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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丁若鏞)-경세유표, 목민심서, 여유당전서

Jobs9 2020. 9. 2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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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경세유표』, 『목민심서』, 『여유당전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   실학자.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당쟁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 참여로부터 소외되었던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의 통치방식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들이 존중하는 성리설과는 달리 선진유학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이론을 일찍부터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들의 학문적 경향을 ‘근기학파’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정약용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고, 소시적부터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양근(楊根) 땅 일대는 뒷날의 연구자들로부터 실학자로 불리게 된 일군의 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가던 곳이었다. 그의 친인척들도 이곳의 학풍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과 해남윤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음사(蔭仕)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나, 고조 이후 삼세(三世)가 포의(布衣)주 01)로 세상을 떠났으니, 비록 양반이며 그 이전까지는 대대로 벼슬을 했지만, 그의 집안은 당시로서는 권세와 별로 가까운 처지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의 생애는 대략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생애

첫째 단계는, 출생 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내던 22세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때마침 이 때 부친의 벼슬살이 덕택에 서울에서 살게 되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李家煥)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李承薰)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도 그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약용이 어린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두 번째 단계는, 1783년 그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체포되던 때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

이 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의 경전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1789년에는 마침내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그는 이벽(李檗)·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정약용은 천주교를 서학으로 인식하고 학문적 관심을 가졌을 뿐 그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약용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였다. 당시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집권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천주교 신앙 여부가 공식적으로 문제시된 것은 1791년의 일이다. 이후 그는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해야 했고, 이 때마다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함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그는 1801년의 천주교 교난 때 유배를 당함으로써 중앙의 정계와 결별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세 번째 단계는, 유배 이후 다시 향리로 귀환하게 되는 1818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교난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이를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의 강진 유배기는 관료로서는 확실히 암흑기였지만, 학자로서는 매우 알찬 수확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중국 진나라 이전의 선진(先秦) 시대에 발생했던 원시 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해서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경세유표』·『흠흠신서』·『목민심서』의 일표이서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이들 저서는 유학의 경전인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와 사회개혁안을 정리한 것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다. 정약용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그 대부분이 유배기에 쓰여졌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마지막 단계는, 1818년 57세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생을 마감하게 되는 1836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이 시기에 향리에 은거하면서 『상서(尙書)』 등을 연구했으며, 강진에서 마치지 못했던 저술작업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의 개정·증보작업이나 아언각비(雅言覺非),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 등이 이 때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자서전적 기록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도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적 자료를 정리하기도 했으며, 500여 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를 정리하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편찬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 그의 생애는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위기에 처한 조선왕조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그 현실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선진유학을 비롯한 여러 사상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유배과정에서 불교와 접촉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다시 서학에 접근했다는 기록도 이와 같은 부단한 탐구정신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 그는 학문 연구와 당시 사회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대표적 지성이었다.

 

활동사항

정약용은 당시 조선왕조가 직면한 위기를 해소하고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이상적 사회로 재편되기를 희구하면서 각종 개혁사상을 개진하였다.

당시는 오늘날과는 달리 사회와 학문의 분야가 미분화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그의 개혁사상은 정치·경제·사회 그리고 문화·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여유당전서』의 분석을 통해 규명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정치사상을 검토해 보면, 그는 일표이서를 통해 군주권의 절대성과 우월성을 내용으로 하는 왕권강화론을 제시하였다. 벌열(閥閱)이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를 전횡하던 상황에서 국가 공권력의 회복을 위해 왕권의 절대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왕권은 공권력을 대표하는 권위의 상징일 뿐, 절대 왕정과는 거리가 멀었고, 영조와 정조대 탕평정책에서 추진되었던 왕권강화책과도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정약용은 국왕이나 관료가 공적인 관료기구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파악하였다. 또한 그의 정치사상은 왕도정치의 이념을 구현하는 데 집중되었고, 주로 집권층의 정치관을 수정시키려는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즉, 그는 집권층에 대해 위로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질서의 강화에 협조하고, 아래로는 애민(愛民)·교민(敎民)·양민(養民)·휼민(恤民)하는 목민지도(牧民之道)를 확립, 선진 시대 이래 유학의 기본적 가르침이었던 민본(民本)의 의식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한때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천자(天子)도 인장(隣長)이나 이정(里正)과 같은 인민의 대표자들이 선출하여 추대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맹자에 의해 주장되었던 폭군 방벌론(暴君放伐論)의 입장에서 민은 폭군을 거부할 수 있다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그의 정치 개혁안들의 주류는 왕조체제를 근간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봉건적 통치구조의 파행적 운영으로 말미암은 폐단을 제반 제도의 개편을 통해 최대한으로 막아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정치 분야에서의 개혁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정치운영의 형태가 소수의 벌열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로 바뀌면서 국가기강의 문란과 관료체제의 부패, 극심한 사회경제적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정약용은 관료기구의 개혁안 마련에 주력하였다. 우선, 육조에 소속된 아문들을 재배치하고, 승정원 및 왕실 관련 아문들을 모두 이조에 예속시켰다. 군영아문(軍營衙門)의 경우도 병조에 소속시켜 명령전달체계를 일원화시켰다.

또한, 그는 권력이 집중된 관료기구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방안으로서 비변사를 혁파하고 중추부를 실직화(實職化)시켜 변무(邊務)만을 담당하게 할 것을 제안하였다.

동시에 이전까지 비변사가 장악하던 군국기무 처리 기능을 의정부에 회복시키고 고위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부여함으로써, 의정부가 명실공히 관료기구의 중심이 되는 행정체계를 구상하였다.

그리고 그는 왕과 관료집단 간에 사적인 연결을 방지하고 관료기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을 비롯한 청요직(淸要職)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즉, 왕을 정점으로 하고 의정부를 통해 권력이 일원적으로 행사되도록 하여 행정의 본체인 육조를 중심으로 하는 관료체제를 강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왕과 관료 사이에도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도록 하여 사회개혁을 위한 정책이 일관성 있게 추진될 수 있는 독자적인 관료체제를 구성하고자 하였다.

한편, 정약용은 나름대로의 새로운 관료제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이에 걸맞는 새로운 관료를 선발하기 위해 과거제 개혁론을 피력하였다. 그는 이익의 견해에 찬동하여 식년시 외에 부정기시를 모두 혁파하고, 급제자의 수도 줄임으로써 과거에 합격하고도 관직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고 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과거제 본래의 기능을 일단 회복시키자는 목적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또한 그는 과거제의 실시 절차를 정비·보강해 제시하였다. 공거제(貢擧制)를 과거시험의 1단계에서 도입하고, 소과(小科)와 대과(大科)를 통합했으며, 마지막으로 삼관(三館)의 관료들이 급제자와 경륜을 논하는 조고(朝考)를 첨설하였다.

고시과목도 대폭 증설, 경학과 관련된 과목들이 시험 때마다 바뀌도록 했고, 중국사는 물론 우리 역사, 관료의 실무 행정과 관련되는 잡학(雜學), 체력의 단련을 요하는 시사(試射) 등을 새로이 추가하였다.

이러한 과거제 개혁론은 관료를 선발하는 기준을 덕행, 재주 등으로 다양하게 확대하고, 학교제와 과거제의 연결을 통해 관료 양성과 선발을 구조화하고자 한 것으로, 관료로서의 기본적인 자질과 실무능력을 고양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정약용은 원초 유학에 입각한 왕도정치론의 차원에서 사회개혁론을 제기했다. 원초 유학의 왕도정치론에서는 그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민에게 항산(恒産)을 보장해 주고, 정전제의 실시를 통해 부세와 요역을 고르게 하여, 상공(商工)을 보호할 것을 제시하였다. 또한 전반적 차원에서 ‘보민(保民)’을 주장했고, 특히 궁민(窮民)의 구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원초 유학의 왕도정치론을 중세 해체기의 조선사회에 적용함으로써 조선에서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는 정전제의 정신을 살려 토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인정(仁政)의 회복을 주장하는 새로운 왕도정치론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실학자들이 제시했던 정전제 등에 관한 주장은 단순한 경제개혁론이라기보다는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통합적 이론 가운데 중요한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도 왕도정치를 조선사회에 알맞게 재해석하여 시행하려는 현실적 목표를 가지고 토지제도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 당시 농업에 있어서 주된 생산관계는 지주-전호제가 보편적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토지개혁론은 이러한 지주제를 인정하는 위로부터의 개혁과, 지주제를 해체하고 자립적 소농이나 중소 상공인의 입장을 지지하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대두되어 있었다.

실학파의 토지개혁론은 후자의 길과 관련되며, 정약용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자신의 토지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개혁론을 설명하기에 앞서 기존의 정전제·균전제·한전제를 차례로 비판하였다. 우선, 중국 고대의 정전제는 한전(旱田)과 평전(平田)에서만 시행되었던 것이므로, 수전(水田)과 산전(山田)이 많은 우리나라의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균전제는 토지와 인구를 계산하여 이를 표준으로 삼는 방법인데, 당시 조선은 호구의 증감이 수시로 변동되고 토지의 비옥도가 일정치 않기 때문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전제는 전지의 매입과 매각에 일정한 제한을 두고자 하는 제도이지만, 타인의 명의를 빌어 한도 이상으로 늘이거나 줄이는 것을 일일이 적발해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이들의 기본적 결함이 치전(治田)에 반하여 농사를 짓지 않는 자에게 토지를 주고 균산에 주안을 둔 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균산에 목적을 두지 않고 오직 농업생산력을 상승시킬 수 있는 치전에 목적을 둔 토지제도의 개혁을 주장함으로써,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정약용의 토지 개혁론은 「전론(田論)」에 나타난 여전제(閭田制)와 『경세유표』에 보이는 정전제의 두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정전제는 고대 정전제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한 정전론과 전제개혁안을 적용한 정전의(井田議)로 구분할 수 있다. 그의 토지개혁안 가운데 여전제적 개혁안을 담고 있는 「전론」은 1798년에 작성되었고, 정전제적 개혁을 추구하던 『경세유표』는 1817년에 쓰여졌다.

먼저, 그는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토지개혁안인 여전제를 논하였다. 「전론」에서 주장하는 여전제의 목적은 토지의 균분으로 토지와 재부가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농사를 짓는 자만이 농지를 얻고, 농사를 짓지 않는 자는 얻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는 정전제(정전론, 정전의)에서도 견지되는 입장이다.

여전제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전제는 30가구를 1여로 하여 여민(閭民)은 공동노동을 통해서 생산과 수확을 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여기에서 여민이 선출한 여장(閭長)은 생산작업을 분담시키며, 일역부(日役簿)를 만들어 노동량을 기록한다.

이와 같이 여전제에서는 공동생산을 추진하지만, 소비는 가족 단위로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즉, 생산물의 분배는 생산에 투하된 가족의 노동량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여전제는 토지의 봉건적 소유를 부정하면서 공동소유·공동경작을 창안함으로써 그 경제적 내용에 있어서 토지를 사회적 소유로 규정하고 있다. 여전제에서는 인구의 자유로운 이동을 8∼9년간 허용하면, 이익을 추구하고 해를 피하려는 농민의 합리적 행동에 의해 각 여의 노동생산성과 빈부는 균등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리고 10년째부터는 인구와 노동력의 이동을 노동생산성을 균등화하는 방향에서만 국가에서 계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그는 여전제의 토지제도를 군사조직의 근간으로 삼아 여-리-방-읍(閭里坊邑)에 따른 병농일치제적 군제개혁안을 구상하였다.

정약용은 농사를 짓지 않는 사·공·상의 토지 소유를 반대하였다. 이에 따라 상인과 수공업자는 독립적으로 여전제와 사회적 분업관계를 이루도록 하였다. 사족의 경우 직업을 바꾸어 농사에 종사하거나 그 밖의 생산활동, 즉 상업·수공업·교육 등에 종사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사(士)들이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위한 기술 연구에 종사하는 것을 가장 높이 평가하였다.

한편, 『경세유표』에 보이는 「정전의」에서는 국가에서 재정을 마련하고 그 돈으로 사유 농지를 유상 매입하여 전체 농지의 9분의 1을 공전(公田)으로 만들기를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 공전을 민의 노동력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을 전세에 충당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실천하기 위한 과제로서 공전을 마련하기 위한 재원 마련, 기구 편성, 공전 편성작업, 공전 경작을 위한 노동력 할당, 토지대장 작업, 공전의 조세량 등을 검토하였다.

그가 제시한 이 정전의의 개혁론은 조세개혁적 성격이 크며, 토지개혁이나 경작권 조정이라는 측면도 있었다. 그는 정전의에서 농업전문화를 통한 상업적 농업을 추구하면서 그 경영 규모는 100무 단위의 부농에 의한 자본주의적 개별 경영을 지향하였다.

한편, 『경세유표』의 정전론은 전국의 토지를 국유화하여 정전을 편성한 뒤, 그 중 9분의 1은 공전을 만들어 조세에 충당하고 나머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공전은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의 공동노동으로 경작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정전론에서는 국가에 토지 처분권을 귀속시켜 지주전호제의 재등장을 막아 보고자 하였다.

전반적으로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은 상업적 이윤과 ‘자본주의적’ 경영을 전제로 한 것으로, 농민에게 토지를 갖게 하되 양반 및 상공 계층은 제외하고 농업을 통한 상업적 이윤을 추구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른 실학자들과는 차이가 있다.

한편, 정약용이 제시한 여전제와 정전론은 유사점이 많다. 즉, 그는 자신의 개혁안에서 모두 토지의 사적 소유를 부정했고,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농민에게만 토지를 주고자 하였다. 그리고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과, 전제개혁(田制改革)을 통해 병농일치제를 관철하고 지방제도와 병제의 일체화를 시도한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 두 개혁안 사이에는 차이도 있었다. 즉, 정약용은 여전론을 통해서 여의 설치와 여민의 공동생산을 분명하게 논했다. 그러나 정전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전의 경우는 그 운영에 있어서 여전과 차이가 있었고, 농업의 전문화와 부농에 의한 개별 경영을 제안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전론과 여전론이 근본적으로 다른 개혁안은 아니다. 아마도 그는 지향할 궁극적 목표 내지는 방향으로 여전제적 개혁안을 제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현실적 개혁안으로서 정전제를 말했기 때문에 이 둘 사이에는 상이점보다는 유사점이 더 많이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정약용은 상업 및 수공업 분야에 관해서도 개혁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존중하던 원초 유학의 왕도정치론에서는 인정의 지표 가운데 하나로 상인과 장인(匠人)을 보호하는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살았던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선진시대와는 달리 상공업이 상대적으로 발전해 가던 단계였다.

이처럼 그는 선진 유학에서 제시했던 공고(工賈)에 대한 보호논리와 조선 후기의 상공업계의 발전 등에 영향을 받아서, 화폐의 유통정책에 적극적이었으며, 광업의 개발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왕도정치의 구현을 시도하던 정약용이 상공업 진흥론을 개진한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우선 그는 상업을 천시하는 말업관과 상인의 관직 진출을 막는 금고법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이는 유식(遊食) 양반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었다. 또한, 그는 상업발전론을 제시하는 한편으로 특권상업 및 매점상업에 대해서는 반대론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이미 18세기 이후 발달한 특권 및 매점 상업에 의한 폐단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선왕의 법’을 들어서 상업 이윤을 확보하고 있던 상인들에 대해 상업세의 증수를 꾀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세과사(稅課司)나 독세사(督稅司)와 같은 세무관서의 설치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상업세의 증수를 위해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상업뿐만 아니라 수공업 분야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방직(紡織) 분야 등에서 드러난 낙후된 국내 기술을 발전시키고 생산력의 향상을 통한 국부를 증대시킬 목적으로 선진기술을 과감히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선진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이용감(利用監)과 같은 관청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선박과 수레 제조기술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전함사(典艦司)나 전궤사(典軌司)와 같은 관청을 중앙정부에 설치해서 정부 주도로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피력했다.

한편, 정약용은 당시 전국적으로 화폐가 유통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농본적인 절약론의 입장에서 화폐 유통의 구조 개선을 주장하였다. 그는 화폐가 상품 유통의 매개체로서 국가 경제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당시 화폐정책 및 화폐제도의 개혁과 전황(錢荒)을 극복하려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전환서(典圜署)를 설치하여 화폐주조 관리체계를 일원화하고 화폐의 품질과 체제를 개선한다는 것이다. 또한 화폐제도의 개혁안으로 동전을 가장 이상적인 화폐로 생각했으나, 고액전의 통용 및 금·은화의 주조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사회는 광업분야에 있어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즉, 18세기 말에는 공장제 수공업 단계의 덕대제(德大制) 광업경영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농민층 분화와 관련하여 광산노동자가 증가되었고, 이로 인해 농업노동력의 부족현상이 나타났다. 광업의 발달은 전답과 봉건질서를 함께 파괴시켜 갔다. 그리고 광세(鑛稅)의 징수, 금은의 국외 유출에 따른 손실 등 여러 문제가 수반되었다.

이에 정약용도 사회개혁론의 일환으로 광업개혁론을 제시하였다. 그의 광업론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초기는 국영 광업정책의 단서가 마련되는 「지리책(地理策)」·「응지논농정소(應旨論農政疏)」가 저술된 시기이다. 이 때 정약용은 설점수세제를 기본으로 한 정부의 광업정책을 용인하면서 동점(銅店)과 철점(鐵店)에 대한 억제정책을 완화시키기를 요구했고, 광업의 민영화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광업 민영화보다는 관영화 또는 국영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을 견지했다.

광업개혁론에 있어서 두번째 단계는 『경세유표』·『목민심서』의 단계이다. 여기서 그는 광업정책 및 광업경영론을 논했고, 광업제도의 운영을 개선하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즉, 중앙정부 차원의 근본적 개혁 방안으로 국영광업정책 및 국영광업론을 제시하면서 중앙에는 사광서(司礦署)를 설치하고 지방에는 감무관(監務官)을 파견하여 광산을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이용감의 설치를 제안했고, 금광군의 생산·노동 조직과 광산의 경영형태 및 생산기술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면서 생산성 향상을 전망하였다. 나아가 그는 아전의 중간 수탈과 소란의 근원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방관 차원의 광업제도 운영방안으로서 광업 행정지침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광업개혁론은 당시 발달한 덕대제 광업 경영의 기술수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정약용은 왕도정치의 이념에 따라 상공인을 보호하고, 당시 사회의 한 과제로 제시되고 있던 상공업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 상공업 개혁론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통공발매정책을 지지하면서 상업세의 증수를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광업을 국부의 원천으로 파악하여 국가재정의 확보를 위해서는 광산국영이 요청된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그의 상공업 개혁론은 현실적으로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고 유식자(遊食者)를 정리하여 개직(皆職)을 성취해야 한다는 사회개혁적 입장에서 제시되었다.

정약용은 경제사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추구하고 있던 왕도정치의 이념과 조선사회가 직면해 있던 현실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하여 일련의 사회개혁론을 전개하였다.

일찍이 왕도정치의 이념을 제시한 『맹자』는 「등문공(滕文公)」상(上)에서 “백공의 일은 본래 농사를 지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百工之事 固不可耕且爲也).”라고 하면서 노심자(勞心者)와 노력자(勞力者)를 구별해 사회적 분업 개념의 원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봉건사회 해체기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사회구조에서는 사회적 분업이라는 측면보다는 신분제도가 적용되는 사회적 불평등이 엄존하고 있었다.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이와 같은 사회 신분제도의 모순성을 지적하고, 고착적 신분제에 의해서 사회를 설명하기보다는 사회적 분업에 가까운 개념으로 조선사회를 재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의 사회신분제의 개혁 논의에는 미진한 점이 많다.

그는 모든 신민을 사·농·공·상·포·목·우·빈·주(士農工商圃牧虞嬪走)의 9직(九職)으로 나누어 배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직역에 대한 종래의 신분적 파악에서 사회 분업에 따른 직능적 파악으로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또한 사의 농·공·상에의 참여와 농·공의 과학기술적 기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기예 경영을 통해 우수한 농·공인을 행정직에 발탁하는 일종의 직업별 과거제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9직은 공동체적 필요에 의해 국가에서 배정하는 것으로 자유로운 선택의 의미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사민구직을 수평적·직능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신분제의 철저한 혁파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약용은 또한 인간의 본질적 평등에 관해서는 인정을 했지만 신분간의 위계질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국가에서 의지하는 것은 사족인데 그들이 권리도 세력도 없어지면 위급할 때 소민의 난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라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는 양반 사족의 지도나 통솔이 없이는 국가가 존립할 수 없다는 신분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교육관에도 드러나 양반 자제와 서민은 교육기관이나 교육내용을 엄격히 구분하여 양반은 지도자로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전인교육을, 일반 백성은 효제의 윤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양반은 통치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배우고 평민은 피지배자로서 지켜야 할 윤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지배계급의 선천적인 우월과 피지배계급의 선천적인 열등을 합리화시키는 운명론을 부정하고 인명을 중시하는 민본주의 사상에서 계층간 격차를 좁혀 보려 하였다. 그러나 정치의 담당자는 양반임을 내세우는 고정된 신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완전한 신분제의 타파로 나아가지도 못하였다.

정약용 역시 기술개발의 최종 통로를 관직의 수여에 귀착시키거나, 성공적인 독농가나 향촌지도자의 경우에도 그 최종 귀착점을 관직에 두고 있었다. 이는 당시 사회문제가 되고 있던 유식양반들에게 개직을 보장하며, 그들을 지방행정의 하급 담당자로 삼아 행정의 운용 효율을 높이고, 사회 풍속의 개선도 기대할 수 있다는 인식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정약용은 여타 실학자들과처럼 사회 신분제에 대해 인습적 관념에 매달리지 않았고 직능적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사회적 분업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사회구조를 논했던 것이다. 그들은 성리학적 견지에서 제시되던 선천적 불평등성에 입각한 인간불평등성론에는 분명한 반대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만민평등의 원리를 개관적으로 이론화하거나, 신분제를 철폐하여 사회적 평등을 이루어야 함을 분명하게 주장하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은 왕도정치의 이념에 따라 자신들이 속해 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불평등성에 대해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었다.

한편, 그들은 향촌제도의 개편과 연결하여 향직(鄕職)을 정식 관직화하기를 제안했고, 향리(鄕吏)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은 그들의 개혁안은 유식 양반들에게 개직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정약용은 그의 개혁 사상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은 그의 철학적 사유 내지는 역사관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새로운 천관(天觀)을 제시하며 천명(天命)과 인간본성이 이중구조적 단일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여기서 그는 성리학의 입장과는 다른 인간관과 윤리관을 가질 수 있었고, 제반 사회개혁론을 제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역사관에 있어서도 특출한 면을 드러내고 있다. 즉, 민의 일상적 생산활동을 통해 과학기술이 진보, 발전된다는 인식을 확립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 이해를 위해 노력했고 그것이 도덕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비로소 그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민에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평가와 의의

이와 같은 정약용의 사상은 당시 사회가 직면해 있던 봉건적 질곡을 극복할 수 있는 탁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그를 실학사상의 집대성자이자 조선 후기 사회가 배출한 대표적 개혁사상가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시 사회가 직면해 있던 각종 해체 현상을 직시하고, 사회개혁을 위한 여러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지고 그 문제점들을 찾아 나갔다.

나아가 그는 문제점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원인에 대해 규명하고자 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개혁안을 마련해 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개혁안은 정조와 같은 성군(聖君)이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서 실천해야 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 왕도정치의 실현에는 창의적이고 강직한 신하의 보필이 필요하며, 아마도 자신이 이와 같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정약용은 정조의 치세기였던 자신의 젊은 시절에는 한때 관직에 있으면서 직접 개혁 정사를 실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애의 대부분은 개혁의 현장과 유리된 상태에서 보내게 되었고, 오랜 귀양살이를 통해 당시 사회의 피폐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이상적이며 참신한 개혁안들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그는 개혁안을 자신이 직접 추진할 수 없었고, 관직에 대한 경험 부족은 그의 개혁안에 현장성의 결여라는 문제점을 안겨주었다. 즉, 개혁의 목표와 개혁된 사회상에 대해서는 뚜렷이 제시하고 있지만, 개혁된 사회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여기서 그의 개혁안이 가지고 있는 이상적 특성과 함께 실천에 있어서의 제한성이 드러나게 된다.

한편, 그의 개혁안은 민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민본주의에서는 민을 객체화하여 통치나 보호의 대상으로만 파악할 뿐, 민 자신을 통치의 주체로 인식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제약성은 그 개혁안의 실현가능성에 상당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나 정약용은 18세기를 전후하여 우리나라 사회에서 강력히 제시되고 있던 개혁의 의지를 집대성했고, 개혁의 당위성을 명백히 해주었던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에게는 개혁을 향한 열정과 함께,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민에 대한 애정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는 시대의 문제점을 밝혀내는 데 과감했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고뇌하던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이상적인 왕도정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스스로 좌절하지 않고 그 방대한 개혁사상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그의 개혁안이 묵살되거나 좌절되어가는 과정에서 조선왕조의 몰락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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