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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미국 헌법의 제정, 알렉산더 해밀턴, 토머스 제퍼슨, 프랑스 혁명, 영국과의 분쟁

Jobs 9 2021. 5. 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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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미국 헌법의 제정

영국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 대륙의 13개 주는 미국 독립 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  AD 1775년 ~ AD 1783년)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독립하고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 즉 '미국(美國)'을 건국했다. 그리고 AD 1787년 9월 17일 제임스 매디슨의 기초로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 분립 내용의 '미국 헌법(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미국 헌법은 13개 주 모두의 비준을 동시에 받은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AD 1788년 6월 뉴햄프셔 주가 9번째로 비준하면서 3분의 2 이상의 효력 발휘의 정족수가 충족되자 AD 1789년 3월 정식으로 공포되었다.

 

이후 AD 1788년 7월 버지니아 주와 뉴욕 주를 시작으로 나머지 노스 캐롤라이나 주(AD 1789년 11월), 로드 아일랜드 주(AD 1790년 5월)도 차례로 비준하면서 미국 헌법이 완전한 합법성을 획득하였다. 또한 AD 1791년 12월 미국 헌법의 불완전함을 해소하고 연방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고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제임스 매디슨이 작성한 10개조의 '미국 권리 장전(United States Bill of Rights)'이 제정되어 '수정 헌법(Amendments to the Constitution)'으로 불리게 되었다. 수정 헌법은 미국 권리 장전의 10개조 이외에도 지속적으로 추가되면서 훗날인 AD 1992년까지 총 27개조까지 늘어나게 된다.

 

 

조지 워싱턴의 대통령 취임

미국 헌법에 따라 입법부는 '상원(Senate)'과 '하원(House of Representatives)'으로 나뉘는 양원제의 '의회(Congress)'로 구성됐다. 하원 의원은 인구 비례로 선출하지만 상원 의원은 각 주별로 2명씩 선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개별 주마다 다른 선거법을 적용하면서 AD 1788년 11월 24일부터 AD 1789년 3월 5일까지 진행된 선거를 통해서 11개 주의 초대 하원 의원 총 59명이 선출되었다. 또한 뒤늦게 헌법을 비준한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와 로드아일랜드 주가 각각 AD 1790년 2월과 8월에 하원 의원 선출을 마치면서 하원은 총 65명으로 구성되었고 임기는 2년이 되었다. 이와 달리 상원은 각 주 의회에서 2명을 선출하기로 하면서 AD 1788년과 AD 1789년의 선거를 통해 총 26명이 선출되었다. 상원 의원은 임기가 6년이었으나 2년마다 전체의 3분의 1을 교체하여 선출하기로 했다. 이와 별도로 사법부는 '연방 대법원(Supreme Court)'을 설치했고 하위 조직으로 '순회 법원(Circuit Court)' 3개와 '지방 법원(District court)' 13개를 두었다.

 

AD 1789년 2월 4일 미국 헌법을 아직 비준하지 않은 노스캐롤라이나 주 및 로드아일랜드 주, 연방제를 반대한 뉴욕 주를 제외한 나머지 10개 주로부터 선출된 총 69명의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이 뉴욕 시에서 모여 미국의 초대 '대통령(President)'과 대통령의 유고 시를 대비하는 초대 '부통령(Vice President)'을 선출하는 선거를 진행했다. 이 당시의 대통령 선거는 선거인단 1명이 각각 2표씩 행사할 수 있지만 같은 주 출신의 후보자에게는 중복 투표를 할 수 없었다. 또한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를 별도로 지명하지 않은 채 1표 기준으로 과반수를 넘은 최다 득표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차순위 득표자가 부통령이 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단 부통령의 경우에는 과반수를 넘을 필요는 없었다. 만일 과반수가 넘은 득표자 2명이 동률을 이룬 경우 하원에서 둘 중 한 명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도록 했다. 또한 아무도 과반수 득표를 얻지 못하는 경우에도 하원에서 상위 득표자 5명 중 한 명을 대통령으로 뽑도록 했다. 부통령의 경우에도 차순위 득표자 2명이 동률을 이루는 경우에는 상원에서 부통령을 선출하도록 했다.

 

이러한 선거 방식을 적용하자 이미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미국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조지 워싱턴의 대통령 당선이 기정사실화 되었기 때문에 미국의 초대 대통령 선거는 사실상 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되었다. 그리고 조지 워싱턴이 이미 일반인 투표에서 압도적인 1위가 된 상태에서 진행된 선거인단 선거에서 선거인단 개개인이 각각 행사한 2표 중 1표를 모두 획득하면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만장일치로 선출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많은 득표(36표)를 기록한 존 애덤스가 부통령이 되었다.

 

 

조지 워싱턴의 대통령 취임과 초대 내각 구성

조지 워싱턴은 AD 1789년 4월 30일 민병대와 군악대를 대동한 행렬과 함께 뉴욕 시의 연방 홀로 향하였는데 이 때 조지 워싱턴의 취임식을 보려고 무려 10만명의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그리고 조지 워싱턴은 성서에 손을 얹으며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였고 상원으로 향하여 취임 연설을 가지면서 미국 대통령 취임식의 전통을 만들게 된다. 또한 조지 워싱턴은 자신의 칭호를 놓고 상원에서 유럽 왕실의 전례를 준용하여 제안한 '각하(His Excellency)'나 '대통령 전하(His Highness the President)' 대신에 단순히 '미스터 프레지던트(Mr. President)'라고 정하였다.

 

조지 워싱턴은 자신을 보좌할 내각의 구성에 나섰지만 헌법 상의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독립 이전에 13주 간에 체결된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준용하여 '전쟁부(Department of War)', '외무부(Ministry of Foreign Affairs)', '재무청(Finance Office)'으로 구성하였고 AD 1789년 7월 외무부가 재창설된 후 9월에 '국무부(Department of State)'로 개칭하였다. 이후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에 토머스 제퍼슨이, '전쟁장관(Secretary of War)'에 헨리 녹스가, '재무장관(Secretary of the Treasury)'에 알렉산더 해밀턴이 각각 선임됐다. 또한 법률 자문을 위한 '법무장관(Attorney General)'에 에드먼드 랜돌프가 임명되어 국무장관, 전쟁장관, 재무장관과 함께 4인 내각을 구성했다. 그 밖에 우편 업무를 담당하는 '우정공사(Post office)'의 '우정총재(Postmaster General)'로 새무엘 오스구드가 각각 임명되었지만 내각의 일원은 아니었고 부통령인 존 애덤스도 행정부의 일원이지만 상원 의장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내각에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머스 제퍼슨의 대립

조지 워싱턴이 초대 내각을 구성할 때 특이한 것은 서로 앙숙이던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머스 제퍼슨을 모두 기용했다는 점이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연방 정부의 강력한 권한을 추구하는 '연방당(Federalist Party)'을 결성했지만 이에 반해서 토머스 제퍼슨은 각 주의 자치와 권한을 중시하는 '반(反) 연방주의자(Anti-Federalist)'였다. 비록 조지 워싱턴은 심정적으로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주장에 더 공감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어느 한 정파에 소속되지 않은 채 각 주제를 두고 열띤 토론을 시켰고 마지막에 자신이 그 중 하나를 선택하곤 했다. 그러나 알렉산더 해밀턴은 국가 신용도 향상과 부국 강병을 내세우며 국가 재정 정책을 추진하면서 사사건건 토머스 제퍼슨과 격돌하였다.

 

먼저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독립 전쟁을 치르면서 각 주가 부담하게 된 부채를 미국의 모든 주가 똑같이 나누어 상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연히 부채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버지니아 주, 노스 캐롤라이나 주,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강한 반발을 샀다. 이에 알렉산더 해밀턴은 토머스 제퍼슨과 협상을 벌여 미국의 수도를 남부 지역으로 양보하는 대가로 자신의 재정 정책을 통과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를 토머스 제퍼슨이 받아들이면서 AD 1790년 7월 알렉산더 해밀턴의 법안이 통과되었고 미국의 수도는 뉴욕 시가 아니라 포토맥 강변에 어느 주에도 속하지 않는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으로 정해졌고 조지 워싱턴의 이름을 따서 '워싱턴 D.C.(Washington, District of Columbia)'로 명명되었다.

 

AD 1790년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머스 제퍼슨은 연방 은행의 설립을 두고 다시 한번 격돌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국가 재정의 안정과 대외 신용도 향상을 위하여 연방 은행의 필요성을 설파하였고 주로 공업 지대인 북부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집권화를 원하지 않는 토머스 제퍼슨은 연방 은행의 필요성에 공감하지 못한 채 헌법에 연방 은행에 대한 규정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반대했고 주로 농업이 중심인 남부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자 알렉산더 해밀턴이 연방 정부는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해줄 의무가 있다는 논리로 반박하였다.

 

결국 조지 워싱턴이 알렉산더 해밀턴의 손을 들어주면서 20년 기한으로 '미국 제1은행(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을 설립하는 법안이 AD 1791년 2월 의회를 통과하였다. 의회 내 세력이 부족함을 느낀 토머스 제퍼슨은 이를 계기로 제임스 매디슨과 함께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을 창당하면서 미국의 양당 체제가 만들어졌다. 이후 토머스 제퍼슨은 알렉산더 해밀턴이 왕당파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며 비판하였고 알렉산더 해밀턴은 토머스 제퍼슨이 분열을 획책하는 조직 파괴자라고 공격하며 대립을 이어갔다.

 

 

조지 워싱턴의 대통령 재선

조지 워싱턴의 초대 대통령 4년 임기의 종료가 다가 옴에 따라 AD 1792년 12월에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번에는 미국 13개 주가 모두 참여한 선거인단 132명이 여전히 2표씩 행사하는 방식을 통해서 선거를 진행했다. 그리고 여전히 높은 인기를 얻고 있던 조지 워싱턴이 다시 한번 132명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오히려 관심은 오히려 부통령 선거로 몰렸고 이제는 연방당과 민주공화당으로 두 개의 정당이 등장했기 때문에 초대 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가 연방당의 후보로 나서자 민주공화당에서는 조지 클린턴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77표 대 50표의 차이로 존 애덤스가 다시 한번 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조지 워싱턴의 초대 내각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AD 1793년 3월 4일부터 조지 워싱턴의 두 번째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었다.

 

 

 

조지 워싱턴 정부의 위기

위스키 반란 진압

AD 1791년 알렉산더 해밀턴은 국채 상환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위스키에 과세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의회에서 법안이 통과되는 과정에서 소규모 양조업자는 갤런 당으로, 대규모 양조업자는 정액으로 세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대규모 양조업자는 갤런(gallon) 당 6센트의 세금을 지불하지만 소규모 양조업자는 갤런 당 9센트가 과세가 되는 불합리함이 발생했다. 이는 조지 워싱턴도 대규모 양조업자라는 점도 작용했다. 또한 펜실베이니아 주와 노스 캐롤라이나 주 서부의 내륙에 거주하던 농민들은 대서양 해안 도시까지 거리가 멀고 도로 사정도 좋지 않아 남는 곡물을 위스키로 만들어 화폐처럼 사용하곤 했기 때문에 위스키 과세 정책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AD 1794년 펜실베이니아 주와 조지아 주의 분노한 농민들이 세무 징수원들에게 몰려가며 납세를 거부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메릴랜드 주, 버지니아 주, 노스 캐롤라이나 주,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서 대규모 납세 거부 폭동인 이른바 '위스키 반란(Whiskey Rebellion)'으로 번지며 사태가 악화되었다. 그러자 조지 워싱턴은 이를 연방 정부의 권위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여기고 계엄령을 선포한 후 펜실베이니아 주와 버지니아 주에서 민병대 15,000명을 모집했다. 그리고 알렉산더 해밀턴과 함께 직접 민병대를 이끌고 위스키 반란의 주모자들을 체포하였다. 이러한 단호한 조치 덕분에 위스키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반란의 주모자들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지는 않았다.

 

 

프랑스 혁명과 영국과의 분쟁

AD 1789년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이 일어나고 AD 1793년 프랑스 혁명 정부가 국왕 루이 16세를 처형한 일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각국이 참여하는 반(反) 프랑스 동맹인 '제1차 대프랑스 동맹(First Coalition)'이 결성되면서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 상황에 놓이자 이제 알렉산더 해밀턴은 토머스 제퍼슨의 담당 분야인 외교까지 간섭하기 시작했다. 토머스 제퍼슨은 프랑스가 미국 독립 전쟁을 도와준 오랜 우방임을 내세워 프랑스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알렉산더 해밀턴은 유럽의 분쟁에 개입하지 말아야 하며 이번 기회에 아예 AD 1778년에 프랑스와 체결한 동맹 조약까지 파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 정부에서 파견한 에드몽 샤를 주네가 토머드 제퍼슨의 지지 속에 공공연히 미국이 프랑스를 지원을 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조지 워싱턴 정부를 전복시키겠다고 선동하고 다니면서 반감을 일으켰다. 결국 조지 워싱턴이 알렉산더 해밀턴의 의견에 따라 AD 1793년 4월 중립을 선언하고 프랑스와의 무역을 이어가도록 하였다. 그 결과 토머스 제퍼슨이 AD 1793년 12월 31일 국무장관직을 사임하였고 대신에 법무장관이었던 에드먼드 랜돌프가 후임 국무장관이 되면서 그의 법무장관직은 윌리엄 브래드포드가 이어받는 개각이 이루어졌다.

 

이후 영국이 프랑스와 벌인 전쟁의 일환으로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French West Indies)'에서 무역을 하던 미국 상선을 나포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다시 영국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하지만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이 아직까지 세수의 대부분을 영국과의 교역 및 수입 관세에 의지하는 상황에서 영국과 전쟁을 벌이는 일은 무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지 워싱턴을 설득하여 연방 대법원장인 존 제이를 런던에 파견하도록 했다. 그리고 존 제이는 영국 정부와 협상을 벌여 AD 1794년 11월 19일 미시시피 강을 영국에게 개방하고 영국의 적대국 사략선에 대한 보급을 중지하는 대신에 약탈한 미국 선박에 대한 보상과 미국에 대한 통상 차별 폐지, 영국 및 영국령 동인도에서의 미국에 대한 무역 특혜 제공 등의 조건을 합의한 가조약에 날인하고 AD 1795년 귀국하였다.

 

일명 '제이 조약(Jay's Treaty)'이라고 불린 가조약은 AD 1778년에 프랑스와 체결한 동맹 조약에 대한 배신이라는 점과 체포된 미국 선원의 석방이나 영국의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 선동 금지 같은 중요한 쟁점 사안은 하나도 얻어내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토머스 제퍼슨의 은거 이후 사실상 민주공화당을 이끌게 된 제임스 메디슨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알렉산더 해밀턴은 AD 1795년 1월 재정장관직을 사임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제이 조약을 옹호하는 글을 써냈다. 결국 제이 조약은 조지 워싱턴의 지지 속에서 AD 1796년 2월 최종적으로 미국과 영국의 양국 정부 모두의 비준을 받으면서 효력이 발생하였고 미국은 영국과 직접적인 전쟁을 벌일 위기에서 일단은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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