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한글 신문의 발행이 허용되었다. 이에 따라 (가) 이/가 창간되었다. (가) 은/는 자치운동을 모색하던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을 실어 비판받기도 하였으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일제로부터 정간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
① 한글 보급 운동에 앞장서 '한글원본'을 만들었다.
② 브나로드 운동이라는 농촌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③ '개벽', '신여성', '어린이' 등의 잡지를 발행하였다.
④ 신간회가 결성되자 신간회 본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해설】 정답 ②
(가)는 동아일보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
① 문자보급운동(1929~1934)은 조선일보
③ 천도교
일제 강점기의 언론과 광고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총독부 기관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조선어 일간 신문을 모두 폐간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국문지 『매일신보(每日申報)』, 일문지 『경성일보(京城日報)』, 영문지 『서울 프레스(The Seoul Press)』 등만 남겨 두고 조선인이 발행하는 모든 조선어 신문을 폐간한 것이다.
잡지도 종교나 문예지가 주류를 이루었고 정치 시사적 내용을 다루는 잡지는 존재할 수 없었다.
<경성일보사>
한말부터 일제 강점기에 걸쳐 조선 총독부 기관지인 일문지 『경성일보』를 발행한 경성일보사를 1940년대에 촬영한 사진이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총독부 기관지를 제외한 나머지 조선어 신문을 모두 폐간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서 발현된 우리 민족의 강렬한 독립 의지에 놀란 일제는 무단 통치적 식민지 정책을 수정하였다. 하여 무조건 저항 의지를 억압하기보다 유화 정책으로 조선인을 통제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전술적 판단에 따라 이른바 ‘문화 정치’를 지배 정책으로 시행하였다. 그 결과 허용하지 않았던 조선인의 한글 신문 발행을 ‘신문지법’에 의해 허가하였다.24) 이에 따라 총독부는 1920년에 『조선일보(朝鮮日報)』, 『동아일보(東亞日報)』, 『시사신문(時事新聞)』 등 세 개 일간지의 창간을 허용하였다.
일제는 조선인의 민간 신문 창간을 허용하여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고 조선 지식인의 동태를 살피는 동시에, 민족적 저항 의지를 희석시키려 하였다.25) 『조선일보』는 조일 동화 주의(朝日同化主義)를 표방하는 대정 실업 친목회(大正實業親睦會)가, 『시사신문』은 친일파 민원식(閔元植)의 국민 협회가 창간하였다. 『동아일보』는 외견상 민족진영을 대 표하는 신문이지만 일본 귀족이었던 박영효를 사장으로 내세웠고 『매일신보』 사회부장 출신인 이상협(李相協)이 제작 실무를 담당하였다. 『동아일보』의 재정을 지원한 김성수(金性洙)는 식민지 토착 자본가로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신문은 제대로 수익 구조를 갖추기 어려웠다. 당시 독자 시장은 문맹과 빈곤으로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1930년에 문맹률은 77% 정도였고 실업률도 73%나 되었으므로 당시 일반인의 낮은 임금 수준으로는 신문을 구입하기 어려웠다.26) 이러한 상황에서 부수의 확장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기란 불가능하였다. 당시 신문 독자층은 지적·경제적 능력을 갖춘 지식인으로 제한되어 있어 신문 부수를 확장하려면 그들의 정치적·사상적 요구에 부응하여야 했기 때문에 민간 신문들이 민족주의적 반일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일제에 비판적 논조를 견지하면 신문 판매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에 의해 무기 정간 등의 강력한 규제를 받으면 신문 경영은 구독료 수입과 광고 수입을 얻지 못하므로 치명타를 입었다. 일제의 강력한 내용 규제는 이미 상업주의 논리가 스며들고 있던 민간 신문에게 커다란 위협이어서 이를 피하기 위한 자기 검열이 시작되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주요한(朱耀翰)은 1929년경에 되도록이면 압수당하지 아니할 정도로 논설이나 기사를 쓰라고 회사 방침이 바뀌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28)
『동아일보』에는 1924년부터 이광수(李光洙) 등 자치론(自治論, 민족 개량 주의) 진영 지식인의 논설이 게재되기 시작하였는데, 일제의 식민지 지배 를 인정하고 합법적 범위 내에서 자치 운동이나 사회 운동을 해야 한다는 논지였다. 이를 계기로 『동아일보』는 반일적 저항적 흐름과는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조선일보』는 친일 단체가 운영하였고 자본력이 취약하여 독자의 호응이 적었다. 따라서 『조선일보』는 독자 확보를 위해 『동아일보』보다 더 강력한 항일적인 논조를 내세워서 총독부로부터 많은 규제를 받았고 실제로 기자 집단은 일제에 비타협적이었다.29) 1924년에 신석우(申錫雨) 등 민족진영이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운영하게 되자 논조는 더욱 선명해졌다. 그러나 재정적 압박과 사회주의자 기자들에 대한 일제의 압력이 가중되면서 『조선일보』는 위기로 치닫게 되었다.
1926년 11월 일본 방송 협회 산하에 경성 방송국이 설립되면서 시작된 라디오 방송은 새로운 매스 미디어를 등장시켰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방송은 일본의 경제 뉴스 등을 전달하고 오락을 제공하는 기능을 주로 하다가 차츰 중소(中蘇)에 대한 사상전(思想戰)을 수행하고 조선인을 황민화(皇民化)하는 선전 기관으로 바뀌었다. 1937년에 라디오 수신기 보급 대수가 14만 대를 넘어설 정도로 방송 수용자가 확대되지만 방송은 기본적으로 청취료에 의존하였고 광고는 하지 않았다.
<경성 방송국>
1926년 11월에 조선 총독부가 서울 중구 정동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 방송국의 모습이다. 경성 방송국은 우리말 방송과 일본말 방송을 섞어 내보냈고, 광고는 하지 않았다.
일제는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을 계기로 고양된 민족 운동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였다. 일제는 조선을 황국신민화시키는 동시에 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 기지로 만들면서 전시 체제로 몰아갔다. 다른 사회 부문과 마찬가지로 언론 탄압도 강화되었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은 일제의 정간이나 폐간이 두려워 일제 에 대한 비판적 논조를 피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상황을 수세적으로만 대응한 것은 아니었다. 역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이때부터 상업주의 행보를 시작하였다. 이제 신문 기업들은 민족적 과제의 해결에 매달리기보다 이윤 추구에 몰두하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제한된 신문 시장과 광고 시장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증면 경쟁, 사옥 증축 경쟁, 문화 사업 경쟁 등에도 무리하게 매달렸다.30) 상업신문을 방불케 하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이러한 경쟁은 적어도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신문들이 본격적인 자본주의 기업화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하였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일본 상품 광고를 유치하려는 경쟁을 벌이고 선정적인 보도와 흥미 위주의 문예물로 지면을 채우는 대중 신문과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의 모습도 보이게 된다. 열악한 조선의 경제적 현실은 신문 기업이 일본 상품 광고를 유치하도록 하였고, 일본 기업도 조선 시장 진출을 위해 신문 광고가 필요하였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는 1920년대 초 이상엽 편집국장이 일본에 가서 광고를 적극적으로 유치한 바 있었다. 1933년 이후에는 일본 상품 광고 유치 경쟁이 더욱 치열해져 세 개 신문이 일본에 지국을 설치하여 광고 업무를 진행하고, 심지어 일본 광고주를 초청하여 접대와 관광을 주선하였다고 한다.32) 『동아일보』는 1940년에 이미 광고 수입의 점유율이 45%에 이르러 수입 구조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일본 상품 광고가 60%를 넘었다.33)
이때 『동아일보』 등은 광고 판매 경쟁과 함께 발행 부수 확장에 전념하였다. 『동아일보』 등이 지원하였던 농촌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Vnarod運動)도 문맹 해소에 초점을 맞추면서 일제와 마찰을 피하려 했는데, 이를 잠재적 신문 독자 확보라는 상업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1920년대부터 활발해진 잡지에 의한 언론 비평을 살펴보면, 신문의 기업화와 상품은 영리 추구에 집착하게 할 것이므로 우려된다는 지적이 있었 다. 민간 신문들이 광고 유치를 위해 광고주에게 불리한 기사는 보도하지 않고 위협 기사를 통해 광고 수입을 올린다는 지적도 있었다. 동시에 신문은 산업이며 기업으로, 운영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광고 수입이 8할을 넘어서야 한다는 현실론도 개진되었다.
<브나로드 운동>
19세기 후반 러시아 젊은 지식인층이 전개한 농촌 운동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서 1930년대에 전개된 농촌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 포스터이다. 『동아일보』 등이 지원한 이 운동에는 대중 계몽을 통하여 잠재적 신문 독자를 확보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1936년에 발생한 일장기 말소 사건은 민간 신문이 일제에 저항한 최후의 사건으로 여운형(呂運亨)의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는 폐간되었고, 『동아일보』는 거의 일 년 동안 무기 정간을 당하였다. 1930년대 말에 이르러 민간 신문들은 일본 기업의 광고 유치에 주력하였지만 광고 수입의 증가는 한계에 부딪쳤다. 독자 확장도 『매일신보』의 약진으로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일제는 1938년 일본의 신문 통폐합을 추진하였고 조선에서도 신문 통폐합을 준비하였다. 당시 민간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논조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지만 잠재적으로 식민지 통치에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본 본토와 마찬가지로 신문 통폐합을 추진하였다. 194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총독부의 자진 폐간 권유를 받아들여 윤전기 매각 대금과 사원들의 퇴직금을 지급받으면서 국책에 순응한다는 명분으로 자진 폐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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