~~(광해군, 인조반정까지)

기갑 예송 이후

경기갑 환국, 서인,남인,소론 순으로 집권

이후 무신이임

무고의 옥/신임사화/이인좌 난/임호화변

이후

(영정조 탕평 잠시 있다가)

붕당의 끝, 세도정치

세도정치 끝에 조선 몰락~~

 

  • 연산군 : 사화
  • 선조 : 붕당 이기
  • 현종 : 예송
  • 숙종 : 환국, 일당 독점
  • 경종 : 호락
  • 영정조 : 탕평
  • 순조 : 세도

 

두문자 표로 정리하면

조선 붕당 두문자 암기




 

조선시대 붕당(朋黨)및 붕당정치(朋黨政治)

 

가, 붕당

(朋黨)의 역사

 

1. 동인과 서인이 주도한 붕당 성립기

◎동인 VS 서인

붕당의 효시라 할 동인과 서인의 분열은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 즉 을해당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 을해당론 ☞ 왕실 외척이 관료추천권이 있는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느냐는 논쟁

1575년(선조 8)에 일어난 사건으로, 사림세력들이 이른바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갈라져서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건이다. 이는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전랑 자리의 추천권을 놓고 벌인 싸움인데, 이 때문에 일제 강점기 이래 당쟁의 근본 원인이 개인적 감정싸움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왕실 외척이지만 사람들을 보호한 심의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선배 정치인과, 왕실 외척 지위를 이용한 심의겸의 정치적 비리를 용서할 수 없다는 후배 정치인의 대립이었다.


분파 후 정여립 모반사건의 결과 기축옥사로 인해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지만 3년후 정철의 건저의 사건으로 다시 동인(남인,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 기축옥사

1589년(선조22)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통 정여립 옥사, 또는 정여립 반란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데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다.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는 구체적인 물증이 없는데도 정여립과 친했다는 이유만으로 동인 중에서 급진적인 지도자들과 전라도 지역 서경덕, 조식 학파의 수많은 인물들이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었으므로 이후 심각한 정치적 후유증을 남겼다. 때문에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정여립이 이 씨 왕조가 정 씨 왕조로 바뀐다는 정감록을 바탕으로 일으킨 민중반란이라는 설, 선조 임금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일어나게 된 사건이라는 설 등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남인 VS 북인

남인과 북인의 분립은 동인과 서인의 분립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기축옥사로 인해 분립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는 기축옥사 당시 서인(정철)이 정여립 사건의 처리를 주도하면서 북인계 인물을 무고하게 죽였는데도 이를 잘 알고 있는 남인계 인물들이 제대로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당이 발생했다고 보고있다. 또한 그로부터 3년 뒤인 정철의 건저의 사건 때 서인의 처리 문제로 분당이 발생했다는 견해도 있다. 남인의 중심인 유성룡이 임진왜란 이후 화의를 주장하여 실각되자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고 남인은 한동안 몸을 사리게 된다.

◎대북 VS 소북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의 후사문제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갈라져 대립한다. 그러던 중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모함하여 살해하는 등 소북파를 몰락시킨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서인은 정권을 장악하고 대북파를 몰락시켜 다시는 정치의 무대에 설 수 없게 만들었다. 인조반정 이후 북인은 완전히 와해되어버린 것이다.

2. 서인과 남인의 공존, 붕당 공존기

서인과 남인의 50년에 걸친 붕당정치 시대 - 정치적 평화를 유지한 제도개혁의 시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계 정치가들은 인망이 높은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추대해 사회안정을 도모하는 등 남인을 정치적 동반자로 인정하고, 남인들의 도움으로 주요 정치적 과업을 시행하였다. 인조연간 정치사 연구결과를 보면, 주요 관료집단에서 서인과 남인의 비율은 6:4 정도였고 서인과 남인 학통을 이끈 산림들도 거의 대등하게 등용되었다. 이후 인조, 효종, 현종에 이르기까지도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붕당 간의 조화로운 공존이 계속되었다. 서인이 주도적인 위치를 지키는 가운데 남인이 이를 견제하는 양당체제, 즉 정치적 평화시대였던 것이다.

3. 일진일퇴의 환국정치, 일당전제기

일당전제기는 1674년 왕실에서 공복을 입는 기간 문제로 일어난 갑인년 복제논쟁을 군주권 강화에 이용한 숙종 즉위년부터, 1729년 영조가 일당전제 정치를 끝장내겠다고 선언한 기유대처분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는 보통 일진일퇴 정국, 환국에 의한 일당독재, 역모조작과 정탐정치 등으로 표현되는 격렬한 당파싸움의 시기다. 전후 여덟 차례 정도 일진일퇴하는 환국정치에 의해 일당독재가 반복되었다.

◎서인 VS 남인

서인과 남인의 공존은 평화롭기도 했지만 불안정하기도 했다. 그 불안정함이 '폭발'한 것이 바로 예송 논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예송논쟁  서인 : 효종은 차남이야. 무조건 1년상! / 남인 : 차남이지만 왕 됐으니 장남 대접받아야 되는 거 아니야? 당연히 3년상이지.

왕실에 적용할 상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벌인 논쟁으로서, 1659년(현종 즉위년) 논쟁과 1674년(현종 15) 논쟁 두 번이 있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효종과 효종왕비의 상사 때, 어머니 자의대비가 큰아들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둘째 아들 이하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였다. 이는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파견된 분조에서 사실상 아버지 인조를 대신하는 소군주로서 권한을 행사했지만, 국내에 돌아온 이후 의문 속에 죽음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 2차 예송논쟁은 결국 숙종 즉위년부터 남인 주도 정권을 출범시켰다.

예송논쟁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1차 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정권에 변동이 없었으나, 2차 논쟁에서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때, 남인은 서인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강경파 청남과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 탁남으로 분열되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이 심하여 경신대출척, 즉 경신환국으로 집권한 지 몇 년 만에 쫓겨나게 된다.


■ 경신환국1680년(숙종6) 남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남인정권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북벌을 위한 새로운 군대인 체부를 설치함으로써, 당시 숙종의 신임을 받던 서인계 외척 김석주의 군사권을 약화시켜 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노론 VS 소론 VS 남인 


그러던 중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갈리게 되는데,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사건이 바로 임술삼고변이다.

 

■ 임술삼고변
1682년(숙종8)에 일어난 사건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사건이다. 훗날 노론이 된 왕실 외척 김석주, 이사명, 김익훈 등이 밀정을 파견하여 남인들에게 역모를 권유한 후 이를 밀고하는 등의 정탐정치를 자행한 사실이 드러나 큰 물의를 야기시킨 사건이다. 당시 서인 영수 송시열은 이를 자신이 스승의 후손들을 잘못 교육시킨 탓이라 하여 결국 정탐정치를 자행한 이들을 변호하려 하였고, 이를 서인 소장파 인물들이 탄핵하고 윤증 학파가 이에 합세함으로써 결국 서인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반대하는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서인이 분열 된 이후에도 환국은 계속되는데,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재등용되는 기사환국 이후 왕에 의해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래서 갑술환국 이후로는 노론·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 기사환국
1689년(숙종15) 서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남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장희빈이 아들을 (후일의 경종) 낳자, 곧바로 왕위계승권자로 정하려는 것을 서인들이 반대함으로써 일어났다. 이로써 서인 영수 송시열은 사사당하였고, 서인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민 씨는 폐출되었으며, 장희빈은 왕후에 봉해졌다.

■ 갑술환국
1694년(숙종20) 남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이 정권교체는 서인계와 남인계 일부 집단의 정탐정치 시도에서 발단되었다. 이로써 인현왕후는 복위되었고, 반면에 장희빈은 왕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왕세자(경종)의 보호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어 갔다.


그 후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옥사가 일어나 노론 대신들이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 신임옥사

1721년(경종1) 12월에 노론 주도 정권이 소론 일당정권으로 급변한 신축환국과, 다음 해 목호룡이 이른바 노론 및 연잉군(후일 영조) 측근 인물들의 경종 시해음모를 고변함으로써 일어난 임인옥사, 이 두 사건을 합쳐서 지칭하는 것이다. 신축환국은 노론당이 숙빈 최 씨의 아들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 직후, 다시 대리청정을 청함으로써 노론 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다가, 소론과 남인의 공격으로 실패함으로써 정권이 교체된 사건이다. 임인옥사로 당시 노론 최고 지도자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4인이 모두 사형을 당하였으므로, 노론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사건을 올바른 노론 붕당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고 하여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4,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당쟁은 조선 후기 사림정치에서 파생된 정치 현상의 하나이다. 조선의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에는 정치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시대 구분이 필요하다. 조선의 정치를 담당한 계층은 양반으로 문반과 무반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반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문ㆍ무 관료라는 의미를 가지던 양반이 뒤에는 그 가족ㆍ친족까지를 포괄하는 신분 개념으로 쓰였다. 그러나 양반 중에서도 특히 어떤 정치 세력이 정치를 주도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나는 조선의 정치사를 집권한 정치 세력을 중심으로 사대부정치기, 훈신정치기ㆍ권신정치기, 사림정치기, 탕평정치기, 외척세도정치기로 구분하고자 한다.

1) 사대부정치기

사대부정치기는 고려 말 조선 초기 유학적 소양을 지닌 문관 관료인 신흥 사대부들이 집권한 시기를 말한다. 12세기부터 원나라를 통해 주자학이 전래되었다. 이에 무신 정권 하에서 새로이 진출하기 시작한 신흥 사대부들이 예의와 염치를 숭상하는 주자학 이념을 이론 무기로 하여 구 귀족ㆍ사원의 부정ㆍ부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새로운 농업 기술인 중국으 강남농법(江男農法)을 도입해 경제적 기반을 닦고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신진 학자 관료들이었다. 이들 사대부들은 양자강 이남이 개발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정계에 등장한 송나라의 신흥 지주(지식인 관료 사대부 층)와 유사한 정치 세력이었다. 이로부터 사대부는 하나의 정치 세력을 가리키는 역사적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원래 사대부는 문관의 5품 이하인 사(士), 4품 이상인 대부(大夫) 등 문관 관료를 통칭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문관 관료뿐만 아니라 무관 관료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했다. 과전법(科田法)의 토지 분급 규정은 그 예이다. 고려 말에는 문관 관료인 신흥 사대부 이외에도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서 신흥 무장 세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조선 왕조의 건국 과정에서 넓은 의미의 사대부에 포괄되었으며, 그 주도 세력은 역시 문신, 즉 문관 관료들이었다. 문(文)을 높이고 무를 낮게 보는 유교적 문치주의 하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신들은 무신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는 것을 억제했을 뿐 아니라 왕실의 정치 참여도 철저히 제한했다. 종친은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宗親不任以事]은 고려 이래의 불문률이었다. 사대부들은 행정 실무자인 서리(胥吏, 衙前)와 여자ㆍ환관들의 정치 참여도 봉쇄했다. 이것은 모두 중국의 문치주의에서 배운 것인데, 다만 환관의 경우 중국에서는 그들의 득세를 억누르지 못했으나 조선에서는 철저히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고려 500년 동안 수행해 온 과업 중의 하나인 지방의 반독립적인 향리 세력 타도의 마무리를 위해 이들을 행정 실무자인 중인으로 격하시키고, 지방사족(地方士族)의 지배적 지위를 확고히 해 주어 이들을 왕조의 정치기반으로 삼았다.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를 복적으로 군현제의 개편도 수반되었다. 이렇게 되자 지방 사족의 정치적 진출은 장려될 수밖에 없었다. 군현마다 향교를 설치해 유교 교육을 강화하고, 여기서 길러진 인재들은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 관료로 불러올리는 정책이 실시되었다. 새 왕조는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도 비교적 공정하게 인재를 선발했다. 그리하여 세종조에는 집현전을 중심으로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어,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정치 제도가 마련되는 등 그야말로 황금 문화가 창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를 나는 사대부정치기로 명명하고자 한다.

2) 훈신정치기

사대부 정권이 확립되자, 이들의 기득권이 강화되어 사대부 독주의 정국이 전개되었다. 신흥 사대부들이 이미 새로운 귀족으로 부상한 것이다. 왕권은 철저히 제약을 받았고, 국가의 법제는 이들의 권익 보장 때문에 기형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정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지방 사림들의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바로잡기 위해 1453년(단종 원년)에 수양대군(세조)의 쿠데타(癸酉靖難)가 일어났다. 비상 수단에 의해 사대부 정권을 타도한 것이다. 이때 세조의 정란공신(靖難功臣)이 생긴 이후 성종 때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250명의 공신이 등장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한편 세조는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 집현전 학사들 대신에 지방으로부터 김종직(金宗直)을 비롯한 젊고 야심 있는 사림을 정계에 불러들였고, 이들은 공신 세력을 견제하려는 비호를 받아 사림파를 구성하게 되었다.

사대부가 문ㆍ무 관료들만을 의미하는데 비해, 사림은 유교 교양을 갖춘 독서인층(讀書人層)을 포괄하는 양반 지식인들이었다. 또 훈구파가 문장을 중시하는 사장파(詞章派)였는데 비해, 사림파는 경학을 중시하고 도덕적 수양을 내세우는 경학파(經學派)였다. 사림파는 주자학의 철학 이념을 깊이 연구해 훈구파의 부정과 부패를 공격함으로써, 두 세력은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네 차례에 걸친 사화가 그것으로, 정치권력을 장학하고 있던 훈구파에 의해 사림파가 화를 당한 사건이었다. 사실 두 세력의 충돌은 이미 세조의 개혁 정치에서부터 잉태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인사권과 언론권이 대체로 재상이나 대신들에게 있었던 것이 특징이다. 나는 세조대부터 중종대까지의 시기를 훈신정치기로 보고자 한다.

3) 권신정치기

공신 세력이 늙어 죽고 사림파의 과도한 개혁 주장에 염증을 느낀 국왕이 등을 돌림으로써 정권은 외척 권신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김안로(金安老)ㆍ윤임(尹任)ㆍ윤원형(尹元衡)ㆍ이량(李樑) 등이 그들이다. 외척 권신들의 집권은 기간이 짧았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이들에게는 집권의 명분도, 특별한 정치 이념도 없었다. 다만 훈구파가 무너지고 사림파가 아직 정권을 차지할 만한 세력을 갖추지 못한 과도기에 잠시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정권 장악 능력도 부족했다. 인사권과 언론권을 대신이 가진 것도 아니었고, 다만 자기 사람들을 전랑이나 언관에 배치함으로써 사림의 정치 체제를 도용한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사대부와 훈구파가 약화된 이후 사림파가 집권하기까지는 외척밖에는 정치를 주도할 세력이 없었다. 비록 왕실이 있다고는 해도 왕족은 이미 국왕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정치에 나설 수 없게 되어 있었으며, 그들도 4대가 지나면 일반 관료들과 똑같은 지위로 하락하게 되어 있었다. 이런 여러 사정을 고려할 때, 권신정치기는 훈신정치기의 말기적인 현상으로 보아 훈신정치기에 포함해도 별 무리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는 대략 중종 말기부터 명종대까지이다.

4) 사림정치기

선조조에 이르러 권신들이 타도되고 사림들에 의한 정치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대적할 세력을 잃은 사림들은 분열하여 붕당이 생기고, 붕당간에 당쟁이 치열해졌다.

그렇다면 사림정치의 부산물로 생긴 당쟁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16세기에 이르러 훈신 세력은 네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사림 세력의 성장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역사의 대세로 밀려오는 사림파의 진출을 결코 막을 수는 없었다. 이조전랑ㆍ좌랑 등의 전랑권이 강화되고 청요직 당하관의 인사권이 이들에게 돌아가는가 하면(이는 제도가 아니라 관행이었다), 언관의 언론권이 강화되어 관직 세계에 청신한 기풍이 진작될 수 있었다. 이에 외척 세력인 심의겸이 사림 세력을 지지하게 되고, 새로 국왕이 된 선조가 혼인하기 전이어서 외척이 없는 것을 기화로 사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사림이 정권을 장악하자 사림파는 대적할 상대를 잃어 스스로 분열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곧 당쟁이다.

정치권력은 투쟁 대상이 없어지면 분열하게 마련이다. 사림들의 붕당은 학연성과 지역성ㆍ혈연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잠시 모였다가 헤어지는 정치 세력을 파벌이라 하는 반면, 학연ㆍ지연ㆍ혈연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대립하는 정파를 붕당이라 하고, 붕당 간의 싸움을 당쟁이라 한다.

선조조 초기의 당쟁에서는 선배 사림과 후배 사림의 대립이 있었다. 선배 사림은 심의겸 등 명종조의 권신 정치 하에서 벼슬한 사람들이요. 후배 사림은 사림정치 하에서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신진기예 관료들이었다. 이이ㆍ김효원 등 후배 사림들은 스스로를 군자라 하고, 선배 사림을 소인이라 하여 공격했다. 이 군자소인론은 송나라 구양수의 붕당론에 의거한 것으로, 권신정치기에 물들어 도덕적 수양이 덜된 선배 사림을 소인으로 몰아세운 것이다. 군자소인론의 근거가 되는 구양수의 붕당론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무릇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도(道)를 같이 함으로써 붕(朋)을 삼으며, 소인은 소인끼리 이(利)를 같이 해 붕을 이루니, 이는 저연의 이치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臣)은 소인에게는 붕이 없고, 오직 군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인은…… 잠시 무리를 끌어와 붕을 이루는 것 같지만, 이는 거짓된 것이라 이익을 보면 먼저 차지하려 다투고, 이익이 다해 사귐이 멀어지면 도리어 서로 해치고자 합니다. ……그러나 군자는 그렇지 않아서 그 지키는 바가 도의(道義)이며, 행하는 바가 충신(忠信)이요, 아끼는 바가 명절(名節)이니, 몸을 닦음에는 도를 같이 해 함께 힘써 처음과 끝이 같으니, 이것이 군자의 붕입니다. 그러므로 인군(人君)은 단지 소인의 위붕(僞朋)을 물리치고, 군자의 진붕(眞朋)을 불러 써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천하는 다스려지게 마련입니다." (『歐陽文忠公集』권17, 朋黨論)

진정한 붕당은 군자에게만 있고, 소인은 이익에 따라 모였다 흩어졌다 하므로 소인의 붕당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소인을 물리치고 군자를 기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군자소인론에 바탕을 둔 군자유붕론(君子有朋論)ㆍ일붕론(一朋論)은 그 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과 사마광(司馬光)의 구법당이 싸울 때 구법당에 연결되었고, 여대방(呂大防)과 범순인(范純仁)은 붕단간의 화해와 조정을 목적으로 조정론(調停論)을 내세웠으며, 소식(蘇軾)은 소인의 붕당은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무너지게 마련이니 구태여 소인을 핍박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세 갈래로 갈라지게 되었다.

구양수의 군자소인론은 주자에 이르러 더욱 철저해졌다. 주자는 군자와 소인의 변별을 철저히 하되 자기 당에도 소인이 있다는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주장하고, 임금까지도 군자당에 끌어넣어야 한다는 인군위당설(人君爲黨說)을 제기했다.

이러한 송나라의 붕당론이 주자를 숭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이는 처음에 군자소인론을 들고 나와 선배 사림을 공격했다. 그러다가 선배 사람들의 세력이 약화되자, 조정론으로 돌아섰다. 이 조정론은 주자의 양비양시론과 약간 차이가 있다. 양시양비론은 군자와 소인의 변별을 철저히 하는 데 비해, 이이의 조정론은 두 붕당을 다 군자당으로 보고 두 당인을 함께 쓰자는 것이었다.

선배 사림과 후배 사림의 충돌은 1575년(선조 8년)에 일어났다.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추천된 것을 심의겸이 반대한 데서 사림 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 것이다. 김효원을 편든 사람들을 동인, 심의겸을 편든 사람들을 서인이라 했다. 당시는 동인의 세력이 강해 많은 사림들이 동인에 가담했다. 그러나 동인은 정여립의 옥사를 과도하게 다루어, 동인을 해친 서인 정철(鄭澈)의 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었다. 정철의 죄뿐만 아니라 서인들을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이발(李潑)ㆍ정인홍 등 강경파를 북인, 온건파를 남인이라 했다. 그리고 남인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화의론에 찬동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의병을 많이 일으킨 북인이 집권해 광해군을 옹립했다. 북인은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갈리었는데, 대체로 광해군조에는 대북이 우세했다.

대북 정권은 적자가 아니라는 광해군의 왕통상의 약점을 의식해 형인 임해군과 배다른 어린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서인의 쿠데타인 인조반정을 유발했다. 반정의 명분은 인륜적인 패악만은 아니었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이중 외교를 벌인 것도 문제시되었다. 태조 이후 명나라를 준경하여 사대 외교를 해야 한다(尊明事大)는 명분에 저촉되기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광해군은 쫓겨났고, 대북 정권도 따라서 무너지게 되었다.

인조조의 서인 정권은 비상시국에 인심을 수습하기 위해 남인을 관제 야당으로 불러들였다. 서인들은 대북 정권이 독주를 하다가 스스로 대북ㆍ소북ㆍ골북(骨北)ㆍ육북(肉北)ㆍ청소북(淸小北)ㆍ탁소북(濁小北) 등으로 세포 분열하였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남인뿐 아니라 소북 세력도 끌여들였다(그런데 소북 세력은 뒤에 남인으로 편입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사실상 정권은 서인들의 수중에 있었고, 서인 중에서 공신 출신의 공서(功西, 勳西라고도 한다)와 사림 출신의 청서(淸西)의 대립이 더 기본적인 대립 구도였다. 인조반정 이후 공신들이 모여 맹세하는 자리에서 "왕실과의 혼인을 잃지 말고 산림을 우대한다[毋失國婚 崇奬山林]"는 구호를 내걸었던 것에서 잘 나타나듯이, 당시에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서 외척이 되고 또한 사림의 종장(宗長)인 산림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공신들은 실질적으로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도 사림의 여론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신과 사림의 주장은 같을 수가 없었다. 병자호란 때 공신들은 후금과의 화의를 주장했지만, 사림들은 척화를 주장했다. 같은 서인이지만 공신들의 공서와 사림들의 청서가 주화파와 척화파로 갈리고 만 것이다. 공신들은 당로자로서 나라의 보존을 위해 후금에 항복했지만, 사림은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내세워 이를 극력 반대했다. 여기에는 야당인 남인이 낄 여지가 없었다. 그러므로 인조조에 붕당간에 공존과 협력 및 비판에 바탕을 둔 전형적인 붕당정치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인정하기 어렵다.

인조조의 정권은 사실상 공신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후금에게 항복한 이후로는 존명사대의 큰 명분을 잃어 사림들의 공격을 배겨낼 수가 없었다. 이에 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ㆍ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 등 호서산림(湖西山林)의 영향력이 커지고, 이들의 제자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며, 여론에 밀려 현실성이 희박한 북벌 정책을 밀고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친청파인 소현세자가 죽음을 당하고 반청파인 봉림대군이 왕위에 올라 효종이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효종조에는 국왕이 송시열의 도움을 받아 북벌을 준비한 시기였다. 그러나 북벌의 뒤에 숨어 있는 효종과 송시열의 목표는 달랐다. 효종은 이를 기화로 군사를 길러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고, 송시열은 이를 이용해 사림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자는 것이었다. 북벌은 명분일뿐 현실성이 없었다. 북벌을 위해 10만 양병을 한다고 했지만, 조선시대에는 실제로 10만 군사를 일으켜 본 적이 없었다. 또한 청나라는 새로 일어나는 나라로서 200만의 군사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설령 10만 양병이 가능하다고 해도 북벌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효종조에는 특별한 당쟁은 없었다. 단지 서인 내부에서 송시열 계열의 산림과 김육을 필두로 하는 청풍 김씨 외척 세력이 경쟁하는 정도였다. 효종은 외척 세력이나 자기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래서 송시열[山黨, 송시열 등 김장생의 문인으로 구성된 호서산림]과 같은 산림에 대해서는 극도의 예의를 갖추기는 하되 중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가 1658년(효종 9)에 김육[漢黨, 김육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 출신의 사림 현실론자]이 죽자, 의지할 곳이 없어진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효종은 이듬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현종조에는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세력이 정권을 주도했다. 그러나 인조조 이후로 성장해 온 남인 세력도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들 상호간의 권력 장악 기도는 두 차례의 예송을 통해 나타났다.

첫 번째 예송에서는 효종이 죽었을 때 인조의 후취 왕비인 조대비(趙大妃)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이 붙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니 기년복(朞年服,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고 윤휴ㆍ허목 등 남인들은 효종이 비록 차자이지만 이미 왕이 되었으니 그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당연히 장자와 마찬가지로 3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별것 아닌 일로 싸운 듯하지만, 사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 논쟁에서 지면 정권을 잃게 되기 때문이었다. 특히 서인보다 정치적 입지가 취약한 남인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문제를 왕통과 관련시킴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는 서인의 정국이었던 만큼 1659년(현종 즉위년)의 예송에서는 서인이 승리했다.

그렇다고 남인이 이 논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듬해에 윤선도(尹善道)가 송시열ㆍ송준길이 왕통과 적통을 분리해 효종을 낮추어 보았다고 공격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정국은 한층 경색되었다. 윤선도는 효종이 세자로 있을 때의 선생이었다. 이 상소로 인해 윤선도는 귀양을 갔지만, 송시열은 30년 뒤인 숙종조에 가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렇듯 정쟁은 치열하면서도 끈덕진 것이었다. 문치주의 체제 하에서 정쟁은 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붓으로, 이론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예송 논쟁은 이론을 앞세운 전형적인 권력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당쟁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두 번째의 예송은 현종이 죽기 직전인 1674년(현종 15)에 일어났다. 당시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죽어 또다시 조대비가 입어야 하는 상복이 문제가 된 것이다. 송시열의 이론대로 한다면, 조대비는 대공복(大功服, 9개월복)만 입으면 그만이었다. 둘째 아들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종은 효종의 상을 당하여 조대비가 입은 상복은 송시열의 이론대로 한 것이 아니라 『대명률』이나 『경국대전』의 예법을 따른 것인데, 그에 따르면 1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실제로 효종 상에서도 송시열의 주장이 뒷날 문제가 될 것 같아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의견을 따라 『경국대전』의 법제를 적용해 1년으로 했다. 그런데 송시열의 제자들은 이를 송시열의 주장을 따른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분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결국 현종은 자신의 직권으로 1년복으로 확정지은 뒤 서인 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했다.

현종조의 두 차례의 예송은 실로 송시열과 윤휴의 경전에 대한 해석 싸움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송시열은 주자를 극도로 숭배한 나머지 주자의 해석은 한 글자도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에 비해 윤휴는 경전 해석을 꼭 주자가 한 대로 좇을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윤휴는 경전 해석에 대해 족자적인 해석을 내놓았고, 이것은 주자를 하늘 같이 받드는 송시열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송시열이 동문인 윤선거(尹宣擧, 윤증의 아버지)와 틀어진 것도 윤선거가 윤휴의 이론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는커녕 오히려 비호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였고, 그를 추종하거나 비호하는 사람은 무조건 배척했다.

윤휴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남인이 되었고, 윤휴를 비호한 윤선거는 그 아들 윤증대에 가서 소론이 되었다. 송시열이 숭배하는 율곡 이이의 친구 우계 성혼의 제자들은 인조반정에 공신으로 많이 참여해 송시열계 산당의 공격을 받았다. 이들은 겉으로는 주자학을 하지만 속으로는 양명학(陽明學)을 하는 소론계 강화학파(江華學派)와 연결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당쟁은 크게 노론ㆍ소론ㆍ남인으로 삼분되었다. 노론은 이이ㆍ송시열계이고, 소론은 성혼ㆍ윤선거계이며, 남인은 이황ㆍ조식계였으나, 영남 남인들은 이미 선조ㆍ광해군대에 떨어져 나가고, 윤휴ㆍ허목ㆍ허적(許積)계의 경기도ㆍ충청도 남인들(기호 남인)만이 살아남았다.

숙종조에는 현종조의 예론으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당쟁의 골이 깊어진 탓에 정권 교체가 빈번하게 많아졌다.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훈척 세력으로 당파를 치거나, 이 당파로 저 당파를 치는 파행적인 방법을 썼다. 처음에는 청풍 김씨인 김석주(金錫胄)의 힘을 빌어 서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남인 정권을 수립했다. 김석주는 삼촌이 현종 왕비(명성왕후)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외척에 속했다. 그는 자질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외척이 정치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는 송시열의 주장 때문에 출세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불만으로 여기던 김석주는 이때에 와서 송시열의 서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남인을 끌어들여 새로운 정권을 수립한 것이다. 숙종 즉위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갑인환국(甲寅換局)이라 한다.

남인은 정권을 잡게 되자 서인 인사들에 대한 처리 문제를 놓고 허적(許積)ㆍ권대운(權大運) 등의 탁남(濁南)과 윤휴ㆍ허목 등의 청남(淸南)으로 갈렸다. 청남은 이 기회에 서인을 완전히 몰아내자는 강경파였고, 탁남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온건파였다. 그러나 정권의 주도권은 허적 등 탁남이 쥐고 있었다. 허적은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다시 설치해 오도도체찰사(五道都體察使)가 되어 군권을 장악했고, 윤휴는 이를 바탕으로 청나라를 치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남인은 훈련도감(訓鍊都監)과 어영청(어營廳)의 군권도 차지했다. 반면에 서인은 숙종 왕비의 아버지인 김만기(金萬基)가 총융청(摠戎廳)의 군권을, 김석주가 수어청(守禦廳)의 군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군권의 향배가 당쟁의 중요한 변수가 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숙종은 허적 등 남인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꺼려 군권의 열세를 느끼고 있던 김석주를 시켜 1680년(숙종 6)에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 정권을 수립했다. 이것이 경신환국이다. 이 경신환국으로 100여 명 이상의 남인 인사들이 화를 당했다. 허적은 자신의 서자인 허견(許堅)의 모반으로 죽임을 당했다. 왕대비를 조관(照觀) 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던 윤휴 역시 이때 사약을 받고 죽었다. 반면에 김석주는 병조판서로서ㆍ어영대장ㆍ훈련대장ㆍ호위대장을 도맡아 병권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서인의 협력을 얻어 남인을 쫓아낸 김석주는 남인 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김환(金煥)ㆍ김익훈(金益勳) 등을 시켜 역모를 조작하고 밀고하게 했다. 1682년(숙종 8)에 일어난 이 고변사건을 임술고변(壬戌告變)이라 한다. 사건을 조작한 데 대해서는 서인들 중 조지겸(趙持謙)ㆍ한태동(韓泰東) 등과 같은 젊은 관료들조차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 때 송시열이 주모자인 김익훈을 두둔해 훈척 계열과 야합하자, 서인은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그를 비판하는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사실 노론고 소론이 갈리게 된 연원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공서와 청서의 대립, 송시열과 윤증의 시비 등이 그것이었다.

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김석주와 송시열이 정국을 주도했다. 1689년(숙종 15)에 숙종은 후궁 장희빈에게서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자 했다. 예상대로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들은 반기를 들었다. 속종은 가뜩이나 서인의 위세가 강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차에 노론이 자기의 뜻을 거스르자 이를 서인을 타도의 기회로 이용했다. 이에 서인의 지지를 받던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고, 송시열이 죽음을 당했으며, 100여 명 이상의 서인 인사들이 화를 당했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한다.

윤휴가 경신환국에 죽고 송시열이 기사환국에 죽어, 남인과 서인의 종장이 모두 사라졌다. 이는 이미 사림정치의 틀이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송시열은 효종이 죽었을 때 "효종은 서자라고 해도 해롭지 않다"라고 한 말 때문에 남인의 집요한 공격을 받고, 결국 30년 만에 남인의 손에 죽었다. 당쟁이란 이토록 끈질기고 참담한 것이다.

경신환국과 기사환국은 화를 입은 사람이 100여 명이 넘는 대형 사건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과거의 붕당 공존과는 달리 당파와 당파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이것은 어느 면에서는 숙종이 의도적으로 빚어낸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숙종은 김석주로 하여금 금위영(禁衛營)을 창성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를 바탕으로 당파 간의 충돌을 야기시켜, 신권을 약화시키고 상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숙종은 경신환국 때만 하더라도 아직 어렸기 때문에 김석주가 하는 대로 따랐다. 그러나 장성해서는 신료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무슨 일이든지 자기 뜻대로 하려고 했다.

1694년(숙종 20) 3월, 서인 김춘택(金春澤,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손자) 등이 궁중의 궁인ㆍ환관ㆍ공주들과 연결해 남인을 몰아내려 한다는 남인 함이완(咸以完)의 고발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서인 김인(金寅)은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영조의 어머니인 최숙원을 독살하려고 음모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그러나 속종은 남인의 고발은 가볍게 보고 함이완의 고발은 집권당인 남인으로 하여금 취조하게 했다.

그러나 별안간 심문하던 남인 인사들을 처벌하고 서인을 기용하는 갑술환국(甲술換局)을 단행했다. 이 사건은 미심쩍은 데가 많은데, 실상은 김춘택이 숙종의 유모를 통해 최숙원과 짜고 숙종에게 남인의 실상을 낱낱이 고해 바침으로써 일어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남인 135명이 죽거나 귀양ㆍ삭탈 관직되었고, 이미 죽은 송시열 등 서인 정객들의 관직이 다시금 회복되었다.

갑술환국 직후부터 장희재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빗발쳤다. 소론은 장희재를 처벌하면 그 영향이 세자에게 미친다 해서 반대했다. 그런데 숙종은 1701년(숙종 27)) 8월애 인현왕후가 죽자 이것이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해, 결국 장희빈과 장희재를 죽였다.

숙종은 노ㆍ소론의 대립을 적절히 이용하여 정국을 이끌어 갔으나, 말년에는 노론을 기울었다. 1716년(숙종 42)에 가례원류의 간행 문제를 둘러싼 소론과 노론의 시비에 대해 노론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판정하는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내려 소론에게 큰 타격을 안겨 준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숙종은 1717년(숙종 43) 7월 19일에 노론 재상 이이명(李이命)과 독대하여 세자의 대리청정을 걸정하고, 연잉군(延仍君, 뒷날의 영조)과 연령군(延齡君) 두 왕자의 보호를 부탁했다. 그 당시 숙종과 세자와의 사이는 이미 벌어져 있었고, 세자에게 실수를 유발해 세자를 폐하려는 음모가 있었다고 소론들은 보고 있었다. 노론은 두 왕자 중에 누구를 밀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그러던 차에 연령군이 죽자, 노로느이 선택은 자연스럽게 연잉군으로 귀결되었다. 그 와중에서 숙종이 죽고, 경종이 왕위에 올랐다.

경종이 즉위했으나, 노론의 집권은 계속되었다. 노론은 자기들의 집권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경종을 퇴진시키려 했고, 소론은 경종을 지지해 노론의 술책을 타도하려고 했다. 두 세력의 충돌은 1721년(경종 원년)의 신축환국(辛丑換局)과 이듬해 1722년(경종 2)의 임인옥사(壬寅獄事)로 나타났다. 신축환국이란 소론 김일경(金一鏡) 등이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과 왕세제의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의 행위는 경종에 대한 반역이라고 몰아세워, 노론 세력을 쫓아내고 소론 정권을 수립한 사건이다. 또 임인옥사란 노론 측 고관 자체들이 경종을 죽이려고 음모하다고 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발을 계기로 소론이 노론을 일망타진한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을 신임옥사(辛壬獄事)라고 한다.

신임옥사는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이命)ㆍ이건명(李健命)ㆍ조태채(趙泰采) 등 노론의 4 대신이 죽임을 당한 것을 비롯해 60여 명의 노론 인사들이 참혹한 변을 당한 사건이다. 이에 당쟁은 예송과 같은 정책 대결이나 단순한 정권 교체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료가 국왕을 선택하고 거기에 충역의리를 결부시키는 치열한 정쟁으로 바뀌게 되었다. 노론은 있지도 않은 왕세제라는 제도를 들고 나와 자기들의 집권욕을 채우려 했으며, 소론은 이들을 국왕에 대한 반역으로 몰아 처참한 당화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출처;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나, 붕당정치(朋黨政治)

 

조선 중기의 정치 운영 형태. 근래까지 일반적으로 이 정치 형태는 사화(士禍) 당쟁(黨爭)을 중심으로 망국적인 정치 현상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의 개략은 다음과 같다.

1, 붕당정치의 부정적 연구성과와 그 개요

조선 시대의 왕정은 당초 중앙집권 관료제로 운영되었으나 15세기 말엽부터 훈구파로 불리는 기성 관료 집단을 비판하는 사림파(士林派)가 대두했다. 이후 양자의 충돌로 여러 차례 사화가 반복하던 끝에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무리로서 붕당이 발생해 항구적인 당쟁이 시작되었다.

당쟁 발생의 직접적 원인으로는 선조대에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이조전랑(吏曹銓郎) 추천 문제로 생긴 양자의 반목이라고 한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조정의 인사들이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나뉘고 나아가 재야의 유생들까지도 어느 한쪽을 지지해 모든 관료와 지식인들이 대를 물려가면서 대립하는 양상을 빚었다.

동서분당 이후 붕당은 계속 핵분열을 일으키는 추세를 보였다. 동인에서 갈린 남인(南人)·북인(北人)·서인(西人)에서 나뉜 노론(老論)·소론(少論) 등을 흔히 사색(四色)이라고 하여 중심적인 붕당으로 꼽았다. 붕당 간의 대립은 지극히 배타적이었을 뿐더러 주로 복상(服喪) 문제, 세자책봉 문제 등 민생과는 관련이 없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통념되었다.

치열한 붕당간의 대립은 영조, 정조 등의 탕평정책으로 다소 누그러졌지만 19세기에는 세도정치로 발전해 망국의 길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쟁을 망국적 정치 현상으로 본 조선시대 정치사에 대한 종래의 부정적인 인식은 형성 과정에 큰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구명되었다.
조선시대 ‘당쟁’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19세기 중반에 나온 이건창(李健昌)의 ≪당의통략 黨議通略≫에서 이미 한 차례 객관적으로 정리되었다.

당쟁의 흐름을 개관하면서 중요 정쟁을 정리한 이 저술은 오랫동안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여러 계층을 대변해 당쟁이란 정치 현상 자체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양반 중심의 정치를 청산하고 마무리하는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적인 비판 작업은 일본 침략주의자들이 한국의 국권을 침탈해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크게 악용, 왜곡되었다.

일본 어용학자 및 언론인들은 한국 국권 침탈 초기부터 조선시대 정치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른바 당파성론(黨派性論)을 창출했다. 한국인은 정치적으로 서로 싸우기를 좋아하는 민족성을 가져 망국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들의 논점이었다. 시데하라(幣原坦, 1870∼1953)의 ≪한국정쟁지 韓國政爭志≫(1907)는 이런 의도에서 쓰인 최초의 조선시대 정치사였다.

당파성론은 다른 식민주의적 역사 해석과 함께 자기네의 국권탈취를 합리화, 정당화하고 한국인에게 패배주의 의식을 심어 식민 통치를 감수하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당파성론 창출 과정에서 ≪당의통략≫의 생산적 비판 의식을 한국인도 이미 그 폐단을 인정한 예로 삼았다. 식민주의 사관의 일환으로 창출된 당파성론은 한국인들에게 의외로 많은 영향을 끼쳐, 일제 강점아래에서는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어서도 쉽게 시정되지 않았다.

안확(安廓, 1886∼1945)의 ≪조선정치사 朝鮮政治史≫(1923)는 정쟁이란 것은 어느 역사에나 있기 마련인 것으로, 오히려 조선시대의 붕당 간의 대립은 나름대로 이념 지향성을 가져 서양 근대의 정당 정치에 비견되는 것이라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평가했다. 그는 조선 시대 정치의 사회적 기반을 자치제의 발달에서 찾고 중앙의 정쟁은 곧 이의 상부적 구현 형태라고 설명했다.

1940년에 일본인 학자 이시이(石井壽夫)도 이와 비슷한 긍정적 평가를 냈다. 그러나 모두 소수 의견으로 묻혀 일반인의 인식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해방 후 1970년대부터 이 소수 의견들을 주목하면서 조선 시대 정치사, 사회사를 적극적으로 고찰하는 연구들이 나오면서 종래의 당쟁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극복되기 시작했다.

2, 붕당정치의 성립

1392년 역성혁명으로 개창된 조선왕조는 중앙 집권적 양반 관료제로 새로운 통치 질서를 확립했다. 조선왕조 개창 전후 시기에는 중소지주층이 확대되는 사회경제적 변화가 일어났다. 양반 관료제의 확립은 곧 이를 정치 체제 운영에 반영시킨 것이었다. 각지에 중소지주적 경제 기반을 가진 자들은 대개 관인(官人)이 될 수 있는 신분적 자격을 획득해 과거 시험을 통해 언제든지 중앙 관계에 진출할 수 있게 됨으로써 관료 공급원으로서의 지방 사회의 기능성이 전에 비해 크게 높아졌다.

그런데 왕조 초기 양반 관료제의 운영은 자연히 양반 사대부 가운데 세습적 지위를 확립한 부류를 생성시켜 15세기 중반 이후 향상된 농업 경제력을 바탕으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기 시작해 지방 장시(場市)가 곳곳에 형성되어 곡물과 면포를 중심으로 상품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한편, 국제적으로 중국·일본·유구(琉球) 등과의 교역이 활발해져 재부 획득의 기회가 전에 비해 크게 많아졌다.

훈구(勳舊) 대신들과 척족들은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여건 속에서 사적인 경제 기반 확대에 열을 올려 농장 확대 외에 국제 교역, 곡물 교역, 면포 수집 등을 통해 상업적 이득을 광범하게 추구했다. 이들은 중앙에서는 하급 관료와 이속(吏屬)들을, 지방에서는 수령(守令)과 지방 유력자들을 이용해 재산을 늘려갔다.

이런 추세 속에 자연히 일반 백성에 대한 수탈도 심하게 자행되어 군역(軍役)의 포납화(布納化), 공물의 방납화(防納化) 등과 같은 현상도 나타났다. 한편, 조선 왕조에 들어와 재지 중소지주층의 자제들은 관학인 향교(鄕校)와 사학인 서재(書齋) 등의 교육을 통해 지식인화 과정을 꾸준하게 거쳐 현직에 나아가지 않더라도 정치의식을 높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15세기 중반까지도 조정의 사대부들을 가리키던 사림(士林)이라는 지칭이 15세기 말엽 이후로는 재야의 많은 선비들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전화되었다. 재야의 지식인을 포괄하는 지칭으로서의 사림은 소과(小科) 합격자인 생원(生員) 진사(進士)들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사장(詞章) 보다는 경학(經學)에 치중했고, 경학의 기본 정신을 성리학(性理學)에서 구하는 공통점을 보였다. 사림 세력은 중앙 진출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리학의 공도론(公道論)에 입각한 언론 활동이나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보급 운동(성종대), 향약 보급 운동(중종대) 등을 통해 훈구파의 치부 행위와 수탈을 비판하고 훈구파가 권력을 매개로 구축한 각 향촌 사회의 기반을 변혁시키려 했다.

16세기에 들어와 4차례나 사화(士禍)가 일어난 것은 사림 세력의 이러한 도전에 위협을 느낀 훈구 세력이 정치적 보복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림 세력은 거듭하는 사화에도 불구하고 쉽게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중종대 말엽부터 서원(書院) 건립 운동을 펼쳐 성리학적 이념 실현을 목표로 하는 학문 연마의 기반을 확대해 사회적, 정치적 입지를 계속 넓혀갔다. 이러한 성과를 배경으로 선조 즉위 초년, 외척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선조는 즉위 당시 미혼이었다.) 사림 계열의 인사들은 조정에 대폭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림 세력은 그 뒤 구(舊) 척신 정치 체제의 잔재 척결을 둘러싸고 두 계열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해 갈등이 생겼다. 전배(前輩)로 불리던 노성한 사류(士類)는 온건한 입장이었던 것에 반해 후배(後輩) 사류는 강경한 입장에서 적극적인 개혁을 주장하면서 김효원의 전랑 추천을 반대한 심의겸을 용납하려는 점에 대해 불만이었다. 후배로서는 심의겸이 전날에 사림계 인사들을 보호하려 한 사실이 있기는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척신 출신이므로 그를 받아들이면 척신 정치의 잔재를 청산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정치적 결단 및 시국관의 차이로 일어난 이러한 사림 내의 대립은 끝내 후배 사류를 중심으로 한 동인과 전배 중심의 서인으로 분열하는 것으로 귀결 지어졌다. 당시 동인은 대개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서인도 이이(李珥)가 참여하게 되면서 학연성을 높였다. 사림 내의 최초의 붕당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인과 서인은 이처럼 출발 초기부터 학연성을 강하게 지녀 이 시대 특유의 정파가 형성되었다. 붕당 성립 후, 중앙 정치는 대개 이를 정치 세력의 기본적 범주로 삼아 운영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러한 정치운영 형태를 붕당정치라고 부른다.

3, 붕당정치의 운영 논리

신하들 사이의 세력 결집인 붕당은 본래 유교 왕정에서 금기의 대상이었다. 조선 초기에도 붕당이란 말은 반역자 또는 정치적 유죄 집단에 대해 주로 사용될 정도록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사림 세력에 의해 중국 송(宋) 나라 때 확립된 새로운 붕당관이 수용되면서 붕당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중국 송나라 때는 사회경제적인 발달로 정치 참여 유자격층 내지 정치 참여 의식층이 확대되면서 붕당관도 바뀌었다. 구양수(歐陽脩)의 〈붕당론 朋黨論〉이 변화의 전기를 마련했다. 그의 붕당론은 정치에서 붕당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점을 주지시키는 한편, 붕당을 공도(公道)의 실현을 추구하는 자들의 ‘군자(君子)의 당’과 개인적 이익의 도모를 일심는 ‘소인(小人)의 당’으로 구분했다.

군주는 진붕(眞朋)의 전자가 위붕(僞朋)인 후자에 대해 우세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면 왕정은 저절로 바르게 이끌어질 것이라고 논했다. 성리학의 대성자인 주희(朱熹) 역시 구양수의 견해를 취하면서 붕당에 관한 한 정승의 문의에 답하기를, 붕당이 있는 것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군자의 당이 있다면 정승도 군주와 함께 그 당에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16세기 조선에서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할 때 양자는 붕당관에 대해서부터 서로 다른 인식을 가졌다. 훈신·척신들이 한·당 시대의 붕당관으로 사림의 결집을 불충(不忠)으로 몰아 탄압의 구실을 삼은 반면, 사림들은 훈신·척신들을 ‘소인의 당’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선조대에 사림계의 우세가 확실해진 뒤에는 구양수나 주자의 붕당론이 정설로서 자리를 잡았다.

인조반정(1623) 이후로는 서인·남인 두 정파의 상호 공존 체제가 추구되는 가운데, 중앙 정치체제에 대한 인식도 한 걸음 더 발전했다. 즉 구양수, 주자의 붕당론은 붕당의 존재를 죄악시하는 관념을 극복했다. 그러나 군자와 소인의 대립 관계만을 설정함으로써 공도 실현을 추구하는 복수 붕당(학파)의 공존에 대한 논리는 미쳐 세우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17세기 초 사림은 이에 다음과 같은 논리로 복수 정당의 공존을 합리화했다. 즉 현재의 붕당은 구양수나 주희가 말하는 군자당·소인당과는 달리 각기에 ‘선인(善人)’과 ‘불선인(不善人)’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어느 한 붕당의 인사들만을 등용하거나 배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으로 공존의 근거를 얻으면서 ‘공론(公論)’에 입각한 상호 비판 견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붕당을 미워해 없애려 한다면 군자들이 화를 입고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구양수와 주희의 견해를 들어, 군주와 권세가들이 인위적으로 붕당을 없애려 하는 노력에 반대했다.

그리고 당시의 붕당정치는 나름의 운영 장치들을 새로 갖추었다. 즉, 이조(吏曹) 전랑(銓郞)이 후임을 자천하는 자대제(自代制)와 삼사(三司)의 관원들에 대한 통청권(通淸權)이 좋은 예이다. 이조 전랑 자대제는 상관으로 조정 대부분의 인사 조치의 권한을 가진 이조판서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았다. 이 조건 아래 조정의 언론을 담당하는 삼사 관원들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에는 교체자를 왕에게 직접 추천하는 통청권을 누렸다.

이조 전랑에 대해 이와 같이 큰 권한을 부여한 것은 삼공(三公) 육경(六卿) 등의 전횡과 일탈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이조 전랑직의 이러한 특별한 권한은 사림 사회에 대해 자신의 명예를 걸고 파당을 초월해 적합한 후임자를 제대로 추천하는 데서 지켜질 수 있었기 때문에, 사림의 붕당정치의 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재야 사림의 공론(公論)은 학문적 명성이 높은 인사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를 가리켜 산림(山林)이라고 했다. 산림은 왕으로부터도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4, 붕당정치의 전개와 변질

학파가 곧 정파를 이룬 사림의 붕당정치는 선조대의 동인과 서인의 분열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선조-광해군대에는 여전히 기반이 다져지지 않아 파란을 거듭했다.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은 선조대에 집권 기회를 가장 많이 누렸지만, 구성원들의 학연이 복잡해 분열을 거듭했을뿐더러, 광해군대에는 대북(大北)의 권력 독점적 성향이 강해 다른 붕당과의 공존 관계를 정립하지 못해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대북의 독주에 비판적이던 서인과 남인이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구실로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북인 세력을 제거한 뒤 양 붕당의 상호 비판 공존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붕당정치의 궤도가 잡혔다. 이후 두 붕당은 각각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학문적 이념을 정치에 구현한다는 기치아래 서원 제도와 산림 제도를 발달시켜 붕당정치의 발달에 기여했다.

붕당정치는 사족 양반이라는 특정한 신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시대적 한계성을 가지지만, 교육 기회를 누린 중소 지주층의 대부분을 포용한 정치 형태로서 시대적 발전성도 인정할 수 있다. 붕당정치의 저변을 이룬 재지 사림은 각 지방의 서원을 중심으로 향회(鄕會)를 구성해 해당 지역의 향권(鄕權)을 주도해 수령(守令)의 일방적 횡포를 용납하지 않는 체제를 유지했다. 17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붕당정치는 한계를 드러냈다. 즉, 붕당간의 공존 의식이 무너지면서 어느 정파이든지 간에 일당 전제(一黨專制)의 성향을 강하게 발휘해 정쟁이 격렬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 속에서 종래의 붕당정치에서 크게 억제되었던 척신의 비중이 다시 높아져 이를 중심으로 한 벌열(閥閱) 세력이 형성되어 붕당을 대신하는 추세를 보이기까지 했다. 붕당정치의 중요한 기반이었던 서원도 개별 가문의 조상을 모시는 사우(祠宇)와 혼동되어 남설됨으로써 공론 결집의 중심지라는 본연의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정쟁이 격력해질 수록 정탐이나 역모 조작 그리고 사사(賜死)와 같은 적극적인 보복 행위 등 파행적인 정치 현상이 잇따랐다.

조선 왕조의 정치가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이르면서 이처럼 크게 동요한 데는 다음과 같은 경제적 변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17세기 말부터의 경제 변동은 16세기에 일차적으로 토대가 잡힌 지방 장시 중심의 상공업이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계기로 질량면에서 확대, 발전하면서 일어난 것이었다.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변동은 특히 서울을 비롯한 정치적 도회처의 도시화를 수반하면서 가속화되었다.

이와 같은 경제변동 속에 새로운 재부 획득의 기회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붕당간의 공존 의식에 균열을 크게 일으키고 나아가 학파가 정파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붕당 요건마저 퇴색되었던 것이다. 붕당의 허울은 존속했지만 정치 운영의 실제에서는 개인이나 가문의 입장을 우선하는 성향이 두드러지고, 산림 제도마저 권세가의 인척 또는 왕실의 외척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사림의 공론을 반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숙종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한 것은 붕당정치의 변질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 두 파당과 남인 3자 사이에 벌어진 환국(換局)의 잦은 정변은 이 시기 정치의 파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잦은 환국으로 정치적 입지가 극히 불안해지자 노론, 소론 및 남인 등 각 정파는 서로 특정한 왕위 계승권자를 지지하고, 실패했을 때는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까지 생겼다.

정쟁이 이처럼 왕실의 권위마저 크게 손상하는 형태로 발전하자 왕권이 직접 이를 개혁하는데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18세기 영조·정조대에 실시된 탕평책(蕩平策)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탕평정책은 군주가 붕당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모든 정사를 직접 주재하는 것을 취지로 붕당정치의 폐해를 시정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단 영조대의 탕평정책은 붕당간의 화합을 꾀하는 데 역점을 두어 ‘조제보합(調劑保合)’이란 과도적 방법을 추구한 반면, 정조대에는 의리를 앞세워 군주에 대한 충성 외에는 일체 용납하지 않는 강경성을 보였다. 한편 탕평책을 추구한 군주들은 소민(小民)보호를 왕정의 새로운 시대적 과제로 제시하는 시대적 발전성을 보였다.

탕평정치는 기성 벌열 세력의 사대부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을 소지가 많았다. 실제로 19세기에 군주들이 잇달아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이들이 담합해 군주권을 억제하는 반동적 정치 형태로서 세도정치(勢道政治)를 출현시켰다. 19세기 초 중반에 계속된 세도정치는 노론계 벌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왕실과의 외척 관계를 권력 기반 확보 내지 유지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들은 탕평 군주들이 추구한 소민 보호 정치를 버리고 사적 치부에 모든 권력 장치를 악용했기 때문에 일반민으로부터 마침내 광범한 저항을 받게 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전국적으로 일어나 민란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 시대 정치사에 대한 이상과 같은 새로운 시각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조선 시대 정치는 당쟁 일색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몇 단계로 구분해 파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첫째, 왕조 초기인 15세기 왕정은 양반 관료제를 확립해 수행되었고, 둘째 16세기는 붕당이 성립하는 시기, 셋째 17세기는 붕당정치가 정립한 시기, 넷째 17세기말 이후는 붕당정치가 한계를 드러내 이를 시정하기 위해 군주 측에 의해 탕평 정치가 꾀해진 시기, 다섯째 19세기는 탕평정치의 소민 보호주의에 반발하는 벌열 세력의 반동의 세도정치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16∼17세기의 붕당정치는 조선 시대 정치의 이러한 발전적 변천의 한가운데서 중소지주 출신의 지식인들이 성립시킨 성리학적 이념 실현을 목표로 한 고도의 주지(主知)주의적 정치 형태였다.

 

5. 사림의 분열과 붕당 정치의 전개

 

16세기에 이르러 조선의 정치 운영은 당파를 형성하여 집단적인 논쟁을 수반하는 투쟁으로 발달했다. 이는 외척 정치가 종식된 선조 대에 정권을 독점한 사림 세력이 다시 학맥과 사상적 차이로 인해 붕당을 형성한 결과였다.

사림 분열의 직접적 요인은 1575년에 발생한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과 신진 사류 김효원의 암투였다. 김효원이 인사권을 쥐고 전랑직에 천거되자 심의겸은 그가 윤원형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권세에 아부한 소인배라고 하면서 그같은 요직의 적임자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효원은 전랑직에 취임하였다.

하지만 얼마 뒤 김효원은 다른 자리로 이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심의겸의 아들 심충겸이 그 후임으로 천거되었다. 그러자 김효원은 왕의 외척이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전랑직에 앉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심충겸의 전랑 취임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와 같이 전랑직을 둘러싼 두 사람의 대립이 가속화되고 있었는데, 다시 이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벼슬아치와 사류들이 두 편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그리고 급기야 정치적 이념적 성격을 띤 붕당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파벌을 동인과 서인으로 구분해서 불렀는데, 심의겸의 집이 도성 서쪽 정동에 있었고,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 건청동에 있었던 까닭이다.

이들의 분파는 비록 단순한 감정 대립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내부는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학맥과 사상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동인은 주리철학적 도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형성된 이황, 조식 문하의 영남학파였고, 서인은 주기철학에 근거를 두고 형성된 이이, 성혼 문하의 기호학파 사류들이었다. 이러한 학맥과 사상의 차이는 붕당 정치에 기반한 당쟁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유교 정치 사상에서 원래 붕당 정치는 금기 사항이었다. 그러나 중국 송대에 들어오면서 정치 참여 자격층 내지 정치 참여 의식층이 확대됨에 따라 전통적인 붕당관은 커다란 변모를 겪게 된다. 즉, 구양수와 같은 인물은 붕당을 공도의 실현을 추구하는 자들의 모임인 '군자의 당'과 개인적 이익의 도모를 일삼는 '소인의 당' 두 가지로 나누고, 전자를 '진붕', 후자를 '위붕'이라고 규정하고 군주가 진붕의 승세를 유지시킨다면 정치는 저절로 바르게 이끌어진다고 하였다.

성리학의 대성자인 주희 역시 기본적으로 구양수와 견해를 같이하면서 더 나아가 붕당이 있는 것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군주까지도 '군주의 당'에 끌어들이도록 하여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16세기의 조선은 전통적인 붕당관과 성리학의 붕당관이 엇갈리고 있었다. 훈척 세력은 한, 당대의 붕당관에 바탕을 두고 사림의 세력 결집을 비판하는 동시에 탄압의 구실로 삼았으나, 사림계는 구양수의 붕당론에 근거하여 권세로써 정권을 독점하는 훈척 계열을 '소인의 당'이라고 비난했다.

사림 세력은 선조 대에 이르러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고 구양수의 붕당관에 따라 당파를 조성하기에 이른다. 이의 시초가 바로 동인과 서인이었다. 주리론자들로 구성된 동인과 주기론자들로 구성된 서인들의 정쟁은 시간이 흐를 수록 극한적인 대립 양상을 띠게 된다.

동서로 갈라진 뒤 대사헌 이이는 이들 두 당의 충돌을 극소화하기 위해 심의겸과 김효원을 각각 외직인 개성유수와 부령부사로 물러앉게 한다. 이후 1580년 낙향했던 심의겸이 예조판서에 제수되자 동인인 장령 정인홍이 그를 탄핵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나, 이이의 중재로 정치적 파장이 확대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584년 중재자 구실을 하던 이이가 죽자 동인과 서인은 본격적인 정치 투쟁을 감행한다. 이이가 죽자 이발, 백유양 등의 중도파 세력이 동인에 가세해 서인의 거두 심의겸을 탄핵하자 서인 중에 탈락자가 생기고 심의겸도 파직되었다. 이제 조정은 점차 동인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인이 조정을 거의 장악했다고 판단했을 무렵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발생하여 조정은 다시 서인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된다.

정여립은 본래 서인 세력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 편에 들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 박순을 비판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린다. 그가 서인을 공격하게 된 원인은 분명하지는 않다. 그가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던 적이 있긴 했으나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직선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의 성향과 일치했던 것이 동인에 동조하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이이를 공격한 이유로 서인의 미움이 그에게 집중되었고, 그래서 그는 동인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관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는 낙향한 몸이었음에도 동인들 사이에서는 명망이 높았다. 그래서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달 모임을 갖는 등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1587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하였을 때는 대동계를 동원해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

대동계의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 기인, 모사 세력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조정은 커다란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때문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서인의 정철이 위관이 되어 사건을 조사하면서 동인의 정예 인사들이 제거되었다. 이 때 숙청된 인사는 장살로 죽은 이발을 비롯하여 약 1천 명에 육박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옥사로 한때 서인이 조정을 장악하긴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1591년 정철이 건저의(세자 책봉에 관한 의견) 문제로 실각하자 다시 동인이 득세하였기 때문이다.

건저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선조에게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는 병약하여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후궁 소생의 왕자들 중에 왕세자를 책봉해야 했는데, 이 일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어 쉽사리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때 이 건저의 문제를 해결하게 위해서 당시 좌의정이던 정철은 우의정 유성룡, 부제학 이성중, 대사헌 이해수 등과 상의하고 선조에게 건저(왕세자를 세우는 일)할 것을 주청하려 하였다.

정철은 또 한편으로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와도 이 문제를 상의하고 최종 결정을 위해 자리를 함께 하기로 했으나 이산해는 두 번이나 약속을 어겼다. 사실 이산해는 이 문제를 이용해 정철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산해는 정철과 건저 문제를 의논하기로 하는 한편, 후궁 인빈 김씨의 오빠인 김공량과 결탁하여 계략을 꾸몄다.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을 총애하는 것을 알고 김씨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올리고 그들 모자를 죽이려고 한다고 무고했다. 그러자 인빈 김씨는 선조에게 이 내용을 전했고, 선조는 매우 진노하였다 .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정철이 경연장에서 건저 문제를 주청하자 선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대노하였다. 유성룡, 이산해 등은 침묵을 지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철은 삭탈관직되고 같은 서인이었던 이성중, 이해수 등은 모두 강등되어 외직으로 쫓겨났다. 정철이 실각하자 동인은 서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감행했다. 말하자면 정여립 모반 사건에 대한 보복을 할 기회를 맞은 셈이었다. 서인의 주요 인사는 대부분 숙청되고 조정은 완전히 동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동인은 이 때부터 인조반정이 있기까지 30여 년을 집권하게 된다.

그러나 동인은 정철의 치죄 과정에서 남북으로 갈라서고 만다. 정철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사형을 시켜야 된다는 주장을 펴던 이산해와, 유배로 끝내야 한다는 온건론을 펴던 우성전의 대립이 이러한 분당을 유발시켰다. 또한 이산해는 전랑 천거 문제로 유성룡과 대립하게 되는데, 이것도 분당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에 유성룡과 개인적인 알력이 있던 이발이 이산해와 결합하게 된다.

그래서 유성룡, 우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파를 남인, 이산해와 이발을 추종하는 파를 북인이라고 했다. 이것은 유성룡이 영남출신이고 우성전의 집이 남산 밑에 있었는 데 반해 이산해의 집이 한강 북쪽편에, 이발의 집이 북악산 밑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유래됐다. 이 남인과 북인의 학맥을 살펴보면 근본적으로 둘 다 주리론을 주창한 영남학파였으나 남인은 이황 문하였고, 북인은 조식의 문하이면서도 이이, 성혼 등과 교유 관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철저한 인맥을 중심으로 당을 형성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분당 이후 남인은 우성전, 유성룡, 김성일 등을 중심으로 한때 정권을 잡았으나, 조식의 문하인 정인홍이 1602년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삭직케 함으로써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북인은 홍여순과 남이공의 대립으로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분파된다. 이산해, 홍여순 등 노장들이 영도하는 당을 대북이라 했는데 기자헌, 이이첨, 허균 등이 여기에 속했고, 남이공, 김신국 등 소장 세력이 이끄는 당을 소북이라 했는데 여기에는 유영경, 박이서, 성준구 등이 참여했다.

이렇게 북인이 소북과 대북으로 갈리자 남인은 서인과 공조 체제를 구축하고 이에 대응했지만 어쨌든 선조 말기는 북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대북 세력은 정권을 거의 독점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대북은 광해군 대에 가서 내부에서 알력이 생겨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폐위를 주장하던 골북과 육북, 이를 반대하던 중북으로 다시 세 분파를 이루게 된다.

이 때 골북을 주도하던 인물은 이산해였고, 육북은 홍여순, 이이첨이었으며, 중북은 유몽인이었다. 이렇듯 끝없는 분파를 통하여 조선의 붕당 정치는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각 당파들은 일당 독재의 경향을 보이며 처음에는 미숙함을 드러내지만 후에 인조 대에 이르러서는 서인과 남인이 서로 공존하면서 상호 비판하는 체제를 갖추어 붕당 정치의 참모습을 실현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당쟁으로 인해 조선이 망했다는 그릇된 인식을 강요받아왔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강요된 이같은 식민사관의 근본 문제는 바로 붕당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되었다는 데 있다. 당쟁, 즉 붕당 정치에서는 상호 견제하고 대립하는 것이 곧 상호 공존하는 방법이었다. 붕당 정치의 본질적인 취 지는 바로 일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원리는 현대의 민주 정치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 점령되던 시기를 돌이켜 보아도 이것은 명백해진다. 흔히 조선 말기를 당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대원군 등의 외척, 인척 세력의 독재가 횡행하던 시기였다.

이 사실은 조선을 망하게 한 원인이 당쟁이 아니라 일당 또는 일부 세력의 독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당쟁, 즉 붕당 정치는 결코 식민사관에서 강요받았던 '망국적 권력 다툼'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정파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후 득세한 사림파 가운데 훈구정치 청산태도를 놓고 청년 급진파 동인과 장년 온건파 서인으로 대립. 서인의 중심인물이었던 심의겸의 집이 서울 도성 안 서쪽에 있어 서인이라고 부름.

 

이후 서인은 정여립의 옥사를 계기로 정철이 중심이 돼 동인을 숙청한 후 정권을 잡았으나 국왕 후계문제로 선조의 눈에 거슬려 실권. 그러다 선조 다음인 광해군 때 북인의 무리한 정책 추진으로 입지가 좁아지자 1623년 인조반정을 통해 다시 권력 장악. 이후 효종 다음인 현종 및 숙종 시절 예송논쟁을 거쳐  남인을 완전히 축출, 조선 후기까지 실세로 자리잡음.

 

서인 중에서는 숙종 초기 남인에 대한 입장차를 배경으로 스승격인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과 제자격인 윤증을 따르는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 소론이 이후 경종 때에 국왕의 동생인 연잉군을 후원한 노론을 반역으로 규정, 노론을 숙청한 것이 바로 임오사옥이다. 그러나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자 이번에는 노론이 소론을 제거했고 이때 소론과 남인 결탁해 일어났던 것이 이인좌의 난이다. 이후 노론은 조정에서 확고한 우위를 유지함.

 

소론과 노론의 입장차를 살펴보면 연령대 차이처럼 소론은 개혁적 현실적이어서 청과의 평화공존을 모색한 반면, 노론은 골수 성리학적이어서 대명의리론을 앞세웠음.

 

이후 노론이 득세하던 정조 시절 정조가 생부인 사도세자 위상을 자기뜻대로 펼쳐나가자 노론이 옳거니 하면서 정조의 정책에 동조하는 부류를 시파라 하며 배척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에 맞서는 벽파가 됨. 따라서 사도세자가 폐세자된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 벽파의 주류는 노론이며 사도세자 동정론을 편 시파의 주류는 남인이었음.

 

한편 급진파 동인의 이야기로 다시 올라가면 동인의 중심인물인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어 동인이라 불림.

 

이후 동인은 서인이었던 정철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는 북인과 온건론을 주장하는 남인으로 분기. 젊은 급진파 북인은 임진왜란 당시의 주전론을 펼친 명분으로 정국 주도하다가 선조 다음인 광해군 당시 선조의 적자이자 국왕의 동생인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선조비인 인목대비를 축출하려는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다가 서인의 인조반정으로 숙청당함.

 

한편 장년 온건파 남인은 서인의 인조반정 이후 서인과 손잡고 조정의 대청 강화책을 비판하면서 정계에 참여. 이후 예송논쟁에서 왕가의 상복을 길게 잡아야 한다며 서인과 대립, 결국 승리하면서 현종과 숙종 초 정권을 잡음. 그러나 결국 최종 승자는 서인으로 정조가 죽은 뒤 중앙정계에서 완전 축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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