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4년(원종 15, 충렬왕 즉위)과 1281년(충렬왕 7)의 2차에 걸쳐 원(元)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려 했던 사건.
고려와의 전쟁이 끝나고 강화가 성립됨에 따라 원은 일본지배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당시 원(元)세조(世祖)는 일본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기 위해 모두 6차에 걸쳐 고려와 원의 사신을 일본에 파견했다. 당시 원이 일본초유의 의도에 대해서 남송(南宋) 정벌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원은 남송의 양양성(襄陽城) 공격(1268∼1273)을 전후하여 일본초유를 시도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해상으로 연결된 남송과 일본의 통교관계를 끊어 남송을 고립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원의 요구에 불응하자 원은 무력을 동원해 일본을 굴복시키기로 하고 대규모의 원정군을 파견했다.
1270년 11월 원의 세조는 일본 침략을 결정하고 고려에 둔전병(屯田兵)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마침 고려에서 일어난 삼별초(三別抄)의 난(亂)(1270∼1273)으로 인해 그 실행이 불가능했으며, 1273년 4월삼별초를 평정함으로써 저해요인이 사라지자 전열을 정비, 그 이듬해에 일본 침략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1274년 1차원정에서 원나라는 홀돈(忽敦)주 01)을 도원수(都元帥), 홍다구(洪茶丘)를 우부원수(右副元首), 유복형(劉復亨)을 좌부원수(左副元首)로 하고, 고려는 김방경(金方慶)을 도독사(都督使), 김신(金侁)을 좌군사(左軍使), 김문비(金文庇)를 우군사(右軍使)로 한 이른바 삼익군(三翼軍)으로 이를 돕게 하였다.
당시 합포(合浦)주 02)를 출발할 때의 군세는 몽한군(蒙漢軍) 25,000명, 고려군 8,000명, 초공(梢工)·인해(引海)·수수(水手) 6,700명, 전함(戰艦) 900여 척이었다.
연합군은 먼저 쓰시마(對馬島)를 정벌한 뒤 이키도(壹岐島)를 쳐서 그 성을 함락하였다. 다시 북큐슈(北九州)의 다자이부(太宰府)를 공략하기 위해 히젠(肥前)의 마쓰우라(松浦)를 짓밟고, 하카타만(博多灣)에 도착해 하카타·하코사키(箱崎)·이마쓰(今津) 등지에 상륙하였다.
일본군은 군세를 규합해 연합군에 대전했으나 공성(攻城)과 야전(野戰)에 능숙하고 화기를 사용하는 연합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과 마침 태풍이 불어 연합군은 많은 함선과 병사를 잃었으며, 좌군사 김신이 물에 빠져 죽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고 합포로 돌아왔다. 이때 돌아오지 못한 자가 1만 3500명이나 되었다. 당시 고려인인 홍다구와 의견 충돌이 잦았던 것으로 보아, 군사작전의 문제로 실패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원나라는 제1차 일본 정벌(日本征伐)에서 큰 손실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탐라(耽羅)주 03)에 목마장(牧馬場)을 두고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征收日本行中書省, 行東行省)이라는 관부(官府)를 고려에 설치하였다. 한편, 일본의 반응을 타진하기 위해 2회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국서(國書)를 전했으나 그 사신들이 모두 살해되었다.
이에 남송을 멸망시킨 원나라는 1281년(충렬왕 7) 제2차 일본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동안 일본 원정에 소극적이던 고려는 적극적으로 원정 계획에 참여했다. 특히 충렬왕은 일본원정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고려에 파견되어 있던 홍다구 등의 부원세력(附元勢力)을 축출하고 자신의 측근세력을 육성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또한 왜구의 근절을 기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때 군세는 동로군(東路軍)·강남군(江南軍)의 양군으로 편성되어 동로군은 합포에서 출발하고, 강남군은 중국의 명주(明州)·정해(定海) 등 강남에서 출발하였다. 동로군은 여·원 연합으로 편성되어 총병력 4만 명에 함선 9백 척이었다. 그 중 원나라가 3만 명, 고려가 1만 명이었으며 함선 900척은 역시 고려의 부담이었다. 그리고 중국 강남지역에서 차출된 강남군은 총병력 약 10만 명에 함선 약 3,500척이었다.
동로군은 제1차 때와 같이 김방경과 홀돈의 지휘하에 합포를 출발, 이키도를 비롯해 구주 연안의 모든 섬을 공략하고 하카타만을 향해 공격하였다. 강남군은 원장(元將) 범문호(范文虎)의 지휘하에 강남을 출발, 구주 연안의 오도(應島)에서 동로군과 합세하고, 다자이부를 향해 공격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저항이 예상외로 강했고 또 다시 태풍을 만나 인명·함선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제2차 정벌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차에 걸친 일본정벌의 실패는 태풍과 해전에 미숙함이 주요한 이유가 되었지만, 제일 큰 실패 원인은 군의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던 데 있었다. 또한 국내사정도 혼란하였을 뿐 아니라 남송의 유민들마저 일본정벌의 불리함을 알고 종군하기를 꺼려하여 결국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원사(元史)』「일본전(日本傳)」에는 10만 명 가운데 살아 돌아온 자가 3명뿐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충렬왕세가(忠烈王世家)」에는 관군(官軍)으로 돌아오지 못한 자가 무려 10만명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각각 막대한 인명의 손실을 입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원사』의 살아 돌아온 자가 3명뿐이라는 기록은 너무 지나친 표현이며, 그 당시 각 도 안찰사(按察使)의 보고에 동정군(東征軍) 9,960명, 초공(梢工)과 수부(水夫) 1만 7029명 가운데 살아 돌아온 자가 1만 9397명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숫자로 보인다. 이 보고 내용의 숫자는 고려만의 것으로, 원나라의 것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2차에 걸친 일본 정벌은 예상외로 강한 일본의 저항과 태풍의 피해로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원나라의 세조(世祖)는 끝내 일본 정벌의 꿈을 버리지 않고 금주(金州)주 05)에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설치하고, 고려에 함선·군량을 준비하게 하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동태를 살피는 등 제3차 정벌을 준비하였다.
그 뒤 원나라에서 내안(乃顔)의 반란이 일어났고, 고려에는 내안의 무리인 합단(哈丹)이 만주에서 동계(東界)로 침입해 철령(鐵嶺)을 넘어 양근(楊根)주 06)을 휩쓸고 충청도까지 남하하였다. 이에 충렬왕은 강화(江華)로 피난하는 한편, 원나라에 원병을 청해 여·원 연합군으로 연기(燕岐)에서 그들을 크게 무찔러 몰아냈다.
이렇게 원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고려에는 합단이 침입해 사태가 복잡해진데다가 세조가 죽음으로써 원나라는 일본 정벌을 포기하게 되었다.
일본 정벌의 의미가 원나라의 경우에는 세계제국건설의 일환으로 단순히 정벌에 실패한 것에 불과했지만, 고려는 원나라의 압력으로 참전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즉, 그 동안의 대몽항전(對蒙抗戰)으로 사회적으로 피폐가 극심한데다가 일본 정벌에 소요된 함선·군량을 모두 부담함으로써 경제적 피폐를 더하게 되었다. 또 많은 인원이 함선제조에 동원되고, 정벌군·소공·수부 등으로 징발됨으로써 사회적 피폐를 가중하게 하였다.
즉, 1283년(충렬왕 9)에 제3차 정벌을 준비함에 있어 제왕(諸王)·재추(宰樞)·승지(承旨)에게는 쌀 20석(石), 치사재추(致仕宰樞)·현관(顯官)주 07) 3품은 15석, 치사(致仕) 3품과 현관문무(顯官文武) 4·5품은 10석, 문무 6품과 시위호군(侍衛護軍)은 8석, 문무 7·8품과 참상해관(參上解官)은 6석, 동반(東班) 9품·참외부사교위(參外副使校尉)·남반(南班) 9품은 4석을 내게 하였다.
그리고 정잡권무대정(正雜權務隊正)은 3석, 동서산직(東西散職)·업중승(業中僧)은 1석, 백정(白丁)·초노(抄奴)·소유(所由)·정리(丁吏)·제사하전(諸司下典)·독녀(獨女)·관사노비(官寺奴婢)는 10두(斗), 상인(商人)으로 대호(大戶)는 7석, 중호(中戶)는 5석, 소호(小戶)는 3석을 내게 하여 군량에 충당하게 하였다.
이것을 보면 문무양반은 물론 노비·독신녀에게까지 쌀 10두라는 과중한 부담을 주었으니 그 당시의 경제적 고통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한 부담은 비단 1283년뿐만 아니라 제1·2차 일본 정벌 때에도 부담했을 것이다.
그에 따라 고려는 지금까지 몽고에 장기간 대항할 수 있었던 국력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고, 일본정벌을 위해 설치되었던 정동행성은 이후 원나라에서 고려의 정치에 간섭하는 기관으로 변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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