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에 의하여 시작된 이슬람교는 그 세력을 확장하여 불과 100여 년 사이에 서쪽으로는 스페인 및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동쪽으로는 페르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였다. 이 시기에 헬레니즘 문명권의 여러 지식들이 이슬람권으로 유입되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의 자연 철학 내용을 담은 서적들이 7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들의 번역에는 정교하고 긴 주석이 덧붙여지게 되어, 독특한 색체를 띤 이슬람 과학의 내용으로 발전하였다. 이븐 알하이삼의 생리학적인 광학이나 연금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스 과학의 보관창고였던 이슬람 과학
이슬람 세력은 무함마드 등장 이후 스페인에서 페르시아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100여 년이라는 빠른 시일에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헬레니즘 문명권의 수많은 지식들이 이슬람권으로 유입되었다. 특히, 그리스의 의학 및 자연철학 내용들이 집중적으로 유입되었다. 9세기 초반 이슬람 왕조의 군주 알 마문은 당시 수도였던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이라 불리는 학문연구소를 세웠고 수많은 학자들이 이 곳에서 방대한 양의 그리스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하였다.
이슬람 세력이 팽창하여 그 문명이 절정에 달하게 되는 7세기에서 11세기 사이의 500여년간은 서구 문명권의 위상이 가장 위축되어 있던 시기였다. 서방 세계의 과학 활동이 미약했던 이 시기에 많은 그리스의 고전들이 아랍어로 번역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번역 과정에서 정교하고 긴 주석이 덧붙여지게 되어, 독특한 색체를 띤 아랍 과학의 내용으로 발전되기도 했다. 이븐 알하이삼의 생리학적인 광학이나 물리적 실체를 엄격히 논하는 아랍 세계의 천문학적 경향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 세계의 수학이란 기하학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아랍 세계에서는 대수학 분야가 형성되며, 연금술 전통이 이론적인 구도를 갖추면서 강한 전통으로 확립되어 후대 과학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에 대학이 설립될 무렵, 그리스의 과학 및 의학 저술들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서방 세계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리스의 책들은 이미 망실되었고, 서방의 학자들은 아랍어로 번역된 고대 그리스 서적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아랍의 과학은 그리스의 과학 저술들을 보관해 두었다가 서양에 다시 전달하는 일을 했다고 표현한다.
이슬람의 광학
이슬람 문명권에서는 사막 지대에 신기루를 비롯한 여러 광학현상이 나타났으며, 사막의 강한 바람으로 많은 사람들이 눈병에 걸려 이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눈과 시각 현상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광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슬람의 광학은 기하학적 전통을 계승한 알킨디(Al-Kindi), 해부학적 전통을 계승한 후나인 이븐 이샤크(Hunain Ibn Ishaq), 그리고 경험에 의해 얻어진 형상이 뇌에 전달된다고 주장한 전통을 계승한 이븐 시나 등 세 사람이 계승한 전통에 의해 이어져 왔다. 당시 수학적ㆍ해부학적 전통에서는 눈에서 나오는 고아선이 물체에 닿을 경우 중간의 공기가 압축되어 그 영향이 눈의 수정체 액에 전달되어 물체가 인지된다고 생각했었다.
서유럽 학자들은 이븐 알하이삼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과 수학적ㆍ해부학적 전통을 결합시켜 체계화한 이론을 받아들였다. 이븐 알하이삼은 빛과 색이 눈과는 독립적으로 물체에서 모든 방향으로 직선으로 방출된다고 생각했으며, 점광원에서 나오는 빛이 눈에서 굴절되면서 물체와 눈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물체로부터 눈으로 들어오는 상을 그대로 인간이 인지하는 것이 아니며, 경험에 입각한 추론에 의해서 물체를 인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근대적인 시각 이론의 형성을 위한 중요한 발견이었다. 이븐 알하이삼은 시각 현상 외에도 무지개, 후광, 거울 등 광학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는데, 이러한 연구들은 케플러와 같은 서구의 광학 이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연금술의 발전
서양의 연금술은 고대 이집트에서 기원으며,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와서는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연금술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연금술은 영지주의를 위시한 신비주의 사상과 결합되면서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이런 신비주의적 전통을 지닌 연금술은 이슬람으로 건너오면서 역시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Sufism)과 결합되어 발전하게 되었다. 연금술이라는 어휘 자체가 아랍어의 기원을 갖고 있으며, 그 외 알칼리, 알코올, 나프타, 나트륨 등 연금술을 통해서 발견된 수많은 화학물질의 명칭이 아랍어에서 기원했다.
한편, 연금술의 이론적 근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물질은 4원소들의 배합이기 때문에 그 비율을 바꾸면 다른 물질이 된다는 생각은 연금술사들에게 물질이 변환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9세기에 와서 이슬람 연금술의 아버지인 자비르 이븐 하이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새로운 황-수은설을 제창했다. 그의 황-수은 설은 이슬람과 유럽 연금술의 기본 원리로 발전했으며, 18세기를 풍미했던 플로지스톤 이론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화학의 중요한 이론적 배경으로 남아 있었다.
연금술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이론이나 황-수은설을 이용하는 한편, 물리ㆍ화학적 조작을 가하기도 했으며, 기도 혹은 주술도 활용하는 등 헬레니즘 시대 이래로 강하게 남아 있었던 신비적 자연관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또한, 연금술사들은 점성술사들처럼 대우주와 소우주가 서로 연결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에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중요한 물질들을 각각의 별자리와 연관시켰다.
연금술은 이와 같은 신비주의적이고 비합리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발전했지만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과학사(科學史)상 많은 공헌을 이루어졌다. 즉, 연금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천칭이나 시약이 사용되었으며, 화학적 조작이 활용되면서 새로운 화학 물질도 많이 발견되었다. 연금술이 과학사에서 한 역할은 베이컨의 평가에서 비유적으로 잘 나타난다.
“ 연금술은 아마도 아들에게 자신의 포도 밭 어딘가에 금을 묻어 두었노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은 땅을 파서 금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포도 뿌리를 덮고 있던 흙무더기를 헤쳐놓아 풍성한 포도 수확을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금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유용한 발명과 유익한 실험들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통념적으로 우리들은 중세 유럽의 과학 문명이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뿌리를 두고 있다고 익히 들어왔다. 그러나 이슬람 문명이 중세 유럽의 문명 발달에 있어 핵심적 가교 역할을 얼마나 지대하게 수행해왔는지 수긍하는 사람은 무척 드물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슬람의 과학
이슬람 세계는 중국과 유럽을 잇는 촉매제로서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 그리스 유산을 보존하고 심화시켜 중세유럽 문명을 촉진시킨 그림자 후견인이자 숨은 주역이라 칭하지 않을 수 없다.
칼리프들이 ‘譯書사역’ 진두지휘
서양에서 질풍노도의 찬란한 고대 그리스 문명이 쇠락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동방 아라비아에서는 그 빛을 이어갈 새로운 문명의 잉태 조짐이 역력했다. 622년 마호메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후 불과 1세기만에 이슬람교도들은 파죽지세로 시리아, 이집트, 스페인을 연거푸 점령하면서 북 아프리카를 위시 지중해 전역과 서쪽은 스페인의 피레네산맥, 동쪽은 중국의 국경선에 이르는 이슬람 제국을 건설한다.
승승장구 영토 확장의 결과로 AD 750년부터 AD 1085년경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걸쳐 이슬람 문화의 급팽창 열기를 그 누구도 잠재울 수 없게 된다. 특히 코란과 칼을 양손에 든 이슬람 교도들은 점령지역에서의 과학의 진수에 폭발적 관심을 보였다. 이에 이슬람 국가의 왕인칼리프들이 대대적으로 앞장선바, 이슬람 학문의 대대적 부흥의 일대 예고편이라 할 것이다.
이슬람 과학의 중심지는 이라크의 바그다드, 이집트의 카이로,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니였으며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까지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아라비아에서 학문의 새싹이 튼 것은 8세기 중엽 이후로 아바스왕조 시대에 만수르(754∼775), 하룬 알 라시드(786∼809), 알 마문(813∼833)과 같은 저명한 칼리프가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고 발달시켰다. 이들 군주들은 한결같이 번역(飜譯) 작업에 초인적 지원과 노력을 아끼질 않았다.
특히 749년 바그다드에 수립된 아바스 왕조의 제7대 군주인 ‘알 마문(Al-Ma'mun)’은 우리 조선시대의 세종대왕과 같은 경이적 존재로 비견된다. 알 마문은 '828년경 ‘지혜의 집(Bayt al-hikmah)'으로 불리는 연구소를 바그다드에 세우고 과학문화의 진흥에 전력을 경주했다.
당시 번역의 제1인자로서 독보적 존재였던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Hunayn ibn ishaq AD808~873)’가 이를 관장하였다. 도서관과 천문대를 갖춘 지혜의 집에서는 아랍인을 비롯하여 여러 민족의 학자들이 초청되어, 주로 그리스어로 편찬된 과학 도서를 아라비아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방대한 규모로 속전속결 진행됐다.
이븐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숙식을 해결하며 번역 사역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븐에 의해 시리아어로 번역되어진 그리스 과학 문헌들이 다시 그의 동료들에 의해 아랍어로 번역되는 일련의 노고 하에 그리스 과학 문헌집이 체계적으로 완성하여 햇빛을 비추게 하였다. 이런 고된 작업을 통해 번역된 책들에는 철학서, 지리서, 의학서뿐만 아니라 산술(Arithmetic)이나 기하학(Geometry), 천문학, 음악이나 문학서적까지 그 범위는 무척 광범위했다.
철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수학에서는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 천문학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의학에서는 히포크라테스·갈레노스 등의 저서가 모두 번역됐다. 요컨대 그리스 학문이 씨앗이 되고 페르시아나 인도의 과학이 접목되어 이른바 이슬람 ‘퓨전 과학’이 세계사적 반열에 등재되는 대기염을 토하게 된 것이다.
수학 화학에서 빼어난 업적
이슬람 과학은 특히 수학과 연금술 분야에서 걸출한 세계적 학자들을 배출했다. 아라비아어를 기원으로 한 Alcohol(알콜), Alkali(알칼리), Chemistry(화학), Algebra(대수), Alchemy(연금술)등 단어들은 모두 이슬람 세계에서 태동된 것들로서 그 명성과 업적을 익히 알고도 남음이 있게 한다.
중국의 당나라와 빈번한 교류로 종이 제조법을 이어받은 이슬람 문명은 751년에 최초의 제지 공장을 건설하였고, 제지술은 1150년경 당시 이슬람 국가이던 스페인으로 건네지면서 서방세계의 문을 노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종이에 어떤 기록물들의 흔적을 방대하게 남겨 놓았는지 무척 궁금증이 더해온다.
대수학, 기하학, 삼각법 이론을 심화시키고 적분법과 방정식계산, 쌍곡선과 원주의 교점을 구하는 방법으로 4차의 기하학적 방정식을 풀었고 뒤에 해석 기하학의 선구가 된 이슬람 수학의 백미는 누가 뭐라 해도 인류에 최고의 선물로서 아라비아 숫자를 손꼽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그리스의 숫자나 한자의 숫자는 일정 수 이상을 표기하기 위해선 다른 특수 문자 표기의 차용 불가피성으로 인해 실용적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라비아 숫자는 'O'의 개념을 도입함으로 아무리 큰 수라 하여도 무한대로 그 표기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아라비아 숫자는 그 근원을 인도에 두고 있는바, 이슬람인들이 심화 발전시켜 유럽에 전하였기에 통상 아라비아 숫자로 불린다.
중세 수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대수학(代數學) 역시 이슬람 학문의 독보적 성과로 손꼽힌다. 영어식의 표기인 Algebra(대수)의 어원이 아랍어임을 볼 때, 범접하기 어려운 그 위상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스와 인도 학문의 기초 위에 대수학을 건설한 위대한 이슬람 수학자로는 '알 흐와리즈미(Al khwarizmi, AD780~850)를 들 수 있다. 그가 820년경 집필한 수학책 이름에 들어 있는 '알 자브르'라는 아라비아 낱말이 오늘날 ‘알제브라(Algebra)’가 됐으며, 다시 알고리즘(Algorism)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특정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모든 조작이 단계별로 명시된 기계적 절차를 알고리즘(Algorism)이라고 한다. 또한 ‘알 흐와리즈미’는 '미분 방정식'을 정립하여 12세기 유럽 대학의 표준 교과서로서 채택되는 영예를 누렸다.
다음으로 화학분야 모태가 되는 영역에서도 이슬람인들은 이내 두각을 나타내었다. 8세기 말에 고체에 열을 가하면 액체가 되는 일이 없이 곧바로 기체로 변하는 승화(昇華) 작용이 발견되었으며, 여과법과 증류법의 발명으로 11세기경 제약 의화학이 크게 발달되었고 글라스, 염색화약, 도자기 등의 공업이 부흥되었다.
이슬람 화학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친 과학자로는 ‘자비르’와 ‘라지’를 들 수 있다. ‘라지’는 중세 연금술에 필요한 화합물과 설비의 개요를 정립하면서 물질을 동물, 식물, 광물로 분류하고 오늘날 실험실에서 볼 수 있는 화학기구(비이커, 플라스크, 시험관, 유리접시) 등을 널리 전파하였다.
여기에서 이슬람 문명의 희비극으로 거론되는 연금술을 빼놓지 않을 수 없다. 아라비아 연금술의 창시자는 유럽에서 게베르로 불리는 9세기경 신비주의자인 ‘자비르 이븐 하이얀’이다. 연금술의 종착역은 비금속을 귀금속으로 변신시켜 그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서, ‘자비르’는 “금속은 유황의 남성적 원리와 수은의 여성적 원리의 상호 작용에 의해 형성되고, 비금속은 죽음과 소생의 과정을 거쳐 귀한 것이 된다.”는 논지의 설파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허황된 논제로의 집념이 결코 유명무실하다고 폄하할 수는 없다. 금을 만들기 위해 부단하게 불철주야 노력하는 가운데 화합물의 조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수많은 연구가 행하여졌고 그 부산물로서 금속의 정련, 강철의 초산제법, 유리제조에 있어서 이산화망간의 사용 등 신기술이 거듭 발견되었다. 그만큼 아라비아의 연금술은 훗날 화학의 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의학 광학(光學)에서도 두각
이슬람 제국에서 '의학'은 관념적이나 사상적 학문이 아닌 매우 실용적 학문으로서 이내 자리 잡게 된다. 9C초에 시작된 번역 작업에 '의학'은 초반부터 포함되었을 정도로 그들의 주 관심 분야였다. 이슬람 시대를 풍미한 저명한 의사들은 태반이 페르시아 태생으로, 독보적 비범한 인물로서 어느 누구도 ‘알 라지(Al razi, AD 865~925)’를 필적하지 못한다.
그리스 힙포크라테스와 비견된 라지는 의술의 달인으로서 100권 이상의 의학서를 편찬하였는데, '조건 반사, 천연두, 소아 질병, 홍역' 등 한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자적 인물이었다. 라지의 불후 업적으로는 그리이스, 시리아, 페르시아, 인도, 초기 아라비아 등의 지식을 집대성하면서 광범한 임상경험에 입각하여 저술한 '의학 대전(Kitab al hawi)’이다. 이 백과사전은 1279년부터 1542년까지 무려 3세기에 걸쳐 라틴어로 수없이 번역되어 중세 유럽인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다음으로 ‘후나인 이븐 이스학(Hunayn Ibn Ishag)’은 ‘신체 병에 관한’ 醫書에서 음식, 대변이 나오게 하는 완화제, 인체기관 사이의 차이점을 서술했다. ‘이븐 시나’는 결핵의 전염성과 각종 피부병, 심리장애에 의한 상사병을 이미 거론하였다. ‘이븐 마이문’은 에스파니아 출신으로 식이요법과 섭생법에 관한 것을 저술했다.
이슬람 과학에서는 아라비아의 지역적 기후적 영향으로 광학분야 또한 초강세를 띠었다. 가장 발달한 분야는 안과학인데 이는 사막에서 눈병이 잦았던 탓으로 백내장 수술법이 근대적 기술로 대체되기 전 수세기 동안 사용되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이븐 알하이탐(Ibn alhaytham, AD 965~1039)'은 수학과 해부학을 접목하여 이슬람의 광학을 체계화하고 발전시켰다. 물체가 눈을 통해 인지되는 과정에서 뇌의 역할에 대한 그의 이론은 후에 근대 시각 이론을 정립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덧붙여, 천문학의 발달 역시 이슬람 고유문명에 속하는 것으로서 유럽은 물론 중앙아시아 중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역법(曆法)인 중국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과 명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은 모두 아라비아 천문학의 성과에 힘입은 것이다.
이슬람교의 태동과 발전과 함께 그 족적을 같이한 아랍의 천문학은 모슬렘의 예배시간, 메카의 방향, 라마단의 새로운 월출시간을 헤아리는 것뿐만 아니라 육로 및 해상 여행자의 방향제시에도 그 등대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상술한바, 이슬람 과학문명의 기여도를 총괄하자면 아라비아 세계에서 그리스의 과학서적을 활발하게 번역했기 때문에 아랍 어역(語譯)에 의해서만 현존하고 있는 문헌이 상당하다.
또 12세기경 서유럽에서 학문의 여명기가 도래할 즈음 아랍어로 전해진 그리스의 천문학적 자산을 라틴어로 재번역해서 두루 적용하였다.
이슬람 과학은 그리스와 인도의 학술서 번역을 시발로 거기에서 애써 체득한 자양분을 자신들의 임상, 관찰, 실험에 의해 풍부하고 정교한 것으로 일체화시켜 그 값진 유산을 모두 유럽에 전수하여 유럽의 근대 자연과학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