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하이트
Jonathan Haidt
미국의 심리학자. 뉴욕 출신으로 예일 대학교 철학 학사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심리학 박사를 마친 후로는 뉴욕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다루는 범주는 대략 도덕, 정치, 종교 정도를 아우르는 응용사회심리학. 그가 낸 책인 《바른 마음》 은 미국과 영국에서 엄청난 열풍을 일으켰다.
주요 연구 성과
우선 본인이 《바른 마음》의 출간으로 크게 재미를 봤고 그걸로 전세계를 돌며 강연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전후 맥락까지 함께 고려해서 본다면 하이트는 순간적인 도덕적 판단의 개인차 설명 방법에 대해서 논의의 수준을 몇 단계 끌어올렸다고 평가되고 있다. 현대 도덕심리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타 연구자
도덕성 기반 이론
동료 연구자 제시 그레이엄(J.Graham) 등과 함께 그가 제안한 도덕성 기반 이론(MFT; moral foundations theory)에 따르면, 사람들은 도덕적인 판단을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그 판단의 기준으로서 최대 여섯 가지 도덕성 기반에 입각하며, 여기에는 진보냐 보수냐 같은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개인이 채택하는 기반의 숫자에 차이가 난다. 이 이론에서 제시하는 도덕성 기반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은데, 한국어 번역이 워낙 제각각인지 나무위키 역시 가능한 한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방향으로 번역해 소개하기로 한다.
돌봄 vs. 위해 (care vs. harm)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타인을 배려한다면, 그것은 올바르다.
공정성 vs. 기만 (fairness vs. cheating)
정의롭지 못하게 자원이 배분되거나 무임승차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 정의롭게 자원이 배분되거나 기만자가 처벌받는다면, 그것은 올바르다.
충성 vs. 배신 (loyalty vs. betrayal)
어떤 집단에 속한 개인이 집단에 해가 되는 짓을 한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 집단에 속한 개인이 집단을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한다면, 그것은 올바르다.
권위 vs. 무질서 (authority vs. subversion)
어떤 사회의 위계서열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전복한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 윗사람의 권위에 순종하고 경의를 표한다면, 그것은 올바르다.
정결함 vs. 오염 (sanctity vs. degradation)
인간으로서 상징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더럽힌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 스스로를 지켜 깨끗이 하고 더욱 숭고하고 고귀한 것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올바르다.
자유 vs. 압제 (liberty vs. oppression)
다른 연구자에 의해 뒤늦게 추가된 도덕성 기반인데, 2020년에도 아직 그 이론적 파급력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것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보수와 진보에 따라 생각에 차이가 날 수 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짧게 말해서 진보주의자들은 위해 기반과 공정성 기반을 중점적으로 의식하며, 특히 전자를 더 중요시한다. 그리고 이 이론이 학계의 시선을 끌었던 진짜 이유, 보수주의자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위해 기반과 공정성 기반 이외에도 다른 도덕적 기반들까지 "골고루"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진보주의자들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사회적 불의를 야기하지 않는 한) 어지간하면 다 수용하고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믿는 편이고 이것이 특유의 톨레랑스로 나타난다면, 보수주의자들은 무엇이 도덕적인가에 대해 더욱 깐깐하고 엄격한 기준들을 적용하는 편이고 이것이 꼰대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2014년에 국내에서 수행된 한 연구에서는 진보들이 추구하는 도덕성 기반을 "개인 기반", 보수들이 추가로 추구하는 도덕성 기반을 "집단 결속 기반" 이라고 분류하기도 했다.
사안에 따라서 도덕성 기반은 다양하게 적용된다. 예컨대 도널드 트럼프의 혐오발언에 대해 미국 리버럴들(그리고 교양과 상식을 갖춘 보수주의자들)이 분개하는 것은, 그가 상습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위해를 가하기 때문이다. 성향을 막론하고 조별과제 때 무임승차자가 발생하는 것에 반감을 갖는 것은, 그것이 공정성 기반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유독 국가와 사회를 위한 개인의 희생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진보주의자와는 달리 나라에 대한 충성 역시 도덕적 요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유독 달동네 철거민들에 대해서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그들이 공권력의 권위를 개인이 누려야 할 권리보다 우선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유독 퀴어문화축제나 간통죄에 대해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것은, 그런 것들이 결국 인간의 상징적인 깨끗함과 고귀함을 오염시키고 타락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당하는 상황에서 진보주의자들은 "이 부도덕하고 금수 같은 놈들!" 이라고 보수주의자들을 비난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개인의 권리 외에도 집단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까지가 도덕적 행동의 요건이라고 이해할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자들이 성 소수자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저걸 무조건 괜찮다고 하다니, 세상이 어찌 되려고..." 하면서 혀를 차더라도, 진보주의자들은 그런 것이 부도덕하다고 판단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동성애자들이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요, 무임승차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표현을 바꾸면,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보다 도덕적인 행동을 더 넓은 의미에서 판단하고, 반대로 무엇이 부도덕하다고 판단할 때에는 상대적으로 더 높은 허들을 적용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조너선 하이트가 자신의 책 제목을 왜 "(도덕적으로) 올바른 마음" 이라고 정하고, 그 부제를 "어쩌다 선한 사람들이 정치와 종교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게 되었나" 로 정한 것인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차이는 사실 진보 대 보수 같은 형태로 일차원적으로 딱 떨어지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실제로 하이트의 다른 연구에 따르면, 진보나 보수 중 어느 한쪽으로 나눌 수 없는 회색지대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를 구태여 다시 둘로 나누면, 전자는 자유지상주의자로서 모든 종류의 도덕성 기반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경향을 보이며, 모든 종류의 도덕성 기반에 과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종교적 좌파"(religious left) 부류의 사람들도 존재한다. 종교적 좌파는 클래식한 보수주의자들처럼 인간의 정결함에도 신경을 쓰지만, 한편으로는 타인의 고통을 돌보고 빈부격차와 같은 정의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이 조너선 하이트의 그 유명한 도덕성 기반 이론의 전말이고 실제로 호응도 크게 받았지만, 현실적으로 그 가치에 비해 오히려 저평가되어 있다는 호평 아닌 호평이 많다. 이미 도덕성에 대해서는 하인츠 딜레마로 유명해진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이론이 학계를 꽉 잡고 있기에 아무래도 이와 대립각을 세우는 이론은 영향력을 쉽게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콜버그의 이론은 "어떤 기준에 입각한 도덕성이 더 '우월' 한가? 우리는 어떤 도덕성을 지향해야 하는가?" 에 대해 답하지만, 하이트의 이론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도덕적 판단기준은 어떻게 '차이' 를 보이는가?" 정도만을 다루기 때문에 어떤 가치개입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직관론자 (2001)
하이트가 학계에서 정말로 돌풍을 불러일으킨 것은 2012년에 집필된 《바른 마음》도 아니고, 2009년에 제안된 도덕성 기반 이론도 아니다. 그는 이미 2001년에 인간은 그렇게 심사숙고하지 않고 그때그때 되는 대로 도덕적인가 아닌가에 관한 판단을 한다는 사회적 직관론자(social intuitionist)라는 개념을 제안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예측 요인으로서 역겨움(disgust)과 같은 정서를 제안했는데, 무엇을 접하고 나서 곧바로 역겨운 느낌이 들면 그게 부도덕하다고 응답하게 되고, 그에 맞는 합리적 이유는 사후적으로 갖다 붙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서라는 놈은 마치 뛰어가는 강아지처럼 제 좋을 대로 달려가는 것이고, 우리의 이성이란 놈은 강아지의 꽁지에 달린 꼬리마냥 그 뒤를 따라붙어 갈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진화적으로 탑재된 역겨움을 어떻게든 이성적이고 사회적으로 포장하려는 대표적 케이스가 바로 근친상간을 부도덕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심리. 사실상, 학계에 조너선 하이트의 존재감을 제대로 알리게 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하이트 이전에 이미 데이비드 흄과 같은 철학자들이 인습과 도덕에 대하여 이러한 주장을 했었다. 여기서 하이트의 경우에는 심리학적 연구를 진행하였다.
조너선 하이트는 정서가 대통령, 이성은 대통령의 공보담당관이라고 비유했다.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무조건적인 변호를 하는 공보담당관처럼 정서가 무슨 선택을 하든 이성을 최대한 그 선택을 변호하는 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 공화당 지지자를 데려다 놓고 한 실험이 있다. 참가자에게 조지 부시가 엔론을 칭찬하는 자료를 보여준 다음, 엔론의 분식회계 사건을 보여주고, 마지막으로 조지 부시의 변명를 보여준다. 민주당 지지자는 엔론의 분식회계사건에 통쾌함을 느끼고 조지 부시의 변명도 제대로 수용하지 않는 반면 공화당 지지자는 분식회계사건에도 조지 부시를 비난하지 않고 조지 부시의 변명을 보자마자 안심해버린다. 때문에 어떤 입장을 설득할 때는 이성적으로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설득하기 보다는 일단 그 사람의 정서에 맞게, 그 사람의 편인 것처럼 다가가는 것이 설득하기 훨씬 쉽다고 한다.
바른 마음
1. 코끼리 위에 올라탄 기수
여기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한번 이야기를 듣고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판단해 보시라.
이야기 하나. 어떤 사람이 방바닥을 닦는데 걸레가 없어 태극기를 걸레로 사용했다.
이야기 둘. 어떤 남자가 닭 요리를 하는데, 그는 요리 전에 생닭으로 자위행위를 한다. 그리고 만든 요리는 항상 본인만 먹는다.
이야기 셋. 어떤 남매가 성인이 되고 단둘이 무인도로 여행을 간다. 그들은 합의하에 완벽한 피임을 한 채 성관계를 맺는다. 그들은 둘의 사이가 더 가까워짐을 느꼈지만, 더 이상 성관계를 맺을 생각은 없다.
이 이야기들을 만드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 등장인물의 행위가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 둘째, 읽는 사람을 가능한 불쾌하게 만들어라.
아마 공동체적/종교적 문화가 많이 퍼져있는 곳일수록 사람들은 등장인물들에게 도덕적 지적을 하는 동시에 불쾌감을 느낄 것이다. 반면에 개인주의적 문화가 많이 퍼져있다면 등장인물에게 딱히 잘못이 있다고 지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 가지 이야기를 듣고 불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합리, 이성, 진실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우리 뇌는 이런 것들과 친하지 않다. 몇 년 전에 유튜브에서 유행했던 주이의 트로피카나 광고를 떠올려보자. "트로피카나! 톡톡톡! 사과!"라는 문구를 무반주로 반복하는 괴랄한 광고는 사람들에게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마케팅 전공자에게 이 광고가 좋은 광고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리고 "당연히 좋은 광고."라는 답변을 들었다.
요지는 이렇다. 사람들이 뭔가 판단할 때는 이성과 직관이 관여한다. 이것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부르든, SYSTEM1과 SYSTEM2로 부르든, 코끼리와 기수로 부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직관이 우리 판단을 대부분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비록 트로피카나 광고는 순간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지라도, 우리가 목마른 상태로 가판대 앞에 서게 되면 무의식 중에 조금이라도 익숙한 상품을 선택하게 된다.
도덕적 판단이든 정치적 판단이든 예외는 없다. 따라서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기수가 아닌 코끼리(직관)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우리의 이성은 직관의 하인일 뿐이며, 직관에 따른 판단을 사후 정당화하는 변호사에 불과하다. 우리의 이성이 판사가 아니라 변호사로 진화한 이유는 집단에서 생존하기 위해 '사실'보다 '평판'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성이 변호사로 비유된다면, 도덕적 판단은 표를 모으는 정치인으로 비유된다. 우리는 엄밀한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자처럼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우리가 소속된 집단에 부합하는 도덕을 선택할 뿐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한 결과, 이러한 사람들조차도 무의식 중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음이 밝혀졌다.(이렇듯 평판을 중요시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이기에 SNS상에 달리는 악플을 참고 넘기는 건 멘탈에 관계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사람들이 '평판'이 아닌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하도록 만드는 조건이 존재하긴 한다.
(1) 의사결정자는 어떤 견해를 갖기 전 그 견해를 나중에 자신이 청중에게 해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2) 의사결정자는 청중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몰라야 한다.
(3) 의사결정자가 보기에 청중은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또 정확성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 세 조건이 모두 충족될 때에야 사람들은 그야말로 피 터지게 노력하여 진실을 찾으려고 한다. 이때는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까다로운 조건 아래서만 사람들은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진실을 추구해야 할 언론이나 학계에서는 이와 같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 애써야 한다.
이런 코끼리 부대를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의 코끼리(직관)는 너무 강력해서 기수(이성)는 코끼리를 통제하지 못한다.
2. 가난한 사람이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이유
가난한 사람들이 진보정당에 투표하지 않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태극기 부대 할아버지들이 먹고살만해서 광장으로 나오는 게 아니다. 이렇게 이해 불가능한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아이디어를 짜냈다. 계급배반 투표, 헤게모니, 프레임 이론... 등등. 하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바른 마음>의 저자인 조나단 하이트의 주장이다. 하이트는 진보와 보수가 단순히 한두 가지 가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무려 6가지 가치에 따라 나누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진보주의자들은 기껏해야 3가지 가치를 다루는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6가지 가치를 두루 만족시킴으로써 표를 가져간다.
여기서 조나단 하이트가 제시하는 6가지 가치는 다음과 같다.
1) 배려/피해
포유류에게 배려란 기본적인 본성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나 귀여운 인형을 보면 누구나 보호본능이 올라오기 마련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소수자들이 당하는 피해에 집중하는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집단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배려한다. 세월호 추모자와 천안함 추모자가 매년 대립각을 세우는 이유이다.
2) 자유/압제
동물들이 알파메일을 중심으로 무리를 형성하듯이, 인간들도 처음엔 위계질서를 가지고 생활해왔다. 하지만 인간의 무리는 동물들에 비해 보다 평등주의적이고, 도덕에 의존하는 특징을 보인다. 학자들은 이렇게 인간의 역사에 평등주의가 뿌리내리게 된 계기가 '무기'와 '험담'의 발명 덕분이라고 한다. 무기의 발명으로 다수가 소수의 압제자에게 대항할 수 있게 되었고, 험담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보다 평판에 신경 쓰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도 평등의 원천은 죽창이다.)
하이트는 '평등'이라는 가치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압제에 대항하여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 속에서만 평등주의가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평등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진보주의자들은 소수자들이 당하는 압제에 집중하는 한편, 보수주의자들은 국가가 개인에게 가하는 압제에 집중한다. 따라서 이런 보수주의자들의 태도는 작은 정부와 자유시장을 신봉하도록 만든다.
3) 공평성/부정
공평성을 추구하며 부정을 배척하는 속성은 집단에서 무임승차자를 걸러내기 위해 발전한 것이다. 보통 진보주의자의 공평성은 소득불평등에 주목하여 부자들의 특권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반대로 보수주의자들의 공평성은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큼 받아가는 것을 당연시하기에 세금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최근 한국에 떠오르는 공정성 담론도 공평성 가치의 범주에 속해있는 게 아닌가 싶다.
4) 충성심/배신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그리고 쿨병에 심하게 걸린)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집단에 소속감을 가지고 열광한다. 크게는 국가대표 스포츠 대항전에서부터, 연세대와 고려대, 좋아하는 밴드나 브랜드, 심지어 호드와 얼라이언스까지. 이러한 집단의식은 12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충성심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가치이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은 이 가치를 곧잘 무시해왔다. 그들은 국가나 민족에 기반한 집단주의적 사고를 경멸하지만, 대중들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집단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을만큼 중요하다.
5) 권위/전복
권위라는 것은 단순히 과거로부터 내려온 쓸데없는 악습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권위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장류 동물학자인 프란스 드 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회적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발로되려면 서열에 대한 동의와 권위에 대한 존중이 어느 정도 있지 않으면 안된다. 고양이를 데리고 간단한 집 안 규칙을 가르쳐 본 사람이라면 이 말뜻에 쉽게 수긍할 것이다."
권위 역시 보수주의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이며, 진보주의자들이 경시하는 가치이다. 진보주의자들은 권위라는 가치를 손쉽게 '착취'와 연결시킨다. 물론 제대로 된 권위는 단순히 힘으로 차지한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질서와 정의를 유지하는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심리학자 앨런 피스크도 ‘권위 서열'관계는 강압적 권력보다는 정당한 비대칭적 관계에 대한 인식이 바탕이 되며, 본래부터 착취의 성격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 사회의 도덕 질서 형성에 권위가 해준 역할은 실로 막중해서, 권위를 제쳐두고 인간 문명이 보여준 효율성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6) 고귀함/추함
판다는 평생 대나무를 먹고, 코알라는 평생 유칼립투스 잎을 먹는다. 하지만 인간과 같은 잡식동물은 무엇을 먹을지 알려면 반드시 학습이 필요하다. 생존을 위해서는 다양한 음식을 먹는 것이 유리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음식이 독/미생물/기생충에 오염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폴 로진은 여기에서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로 인해 인간은 평생 두 가지 모순된 동기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은 바로 '새로움 애호증(새로운 것에 대한 이끌림)'과 '새로움 혐오증(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외로움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을 밀쳐내는 인간 군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보통 모든 사람은 새로움 애호증과 혐오증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지만, 주로 진보주의자들은 새로운 것에 개방적인 성향을 가지며 보수주의자들은 새로운 것을 배척하는 성향을 가진다.
애초에 인간에게 '구토감' 또는 '역겨움'이라는 정서(혹은 생물학적 반응)가 존재하는 이유는 잡식동물의 딜레마 때문이다. 독/미생물/기생충에 오염된 음식으로부터 생존할 필요로 인해 인류는 구토감과 같은 정서를 발달시켰다. 저자인 조나단 하이트는 우리에게 구토감의 느낌이 없다면 무엇을 신성시하는 느낌도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따라서 고귀함/추함이라는 가치는 이러한 단계를 거쳐 발전한 것이다.
도덕 공동체 내에서 누군가 도덕적 상징을 훼손한다면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격한 반응을 보이며 그를 벌하려고 한다. 이는 주로 보수주의자들, 특히나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이러한 보수주의자들의 모습을 조롱하는 경향이 있지만, 본인들도 내심 고귀함의 가치에 기반한 도덕적 열정을 가지고 있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이 남성 중심적 상징들을 쉽게 해체하는 반면에, 본인들이 고귀하게 여기는 환경친화적 상징들은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3. 호모 듀플렉스
조나단 하이트는 인간의 본성이 90%는 침팬지, 나머지 10%인 벌과 같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개인성과 집단성을 동시에 가지는 이중적인 존재(Homo duplex)라는 것이다. 많은 학문들이 이기적인 개인으로 인간을 정의 내리지만, 실제 상황에서 인간은 남다른 희생정신을 보이곤 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단순히 이기적 개인을 상정했을 때는 설명하기 어렵다.
에밀 뒤르켐은 인간의 집단적 속성을 잘 파악한 사회학자다. 뒤르켐은 인간이 "집단적 들썩임(collective effervescence)"이라는 고차원적 감성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이는 집단적 의식을 통해 인간이 느끼는 열정과 열광으로써, 뒤르켐에 따르면 '어딘가에 모이는 행위 그것 자체'가 무엇보다도 강력한 자극제이다. 인터넷 기술이 발전하였지만 많은 종교 공동체에서 여전히 종교집회를 중요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인간에게 침팬지가 아닌 벌의 속성, 즉 ‘군집 스위치’를 켜는 방법은 합창단에서 노래하기, 군악대에서 연주하기, 설교 듣기, 정치 집회에 참석하기, 명상하기 등이 있다. 과거 아즈텍인들은 환각 버섯을 통해 군집 스위치를 켜기도 했는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LSD를 이용하면 우울증 환자를 치료하는데 효과적인 결과를 보인다고 한다. 지나친 자아 중심성에서 벗어나 더 큰 집단, 그리고 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마치 카를 융이 말했던 집단 무의식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집단의식은 어디까지 작용하는 것일까? 사람과 사람 간의 유대감을 일으키는 호르몬인 옥시토신은 인간을 온정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외집단의 사람에게는 공격성을 높이기도 한다. 따라서 사람은 본인이 속해있는 그룹의 사람들에게 선택적으로 공감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이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기반하여 감수성과 공감으로 귀결되는 정치가 보편적 도덕률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4. 종교와 정치
많은 사람들이 쉽게 종교를 비이성적이고 전근대적이라며 비판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종교는 어떻게 인류의 역사 속에서 번성할 수 있었을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본래 인류가 수렵과 채집을 하던 시절의 신들은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농경생활을 하며 규모 있는 생활을 하게 되면 신들도 훨씬 도덕적인 모습을 보인다. 규모가 큰 집단의 신들일수록 집단 내에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행동(살인, 간통, 위증, 서약 파기) 등을 중하게 여긴다.
인간에게 타인과 이유 없이 협력하라는 요구는 들어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최소의 비용으로 이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바로 종교이다. 실제로 19세기 공동생활촌의 생존율을 조사한 결과 비종교적인 공동생활촌은 20년 뒤 6%만 살아남은 반면 종교적인 공동생활촌은 39%가 살아남았다. 공동생활촌이 구성원에게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할수록 살아남은 기간도 길어진 것이다. 인류학자 리처드 소시스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비종교적인 공동생활촌의 경우 희생에 대한 요구가 있었음에도 구성원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집단을 위해 개인이 희생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두운 환경에서 시험을 보면 부정행위를 더 많이 저지르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조악한 형태의 눈 모양이라도 책상에 붙여놓으면 부정행위가 줄어드는 효과를 보인다. 또한 신과 관련된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어서 보여주어도 사람들의 부정행위는 줄어든다. 왜냐하면 인간은 기수(이성)가 아닌 코끼리(직관)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아마 무신론자들을 대상으로 실험해봐도 결과는 비슷할 것이다. 이와 같은 종교의 긍정적 효과가 전 사회적으로 퍼진다면? 효과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부정행위와 서약 파기를 줄이는 효과는 곧 상업의 발달을 일으킨다. 유대인들이 종교 공동체를 바탕으로 상업에서 활발한 활동과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종교는 인류에게 집단의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는 좋은 예시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종교 공동체를 잃음과 동시에 뭉칠만한 집단을 잃었다. 그리고 정치 공동체는 진보와 보수로 쪼개졌고 서로에 대한 몰이해가 커지고 있다. 특히 연구에 따르면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에게 터무니없는 편견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이 공감능력이 전혀 없고 사회정의에 무관심 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실제 보수주의자들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와 같은 진보의 자기폐쇄적 행태는 '정체성 정치'와 더불어 더 심각해졌다. 진보정치는 인종/젠더/장애여부에 따라 사람들을 갈라쳤다. 진보주의자들은 다수를 모아 집단 스위치를 켜는 방법을 고민하기는커녕, 정체성이라는 편협한 특징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소수만을 위한 정치를 지향했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코끼리(직관)를 설득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정체성 정치를 고집하는 한 진보좌파가 많은 표를 받아 정치적 승리를 거두는 일은 요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