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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林炳瓚), 국권반환요구서, 순창전투, 독립의군부

Jobs9 2021. 5. 9.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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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등을 역임한 의병.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 전라북도 옥구 출신. 아버지는 임용래(林榕來)이다.

 

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11월에 1,000냥을 내어 구휼하고, 이어 3,000냥과 조(租) 70석을 내어 백성을 진휼하였으며, 다음 해 징세(徵稅)할 때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하였다.

그 결과 1899년 호남의 선비들이 임병찬의 공을 추천하여, 2월에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樂安郡守兼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1894년 12월 1일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김개남(金開男)을 고발함으로써 12월 4일 김개남이 처형되었다.

1906년 2월 최익현(崔益鉉)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초모(招募)·군량·연병(鍊兵)의 책임을 맡아 홍주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연락하면서 태인·정읍·순창·곡성 등을 쳐서 관곡을 군량으로 충당하고, 진용을 정비하였다.

같은 해 6월 순창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최익현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2년 선고를 받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1월 귀국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은거하면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의 밀조(密詔)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에 임명되었다.

이에 각지에 격문을 보내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조직을 확대하여 12월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李明翔)·이인순(李寅淳)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총사령 자격으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 이하 대소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냈다. 여기에서 합방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한국통치의 곤란함을 주지시키며, 외국에 대해서는 일제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한편, 일제를 일시에 구축하려는 의병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일본경찰에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잡힌 뒤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계획이 탄로나면서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나, 1916년 5월 이곳에서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돈헌문집(遯軒文集)』이 있으며, 그중에 수록된 「돈헌문답기(遯軒問答記)」는 태인의거 후 잡혀 취조당할 때의 기록과 1908년 5월 천안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일본헌병대장과 문답한 기록으로, 의병운동사 및 사상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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