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지 정책
< 1910년대 >
● 정치 : 헌병경찰제도
일본 헌병사령관이 중앙의 경무총감이 되고, 각 도의 헌병대장이 해당 도의 경무부장이 되었다.
헌병경찰은 한국인의 모든 행위에 대해 재판없이 구류, 벌금, 태형 등을 가할 수 있는 <즉결처분권>을 가지고 있었다.
헌병경찰은 민간인이 아닌 군인신분이고, 관리에서 교원까지 모두 제복에다 칼까지 차고 다녔다.
* 민족탄압책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국민의 기본권 박탈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 탄압
● 경제 : 토지조사사업
토지조사령(1912)을 발표하고 토지조사사업(1912~1918) 실시
기한부 신고제, ‘과세’대상, 까다로운 규정․절차, 민족감정 ⇨ 신고기피
전 국토의 약 40% 조선총독부 소유 ⇨ 동척, 불이흥업, 일본 이주민에게 헐값으로 불하
10만건의 토지소유권분쟁 ⇨ <고등토지조사위원회> --- 총독부 탄압으로 묵살
결과
농민 : 기한부 계약제 소작농으로 전락, 자작겸 소작농과 소작농의 증가
지주 : 친일 지주화, 지주권의 강화
회사령
회사의 허가제(1910) ⇨ 자유로운 회사설립의 어려움
목적 : 민족기업의 성장 억제, 일제의 상품시장화
결과 : 1919년 기준 전체 공장의 자본금에서 일본이 91%, 한국은 6% 정도 차지함
삼림령(1911) : 전 삼림의 50% 이상 점탈, 압록강․두만강 유역 목재 대량 벌목
어업령(1911) : 한국인 어업권 부인 ⇨ 어장을 일본인 중심으로 재편성
광업령(1915) : 일본 광업자본이 침투하여 1920년 일본인 소유 광산은 전체 광산의 80%
임야조사령(1918)
< 1920년대 >
● 정치 : 문화통치
배경 : 3․1운동이 계기
내용
1) 문관출신도 조선총독에 임명이 가능하도록 규정을 바꿈(총독 임명제한 철폐)
2)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전환
3) 민족교육기회 확대(제2차 조선교육령-1922- ⇨ 민립대학 설립운동), 국민의 기본권 제한적 허용
4) 조선일보, 동아일보 발행 허가
5) 자문기관인 도평의회, 면협의회, 부협의회, 학교평의회를 설치하여 선거에 의해 회원을 선출하였으나 친일파 양성의 허구적 정치참여이자 지방자치
* 문화통치의 기만성
6) 실제로 해방될 때까지 문관출신의 총독은 한 명도 임명되지 않음
7) 오히려 경찰관서 및 경찰의 수와 유지비율을 3배로 증가시킴
8) 고등교육기관은 억제하고 보통교육, 기술교육만 허용 ⇨ 경성제국대학 설립(1924), 극소수 한국인 입학
9) 언론에 대한 검열, 정간․폐간
10) ‘자치론’ 유포 ⇨ 독립운동 분열(민족주의의 좌파 vs 우파)
11)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1923) 한국인을 8천명 살해
12) 치안유지법(1925) :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한다고 공포하였으나 실제로는 민족운동, 독립운동을 억압하기 위함이다.
● 경제 : 산미증식계획(1920-1934)
* 배경 : 일본의 공업화정책에 따른 일본내 식량부족과 미가폭등을 조선에서의 식량수탈로 해결키 위함
* 과정
수리조합(관계시설) 설치, 토지개량사업, 품종개량, 비료증산․개선 등으로 영농법을 개선하여 증산량 증가
⇨ 이는 우리농민에게 도움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농업을 단작형 쌀농사 형태의 기형적 농업구조로 규정
⇨ 증산량보다 수탈량이 크게 초과
1920년부터 30년간 실시하기로 계획했으나 1926년 1차로 실패
⇨ 조선농회령(1926) 제정으로 지주중심의 착취 극대화를 위한 <조선농회> 조직
1926년 증산계획을 축소하여 조정했으나 1930년대 초 세계경제공황과 일본내 농민보호를 위해 1934년 계획을 중단
* 결과
증산여부에 관계없이 미곡수탈은 목표대로 진행
한국내 쌀부족(일본인보다 쌀소비량 1/2)으로 만주에서 작곡 수입
증산에 필요한 수리조합비, 비료대금, 곡물운반비 등 경비를 우리 농민에게 모두 부담시킴 ⇨ 농민 몰락(유랑민, 화전민, 소작농 증가, 이농)
1920년대 소작쟁의 발생의 원인 제공(소작권 이동 반대 > 소작료 인하)
* 회사령(1920) 철폐
1910년의 회사령상 회사설립의 허가제를 신고제(계출제)로 고침으로써 조선내 기업설립의 용이를 의미. 이는 일본 독점자본의 국내진출을 쉽게 하기 위한 조치임.
< 1930년대 >
● 정치 : 민족말살정치
● 경찰력, 군사력의 대폭 증가
기만적 문화통치에서 탈피하여 노골적 국가주의(파시즘) 체제로 전환했다. 이는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 등 잇따른 대륙침략 야욕을 드러낸 일본제국주의의 본질인 것이다.
● 국가 총동원체제로 전환
육군특별지원병령 | 1938.2 | 중일전쟁 직후의 조선청년 동원 |
국가총동원법 | 1938.2 | 일본 <국가총동원법>의 조선내 적용 시작 |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
1938.7 | 인적․물적 자원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지방연맹> <직장연맹> 조직 |
국민징용령 | 1939 | 1939년부터 <모집>형식으로 1940년부터 <알선>형식으로 1백만 이상을 끌고감 |
학도지원병제 | 1943 | 조선인 전문학교․대학교 학생을 전쟁터로 내몸 |
징병제 | 1944 | 종전까지 약 20여만명 징병 |
여자 정신대근무령 | 1944.8 | 12~40세 여자 수십만을 강제 동원. 이중 5~7만명이 위안부로 성적 노리개 역할 |
● 민족문화 말살
신사참배 강요 | 1936.8 | 1면(面) 1신사(神社) 원칙하에 궁성요배 강요 |
황국신민화정책 | 1938 | 내선일체 구호아래 황국신민의 서사를 암기시킴 |
한국어 사용금지 | 1938 | 일본어 사용 강요 |
한국사 교육금지 | 1938 | 일본역사에 편입시킴 |
창씨개명 | 1939.11 | ‘조선민사령’ 제정, 전국민 4/5 개명 |
동아일보, 조선일보 폐간 | 1940.8 | 이외에 「문장」, 「인문평론」 등 한글잡지 폐간 |
조선어학회사건 | 1942 | 조선어학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관계자를 투옥, 학살 |
사상범 통제 |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1936), 조선 정보위원회(1937), 사상보국연맹(1938), 조선사상범 예비구금령(1941) |
● 경제 : 병참기지화 정책
경제공황 극복을 위한 침략전쟁을 뒷받침하고 일본 본토와 식민지를 묶어 경제블럭을 형성하기 위함
* 중화학공업 육성
① 군수물자의 생산
② 광산개발 : 금광(1930), 중석(1940)
③ 조선 질소비료 공장 설립. 조선 전기사업 법규 위원회 조직
④ 일본 재벌 진출 : 미츠이, 미츠비시, 노구치
⇨ 일본의 공장법이 국내에 부적용되어 풍부한 노동력 수탈
⑤ 남면북양정책 : 산미증식계획의 실패 이후 공업원료 증산정책으로 전환
* 농촌진흥운동(1932 ~ 1940)
① 농민의 부채정리, 식량자급과 경제적 향상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추진
② 일제수탈로 궁핍해진 농민들의 소작쟁의 등 형태로 저항하는 상황에서 마련됨
③ 농촌피폐의 원인이 농민의 게으름, 낭비, 무식에 있는 것처럼 돌림
④ 결국 허구적 관제운동, 항일운동의 무력화, 조선농민 회유, 개량적 토지정책 추진
⑤ 반공주의적 농업정책 : 춘궁퇴지, 借金퇴치, 차금예방
* 농산물 수탈과 통제
① 공출과 배급제 실시(1939)
② 신 조선미곡증산계획(1940)
③ 조선식량관리령(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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