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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Jobs9 2022. 9. 12.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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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걸쳐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군사행동을 일컫는다.


1296년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시작된 제1차 전쟁(1296년 ~ 1328년)은 1328년 애든버러-노샘프턴 조약의 체결로 종료되었다. 제2차 전쟁(1332년 ~ 1357년)은 1332년 에드워드 발리올이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하며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쳐들어옴으로써 발발, 1357년 베릭 조약으로 종료되었다. 스코틀랜드의 독립이 확정된 뒤에도 양국은 1603년 동군연합이 될 때까지 산발적인 충돌을 계속했다(영국-스코틀랜드 전쟁).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은 스코틀랜드의 거대한 국가위기의 일부였으며, 동시에 최종적으로 독립을 쟁취해냄으로써 스코틀랜드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시기였다. 양차 독립 전쟁은 모두 스코틀랜드의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재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또한 중세 전쟁에서 장궁이 전면에 나서게 된 중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영국은 작은 섬나라에 지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 등 네 지역으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잉글랜드는 게르만 이주민, 즉 앵글로-색슨 계통의 주민들이 대부분이고 나머지 지역의 주민은 켈트(Celt)계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영국의 공식 국호는 '대(大)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이다. 영국 국호의 변화를 살펴보면, 이 나라의 역사는 잉글랜드가 다른 지역을 병합하여 팽창해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들 지역 모두를 가리켜 흔히 '영국'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관행은 기실 잉글랜드 중심주의에서 비롯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 제국(帝國)의 해체 및 경제 쇠퇴에 뒤이어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지역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세력을 얻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 이르러 분리 움직임은 좀더 분명한 추세로 나타나고 있다. 19세기만 하더라도 이와 같은 운동은 별로 없었다. 역사적으로 18세기 초까지 잉글랜드와 끊임없이 갈등을 빚어온 스코틀랜드 사람들도 19세기 영 제국의 번영기에는 '대브리튼'(Great Britain) 국민이라는 의식을 뚜렷이 나타냈으며, 제국의 첨병 역할을 기꺼이 맡았다. 19세기의 이러한 분위기에 비하면 오늘날의 분리 움직임은 매우 심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근래에 우리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이같은 대조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두 사건을 지켜본 적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1997년 6월 30일 홍콩 반환 직전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이루어진 영 육군 42 보병연대의 기념행진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9월 스코틀랜드 자치의회 구성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실시된 주민투표 결과이다. 

블랙워치(Black Watch)라고 불린 이 부대는 역사적인 기념행진을 위하여 영국 본토에서 특별히 파견되었다. 이 행사에서 병사들이 스코틀랜드 특유의 전통복장인 '킬트'(Kilt) 의상을 두르고 백파이프와 드럼소리에 맞추어 연병장을 행진하는 모습이 전 세계의 텔레비전 방송망으로 중계되기도 했다. 1725년에 처음 창설된 이 부대는 전통적으로 스코틀랜드 고지대(High Land) 출신의 젊은이들로 이루어졌다. 블랙워치는 창설이래 200여 년간 나폴레옹 전쟁, 1차 대전, 2차 대전, 한국전 등에서 용맹을 떨쳤다. 이들이 홍콩 반환 기념식에서 특별 행진을 맡았던 것도 영 육군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부대였기 때문이다. 42 보병연대의 애국적인 활동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갈등의 분위기를 넘어서 18, 19세기에 스코틀랜드의 사회 분위기가 잉글랜드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보다는 오히려 영 제국의 국민으로 봉사한다고 하는 자긍심으로 충만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 1997년 9월 11일에 실시된 스코틀랜드 주민투표는 분리주의 운동에 중요한 이정표를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투표는 스코틀랜드 자치의회의 창설과 독자적인 재정권 여부에 관한 것이었는데, 주민의 75%가 이에 찬성했다. 사실 스코틀랜드 의회는 1707년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합병된 이후 사라졌다. 2000년에 새롭게 구성될 의회는 외교·국방 문제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내 문제에 대한 자치권과 징세 및 재정권을 갖는다. 물론 영국 노동당 정부가 주민투표를 서둘러 강행한 것은 중앙정부에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을 지방으로 분산하고 또 이렇게 함으로써 분리주의 운동을 오히려 무력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정책이 장기적으로 분리주의 운동을 약화시킬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위의 두 가지 에피소드는 오늘날 대브리튼에 대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귀속의식 또는 국민 정체성이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1707년 통합 이후 200여 년간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잉글랜드와의 전통적인 갈등이 있었음에도 대브리튼 국민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분위기는 분명히 약해졌으며 스코틀랜드인으로서의 독자적인 의식을 새롭게 형성해가고 있다. 국민 정체성의 형성과 위기, 브리튼의 통합과 분리라고 하는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갈등의 역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지리적 경계는 어쩌면 역사적·정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 후 1세기에 로마제국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켈트인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그 후 두 지역의 경계로 굳어졌다. 스코틀랜드는 원래 칼레도니아라고 불렸으며, 일찍부터 세 부류의 종족들이 섞여 살았다. 그 기원이 확실하지 않은 픽트인(Picts), 아일랜드에서 이주한 스코트인(Scotts), 그리고 앵글로-색슨인에게 쫓겨 남부에서 이동한 브리튼인(Britons)이 그들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들의 인종적 구분은 희미해졌으며, 그들의 언어도 점차로 스코트어(語)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박지향, 1997: 27∼29).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자주 충돌한 것은 특히 11세기 이후의 일이다. 잉글랜드가 7왕국 시대를 거쳐 통합왕국으로 발전하던 9세기에 스코틀랜드도 스코트인과 픽트인을 통합한 왕국으로 발전했으며, 당시 케네스 1세는 왕국의 수도를 스콘으로 옮겼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이른바 '스콘의 돌'(The Stone of Scone)은 케네스 1세가 수도를 옮기면서 즉위식에 사용했던 돌이라고 전해진다. 이 돌은 후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탈취하여 최근까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보관되어 있었다. 

중세 초기에 잉글랜드와는 독자적인 왕실 전통을 유지하던 스코틀랜드는 점차로 잉글랜드의 직접적인 간섭과 위협 아래 놓였다. 우선 11세기 후반에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정복왕 윌리엄의 군대에 패배를 맛보았다. 그 이후 두 나라 사이에 독립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다가 마침내 1296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직접 통치하기 위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이후 수 십 년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 에드워드 3세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웠다.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은 승리와 패배가 교차할 만큼 치열한 것이었다(마틴, 1993: 37∼48). 
 
사실 민족 정체성은 특히 타자(他者)에 대한 인식에서 먼저 형성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민족주의는 14세기 전반 잉글랜드의 칩입에 대한 치열한 저항에서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승리와 패배의 무용담은 여러 전설과 영웅 설화를 낳으면서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웠다. 이 시기의 영웅 설화는 대부분 윌리엄 월리스(William Wallace)와 로버트 브루스(Robert Bruce)에 관련된 것들이다. 

월리스는 에드워드 1세의 침입에 맞서 잉글랜드 군에 끈질기게 대항하였으며, 마지막 전투에서 사로잡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월리스는 사랑하는 아내가 잉글랜드 병사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하자, 분연히 일어나 에드워드 1세의 군대와 싸웠다. 그는 뛰어난 전술과 용력으로 잉글랜드군을 괴롭혔다. 월리스는 마지막 전투에서 포로로 사로잡혔으며 런던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했다. 침입자의 전제와 압제에 대항하여 영웅적으로 투쟁한 월리스의 삶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전설과 무용담으로 되살아났다. 중세 잉글랜드에서 지배층의 압정에 맞서서 민중을 위해 투쟁한 영웅의 전형으로 로빈 훗의 발라드와 설화가 형성되었듯이, 스코틀랜드에서는 월리스에 관한 민요와 설화가 민중의 기억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몇 년 전에 멜 깁슨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브레이브 하트」는 영웅 월리스의 생애와 사랑을 다룬 역사물이다. 

월리스가 처형당한 후에 스코틀랜드의 지도자로 떠오른 사람은 브루스였다. 그는 왕실 출신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유력 가문의 후예였지만, 월리스의 죽음 이후 침체에 빠진 스코틀랜드 군대를 결속하여 잉글랜드 에드워드 2세의 군대에 저항하였다. 1314년의 이른바 백너번(Bannockburn) 전투는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널리 알려진 전쟁이다. 이 전투에서 브루스는 2만 명 이상의 잉글랜드 군을 격파하고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 1328년 마침내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브루스는 로버트 1세로 스코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마틴, 1993: 48∼49). 

15세기 이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군사적 충돌은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두 나라의 관계는 개선되지 못했다. 스코틀랜드의 국왕들은 잉글랜드와 경쟁하는 프랑스 왕실과 가깝게 지냈다. 잉글랜드 왕실에 대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적대감은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에 뒤이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제임스 스튜어트)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면서 점차 완화되었다. 그후 100여년간 영국 내란기를 제외하고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스튜어트 왕가 출신을 공동의 국왕으로 옹립하면서도 서로 독자적인 두 나라로 남아 있었다. 이와 같은 기묘한 관계는 1707년 두 나라가 통합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통합된 뒤에도 영국 왕실에 대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적대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1714년 스튜어트 왕통이 끊어지고 그에 따라 하노버 가(家)에서 영국 왕위를 계승하면서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상당수는 스튜어트 왕실을 복원하기 위한 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도 했다. 1715년과 1745년 두 차례에 걸쳐 스튜어트 왕실 복원운동(이 운동의 가담세력을 Jacobbites라 부른다)이 일어났는데, 이 반란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특히 1745년 재커바이트들은 스튜어트 가문의 왕위 계승 후보자인 찰스 에드워드를 통합왕국의 국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컬로든(Culloden)에서 잉글랜드 군과 싸웠지만,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그 후 잉글랜드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저항운동은 더이상 힘을 얻지 못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두 나라의 통합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잉글랜드와의 일련의 투쟁 속에서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타자(잉글랜드)와 다른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그들은 잉글랜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종족적 기원을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찾았다. 그러나 모든 브리튼인이 트로이의 장군 부르투스 후손이라는 잉글랜드의 설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은 이집트 파라오의 딸 스코티아의 후예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잉글랜드의 영향력을 더 강하게 느낀 저지대 사람들일수록 오히려 잉글랜드라는 타자를 더 의식하였다. 

 

정치에서 문화로-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의 대응

17세기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공동의 왕위를 가졌지만, 국왕은 주로 런던에 머물렀으며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중심 권위의 실종이라는 상황을 맞이했다. 이 시기에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새롭게 결집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었다. 종교개혁기에 스코틀랜드 교회는 순수한 칼뱅주의를 받아들여 잉글랜드 교회와 다른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선도한 인물은 존 녹스(John Knox), 조지 뷰캐넌(George Buchanan),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등이다. 스코틀랜드 개혁교회, 이른바 커크(the Kirk)는 국가의 통제로부터 교회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는데,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교회의 이러한 움직임을 잉글랜드로부터의 독립을 지키려는 의지로 받아들였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영향은 단순히 신앙문제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존 녹스 이래 교회는 스코틀랜드의 실질적인 상징이 되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교회 자체의 개혁에서 더 나아가 젊은이들에 대한 새로운 교육을 통하여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영적 갱신과 함께 새로운 지식과 도덕을 고양하기를 소망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녹스, 뷰캐넌, 멜빌 등으로 굳건하게 이어져 내려왔다. 녹스는 주교제도를 장로체제로 바꾸었고 스코틀랜드 대학교육을 혁신하였다. 멜빌 또한 글래스고우 대학과 에든버러의 세인트 메리 칼리지의 학장을 역임하면서 새로운 교육방법을 도입했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학문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이 스코틀랜드 국내에서 또는 유럽 대륙에서 지식을 쌓는 데 전념하였다. 18세기에 에든버러나 글래스고우의 대학의 명성은 전 유럽에까지 널리 퍼졌으며, 대륙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 곳에서 교육받기를 원했다. 

18, 19세기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영국이 전통적 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우리는 이 시기에 인문학, 사회과학, 공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룬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을 찾을 수 있다. 역사가 윌리엄 로버트슨(William Robertson), 사회과학자 애덤 퍼거슨(Adam Ferguson),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 문학분야의 월터 스코트(Walter Stott), 로버트 번즈(Robert Burns), 조지 톰슨(George Thompson), 공학 분야의 토머스 텔퍼드(Thomas Telford) 등은 그 일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Harvie, 1994: 86∼87). 여기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18세기 후반 이래 19세기에 걸쳐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이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이 시기 영국 문화의 주류를 이루면서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 일반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19세기 영국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의 활동은 흔히 '스코틀랜드 계몽운동'(Scottish Enlightenment)으로 불린다. 이 말은 물론 1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어쨌든 이 지적 흐름은 에든버러에 런던, 파리, 비엔나에 못지 않은 학문적 명성을 안겨 주었다. 동시대의 지적 분위기에 밝았던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세계의 어느 곳도 에든버러와 경쟁할 수 없다."(Harvie, 1994: 87) 

이 계몽운동은 합병 이후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새로운 대응방식을 반영한다. 이제 스코틀랜드는 더 이상 잉글랜드와 정치적인 면에서 대결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당대의 지식인들 사이에 타자로서의 잉글랜드의 이미지가 순화된 것만은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브리튼에 통합되어 있으면서도 잉글랜드와 다른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이중적인 성향이 계몽운동에 깃들어 있다. 1767년 이후 새로운 도시계획에 따라 에든버러 시민들은 신도심지에 수도 런던의 쾌적한 분위기를 되살려냈지만 그러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런던의 대안으로서 독자적인 성격을 나타내려고 했다.  

에든버러 식자층의 주류는 전문 직업인이었다. 그들은 전문적인 식견을 지녔으면서도 남부로 진출할 만한 재력을 갖추지 못한 소지주, 변호사, 상인, 문필가, 제조업자, 교사, 목사들이었다. 18세기 후반이래 이들 지식인들의 담론세계와 문화는 스코틀랜드 민족주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계몽운동은 한편으로는 전산업적 요소가 깃들어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쇠락한 잉글랜드를 대신해서 브리튼의 문화를 되살려야 한다는 강한 자의식이 숨어 있었다. 우리는 당대 에든버러 지식인들의 토론모임이나 이들의 저널과 출판활동 등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1764년 첫모임을 가진 에든버러 사색협회(Speculative Society)는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담론공동체였다. 이 모임의 고정회원으로는 월터 스코트, 프랜시스 제프리(Francis Jeffrey), 헨리 토머스 콕번(Henry Thomas Cockburn) 등이 있었다. 그들은 수요일 저녁 에든버러 대학 구내에서 만나 술을 곁들이며 담소를 나누었다. 이런 담론의 장에서 그들은 좁게는 스코틀랜드의 전통과 문화를, 그리고 넓게는 브리튼의 문화와 정신에 관해서 토론을 벌였으며 그것이 지적·문화적 활력을 제공했다. 예컨대 자유주의의 산파역을 자임했던『에든버러 리뷰(Edenburgh Review)』지의 편집인들-비평가 프랜시스 제프리, 문필가 시드니 스미스(Sydney Smith), 헨리 브루엄(Henry Brougam), 법률가 콕번, 경제학자 제임스 밀(James Mill) 등-도 사색협회를 출입하던 사람들이었다. 

『에든버러 리뷰』가 19세기 영국의 식자층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편집인들은 제각기 뛰어난 비평과 문필활동을 통해서 영국 사회의 지적·문화적 정신을 고양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더 나은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갖가지 사회활동에 참여하였다. 이를테면 헨리 브루엄은 런던대학 설립의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노동자층을 대상으로 지식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기술강습소' 운동도 펼쳤다. 글래스고우, 런던, 리버풀 등지의 기술강습소 설립은 브루엄의 활동에 크게 힘입어 이루어진 것이었다(이영석, 1999: 308∼9). 기술강습소 운동의 내면적 가치체계라고 할 수 있는 '자조'(self-help)는 사실 빅토리아 시대 사회 일반의 슬로건이기도 했는데, 당대의 베스트셀러『자조론(Self-Help)』을 쓴 새뮤얼 스마일즈가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것도 따지고 보면 우연한 일이 아니다(이영석, 1999: 292). 

역설적으로 18, 19세기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의 문화적 성취는 타자로서의 잉글랜드를 의식한 결과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대브리튼의 문화 창달자임을 자부하는 이중적인 의식구조를 보여준다. 이 이중구조를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그들은 현실 정치에서 잉글랜드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스코틀랜드의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초극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현실정치를 넘어 좀더 추상적인 것, 전통과 학문과 문예 속에서 그들의 자의식을 발현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런 노력이 대브리튼의 새로운 문화적 전통으로 자리잡기를 기대하였다. 정치적 열등감은 어쩌면 문화적 우월의식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 터였다. 에든버러의 지식인들이『브리태니커 백과사전(The Encyclopedia Britanica)』의 편찬과 개정에 열정을 기울였고 또 많은 사람들이 백과사전의 편찬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도 이런 측면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계몽운동과 문화중심주의를 통해서 스코틀랜드인들은 궁극적으로 대브리튼 국민이라는 귀속의식 또는 대브리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는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19세기 스코틀랜드 지식인의 의식이 '잉글랜드적인것'(Englishness)을 넘어서 '브리튼적인 것'(Britishness)에까지 이르렀을 가능성은 조심스럽게 인정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가능성은 잉글랜드 사람들의 의식과 관련지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외관만을 단순히 비교하면, 두 지역의 통합 이후 국민적 정체성이란 사실 잉글랜드로의 흡수과정에서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1800년 당시 잉글랜드의 인구는 850만 명, 스코틀랜드의 인구는 15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력, 경제력 등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잉글랜드인들이 스코틀랜드 사람들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고, 또 멸시하는 버릇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61년 한 부인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에 대해서 협잡꾼, "졸렬하고 저속하고 음침한 금욕주의자", 맹목적인 애국주의자로 바라보는 편견이 널리 퍼져 있음을 꼬집었다(Robbins, 1988: 10∼11). 그러나 다른 한편,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의 기질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커다란 전체(즉 브리튼적인 것) 속에 나타나는 다양성으로 이해하려는 경향도 나타났다. 데이비드 흄에 따르면, 영국의 특징은 단일성이 아니라 점차로 복합적인 문화로 확산하는 경향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었다(Robbins, 1988: 11). 

빅토리아 시대에 잉글랜드인들이 이전의 편견의 제약을 받으면서도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데에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직접 또는 간접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18세기 후반에 화가들은 브리튼의 아름다움, 특히 스코틀랜드 자연과 풍경에 매료되었고 그것을 화폭에 옮기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 조지프 터너(Joseph Turner)는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자연경관을 다룬 뛰어난 풍경화를 남겼는데, 그의 그림은 브리튼 섬의 풍광에 대한 잉글랜드인의 이해를 높여주었다. 에드윈 랜드시어(Edwin H. Landseer)는 장기간 스코틀랜드에 체류하면서 <하이랜드 골짜기>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풍경화를 그렸다. 그가 소재로 다룬 하이랜드의 산과 바위와 골짜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인상으로 다가왔다(Robbins, 1988: 12∼13). 

18세기 말에는 브리튼의 풍경을 직접 보고 관찰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나폴레옹 전쟁기에 대륙으로 여행을 떠나지 못한 자산가며 중간계급 출신 지식인들은 그 대신에 브리튼의 여러 지역을 탐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하이랜드의 산악지대며 웨일즈의 이국적인 풍경들에 깊이 빠져들었다. 여름이면 스케치북을 들고 스코틀랜드 고지대나 북웨일즈로 떠나는 여행객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Robbins, 1988: 19). 1830년대이래 식자층 사이에 지도가 널리 보급되었고, 출판업자들은 그들의 지도가 "나라의 실제 상태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스스로 나라의 곳곳을 답사하고 경험하는 것, 그것은 19세기 중엽의 영국인에게 더이상 낯선 일이 아니었다(Smith, 1985). 더욱이 19세기 중엽에 철도가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자리잡으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스코틀랜드의 풍경을 그림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철도의 시대에 이르러 잉글랜드 사람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스코틀랜드의 풍물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문화적 자긍심과 스코틀랜드 자연에 대한 잉글랜드인의 열광은 브리튼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인들은 잉글랜드 중심주의나 스코틀랜드적 자의식을 나타내곤 했지만, 그럼에도 그 한계를 넘어서 브리튼적인 것을 공유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이것은 물론 당시 영국이 광대한 식민지를 경영하는 제국으로 팽창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18세기이래 스코틀랜드 지식인의 문화중심주의가 브리튼의 정체성에 기여한 정도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대브리튼과 국민 정체성

오늘날 역사학에서는 민족을 일종의 '상상의 공동체'로 이해한다. 그것은 어떤 실체라기보다는 이야기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의미체계라는 것이다(Kramer, 1997: 536). 국민의식 또는 국민적 정체성은 당연히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영국사에서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또는 '브리튼적인 것'(Britishness)은 대체로 18세기 말 또는 19세기 초에 분명하게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Robbins, 1988: 6). 이러한 정체성이 통합에서 비롯했다면, 그것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지역에 각기 독자적인 민족의식이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 이들 민족의식을 넘어서 통합된 전체로서의 국민의식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을까?  

사실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브리튼의 정체성을 거론하는 역사가들은 드물었다. 잉글랜드 중심주의의 영향을 받은 보수적인 역사가들은 '영국적인 것'이 바로 '브리튼적인 것'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영국의 국민 정체성은 역사가들의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가 역사적으로 통합된 이래 과연 대브리튼 국민의식이 형성되었는지, 정말 그렇다면 언제 형성되었는지 면밀하게 성찰하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오늘날 영국에서 국민적 정체성의 위기가 그만큼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의 구분을 넘어선 대브리튼 국민의식이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급속하게 자리잡은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프랑스와의 전쟁을 생각할 수 있다. 린다 콜리(Linda Colley)는 프랑스라는 타자와의 끊임없는 전쟁이 영국인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Colley, 1991). 17세기 말 이래 영국과 프랑스는 9년전쟁,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7년전쟁, 미국 독립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 여러 전쟁에서 싸웠으며, 그 대부분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물론 세계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두 나라의 싸움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중심부의 패권을 둘러싼 경쟁에서 비롯되었으나, 그것은 정치적인 것 못지 않게 종교적인 것이기도 했다. 가톨릭 프랑스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영국의 항전은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 싸움이었다. 전쟁의 종교적 성격은 18세기 전반의 전쟁에 비해 후반에 이르러 점차 약해지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스코틀랜드인이 이들 전쟁에 적극 참여한 데에는 종교적 성격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콜리에 따르면, 영국인의 정체성 형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치 및 경제의 자유에 대한 관념이다. '자유롭게 태어난 영국인'이라는 관념은 물론 17세기 내란기에 나타났으나, 그것이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렇다면 프랑스와의 전쟁이 어떻게 자유의 관념과 연결된 것일까? 영국인들이 가톨릭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은 종교적 관용정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프로테스탄티즘이야말로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그들이 누리는 자유의 원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유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잉글랜드 교회나 스코틀랜드 교회는 마찬가지였다. 

다음으로, 앞 절에서 지적한 대로 스코틀랜드의 문화중심주의가 오히려 국민의식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의 문화중심주의는 처음에는 정치적 열등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겠지만, 그들의 성취가 영국인들이 공유하는 문화의 주류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좀더 다른 의미를 띠게 되었다. 문화중심주의는 스코틀랜드의 독자적 자의식을 고양하기보다는 오히려 대브리튼의 정체성과 곧바로 연결되게 마련이었다. 오늘날 에든버러 시내 곳곳에는 월터 스코트의 좌상을 비롯하여 문화적으로 뛰어난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의 조상(彫像)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물론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문화적 긍지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근대 영국 문화를 대변하는 인물들이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자부심 속에는 이미 브리튼의 정체성이 깊숙이 녹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 제국 또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제국의 광대한 식민지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새로운 기회인 셈이었다. 제국은 교양 있는 스코틀랜드인에게 법조계·군대·식민지 관료 등의 일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이 제국 경영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효율적인 대학 교육으로 제국 경영에 필요한 젊은이를 많이 배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잉글랜드 젊은이들의 처지와는 달리 국내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전망이 밝지 않았다. 해외 진출이야말로 이들의 상승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배출구였다. 고지대의 용감한 젊은이들은 육군과 해군에 입대하여 군 경력을 쌓는 데 열심이었고, 저지대의 교육받은 사람들은 식민지 또는 동인도회사의 관리로 대거 진출하였다. 실제로 해외 식민지와 관련된 일자리에 진출한 사람들 가운데 스코틀랜드인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 예컨대 1775년 벵골에 파견된 관리 249명중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은 47%였다. 또 나폴레옹 전쟁 당시 지원병의 20%가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스코틀랜드 인구 비율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다(박지향, 1997). 

19세기 영국인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왕실의 전통이다. 사실 새로운 의식과 정체성은 그에 걸맞은 상징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전통이 때로는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이다. 전통이란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복고적인 문화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특정한 시대 사람들의 이해와 열망에 따라 나타난 것이며 역사적 과거와 연속성을 가지면서도 새로운 의례와 상징을 포함한다. 전통은 과거보다 현재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Hobbawm and Ranger, 1983: 2∼3). 

역사적으로 보면 왕실은 영국인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스튜어트, 하노버 왕조의 국왕들은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풍자의 대상이 되거나 농담의 주제로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국인들의 전통적인 자유의 관념 때문에 국왕의 인위적인 권위는 곧바로 전제(專制)를 연상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대륙의 다른 나라와 같은 왕실의 거대한 조형물이나 호화로운 왕실의식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19세기 후반에 변모한다. 왕실의 이미지가 달라졌고 왕실의식도 공중 앞에서 재현되기 시작하였다. 왕실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존경심은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여황제를 겸하면서 높아졌으며, 특히 보수당의 디즈레일리 정부는 여왕의 이미지를 적극 이용하였다. 1887년 빅토리아 여왕 즉위 50주년 기념행사는 왕실에 대한 국민의 열광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도 왕실에 대한 분위기는 우호적으로 변했다. 특히 발모럴 성(Balmoral Castle)을 왕실의 사저로 이용하여 빅토리아 여왕의 스코틀랜드 여행이 잦아졌고, 이것이 스코틀랜드인들의 열광을 자아냈다. 원래 이 성은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이 구입하여 개축한 것으로, 남편이 죽은 후에 여왕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이 성을 찾았다. 여왕의 여행은 스코틀랜드와 왕실의 거리를 그만큼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 언론 매체의 등장과 함께 여왕의 여행을 많은 사람들이 전해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캐너딘(D. Cannadine)에 따르면, 오늘날 영국 왕실의 전통과 의례는 대부분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황제에 즉위한 1877년 전후에 오래된 의식들을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각색하고 새로운 의례를 창출하였다.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영국 국민들의 왕실에 대한 감정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영국인의 개인주의 기질과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이를 더 조장하였다. 왕실 의식의 확산은 국왕의 정치적 권한의 축소와 반비례하여 이루어졌다. 영 제국의 쇠퇴기에 왕실 전통이 오히려 발전한 것은 역설적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기술혁신과 왕실의식의 조화가 세련되게 이루어졌다. 오늘날 영국 왕실은 '혼돈의 시대의 안정을 위한 결정점'으로 작용한다. 1930년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국왕의 방송담화는 '아버지' 상으로서의 군주의 이미지를 부각하였다. 대규모 국가 행사가 있을 때마다 라디오를 통하여 생방송되었고, 특별한 마이크를 통하여 청취자가 벨, 말소리, 마차소리, 환호를 들을 수 있었다. 왕실의 가장행렬이 국민적이고 가족적인 행사임을 상징하는 데 성공한 것은 이러한 기술발전 덕택이다(Cannadine, 1983: 101∼64).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19세기 영국의 국민 정체성은 너무나 뚜렷한 것이었다. 내용의 차이는 있겠지만,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어느 지역에서나 대브리튼 국민이라는 의식은 확고하였다. 이런 분위기 아래서 자기 지역만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세기에도 스코틀랜드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명맥을 유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운동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는커녕 사람들의 관심도 끌지 못하였다. 적어도 19세기에 관한 한, 스코틀랜드에서 분리주의 운동은 분명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세기에 다시 드러난 것처럼 정치적 통합과 브리튼의 귀속의식이 강력했음에도 스코틀랜드 독자적인 정체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집단적 분위기의 이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영국의 현주소-분열과 정체성의 위기 

1950년대에 일단의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보관되어 있던 '스콘의 돌'을 훔쳐낸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들은 몇 달 후에 밝혀졌고, '스콘의 돌'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이 사건은 스코틀랜드 분리주의 운동을 사람들의 머리 속에 다시금 각인시켜 주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후, 스코틀랜드 자치의회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앞두고 이 돌은 다시 스코틀랜드로 정식 반환되었다. 이 돌의 운명이야말로 대브리튼의 국민 정체성이 약화되었음을 알려주는 유력한 상징이라 할 것이다. 그 명맥조차도 끊어진 듯이 보였던 분리주의 운동이 불과 한 세대 사이에 많은 호응을 얻은 까닭은 무엇인가. 과연 영국은 사실상의 해체단계에 들어선 것인가. 

1960년대에 독일의 칼 도이취(Karl Deutsch)는 잉글랜드인, 스코틀랜드인, 웨일즈인이 각기 그들 나름의 정체성을 견지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몇 세기에 걸쳐 정치적으로 통합되었음에도 그들의 의식구조에는 서로 다른 정체성이 병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영국이라는 나라가 별개의 지역들 사이의 정치적 연합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Robbins, 1988: 3). 사실 분리주의 운동이 단기간에 되살아났다는 것은 오랜 정치적 통합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의 독자적인 정체성이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왔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단기간에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세력을 얻은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좀더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19세기 영 제국의 번영기와 오늘날의 영국을 비교하면 부분적인 설명은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분리주의 운동이 제국의 해체, 영국 경제의 쇠퇴, 유럽 통합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왜 제국의 해체가 분리주의 운동의 성장과 관련되는가. 2차 대전 이후 식민지 해방운동이 전세계를 휩쓸면서 영국의 해외 식민지도 대부분 독립국가로 바뀌었다. 사실 식민지 문제로 곤란에 빠졌던 프랑스와 비교할 때 영국은 변화하는 시대적 추세에 작 적응했다고 알려져 있다. 영국은 능동적으로 식민지를 독립시킴으로써 이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고 그만큼 국력의 소모도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국의 해체는 그 경영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없앴다. 군대 축소 또한 비슷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제국 경영에 적극 뛰어들었던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가 줄어든 것을 뜻하였다.  

다음으로 2차 대전 이후 경제 쇠퇴 문제를 살펴보자. 1950∼70년대는 전세계적으로 장기호황을 누렸던 시기이다. 영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시기에 영국 경제는 완전고용과 함께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다. 그러나 그 성장은 다른 경쟁국들에 뒤쳐진 것이었다. 영국인들은 번영의 시기에 이전보다 높아진 생활수준에 집착한 나머지, 그들 나라의 경제력이 인접한 독일이나 프랑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장기호황의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영국 경제의 취약점이 그대로 드러난 것은 1970년대 석유위기 때였다. 1973년이래 영국 경제는 장기불황에 빠졌으며, 특히 1978년 이후 10여 년간 영국인들은 제조업의 위축에 따른 실업 증가, 인플레이션, 생활수준 하락 등의 고통을 겪었다. 제조업의 위축은 전통적인 수출산업을 위주로 하는 지역에서 심각했는데, 잉글랜드 북부, 스코틀랜드, 웨일즈 지역이 이에 해당한다. 예컨대 1984∼88년 사이에 영국의 전체 산업분야의 고용규모는 2.9% 증가한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고용규모가 11.9%나 감소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실업률도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을 수밖에 없었다. 1996년 통계에서도 스코틀랜드의 실업률은 잉글랜드 북부와 함께 전국 평균을 훨씬 넘었다. 분리주의 운동은 이와 같이 경제적 박탈감이 높은 곳에서 더 거세게 타오르기 마련이다. 

유럽 통합의 움직임 또한 분리주의 운동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 같다.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유럽 통합운동은 더 한층 활력을 얻었다. 그 동안 영국은 유럽 통합에 거리를 두었고 그에 따라 통합운동은 항상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하였다. 영국이 유럽 통합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에 대해서는 흔히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즉 독일과 프랑스의 헤게모니에 반대하는 영국이 통합 속도의 재조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소극적인 태도에는 국제정치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그것이 국내 분리주의 운동에 미칠 파장을 고려한 데서 오는 요인도 있다. 

역사가들은 영국의 지리적 환경에서 섬나라라는 특징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대륙과 떨어진 섬나라라는 조건이 일찍부터 영국이 대양 너머로 눈길을 돌리는 데 이바지하였다. 오랫동안 영국인들은 대륙의 문제에 초연한 태도를 지녀왔고 그 대신에 해외 식민지와 그들의 식민국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제국의 해체와 더불어 영국은 이제 유럽 대륙의 한 부분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절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에 영국의 고뇌가 있다. 대륙이라는 타자를 설정하고 해외 제국을 경영하는 상황 아래서 영국은 지역적 다양성을 넘어 브리튼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유럽 연합의 일원이 되는 순간 이러한 상황은 중요성을 상실한다. 그럴 경우 스코틀랜드와 웨일즈가 잉글랜드와 함께 대브리튼을 형성해야 하며 그럴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이 사라진다. 유럽 연합의 테두리 안에서 잉글랜드나 웨일즈나 다같이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진 단위지역으로 변모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영국의 보수적인 정치인들이 유럽 연합 가입에 주저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오늘날 유럽 통합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독일이나 프랑스를 경쟁국으로 바라보던 대중의 정서도 점차로 바뀌고 있다. 여론조사에서도 가입을 반대하는 비율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지역별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흥미롭다. 잉글랜드에서는 상대적으로 반대 여론이 높고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에서는 상대적으로 낮다. 이러한 현상은 브리튼의 정체성의 위기를 바라보는 태도에서도 지역간 차이가 있음을 뜻한다. 기존의 보수당 정부에 비해서 유럽 연합에 전향적인 정책을 공언한 바 있는 노동당 정부는 집권 초기와는 달리 유럽통합 정책에서 조심스러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유럽 단일화폐인 유러화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그 전형적인 보기이다. 이것은 유럽통합 문제가 영국의 정체성 문제와 직접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유럽통합에 대처하는 일이야말로 현재 영국의 정치인들이 당면한 어려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오랜 분열과 통합을 되풀이해온 영국의 역사적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대응책을 강구할 수 없다. 특히 19세기 브리튼적 정체성의 형성과 오늘날 그 약화라고 하는 대조적인 현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앞으로 유럽연합은 '대브리튼'이라는 관념에 상당한 원심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원심력에 대해서 영국인들은 어떠한 상징과 이미지 속에서 구심력을 찾을 것인가. 그 대답은 아직도 미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19세기 이래 영국은 국민 정체성의 형성과 약화라고 하는 서로 대조적인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영국의 사례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를 성찰하는 데에도 약간은 도움을 준다. 물론 민족적 동질성이 없이 18세기에 국민 통합을 이룩한 영국의 사례와 아직도 민족적 동질성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는 남북한의 경우를 비교하는 데에는 한계가 뒤따른다. 그렇더라도 지난 50여 년간 남북한 사회는 이질적인 정치 및 경제체제 아래서 각기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비록 같은 민족이라는 정서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는 하지만,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최근의 연구 경향을 감안하면, 그 정서 또한 일정한 한계를 지녔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50여 년간 형성된 서로 다른 정체성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우리는 단시일에 통일을 이루는 꿈을 꾸기에 앞서서, 남북한에 형성된 정체성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다루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남북한의 이질적인 정체성을 넘어서 새로운 통합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차이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스튜어트 왕조(1603 ~1714) : 스코틀랜드 출신 왕위 계승

♣ 스튜어트 왕조(1603 ∼ 1714)
(1) 제임스 1세(1603 ∼ 1625)
(2) 찰스 1세(1625 ∼ 1649) - (청교도 혁명<1649>. 공화정 시대<1649 ∼1660> ) - (왕정복고<1660>)
(3) 찰스 2세(1660 ∼ 1685)
(4) 제임스 2세(1685 ∼ 1688)
(5) 메리 여왕(1688 ∼ 1694)와 윌리엄 3세(1688 ∼ 1702)의 공동 통치
(6) 앤 여왕(1702 ∼ 1714)

1603년 영국의 Elizabeth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절대주의는 엘리자베스시대를 정점으로 하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여왕은 독신으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는 스코틀랜드왕 제임스가 혈연에 따라 잉글랜드왕을 겸하여 제임스 1세가 되고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1605년의 가이 포크스 등 카톨릭 교도의 화약음모사건을 계기로 카톨릭을 탄압하였으며, 엘리자베스시대부터 세력을 키워온 칼뱅파(派) 청교도도 박해하였다.

청교도가 많은 의회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의 제임스의 대립은 뒤를 이은 찰스 1세 시대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1628년 의회가 공채(公債)나 조세(租稅)는 의회의 찬성을 요한다는 것, 함부로 백성을 체포 ·투옥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청원을 통과시키자 왕은 의회를 해산시켰다. 왕은 재원조달을 위해 1640년에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선출된 청교도가 이를 반대하자 곧 해산해 버렸다. 이것이 단기의회이다. 같은 해에 소집된 장기의회에서는 왕과 의회의 반목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1642년부터는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국내전쟁이 일어났다. 이 내전은 1647년에 이르러 의회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청교도는 온건주의 장로파와 급진주의 독립파 및 평등파로 분열하였다.

왕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파와 결속하고 각지의 왕당파의 지지를 얻어 다시 국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2차 내전은 독립파와 평등파의 승리로 끝나 1649년(조선시대 효종1년) 찰스는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을 지도자로 하는 공화정부가 성립하였다.(크롬웰의 청교도 혁명

이 청교도 혁명으로 상원은 폐지되고, 장로파와 토지배분을 요구하는 빈농·군인·직인 등 평등파도 탄압되었다. 크롬웰의 정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원정, 해운법에 의한 네덜란드의 제해권에 대한 도전, 에스파냐 함대의 타파 등 대외정책에서는 성공하였으나, 대내적으로는 엄격한 종교정책과 군사독재로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

그가 죽자 1660년 의회는 신교의 자유, 마그나 카르타와 권리청원의 존중을 브레다 선언에서 맹세한 선왕의 아들 찰스를 망명처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이고 왕정을 부활시켰다.
새 의회는 소수의 장로파와 다수의 왕당파로 이루어졌으며, 다수파는 국교도만이 국왕이 될 수 있다는 심사율(審査律)의 제정을 비롯하여 국교주의의 재건에 주력하였으나,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은 찰스 2세와의 대립이 표면화하였다.
이윽고 의회는 카톨릭 교도인 왕제(王弟) 제임스의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휘그와 토리의 두 파로 분열·항쟁하였는데, 찰스가 죽자 신왕 제임스 2세는 카톨릭주의와 절대주의 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휘그뿐만 아니라 토리와도 적대하였다.


두 파는 협정하여 1688년 제임스의 딸 메리와 그 남편 윌리엄을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여 여왕과 왕으로 만들었다(메리 여왕과 윌리엄 3세).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이에 이른바 의회 내 국왕을 원칙으로 하는 명예혁명이 성립하였다. 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 법의 정지 또는 면제, 금전의 징수, 상비군의 유지 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장전(權利章典)이 이듬해 1689년(조선시대 숙종)에 의회를 통과하였으며, 그때부터 이는 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과 함께 영국헌법의 근간을 이루었다.

영국의 정치혁명의 시대는 끝나고, 윌리엄 3세는 제임스가 프랑스의 지원으로 복위(復位)를 꾀하자 1690년 네덜란드·독일·에스파냐와 협력하여 1697년의 강화 때까지 프랑스와 싸웠다. 전비조달 방법으로 1692년에는 국채제도가 시작되었으며, 1694년에는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었다. 또 전비재원·화폐개주(貨幣改鑄)·무역차액·법정이자율 등의 문제를 두고 중상주의 논객들 사이에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윌리엄 치세의 말기인 1702년부터 의매(義妹) 앤의 치세인 1714년까지의 에스파냐 계승전쟁의 결과 영국은 에스파냐와 프랑스로부터 뉴펀들랜드·노바스코샤·허드슨만(灣) 지방·지브롤터·미노르카 등을 획득하였으며, 절대왕정 이래의 식민지체제를 확대하여 국내 상공업자의 이익을 증진하였다.
1714년 Ann 여왕의 죽음으로 Stuart 왕조는 끝나고 하노버 왕조로 바뀌었다
또 그 동안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와 합동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1) James 1세(1603 ~1625)
Mary Stuart의 아들로 스코틀랜드왕 James 6세가 되었으나, 1603년 Elizabeth 여왕이 죽자 영국 왕위를 겸하며, Stuart가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전제정치를 행하였고, 왕권은 신이 준 것이라 하여 번번히 의회의 결정을 어겼다.
제임스 1세는 덴마크 공주 앤과 결혼하여 찰스 1세를 낳았다.
그는 복잡한 종교를 해결하고 영국의 국익을 위하여 성공회를 영국국교로 하였다. 자신의 어머니가 카톨릭이고 영국 평민들 사이에도 많은 신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의 메리’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신앙의 자유는 허락하였으며, 교황 대신에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명령하였다.
청교도는 국회를 장악하고 있었고 또한 자신이 지배하는 스코틀랜드가 신교임을 감안하여 신앙의 자유를 주는 대신 예배는 국교인 성공회식을 다를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것이 오히려 청교도와 카톨릭을 반발하게 한다. 결국 청교도는 성공회 예배방식을 거절하여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또 카톨릭은 그를 암살하려다 적발되어 심한 탄압을 받게 된다.
왕권신수설을 강조하고 절대왕정을 강화하려 하여 1622년 의회와 대립한 그는 처음부터 위대한 여왕의 뒤를 이었다는 부담감과 이를 현명하게 극복하지 못한 채 자기 멋대로의 정책을 꾀하다 생을 마치게 된다.

2) Charles 1세(1625 ~ 1649)
아버지의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여, 하원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청교도들을 탄압하여 국민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의회는 탄압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하여 법적으로 ‘국왕을 상대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라는 권리청원을 하여 1628년 왕을 굴복시키고 승인을 받아냈다.
그러나 1629년에 권리청원을 폐지하였고 이는 청교도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찰스 1세는 프랑스의 루이 13세의 누이 앙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하였다. 카톨릭 신자인 왕비가 의회에서 탄핵될 것을 두려워한 그는 먼저 의회 의원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회 의원의 체포는 실패로 돌아갔고 청교도 전쟁이 시작되었다.
청교도 전쟁은 의회파와 왕당파로 나뉘어 싸웠으며, 초반에는 왕당파가 승리하였으나 나중에는 크롬웰의 새로운 군대에 의해 패배한다. 이것을 청교도 혁명(1642 -51)이라고 한다. 
크롬웰에 의해 포로가 된 찰스 1세는 결국 영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법정에서 왕은 신에게만 심판받을 의무가 있고, 인간에 의하여 심판받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으나 살인, 반역, 폭정, 사회에 해를 끼친 죄로 1649년 사형 당하였다.

3) Cromwell의 공화정 시대
그는 탁월한 재능과 강인한 성품, 그리고 경건한 칼뱅주의 신앙으로 사치를 금하였고 엄격한 정치를 펼쳤다.그러나 이는 국민의 불만을 가져오게 된다.
그는 Elizabeth 1세가 죽은 후에 쇠퇴의 길을 가던 영국을 잘 훈련된 군대와 엄격한 청교도식의 독재 정치로 부흥시켰으며 영국과 북아메리카 등에 청교도적 사고방식을 확대하여 유지하는데 기여하였다. 그의 청교도적 사고방식은 최근까지도 정치사회생활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는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려고 항해조례를 만들었다.
또 1653년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다스리는 호국경에 취임하였으나 1658년에 죽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1661년 Charles 2세가 송장을 복고하면서 아버지의 복수로 그의 시신을 꺼내어 죄수들의 처형장소 타이변에 내걸었다가 교수대 밑에 매장하였고, 해골은 웨스트민스터 사원 꼭대기에 그의 집권 말기까지 걸어두었다고 한다. 

4) Charles 2세(1660~1685)
찰스 1세의 장남으로 아버지를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으나 1649년에 아버지가 처형되자 저항하는 스코틀랜드인들에 의하여 찰스 2세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프랑스로의 망명생활이 시작되었다.
크롬웰의 엄격한 청교도식 정치에 지쳐있던 민심은 다시 왕정복고를 부르게 되어 찰스 2세는 영국으로 돌아와 왕정을 복구하였다.
훤칠한 키에 재치가 있어 모든 것을 즐겼는데, 그 중에 왕을 위하여 의사 콘돔 대령이 콘돔을 만들었다고 한다.
왕은 침착하지 못하고 의회를 무시하였고 청교도들을 억압하였다.
이때 의회는 1673년 ‘심사율’이란 법을 통과시켰다.
또 1679년에는 ‘인신보호율’이란 것을 만들어 왕은 이유없이 국민을 체포하는 것을 제한하여 국민들의 자유를 지켰다.
이때 왕위 계승자인 제임스가 카톨릭신자이며 독재 스타일이라 의회에서는 법을 고쳐서 왕위 계승을 막아야 한다는 쪽과 전통과 법은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쪽이 맞서게 되어 정당이라는 것이 생기는 원인이 되었다.
제임스 편을 드는 왕당파(귀족, 목사, 지주)를 자유파들이 아일랜드의 해적같은 무리라는 뜻으로 토리즈(Tories)라고 불러 ‘토리당’이 되었으나 후에 보수당으로 바꾸었다.
제임스를 반대한 자유파(부호 상인, 청교도)를 왕당파들이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무리라는 뜻으로 휘거모어즈(Whigamores)라고 불러 이것을 줄여 ‘휘그당’이 되었으나 후에 자유당으로 바꾸었다. 자유당은 1차 대전 후에는 인기를 잃어 없어지고 노동당이 대체하여 2대 정당이 되었다.
그가 영국 정부에 물려준 값진 유산 중 하나는 행정 통제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James 2세(1685 ~1688)
1664년 그가 보낸 함대가 미국의 ‘뉴 암스테르담’을 점령하여 그의 이름을 따라 암스테르담을 빼고 ‘뉴(New) 요크(York)'라고 바꾸었다.
그는 1673년 이른바 심사율에 의하여 위반하는 카톨릭 서약을 거부하며 모든 직책을 사임하여 자신의 입장을 공공연하게 밝혔다.
카톨릭신자인 그는 1660년 백작의 딸 앤과 결혼하였다.
국민과 지배자의 종교가 다른 모순은 항상 영국의 문제가 되었다.
그는 1688년에 신앙자유령을 재공포하였다.
이에 성공회의 켄터베리 대주교와 주교 6명이 신앙자유형의 철회에 대한 탄원서를 보내고 공개하였으나 왕은 이들을 선동죄로 고발하여 구속하였다.풀려난 7명은 왕위 계승권을 가진 메리의 남편 빌헴 공에게 군대를 이끌고 오라고 서한을 보냈다.
당시 네덜란드의 빌헴 공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견제세력으로 있을 만큼 강하였다.
1688년 그의 군대가 영국에 상륙하였고, 영국의 개신교 장교들과 딸 메리도 빌헴의 편이 되었다.
제임스는 전쟁을 할 의욕을 잃었고 이듬해에 아일랜드로 가서 항거하였으나, 1690년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연합군이 패하여 복위의 꿈은 사라졌다.
1689년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의 빌헴 공은 영국국왕(월리엄 3세)이 되었다.
그는 의회가 제출한 권리장전에 승인하였고 이에 의회는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과 같은 영국 의회를 만들었으며 명예혁명으로 의회와 국왕의 마찰은 끝났다.

6) Mary 2세(1689-94)와 William 3세(1689-1702)
제임스 2세의 딸 메리는 아버지와 종교에서, 종교 쪽을 택하여 남편이 영국을 침공하는 것을 허락하여 아버지를 쫓아냈다.
왕위에 오를 때에 혼자 오르기를 거절하여 남편과 함께 오르게 되어 영국 최초로 두 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영국 내에서 결정은 메리가 하였고 조언은 남편 네덜란드의 빌헴 공이 하였다.
임신이 불가능한 그녀는 남편의 외도에도 사이좋은 부부였다. 아버지 문제로 고민하였으며, 국민에게는 인기있는 여왕으로 32세에 천연두로 죽었다.

7) Ann 여왕(1705 ~1714)
언니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가 후계자가 없어 앤이 스튜어트 왕조 마지막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는 큰아버지의 권유로 프로테스탄트 교육을 받았다.
앤은 덴마크의 게오르공과 결혼하여 18번의 임신에도 5명만 태어났고 모두 어려서 죽어 후계자가 없었다.그녀는 온건주의자 플벗에게 후계자를 위임하고 죽었다.
플벗의 권장 하에 하노버 가문의 게오르크 루드비히(조지 1세)가 평화롭게 즉위하게 된다.
재위 동안 에스파냐 계승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1707년에는 스코틀랜드를 병합하여 대 브리튼 왕국을 성립하였다.그러나 전통과 역사가 완전히 합쳐지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자기의 조국을 분리하여 말하기도 한다.
지금의 국기인 Union Jack은 잉글랜드의 국기인 직사각형 안에 바른 십자가(+)와 스코틀랜드 국기인 직사각형 안에 성 안드레 십자가(X)가 합쳐진 것이다.
그 처세는 영국 사상 빛나는 시대였으며 여왕은 평화주의자, 공공복지의 증진자로서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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