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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단죄하고 사형당한 청년 이재명, 김구, 이재명의 부인 오인성 여사,

Jobs9 2022. 2. 1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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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재명

 

매국노인 이완용을 주살하기 위해 단도로 습격을 했던 의사로 유명하다. 본관은 진안(鎭安). 개신교인이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추서 되었다.

1887년 10월 16일 평안도 선천군(현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평안남도 평양부 평양성내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그러다가 1904년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1907년 귀국하였다.

1909년 1월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과 함께 평양부를 방문하기로 하였을 때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하지 못했다. 《백범일지》에 이재명의 의거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다. 김구가 황해도 재령군에 있었을 때 "이재명이라는 자가 총을 쏘며 난리를 피우면서 아내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만났는데 김구와 노백린은 이재명이 단순히 자기 말을 안 듣는 아내를 죽이려고 하는 줄 알고 그의 총을 빼앗아 기차를 타고 가버렸는데 의거 이후 그것이 이완용을 척살하기 위한 무기였음을 알고 크게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사실 말하자면 이재명이 자신이 이완용을 죽이겠다 하자 그의 아내는 만류하였고 이재명은 "이 계집이 나라가 중한 것을 모른다"라고 화를 낸 것. 그러고 나서 나중에 이완용이 칼빵을 당하고도 살았다는 소식을 듣고 후회했다는 말이 있다. 또는 김구와 노백린은 이완용을 죽이는 데 사용할 무기임을 알고는 있었는데 이재명을 헛된 열정에 들뜬 젊은이로 보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말린 것이라고도 한다.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으로 죽자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을 처단하기로 하였는데 이완용은 이재명, 이용구는 김정익, 송병준은 이동수가 담당하여 죽이기로 결정했다.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 천주교회당(오늘날 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이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이재명은 신문을 보고 이 정보를 입수한 뒤 밖에서 군밤 장수로 변장하고 있다가 11시 30분에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를 칼로 3번 찔렀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과 이재명 사이를 막아섰던 인력거꾼 박원문이 칼에 찔려 사망하였고 부상당한 이완용은 대한의원에서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치료와 대수술을 받은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게 한국의 흉부외과 수술 제1호이다. 이게 통탄할 노릇인 것이 이때 이완용을 치료한 일본인 의사가 말하기를 "외과 기술이 10년만 늦었어도 이완용은 이 날 죽었다."


●“내 목숨 빼앗을 수 있으나 충혼은 못 빼앗아”
경시청에서 조사를 받은 의사는 일경이 “공범이 있느냐?”고 묻자 “이러한 큰 일을 하는데 무슨 공범이 필요하냐. 공범이 있다면 2000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다”라고 말했다.

이듬해 4월 열린 재판에서도 “도와준 자를 말하라”는 일본인 재판장 스가하라에게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자는 우리 2000만 동포 모두며 방조자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엄숙한 목소리로 역적 이완용의 8개 죄목을 거론하며 통렬하게 비판했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나의 충혼, 의혼(義魂)은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번 죽음은 슬프지 않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내 결코 죽어서 그 원한을 갚을 것이다.”

의사는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고 꼿꼿한 자세로 재판장을 꾸짖으며 이렇게 최후 진술을 했다. 부인 오씨는 ‘국적 이완용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았는데 우리 가부(家夫)는 왜 사형에 처하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의사는 총독부 체제 발족 바로 전날인 1910년 9월 30일 순국했다. 의사는 의거를 공모한 사람들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호하면서 끝까지 단독 범행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병록 등 동지 10여 명도 최고 징역 15년형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Ⅱ - ▣이재명▣

 

 

■이재명의 부인 오인성 여사, 남편 사망 후 간도 등지서 교사하며 독립운동

이재명 의사의 부인 오인성(사진)은 1890년생으로 추정된다. 부모는 평양에서 정미업을 했고 다섯 자매를 두었는데 그중 맏딸이었다. 평양 성모여학교 졸업 후 재령 진초학교 교사가 됐다. 이재명 의사 의거 당시 양심여학교(동덕여자의숙과 통합) 생도였다. 결혼은 1908년 성모여학교를 다닐 때 이 학교 교사 등이 이 의사를 소개해 이뤄졌다.


이 의사 순국 후에 성재 이동휘 선생의 두 자매와 함께 성진 보신여학교, 간도 양정여학교 교사를 지냈다. 연해주 간도 상하이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으며 3·1 운동 소식을 듣고 동참하려 환국했으나 급서하고 말았다.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있다.

■이재명(1890?~1910)
·1888∼1890년 사이 평북 선천 출생. 부 사망

·1904년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
·1906년 샌프란시스코 '한인공립협회' 가입
·1907년 재미동포 공동회에서 매국적 숙청 결의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 습격
·1910년 5월 18일 사형 판결
·1910년 9월 30일 사형 집행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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