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
유럽, 지중해, 중동, 아프리카, 카리브해, 중국 대륙, 태평양
원인
사라예보 사건과 그 사건으로 폭발한, 오랜 시간 축적되던 열강들 간의 갈등과 민족주의의 충돌 등의 복합적 원인
■ 지원 관계 / ■ 동맹 관계 / ■ 조약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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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협상국의 승리
영향
동맹국 국가 해체
중동과 유럽 국가 독립,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 독립선언
전제군주제 몰락 및 유럽 내 황제국 전멸 및 이로 인한 공화제의 대두
국제연맹 창설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
피해규모
사망(군 병력) 5,525,000명
부상(군 병력) 12,831,500명
실종 4,121,000명
총 사상자 22,477,500명
사망(군 병력) 4,386,000명
부상(군 병력) 8,388,000명
실종 3,629,000명
총 사상자 16,403,000명
제1차 세계 대전은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전쟁을 선포하여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 세계적으로 전개된 전쟁이다. 2014년 1차 세계 대전 개전 100주년을 맞았으며, 2018년 11월 11일에 종전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 전개
독일 제국의 신민들에게 고한다! 제국의 형성 이후 43년 동안 짐과 짐의 조상들은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고 우리의 평화롭고 강력한 발전을 증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그러나 적들은 우리의 성공을 시기하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9일 후인 1914년 8월 6일, 빌헬름 2세 카이저의 연설 중.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은 100년 간의 평화 시대 속에서 지속적인 팽창을 이룬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과 그 과정에서 소외된 독일 제국으로 대표되는 신흥 제국들의 불만, 유럽 내 민족주의적 갈등 등 다수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섞여있다. 그런 과정에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을 중심으로 한 삼국 협상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을 중심으로한 삼국 동맹이 형성되었고 이들 두 동맹체 간의 대립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19세의 세르비아 민족주의 혁명가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했다. 삼국 동맹 소속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에 분노해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이때 세르비아를 같은 슬라브족 국가로써 보호하던 삼국 협상 소속의 러시아 제국이 반발하며 총동원령을 내리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맹인 독일 제국이 러시아 제국과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영국은 느닷없는 발칸 반도의 분쟁이 전 유럽을 휩쓰는 대규모의 전쟁으로 커지려고 하자 중립을 지켰으나, 독일 제국이 슐리펜 계획에 따라 영국이 독립을 보장하던 벨기에를 침공하자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참전을 선언한다. 일본 제국 또한 영일동맹에 근거하여 독일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1914년 11월에는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면서 전역이 캅카스와 중동으로 확대되게 된다. 이탈리아 왕국은 1915년 참전했고, 미국은 이어서 1917년에 참전했다. 단순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간의 분쟁으로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은 당대의 주요 열강들이 협상국과 동맹국이라는 2개의 동맹체 아래 모두 말려드는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고 만다.
시간이 지나 전쟁이 길어지며 모든 주요국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수많은 사상자와 장기화되는 전시 경제에 대한 피로감으로 인해 전쟁은 끝을 보이게 된다.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1917년 3월 붕괴된 이후 동부 전선이 해소되었으며 볼셰비키와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러시아가 전쟁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리자 동맹국이 러시아 영토를 확보했다. 1918년 11월 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또한 러시아 제국과의 휴전에 합의했다. 1918년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은 마지막 발악으로 루덴도르프 공세를 실시했으나, 협상군은 독일의 공세를 방어하고 이후 진격하여 독일군 참호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독일 11월 혁명 이후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합의하면서 협상국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전쟁 이후 세계는 180도 바뀌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 아래 난도질을 당했다. 러시아는 내전에 휩싸이고 말았으며 오스만 제국은 국가가 완전히 해체될 위기였으나 튀르키예 독립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오늘날 튀르키예의 형태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승전국으로써 패전국의 영토와 식민지를 흡수해 전세계에 새로운 국경선을 그렸다. 이와 같은 대전쟁을 막기 위해 국제연맹이 탄생했으나, 패전국에 대한 징벌의식은 유럽의 민족주의 부활과 독일에서의 파시즘 부흥을 낳았고, 전후 전쟁에 대한 공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게 했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의 결말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단초를 제공했다.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지만 일반적으로 크게 봤을 때 근본적인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과 그들의 식민지 문제를 둘러싸고 열강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된 것이 지목된다.
제국주의와 열강들간의 긴장 고조
제1차 세계 대전의 기원은 팽창된 유럽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1815년부터 1914년까지 유럽에서 전쟁이 거의 벌어지지 않는 안정된 정세가 조성된 덕분에 산업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유럽의 생산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급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열강들이 자국의 산업을 팽창시키며 세워진 수많은 공장들을 운영하기 위해 원자재가, 그를 가공한 상품을 팔 시장이 필요했다. 강대국들의 산업이 점차 성장하며 시장은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진 레드오션이 되었고 유럽 각국은 식민지 쟁탈전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일찌감치 산업혁명을 성공시키고 국내 정치가 안정되어 있던 영국은 우위에 서있는 해군력 등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보유했고 프랑스도 여기에 가세했다.
그에 비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독일 통일을 통해 새로 떠오른 신흥 강국 독일 제국은 통일전쟁을 거치면서 영국, 프랑스에 비해 산업과 공업 발달 과정이 늦어졌고 이 때문에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고 보니 이미 알짜배기 땅들은 영국, 프랑스 등이 다 차지한 상태였다. 결국 독일이 식민지를 획득할 방법은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를 뺏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독일은 기존 식민제국인 영국, 프랑스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으로 가장 크게 지적되고 있다. 범게르만주의로 탄생한 국가가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상황은 독일인들에게 강대국의 국력에 걸맞은 식민지를 바라게 만들었다.
특히 빌헬름 2세는 식민지를 위해 영국 해군에 맞서 해군 증강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것은 해양 패권에 민감하던 영국의 신경을 크게 건드렸다. 윈스턴 처칠은 영독 관계에서 함대란, 독프 관계에서의 알자스-로렌이 의미하는 것과 같다고 경고했고, 런던 주재 독일대사였던 파울 볼프 메테르니히 백작(Paul Graf Wolff Metternich zur Gracht)도 해군을 증강하면 1915년 이전에 영국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영국의 경고를 무시했고, 계속해서 해군 증강을 반대한 메테르니히를 1912년에 해임해 버렸다. 건함 경쟁은 영국과 독일을 적대관계로 만들었으며 세계 대전의 흐름을 결정지었다.
이미 제1차 대전 이전에도 독일 제국과 영국, 프랑스의 대립은 위험수위에 달해 있었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계 보어인들과 싸운 보어 전쟁 당시에도 보어인들의 배후에 독일 제국이 있었고, 프랑스와는 두 차례에 걸친 모로코 위기로 대립하는 상황이었다.
민족주의의 발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같은 식민지와는 인연이 없는 다민족 국가 또한 역시 내부적으로는 점점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민족주의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주요민족인 오스트리아, 헝가리인들은 인구 구성의 반도 안 되었으나 다른 민족들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너무 많은 이권을 가졌다는 것에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외적으로도 안 좋았는데 독일 제국과 함께 범게르만주의의 영향을 받는 국가로서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에 맞서 발칸 반도를 둘러싼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발칸 반도는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하였는데, 그 뒤로 발칸 반도의 각국은 발칸 전쟁 등 영토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을 선동하여 지중해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 제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불만을 품은 나라는 세르비아 왕국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를 합병하고 러시아 제국이 독일 제국의 압력으로 이에 굴복하자 (1878년, 1908년) 세르비아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극렬한 적대감을 품게 된다. 세르비아 왕국의 적대감은 1914년 6월 28일 제1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인 사라예보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과 관련 세르비아 왕국 측에 검은 손의 해체 및 처벌과 반오스트리아 활동 해체, 사라예보 사건 가담자들에 대한 세르비아 내 재판 개입 등을 요구했고, 세르비아 왕국은 이를 거부하면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이에 대해 독일 제국의 지원이 확실시된 이후에는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선전포고 역시 예견되어 있었고, 그에 대한 핑계가 필요했던 것뿐이라는 해석이 존재한다. 이 긴박한 1달의 일련의 사태를 아래에서도 설명하듯 7월 위기라고 한다.
전통적인 유럽 내 외교 균형의 붕괴
본래 19세기 오토 폰 비스마르크 시대의 독일은 독일 통일 이후 더 이상 중부 유럽에서 팽창을 시도하면 열강들과의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 판단하여 주변 강대국과의 외교에 신경을 많이 썼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유럽 내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이 되는 것을 자처하면서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3제 동맹을 맺고 전통적인 서유럽의 강대국이던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 즉위 후, 그는 비스마르크를 강제로 은퇴시키고 외교체제를 개편하면서 러시아를 버리고 오헝제국을 유일한 동맹 파트너로 선택한다. 이에 러시아는 당연히 서로 고립된 프랑스와 1894년에 러불동맹을 체결하며, 독일은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영국 역시 독일의 성장을 상당히 경계했고 오랜 경쟁 관계였던 프랑스, 러시아와 삼국 협상을 체결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최근에는 만약 비스마르크의 실각이나 빌헬름 2세의 팽창 정책이 없었다고 해도 독일이 유럽의 가장 강대한 국가가 되어가는 이상 어차피 영국-프랑스-러시아 삼국 협상을 막을 수 없었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1850년까지만 해도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의 경제력 비율은 70:12:7:4로 독일의 경제력이 당시 압도적이였던 영국에 비할 바가 못되었지만, 1900년에는 독일이 영국을 거의 따라잡아서 37:11:34:10이 되었고, 1910년에는 30:12:39:10으로 독일의 경제력이 영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인구 측면에서도 6,70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독일이 영국의 4,600만 명이나 프랑스의 4000만 명을 가볍게 앞서고 있었고, 이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를 격파했던 독일의 강력한 육군까지 고려한다면 독일이 조만간 유럽의 그 어떤 나라도 단독으로 상대할 수 없는 강대국이 된다는 것은 불보듯이 뻔한 상황이었다. 이렇다보니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지속적으로 독일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영국과 러시아까지 독일의 적국으로 돌아서는 것은 독일의 정책 방향과 상관없이 이미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과거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가 서로 싸우면서 국력을 소진하는 동안 이득을 챙기려는 외교 정책을 펼치고 있었으나, 독일의 힘이 지나치게 막강해지자 이제 독일을 러시아의 안보 위협으로 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은 러시아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도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으로 동유럽과 발칸 반도의 패권을 두고 갈등을 겪고 있었기에 두 국가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면 독일도 휘말려 들어가서 외교 관계가 엉망이 되곤 했다. 때문에 비스마르크의 말년부터 이미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고, 비스마르크가 실각하기 전인 1887년에 마지막으로 러시아와의 동맹을 갱신했을 시절에는 많은 독일 지식인들이 "만약 프랑스와 전쟁이 벌어진다면 러시아가 조약을 파기하고 독일을 공격하러 올 것이다"라고 믿고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져 가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조금이라도 연장해보려고 노력하기는 했으나, 만약 비스마르크가 총리를 더 오래 했다고 해도 언젠가는 결국 러시아와의 친선 관계가 깨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국도 제국주의 팽창 정책에 몰두하던 시절에는 식민지 쟁탈전의 경쟁 상대인 프랑스를 견제해주던 독일에 우호적이었지만, 1890년대부터 독일과의 관계가 서서히 냉랭해지기 시작했고, 1904년 영불협상을 타결하여 해외 식민지를 둘러싼 프랑스와의 분쟁을 종결시키면서 대결 상대를 독일로 옮길 환경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관세와 사회 개혁 문제가 쟁점이 된 1906년 선거에서 자유당이 보수당을 누르고 압승을 거두면서 독일을 주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당시 자유당 세력은 지나친 식민지 팽창 정책을 혐오했으며 유럽에서의 세력 균형을 중시했기 때문에, 이전의 보수당보다 훨씬 더 독일에 적대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러일전쟁에서 많은 국력을 소진하고도 전쟁에서 패한 러시아와 이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에게 패배했던 프랑스의 상황도 영국이 더 이상 타국에게 독일을 견제하는 임무를 떠넘길 수 없게 하는데 일조 했다.
안일한 대처
존 키건의 저서 1차세계대전에 의하면 러시아 제국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영국대사 조지 윌리엄 뷰캐넌(George William Buchanan,1854 ~ 1924)과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2세가 최초로 세계 대전의 불씨를 인식했다고 추측된다. 이들은 당사국들에게 회의를 제안하면서 이 사태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당시 들어오는 정보와 각종 제안들만으로 이미 각국 외교부 실무진들은 그로기 상태였다. 전화같은 현대 통신의 이기가 없던 시절의 한계. 가장 큰 문제는 독일 제국 수뇌부들은 카이저부터가 일단 요트타고 놀고 있었던 걸 시작으로 거진 휴가 중이란 것이다.
당시 세계 대전은 그저 '가능성'이었고, 경제적으로만 보면 또 별개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벨 에포크를 거치며 산업혁명과 철도는 인구, 기술, 생산, 운수에 혁명적인 진보를 만들어냈다. 당시의 국제적인 규제는 없다시피했고 국제 자본은 전세계를 오갔다. 1900~1910년 사이에는 평균적으로 연간 3억 5천만 파운드의 금액이 유럽에서 아메리카, 아시아로 오갔으며, 독일 철강 기업에 투자금의 상당수가 적국 프랑스의 자본이거나 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국제 전신 연합, 만국 우편 연합과 같은 온갖 국제협력을 위한 협의회들이 설치되어 가며 상호의존을 가속화시켰고, 이러한 거미줄과 같은 상호 교류는 세계 대전과 같은 악몽은 그저 악몽일 뿐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2차 대전과 마찬가지로 전쟁은 단순한 기대만으로 피할 수 없었다.
발발 과정 - 7월 위기
전쟁 열병/자원병 열풍
1차 세계 대전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역사상 손꼽힐 정도로 크고 끔찍한 전쟁에 자원입대를 하면서 군대로 들어간 젊은이들이 넘쳤다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언론에서는 청년들에게 군대로 입대할 것을 권했고 "Your country needs you", "I want you" 등 유명한 문구의 모병 포스터들이 거리에 붙여졌다. 물론 전쟁에 대해서 비판적이며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전쟁을 피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겁쟁이나 매국노 등으로 몰리기 일쑤였고 심지어 프랑스의 장 조레스처럼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주변 또래들은 자원해서 군대로 입대하는데 건강한 청년이 입대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기란 쉽지 않았다.
거기다 당시에는 낭만주의가 만연하던 벨 에포크 시대였다. 시나 소설에서도 나폴레옹과 같은 전쟁 영웅들의 멋진 서사시를 노래할 뿐 전쟁의 참혹함이나 그 속에서 죽은 병사들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젊은이들에게 전쟁은 참혹하고 잔인한 것이 아닌, 단순히 영웅놀음이나 성인식, 모험 등으로 각인되었다.
또한 전쟁에 대한 지나친 낙관도 있었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40년 동안이나 이어진 벨 에포크 시대의 길어진 평화로 인해 전쟁에 대해서 다소 낭만적인 생각이나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100여 년간 전 유럽대륙을 아우르는 대규모의 전면전도 없었던 데다 전쟁을 치르더라도 대부분 단기간 내에 좀 치고 받으면서 끝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시대는 산업혁명과 병기의 발달로 인해 과거와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전쟁관은 여전히 중세적, 전근대적이었다. 19세기만 하더라도 군대라고 하면 금 장식이 달린 유니폼을 입고 포화와 총격에도 꿋꿋히 전진하는 라인배틀로 상징되는 명예와 자부심이 느껴지는 것이다. 특히 중세 유럽의 전쟁의 양상과도 1차대전은 너무나도 달랐다. 과거 유럽 왕족은 친인척으로 얽힌 경우가 많았고, 전쟁을 스포츠처럼 여기는 경향이 많았다. 그래서 중국의 중원 통일처럼 나라 대 나라가 존폐 여부를 걸고 싸우는 경향이 아닌 몇번의 큰 전투 이후 판도를 본뒤 조약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평민들에게도 전쟁은 기사들이 출진하고, 영주가 바뀌더라도 거기서 그칠 뿐, 체감하는 개인적인 일은 없어 크게 상관있지 않은 이야기들이였다.
그러나 20세기가 들어서면서 더이상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유럽에서 애국심과 민족주의 열풍이 강하게 불던 시기로, 또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징집된 병력을 철도로 얼마나 빨리 집결시키는지가 승리의 큰 요소가 됨이 증명되었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도 모병과 애국심 고취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전쟁터에 나아갔다. 냉병기 시대와 달리 총이 개발되면서 더 이상 숙련된 병사가 필수적이지 않았다. 1명의 숙련된 기관총 사수보다 5명의 초보 기관총 사수가 더 압도적이었다. 거기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생산이 가능했긴 때문에 물자 또한 충족시킬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영주 대 영주의 돈(전쟁수행유지용) 대결이 아닌 국가 대 국가의 국가 총동원개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총력전은 전쟁의 승패와 무관하게 참전국 전원을 존폐의 위기에 몰아넣는 다같이 망하는 수준의 피해를 불러왔다.
사실상 오랫동안 유럽 본토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탓에 유럽인들에게 전쟁이란 기껏해야 머나먼 식민지에서 낙후된 토착민들을 우월한 기술력이 적용된 무기로 학살하는 경험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조국의 군대가 타 국가를 손쉽게 혼내줄 것이라는 생각에 흥분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급속도로 발달하던 기계화된 무기들이 자신들을 향해 대량으로 사용되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이 발생할 것인가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1910년대 초기에 벌어진 몇 차례의 국가들 간의 형식적인 대치만 하는 모습은 이러한 착각을 더욱 부추겼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가 식민지 대결을 하면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졌는데... 그러다 보니 많은 청년들은 "그까짓 전쟁... 이번에도 적당히 대치만 하고 총 몇번 쏘다보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나는 영웅이 되겠지?" 라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결국 전쟁 발발 초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의 모병소에 국가에 대한 거룩한 의무를 수행하고 살아서 돌아오면 전쟁영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한 지원병 청년들이 미어터졌다. 하지만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할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갈지 제대로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전쟁이 아무리 길어봐야 3개월 정도면 끝나고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지나친 낙관에 차 있었다. 즉, 낭만주의와 애국심에 빠저든 젊은이들이 "강한 우리나라의 군대가 적군을 물리치고, 나는 그곳에서 영웅처럼 싸워서 승리하고 명예롭게 훈장과 포상을 받고 제대한다!!!" 라는 매우 비현실적인 상상에 빠져서 저승사자가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전쟁터로 자원입대를 한 것이다.
물론, 자원입대를 하고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귀향한 이들은 전쟁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를 무려 4년도 넘게 버텨낸 뒤에야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돌아온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으며, 가족들과 고향 친구들은 대부분 끔찍한 전쟁을 겪고 세상을 떠났다. 결국 이들은 전쟁의 끔찍한 후유증 속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억을 잊지 못했다.
실제로 서부전선의 경우는 병사들의 평균 생존시간은 겨우 5일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영국군의 경우는 같은 지역 출신자들은 되도록 같은 부대에 몰아넣었는데, 대량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투들에서 특정 지역의 청년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이 빈번했다. 운 좋게 살아남더라도, 주변에 죽은 전우들은 고향 친구들일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굶주림이나 추위는 물론이고 물이 고인 진흙탕 참호에서 참호족에 걸리기 일쑤였으며, 대량의 포화 등을 겪고 정신적으로 망가지는 셸 쇼크 증상을 보이는 병사들도 많이 발생했다.
또한, 자신들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자신들에게 돌아오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생존자들 중 일부는 그대로 군대에 말뚝을 박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들은 또 다시 세계 대전에 나가야 했다. 말뚝 외에도 국민돌격대, 임관, 정계, 재입대, 추축국의 침공에 대항한 저항운동 등으로 2차대전에도 참전한 1차대전 참전 출신자들도 많았다.
한편, 전쟁이 길어지고 불구가 된 전상자들과 비어있는 관이 고향으로 돌아오며 후방에서도 전쟁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전쟁을 결정한 정부는 선거 등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 그럼에도 전쟁이 끝나는 그 날까지 학업, 질병 등의 이유로 정당하게 면제받을 수 있음에도 자원입대 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당시는 민족주의/애국심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에, 사지멀쩡한 건장한 청년이 군복을 입지 않고 거리를 쉽게 돌아다닐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은 뒤에서 겁쟁이라고 험담을 당하고, 종종 어째서 군대로 가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기 일쑤였다. 굳이 뭐라 안하는 분위기라 해도 오히려 낭만주의가 지배적일 때는 전쟁분위기를 혐오했지만 정작 전쟁터에 가서 죽어가는 또래 연령대의 청년들을 보면서부터는, 오히려 "전우들은 죽어가는데 나만 후방에서 편하게 지낸다" 라는 죄책감에 어떻게 될 지 뻔히 알면서도 자진입대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결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많은 청년들이 자원해서 사지로 들어갔는데, 특히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되어버린 청년들은 적국을 증오하는 심정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했다.
특히 그 낭만주의에 가장 강하게 경도되어있던 청년 귀족층들은 나중에 전선의 상황이 알려진 후에도 가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명예욕과 의무심에 계속해서 장교로 입대했는데 초급 장교들은 보병전에서 항상 최선봉에 서야 했으므로 일반 보병들보다도 훨씬 죽을 확률이 높았으며 실제로 엄청난 숫자가 사망했다. 전후 유럽 귀족층에서 아들들이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전부 죽어버려서 가계가 흔들린 곳이 많을 지경이었다.
전쟁의 전개
전쟁의 시작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왕국의 민족주의 조직 검은 손 소속의 단원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암살당하면서 이에 분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함에 따라 제1차 대전이 열렸다(세르비아 침공). 그러나 얼마 안가 점령될 거라 여겨졌던 세르비아는 오히려 침공을 격퇴하고 1915년 11월까지 버텼다.
그 뒤 세르비아의 보호를 이유로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독일은 러시아에게 총동원령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하고 무시되자 다음날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독일은 서쪽의 프랑스를 최대한 빨리 굴복시켜 동쪽의 러시아 제국 방면으로 집중해 전쟁을 수행한다는 내용의 슐리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고, 1914년 8월에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8월 2일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3일에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한 뒤 중립국 벨기에가 독일군의 통과를 거부하자 4일부터 침공해 점령한다. 영국은 중립을 표방했었으나 영국이 독립을 인정했던 벨기에의 중립이 무시당한 것을 이유로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 한 뒤 프랑스로 영국 원정군을 투입하기 시작했으며 발칸 반도의 국가 등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전포고를 교환했다.
8월 7일부터는 독일군이 프랑스 영토 안에서 국경 전투를 열어 승리해 파리 50여km 앞까지 진격할 정도로 선전한다. 한편 러시아가 급하게 8월 중순부터 독일의 동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를 공격, 갈리치아의 중심 도시인 렘베르크를 비롯한 갈리치아의 상당 지역과 동프로이센의 국경 지대 일부를 점령했지만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반격당해 큰 피해를 입고 동부전선 우위를 내줬으며 오스트리아군도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린다. 하지만 9월의 마른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프랑스+영국 협상군에게 저지당하며 진격의 힘을 잃고 주저앉게 된다. 결국 독일은 계획대로 프랑스를 조기에 굴복시키기에 실패했고, 우려했던 대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양면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지에서도 유럽의 식민지였던 지역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독일과 영국 식민지에서는 종전까지 현지 병력들의 전투가 계속 일어났다. 라이베리아가 개전 1주만에 대독 선전포고를 한 이래 8월 말에 일본 제국도 영국과 함께 독일령이었던 칭다오를 침공해 점령했고 9월에는 호주가 독일령 뉴기니를 점령했다. 태평양 지역에 있던 독일 함대는 본국으로 귀환을 시도했지만 영국 함대의 습격을 받다가 포클랜드 해전에서 괴멸되었다.
참호전의 수렁
더 진격할 수 없게 된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프랑스 방면의 점령지역 유지와 방어를 위해서 참호를 팠고 협상군도 독일의 진공을 저지하기 위해서 참호를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상대편 참호의 측면으로 계속해서 기동을 되풀이한 결과 끝내 참호선이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늘어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가장 끔찍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참호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나라에도 참호전이란 교리가 없었으며 의도된 전쟁 양상이 아니었다. 과거 남북전쟁 당시 서부 전역의 빅스버그 포위전, 피터스버그 포위전에서 초기 형태의 참호전이 선보여졌지만 유럽국가들은 산개, 엄폐, 참호를 활용한 남북전쟁에 대해 아 그 신대륙 촌놈들, 참 촌스럽게 전쟁하네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또한 기관총, 야포, 철조망 등 방어에 유리한 무기는 발달했으나 참호 돌파를 위한 효과적인 무기가 없었기에 양측은 효과적인 전진을 하지 못하고 인명피해만 늘어가는 소모전을 치르며 대치하게 된다. 대전기간 그 어느 쪽도 참호전 양상을 타개하는 데는 실패했다.
의외로 러시아 제국군이 동맹국을 상대로 참호 돌파를 많이 했었다. 그러나 상대는 독일이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동부전선에선 참호전을 중요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서부전선에선 끝없이 이어지는 참호로 요새화 된 지역은 우회해서 돌아갈 길도 없었고, 참호에는 포격도 썩 효과적이지 않았다. 결국 대량의 포격을 적의 참호에 가한 후 정면으로 병력을 돌격시키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적의 기관총과 철조망, 그리고 포격 때문에 아군은 적의 참호에 가기도 전에 전멸하기 일쑤였다. 설사 적의 참호를 점령하더라도 그 앞에는 적들이 준비한 제2, 제3의 참호가 버티고 있었다.
서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을 제외한 동부전선이나 발칸, 캅카스, 중동 전선에서는 참호전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 자체가 없었다. 이쪽에서는 철도와 기병을 동원해 대규모 기동전을 펼치고 있었다.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양상이 판이하게 달라진 이유는 병력밀도가 차이나는 것이 컸다. 서부전선은 전 전선에 걸쳐 병력이 빽빽하게 들어차 병력밀도가 낮은 취약점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참호전이라는 일종의 진지전 양상으로 변모했다. 이탈리아 전선도 마찬가지로 병력 밀도가 높을뿐만 아니라 고지대인 알프스 산맥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므로 대개 참호를 파고 포격을 주고받는 진지전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동부전선은 흑해에서 발트 해까지의 거대한 전선이 형성되다 보니 참호에 의존한 고수방어를 하려다가는 쉽사리 측면돌파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보병과 기병에 의한 기동전 양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오스만의 참전
오스만 제국은 이 시점까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1914년 7월에 영국에서 만들어지던 오스만 전함 두 척을 동맹국 병기라는 이유로 영국이 부당하게 압류하자 오스만의 영국에 대한 여론이 나빠졌으며 8월에 독일은 오스만에게 비밀리에 동맹을 추진하고 전함 두 척을 양도하고 군사적으로 지원해 줘 환심을 산다. 그리고 오스만 해군 소속이 되었음에도 독일 해군이 지휘하던 이 두 전함은 10월 말에 러시아의 세바스토폴 항구를 기습 공격해 버렸고 러시아는 11월에 오스만 제국에게 선전포고하여 캅카스 방면을 공격하기 시작해 오스만도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곧 중동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영국은 영국령 인도 제국에 자치권 강화를 약속하여 인도 제국도 협상국 측에 합류했다.
1914년 12월, 대부분 군인들이 집에서 보내리라 생각했던 크리스마스가 다가 오자 서부전선에서 대치하던 협상군과 독일군은 암묵적으로 휴전한 채 각자의 참호에서 조촐한 축하행사를 가졌으며 기적적으로 서로 총을 거두고 적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해가 가자 적어도 대놓고는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체되는 전황
1915년 1월에 오스만 제국과 독일은 영국과 영국령 인도의 연결을 끊어버리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공격했으나 점령에 실패한다.
2월부터 독일은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고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실행해 협상국의 상선 등을 무차별적으로 격침시킨다. 5월에 영국의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가 격침되며 미국인 128명이 죽자 미국의 참전여론이 거세졌으나,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취하하기로 하여 미국도 이를 인정하고 화를 잠재운다. 하지만 이 작전은 꽤나 효율적으로 영국의 해상력을 경계하고 약화시켰기 때문에, 이후 말을 바꿔 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감행하여 미국의 여론이 다시 악화되었으며 하술할 치머만 전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이 참전한다.
영국은 꽉 막힌 서부전선의 교착을 풀어줄 돌파구를 찾을 겸, 독일에 고전하면서 오스만까지 상대하던 러시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프랑스와 연합한 함대를 보내 2월에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려고 했으나 거센 저항 때문에 실패했고 4월부터 다시 지상군을 동원한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실행했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의 상륙작전이란 결과를 본 채 이듬해 1월에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일은 윈스턴 처칠의 가장 큰 흑역사가 되었다.
한편 4월의 협상국의 공세를 조용하게 지켜보던 이탈리아 왕국은 결국 삼국 동맹을 공식적으로 배신하여 협상국에 가담한 뒤 바로 5월에 전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전쟁이 시작되면 빠르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영내로 진격할 수 있을 거라는 이탈리아의 예상과 달리 국경을 넘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방어선에 가로막혔고 이후 두 나라는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힘겨운 대치를 이어간다.
동부전선에서는 5월부터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갈리치아 방면에서 고를리체-타르노프 공세를 펼쳐 그 해 6월 렘베르크를 탈환했으며 곧이어 러시아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개시, 러시아는 폴란드에서 전략적 후퇴를 결정하고 8월에 독일군이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의 중심 도시인 바르샤바를 점령한 데 이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코브노, 빌나, 핀스크 등 러시아 서부의 주요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할 정도로 독일이 우위를 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일이 러시아 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기에는 여전히 러시아의 병력은 많았으며, 거리도 너무 멀었고 애초에 동부는 독일의 양면 전쟁에서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10월에는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고전하던 세르비아 방면의 전투는 물론 발칸 반도 지역의 정세가 동맹국에게 유리하게 넘어온다.
영어권에서 일명 Going over the top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진. 참호에서 올라와 기관총탄과 포탄이 빗발치는 무인지대로 돌진을 시작하려는 영국군을 찍었는데, 솜 전투의 가장 유명한 사진일 것이다. 후반부 전쟁에 뛰어든 미군도 사진의 영국군과 마찬가지로 무인지대로 돌진을 시작하려는 미 육군 병사들을 촬영한 기록사진이 있다.
1916년이 되자 서부전선의 전투는 격화되지만 상황은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특히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서만 200만 명이 살상되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지만 전황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다만 베르됭 전투 이후 독일은 전력이 약해져 서부전선에서 방어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독일 해군은 5월에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기 위해 영국 해군과 유틀란트 해전을 벌여 상대적으로 유리한 전과를 올렸지만 애초에 체급이 달랐기 때문에 봉쇄를 돌파하진 못했다. 이후 독일은 드레드노트 함대전을 포기하고 잠수함만 바라보았다.
또한 이 시기에 포르투갈이 1차 대전에 협상국 측에 참전했다. 당초 포르투갈 정부는 중립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1916년 오랜 동맹이었던 영국이 포르투갈의 항구에서 독일 배들의 나포와 화물 압수 등을 요구하자 독일은 포르투갈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포르투갈은 중립을 포기하고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서부전선에서 포르투갈은 영국과의 협의 끝에 영국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보병 5만 5천 명과 포병 1천 명이 참전했는데 그중 전사 8145명, 부상 1만 3751명, 실종 및 포로 1만 2318명이 발생했다. 포르투갈 국적 선박 80척이 독일 잠수함대에게 공격받아 침몰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2월에서야 불가리아와 합동으로 세르비아 왕국과 몬테네그로 왕국을 힘겹게 점령했으나 세르비아 정부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고 잔존 병력과 함께 그리스로 후퇴했다. 그리고 영불 연합군이 세르비아군을 도와 테살로니키에 상륙하면서 발칸 전선이 완전히 정리된 것도 아니게 되었다. 게다가 6월에는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독일 동맹군을 상대로 브루실로프 공세를 펼쳐 오스트리아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약체라는 것을 명확히 드러냈다. 하지만 엄청난 병력을 동원한 러시아도 독일군에 비해 전력이 열세였으며 피해가 꾸준히 누적되고 있어 1916년 말까지 병사 500만이 사상당했고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국내의 불만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도 러시아와의 캅카스 전선에서는 러시아한테 패하며 쭉쭉 밀려나고 있었고 중동의 아랍 부족들이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을 원하고 있었던 것을 영국이 지원하여 6월에 아랍 반란을 일으켜 예상 외로 잘 버티고 있던 중동 전선에서도 수세에 몰린다.
8월 27일, 그동안 중립을 표방하며 어느 편에 설지 간만 보고 있던 루마니아가 브루실로프 공세의 성공을 보고 협상국으로 참전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한다. 초반에는 카르파티아 산맥에 대한 오스트리아군의 방비가 빈약했던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으나, 양적인 병력 증강에서 비롯된 질적 부족과 동맹국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루마니아군은 곧바로 자국 영토로 밀려나 수도 부쿠레슈티까지 함락되었으며 몰다비아만 남은 상태로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버티게 되었다.
전쟁 동안 서부전선의 참호전을 타개하기 위해 숱한 신병기와 전술이 개발되었다. 현재까지 사용되는 거의 모든 보병전술의 기초가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전쟁이 시작되던 1914년에는 어느 국가의 병사도 철모를 쓰지 않았으나 점차 너나할 것 없이 채택하기 시작한다. 독일은 1915년 4월부터 시작된 2차 이프르 전투에서 살상용 독가스를 사용해 효과를 봤고, 6월에 화염방사기를 첫 배치했다. 영국은 전차를 발명해 마크 1이 솜전투가 펼쳐지던 1916년 9월에 실전 투입되었다. 영국의 전차를 보고 프랑스에서는 생샤몽 을 개발했고 전쟁 후기에는 세계 최초의 경전차인 르노 FT를 만들었다. 전쟁 최후기에는 A7V 슈투름판처바겐과 그로스캄프바겐이라는 물건이 독일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신병기들로도 참호전의 양상을 궁극적으로 타개하지는 못했다. 독가스는 사용조건에 제한이 있는데다 화학전 방호장비가 보급되면서 효력이 감소했고, 전차는 가장 획기적인 발명이었으나 초기 전차는 성능이 부족한 데다 전차 운용에 대한 노하우가 없어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바람에 참호전을 궁극적으로 타개하는 데는 실패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의 전차는 거의 움직이는 엄폐물 정도였다. 전쟁 말기인 1918년에는 MP18 등의 기관단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항공기의 군사적 활용의 발전도 두드러진다. 전쟁 초에는 단순히 정찰, 그리고 상대 국민에 대한 테러 목적으로 미미한 폭격이 있었으며, 비행선을 이용한 폭격이 시도되기도 하지만, 공랭식 기관총과 동조식 발사장치를 개발하여 기관총 한두 정을 장착한 빠르고 민첩한 전투기가 상대의 기구, 비행선, 정찰기를 격추시켰다. 그리하여 폭격용 비행선은 빠르게 사라지고 보다 빠르고 크기 대비 폭장효율이 좋은 대형 폭격기가 등장하여 상대국의 도시를 노렸다. 이에 따라 자국 방공망 구축보다 효율적인 항공기 운용을 위해 1918년부터 영국 공군이 세계 최초로 결성되었고 다른 참전국들도 이를 따랐다. 대전 말 전략폭격의 이론을 영국의 트렌차트, 미국의 미첼, 이탈리아의 두헤가 서서히 틀을 잡았다.
미국의 선전포고와 러시아 혁명
독일은 2월부터 다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한다. 결국 이것과 독일의 테러들, 치머만 전보 사건 등을 견디다 못한 미국은 4월에 독일 등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동맹국은 시한부 인생이 되었다. 하지만 급하게 징집한 병사들의 훈련 등을 이유로 미국은 전쟁 참여에 조심스러웠고, 6월부터 프랑스에 기초훈련이 끝난 소규모의 미군 부대가 도착하기 시작했지만 1918년 5월까지도 큰 교전을 하지 않았다. 한편 비슷한 시점에 중국인 노동자들을 수송하던 배가 독일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중국인들이 떼죽음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돤치루이 내각은 1917년 3월에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단교하고 수개월 후에 내전까지 불사하며 선전포고하고 참전하게 되나 전투 차원에선 유럽에 보내기 위해 조직하던 '참전군'이 대전이 끝나던 시점까지 편성이 안되서 도움을 못줬고 다만 수십만명의 노동자들을 유럽에 보내서 후방에서 원조하였다.
1917년에 들어서 러시아 2월 혁명이 터져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고 러시아의 체제가 전복되었다. 하지만 새 정부는 여전히 독일과 전쟁을 하려 들었고 내부의 불만 요소는 그대로였기에 사회에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1917년 3월에 영국군은 오스만 제국의 도시였던 바그다드를 점령했고, 곧 메소포타미아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1917년 4월에 독일은 망명 중이던 레닌을 기차에 태워 러시아로 귀국시켰다. 레닌의 혁명이 성공하면 독일과의 전쟁을 그만둘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이렇게 러시아의 내부 상황이 혼란으로 치닫자 프랑스와 영국은 초조해졌고, 서부전선에서 4월부터 연이어 협상군의 대공세가 펼쳐지며 7월의 치열한 파스샹달 전투까지 펼쳐졌지만 대량의 인명이 소모된 것에 비하면 작은 승리였으며, 전략적으로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
한편 그리스 왕국은 전쟁 발발 이후 계속 중립을 지키고 있었는데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와 협상국으로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갈등과 그로 인해 둘로 쪼개진 국민 여론, 그리고 세르비아 전선의 패전으로 동맹국의 추격을 피해 그리스 영내로 피난한 세르비아군과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테살로니키에 진주한 영불 협상군, 그에 대응하여 콘스탄디노스의 묵인을 받아 그리스령 마케도니아로 진주한 불가리아군 때문에 그리스도 전쟁에 휘말렸다. 급기야 총리 자리에서 해임된 베니젤로스는 지지자들을 이끌고 협상군이 점령한 테살로니키로 가 임시정부를 세우고 수도 아테네에서는 양측의 지지자들이 대규모 시가전을 벌이고 베니젤로스를 지지하는 영불 협상군은 그리스 북부와 도서 지역을 점령하여 콘스탄티노스를 압박하는 등 난장판이 되었다. 협상국 중 유일하게 콘스탄티노스에게 우호적이던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마저 혁명으로 물러나자 버틸 곳이 없어진 국왕 콘스탄디노스가 퇴위하고 둘째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했으며 신정부를 이끄는 베니젤로스는 6월 30일 동맹국에 선전포고하면서 그리스도 협상국 측으로 참전했다.
한편 이손초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의 소모전에 압박을 느끼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 전선에만 집중하기 위해 동부전선을 전부 독일한테 떠넘기려 한다. 독일의 반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후 독일은 서부전선으로 바쁜 와중에 동부전선의 90%를 담당하며 이탈리아 전선마저도 독일이 지원해야 하는 눈물겨운 상황이 펼쳐진다. 그러나 10월에 펼쳐진 카포레토 전투에서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함께 이탈리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탈리아군은 우디네 일대를 포기하고 베네치아를 불과 30 km 앞둔 피아베 강까지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전선이 이탈리아 영내로 옮겨가고 이탈리아가 방어전으로 돌아서자 독일은 이탈리아 전선을 마무리하고 서부전선으로 집중한다.
1917년 10월 혁명의 여파로 러시아 체제가 전복되고, 11월에 레닌은 러시아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던 전쟁을 멈추기 위해 독일과 강화한다. 독일은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프랑스나 영국은 큰 위기감을 느꼈지만 사실 독일도 이미 인적 경제적 손실이 누적되어 국가는 피폐해졌다. 러시아에도 평화가 찾아오기는커녕 러시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1918년 1월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평화 14개조를 발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고 이는 핍박받는 민족과 국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나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에게는 종전 후 분열을 가져오는 치명타가 되었다.
동맹국의 항복
1918년 3월, 독일의 경제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에 상황을 반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된 동부전선에서 71개 사단에 달하는 병력들을 차출해 서부전선에 집결시킨 후, 마지막으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쥐어짜 서부전선 최후의 공세인 루덴도르프 공세를 펼쳤으나 심각한 피해를 입고 얼마 못 가 주저앉았다. 26년 후 아르덴 대공세 판박이 이후로 결국 미군도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5월에는 미국이 독일을 상대로 한 첫 승리를 거두었다. 1918년 5월에는 루마니아 왕국과 부쿠레슈티 조약을 체결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6월에는 피아베 강에서 이탈리아와 대치 중이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탈리아를 협상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마지막 여력을 쥐어짜 피아베 강 전투를 감행했으나 사상자 수십만을 낸 채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1918년 8월부터 미군은 하루에 만 명씩 프랑스로 들어오고, 미국 원정군 90만 명을 포함한 협상군은 바로 독일을 상대로 백일 공세를 펼쳐 엄청난 속도로 전선을 밀어내며 10월,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 주요 방어선인 힌덴부르크 선을 붕괴시켰다. 비슷한 시기, 협상국의 대공세로 이탈리아 전선, 중동 전선, 마케도니아 전선 역시 마찬가지로 일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결국 희망이 사라진 동맹국들은 내부적으로 패배에 대해 거론하기 시작한다. 9월 29일, 테살로니키 휴전 협정으로 불가리아 왕국이 가장 먼저 이탈했으며 10월 30일에는 무드로스 휴전 협정으로 오스만 제국이, 11월 3일에는 제국 내부 소수민족들의 이탈로 무너져내리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빌라주스티 휴전 협정으로 항복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독일도 킬 군항의 반란을 시작으로 반정부운동이 다발적으로 일어난 11월 혁명으로 정부가 무너져 11월 11일에 콩피에뉴 휴전협정을 체결하면서 협상국에 항복했다.
항복 직전의 독일은 전선의 병사들도 굶주림에 못 이겨 협상군 참호를 습격해 음식을 약탈해 오고, 후방의 민간인들은 루타바가 말고는 먹을 게 없을 정도로 굶주리고 있다가 마침내 전선과 후방에서 균열이 벌어지고 있었다. 즉 한 1년 정도는 더 버티더라도 패전을 면할 길은 전혀 없었다. 이는 힌덴부르크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시 계획경제에서 군수물자 생산에 너무 치중하다가 식량 생산 등의 기본적인 요소에서 일이 틀어진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경제 전체가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독일의 경우 오히려 관료들이 자원을 비교적 유능하게 잘 배분해서 가용한 모든 자원을 완전히 탕진할 때까지 끌고 오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식량이 풍부하다고 알려진 프랑스도 독일보다 먼저 그러한 상황에 직면한 적이 있는데, 미국의 식량 원조로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이때 식량 원조분이 4일만 늦게 도착했으면 프랑스 전역에서 식량이 고갈될 상황이었다. 물론 이것은 춘궁기의 일시적인 상황으로, 이는 프랑스가 식량이라는 요소를 경시하다가 문제를 겪은 것을 보여줄 뿐 독일과 달리 프랑스는 전반적인 농업생산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전체적인 인구수와 공업생산력에서 독일에 심각하게 밀렸던 프랑스가 유일하게 비교우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압도적인 농업생산력이었다. 그러나 그런 프랑스조차도 식량을 자급자족할 정도로 충분히 생산하지는 못해서, (전쟁 중이니까) 미국은 1914-24년 사이에 프랑스에 842만 톤의 식량을 보내기도 했다. 이를 보면 외부지원 없이 붕괴하지 않고 버틴 것에서 독일 관료들은 오히려 경제를 잘 운영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없는 자원을 창조할 능력이 있을 리는 없었다.
물론 협상국의 상태도 막장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미국을 포함한 신세계와의 교역이나 지원으로 물자를 보충할 수 있었다. 협상국은 전반적인 경제 운영에 훨씬 여유가 있었고 여기에 미국 병력까지 쏟아져 들어오는 상태라 독일은 항복하는 길 밖에 없었다.
다만 독일은 항복하는 순간에도 프랑스 영토 안에서 서부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국 영토에 적군을 한 발짝도 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패전을 맞자, 많은 독일 국민들에게 분노하면서도 상황에 의심을 품어 일명 배후중상설이라는 도시전설이 폭넓게 퍼졌다. 이것이 후일 히틀러와 파시즘이 일어나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종전
1919년 6월에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반영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고, 생제르맹 조약, 트리아농 조약, 세브르 조약, 뇌이 조약이 체결되어 패전국들은 많은 영토가 민족별 국가로 나눠져 독립해 버렸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협상국과 신생 독립국에 일부 영토를 할양하고 가지고 있던 식민지도 토해내야 했다. 독일 황실과 오스트리아 황실도 무너졌고 오랜 시간 동안 중동의 패권자였던 오스만 제국도 사실상 멸망했다.
러시아 제국: 정부가 혁명으로 붕괴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조기에 전쟁에서 이탈한 탓에 협상국으로 참전했음에도 승전국 반열에 들지 못하고 도리어 발트3국이나 핀란드, 폴란드 등을 독립시키고 루마니아에 영토를 할양해야 했다.
폴란드: 18세기 말 멸망했었던 폴란드는 1차대전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모두 무너지고 식민지를 토해낸 것을 계기로 폴란드 제2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이 과정에서 동프로이센 지역은 폴란드 회랑(Polish Corridor)으로 다른 독일 지역과는 분리됐다.
프랑스, 영국: 식민지를 더 가지거나 알자스-로렌 같은 영토를 일부 할양 받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얻었다. 다른 한편으로 1882년부터 영국의 보호령, 사실상 식민지였던 이집트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노동력과 자원이 징발당하고 여기에 현지 이집트인들이 분노한 것을 계기로 민족주의 운동이 힘을 얻었다고 한다. 인도 역시 노동력과 자원의 징발, 그리고 중동에서 인도 병력이 거둔 승리, 결정적으로 남아공에서 돌아온 간디의 영향으로 전후 영국이 자치권 보장 약속을 어겼음에도 민족주의 운동이 큰 힘을 얻었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로부터 트리에스테(트리에스트)를 포함한 이스트리아 반도와 쥐트티롤을 할양 받고 지중해랑 튀르키예 쪽에 세력을 폈으나 가장 원했던 달마티아를 얻지 못하는 등 생각외로 많은 이득을 얻지 못해 이에 불만을 품은 국민이 파시즘을 지지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세르비아: 오스트리아에서 빼앗은 땅을 합쳐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건국했다.
그리스: 불가리아의 영토를 조금 뺏았고, 벨기에는 독일의 말메디 지역을 얻었다.
루마니아: 전 국토가 동맹국에게 유린당하고 동맹국에 항복하는 치욕을 겪었으나 전쟁이 협상국의 승리로 끝나자 오스트리아로부터 부코비나, 헝가리로부터 트란실바니아, 불가리아로부터 남도브루자를 수복하고 여기에 러시아 제국이 통치하던 베사라비아까지 추가로 획득하여 영토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일본: 1차 대전으로 경제호황 및 독일의 아시아, 오세아니아 식민지랑 중국의 이권들을 조금 획득했지만 역시 대공황으로 불황을 겪자 군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군국주의가 대두했다.
우드로 윌슨은 '평화 원칙'을 내세우며 베르사유 조약 1조에 국제연맹의 창설에 관한 조항을 넣었고, 1920년 1월 런던에서 첫 국제연맹 회의가 개최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사망자 수 및 지출비용
제1차 세계 대전은 전사자 900만 명, 민간인 사망자 600만 명, 부상자 2700만 명, 불구자 600만 명, 미망인 400만 명, 고아 800만 명을 남겼다. 이런 인명 피해는 당연히 성비 불균형, 한 세대의 상실 등 사회 불안을 초래했다.
독일군은 최소 180만 8545명의 전사자, 424만 714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프랑스군은 약 500만의 사상자가 나왔고, 그 중 138만 5300명이 전사 및 실종자였다. 영국군은 사상자가 326만 581명이였고, 그 중 94만 7023명이 전사 및 실종자였다. 미군은 32만 5867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전사자는 11만 5660명이었다.
러시아군은 자료에 따라 다양한 추측이 존재하는데 한 집계에 따르면 340만 9433명이 포로로 잡히고 22만 8838명이 실종됐다고 한다. 전사자 100명당 러시아군은 251명이 포로로 되거나 실종자라는 것인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50명, 이탈리아군은 92명, 독일군은 65명, 프랑스군은 46명, 영국군은 영국 식민지 출신 병사를 포함해 21명이라고 한다. 러시아 군인들이 타 국가에 비해 포로가 되는 상황이 많았거나 쉽게 항복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은 러시아군 전사자가 독일군 다음으로 많다는 것이다. 당연히 러시아 전선에서 독일군이 입은 피해가 러시아군보다 압도적으로 적을 리는 없다. 독일군이 정말 잘 싸운 셈이다.
그 외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20만 명, 오스만 제국군은 77만 2천 명, 이탈리아군은 65만 1천 명, 루마니아군은 33만 5천 명, 세르비아군은 27만 5천 명, 벨기에군과 불가리아군은 8만 8천 명, 그리스군은 2만 6천 명, 포르투갈군은 7천 명, 몬테네그로군은 3천 명, 일본군은 1천 명이 전사했다
경제적으로도 피해가 컸다. 1차 대전 이후 참전국들의 경제적 상황은 크게 악화되었다. 군비를 세금, 금 매매와 차용금으로 마련했기 때문에 참전국들의 국가채무는 굉장한 수준에 이르렀다. 유럽 각국에서 평균 350%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을 겪었고, 가장 문제가 심각했던 독일 바이마르 정부의 마르크는 3년 만에 1억 배 오르는 등 휴지조각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때까지 가장 큰 부채를 안았던 미국만이 모든 부채를 해소하고 제일의 대금국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영향
"20세기는 1914년에 시작되었다."
에릭 홉스봄
홉스봄의 표현처럼 사실상 20세기의 모든 것이 1차 대전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특히 주 전장이었던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과 함께 세력구도의 대격변을 일으킨 사건으로, 급진적인 학자들은 유럽사에 한해 현대의 시작을 1차대전의 종전 이후로 정의하는 의견이 제안될 정도다. 유럽에서의 세력구도 재편은 아직 제국주의의 영향이 가시지 않았던 타 대륙권의 식민지나 열강들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1차 대전은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여기에 또 다른 문명의 발달인 국가 관리 체계의 발달과 민족주의에 의거한 국가 총력전으로의 변화는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대량의 인원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는 앞서의 요인 등으로 도리어 인적 손실을 극대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인문학적
인문학적으로도 중요한 시기였는데 (식민지 지역 같은) 야만에서 벗어난 문명국을 자처하던 유럽이 그 어떤 야만인들보다 더 끔찍한 전쟁을 벌였던 것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는 문명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낙관하던 분위기는 문명의 이기들을 이용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통해 박살이 나고 만다.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전쟁에 자원하던 유럽의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생지옥이었으며 1차 대전 이후로 유럽 문화는 상당 부분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염전(厭戰)사상 확산에도 일조했다. 까놓고 전근대시대 유럽의 전쟁은 이전까지가 그랬듯 특정계급들간의 제한적인 동원으로 이루어진 전쟁이었고, 전쟁의 프로들인 정규군과 용병들로 구성된 전사들의 영웅주의적 색채로 미화되어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시대 프랑스를 시작으로 점점 전쟁을 전문으로 하던 전사계급이 아닌 시민이 총을 들고 나서는 총력전의 개념이 도입된 이후에 각국 역시 열강들끼리 온 국토를 쥐어짠 총력전을 한 것은 처음이라 각국 수반들도 전쟁을 지금보다는 훨씬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전쟁은 이전과 달랐다. 전사들만 싸우는 게 아닌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싸웠기에 군기확립이나 군인 통제가 어려웠고, 그동안 자신들이 칭하길 야만인이었던 식민지의 저항세력에게 쏟아붓던 제국주의 열강의 필살기였던 기관총과 야포의 총구멍이 자기를 향하게 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이렇게 자국 시민을 상대 기관총과 야포에 총알받이로 던지는 참담한 전쟁을 마주하기 시작했음에도 정치가들과 높으신 분들은 전쟁을 멈출 수 없었고, 피해는 엄청나서 그 이전과는 달리 전쟁을 벌였다가는 잃을 것이, 설사 이긴다고 가정해도 그 이후 따를 보상보다 훨씬 클 수도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가공할 피해는 대전 직후 대부분의 국가에서 염전 사상을 확대시켰다. 전쟁에 대한 가공할 공포는 열강들에게 더 이상의 1차 대전과 같은 재앙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이 염전 풍조는 유럽 사상 유례없는 군비축소 조약과 부전조약을 체결하는 계기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영-불의 독일에 대한 소극적, 유화적 외교시책의 원인이 되었다. 그 1차 세계 대전때 처절한 참호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2차 세계 대전때 가장 강력한 유권자 세력이 되었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참호전을 시킬지 모를 상황이었으니까. 이 염전의 풍조가 지금 생각하면 2차대전이 그 지경으로 가는 데까지 방조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슬픈 아이러니. 당대의 이러한 염전 풍조 확산은 그 시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1차 대전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La Der des Ders)이었다고 평가하게 했다.
1914년까지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통치했던 유럽은 미국 등 다른 대륙의 국가들에 의존해 재건에 집중해야 했다.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지금까지 스스로를 세계 문명의 주축이라 여기고 미래를 낙관했던 유럽 국가들에 전체적인 비관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런 시체의 산을 손쉽게 쌓아올리는 지옥도 같은 전쟁 양상은 이전 과학 기술이 평화로운 풍경 하에 발전하던 시절에 품었던 벨 에포크적인 과학과 이성으로 가득 찬 희망차고 밝은 미래상의 붕괴를 불러오고 그 과학이 미치광이 같은 전쟁 상황에 동조하고 도리어 더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과학에 대한 회의주의적 시각을 불러오게 되었다. 반면에 당시의 미흡한 군사 기술에 대한 연구는 어마어마하게 발전했으며 이후 이어지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말의 낙관마저 꺾이게 된다.
군사학적
군사학적으로는 승자와 패자에게 완전히 다른 영향을 미쳐 2차 대전 초기 전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승자인 영국과 프랑스는 1차 대전의 전훈을 압도적인 화력과 방어자의 우세로 결론짓고 방어 위주의 군사사상을 도입, 마지노 선 건설에 착수하지만, 독일은 그 우세를 극복하기 위한 기동전을 연구해 결국 1차 대전 당시 4년 동안 점령하지 못한 프랑스를 1940년엔 6주 만에 점령했다.
이 전쟁은 이전 전쟁과는 달리 전쟁으로 인한 인적 자원의 손실을 국가들이 감당하기 힘든 경우였다. 무기 체계의 발달, 특히 참호전 양상으로 흘러간 전쟁 양상과 더불어 새롭게 개발된 야포와 기관총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은 속도로 병력이 소모되게 했으며, 이에 반해 나이 많은 지휘관들의 생각은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교리에 머물렀다. 이전에는 비교적 엉성한 화망과 포를 뚫고 닥치고 기병 or 보병이 진격해서 적군을 유린하면 되는 반면, 1차 대전 초기 전선에서는 기관총에 병력을 돌진시켜야 하는 상황임에도 양군의 지휘관들은 돌격하여 상대의 방어를 분쇄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같은 무모한 돌격명령은 지휘관들의 '공격 낭만주의'와 더불어 공격하여 적의 진영을 탈취하고 적병을 사살하는 것을 명예로운 일이자 커다란 전공으로 여기고, 방어선을 굳게 하여 나오지 않는 것은 불명예스러우며, 계집애 같은 행위로 여기던 경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일본군에서 이 공격만능주의적 사고방식을 여전히 유지하는 이들이 있었다. 오히려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나 1차 대전 당시 칭다오 전투에서 일본군의 전투 교리는 공격만능사상식 돌격이 아니었으며 포격이 주축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정신력만 강조하는 교리가 일본군을 지배하게 되는 것은 1920년대를 넘어서인데 이러한 교리가 성립되는 데는 러일전쟁 당시 독일식 화력전에 입각한 포격이 당시의 기술 부족에 의해 영 시원치 않았던 경험과 1차 대전의 타넨베르크 전투와 총력전 양상이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일본의 산업능력으로는 1일당 수십만 발을 쏟아붓는 서구 선진국의 "사치스러운" 전투를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식의 전투를 지향해야 한다"라는 무대포스러운 결론으로 이른 것이다. 특히 포병을 강화한 건 프랑스로, 개전 후부터 총력을 다해 대포를 찍어내면서 (징집한 만큼 죽어나간 보병과 달리) 꾸준히 강화된 포병의 힘으로 독일군을 살상했다(다만 포탄은 미국이 돈 받고 팔았다).
초기 전선이 고착된 이후에 무모한 돌격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거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는 게 더 큰 문제. 현대의 학자들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지휘관들의 무능력에 대해선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보고 있다. 지휘관들이 전선이 아닌 후방의 성에서 체류하면서 작전 지시를 했던 것도 전선의 크기나 결정해야 할 사항 등을 고려할 때 몸을 사렸다기보다는 불가피한 지휘 방식이었다는 것이며 이는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전선 시찰 과정 등에서 일어난 고위급 지휘관들의 사상률 역시 상당해서 몸을 사렸다는 주장 역시 부정확하다고 한다. 1914년 전쟁 초기를 지나서 참호선이 구축되고 전선이 고착될 때까지만 해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전훈으로 구축된 보병 기반의 기동전 교리가 대부분이었지만 전황이 참호전으로 고착되면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교리로는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으며 포격을 비롯해서 적의 진형을 보병의 돌격 이전에 무너뜨려야 된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단지 참호와 철조망으로 구성된 적의 진지에 충분히 빠르고 효과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포격이나 화학전, 공습, 전차의 개발 등 당시에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았으며 그러한 시행착오의 결과 전쟁발발 당시인 1914년의 보병 기동전술과 전쟁 후기의 1917-18년에 독일군이 보여준 후티어 전술이나 협상국이 보여준 제병 합동 전술의 수준은 천지차이였다.
문제는 이러한 학습이 무수한 병사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과 향상된 전술이 효과를 보는 상황에서조차도 높은 손실률 자체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한계는 있었다. 진격조차 못했던 무의미한 희생이 그나마 진격은 가능한 유의미한 희생으로 바뀐 정도. 무엇보다도 매끄러운 작전 연계를 위한 통신 기술, 특히 무선통신 기술이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렀기 때문에 포격으로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는 순간에 보병을 돌격시켜 적을 섬멸한다는 것은 책상 위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실제로는 아군에게 포격을 하는 불상사에 대한 염려로 쌍방의 매끄러운 연계가 거의 부재했다. 존 키건은 자신의 저술에서 과학기술이 인명을 살상하기에는 충분히 발전했으나 인명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막기에는 미흡했다고 했다. 즉, 세상을 밝게 해줄 것처럼 여겨졌던 과학기술이 인간을 죽이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었지만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 기관총이나 가스탄 같은 병기가 너무도 쉽게 인명을 살상하는 반면에 철도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계속된 징병을 통해 전선의 병력을 바로바로 보충했기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도 전선이 유지되었다. 과거같으면 보충 속도가 따라가질 못해 어느 한 쪽이 밀려났을 정도로 사상자가 누적되었는데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동부 전선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독일이 서부 전선에 총력을 다 했을 때에도 발전된 전술에 힘입어 전선의 돌파는 가능했지만 그 돌파를 확대시킬 역량은 없었고, 이후 제병합동전술로 독일군을 밀어붙이는 협상국에 대항하여 더는 싸울 수 없을 만큼 자원이 소모된 이후에야 전쟁이 끝났다.
독일군은 1차 세계대전을 매우 잘 수행했다. 원래 독일은 기본적인 병력과 산업 규모부터가 열세였다. 동맹국과 협상국의 GDP는 거의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고, 인구 역시 협상국이 더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독일 제국군은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서부전선을 유지하며, 러시아와 발칸국가들과의 동부 전선에서 주공을 맡았고, 심지어는 이탈리아 전선과 오스만 제국까지도 지원했어야 했다. 이런 난관 속에서도 독일의 장교단과 관료들은 있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서 불리한 전쟁을 5년 가까이 질질 끌었지만, 미국의 참전과 함께 힘을 소진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총력전의 개념과 함께 독일 제국의 패배는 전쟁에 있어 외교와 경제의 중요성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단순히 전투를 잘한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게 되었으며, 지속되는 소모를 얼마나 잘 경제적/인력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지, 나아가 예상되는 소모를 얼마나 잘 선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된 것이다.
본격적인 위장 개념이 탄생한 전쟁이기도 하다. 이전까지는 경험으로 위장의 중요성을 알게 된 군인들이 개인적으로 자신의 군복을 검게 만드는 식이었으나, 1차 대전부터 국가적으로 위장에 신경쓰기 시작했다. 우선 전쟁이 일어날 무렵부터 이미 각 국가의 군복은 어두운 색이었으나 충분치 않았고, 여러 색이 쓰인 위장 무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것의 선구자는 프랑스로, 화가들을 대량으로 징집해 손으로 페인트를 칠해 전차나 군복 등에 위장무늬를 그리게 했으며 카모플레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위장용 모형이나 위장망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프랑스에서 등장했던 입체파가 위장 개념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영국과 미국은 독일의 잠수함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고심했으며, 노먼 윌킨슨이라는 저명한 해양 화가의 제안에 따라 다즐 카모플라주(dazzle camouflage)라는 독특한 패턴을 배에 칠하기 시작해 큰 효과를 보았다. 이 위장은 배 자체를 감추는 것은 아니고, 배의 진행 방향이나 속도를 알기 어렵게 만들어 어뢰를 제대로 조준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이 것에도 역시 입체파의 작품들이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위장의 도색은 주로 여성들로 이루어진 도색 전문 부대가 도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오던 기마병의 급격한 쇠퇴가 시작된 시점도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서였다. 사실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기병대는 1차대전 때까지만 해도 의외로 꽤 많이 활약을 했을 뿐만 아니라, 기병이 중요한 병과로 자리잡고 있었다. 개전시기 독일제국만 해도 수십만의 기병대를 운용했고 이들은 상당한 활약을 했지만, 포장도로가 많은 서부전선에서 영국군의 온로드형 장갑차에게 갈려나가며 쇠퇴의 시작을 알렸다(동부전선에선 현역이었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해서 전투기, 비행기, 군함, 전차, 장갑차 등이 발달을 하기 시작하면서 기병은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는 기병이 어느정도 남아있었으나 2차 대전 종전 이후로는 기병이 완전히 쇠퇴하여 전장에서 은퇴를 했다.
사회적
남성들이 전선에서 싸우자,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여성들이 대신하게 되었다. 프랑스 여성들은 전선에 나간 남성들을 대신해 공업 및 상업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1915년 10월에는 탄약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이 7만 5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영국은 1915년 중반까지 자선, 복지에 여성 노동자들이 투입됐다고 한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탄약성을 설립한 후 1916년 7월에는 여성 노동자 수가 52만명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1918년 7월 영국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여성은 731만명 이상이였다고 한다. 탄약 생산 공장에서 일하는 94만 7천명은 전체 탄약 생산 노동자의 90%에 달했다고 한다. 교통 11만 7천명과 농업 22만 8천명의 노동자도 여성이였다고 한다.
이들 중 다수는 1917년 창설된 여군(Women's land Army)의 일원이였다고 한다. 1917년 7월 창설된 여성보조부대의 뒤를 이어 11월에 왕립해군여성부대 창설, 1918년에 왕립공군여성부대를 창설했다고 한다. 1918년 2월 국민투표법이 통과해 30세 이상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고 한다. 프랑스와 영국 외에 미국 같은 다른 나라들도 1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초기 페미니즘 담론이 싹트고, 여성에게 제도적인 권리가 주어졌다.
군주정을 끝낸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이미 제1차 대전이 터지기 전에 유럽 바깥의 나라들의 군주정은 식민지배나 내부 소요로 무너지고 있었고 그나마 건재하던 유럽의 군주정들도 이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4개의 제국이 망해 버리고 잠시 세워졌던 핀란드 왕국이나 독일 제국 내부의 수많은 제후국들의 왕정이 폐지되고 10여 개의 신생 공화국이 제국의 폐허 위에 세워지면서 20세기 왕정의 몰락의 신호탄을 울린 전쟁이기도 하다. 이후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알바니아의 왕정도 폐지되어 버림으로 유럽의 왕정은 서, 북유럽 지역의 일부 국가를 제외하곤 무너진다.
말단 시민들만 병사로서 죽은 게 아니라, 양심적이고 지성을 갖추었던 젊은 세대의 20~30대 엘리트(특히 프랑스)와 귀족 세력 역시 굉장히 큰 희생을 치렀다. 잘난 만큼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기에 능력 여하를 불문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앞장서서 전장에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수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며, 살아 돌아온 사람들도 상당수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멀쩡하게 돌아올 수가 없었다. 훗날 영국 총리가 되는 해럴드 맥밀런은 이 시기 입은 부상으로 평생 장애와 함께해야 했으며, 명문대인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나 옥스퍼드 대학교의 전사자 비율이 엄청나게 높았다고 한다. 대학교를 방문하면 칼리지마다 출신 사망자들의 이름을 돌에 새겨 기리고 있다. 당시 귀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회계층의 참전자수 대비 전사자수 비율은 8:1이었는데 귀족층은 5:1이었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참고 대부분의 젊은 엘리트와 귀족들이 공격의 선두에 서야 할 초급 장교로 복무했기에 이는 사실 필연적인 결과다. 이 시대를 봐도 후대인 2차대전을 봐도 선두에 서야 하는 초급 장교의 전사율은 일반 말단병보다도 훨씬 높다! 특히나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이 강했던 만큼 영국의 경우는 참전을 하지 않은 건장한 남성등, 특히 엘리트 가문들에게는 겁쟁이의 표식인 하얀 깃발을 주면서 조롱했다. 러디어드 키플링의 아들 경우 시력의 문제로 신체검사에서 탈락을 했으나 아버지의 빽을 써서 장교로 참전했지만 결국 전사한다.
또한 이로 인해 진정한 귀족계층 역시 몰락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구체제가 몰락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혁명가들이 귀족들을 증오해서 혁명을 한 게 아니라 앙시앵 레짐의 폐지를 요구한 것이기 때문에 자코뱅당의 공포정치기를 제외하면 귀족들에게서 빼앗은 건 특권과 부당하게 모은 재산 뿐이었으므로 실제로는 그 이후에도 구체제의 잔재가 꽤나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남은 귀족 역시 전쟁이 터지면 앞서 나가는 모범을 보여서 나름대로 존중받기도 했다. 하지만 1차대전 중에 많은 귀족 가문의 젊은이들이 죽어나가는 바람에 대가 끊겨 진짜로 구 체제가 끝나버렸다.
반면에 사회의 지도층 또한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경험하고 그 참혹함과 끔찍한 만행들을 뼈져리게 체감했기에, 지도층에게도 전쟁에 대한 거부감을 심을 수 있던 것은 다 타버린 집에서 그나마 건진 셈이다. 미국은 그렇게 인명피해가 타 협상군에 두드러지는 편은 아니지만, 대신 전후 참전군인의 처우 문제로 인해 보너스 군대 같은 말썽이 있었다.
이렇게 국민들을 총알받이로 희생시켰으니 국가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국가의 지배세력들이 자본주의의 논리로 움직이므로 국가를 전복하고 공산 국가를 만들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로 살자고 주장했고, 자유주의자들은 국민의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극이 있으면 또 다른 극이 있듯 이와는 반대로 국가에게 모든 권력을 실어주고 국민들을 국가가 시키는 대로 총 단결하고 자신의 국가와 민족만 잘 살자는 극단적인 전체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했고, 전쟁에서 지면 모든 걸 잃지만 이기면 모든 걸 보상받을 수 있으니 군대가 국정을 좌우하는 군국주의가 패전국은 물론이고 일부 승전국에서도 보여졌다. 20세기 사상의 대립과 충돌의 시작이다.
일각에서는 이미 18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던 자유주의 무역에 기반한 100년의 세력균형 평화시대는 전쟁이 아니었어도 경제적인 이유로 종결될 기미를 보였으며, 1차 대전은 단지 그 부산물이었지 결코 원인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칼 폴라니가 대표적.
한편으로는 세계 평화에 기여한 면도 있는데, 히틀러를 비롯한 추축국 수뇌부들의 의도된 복수심과 침략적 동기로 시작된 2차 대전과 달리, 1차 대전의 개전 과정은 당시 기준으로 수뇌부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한 결과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 때문에 국제정치학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과제로 떠올랐다. 그 성과로 인류는 과거에 비해 대규모 총력전을 회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특히 바바라 터크먼이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정을 연구한 저서인 <8월의 포성>은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핵전쟁을 막고 인류를 구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때의 참전 용사들은 이전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이전 시대의 대다수 상이 군인들은 구빈원에 들어가 무능력자 취급을 받으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거나 구걸 등을 하며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1차 세계대전 전후로 사회복지제도가 어느정도 자리잡혀 참전 용사는 장애인 연금을 수령하고 병원에서 치료와 재활, 정부의 직업교육 등 어느정도 인간다운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몰락한다. 러시아 제국과 독일 제국은 정부가 무너져 각각 소련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변했고, 독일은 단치히와 주변 지역을 폴란드에게 넘겨주게 되며 "폴란드 회랑"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폴란드에게 해상로를 열어주었지만 훗날 나치 독일은 이를 빌미로 폴란드 침공을 일으킨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어 그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약간의 영토를 받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이탈리아의 범위에 속하는 영역을 다 받진 못했으며, 이에 대한 불만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 이어진다.
영국과 프랑스는 승전국이었음에도 전쟁 이후 식민지와의 연결이 끊어지고 경제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어 제국 해체의 발단이 된다. 특히 프랑스는 인구 측면에서 국가 발전의 근간이 되는 성인 청년 인구들의 1/3(부상자 포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전쟁 후유증은 심대했다. 근대 이전까지 프랑스의 인구는 영국과 독일을 압도했지만 19세기 무렵에 독일에게 크게 추월당했고, 이런 상황에서 양차 세계 대전 동안 인구 증가가 정체되면서 영국에게도 뒤쳐진다. 1990년대까지는 영국보다 적은 인구를 유지했으며 이는 프랑스가 과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다시 찾지 못하게 된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때문에 독일의 세력과 자신감이 커져서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는데 일조하면서,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은 더 큰 규모의 전쟁의 전초전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원수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을 약체화 시키기에는 너무 허약한 조약이라는 이유로 베르사유 조약에 사인하면서 이 조약은 기껏해야 20년 휴전 협정에 불과하다고 평가했고,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영국 측 수석대표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페르디낭 포슈와 반대로 케인스는 독일에 대한 전쟁배상금이 과도해서 독일이 복수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해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결국 남은 것은 더 큰 전쟁"이라고 했다. 어찌 보면 둘 다 일리 있는 게, 독일이 완전히 무너질 만큼 가혹하지도 않았고, 독일이 복수심을 품지 않을 만큼 관대하지도 않았던, 이도 저도 아니었던 조약이란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가혹하게 했다고 쳐도 독일 통합국가와 인프라가 유지되고 있는 이상 결국 언젠가는 국가 재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20년 뒤 세계 3위의 경제력을 회복한 독일이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유럽의 쇠퇴와는 비교되게 미국, 일본 등의 성장은 더욱 가속화된다. 미국은 영국을 넘어서 제일의 무역국가가 되고, 일본은 15위에서 8위로 도약한다. 미국은 유럽에 당시 가치로 100조 달러를 원조하고 달러가 영국의 파운드 스털링을 대체해 세계 통화가 된다. 유일하게 일본만은 피해를 입지 않은 채 당시 주요 산업이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비중이 바뀌었고 매년 50~70%씩 성장하며, 광업, 해운업, 무역업에서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된다. 러일전쟁때 까먹은 돈은 이때 완전하게 회복이 됐고, 당시 조선업은 세계 3위 수준으로 올라갔으며, 태평양(남양청)과 중국에 식민지를 획득했다.
열강의 식민지들이 이 전쟁 이후 독립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종전 전에 국회에서 공표한 14개조 평화원칙, Fourteen Points에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되어 민족의 운명은 민족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면서 한반도를 포함한 식민지 내의 독립 운동에 큰 불을 지폈다. 또한 소련의 레닌은 이 전쟁을 극단적 자본주의인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규정하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여러 나라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게 되는데 이런 공산권의 지지 또한 혁명에 불씨를 당기는 데 일조하게 된다. 식민지를 전세계에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 국가들도 1차 대전 후에는 대외 영토를 그나마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이마저도 유지시킬 힘이 남아 있지 않아 대부분 독립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