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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 홍범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921, 러시아 자유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 교전, 흑하(黑河)사변

Jobs9 2023. 8. 3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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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을 감행한 일본군을 피해 만주 일대 독립군 부대는 항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조직을 대한독립군단으로 규합하고 연해주로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1921년 3월 부대별 이동을 시작해 국경을 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부대가 만주에 남고 일부가 연해주까지 이동했다. 러시아로 이주한 독립군은 소련 적군(공산군) 소속 한인 부대장을 통해 군사훈련에 도움을 받는가 하면, 소련 정부와 군사협정을 맺고 무기를 공급받는다. 이에 일제는 강력한 외교공세를 벌여 소련 정부에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한다. 혁명 후 내란 발생이 불안했던 소련은 1921년 6월 22일 자유시에 주둔한 한국 독립군에게 무장해제의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사살하고 포로로 잡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직접적으로는 사할린의용군이 소련 적군의 포위와 공격에 의한 참변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한국독립군의 해체를 요구하던 일본군과 볼셰비키 공산당의 협상이 있었다. 시베리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을 협상으로 철수시켜야 했던 볼셰비키 공산당은 일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하여 일본과 마찰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독립군 내부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 고려공산당 간의 정치적 대립투쟁까지 겹쳐진 결과로 일어난 복합적인 배경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에서의 대패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를 침략하였는데, 이 보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간도에 군대를 투입했지만,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독립군에 대패하고 만다. 이후 일본군은 양민학살의 형태로 보복작전을 벌이면서, 간도의 동포들뿐만 아니라, 노령 연해주에 살고 있던 동포들도 많은 피해를 당했다.

당시 소련은 혁명이후 내전 중으로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적군과 반혁명파의 백군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일본군은 백군 지원 명분으로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등 한인 거주지역을 습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독립군은 적군에 가담한 후 적군이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로 이동했고, 연해주 한인무장세력은 볼셰비키 세력의 강화에 따라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집결했다.

1920년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은 5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한국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상황이 위태롭게 돌아가자 서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이청천의 대한독립단,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여러 조직으로 분산되어 있던 독립군은 일단 중국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헤이룽장성 밀산(密山)에 집결했다. 이들은 독립군 10개 부대를 통합·재편성하여 1920년 12월 병력 3천5백 명의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했는데, 3개 대대로 편성되어 사실상의 북간도 독립군 통일군단이 되었지만, 무장이 빈약했기 때문에 제3국으로부터의 군사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은 이에 고무되어 1921년 정월 소만 국경선을 넘어 시베리아 땅을 밟았다. 김좌진은 이 때 소련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반대 이유는 공산주의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어렵더라도 우리 동포가 많이 사는 간도 땅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독립군단은 다시 동쪽 이동하여 우수리강을 건넜고, 안전지대인 연해주의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했다.

 

시베리아에 들어선 독립군단은 부대를 나누어 1여단을 이만에 두고, 2여단을 영안에 주둔시켰다. 이 때 소련 전역에서는 왕당파라 할 백군과 공산당을 지지하는 적군간의 전투가 계속되었고, 적군은 우리 독립군을 흡수하여 백군과의 전투에 투입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독립군 역시 그러한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당시 워낙 추위와 굶주림, 빈약한 무장과 보급으로 인해 공산당의 군사지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독립군은 적군으로부터 대포 15문, 기관총 500정, 소총 3,000정 등의 장비를 지원받게 되었다.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시베리아와 간도로부터 한인무력이 자유시로 집결해, 간도지역의 한인무력으로 최진동·허욱 등의 총군부군대, 안무·정일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이청천 등의 독립군과 김좌진·서일 등의 군정서군대가 있었으며, 노령지역의 의병대로는 이만군대·다반군대·이항군대·자유대대·독립단군대 등이 있었다. 총병력수는 1,900여 명이었다. 그런데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장부대 중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에 한인무력군통수권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났다. 이때 자유대대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고, 이항군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했으므로 결국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의 정면대결이 발생한 것이다. 즉 이항군을 이끌었던 박 일리아는 군통수권장악을 위해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이항군대는 자유대대 편입 거부를 통고했다.

이때 극동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장도정 등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대한국민의회 및 자유대대측과의 협의도 없이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朴昌殷)을 총사령관, 그레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내는 동시에 이항군대를 사할린 의용대로 개칭하고 그 관할하에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무력을 두도록 했다.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다. 이를 접수한 한인부는 다시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 박 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지정했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에 대해서도 강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다가 장교들이 체포당하고 기관포와 대대문서를 압수당하는 등의 횡포에 못이겨 크라스노야르스크로 이주했고, 이주 즉시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당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 인도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력에 대한 군권이 일단 상해파를 지지하는 이항군대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자유대대의 오하묵·최고려 등은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가서 한인무력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군정회의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윌린,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채성룡으로 임명했다. 이무렵 이용·박 일리아 등은 사할린 의용대가 주둔하는 마사노프에 와서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 이칭: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한인무력군 통수권을 위해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게 되면서 실력으로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극동공화국 군무총장에게 체포되어 이르쿠츠크로 압송당했다.

한편 1921년 5월 23일 고려군정회의의 갈란다라시윌린 일행이 치타를 출발하여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해보니 옛 이항군대·총군부군대·독립단군대·다반군대·국민군대·이만군대 등 1,400여 명이 사할린 의용대라는 이름으로 1개 연대를 편성하고 있었지만, 고려군정의회의 통제권 바깥에 있었다. 같은 해 6월 7일 갈란다라시윌린은 자유시의 전 부대를 소집하여 자기가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고려군정의회의 사명을 역설하며, 6월 8일 박 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했지만, 홍범도·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고, 이후 사할린 의용대는 점점 고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일리아는 고려군정의회에 대한 반항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 그레고리예프도 갈란다라시윌린에 투항하자,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 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사할린 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 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총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해파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 의용대는 전사자·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교전 당시의 병력은 1,000여 명가량이었다.

 

1921년 6월 2일 소련적군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는데, 이는 우리 독립군이 소련 공산당을 위하여 싸워달라는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소련 공산당을 위해 싸우라는 요구에 독립군은 항의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독립군을 2증 3증으로 포위하여 무조건 수락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 때 소련군 배후에서 고려공산당(이르크츠크파)이 일을 꾸미고 있었으며, 김좌진은 이 때 이미 소련공산당의 이상한 눈치를 간파하고 극비리에 부하를 거느리고 흑룡강을 건너 중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한편 독립군과 소련정부(당시 치타정부)간의 협상은 결렬되면서 소련군의 공격이 6월 28일에 시작되었고, 이때 독립군은 사망자 2백72명, 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탈출하다 물에 빠져 죽은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백 5명, 포로 97명 도합 6백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고 나머지 인원이 가까스로 소련을 탈출하였다.

자유시사변 뒤 1921년 7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고려혁명군을 이르쿠츠크로 이동시키고 8월말 1개 여단으로 재편하여 러시아 적군 제5군에 예속시켰다. 고려혁명군은 이르추크에서 사관을 양성할 사관학교(교장 지청천)를 개교하고 군사 훈련에 매진하였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한국독립군의 해체를 요구하는 일본군과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당 간의 협상의 결과가 있다. 차르 정권이 몰락한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을 협상으로 철수시킬 필요가 있었던 볼셰비키 공산당은 일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하여 일본과 마찰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독립군 내부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 고려공산당 간의 정치적 대립투쟁까지 겹쳐진 결과로 일어난 복합적인 배경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운동노선을 둘러싼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대립에서 야기된 이 사건이후 두 공산주의 조직의 분열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청산리대첩 이후 고난의 행군으로 새로운 독립운동 근거지를 찾아 연해주로 들어갔던 만주지역 독립군단은 독립운동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만 하였다. 그러나 만주지역 독립군단들은 경신참변과 자유시사변 등 두 차례에 걸친 참담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항일무장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독립군단들은 남북만주를 연결하는 통신연락의 재개와 독립군단들의 전열정비 등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이는 1920년대 중반 이후 만주지역에서 새로운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과 연관? "자유시 참변 때 통곡…재판관되어 독립군 석방에 노력"

<민족의 장군 홍범도> 저자 이동순 교수 "정부, 어떻게 이렇게 치졸한지 의문"

국방부가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과 관계가 있고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이유로 육군사관학교(육사)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을 두고, 홍범도 평전을 쓴 이동순 영남대학교 명예교수는 참변이 일어났던 당일 홍범도 장군은 현장에 없었고 공산주의자로 보기도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동순 교수는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던 그 당시 이르쿠츠크로 잠깐 회의에 참석한다고 떠나셨는데 바로 그날 사태가 일어났다"며 "소식을 듣고 황급히 와보니 길가에 시신이 널브러져 있고 동족상쟁이 타국에서 펼쳐졌다. 그래서 통곡하면서 시신을 땅에 묻고 황급히 뛰어다니면서 현장을 정리하고 나중에 재판관이 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앞서 국방부는 지난 28일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통해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다"며 "독립군측이 400명에서 600명까지 사망하였고, 약 50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재판하는 위원으로 참가"한 것을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참변으로 인해) 약 140명이 전사하고 600명 가량이 생포됐는데 생포되어 감옥에 갇힌 독립군들을 죄의 경중을 가리는 재판관으로 스스로 자청해서 참석했다"며 "그 이유는 어떻게든지 석방시키려는 노력을 하겠다고 했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약 30명이 감옥에 갇히고 나머지는 다 석방됐다"고 밝혔다. 
국방부가 해당 자료에서 "자유시 참변사태는 1921년 6월에 자유시에서 무장해제를 거부한 독립군이 공격당한 사건을 말하는데, 홍범도 장군은 순순히 무장해제하는 편에 섰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대목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너무 유치찬란했다. 어떻게 한 정부의 부서를 대표하는 기관이 이렇게 치졸한 문장을 쓰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자유시 참변에 대해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을 대파한 이후 일본군은 그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함경도 지역에 사단급 병력을 총동원해서 만주 일대에 무장 독립 단체를 모조리 파멸시킬 계획으로 만주로 출병을 시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만주 지역에 약 16개 독립운동 군소단체들이 연합해서 일단 러시아로 피신하자고 한 것"이라며 배경을 설명했다. 
이 교수는 "그래서 풍찬노숙하면서 아무르강을 건너갔고, 건너간 그곳이 '스보보드니'라고 하는 곳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자유라는 뜻"이라며 "이 자유시에 약 1700명 가량 도착했는데 총기를 휴대한 군인들이 자유시로 진입하니까 스보보드니 시민들이 깜짝 놀라고 지역에서도 불안감을 가졌다. 안전 사고도 (현지 시민들에게) 위협이 되고"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러시아 측에서 (독립군에게) 총기를 반납하는 게 좋겠다. 그리고 귀하들은 독립군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나라에 무단으로 들어와 있는 거류민이라는 통보를 하면서 무기를 반납하라고 하니까 우리 독립운동 전체 조직이 두 패로 나뉘어졌다"며 "일단 무기를 반납하자는 측과 군인이기 때문에 끝까지 무기를 반납할 수 없다고 대립하다 나중에 이념적 대립으로 갈라치기가 되어서 결국은 소련 홍군 측에서 무기반납 지지파를 앞세워 반대파를 공격한 것이 바로 자유시 참변"이라고 말했다. 
이 상황에서 홍범도 장군의 역할에 대해 이 교수는 "처음에는 무기는 우리가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우리가 계속 무기반납을 거부하는 쪽으로만 고수한다면 소련 홍군 측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한 낌새가 있다, 무기는 일단 반납하는 게 좋을 것 같다라고 방침이 바뀌어졌고, 여기에서도 갈등과 내분이 생긴 것 같다"고 해석했다.
국방부가 "홍범도 장군이 1930년대에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기 위해 작성한 이력서에 '자유시 유혈사태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한인 빨치산 지대 대표단원 자격으로 레닌 동지를 만나러 모스크바로 갔다'로 되어 있다"라고 주장한 데 대해 이 교수는 "그 서류(이력서)를 저도 봤습니다만 그 어디에도 그런 내용이 담겨져 있지 않다"라고 반박했다.
홍범도 장군이 공산당에 가입한 것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홍범도 장군의 평생소원이 빼앗긴 조국의 주권을 찾는 일"이라며 "공산당에 가입한 것도 당시 소련의 무력을 활용해서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우겠다는 복안"이었다고 진단했다.
홍범도 장군이 1922년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개최한 '극동민족혁명단체 대표대회'에 참석해 권총, 상금, 친필 서명된 조선 군대장 증명서를 접수했고 1930년대에 작성한 이력서에는 자유시 사태 보고를 위한 한인 빨치산 대표 자격으로 레닌을 만나러 모스크바에 갔다고 돼 있다는 국방부의 주장에 대해 이 교수는 당시 대표대회를 '극동피압박민족대회'라고 규정했다. 
그는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 대장을 했다는 자격으로 초청받았다. 그 때 레닌이 조선의 독립투사가 모스크바에 왔다고 면담을 하고 싶어한다고 해서 만나게 된 것"이라며 "그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조선의 위대한 독립투사를 영접하면서 받은(레닌이 건넨) 기념물"이라고 말했다. 
홍범도 장군의 빨치산 대표 자격을 문제삼은 국방부의 주장에 대해 이 교수는 "비정규군인데, 러시아에서는 제정러시아 정부의 군대와 싸우던 모든 볼셰비키 군대를 전부 빨치산(partisan)이라고 했다"며 "홍범도 장군을 빨치산이라고 불렀던 것은 제국주의의 고통을 받는 민중을 구출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항일유격대 이런 뜻으로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홍범도 장군은 공산당에 입당은 했지만 막스나 레닌주의 책을 읽은 것도 아니고 박헌영이나 이동휘 같이 모스크바에 유학을 하고 돌아온 공산주의자와는 전혀 다르다"라며 "연금을 받기 위해 입당원서를 내야 된다든지 하는 건 생활을 하면서 받아들인 형식일 뿐이다. 홍범도 장군이 공산주의자로 활동을 한 기록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내놓아 보라고 해라"라고 따졌다. 
그는 흉상을 철거하려는 정부의 방침에 대해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면 흉상 전체를 아예 녹여서 땅에 묻어버리시거나 홍범도 장군을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시기 바란다. 카자흐스탄에서 고독하게 살다가 아주 정말 어렵게 귀국하신 어른을 이렇게 모욕을 주고 땅에 팽개치고 손상을 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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