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4월 26일∼6월 15일까지 유엔참전국을 비롯한 19개국 외상들이 스위스 제네바 전 국제연맹회관에서 한국의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개최했던 국제정치회담.
1953년 7월 27일판문점에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됐지만 이는 전쟁을 군사적으로 종결시켰을 뿐,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휴전협정 제4조 60항은 휴전조약이 조인되어 효력을 가진 뒤 3개월 안에 한반도로부터의 외국군 철수와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토의할 고위정치회담을 열도록 건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해 8월 28일 유엔총회는 한반도에 있어서 독립된 통일 민주정부를 세우는 것이 유엔의 목표임을 재확인하면서 휴전협정을 승인하고, 특히 휴전협정 때 건의된 고위정치회담의 실현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이 결의안은 한국과 유엔군측 참전국으로 한국전에 병력을 파견한 15개국의 참여를 권고했으며, 소련의 참가도 건의했다. 이어 10월 8일 미국은 휴전협정 당사국들에 대하여 고위정치회담을 여는데 필요한 사항들을 협의할 준비회의를 먼저 열자고 제의하였고, 공산측이 이에 동의하였다.
10월 10일판문점에서 열린 준비회의에 미국무성 법률고문 딘(Dean, A.), 한국 측 이수영(李壽榮) 대령, 중국 외무성의 황화(黃華), 북한 문화선전부상 기석복(奇石福) 등이 대표로 참석하였으나 본회담의 구성국문제를 둘러싸고 난항을 거듭하였다. 공산측은 교전 당사국뿐만 아니라 일부 중립국들을 포함하는 확대정치회의를 내세우면서 소련도 중립국의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주장하였다. 반면 유엔군 측은 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회담은 한국전에 참전한 교전 당사국들 사이의 회의가 되어야 할 것이지만, 소련만은 사실상의 교전당사국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며, 회담의 내용이나 결과에 따라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을 중립국의 자격으로 참여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양쪽의 주장은 아무런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그 해 12월 12일 무기휴회로 들어가고 말았다.
1954년 2월 18일미국·영국·프랑스·소련 등 4개국 외상들은 베를린에서 독일문제에 관한 토의를 마친 다음 공동성명을 통해, 아시아문제를 다루기 위한 회의를 그 해 4월 26일 제네바에서 열기로 합의하였다. 이 때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한국정부는 공산주의자들과 회담이 사실상 북한의 전쟁준비에 시간적 여유만 제공하며, 회담이 성공하면 주한미군이 철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내세워 참가를 거부하려 하였으나, 그렇게 될 경우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한국 스스로 거부하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는 미국 측의 권고를 받아들이고 정치회담 참석을 통해 미국 원조를 획득하려는 협상력 증진을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1954년 4월 한국 정부는 변영태(卞榮泰) 외무장관을 수석으로 하는 10명의 대표단을 보낼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경과 및 결과
1954년 4월 26일부터 열린 제네바회담은 한국을 포함한 유엔 한국참전국들 가운데 남아프리카연방공화국을 뺀 15개국과 소련·중국·북한 등 모두 19개국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두 달 동안에 걸쳐 한반도 통일을 위한 선거 범위, 국제감독, 외국군 철수, 유엔 권위 문제 등에 관한 토의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한국은 유엔감시 하에 북한에서만 자유선거를 실시하되 그에 앞서 중공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국도 4월 28일델러스(Dulles, J. F) 국무장관 연설을 통해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이 북한지역에서의 선거를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보조를 같이하였다. 한편, 북한·중국·소련 등 공산측은 남북한의 국회대표들이 전한혼성위원회(全韓混成委員會)를 구성하고, 이 위원회가 국제감시 또는 중립국감시 하에 남북한에서 동시 선거를 관리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영국·프랑스 측과 그 밖의 유엔참전국들 사이에는 대체로 남북한동시총선거를 주장함으로써 선거의 범위를 북한지역에 한정해야 한다는 한국과 미국의 입장을 견제하고 나왔다. 4월 30일 영국의 제안으로 양측 이견을 좁히기 위한 7개국(미, 영, 불, 소, 중, 남북한) 축소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선거감시기구에 관하여는 유엔감시안을 지지하는 여론이 크게 우세하여 공산 측의 국제감시 또는 중립국감시안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한편 한국 정부의 완강한 태도에 대해 미국 정부는 딘(Arthur Dean) 특사를 한국으로 파견해 이승만 대통령과 절충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는 중공군 철수, 남북한 동시선거는 개헌에 의해 국민투표를 실시해 대다수 유권자가 이를 원하는 것이 명백해진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서방 측과 미국의 압력이 강화되자 한국 정부는 5월 22일 전체회의에서 미국과 협의 하에 14개 항목의 수정안을 발표했다. 이 수정안은 최초 북한만의 선거라는 입장에 비해서는 진일보한 것이었으나 기타 참전국을 만족시킬 내용은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선거 범위를 “대한민국 헌법 절차에 의하여”라고 한정해서라도 선거실시를 제안했으나 국회해산 등 조항이 없었으므로 실제적으로는 북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회의가 이미 한국이 예측하였던 대로 별다른 성과도 없이 공전하고 더 이상 한국측의 양보를 얻어내기 어렵다고 판단되자 미국정부는 적당한 수준에서 유엔측 단합을 과시하고 정치회담을 종료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그 해 5월 3일 대표권을 국무차관에게 넘겨주고 제네바를 떠나 귀국하였다. 5월 28일 미국대표인 국무차관은 유엔의 권능을 무시하고 유엔을 한낱 교전당사자로 간주하려는 공산 측의 태도를 비난하면서 한국문제는 유엔의 권능과 권위를 전제로 하여 해결되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결국 이 회담의 가장 큰 쟁점은 한국문제를 다루는 유엔의 권위와 권능에 대하여 공산측과 유엔참전국 측의 기본적 태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직결되어 있었다. 유엔참전 16개국은 회의의 마지막 날인 6월 15일에 발표된 공동성명을 통하여, 공산측의 제안은 결국 유엔의 헌장과 원칙을 백지화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하며 앞으로 한국문제의 해결은 유엔의 원칙과 결의에 바탕을 두고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 날 회담의 의장은 16개국 공동성명을 낭독하고 결렬의 책임이 공산 측에 있음을 비난하면서 회담의 중단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제네바 정치회담은 그 첫 번째 의제였던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에는 실패하고 7월 21일 폐막되었다.
의의와 평가
제네바회담은 한국이 주권국가로 최초로 참가한 중요 국제회의이자, 전후 남·북한이 최초로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통일방안을 공개적인 장에서 논의한 회의였다. 하지만 회의는 남북 양측의 기본 입장이 정면으로 대립했기에 시작부터 실패의 가능성이 높았던 회담이었다. 결국 50여일간 논쟁 끝에 회담은 종결되었다.
이처럼 한국전쟁 직후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유일한 기회였던 제네바 회담의 결렬로 한반도는 휴전체제 아래 분단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제네바회담이 결렬된 직후인 1954년 7월 31일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의 휴전협정은 이제 공문서화(空文書化)되었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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