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일본에 팔아먹은 을사5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된 사람들을 사면자 명단에 넣어야 한다.”
이준 검사는 1906년 이근택 등 을사5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돼 복역 중이던 기산도(1878∼1928) 선생 등의 사면을 주장한다. 상관들의 반발에 부딪힌 이 검사는 결국 기소·파면되고 만다. 사실상 첫 ‘항명 검사’라는 ‘명예’를 안게 된 이는 우리에게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특사로 활동하다 순국한 것으로 알려진 이준(1859~1907) 열사다. 그는 1896년 현재의 사법연수원에 해당하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법률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가 배출한 우리나라 ‘1호 검사’이기도 하다. 여섯달 동안의 교육을 마치고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됐지만 1주일 뒤 아관파천으로 인해 일본 망명길에 오른다. 1897년 와세다대 법과에 들어간 이준 열사는 귀국 뒤 10여년만에 평리원 검사로 임명되지만 ‘항명 파동’으로 결국 파면됐다.
대검찰청은 15일 오후 5시 서울 서초동 대검 본관 4층 자료실에서 정상명 검찰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1호 검사’인 이준 열사 순국 100돌을 맞아 ‘이준 열사 흉상 및 검사 임명장 재현 동판’ 제막식을 가졌다. 이준 열사의 흉상과 동판은 부산대 법대 문준영 교수 등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재현됐다. 대검은 지난 2006년 이준 열사를 ‘자랑스런 검찰인’으로 선정해 관련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준 열사의 검사 임명장 재현 동판은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에도 전달될 예정이다.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의 불길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이준(李儁, 1859~1907)은 가슴이 떨렸다.
“온 국민의 뜻이 그러할진대 그 누가 뒤흔들겠는가. 나 또한 마찬가지.”
나이 마흔여덟에 이르기까지 그 긴 시간을 오로지 구국을 위해서만 달려왔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최근에도 고초를 겪은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준은 평리원 특별검사에서 파면된 상황이었다.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뒤 이듬해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던 이준은 아관파천을 계기로 사임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법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졸업해 귀국하자마자 대한제국의 최고법원인 평리원(平理院) 검사에 임용된 데 이어, 1906년 6월18일에는 특별검사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이준은 작정했다.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가 투옥된 김인식, 나인영, 오기호, 기산도 등을 ‘황제의 은사’라는 형식을 이용해 방면시켜야겠다고 말이다. 을사오적이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조약에 적극 찬성하며 서명한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다섯을 일렀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법무대신 이하영과 마찰이 생기면서 지난한 과정 끝에 불복종 명령으로 파면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이준은 법복을 벗어야 했고,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평의원으로 활동 중이었다. ‘대한자강회’는 1905년 5월 이준과 양한묵(梁漢默) 등이 조직한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로,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겠다는 목적으로 확대, 개편한 단체였다.
이준의 걸음이 빨라졌다.
“국채보상운동을 지지하는 데서 그쳐선 아니된다. 전국적인 범국민운동으로 크게 일으키려면 서울에도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
이준은 자신의 판단을 그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국채보상연합회의소(國債報償聯合會議所)’를 설립하고 소장을 맡아 모금운동을 이끌었다.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헌신의 시작이었다.
#2.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부부의 열정
이준의 뜻에 부인 이일정도 함께했다. 어려서부터 한문과 수학에 뛰어났던 데다 인품과 용모마저 빼어났던 이일정은 1905년 봄 서울 안현동(현 안국동)에 우리나라 처음으로 부인전문상점인 ‘안현부인상점’을 연 개혁적인 여성이었다. 이준이 유배당했을 때 뒷바라지와 살림을 도맡아 하던 중 여성의 경제력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고, 이준의 동의를 얻어 살던 집까지 팔아 마련한 상점이었다. 심지어 상점 수익금의 일부를 일본에 공부하러 간 유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내놓았을 정도로 의식이 깨어있던 여성이기도 했다.
그러니 만큼 이일정의 행보도 큼직큼직했다. 대안동에 ‘국채보상부인회’ 사무소를 설치하고 1907년 3월15일에는 ‘대한매일신보’에 취지서를 발표했다.
“국채로 하여금 나라가 태평치 못한 바, 여자라고 하여 국가의 넓고도 깊은 은혜를 입고서 애국성심이 없다면 신민의 도리가 아니라 하겠습니다. 이에 같은 마음으로 협력이로소이다. 본회에서 의금을 내시는 부인은 본회의 기록에 올리고 이름과 금액을 신문에 공포하겠사오니, 전국 동포 부인은 동참하여 이 운동을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다. 특히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며 국채보상운동에 힘을 싣고 있던 남편 이준을 국채보상부인회 연사로 초청했다.
“국채보상운동의 취지를 설명해주시고, 아울러 부인회에 도움이 될 말씀도 해주세요.”
이준은 반려이면서 정치적 동지이기도 한 이일정의 부탁에 기꺼이 응했다. 이준의 일성이 부인들 앞을 크게 울렸다.
“나는 만 가지 이상이 한 가지 실천만 못하다는 신념을 굳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인들은 지금 위대한 세기적 사업을 실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동포는 2천만으로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그런데 국채보상운동이라는 이 거룩한 일을 남자들만이 한다고 하면 그 수는 반인 1천만밖에 되지 않습니다. 2천만 남녀가 한데 뭉쳐 심력을 다해야만 하는 바, 오늘 부인들이 궐기한 것은 국민된 자로서 당연 이상의 당연한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남녀는 평등입니다. 영원히 평등입니다. 위대한 인물의 뒤에 현모양처가 있었음은 지난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부인들이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한 것은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제가 여기서 칭찬을 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여러분을 모욕하는 언사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국권을 되찾는 것이야말로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니 부인들은 국채보상의 일을 완전히 실천하십시오. 아니면 우리는 모두 일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일본인의 노예로 사는 것을 차마 어찌 보겠습니까. 그렇게 되고서야 살아 무엇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즉 반드시 국채를 우리 손으로 보상해야만 합니다. 국권을 되찾고 남녀평등의 복도 누리며 은혜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 함께 분투하기를 바랍니다.”
#3. 떠나기 직전까지 국채보상운동 헌신
국채보상운동의 성공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이준에게 어느 날 엄청난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6월에서 7월에 걸쳐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이준은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자신을 평화회의의 특사로 파견해줄 것을 제의했다.
“을사늑약은 폐하의 의사가 아니라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되었습니다. 하니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선언하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도 요청하겠습니다.”
고종이 동의하면서 이준은 헤이그특사단의 부사가 되어 1907년 4월22일 서울을 출발하기로 결정이 났다.
“나라의 중한 일을 맡아 떠나는 것은 감사한 일이나 국채보상운동이 걱정이다.”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 소장이었던 그가 헤이그로 떠나기전 국채보상운동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준은 국채보상운동에 하나라도 더 보탬이 되기 위해 내내 동분서주했다. 헤이그로 떠나기 전까지도 그는 쉴 틈 없이 움직였다. 특히 헤이그 특사 파견 이틀 전인 20일에도, 이두훈(李斗勳) 고령군의무소장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공문서를 보냈다. 당시 고령군의무소(高靈郡義務所)에서 모은 의연금의 액수가 대단하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였다.
“삼가 아룁니다. 이번 국채보상의 의무는 온 국민과 큰 관계가 있습니다. 광문사에서 부르짖은 1통의 편지가 전국을 고무시켜 운동을 인도하고 인심을 움직인 일 또한 그런 마음을 가진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발기모집소가 곳곳에서 계속 일어나면서 정리가 필요했습니다. 국내에 회의소를 설치해 서울과 지방에 연락한 뒤 일을 법도에 맞게 통일해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에 국채보상연합회의소는 13개도의 발기인과 각 사회가 합동으로 만들어 그 이름을 국내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고령군의무소를 향해 의연금 모금을 위한 활동 내용을 구체적으로 안내했다.
“그 과정에서 고령군의무소에서 한마음으로 일을 하여 의연금을 많이 모집했다고 하니 누군들 공경하지 않을 것이며, 누군들 우러러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제반의 규칙을 간행하여 알리고자 우선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 취지서를 전합니다. 살펴보신 후 고령군의무소에서 의연금을 낸 이들의 이름과 금액을 소상하게 알려주십시오. 월보(月報)를 간행할 때 넣고자 합니다. 아울러 모금액은 저희가 따로 안내해드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송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하나까지 꼼꼼히 챙기고 나서야 이준은 헤이그를 향해 떠났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못했고, 공문서에서 밝혔던 월보 간행도 지켜보지 못했다. 이국에서 통한의 죽음을 맞이한 때문이었다. 다만 그가 남겼다는 유훈만이 대한제국 국민의 마음을 울릴 뿐이었다.
“사람이 산다함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