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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편의 연극

Jobs9 2023. 4. 26.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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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제1권에서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쓴다. “프론토 덕분에 나는 악의와 변덕이 폭군의 특징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귀족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대체로 인정머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자들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기에 변덕을 부리는 폭군이 되기 쉽고, 귀족이라고 으스대는 특권층은 보통사람들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기에 인정머리 없는 자가 되기 쉽다. 

마녀들에게서 장차 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듣는 맥베스. 맥베스는 마지막에 탄식한다.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촛불아. 인생은 그저 걸어다니는 그림자.” 

게오르크 헤겔은 <정신현상학>(1807)을 마감시한에 쫓겨 가며 썼다. 글을 써갈수록 원고가 걷잡을 수 없이 늘었다. 긴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을 무렵 나폴레옹 군대가 예나 시내에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헤겔은 백마를 탄 나폴레옹을 보고 ‘세계 영혼’이라고 찬탄했지만, 그 나폴레옹 군대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예나대학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예나를 휩쓸고 간 뒤 <정신현상학>이 세상에 나왔다. 무명의 젊은 철학자가 두려운 마음으로 내놓은 그 책은 머잖아 나폴레옹 군대처럼 독일의 정신세계를 휩쓸었다.

그 장대한 철학적 오디세이아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논의된 대목은 ‘자기의식’을 서술한 장이다. 여기서 헤겔은 인간 의식을 ‘불행한 의식’이라고 규정했다. 불행한 의식이란 자기 내부에서 찢기고 갈라져 끝없이 자기와 다투는 의식이다. 완전한 자유를 원하지만 자기 안의 창살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불행한 의식이다. 헤겔은 자기와 화해하지 못한 불행한 의식의 기원을 찾아 고대 그리스-로마의 스토아철학에 이른다. 스토아철학은 세상의 환락과 영화를 멀찍이 두고 내면 세계로 들어가 평화를 찾은 철학이다. 그렇게 찾은 마음의 평화를 스토아철학자들은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불렀다. 외부의 힘에 휘둘리지 않아 마음에 괴로움이 없는 상태다.


헤겔이 스토아철학을 서술할 때 심중에 품고 있던 사람이 로마제국 철학자 에픽테토스였다.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했던 에픽테토스야말로 스토아철학 정신의 산 표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다. 후대의 문헌은 에픽테토스가 주인에게 뼈가 부러질 정도로 맞아 불구가 됐으나 의연하고도 침착하게 견뎠다고 전하는데, 불행의 폭풍우 속에서도 내면의 고요를 유지하는 스토아철학 정신을 극적으로 보여주려고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실제의 에픽테토스는 좋은 주인을 만나 철학을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노예 신분에서도 해방됐다. 나중에는 철학학교를 세워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존경받기도 했다. 그러나 노예 출신의 습속은 깊게 남아 있어서 삶의 영광과 기쁨 속에 잠행하는 슬픔과 괴로움을 예민하게 느꼈다. 아무리 잘난 인생도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에픽테토스는 절감했다. 인생은 영화롭든 비참하든 제 뜻과는 상관없이 흘러가다 언젠가는 끝나고 마는 한편의 연극이다. 이런 생각이 집약된 글이 에픽테토스 강의를 요약한 책 <엥케이리디온> 17장에 나온다.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너는 극작가의 뜻에 따라 결정된 연극 속의 배우라는 것을 기억하라. 작가가 연극이 짧기를 바란다면 그 연극은 짧을 것이고, 길기를 바란다면 그 연극은 길 것이다. 작가가 너에게 거지 역할을 맡긴다면, 이 역할조차 또한 능숙하게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작가가 너에게서 절름발이, 공직자, 평범한 사람의 역할을 원한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너는 그 역할을 해야만 하고, 너에게 주어진 그 역할을 잘 하는 것이 너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할당받은 배역은 극작가 곧 신이 준 것이다. 그러니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으려거든 그 역할을 불평 없이 맡아 수행해야 한다. 에픽테토스는 세상의 모든 일을 제우스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에픽테토스의 경건주의는 후대 기독교인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줬다. 그 영향은 1500년도 더 지나 중국과 조선에까지 닿았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엥케이리디온>을 한문으로 옮겨 <이십오언>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을 조선의 초기 천주교인들이 구해 읽었다. 마테오 리치는 에픽테토스의 구절을 동아시아 사정에 맞게 번안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마치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속의 일은 잡다한 연극을 공연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 제왕, 공경대부, 지식인, 서민, 노예, 왕후, 아낙네, 노비 등등은 모두 잠시 동안 분장한 것일 뿐입니다.”

에픽테토스의 진정한 후예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스토아학파 철학자였던 그는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통해 로마 역사에서 성숙한 개인이자 훌륭한 지도자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에픽테토스의 진정한 후예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스토아학파 철학자였던 그는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통해 로마 역사에서 성숙한 개인이자 훌륭한 지도자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에픽테토스의 후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젊은 아우렐리우스는 스승에게서 빌린 에픽테토스의 책을 통째로 베껴 닳도록 읽었다. 노예 철학자의 생각은 수로의 물처럼 흘러 장차 제국을 이끌 젊은이의 가슴을 적셨다. 황제의 삶은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아우렐리우스가 통치하던 시절 변방에서는 반란이 속출하고 외침이 끊이지 않았다. 황제는 긴 시간을 전장에서 보냈다. 병에 걸려 죽은 곳도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게르만족 접경 지역이었다. 이 변방에서 격무를 감당하며 쓴 책이 <명상록>이다. 

<명상록> 제1권에서 아우렐리우스는 어린 시절 받은 가르침을 간명하게 정리하는데, 자기에게 수사학을 가르쳐준 프론토를 떠올리며 이렇게 쓴다. “프론토 덕분에 나는 악의와 변덕이 폭군의 특징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귀족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대체로 인정머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자들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기에 변덕을 부리는 폭군이 되기 쉽고, 귀족이라고 으스대는 특권층은 보통사람들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기에 인정머리 없는 자가 되기 쉽다. 자신이 그렇게 될까 봐 경계하며 쓴 그 문장에서 아우렐리우스가 로마 제국 ‘5현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유를 알아볼 수 있다. 에픽테토스의 후예답게 아우렐리우스는 황제라는 지위를 자기에게 할당된 배역으로, 배우가 무대에서 쓰는 ‘페르소나’ 곧 가면으로 받아들였다. <명상록>의 마지막 장은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배우일 뿐’이라는 에픽테토스의 생각을 그대로 베껴놓은 듯하다. 

“인간이여, 너는 이 거대한 나라의 시민이었다. 5년 동안이든 100년 동안이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누구나 다 그 나라의 법규에 맞게 살지 않느냐. 그렇다면 폭군이나 불의한 판관이 아니라, 너를 그 나라로 데려다준 자연이 너를 그 나라에서 내보내기로서니 뭐가 가혹한 일이란 말인가? 그것은 관리가 배우를 고용했다가 무대에서 해고하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나는 5막이 아니라 3막만을 연기했을 뿐이오.’ 좋은 표현이다. 그러나 너의 인생에서는 3막이 연극 전체인 것이다. (…) 그러니 호의를 품고 떠나라.” 
 
인생이라는 연극이 언제 막을 내릴지는 자신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사를 좌우하는 자연 곧 신이 정한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의 역할이 끝나는 날을 미리 보았고 죽음이 오기 전에 서둘러 죽음을 연습했다.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과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 부흥 열기 속에 재발견돼 당대 교양인의 필독서가 됐다. 마테오 리치의 동시대인 윌리엄 셰익스피어도 그 책들의 세례를 받았다. 셰익스피어가 쓴 비극 작품들은 스토아철학의 언어로 짜인 태피스트리와도 같다. <맥베스>의 어떤 장면은 에픽테토스가 나와 직접 말하는 듯하다. 왕이 되리라는 마녀들의 예언을 들은 장군 맥베스는 아내의 부추김을 받아 선량한 국왕을 살해하고 권좌에 오른다. 이때부터 두려운 일이 끊이지 않는다. 피로 왕관을 찬탈한 맥베스는 불안에 떨다 폭군이 되고 반란을 자초한다. 반란군의 창끝이 코앞에 다가오자 맥베스 부인은 정신착란에 빠져 목숨을 버린다. 부인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맥베스는 탄식한다. 

“그런가. 언젠가는 죽을 터였다. 이런 보고를 들을 날이 올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내일, 내일, 또 내일이 하루하루 느리게 흘러가 마침내 최후의 순간에 도달했구나. 우리의 모든 ‘어제’는 바보들을 먼지투성이 죽음의 길로 데려갔다.”  

이어 맥베스의 입에서 절정의 대사가 나온다.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촛불아. 인생은 그저 걸어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초조하게 자신의 시간을 보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가련한 배우, 무어라고 마구 떠들어대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백치의 이야기.” 

맥베스의 대사는 헤겔의 말을 빌리면 ‘불행한 의식’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내지르는 절규다. 인간은 한창 자기의 배역에 몰입해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연극인 줄 모른다. 에픽테토스와 아우렐리우스는 연극이 끝나기 전에 알았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삶이 파국에 이르러서야 인생이 한편의 연극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깨달았다. 사람은 저마다 페르소나를 쓰고 정해진 기간 동안 무대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우렐리우스 아니면 맥베스. 어떤 자는 왕의 자리에서 아우렐리우스처럼 행동하고 어떤 자는 같은 자리에서 맥베스처럼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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