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8년(태조 7) 8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
일명 방원(芳遠)의 난 또는 무인정사(戊寅定社), 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고도 한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 간의 싸움인 동시에 정도전 일당과 방원 일당의 권력다툼이기도 하다.
조선 건국 이후 국가의 통치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개국공신들의 지위가 급격히 상승하였다. 1393년(태조 2)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설립을 계기로 정도전을 주축으로 추진된 병권집중운동과 중앙집권화정책은 권력구조면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개국공신 중 정도전의 지위가 크게 부상했지만, 여타의 훈신(勳臣)과 왕실세력 및 무장세력은 정치의 핵심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398년 이후 이른바 진법훈련(陣法訓鍊)이 강화되자 왕자·종친, 기타 훈신 및 무장들이 가지고 있던 사병(私兵)에 대한 통수권이 해체될 단계에 이르러 양파의 대립은 극에 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은 가장 첨예하였다.
태조에게는 전 왕비 한씨(韓氏) 소생의 여섯 아들과 계비 강씨(康氏) 소생의 두 아들이 있었다. 방원은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그는 개국에 가장 공이 크고 야심과 재질이 큰 인물이었던 만큼 유신(儒臣) 중심의 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정도전 등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방원은 개국공신에도 책봉되지 못했다(태조 7년 12월에 추록됨). 또한 세자 책봉 경쟁에서도 탈락했다. 태조 즉위 초의 세자 책봉에서 태조는 계비 강씨의 뜻에 따라 일곱째 아들 방번(芳蕃)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공신 배극렴(裵克廉)·조준(趙俊) 등은 그 위인(爲人)이 세자에 적당하지 않다며 방원의 세자 책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결국 여덟째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고 정도전에게 세자 보도(輔導)의 책임을 지게 하였다. 이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 특히 방원과 그의 추종자들의 불만이 대단했다. 방원은 권력구조의 핵심에서 차츰 밀려나고, 진법훈련이 강화되어 세력 기반의 마지막 보루인 사병마저 혁파될 위기에 놓였다.
이에 방원은 정도전·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 등이 밀모해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며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단번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트집을 잡아,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해 반대파를 제거하였다.
그는 이숙번(李叔蕃) 등의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과 남은·심효생·박위(朴葳)·유만수(柳蔓殊)·장지화(張至和)·이근(李懃) 등을 갑자기 습격하여 살해했다. 그리고 세자 방석을 폐위하여 귀양 보내는 도중에 살해하고, 방석의 동복형(同腹兄) 방번도 함께 죽였다. 이렇게 방원의 정적은 거의 제거되었고, 정치 정세도 크게 바뀌었다.
왕자 종친과 조준 등 일부 개국공신 및 방원의 심복인 하륜(河崙)·이거이(李居易)·이무(李茂) 등이 실권을 잡았다. 이들은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방원 자신이 사양해 둘째 방과(芳果)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실권은 방원 일당이 장악하였다.
정종이 즉위하자 방원 일당은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서훈되었다. 방원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해 병권 집중과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한 제도개혁을 추진하면서 세력 기반을 강화하였다.
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고 그를 제거했지만 권력의 구심점이 자기에게 쏠리자, 이제는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다.
제1차 왕자의 난은 국가의 통치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방원이 권력획득을 위해 일으킨 정변이었다. 정도전의 중앙집권화 정책은 방원의 요구에 맞게 즉위를 거쳐, 조정, 수용되었다. 방원은 다시 제2차 왕자의 난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어 왕위에 올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면서 통치질서를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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