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클로저 운동
Enclosure
종획운동
목축업의 자본주의화를 위한 경작지 몰수
"양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인간을 잡아 먹는다."- 토머스 모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에 이제는 한 사람의 양치기와 그의 개가 있을 뿐이다." - 휴 라이머
Enclosure(종획운동)
13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소규모 토지를 대규모 농장에 합병하는 법률적 절차[를 의미한다. 이는 목축업의 자본주의화를 위한 경작지 몰수로 요약할 수 있다. 산업 혁명 당시 영국에서 판매용 곡물 혹은 양을 키우기 위해 농지에 울타리를 세우자 농사를 지었던 농민들은 도시의 공장으로 내몰리면서 종국에는 도시의 하층 노동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인클로저는 물가상승에 대한 지주의 대책으로서 , 보통 제1차와 제2차의 2회로 구분한다. 16세기부터 17세기 중반까지의 제1차는 '양치기'를 목적으로 하였고, 17세기 중반 이후, 특히 18세기 중반 이후의 제2차는 "양이 들어가지 못하게 둘러싸는" 농업의 집약화를 목적으로 하였다. 18세기 후반의 인클로저는 의회(議會)의 입법에 의해 다수의 등본보유농(騰本保有農) 및 영세 농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되었다. 공동권(共同權)을 증명하지 못하는 빈농들은 인클로저 후에 분할지를 못 받는다든지 부당한 할당를 받는 일이 많았다. 19세기 전반까지는 영국의 토지 대부분이 인클로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반적인 영어 표기는 enclosure이나, inclosure를 쓰기도 한다.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사회 변화 현상. 당시의 경향, 트렌드를 나타내는 용어다. 따라서 인클로저 '운동'보다는 인클로저 '신드롬'이나 인클로저 '현상' 정도로 번역하는 게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보다 잘 드러내는 번역일 것이다.
한국어로 풀어쓰면 울타리 치기 운동으로, 소유 개념이 모호한 공유지(共有地)나, 서로 간의 경계가 모호했던 사유지 간에 양이나 가축이 도망가지 못하게, 혹은 자신의 소유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울타리를 쳐서 자신의 영역을 확인하고 자산으로 만들었다.
기원을 찾자면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대개는 16~17세기 튜더 왕조 시대 인클로저를 1차, 의회에 의해 주도된 18~19세기 인클로저를 2차로 구분한다.
과정
장원이 성행하던 시대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던 숲이나 들 등의 임야 토지를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다. 이 공유지는 흉년기에 먹을 야생 식물을 채취하거나 가축의 방목이나 벌목 등을 목적으로 이용되어 왔으나, 13-15세기 사이 곡물시장의 성장과 토지거래의 증가로 장원이 해체되면서 이들 공유지도 어느덧 각각의 지주들에 의해 사유지가 되어 울타리가 쳐졌다.
이후에도 잉글랜드 사회는 계속 변화하였는데, 이를 설명하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중상주의의 대두로 해상무역과 시장을 통해 농산품을 팔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면직물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땅을 가진 지주와 부농들은 일손이 적게드는 양목축지를 더 선호하여 농경지를 목축지로 전환하면서 그 자리에 양을 키웠다.
이를 잘 활용한 농민들은 부농이 되었고, 반대로 활용하지 못한 농민들은 빈농이 되었는데, 시장경쟁에서 도태된 농민들은 자기땅을 팔고 도시로 유입되어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당시에 살았던 토마스 모어는 목축지 증가로 농경지가 줄어들어 일자리를 잃는 농촌노동자가 많아지자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목축지의 증가로 인한 농경지의 감소는 과장된 것으로 오히려 최근의 연구 성과에서는 1차 인클로저시기에 농지가 더욱 증가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정작 도시의 노동자는 외지인보다는 주로 도시 출신이거나 인접 지역 출신인 경우가 많았고, 농촌에서도 빈농들 대다수가 자기 땅을 팔고 임금노동자가 되었지만 자기 고향을 떠나는 일6은 매우 드물었다. 7 그러니까 3번째까지는 맞지만 그 이후 항목은 실상과 맞지 않는다.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가 보편화되고, 임금노동자가 된 농민들은 주로 부농에게 고용되거나, 아니면 농촌의 수공업이나 상업등에 종사하게 되면서 농촌에서의 직업분화를 촉진시켰다.
하지만 차지농과 지주를 중심으로 토지소유가 집중화, 대형화되는데에 반해 공유지들이 사라짐으로써, 영세농민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임금노동자라고 할지라도 그리 풍족한 삶을 살지는 못하였다. 종전에는 흉작으로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공유지에서 야생식물을 채취해서 먹고 살거나, 임목을 채취하여 연료나 자재 등을 공급받았지만, 인클로저가 진행되고 공유지가 사라지면서 그러한 것이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노동자들이 차지농에게 고용되더라도, 차지농들은 일손이 많이필요한 수확기 가을에 주로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다른계절에는 고용하지 않았으므로 항상 일자리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이에 농촌의 소득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갔다.
보통 인클로저의 시기를 1차와 2차로 구분할 때에, 1차는 양목축지를 대폭 늘린 것으로 보고, 2차는 농경지를 늘린 것으로 보는 것이 기존의 의견이었으나 앞서 설명했듯이 1차 때는 목축지보다 실제로는 농경지의 증가가 더두드러졌다. 굳이 구분하자면 1차의 경우 진행주체가 지주나 농민등 민간인 경우였고, 2차의 경우 집행주체가 지역민의 청원을 받은 의회라는 정도가 차이점이다. 전자는 주로 지주나 농민들의 단순한 합의에 의존하였으나, 후자는 의회를 통하여 법적인 절차로 소유권을 정하는 경우가 다소 많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지역민 합의로 진행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후자의 뚜렷한 의의는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관습뿐만이 아니라 법으로 확인되고 보장되었다는 데에 있다.
반발
원래 인클로저가 진행되기 전까지는 들이나 숲이 포함된 땅들은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공유지였고, 이 공유지에서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소나 돼지를 방목할 수 있었고, 난방에 쓸 땔감이나, 집을 만들 자재나 농기구나 도구로 쓸 목재를 채취할 수도 있었다. 또한 흉작시에는 도토리 등과 같은 야생식물을 채집하여 먹는 등 생계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관습적으로 공유지에는 일종의 공공소유권 같은 것이 존재하여서 특정인이 땅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농작에서 수입이 변변치 않거나,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이 공유지에 크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인클로저가 진행되면서 이 공유지와 공동권이 침해되고, 이 땅들이 사유지로 나뉘자 더이상 예전처럼 임목이나 야생색물을 채취하며 생계를 보조할 수 없었다. 이에 공유지에 의존하던 농민들은 대규모 반대운동을 펼치는데, 대표적으로 땅의 울타리등을 부수며 일어났던 1549년 케트의 난(Kett's Rebellion), 1607년 중북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 1607년 뉴턴의 난(Newton Rebellion)등이 있었다. 16~17세기 말고도, 19세기 의회 인클로저 당시에도 영세민이 많은 지역에서는 지역민들의 저항과 반발으로 인클로저가 늦게 실행되거나, 실행을 할때에도 애로사항이 많았다.
결과
토지소유권이 확보되자 농토의 수확량이 증가하였고, 증가한 수확량은 도시의 인구증가를 효과적으로 뒷받침 하였다. 또한 농민층이 분화하여 임금노동자가 생겨나자 농촌에서는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 외에도 고용주와 노동자라는 근대적인 근로계약이 자리잡게 되고 이들 농촌의 노동자들 중 일부는 농촌지역의 수공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농촌수공업과 상공업 발전에 영향력을 끼쳤다.
전반적으로 인클로저는 영국이 산업혁명을 수행하는데 필요했던 도시와 농촌의 노동력을 증가시키고, 제도적으로 사유재산권과 근로계약을 확립하는 등 전국적인 산업기반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직업분화와 함께 농민들의 소득격차도 벌어짐에 따라 빈부격차와 실업율, 빈민구제에 대한 각종 사회문제가 대두되었다.
인클로저 운동은 우리말로 종획운동이다. 운동이라고 해서 ‘혁명’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유행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울타리 치기’를 말한다. 이는 영국에서 그동안 소유 개념이 모호한 공유지나 서로 간의 경계가 모호했던 사유지 간에 소유권을 명확히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봉건주의 국가가 무너지고 산업화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지가 봉건주의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토지 소유 개념이 고착된 것을 말한다.
봉건시대 토지란 ‘토지’ 하나에 여러 소유권이 공존했다. 하나의 토지에 영주가 몇 명이 되는 경우가 있었고, 성직자도 포함되는 등 여러 소유권이 공존했다.
또한 영주는 자신의 영지에게만 소유권이 있었기 때문에 농노가 소유한 토지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농노는 영주의 소유 토지와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면서 자신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들이나 숲 등의 땅은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유지 개념이었다. 해당 공유지에는 소나 돼지를 방목할 수 있었고, 난방에 쓸 땔감이나, 집을 만들 자재나 농기구, 도구로 쓸 목재를 채취할 수 있었다.
공유지는 영주도 농노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공유지에 크게 의존을 했었다.
중상주의가 대두하면서 이런 영국이 대대적인 변화가 닥쳤다. 중상주의로 해상무역과 시장이 발달하면서 농산물을 팔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시장을 잘 활용한 농민들과 활용 못한 농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시가 점차 발달하면서 양고기의 수요도 늘어났다.
이런 이유로 부농은 양고기를 팔아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양목축지를 선호하게 되면서 공유지를 점차 침탈하기에 이르렀다.
양목축지도 늘어났지만 농지도 많이 늘어났다. 이는 그동안 사람의 일손이 닿지 않았던 땅을 경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농업이 점차 대형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농촌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공유지가 사라지면서 영세농민들은 더욱 농촌에서 살기 힘들어졌다. 과거에는 공유지에서 먹을 것을 구해서 먹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힘들게 됐다.
그러면서 농촌에서 일자리를 잃은 농민들은 자연스럽게 도시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도시들로는 ‘값싼’ 노동력이 점차 풍부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가들은 이들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게 됐다. 만약 인클로저 운동이 없었다면 자본가들은 값싼 노동력을 구할 수 없게 되면서 산업혁명이 이뤄지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여기에 ‘구빈법’까지 시행하면서 도시 빈민들은 구걸로도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서 결국 임금 노동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