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Israel)
이스라엘의 위치는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의 땅'이라는 의미의 "에레츠 이스라엘"으로 알려진 지역으로, 고대에는 가나안, 팔레스타인 등으로 불렸다. 고대에는 가나안 도시 국가들이 자리 잡았고, 이후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이 세워졌다. 이후 로마 제국부터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여러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인구 구성이 크게 변화하였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의 반유대주의는 시온주의를 촉발시켰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시온주의는 대영제국의 지지를 얻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은 이 지역을 점령하여 1920년에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세웠다. 홀로코스트가 벌어지기 얼마 전 유대인의 이민이 증가하면서,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는 1947년 유엔이 이 지역을 분할할 것을 제안한 후 내전으로 이어졌다.
현재의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에 건국을 선포했으며, 이튿날 인접한 아랍 국가들의 군대가 이 지역을 침공하면서 제1차 중동 전쟁이 시작되었다. 1949년 휴전 협정으로 이스라엘은 이전 위임통치 지역의 77%를 통제하게 되었다. 대다수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시온주의자와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추방되거나 스스로 국가를 떠났는데 이들을 "나크바"라고 한다.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이들은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의 주요 소수민족이 되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은 아랍 세계에서 이주하거나 쫓겨난 유대인들을 받아들였으며,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서안 지구, 가자 지구,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을 점령했다. 국제법에 반하지만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정착촌을 계속 확장하고 있으며, 동예루살렘과 골란 고원을 사실상 병합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요르단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으며, 2020년대에는 더 많은 아랍 국가들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그러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해소되지 못하여 여러 차례 전쟁과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들과의 충돌을 겪었다. 이스라엘의 점령지에서의 관행은 국제적으로 지속적인 비판을 받아왔으며, 인권 단체와 유엔 관계자들은 이스라엘을 전쟁 범죄로 비난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기본법은 단원제 의회 시스템을 규정하고 있으며, 비례대표제로 선출된 국회(크네세트)가 정부 구성과 총리 및 대통령의 선출을 담당한다. 이스라엘은 부활한 공식 언어인 현대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이스라엘은 유대인과 디아스포라의 요소들, 아랍의 영향이 결합된 독특한 음식, 음악, 예술 등 문화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가장 큰 경제를 가진 국가 중 하나이며, 아시아에서 높은 1인당 GDP와 생활 수준을 가진다. 세계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발전된 국가 중 하나인 이스라엘은 연구 개발에 가장 많은 비율의 투자를 하고 있으며,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0년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으며, 회원국 중 유일하게 출산율이 대체 수준을 초과하는 국가이다.2023년 기준 이스라엘은 명목 GDP 29위, 1인당 GDP 13위다.
국명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기간동안 이 지역은 "팔레스타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후 1948년 이스라엘 독립이 선언되면서, 이 나라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국"(히브리어: מְדִינַת יִשְׂרָאֵל, 이 소리의 정보Medīnat Yisrā'el he; 아랍어: دَوْلَة إِسْرَائِيل, Dawlat Isrāʼīl, ar)이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그 외에도 에레츠 이스라엘, 에벨, 시온, 유다 등이 제안되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벤구리온에 의해 제안되었고, 투표를 거쳐 6대 3으로 통과되었다. 건국 후 초기 몇 주 동안 정부는 이스라엘국의 시민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스라엘인(israeli)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어원
'에레츠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이름은 역사적으로 성경 속 이스라엘 왕국과 전체 유대인을 각각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그리스어: Ἰσραήλ, "엘이 통치한다"는 의미로, 호세아서 12:4 이후에는 종종 "하나님과 씨름하다"로 해석됨)은 구약성경에 따르면, 천사와 씨름에서 승리한 후 족장 야곱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집단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가장 오래된 유물은 고대 이집트의 메르넵타 석비(기원전 13세기 후반)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는 인명과 지명 두 가지가 있는데, 인명으로서의 이스라엘:Israel은 -「하나님과 겨뤄 이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지명으로서의 이스라엘:Israel 은 -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하나님은 지배하심」, 「하나님은 통치하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리
국토 면적은 2만 8789 ㎢로 작은 편이며 경상도의 넓이와 엇비슷한 수준이다. 2020년대의 인구통계를 바탕으로 이스라엘 본토에서 거주하고 있는 인구(약 900만 명)와 팔레스타인 국토에서 거주하고 있는 인구(약 500만 명)를 모두 고려하면, 가나안(Canaan) 또는 에레츠 이스라엘(Eretz Yisrael)의 인구는 약 1400만 명이다. 이스라엘이 본토로 취급하며 점령 중인 골란 고원과 팔레스타인이 다스리는 요르단강 서안 지구는 특정 지역을 제외하고 언제든지 여행과 방문이 가능하지만, 하마스가 다스리는 가자 지구는 특별한 허가를 확실하게 받아야지 매우 어렵게나마 방문이 가능하다.
이스라엘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레바논과의 국경부터 가자 지구까지 지중해를 따라 이어지는 해안 평야(מישור החוף, Mishor Hakhof)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살기 좋은 지형으로 토질이 비옥하여 텔아비브와 하이파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본토의 인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이곳에 몰려 산다. 해안 평야에서 동쪽 내륙으로 가면 북부 갈릴리 지역과 요르단강 서안 지구등 산지와 구릉으로 구성된 고지대가 존재한다. 평균 고도 600m 정도의 고지대 사이사이마다 비옥한 계곡 지형이 존재하며 수도 예루살렘 역시 이곳에 존재한다. 다시 고지대에서 동쪽 요르단과의 국경쪽으로 가면 갈릴리 호에서 사해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수원인 요르단강을 따라 이어진 요르단강 계곡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남쪽의 네게브 사막(מדבר הנגב, Midbar Hanegev)은 극히 건조한 지형으로 내륙의 베르셰바나 이스라엘의 유일한 홍해안 항구도시인 에일라트 등을 제외하면 거주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이스라엘 건국 초기에 네게브 사막은 팔레스타인 영토로 넘겨주자는 의견도 있었다. 훨씬 더 비옥한 골란 고원을 빼앗자마자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그곳에 몰려갔다. 현재 이스라엘이 골란 고원을 돌려달라는 시리아 측의 반환 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것도 이미 이 일대에 1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국민들이 이주,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전부터 골란 고원에 살아온 시리아 국민들도 2만여 명이나 산다.
지중해에 접해 있고 남쪽으로 홍해와도 약간 접하는데 이스라엘의 홍해 해안선은 고작 11km에 불과하다. 말 그대로 약간 걸친 수준. 홍해의 유일한 이스라엘 항구도시 에일라트가 있다. 바로 옆에 요르단의 도시 아카바가 있는데, 여기도 요르단의 유일한 항구도시다. 그래도 가상의 적 아랍 국가들에 포위되어 지정학적 운신의 폭이 좁은 이스라엘에게는 이 작은 홍해 연안이 엄청나게 중요한 요충지로, 제3차 중동전쟁 때도 해상 봉쇄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위치상으로 요충지에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중동의 전통적인 육로는 이집트에서 가나안의 좁은 통로를 거쳐 시리아로 빠져나간 다음 메소포타미아나 소아시아로 향하며, 인구분포 역시도 예나 지금이나 이런 양상이다. 여기서 가나안의 '좁은 통로'에 이스라엘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포인트.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성경의 표현이 물질적 의미에서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선진국 중 출산율이 대단히 높은 나라로 유명하다. 흔히 하레디 때문이라는 인식도 많으나 비종교적인 유대인조차 합계출산율 2.0을 기록하여 서구 최고다. 유대인이 인구의 75% 가량인데, 이들의 출산율은 무슬림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양에서 출산율이 높은 영미권조차 1.6~1.7 정도다. 출산을 해도 아이를 가정에서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도와주는 체계가 강하고#, 수평적 집단주의의 일환으로 자립 능력을 키우는 교육과 그 능력을 인정하는 풍토로 아이에 대한 부담이 적은 편이다. 한편 해외 유대인의 경우 대부분 이스라엘보다 출산율이 낮은 거주국의 풍토를 따르기에 이런 경향이 없다고 한다. # 오히려 많은 인구로 인한 환경 문제 같은 사회 문제를 현지에서 인식을 하더라도 이런 풍토 때문에 쉽게 자녀 수를 줄이지 못하고 있다. 대단한 정책을 도입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습관이 이렇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스라엘에서는 자원이 부족한 것을 한국과 반대로 해석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적 자원'인 자식을 더 가져야 한다는 관념도 사회적으로 흔한 곳이다.
생태
이스라엘하면 사막 국가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그에 맞지 않게 스키장도 있다. 이스라엘 북부 헤르몬 산에 있는데 이곳은 정상이 사시사철 눈에 뒤덮여 있다. 그런데 눈이 있음에도 기온은 좀 덥다고 한다. 평소에는 하늘에서 눈이 내리지 않지만 2015년 12월에 60년 만의 대폭설이 내려 눈 치우는 데 몇 달이나 걸렸다.
다만 국토의 70%가 사막이라 척박한 땅이며 기본적인 물조차도 구하기 쉽지 않다. 성경 시대에는 중동 전역에 비옥한 삼림이나 초원이 있었고 농사도 활발히 지었다. 과거에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라 하여 중동 지방의 문명과 생산력을 담당한 꿀땅이었다. 다만 몇천 년간 이어진 농사로 지력이 고갈되다 못해 물을 찾으려고 바닥을 파고들어 가 모조리 사막화가 진행되었을 뿐이지. 현대에 들어가서는 사우디아라비아든 리비아든 이집트든 이스라엘이든 간에 재개간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지만 사막화가 워낙 심각해서, 시리아고 요르단이고 이라크고 이란이고 죄다 농경지에 삼림이 펼쳐진 시절이 있었음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특히 남부의 사막 지대는 너무나 척박하고 물이 없다 보니 도저히 사람 살 곳이 못 되어 인구가 굉장히 적다. 그래도 오스만 제국 시절보다 눈과 비가 훨씬 더 많이 내리는 편인데, 영국령 팔레스타인 시절부터 산림조경 관변단체 유대 민족 기금(Keren Kayemet LeYisrael)이 2020년대까지 약 3억 그루의 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녹화사업이 증발→상승→냉각→응결→구름→강우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기후변화를 도모한 것이다.
살고 있는 야생동물은 주로 사막에 사는 동물들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의외로 다양한 편이다. 북부도시에서는 멧돼지가 도심에 출몰하는 경우도 있다. 한때는 사자 및 아라비아오릭스 등 덩치 큰 포유류나 토종 개구리도 있었지만, 지금은 죄다 멸종된 상태다.
포유류로는 가젤이나 아이벡스 등 유제류가 있으며, 맹수로는 줄무늬하이에나, 아라비아표범이나 황금자칼도 서식한다. 그 밖에도 쥐나 다른 포유류도 존재하며, 황량한 곳에는 전갈이나 뱀 등도 있다. 곤충류도 나비나 딱정벌레 등도 많은 편이다. 사해 등 호수 지역에는 황새나 사다새 등이 찾는 편이다. 지중해와 맞닿은 곳에서는 돌고래들도 많으며, 연안에는 산호들도 다양하게 자생한 편이라 많은 물고기도 모이는 편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유명한 물고기 중 하나인 향어도 이스라엘이 원산지다.
물 부족
이스라엘의 연평균 강수량은 세계 평균 880 mm의 3분의 1도 안되는 240 mm에 불과하며 여름철만 떼어서 보면 강수량이 0 mm에 근접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물 부족 국가이나 텔아비브 수영장이나 여러 가지 시설로 물을 많이 쓰다보니 토착종 개구리가 멸종하는 일도 있었다. 사해 물도 이스라엘의 막대한 산업용수 소요를 충당하느라 해마다 1m씩 수위가 낮아지는 수준. 시리아나 요르단도 책임이 있지만 그 사용량이 이스라엘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나마 사해는 바다라고 칭할 만큼 크니까 그 정도고 갈릴리 호수의 경우엔 바닥을 드러낸다고 할 정도까지 낮아지고 있다. 강수량도 갈수록 감소하고, 인공강우는 비용 문제로 포기하니 수자원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상황.
이스라엘 본토에서 거주하고 있는 인구의 높은 증가율과 도시화 때문에 물 부족이 갈수록 심각해지다 보니 이스라엘로서는 골치가 아주 아픈 문제다. 네게브 사막은 사막화로 갈수록 넒어져 이제는 이스라엘 국토의 70%에 이르렀으며, 이스라엘 시민사회도 사막화로 인한 수자원의 고갈로 이스라엘 국토가 언젠가는 사람 살 곳이 못 될 것이라는 암울한 말까지 나올 정도다. 레바논에서 수자원을 빼앗아오는 방법도 썼으나 이제는 레바논도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어 제한 급수까지 실시하는 상황이라 이것도 한계가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가까운 미래에 맞이할 위기가 다름 아닌 물 부족이라고 우려하고 여러 모로 머리를 쓰고 있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이스라엘의 물 수요는 이미 1979년부터 자체 수자원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에 달한 상황임에도 소비량이 더 늘어나면 늘어나지 줄어들지를 않고 있다. 그러다보니 물값도 매우 비싼데, 이나마 팔레스타인을 상대로는 수자원을 독점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물값을 이스라엘인보다도 비싸게 받으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증오가 굉장하다.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서는 오슬로 협정 이래로 우물 파기가 금지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자주 도는 돌림병이 오염된 물을 마셔서 생기는 수인성 전염병이다.
매우 당연하게도 자국 내 물 수요량을 감당하지 못하여 요르단과 튀르키예를 통한 물 수입이 많았고 국가예산에서 물값이 차지하는 비중이 국방비만큼이나 많을 정도이나, 최근에는 요르단과 튀르키예도 물 부족에 시달리는지라 더이상 이 나라들로부터는 물 수입을 못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도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기에 해수를 담수화시키는 기술에 있어서도 많은 성과를 내놓고 있으며, 폐수도 70%를 정수하여 다시 재사용하고 있고 나중엔 90%를 정수할 계획이다. 중동의 물이 석회질이 많은 만큼 여기도 석회질이 많아 정수기 산업이 발달해 있다.
이스라엘에서 물을 얼마나 중요히 여기는지, 모든 수자원을 일원화하여 관리하고 상수도 매설 지도를 국가기밀로 여겨 절대로 공개하지 않을 정도다. 이스라엘인들도 비가 내리면 팔레스타인인들처럼 서로 물을 받으려고 애쓴다. 이스라엘 본토의 시골에서도 팔레스타인처럼 비가 내리게 해달라는 기우제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관개 시설을 발전시켜 갈릴리 호수와 사해, 요르단강에서 물을 끌어다 농사를 짓고 있다. 나무 하나하나에 호스를 연결시켜 수분을 공급해서 2000년 동안 풀 한 포기 나지 않던 지역을 지상 낙원으로 만들었다. 옛날 포카리스웨트에는 이스라엘산 그레이프 후르츠가 들어갔었고(현재는 남아공산으로 바뀌었다), 빙그레 메론맛 우유에는 이스라엘산 메론과즙이, 썬키스트 레몬에이드에도 이스라엘산 레몬과즙농축액이 들어간다. 복숭아나 스위티도 상당히 자주 보이고, 전 세계적으로 맛으로 유명한 Orri Jaffa라는 귤도 수출한다. 심지어 드물지만 딸기나 바나나까지 간혹 보일 정도. 이스라엘이 경제력과 기술력이 있고 미국 내 기업으로부터 지원받기 수월했던 것도 있다. 다만 우리나라에선 이스라엘의 사례가 조금의 왜곡이 섞여서 홍보되는 감이 없지 않다. 사실 사우디아라비아나 리비아, 이집트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사막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고 있고 호주나 미국에서도 황무지를 지하수를 이용해 농경지로 개간한 사례가 있다. 그중 잘 알려진 리비아 대수로 공사 사업이 바로 수로 부근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벌인 사업이고 사우디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오일머니를 투자해서 농사를 짓고 있으며 이집트에서도 사람 살 땅이 워낙 좁다 보니 사막 개간 사업이 활발하다. 이라크도 1970년대 당시에는 재개간 산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기도 했다. 이들 나라의 면적이 이스라엘보다 넘사벽급으로 넓다 보니 구글 어스로 보면 여전히 사막이 대다수이고 녹지는 드문드문 보이는 수준이지만. 그러나 사막에 물을 뿌려 농사짓는 전략은 수자원 부족의 원인으로 지목받고 있다.
이스라엘 수자원청은 이를 우려하여 사해와 갈릴리 호수의 취수 규정을 제한하라고 지시해 사실상 물 공급을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다. 수자원청의 취수 제한은 농림부 및 농민들의 반발을 일으키고 있지만 수자원청은 이대로 간다면 이스라엘의 물은 씨가 마른다며 취수 규정을 못 바꾼다고 고집하고 있다. 게다가 수자원청은 물을 많이 쓰면 누진세를 부과하는 법안을 계속 제출하는데, 정부 차원에서는 여론이 폭발할까봐 차마 누진세를 도입하지 못하는 대신 수자원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이스라엘의 해수 담수화에 집중해 현재 이스라엘 전체 물 사용량의 70%를 충당할 정도다.
그러나 이것도 궁극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는 것이, 일단 이스라엘인들이 지하수나 호수물같은 천연수를 훨씬 더 선호하는데다 해수 담수화는 대량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다보니 국가재정 부담도 있고 국제 에너지 시장의 큰손인 중동 국가들과의 사이도 썩 좋지 않다보니 마냥 담수화 규모를 늘리기에는 등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그나마 돈 있고 인구가 적으니(인구 천만이하) 그나마 상황이 나은 것으로, 이미 중동 전체가 대표적 물 부족 지역이라고 알려진 상황이다. 이스라엘의 주적인 이란은 사실상 내륙국이나 다름없는 신세고 강수량도 더 적은 데다가 인구는 이스라엘의 8배가 넘는데다 온난화까지 겹쳐 지하수마저 바닥을 드러내는 지역이 태반이고, 농민과 농촌 실업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면 물을 탈취한다거나, 부잣집에도 수영장 찾아보기가 힘들다거나, 물이 특히 부족한 곳은 이슬람 성직자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한다는 충격적인 소식들이 연일 들려오고 있다. 이래서 미국이 이란을 제재할 때 식량과 물로 이란의 목을 조였고, 이란 국내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서방이 증오스럽지만 이대로 가다간 굶어죽겠다며 협상하자는 여론이 높아져 울며 겨자 먹기로 협상 테이블이 열린 것이다.
천연 자원
2000년 이전만 해도 원체 척박한 땅이라 사해 일대에서 채취하는 유황과 소금, 그리고 널려 있는 석회암을 제외하면 딱히 이렇다 할 천연 자원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여기저기 땅을 파 봤지만 석유는 나오지 않았다. 오죽하면 골다 메이어 국무총리가 "모세는 우리를 40년 동안 광야에서 돌아다니게 해놓고는 중동에서도 석유가 나지 않는 동네로 이끌었다"라며 농담삼아 푸념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2000년대 초반에 엄청난 규모의 육해상 석유, 가스전을 다수 발견했다. 매장량이 사우디 다음가는 수준이라는 추정도 있다. 대부분 사우디처럼 조금만 파도 펑펑 나오는 경제성 높은 유전이 아니라 생산 비용이 많이 드는 셰일 오일, 셰일 가스나 해상 유전, 가스전이 대부분이라 다른 중동 국가의 유전에 비해 경제성은 떨어지는 편이다. 이스라엘은 에너지 안보까지 고려하면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입하는 것보다 자국에서 생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는지 유전과 가스전을 개발하고 있는데, 석유와 천연가스의 국내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시펠라 유전, 리바이어던, 타마르, 마리-B, 달리트 가스전 등을 개발 중이다.
이스라엘:Israel(인명)
(Israel) 「하나님과 겨뤄 이김」
야곱이 메소보다미아에서 돌아올 때 얍복강가에서 천사로부터 받은 이름이다. 그 직후 형 에서를 만났다(창 32:22-32).→야곱. 이스라엘은 야곱의 자손 전체를 가리킨다. 이 용법은 야곱의 생존 중에 시작되었다(창 34:7). 광야의 유랑 시대에 흔히 쓰인 호칭명이다(출 32:4,신 4:1,27: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이 시대 이전부터 보다 일반적이었다. 사울이 죽기까지`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자손'은 국명으로써 쓰일 때는 지파별 없이 히브리인 일반을포함했다. 그러나 지리적인 이유, 기타에 의해 유다를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와 구별하는 경향이 이미 있고, 그 구별은 왕국에의 분열 이전부터 인정되고 있었다(삼상 11:8,17:52,18:16).
→유다. 통일 왕국 시대에도 이 명칭은 쓰이고 있었다. 히브리 시의 평행법 이행시(平行法 二行詩)의 첫 줄에 있는 야곱에 해당하는 것으로서둘째 줄에 나타난다(민 23:7,10,24:5,시 14:7). 포로 귀환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제지파를 표시하는데 종종 쓰이고 있다(스 9:1,10:5,느 9:2,11:3).이스라엘은 유다와 별개 행동을 한 지파를 총칭하기도 한다. 히브리 민족의 분열은 사울의 죽음에 이어 일어났다. 북부와 동부의 지파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인정하고 유다족은 다윗을 좇았다.
그 이후부터 전자 10지파는 이스라엘이라 불리우고있다. 이스보셋은 2년간 통치하고 암살되었다. 그리고 그 단절이 회복되기까지 7년이걸리고 이어 다윗이 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삼하 2:10,11). 그러나 양자의 반목은 계속되고, 솔로몬의 사후에 그 결정적인 분열이 일어났다. 10지파는 여로보암에게, 1지파는 다윗의 집을 좇았다. 다윗의 집과 갈린 10지파는 요단 강동쪽의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 요단 강 서쪽의 므낫세 반지파, 에브라임, 잇사갈, 스불론, 납달리, 마셀, 단 그리고 베냐민의 일부이다. 그 이유는, 베냐민 중 벧엘,길갈, 여리고 등과 같은 큰 성읍이 이스라엘의 지경 내에 있었기 때문이다(왕상 12:21,23).
그러면 분열의 원인은 무엇일까? ① 자연적인 유다의 고립이다. ② 에브라임과 유다라는 강대한 두 지파 간의 오래전부터의 반목, 이것은 사울의 사후 왕국에 단기간의 분열을 일으켰다. 압살롬의 패배 후 유다가 왕을 맞았으므로 다시 분열이 일어났다(삼하 19:15,40-43). ③ 왕가의 과도한 사치에 대한 불만이다. 백성들은 겹치는무거운 부담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호화로운 것을 좋아하는 솔로몬의 가계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중세를, 그의 대 사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강제노동을 각각 필요로 했다(왕상 4:22,23,26,5:13-16). 이 무거운 짐으로부터 풀려나고 싶다는 백성들의 정당한 소원도 르호보암에 의해 무자비하게 거부되었다. ④ 잡혼에 의해 조성된 우상숭배(왕상 11:1-11)이다. 영적 부패는 전 계급에 퍼져 여호와 예배에 대한 애착심은 약화되어 그 통일력은 파괴되었다. ⑤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요구를 물리친 그 어리석음이 분열을 일으키는 힘을 강하게 하여 파국을 촉진했다(왕상 12:3-5,12-16)
힘의면에서 유다와 비교하면 북왕국 이스라엘은 10지파로 형성되고 인구는 2배, 영토의 넓이는 3배였으나, 유다보다는 전쟁에 말려들기 쉽고 방어가 곤란하였다. 그것은 배교국이며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것은 국가의 안정성을 필연적으로 약화시켰던 것이다.그 종교는 도덕적으로도 저열한 것으로 되고,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은 유다로 이주했다(대하 11:13,14).이스라엘이스라엘북왕국의 수도는 처음 세겜에, 후에는 디르사에, 그리고 오므리가 세운 사마리아로 옮겼다(왕상 12:25,14:17,15:21,16:23, 24). 최초의 왕 여로보암은백성이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면 옛날 신앙으로 돌아가지나 않을까하고 염려하여 왕국의 북쪽 단과 남쪽 벧엘에 산당을 짓고,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여호와 예배의 매개물로 했다. 이 부분적 배교 때문에 그와 그 자손 위에 심판이 내려 그의 아들나답이 2년 통치한 후 그의 왕조는 사라져 버렸다. 전부 19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들의 전 통치 기간은 약 210년이고,그중7명의통치 기간은 2년 이하, 8명은 타살 아니면 자살에 의해 죽고 그 때마다 왕위는 다른 집으로 옮겨갔다. 같은 집에서 4대 계속하여 왕이 나온 예는 두 번 밖에 없다. 왕 중에서 벧엘이나 단에서 금송아지 우상을없앤 자는 없다.
이교도의 아내 이세벨의 영향을 받은 아합 왕 때에 배교는 정점에 달했으며, 여호와를 예배하는 대신 바알 예배가 수입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예배를 위해 단호히 싸울 선지자를 일으켰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엘리야와 엘리사이다. 바알 예배가 억제된 후 다른 선지자들, 특히 호세아와 아모스가 나라의 도덕생활 개혁을 위해 싸웠다.이스라엘은 유다와 종종 싸웠다. 실제로 이 양국이 진심에서 협력한 것은 양 왕가가결혼으로 맺어졌던 오므리 왕조의 시대 뿐이다. 다메섹의 수리아 왕국이 유력하게 되자 그 인접국 이스라엘의 정치는 영향을 받았다. 양자는 종종 싸웠으나 아합 왕 때처럼 앗수르라는 공통의 적을 갖게 되자 그들은 일치하여 이와 싸웠다. 120년 후, 그들은 예루살렘 공략이라는 吠?목표를 위해 일치했다. 유다 왕 아하스가 여호와의 신앙을 잃고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않고 그 독립을 희생하여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도움을 청한 것은 이 때이다. 유다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고, 다메섹에서 앗수르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왕하 16:8-10). 디글랏 빌레셀은 유다를 침략자로부터구출하고 북이스라엘을 침략하고, 블레셋 사람을 치고 다메섹을 점령하여 르신을 죽이고, 요단 강 동쪽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하고, 베가의 살해를 묵인하고 BC 730년 경호세아를 즉위시켰다. 호세아는 디글랏 빌레셀의 사후 앗수르에 반역, 앗수르군은 이와 싸웠다. 사마리아는 사르곤에게 함락되고 많은 주민이 앗수르에게 포로로 옮겨졌다(BC 722년). 포로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옮겨진 후는 앗수르의 다섯 지방에서 사람들이 식민하여 잔류한 이스라엘 사람과 혼혈하여 뒤에 사마리아 사람의 조상으로 되었다. 이스라엘의 포로는 사람들이 이방인이나 이스라엘 왕들의 습관을 좇아 행하고, 그들의 신에 대하여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배한데 대한 벌이었다(왕하 17:7,8). 그들은 여호와의 법을 거역하고 계약을 어겼다(왕하 17:15,→ 출 20-22장,호6:7,8:1). 그들의 배교는 두 방면에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추방한 이방인의 규례를좇아 행한 것이다(왕하 17:8,15,17,호 2:13,4:2,11,15,암 2:8,9). 이스라엘왕들의 습관, 특히 금송아지와 그에 따르는 의식, 규례 등 우상숭배의 길을 행했다(왕하 17:8,16,호 8:4-6,10:5,8,13:2-4). 그들은 여호와께서 선지자나 섭리를 통하여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범했다(왕하 17:13,호 12:10,암 2:9-11,4:6-13). 그들의 죄는 분리와 타락을 가져왔고, 징계를 오게 한 길이 되었다. 그들은 유다와 분리하여 약화되고 파멸했다. 그들의 우상숭배, 주취(酒醉), 방탕에 의해 이 나라의 남자는 약해졌고, 씩씩한 맛이 없어져 그 군대는 성질에 있어서나 도덕적인 목적에있어서 애굽이나 앗수르, 바벨론의 그것과 같이 되어 버렸다.
이스라엘:Israel(지명)
이스라엘
( Israel)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하나님은 지배하심」 「하나님은 통치하심」
(1)명칭
ⓧ족장 야곱의 별명(창 32:28,37:13,출 32:13,호 12:12,기타):즉, 야곱이 얍복 강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이다(창 32:28). ⓨ이스라엘 민족 전체와 그 국가명(창 47:27,12:15,신 4:1,삿 5:2,삼상 10:1,왕상 2:11,기타):구약의 전승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은 야곱의 12아들로 형성되었다.그래서 애굽 이주부터 출애굽, 광야 시대, 가나안 침입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이스라엘' 또는 `이스라엘 자손'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소위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된 것은 가나안 침입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역사적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애굽 왕 메르넵타(Merneptah, Marniptah,BC 1224-1216 재위)의 치세 제 5년의 전승 기념비에서인데, 그 비문 중에 이스라엘은메르넵타에게 정복된 팔레스틴 제민족 중의 하나로서 기록되어 있다. ⓩ북왕국과 그 백성의 이름(삼하 2:9,5:1,20:1,왕상 5:13,12:16,14:19,호 1:1,4:15,암 1:1,3:14,기타):솔로몬의 사후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유다와 베냐민을제외한 10지파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고 북왕국을 형성하였는데(BC 922), 이때이후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기까지(BC 721) 북왕국과 그 백성은 남왕국 유다와구별하여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웠다. ①남왕국과 그 백성의 이름(왕하 21:8,사 5:7,41:8,겔 13:1,미 3:1,기타):북왕국멸망 이전에 이 예는 적으나, 멸망 후는 종종 이스라엘은 남왕국 유다의 동의어로서쓰이고 있다. 거기에는, 남아 있는 유다야말로 이스라엘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라는생각이 엿보인다. ②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의 이름(스 9:1,10:5,느 9:2,11:3,기타):여기에서도 귀환한 자들이야말로 다음 항에서 기술하는 이스라엘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라고하는 생각이 엿보인다.여호와를 예배하는 공동체의 이름:왕국이나 민족의 이름으로써 이스라엘이 쓰인 배후에는, 그들이야말로 여호와에게 택함 받은 계약의 백성이라는 종교적 자각이 있다.바로 그것 때문에 정치적 상황의 변천이나 12지파의 이산에도 불구하고 이 명칭이 계속 살았으며, 종말적 이상이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대망되고, 또 국가로서의 존립을 상실한 후에도 유대인들은 자기를 이스라엘로서 자각하고 자랑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자각과 자랑은 제 1차, 제 2차 유대 전쟁(66 70, 132- 135) 후 유대인이 고국을 잃을망국민으로 된 다음에도 계속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19세기 이래 유대인의 팔레스틴이주로 나타나 마침내 1948년 5월의 이스라엘 공화국 건설로 결실하게 된 것이다. 한편,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교회야말로 역사적 이스라엘이 지고 온 여호와의 계약 백성의 전통적 전승을 계승하는 참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롬 9장,갈6:16).
(2) 역사
ⓧ 족장 시대(BC 2000- 1290):구약성경의 전승에 의하면, 이스라엘 민족의기원은 족장 아브라함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아브라함은 그의 부친 시대에 갈대아의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주하였다가, 부친의 사후 소명을 받고 가나안으로 이주, 거기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는 여호와의 약속을 받았다. 이것은 그후 이스라엘 민족과 그 역사의 주요 무대인 가나안 땅이 아브라함에게 유래하는 것을보이고 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이삭의 이야기, 야곱의 이야기, 요셉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이른바 족장 전설(창 12장-50장)은,그들이가나안에 있어서 반유목 생활을계속하면서, 최후에는 애굽으로 이주하기에 이른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근대의 고고학적 자료, 예를 들면 애굽 중왕국의 제문서(BC 20- 18세기), 바벨론 제 1왕조의 제문서(BC 19- 16세기), 갑바도기아(Cappadocia) 문서(BC 19세기), 마리(Mari) 문서(BC 18세기), 알랄락(Alalakh) 문서(BC 17, 15세기), 누수(Nuzu) 문서(BC 15세기), 라스 샴라(Ras Shamra) 문서(BC 15 13세기), 델 엘 아마르나 문서(Tell el Amarna Tablets, BC 14세기), 보아스교이(Boghazkoy) 문서(BC 14세기) 등은 족장 전설이 제공하는제전승의 시대적 배경, 명칭, 관습 등이 BC 20- 16세기의 서북 셈족의 그것과 여러모로 공통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을 엄밀한 의미에서는 재건하기 어렵지만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당시의 서북 셈족과 애굽의 동향과 비교 대조하면서 개요를 다음과 같이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즉, BC 3000년대 후반에 아리비아 반도에서 메소보다미아로 이주한 아모리 사람(`서방사람'이라는 뜻)은 BC 1800년 경까지 메소보다미아의 태반을 지배하에 두었다. 에스겔은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겔 16:3)라고 이스라엘의 인종적 혈통에 대하여 이렇게 단정하였다. 그런데 그 아모리 사람은 수리아를 거쳐 가나안으로 이동했으나, 그 중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나그와 가까운 관계에 있어 후에 아람 사람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있다(신 26:5). 당시 가나안에는 각지에서 이주해온 제족(諸族)의 정착에 의한 봉건 도시 국가가 성립하고 있었던 듯한데,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은 정착하지 않고 반유목 생활을 계속하여이동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의 마므레 성소, 이삭 전설은 브엘세바의 성소, 야곱의 전설은 벧엘˙세겜˙브니엘 등의 성소를 각각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주요 무대가 한정되어 있다. 이것은 가나안에 들어간 족장들이 이전부터 가나안에 존재한 여러 성소와 결부한 결과이며, 따라서 이 족장들의 전설에는 그 이전부터 성소에서 전승되어 온 전설도 족장의 이름 아래 받아들여져 있는 것으로 보이며, 족장들의 순서나 동향도 반드시그들의 역사적 순서나 동향을 충실히 전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애굽 사람, 그두라가 아라비아 지방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과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메소보다미아에서 맞은 것, 그리고 야곱이 한 때 메소보다미아에거주한 것 등은 족장 시대의 그들이 순일한 민족이 아니었으며, 제민족의 혼합이 계속된 것을 반영하고 있다.이와 같이 하여 후에 애굽에서 귀환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결성할 모태가 족장 시대에 가나안에서 서서히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언어는 가나안의 언어이며, 후의 히브리어는 그 지방어의 하나이다. BC 18세기에 이미 쇠퇴기에 있던 애굽에 힉소스(Hyksos, `외국의 수장'이란 뜻)라 불리우는 외국민이 수리아와 팔레스틴 지방에 침입하여 최초에는 델타 지대, 그리고 점차 애굽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수도 아바리스(Avaris)를 건설하고, 그 지배는 BC 1570년 경까지 계속되었다. 요셉 전설에 보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 애굽으로 이주한 사건은 이 힉소스의 애굽 침입의 일과, 혹은 적어도 동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힉소스는이스라엘 족장들과 같이 주로 서북 셈계에 속해 있으며, 요셉 전설이 전하는 요셉과그 동족에 대한 애굽 왕의 후대 이유를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때에 애굽으로 이주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전체가 아니고, 후의 요셉족을 중심으로 하는일부만이었다는 것, 특히 후에 북부 이스라엘을 차지했다고 하는 제족이 가나안에 잔류한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민족 조상들의 생활이 어떠하였는지는 성경의 근소한 기사를 통하여서만 알 수 있는데, 그들은 `고센 땅'이라고 하는 나일 강 델타의 동쪽에서(목초가 풍부한 땅인데, 주로 유목을 행하고 있었던 듯하다X창 47:11〉) 평화스럽고 풍요한생활을 하고 있었던 듯하며(출 1:1-7), 이와 같은 생활은 애굽 제 19왕조의 때까지계속된 듯하다. 또, `하비루'(Hapiru), `아비루'('Apiru), `하비루'(Habiru) 등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의 무리가 BC 20세기부터 BC 11세기에 걸쳐 서쪽 아시아 전역에 출몰한 것이 갑바도기아 문서, 마리 문서, 알랄락 문서, 누수 문서, 라스 샴라 문서, 아마르나 문서, 보아스교의 문서 등에 의해 알려져 있다. 그들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고, 기존 사회 기구 중에 정착하고 있지 않는 민족의 한 계급이며, 주로 반유목 생활을하고 있는데, 때로는 용병(傭兵)이 되거나 기술자로서 이용되거나, 노예로 되거나, 또는 평화를 교란하는 반도(叛徒)나 침입자로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히브리'라고 불리우고(창 14:13,39:14,출 2:6,기타) 있으므로 이것과 발음이 유사한 `아비루' 또는 `하비루'를 동일시하는 시도가 지금까지 행해져 왔다. 물론 전기 제문서에서 발견되는 장기간 서방 아시아 전역에 걸친 `하비루'의 활동을 그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그것으로 인정할 수는 없으나, 이스라엘 민족의조상, 즉 `히브리('ibri)'라 불리우고 있는 사람들의 계급에 속하는 것이었다고하는 것은 적어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전승은 다만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뿐만 아니라, 여호와 신앙의 기원도 족장 아브라함에게 돌리고 있다(창 12:1-3,출 3:6-8,6:2,기타). 그러나 이들 전승 자체도 인정하고 있듯이, 여호와의 이름 아래 예배가 행해지게 된 것은 모세 시대 이후이다. 족장 시대의 가나안 지방의 종교는 당시의 서방 셈족의 일반적 종교와 같이 자연의 번식을 주장하는 신들의 예배였다. 그 성소에서는 성석(聖石), 성수(聖樹) 등이 쓰이고, 동물 희생의 봉헌, 수확제 전모제(剪毛祭) 등이 주요한 제사 의식이었다. 그 주신(主神)의 이름은 엘(laE, 'al)이다. 이와같은 종교적 환경 속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서서히 그에 동화해 간 듯하다. 족장들이 예배한 신의 이름은 `엘 욜욘'(@/yl][, laE, 'el 'elyyon,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창 14:22), `엘 로이'(yairE laE, al ero'i `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13), `엘샤다이'(yD'v' laE, 'al sadday, `전능하신 하나님', 창 17:1), `엘 올람'(!l;/[ laE, 'al 'olam, `영생하시는 하나님', 창 21:33) 등처럼 `엘'이었다. 또, 족장들이 전기와 같은 제사 의식을 행하고 있던 것도 분명하다. 또, 족장들의 전설이 각기 주로 특정 성소와결부되어 있는 사실도 당시의 가나안 종교에서 신들이 특정 성소(성석, 성수, 산, 성읍 등을 포함)와 결부되어 있던 특색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가나안 사람의 엘 예배에 있어서 그 흥미가 주로 자연 번식력에 기울어지고 있었음에 반하여,족장들의 경우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통에 흥미가 돌려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방패'(창 15:1), `이삭의 경외하는 이'(창 31:42), `야곱의전능자'(창 49:24),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 등의 호칭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계시된 족장의 이름과 직결 결부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가족 혹은 부족의 수호신으로 되어 있었던 것을 말한다. 이 가족신, 부족신의 관습은당시의 셈 종교 전반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이스라엘의 족장들의 경우에는 그 신의계시가 항상 피계시자인 족장들의 역사적 운명에 관계되는 사건과 관련하여 되어지고있는 것에 특색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모세의 인도하에 출애굽이진행되고, 소위 이스라엘 민족이 성립, 여호와 예배가 시작되었을 때, 그 여호와야말로 다름 아닌 족장들의 신이었다는 신앙이 용이하게 성립될 수 있었을 것이다. ⓨ출애굽˙광야 시대(BC 1290- 1200 경):BC 18세기 이래 애굽을 지배해온 힉소스는 BC 1570년 경에 애굽에서 구축되고, 그 후 애굽인에 의한 제 18왕조가 성립되었다. 수리아에의 대 원정을 행한 투트모세 III세(Thutmose III, BC 1490- 1435 재위)는, 태양신아돈을 예배하는 유일신교를 수립하고, 자신도 `아그나돈'이라 칭한 아멘호뎁 Ⅳ세(Amenhotep Ⅳ, BC 1370- 1353 재위) 등을 포함하는 제 18왕조는 애굽 사상 최대의 번영기초를 쌓았다. 세티 I세(Seti I, BC 1308- 1290 재위)에 의해 제 19왕조가 시작되고, 수도는 데베(Thebes, 노아몬)에서 델타 동북부의 소안(Zoan)으로 천도되고, 국가의번영은 더 증대되었다.다음의 람세스 II세(Ramesses II, BC 1290- 1224 재위)는 당시의 강국이었던 소아시아의 힛타이트 제국과 팔레스틴의 지배권을 놓고 십 수년 동안 싸운 후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 후는 국내의 요새와 대건조물의 구축에 전념했다. 특히 그는 아바리스를 다시수도로 정하고 이를 재건, `비 람세스 메리 아멘'(아멘에 총애받는 람세스의 집)이라명명하였다. 또, 이 시대의 비문 등에, 이와 같은 건조에서 `하비루'가 노예로서 사역되었다는 것이 종종 기록되고 있다.다음 메르넵다(Merniptan, BC 1224- 1216 재위) 시대에 국운은 쇠퇴하고 서서히 무정부 상태로 빠지고, 제 19왕조는 그로서 끝났다. 메르넵다가 남긴 비문에는 그 치세의제 5년(BC 1220), 남부 팔레스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복종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어이것이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에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기록이다. 이스라엘의 애굽 탈출은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구약의 전승에 의하면 "요셉을알지 못하는 새 왕"이 애굽에 즉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박해하고 노예로서 강제노동을 시켰다고 말하고 있다(출 1:8-2:25,52). 이 `박해 왕'이 어느 애굽 왕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으나 그는 힉소스 왕조를 물리치고 들어선 제 18왕조(BC 1560- 1350)에 속하는 투트모세 I(Thutmose I)였다고 생각된다. 이 이스라엘의 애굽탈출은 모세의 지도하에 성공되었다. 그는 호렙 산(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동포를 노예의 땅에서 해방할 자로서의 소명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지 가지 곤란을 물리치고 이 과업을 수행하였다. 이 탈출에 대해 애굽측의 집요한 방해가 있었는데, 그것은 출애굽기 7- 14장의 기사에 반영되고 있다. 소위 `홍해도섭의 기적'(출 14장)의위치나내용에대해서도 여러 가지 이설이 있으나,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의 기반에서 집단적으로 탈출한다는 극히 어려운 일을 성공시켰음으로 하나님의 기적으로 이것이 가능했다고 그들이 믿은 것은 당연하다. 이스라엘 최고(最高)의 신앙 고백 중에 이미 이것이 언급되어 있음은(신 6:21-23,26:6-10,수 24:57) 출애굽에 있어서 여호와의 기적적 대능이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에 결정적 기반으로 된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모세의 인도하에 애굽을 탈출한 사람의 수는 "유아 외에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출 12:37)이었다. 70명이 400년 동안에 이렇게 증가한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이다.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은, 전에 모세가 여호와의 계시를 받은 시내 산(호렙 산)에 가서 거기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받고 여호와의 계약민(?約民)으로 되고(출 19장-20장),그후약40년 동안 가데스 광야에서 방랑 생활을 한 후, 에돔과 모압 땅을 통과하여 여리고 동쪽에서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침입했다고 구약성경은 전하고있다. 저간의 사정은 오늘날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것이 있기는 하나, 이 광야 시대에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예배하는 민족으로서의 자각과 조직의 중핵을 얻었다. 여호와 예배는 출애굽 사건과 그 다음에 오는 시내 계약에 기원한다고 할 수 있다. 출애굽사건과 시내 계약을 따로 떼어 생각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모세 오경의 율법이 모세에게서 유래됨은 물론이므로, 그 십계명이나 계약서(출 20:23-23:19) 등은 이 시대로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십계명 전문(前文, 출 20:2)이 가리키듯이, 출애굽 사건이야말로 그 후에 만들어진 모든 율법의 근거이며, 율법이 계약민인 이스라엘의 신앙과 생활규범의 근거인 것이다.`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뜻에 대해서도 제설이 있는데, 성경은 `스스로 있는 자'(출 3:14)로서 단순한 존재자가 아니고, 계약의 실행자로서의 인격적, 개인적, 계시적인 이름이다. 또, 모세가 여호와 예배를 안 것은 모세가 거기서 생활하면서 미디안제사장이던 장인 이드로에게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출 3장,18장).그러나그것은 단순히 미디안 사람의 신의 이입(移入)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알려져 있던 족장들의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을 해방하고 거기에 새 역사적 존재 의의를 주는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자기를 계시한 것으로 믿고(출 3:15,6:2-8),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족장 시대로부터의 종교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이 시대의 중요한 제사 의식은 궤(언약궤, 여호와의 궤, 민 10:35,36)와 회막(출 33:7-11)인데,다 같이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고 신의(神意)를 중개하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그 밖에 다른 셈족에게도 행해지고 있던 것처럼, 할례(출 4:24-26), 희생(출 18:12,24:5)은 당연히 행해지고 있던 것 같다.ⓩ가나안 정복 시대 및 사사 시대(BC 1200- 1020):BC 13세기 말의 애굽은 쇠퇴하고이미 팔레스틴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또, 북쪽에서 팔레스틴을 위협하고 있던 힛타이트 제국도 그 세력을 상실하고 있었으며, 메소보다미아의 여러 나라들도 상호간의 싸움에 바빠 지중해 방면으로의 진출을 꾀할 여유가 없었다. 이와 같은고대 동방 제국의 상황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정책을 용이하게한 한 요인이었다는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가나안 땅 자체에는 주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두 종족은 동일하지 않지만, 매우 닮은 셈족의 분파였다. 그들은농경을 주로 하고 있었는데, 각지에 성읍도 있어 문화적으로는 제법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들 사이에는 애굽으로 이주하지 않은 이스라엘 동족이나, 모세에 의한 출애굽 이전(예를 들면 힉소스 추방 때)에 가나안으로 돌아와 있던 동족들이 살고 있었던 것 같다.요단 동쪽에서 죽은 모세를 대신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인도된 이스라엘 백성은 BC13세기 말경 가나안에 침입하였다. 여호수아서에 의하면, 가나안 정복은 전 이스라엘백성의 일치한 무력행동에 의해 단기간에 완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수 21:43-).여호수아 24장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12지파를 세겜에 소집하여 여호와 신앙하에 계약을 세운 것을 기록하고 있다. 출애굽과 시내 산 계약의 경험과 전승을 가지지 않은이스라엘 제지파가 이에 참여하여 여호와의 이름에 의한 계약에 들어가 여호와를 예배하는 종교적 지파 연합을 형성한 것이다. 그것은 후에 전 이스라엘 통합에의 제일보였으며, 또 통합의 원리를 확립한 주요한 사건이었다. 이 정복 시대에 이스라엘을 지도한 것은 사사들이었다. 사사란 `재판하는 자'를 가리키지만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내어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우신 사람을 가리키므로 `구원자'란 뜻을 내포하는`심판자'라는 뜻이다. 사사들은 여호와의 영감을 받으므로 세워지는 이른바 카리스마(cavrisma, Charisma, 은사, 은혜)적 지도자이며, 단순히 성소에서 율법에 의거한 재판을 행할 뿐만 아니라, 위기에 직면했을 때의 군사적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사사기에는 도합 12명의 사사가 기록되어 꼬리를 잇는 이스라엘의 위기에 즈음하여 계속출현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그들의 활동 기간은 서로 중첩되어 있었던 것도 있을것이며, 또 한정된 지역의 것이었다고 보인다.사사기의 기술은 여호와 신앙에 선 저자의 명확한 역사관으로 일관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의 타락, 외적에 의한 압박, 사사에 의한 구출의 반복이다. 전체로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전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영웅 이야기, 민화, 제사 의식 전승 등이 소재로서 쓰여지고 있다. BC 12세기 초, 소아시아 지방에서 그레데섬을 거쳐 애굽에의 침입을 꾀하였던 해양 민족 블레셋 사람은 애굽에서는 격퇴를 당했지만, 지중해 동안의 팔레스틴 남부 해안 지대에 상륙하여 그것을 점령하였다. 그들은 곧 해안 지대에서 유다의 산악 지대까지 진출을 시작하였으나, 그들은 철제 병기를쓰고, 또 우수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개개 사사들의 지도에 의한 지파마다의저항이나 불완전한 이스라엘의 암픽티오니(Amphictyony, 종교 연합)의 조직으로는 이스라엘은 이미 그들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특히 BC 1050년 경 암픽티오니의 중심 성소였던 실로가 점령되고 여호와의 궤까지 빼앗긴 사건은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리하여 그것은 암픽티오니의 해체와 그것에 대신하는 왕국 형성의 계기로 되었던 것이다.가나안 정복 및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의 커다란 과도기였다. 즉, 광야의 유목 민족으로부터 팔레스틴 정주의 농경 민족으로, 지파 분립으로부터 지파 연합을 거쳐 통일 왕국에의 전기이다. 특히 그때까지의 유목생활로부터 농경생활에의 전기에서는 당연히 그 농경 기술과 생활 양식을 가나안의 선주민들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주민과의 혼교(混敎)나 이교(異敎)에의 추종도 상당히 행해지고 있었다(삿 3:5,6). 특히 당시의 가나안 종교에서는 가축 번식을 주장하는 비옥신(肥沃神) 바알과 아세라 여신, 아스다롯 여신 등을 예배했고, 옥지종교(沃地宗敎)의 통례로서성소 매춘이나 유아 희생 등이 행해지고 있었다.그러나 가나안은 메소보다미아나 베니게의 고도한 문화를 섭취하고 있었으므로 사막에서 온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것은 큰 매혹이었으며, 그들은 종교적, 윤리적인 위기에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 예배로 배교한자, 레갑 사람이나 나실인처럼 완강하게 가나안적 생활을 거부하고 광야 생활을 고수하는 자, 농경에 관해서는 바알, 싸움에 관해서는 여호와께 의지하는 자 등의 부류로갈렸으나, 전체로는 결국 제사 의식이나 생활 양식에 있어서는 바알 종교와 가나안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여호와가 바울이 가지는 비옥신적 기능까지도 흡수한다는 형식으로 이것을 극복해 나갔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시내 산 계약에서 암픽티오니로일관하여 계승된 노예의 땅에서의 해방과 약속의 땅의 부여라는 구출의 사건에 근저를두는 인격적, 역사적 종교로서의 여호와 종교의 특성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것이다. 가나안 각지의 성소는 서서히 가나안 사람에게서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계되고, 그에 수반하여 가나안 사람은 제사 의식이나 전승이 이스라엘의 것으로 되었다. 그중에서도 단(삿 18장),길갈(수4:19-),오브라(삿 6장),세겜(수24장),실로(삿21장,삼상1장-2장)등은 당시의 종교 사정을 반영하는 중요한 성소이다.당시의 이스라엘의 제사 의식 중에서 중요한 것은, 무교절, 초실절(初實節, 七七節),수장절(收藏節, 출 23:14-19)이다. 이것들은 본래 가나안의 농경제(農耕祭)였으나 출애굽의 역사와 관련하여 역사적 해석이 주어져 서서히 이스라엘 특유의 의미를 가지게되었다. 중앙 성소에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여호와의 궤가 안치되어 있었고, 전쟁 때에는 그것을 전장으로 모시고 나가는 일도 있었다(삼상 4장-7장).이시대에레위인은 기업을 가지지 않는 제사장 계급을 형성하고, 레위인과 제사장이 사실상 동의어로써 쓰이게 되었다.
①통일 왕국 시대(BC 1020- 922) - 애굽은 제 21왕조에 들어갔으나 여전히 약체여서 팔레스틴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앗수르도 디글랏 빌레셀 I세 이후는 쇠운해져 팔레스틴 방면에 압력을 가할만한 세력은 없었다. 이것이 이 시대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왕국 건설, 영토 확장,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위한 호조건으로 되었다. 이스라엘은 근린 제족, 예를 들면 수리아, 암몬, 모압 등이 이미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스라엘만이 아직 종교적 지파 연합의 형식을 지속하고 있었던 것은, 모세 이래의 신정 정치의 이념이 사사 시대에도 아직 강하게 지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삿 8:22,23).그러나 그 암픽티오니의 중심 성소인 실로가 블레셋 사람에게 점령되고, 또 암몬이나모압의 내습도 경험하기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을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의 사사에대신하는 강력한 통일적 조직적 지도자, 즉 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사사들의 최후계보를 잇고, 당시의 암픽티오니의 지도자였던 사무엘은 백성의 강한 요구에 눌리어베냐민족의 청년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여기에 이스라엘 초대 왕이 세워졌다(BC 1020, 삼상 10:1). 사울 왕은 각지에서 블레셋 사람과 싸웠지만, 왕으로서 정치적으로, 이를테면 세속적인 작전 용병을 하는 사울과, 여호와의 성전(聖戰) 원리를관철하려는 사무엘과의 사이에는 점차 반목이 생기게 되었다(삼상 15장).특히유다족출신인 다윗이 백성에게 그의 재능을 인정받고 사무엘의 지지를 받게 된 다음부터는사울의 비운이 계속되어 나중에는 블레셋 싸움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삼상 31:1-6).다윗은 사울 왕 재세시는 질투 때문에 블레셋 땅에 도망가 몰래 자기 출신지 유다를위해 진력하고 있었다(삼상 30:26,기타). 그래서 사울 왕의 사후 헤브론에서 유다 왕에 천거되고(BC 1000, 삼하 2:1-4), 또 7년 후에는 북부 제족에게도 재능을 인정받아이스라엘 전토의 왕으로 추대되었다(BC 994, 삼하 5:1-5). 그리고 요셉족을 중심하는북부 제족과 유다족을 중심으로 하는 남부 제족과는 다윗 왕을 중심으로 결합하여 통일 왕국이 완성된 것이다. 다윗은 우선 여부스인이 점령하고 있던 산성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를 수도로 정하였다(삼하 5:6-10). 예루살렘은 남북의 대략 중간에 위치하여 남북 어느 쪽의 지배에도 속하지 않은 성읍인만큼, 남북 제종족의 대립 감정을 완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자연적 조건도 전략적으로 이상적인 수도였다. 이 수도 결정은 다윗이 이룬 사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며, 또한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보여주고 있다(→예루살렘). 또, 다윗은 블레셋을 완전히 제압했을 뿐만 아니라 에돔, 모압, 암몬, 수리아 등 근린 제국들도 침략하여 이스라엘 사상 최대의 영토와 다수의 국민을 가지는 왕국으로 되었다(삼하 24:1-9). 그는 또 여호와의궤를 에루살렘으로 모셔다가 이 곳을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으로 하고, 제사장 제도, 제사 의식, 관제(官制), 징병 제도 등을 정하는 등 왕국을 착착 정비하였다. 이와같은 다윗의 수완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은 그에게서 여러 가지 이상상(理想像)을 보고신명기적 사가는 완전한 왕의 형, 열왕기 편자는 여호와의 종, 역대지 사가는 제사 의식의 조상, 시편 기자는 많은 시, 기도의 작자, 예언자는 메시야의 예표 또는 메시야자체로서 다윗을 묘사하고 있다(→다윗). 그러나 다윗 치세의 만년에는 그의 셋째아들 압살롬의 반란(삼하 13장-19장)과베냐민사람 세바의 반란(삼하 20장)이일어났다.이것은 다윗 왕의 밑에서 통일을 유지하고 있던 남북 양 부족들 사이에 아직도대립감정이 상실되고 있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은 솔로몬 왕 치세하에서더 한층 격화하여 솔로몬 사후의 남북 왕국 분열의 원인(園因)으로 된다.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형 아도니야와 왕위를 다투었으나, 다윗의 총애를 받고 형에 이겨 다윗의 사후 BC 961년에 즉위했다(왕상 1장-2장).솔로몬왕의치세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소위 `솔로몬의 영화'라 불리우는 경제적 발전과 예루살렘 성전의 건립이다.당시 해상 무역에 의하여 번영하고 있던 베니게를 본받아 솔로몬은 국내를 통과하는대상으로부터 통행세를 징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육로와 에스온 게벨 등의 해항을 기지로 하는 해로를 이용하여 애굽, 아라비아, 지중해 연안 각지와의 교역을 시작했다. 또, 에스온 게벨에는 동제련소를 가지고 각지에 성채를 구축하고, 말과 병거를갖추고, 특히 므깃도의 외양간은 적어도 군마 400마리를 수용하는 것이었다고 한다.그러나 그가 남긴 최대의 사업은 예루살렘 성전의 건립이었다. 이것은 BC 958년 기공되어 20년의 세월과 막대한 자재와 노력을 소비하여 완성되었지만, 그 건축 양식과 기술은 주로 베니게에서 도입되었다(왕상 5장-8장).그러나이와같은 솔로몬 치세하에서의 영화가 구축되기 위해서는 징병 제도, 징세 제도, 강제노동 등이 부과되었음으로자연 국민의 불만이 증대되어 갔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은 후에는 민족 전체의 성전으로 되었지만, 본래는 다윗 왕가의 예배당에 불과하였던 것이며, 전부터 저류(底流)하고 있던 북부 10지파의 대 유다 감정은 훨씬 악화되었다.이미 솔로몬의 재세 중 수리아, 에돔의 반란에 더하여 예언자의 지원에 의한 에브라임사람 여로보암이 반란이 있어(왕상 11장)한때는진압되었지만, 솔로몬의 사후 여로보암은 북부 10지파를 거느리고 북왕국을 세워 최초의 왕이 되었으므로 통일 왕국은남북 양 왕국으로 분열된 것이다(BC 922). 통일 왕국의 성립에 즈음하여 사무엘은 사울 왕의 임직과 병행하여 예언자를 양성하여 예언자 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사무엘은 왕제(王制)의 성립과 더불어 정치가 세속적인 정치적 자율성에 의해 흘러갈 것을예견하고 이것을 신앙적 입장에서 비판하는 세력으로서 예언자를 양성한 것이었다. 이것은 금후 역사를 일관하여 이스라엘 예언자의 현저한 특색으로 된 것이다. 사울이 블레셋을 비롯한 제국과의 싸움에 있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면서 끝내 왕국 건설에 대성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이 예언자단의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했던 점에 있다. 이에 반해다윗은 예언자단의 지지를 얻는데 있어서도 현명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암픽티오니(宗敎連合, Amphictyony)에 의해 전해 내려온 여호와 신앙은, 다윗˙솔로몬치하의 정치적 안정에 의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안정을 가져왔다. 이 정치적, 종교적 안정이 지호비스트(Jehovist)의 문학 활동을 낳고, 그 이전의 수다한 구전이 일관한 역사관하에 편집되어 이스라엘의 택한 사람은 축복의 성취라는 구원사적(救援史的) 테두리 안에서 천지 창조로부터 왕국 건설까지의 이야기가 처음으로 국민적 종교문학으로서 형성된 것이다. 거기서는 국토의 확장과 제외국과의 교류를 반영하고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전인류, 제민족의 기원에 관한 신화와 전설이 흡수되어 있는데, 이미 이것을 여호와 신앙 아래 기술하는 유일신적 입장이 분명히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안정은 동시에 광야 시대의 모세적 전통을 잃게 하는 위험도 내포하고 있었다.즉, 예를 들면 예루살렘 성전의 양식, 성구(聖具)에 채용된 베니게의 태양신 예배를반영한 우주적 상징주의는 그 하나의 표현이다(왕상 7장).또,솔로몬왕의이방 왕가와의 정략 결혼은 필연적으로 이교의 유입을 초래했고, 예언자단의 반발을 사 왕국 분열의 한 요인으로도 되었던 것이다(왕상 11:1-13).
②남북 분립 왕국 시대(BC 922-721):앗수르는 BC 859년, 살만에셀 III세(BC 859-824재위)가 즉위하자 서방 진출을 시작했으나, 팔레스틴 지방의 여러 소국들은 단 한 번수리아와 연합하여 갈골(Karkor)에서 앗수르의 침공을 요격한(BC 853) 외에는 아무런유효한 대항책을 갖지 못하고 헛되이 작은 나라 끼리의 분쟁을 계속했다. 이것이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III세(BC 745- 727)의 침공을 유발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끝내는그들 전체를 파멸로 이끌어 간 것이 되었다. 애굽은 제 22왕조 리비아 왕 시삭이 BC918년 경 유다를 침입한(왕상 14:25,26) 외는 이스라엘과 유다와의 직접적인 관계는과히 없었다.솔로몬의 사후, 그 아들 르호보암(BC 922- 915 재위)은 예루살렘에서 즉위하고 세겜에서 북부 제부족의 승인을 구했으나, 북부 제부족은 이를 거부하고 에브라임 출신인 여로보암(BC 922- 901 재위)을 그들의 왕으로 옹립하였다(왕상 12:1-24). 이리하여 왕국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완전히 분열하였다. 이 시대의 남북 양국의 개황을 보면, 북왕국에는 비옥하고 평지가 많아 농경이 발달하고, 또 인접국 베니게의고도한 문화를 받아 들이기 쉬웠으므로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남왕국보다도 우위에 서있었다. 그러나 수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그 배후에는 강대한 앗수르가 있었기 때문에항상 북방으로부터의 침략 위협을 받고 있었다. 또, 이것은 외국과의 정치 동맹을 맺는데도, 외국의 침략을 받는데도 끊임없이 이교화(異敎化)의 위기를 내포하고 있었던것을 의미하고, 엘리야, 엘리사, 미가야 등 뛰어난 예언자의 활동이 북왕국에서 보다일찍 발견되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 그 왕에 대한 관념은 세습화된 다윗 왕조에 대한 반발도 있고 해서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구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러므로 혁명에 의한 왕조 교대가 꼬리를 이어 200년간에 9왕조 19명의 왕이 세워졌다.이에 반하여 남왕국 유다는 산악 지대나광야가 많고,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불리하였지만, 북왕국의 존재로 북쪽으로부터 보호되고, 남부 광야 지대에는 유목 민족인 나실인, 레갑인 등이 거주하여 남방으로부터의 영향을 덜어주고, 고전적인 여호와 종교의 전통이 쉽게 지켜졌다고 할 수 있다. 또, 뭐라고 해도 여호와의 궤가 놓여진 예루살렘 성전을 종교적 중심으로 보유하고 있었고, 더구나 그 수도 예루살렘이 천연적인 요새로서 외적의 침공에 대하여 완강하였던것도 유리한 조건이었다.
또한 왕조도 아달랴를 제외하면 다윗가에 의해 왕조가 지켜져서 안정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북왕국보다 다른 점이 남왕국을 북왕국보다 약 135년더존속하는원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분열 후, 북왕국의 여로보암과 세겜을수도로 정하고, 종교적으로도 예루살렘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단과 벧엘에 성소를설치하여 금송아지를 두고, 새 제사장과 제사 의식 제도를 정하였다(왕상 12:25-33).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그를 지지한 예언자들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왕상 13:1-14:20).분열 후, 남북 양국은 끊임없이 싸웠다(왕상 14:30). 초기에는 남왕국이 우세하였으나BC 918년 경 애굽이 예루살렘을 공략 약탈한 후는 북왕국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 후북왕국의 바아사(BC 900- 877 재위)는 남왕국을 압박하였으나, 남왕국의 아사(BC 913-873 재위)와 수리아의 동맹에 의한 반격을 부르고(왕상 15:16-24) 북왕국은 그 후곤경에 빠져 BC 876년 오므리가 즉위하기까지 내정적으로도 혼란이 계속되었다. 오므리 왕(BC 876- 869 재위)은 뛰어난 군사적 솜씨를 발휘하여 형세를 만회하여 모압도정복하였다. 그는 전에 다윗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전례에 따라 산상의 성읍 사마리아를 새로 구축하고 여기로 천도하였을(왕상 16:24) 뿐만 아니라, 베니게와 동맹하여남왕국과 북왕국의 세력에 대항하였다. 앗수르의 비문이 북왕국으르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그의 업적이 큰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BC869-850)도 뛰어난 정치가였으며, 앗수르의 살만에셀 II세(BC 859-824 재위)의 침공에 대하여 수리아를 비롯하여 인근 제국과 동맹을 결성하여 BC 853년 갈골에서 이를격퇴하였다(살만에셀의 비문). 그러나 오므리는 베니게와의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아합의 왕비로서 베니게에서 이세벨을 맞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북왕국에 베니게의 바알 예배가 수입되어 엘리야, 엘리사를 비롯한 예언자군의 대반항을 야기시키고, 나아가 복고주의를 주창하는 레갑인의 분노를 샀고, 이를 이용한 예후에 의해 왕조는 쓰러지게 되었다. 아합과 이세벨은 역대 왕조 중에서 최악의 오명을 남겼다(왕상 17장-왕하10장).
엘리야,엘리사에 관해서는 열왕기에 그들의 위대함이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다. 엘리사는 다메섹에 혁명을 일으켜 하사엘을 왕위에 앉히고(왕하 8:7-15), 엘리사는 북왕국에서 예후를 지원하여 혁명을 일으키고 그를 왕위에 앉혔다(왕하 9:1-13). 특히 엘리야는 바알 예배와 대결하여 여호와 예배를 고수하였다(왕하 18장).또,자연을매개로 하지 않은 여호와의 현현(顯現)을 체험한 것(왕상 19장),`남은자'의사상을 발현한 것(왕상 19:18), 여호와의 역사 지배를 강하게 정치 속에 실현하려고 한 것(왕상19:15,16), 대중의 이익을 옹호한 것(왕상 21장)등이스라엘예언자의 현상상(現像想)을 만들어 놓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도, 예수의 시대에도, 위기에 처하였을 때는 항상 엘리야의 재림이 대망될 정도가 되었다(말 4:5,마 11:14,16:14,17:3,27:47). 인엘리야.남왕국에서는 요사밧 치하(BC 873 849)의 일시적인 번영 후 에돔, 립나를 잃는 등 쇠운으로 기울어졌으나, 아하시야(BC 842) 때 북왕국의 혁명에 말려들어 정변이 일어났다. 즉, 북왕국의 연후(BC 842- 815 재위)는 요람 왕과 그의 모친 이세벨을 죽이고 북왕국 제 5왕조를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남왕국의 아하시야 왕도 죽였다(왕하 9:14-10:36). 이때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는 다윗 왕가의 피를 받은 아하시야의 아들을 전부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다(BC 842- 837 재위). 그러나 6년 후 아하시야의 살아남은 단 하나의 아들 요아스(BC 837-800 재위)가 아달랴로부터 왕위를 탈환하여 다윗왕조를 회복하였다(왕하 11장).북왕국의예후,남왕국의 요아스는 각기 바알의 숙청을 단행하여 성공을 거두었다(왕하 10:18-28,11:18). 이 후도 남북 양 왕국은 상쟁을 그치지 않고, 또 북왕국은 수리아의 위협에 영일이 없었고, 한 때는 앗수르에 조공한 적도 있었다(BC 841, 앗수르의 기록). 이리하여 양 왕국이 다 같이 상호의 싸움과외적의 침략에 의해 쇠퇴하여 갔다(왕하 12장-14장).북왕국에여로보암 II세(BC 786- 746 재위), 남왕국에 웃시야(BC 783- 742 재위)가 즉위하자 그 때 앗수르가 일시 쇠퇴하여 수리아도 앗수르에서 받은 타격에 의해 쇠퇴한일도 있고 해서 남북 양 왕국이 다 같이 약 40년동안평화와번영의시기를 맞았다.북왕국은 영토를 확장하고(왕하 14:25) 크게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나 다른 한편 종교적 퇴폐와 사회 도덕의 저하를 초래하여 예언자 아모스, 호세아의 준엄한 비판을 받지않으면 안되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거의 동시대에 예언 활동을 했지만, 그 예언은사람들 사이에 전승된 다음 각각 예언집이 문서화되어 이스라엘 최초의 기술 예언자로되었다(아모스서, 호세아서). 그들은 시내 계약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의책임을 준엄하게 묻고, 여호와에 대한 불진실과 사회적 불의를 책망하였다. 북왕국에서는 벧엘과 단의 성소를 중심하고 그 밖에 지방 성소에서도 제사 의식이 행해지고 있었는데, 신전 창기가 두어지는 등 바알 종교의 영향이 컸다(호 4:11-14,암 2:7). 한편 남왕국도 거의 같은 무렵 웃시야 왕 치세에 국력이 충실하여 국내는 잘 정비되었다(왕하 15:1-7,대하 26장).여로보암Ⅰ세치세하의 번영은 영속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내외의 위기를 맞아 멸망일로를 더듬었다. 즉, 앗수르는 디글랏 빌레셀 III세(BC 745-727 재위)의 즉위로 급속히 세력을 회복하여 서방으로의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북왕국 내에서는 친앗수르파와 반앗수르파가 대립하여 친앗수르의 스가랴(BC 746- 745 재위)는 재위 6개월만에반앗수르의 살룸에게 피살되고, 살룸은 재위 1개월만에 친앗수르의 므나헴이 대신하였다. 므나헴(BC 745- 738 재위)과 그의 아들 브가히야(BC 738-737) 시대에는 앗수르에게 조공하여 예속했지만, BC 737년, 디글랏 빌레셀이 서진(西進)을 시작하자 수리아(다메섹) 왕 르신은 팔레스틴 제국에 반앗수르 동맹 결성을 호소, 북왕국의 반앗수르파는 이에 호응하여 브가야를 암살하고 베가(BC 737-732 재위)를 왕위에 앉혔다. 베가는 수리아와 동맹하여 그 당시의 남왕국 아하스 왕(BC 735-715 재위)에게도 이 반앗수르 동맹에의 참가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아하스는 예언자 이사야의 지시에 따라 참가를 거부하였다. 이래서 수리아와 북왕국의 동맹군은 남왕국으로 침입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지만, 점령하지 못하였다(BC 734, 왕하 16:5,사 7:1-9). 이 싸움을 `수리아˙에브라임(북왕국)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하스는 동맹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이사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앗수르에게 조공하여 보호를 구했다(왕하 16:7,8).이 때 이사야의 유명한 `임마누엘 예언'이 있었다(사 7:10-17). 디글랏 빌레셀 Ⅱ세는 즉시 수리아의 수도 다메섹을 공략하고 BC 732년 수리아는 멸망했다(왕하 16:9).북왕국에서는 반앗수르파는 실각하고 친앗수르의 호세아(BC 732- 724 재위)가 베가를죽이고 왕이 되었지만, 사실상 앗수르의 속령에 불과하였다. 남왕국도 동맹군으로부터는 피하였으나 앗수르의 위성국으로 되고, 앗수르에 충성을 맹세하기 위하여 앗수르의종교를 국교로 하는 형편이었다(왕하 16:10-18).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근심하면서 예언한 사태가 차례차례 이루어져 갔던 것이다. 앗수르에 있어서 디글랏 빌레셀 III세를 대신하여 살만에셀 v세(BC 727- 705 재위)가 왕이 되니 북왕국은 애굽에 통첩하여(왕하 17:4) 앗수르에게 반기를 들었다. 살만에셀 v세는 즉시 내공하여 BC 724년호세아 왕을 사로잡고, BC 721년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살만에셀Ⅳ세는 포위 중에 죽었으나 즉시 사르곤 II세(BC 722-705 재위)가 즉위하고 북왕국사람들은 포로민으로서 앗수르로 이송하였으나 후에 사방으로 흩어져 소위 `상실된 10지파'로 되어버렸다. 북이스라엘 지방에는 앗수르의 지배하에 들어간 다른 각지로부터의 백성이 이주하고, 앗수르의 한 주로 되어 사마리아 주재의 지사의 지배하는 바가되었으나, 이것이 에스라˙느헤미야 시대 이후의 소위 사마리아인 문제의 한 요인으로된다(왕하 17장).한편,남왕국은앗수르에 대한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앗수르의 위성국으로서독립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 동안, BC 8세기 중엽, 북왕국에서 북부의 지파와 그 성소에서 전승된 제전승이 엘로히스트(Elohist)에 의해 편집되어 종교적 역사 문학이 성립하였다.
이 자료는 북왕국의 멸망에 즈음하여 남왕국에 전해져 (Jehovist)의 자료와 합쳐서 하나로 편집되게 되었다.유다 왕국 단립 시대(單立時代, BC 721- 587):아하스 다음의 히스기야 왕(BC 715-687 재위)은 종교 개혁을 단행하여 아하스 시대에 수입된 앗수르의 우상 예배를 일소하였다(왕하 18:1-6). 히스기야는 항상 반앗수르적이었으나, BC 720년과 721년 애굽의 지원을 믿고 한 근린 제국 연합의 대앗수르 반란에는 참가하지 않고, 다른 나라가앗수르에게 대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이를 모면하였다. 이 히스기야의 행동은 이사야의 저지에 의한 것이 분명하다(사 20장,30장-31장).그러나 BC 705년 사르곤 II세의 죽음을 계기로 앗수르에 내란이 일어나자, 이 틈을 타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주창하는 근린 제국의 반앗수르 동맹이 결성되었을 때에 히스기야는 이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앗수르의 새 왕 산헤립(BC 705- 681 재위)에게 격파되어 유다는 많은 성읍을 상실하고 거액의 배상금이 부과되었다(왕하 18:13-16). 또, BC 701년에는수리아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으나 진중(陳中)에 역병이 일어났는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산헤립은 포위를 풀고 귀국하였기 때문에 함락을 모면하였다(왕하 18:17-19:36). 이 때도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예루살렘의 불락(不落)을 예언하였다(사 14:24-27,17:12-14). 이 예언이 성취되어 예루살렘이 수호되었다는 것은 후에 성도 예루살렘은 절대로 패하는 일이 없다는 신앙을 낳게 하였다.히스기야 다음의 므낫세(BC 687- 642 재위), 아몬(BC 642- 640 재위) 두 왕은 앗수르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친앗수르 정책을 취하여 예언자를 배척하고 히스기야에게 숙청되었던 우상 예배를 부활시켰다(왕하 21:1-26). 요시아 왕(BC 640- 609 재위)이 즉위하자 서서히 예언자가 세력을 회복하였지만 BC 626년 경 소아시아 지방에서 남하한 스구디아인의 위협이 그 한 계기가 되었다. 이 새로운 위기를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심판의 경고로 보고 종교적 각성을 외쳤던 것이다(습 1:14-18,렘 1:1-2,13-19,4장6장). 스구디아인의 유다 침입은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요시아 왕은 예루살렘 성전 수리시에 발견된 율법책에 의거하여 제사장, 예언자, 서기관들의 지원하에 대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책이 현재의 신명기의 중행으로 되어 있는 신명기 법전이기 때문에`신명기 개혁'이라고도 부른다(왕하 22:1-23:25).이 신명기 개혁의 이념은, 이스라엘이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약속의 땅에서 축복을다하기 위해 옥토적(沃土的)인 유혹을 물리치고 모세의 종교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이리하여 유일한 여호와의 배타적 충성, 유일한 예배소 예루살렘, 우상 금지의 삼대원리하에 제방책이 세워지고 있다. 즉, 지방 성소를 폐지하고, 제사 의식을 정리하여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의 삼대 절기로 하고, 희생을 규정하고, 성소 중심으로 과잉하게 된 제사장을 도태하고 제사 의식 보조자로서의 레위인 계급을 성립시켰다. 이 방책들이 어느 정도 엄밀하게 실현 되었는지 분명치 않으나, 이 신명기의 이념에 따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해석하려는 역사관은 오히려 바벨론 포로기의 역사 편집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초래하였다. 요시아 왕의 개혁 의도에는 종교적인 것과 동시에, 앗수르가이미 몰락기에 있는 이 기회에 국내로부터 일체의 앗수르적 영향을 제거하려는 정치적인 것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애굽의 군사와 싸우다가 전사하여 뜻이 좌절되고 말았다(왕하 23:29,렘 22:19). 애굽군은 이 때 앗수르를 원조하기 위해 북상했으나 나보볼랏사르(Nabopolassar, BC 626 605 재위) 왕 밑에서 이미 앗수르의 수도니느웨를 점령하여 기고만장한 신흥 바벨론군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패주하였다. 애굽군은 그 도중, 즉위한 지 겨우 3개월 밖에 안되는 요시아의 아들 아하스를 연행하고,대신에 그의 형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시키고 왕위에 앉혔다(왕하 23:32-37).BC 605년에는 느부갓네살(BC 605- 562 재위)이 거느리는 바벨론군이 애굽군을 갈그미스에서 결정적으로 격파하여 애굽은 팔레스틴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다. 유다 왕여호야김(BC 609- 598 재위)은 3년간 바벨론에게 조공했지만, 그 후 반대 의사를 보였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BC 598년, 여호야김의 급사로 인해 왕위에 오른 여호야긴(BC 598- 597 재위)은 항복하고 왕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민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다(왕하 24:1-16,렘 52:28). 이것이 제 1회 바벨론 포로이다. 이제 1회 포로 안에 예언자 에스겔이 포함되어 있었다(겔 1:1).앗수르 군의 이스라엘 침공의 모습X니느웨에서 발굴〉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숙부맛다냐를 `시드기야'(BC 597- 187 재위)로 개명시켜 유다 왕에 앉혔으나, 시드기야는예레미야 선지자의 저지를 듣지 않고 애굽과 공모하여 바벨론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느부갓네살은 다시 내공하여 예루살렘은 2년 동안의 포위 후, 드디어 BC 587년에함락, 성전을 비롯하여 시내는 철저히 파괴되고, 시드기야 왕도 사로잡히고, 남아 있던 시민 중 요인은 모두 바벨론으로 끌려갔다(왕하 25:121,렘 52:29). 이것이 제2회 바벨론 포로이며, 이로 인해 유다 왕국은 사실상 멸망하였던 것이다.그 후 유다는 유다인 그다랴가 총독에 임명되어 잔류민을 통치하고 있었으나, 이스마엘에게 암살되고 유다인들은 느부갓네살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도망갔다. 이때 예레미야 선지자도 애굽으로 연행되어 갔다(렘 40장-43장).느부갓네살은 BC 583년, 제 3차 유다 백성을 포로로 바벨론으로 옮기고(렘 52:30) 유다는 바벨론이 임명하는 사마리아 총독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것도 역시 포로 후에 유다인과 사마리아의대립 원인이 되었다. 유다 멸망의 위기에 즈음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나냐로 대표되는(거짓 선지자) 도그마적 선민관에 선 낙관론과 대결하여(렘 28장)자유로운절대자로서의 여호와 신앙에 서서 예루살렘의 심판을 계속 예언, 바벨론에게 항복할 것을역설했으나, 유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그의 말에 따르지 않고 멸망의 길로 간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 망국의 비운 속에서 이미 새 계약하에 회복될 날을 예언하였으며,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신앙은 아직 계승되어 가고 있었다(렘 30장-31장).
④바벨론포로 시대(BC 587- 538) - 바벨론으로 이송된 유다의 포로민은 세 차례의 포로를 합쳐서 4,600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렘 52:30). 이것은 성인 남자 뿐이기 때문에 총계 15,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BC 8세기 말의 유다 인구가 25만 명으로 추정함에 비하면, 포로민의 수는 결코 많은 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포로로 옮겨진 사람들은지배 계급에 속하는 자나 기술자들로서 유다의 중핵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나라가 망한 유다에도 상당히 많은 잔류 유다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이미 그들 중에는 소망이없고, 여호와 예배도 행해지고 있지 않은 듯하며, 그것은 현저히 이교화하였던 것 같다(겔 33:24-29,사 57:3-13,65:1-5,11). 따라서 이스라엘의 전통을 이어야 할자들은 역시 소수이긴 하나 바벨론에 있는 포로민들이었다. 그들의 바벨론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자유였으며, 곳곳에 그들 자신의 공동체를 가지고 종교적 자유도 허용되어있었다. 성전과 그 제사 의식을 잃었기 때문에 축제 대신에 안식일 예배가 중심이 되었고, 회당에서의 율법의 낭독과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예배 양식이 시작되었다. 뭐라고 해도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 성도 예루살렘에 대한 강렬한 망향의 생각에 사로잡혀, 왜 여호와의 선민이 이방인 밑에서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는회의가 생겨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과 그 신앙은 일대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 때에스겔은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에 구원 회복의 근거를 찾아내고(겔 36:16-24) 새 이스라엘에의 갱생을 예언했다(겔 37장).또,세계적인배경하에 보편적인 유일신관을확립하고 선민 이스라엘의 운명을 세계 구원의 그릇으로서 대상적 고난을 짊어지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파악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의 소망을 예언하였던 것이다.바벨론은 느부갓네살의 사후 서서히 쇠퇴하는 한편, 바사의 고레스는 BC 549년에 메대와 이어서 루디아(Lydia)를 정복하고 BC 539년에는 바벨론까지 압박했다. 바벨론 최후의 왕 나보니도스(BC 556- 539 재위)는 고레스의 군대를 요격했으나 패하고 고레스는바벨론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후 BC 538년까지 고레스 왕(BC 539- 530 재위) 밑에서의바사가 애굽 국경에 이르기까지의 서부 아시아 전역의 지배자로 되었다. 그러나 고레스는 잔인한 앗수르인에게 비해 놀라우리만큼 관대하여 각지에서 사로잡혀 온 포로민을 해방하여 각각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BC 538). 물론 그 중에는 유다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벨론 포로 기간은 길지는 않았지만, 이 이국에서의 고난의경험, 바벨론 문화와의 접촉은 금후의 이스라엘 민족과 그 종교에 결정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또, 유다 멸망에 즈음하여 일부 유다인은 애굽에 망명했으나(렘 42장-),그들의자손은거기 정주하고, 헬라 시대의 애굽은 유다인 세계의 중심으로까지 되었다.
또, 엘레판티네 파피리(Elephantine papyri)가 보여주듯이, BC 5세기에는 나일 강 상류의 엘레판티네에 유다인의 신민지가 있었다. 이 밖에 근린 제국에 도망하여 점차 제국민 사이에 흩어져 간 유다인도 상당수 있었다고 추측된다. 후년의 유다인 디아스포라(Diaspora, 외국으로 사로잡혀가 이산된 유다인)의 원형은 이미 이 때에 시작된 것이다.
⑤바사 속령 시대(BC 538- 331) - BC 538년의 고레스 왕의 귀환 허가령에 따라 다윗 왕국에 속하는 스룹바벨을 정치적지도자, 사독계 제사장 여호수아를 종교적 지도자로 하는 소수 유다인이 예루살렘으로귀환했다. 그 수는 42,360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스 2:64), 당초는 더 적었을 것이다. 그들은 즉시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려(스 3:1-6) 성전 재건의 기초를 놓았으나, 유다 지방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마리아 총독과 사마리아 상류 계급 사람들의 간섭을 받아 실제로는 착공하지 못하였다(스 4:1-6). 또, 유다에 남아 있던 유다인들도귀환민을 기꺼이 맞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귀환민은 환멸 중에 세월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BC 522년 바사 왕 캄비세스(Cambyses, BC 530- 522 재위)의 죽음으로 바사 국내가 동요했을 때 유다 사람들은 바사에서의 독립과 다윗 왕조 재흥의 희망을 품고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격려로 BC 520년 성전 재건에 착공하여 사마리아의 재차 간섭이 있었지만, 정부의 허가가 있었기 때문에 BC 516년에 완공하였다(스 5장-6장).이성전재건은 동시에 하나의 메시야 운동이기도 하며, 학개와 스가랴는 스룹바벨을 `메시야'라고선언하고(학 2:20-23,슥 4장),성전완공과동시에 스룹바벨의 대관식을 계획하였던모양이다(슥 6:11의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본래 `스룹바벨'이었던것이 운동 실패 후에 고쳐 쓴 것 같다고 말하는 학자가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이 곧탄압되었든가, 아니면 스룹바벨이 바사로 소환되어 갔든가 하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이 메시야 운동이 실패한 후의 유다에는 깊은 회의적 기분이 남게 되었다. 50여 년의공백을 거친 유다에서의 생활은 곤란이 많았고, 귀환 후의 영광을 꿈꾸고 있던 민중은강한 환멸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말라기서는 이와 같은 민중의 상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 또, 포로 기간 중 유다에 침입하여 이득을 얻고 그 후로도 사사건건 압력을 가하는 사마리아, 에돔, 암몬, 아스돗 등 제외국에 대한 증오는 격화하여 강한 민족주의, 배외주의(排外主義)를 낳고, 오바댜와 같은 예언이 행해졌을 뿐만 아니라 많은 기존 예언서에도 반외국 예언이 부가되거나 에스더서와 같은 문학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생활고 때문에 사마리아인 등 이방인과의 잡혼에 의해물질적인 원조를 얻으려고 하는 자도 있었던 듯하다(느 10:30,13:3,23). BC 5세기후반 이래 느헤미야와 에스라에 의한 예루살렘의 부흥과 종교 개혁이 행하여져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교에 하나의 전기를 가져왔다. 이 동안의 역사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사료적(史料的) 결함 때문애 명확히 하기란 곤란하다. 그러나 대략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즉, 유다인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세(BC 465- 424 재위)의 호의로 BC 445년 바사정부 임명의 지사로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각종 방해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에 성벽을 중수하여 도시를 정비하였다(느 2-7장).12년간예루살렘에 체재한 후 한 때 바사로 돌아왔으나, BC 433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숙청하고, 안식일을 엄수시키고, 이방인과의 잡혼을 금지시키는 등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때 대제사장엘리아십의 한 손자는 사마리아 총독의 딸과 결혼하였으므로 추방되었으나(느 13:28), 그는 모세 오경을 가지고 가 산발랏과 협동하여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워 예루살렘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전부터의 사마리아와 유다의대립 관계는 결정적으로 되고, 금후도 오래 지속하게 되었다.한편,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Ⅰ세(BC 404- 358)의 치하, 그러니까 BC 398년에 귀환민을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스 7:110) 포로되었던 땅에서 가지고 돌아온 모세의 율법서를 공포하고, 민중은 이것을 재건 유다인 종교 공동체의 헌장으로서 수락할 것을서약하고, 여기에 교단(敎壇)으로서의 유다교가 성립하였던 것이다. 이 때 공포되었던율법서란 제사법전이었다고 생각된다. 느헤미야, 에스라에 의한 종교 개혁의 이념은유다의 정치적 존립을 위태롭게 할 위험이 있는 과격한 예언자적 요소를 배제하고, 정치적 입장을 버리고 민족의 역사적 전통 위에 율법 종교로서 유다교를 성립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유다교를 필연적으로 `문서 종교'로써 성격을 띠게 되어 예언 활동은그치고 대신 율법학자나 서기가 제사장과 아울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유다 교단이 편집한 역사가 역대지인데,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제사 의식 예배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본 것이며,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떠난 북왕국은 여호와로부터 버림 받은 백성으로 간주되고 있다.이 시대에는 문학적 활동도 왕성하였다. 민족주의와 배외주의적인 유다교단에서 룻기, 요나서, 바벨론과 바사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으나 스가랴서, 요엘서 등의 묵시문학, 그리고 유다 민족의 윤리적˙일상적 지도자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되는 지혜자를낳은 욥기, 잠언 등을 들 수 있다.
⑥헬라 속령 시대(BC 331- 63):BC 4세기 후반에 들어와 바사는 점차 약체화하는 한편, 마게도냐가 흥하여 빌립은 헬라 전토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BC 336- 323 재위)는 BC 336년에 즉위하고 2년 후에는 동방 원정을 개시, BC 333년 이수스(Issus)에서 바사 최후의 왕이 된 다리오 III세(BC 336- 331 재위)의 군사를 격파하여이듬해는 수리아와 팔레스틴 전토를 지배하에 두었다.BC 331년, 알렉산더는 애굽을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가우가멜라(Gaugamela)에서 바사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다리오 III세를 죽이고, 바벨론을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바사제국을 멸망시켰던 것이다. 그는 또 그 후 인더스 강까지 지배하에 두고 고대 동방 최대의 판도를 가지는 대제국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유다도 당연히 이 헬라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알렉산더의 사후 헬라의 정권은 삼분되었는데, 유다는 그중 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처음에 유다는 애굽의 주권자인 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톨레마이오스 왕조하에서 유대인은 비교적 자유로왔고, 종교나 문화에 있어서도 간섭을 받는일이 적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중요한 사건은 오히려 알렉산드리아에서의 70인역 헬라어 구약성경의 성립이다. 즉, 알렉산더는 헬라 문화에 의한 세계 지배(소위 헬레니즘)를 추진하려 하고 있었지만, 그는 애굽에 헬레니즘 도시로서의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애굽에는 이미 포로 시대부터 상당수의 유다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들은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헬레니즘적 유다인 사회를 형성해 갔다. 그들의 용어는당시의 세계 공통어로 되고 있던 코이네˙헬라어로 되고, 히브리어는 이미 사어화(死語化)되고 있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헬라어역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행해진 것이다.그 완성은 100년 이상을 요했다고 보이는데, 개시된 것은 톨레마이오스 왕조 치세이며, 모세 오경이 제일 먼저 되었다. 이 70인역은 헬레니즘˙로마 시대의 유다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선교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소아시아, 수리아, 바벨론 등에 주권을 가진 셀레우코스 왕조는 그 이전부터 종종 팔레스틴을 지배하에 두려고 시도해 왔지만, 마침내 BC 198년, 안디오코스 III세(BC 223-187 재위)가 이를 실현하여 유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하는 바가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하에서 유다의 헬라화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는데, 이에 추종하는타협파와 반항하는 경건파(하시딤, Hasidaeans)의 두 파 대립이 생겼다. 이 경건파에서 나중에 바리새파와 엣세네파가 생겼다. 또, 셀레우코스 왕조는 BC 190년, 로마군에게 패하여 다액의 배상금을 요구받은 이후 유다인은 중세(重稅)에 시달렸고, 또 예루살렘 성전의 재보(財寶)도 탈취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에피파네스'(顯現王)라고자칭한 안디오코스 Ⅳ세(BC 175- 163 재위)는 유다를 정치적으로 압박했을 뿐만 아니라, 헬라 신들의 예배를 권장하여 유다인의 신앙을 위태롭게 하였다. 전에 유다의 대제사장 지위를 둘러싸고 도비야가와 오니아스(Onias)가 다투었는데, 안디오코스 III세가 즉위하자 야손(여호수아)은 그에게 뇌물을 보내 형 오니아스 III세에게서 대제사장의 지위를 빼앗았다. 그러나 제사장 가문 출신이 아닌 메네라우스는 더 많은 뇌물을 안디오코스 III세에 보내어 임명되고, 오니아스 Ⅳ세를 암살, 야손은 국외로 추방했다. 더구나 메네라우스는 유다의 헬라화에 협력적이었기 때문에 유다인의 증오를 사고있었다. 안디오코스 Ⅳ세가 애굽 원정에서 전사했다는 오보가 전해졌기 때문에 야손은메네라우스를 예루살렘에서 추방, 다시 대제사장의 지위를 빼앗았다. 그러나 안디오코스 Ⅲ세는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이를 어지럽게 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할례, 안식일, 율법 소지를 금지하는 등 유대교를 철저히 탄압하였다. 또, 예루살렘 성전을 `쓰스 신당'이라 불러 여기에 헬라의 신상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BC 168년의 기슬르월25일에는 제단에 돼지의 제물을 바쳐 성전을 모독하였다. 그래서 하스몬가에 속한 제사장 맛다디아 다섯 아들과 같이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아들 유다는 싸움이 매우 능하였기 때문에 `마카비'라 불리웠고, 이 때문에 이 반란은 `마카비전쟁'이라고 한다. 이십여 년에 걸친 싸움의 결과 BC 164년, 유다는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의 결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전에 성전이 모독된 기슬르월 25일을 `하누가'(獻堂祭)로 정하였다. `하시딤'이라고 하는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일단의 사람들은 하스몬가에 협력하여 싸워왔으나 반란의 종교적 목적이 달성되자 떨어져 나갔다. 하스몬가의5형제는 차례 차례 쓰러졌으나,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조금씩 독립을 추진하여 맨나중에 남은 시몬 때에는 실질적인 자치를 획득하였다.통곡의 벽BC 134년 시몬이 피살되어 그 아들 요한 힐카노스가 왕과 대제사장을 겸직했을 때 하스몬가에 의한 유다의 독립이 달성되었다. 하스몬가에서는 대제사장이 왕을겸직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었으므로 제사장 계급이 큰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다윗 왕조의 제사장 사독의 자손이라고 자칭 `사두개파'라 불리우게 되었다. 그들은 어느 정도 헬라화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하에서는 부득이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스몬가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하시딤의 어떤 자들은 바리새파를 형성하고 모세 율법에 충실한 생활을 지키려고 하였다. 알렉산더 얀나예우스(BC 103- 76년 재위)의 치하에서는 바리새파가 탄압을 받아양 파의 대립은 격화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왕비 알렉산드라가 왕이 되자 바리새파가우대를 받고, 여왕의 남동생 시므온 벤 셰다하의 지도 하에 사나고그(회당)를 중심으로하는 교육제도와 안식일 예배 등이 성행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바리새파는 율법을중시하여 율법학자들에 의해 많은 불문률법을 낳게 하여 이후 랍비적 유다교의 기초를쌓았다. 그 후 하스몬가는 지도권을 놓고 대립과 분쟁이 계속되었고, 여기에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항쟁이 얽혀 이미 헬라에 대신하여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내정 간섭을 초래하여 BC 63년에 로마군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 독립은 끝장이 나고 로마의 속령으로 되었던 것이다.이 시대에 있어서 유다교의 문학적 활동은 매우 활발하였다. 전도서, 다니엘서 등이성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기관에 의한 구약 각 서의 사본 제작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또, 이미 추진되고 있던 헬라어역 외에 아람어, 수리아어, 이디오피아어 등으로의번역도 진행되어 타르굼(Targum), 미슈나(Mishnah), 미드라슈(Midrash) 등 일종의주석도 만들어졌다. 또, 정경 외의 가경과 위경의 대부분도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쿰란(Qumran)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의 대부분도 이 시대에 속하는 것인데, 이것을 작성하여 보존한 사람들은 엣세네파(Essenes)로 하시딤의 일부가 하스몬가에 반항하여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한 것 같다. 기본적으로 율법에 충실할 것을 신조로 하고 있는데, 그 율법 해석은 바리새파의 것과는 달리 독특한 종말론적 역사 이해에 입각하는것이었다. 또, 예루살렘 성전의 동물 희생에 반대하여 독특한 달력을 사용하여 엄격한금욕 생활을 지킨 듯하다. 기독교의 기원 연구에 있어서 이 엣세네파와 그 문서의 연구는 오늘날 없어서는 안될 과제로 되어 있다.
⑦로마 속령 시대(BC 63- AD 70):로마의 속령이 된 다음부터도 형식만의 지방 정치가로서 하스몬가의 자손이 유다를 다스리고 있었으나, BC 37년 헤롯이 하스몬가를 쓰러뜨리고 유다 왕이 되었다(BC 37- 4 재위). 예수께서 탄생한 것은 이 헤롯 왕 때이다(마 2:1). 그는 잔학하였지만 정치적 수완이 능란하여 유다나 사마리아의 성읍들을 정비하고, 또 예루살렘 성전의 개축에 착공하였다. 성전은 AD 63년에 완공하였다. 헤롯의 사후는 빌립, 안디바, 아켈라오, 이 세 아들에 의해 영지가 3분되었다. 후에 헤롯아그립바 I세(AD 37- 44)가 로마 황제의 총애를 받아 3분되어 있던 영지를 통일 지배를 하기까지 사실상 로마의 직할 영지로서 총독 하에 두어져 있다. 아그립바 ?세 사후의 유대는 내정의 혼란, 로마 지배의압정하에서 유대 민중의 생활은 희망이 없는 것으로 되었다. 이 때문에 셀롯(熱心黨)등의 과격 분자가 반란을 꾀하여 베스파시아누스가 거느리는 로마군의 공격을 받는사태를 빚게 되었다. 소위 `유대 전쟁'은 AD 66년부터 70년까지 계속되었으나, 네로의급사 후(AD 69) 로마 제국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에 대신한 디투스가 예루살렘을공격하여 AD 70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은 파괴되었다. 다윗, 솔로몬 시대 이래이스라엘 민족과 그 종교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이 때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재건되지 못하였던 것이다.132- 135년, 유대인 바르 곡바(Bar Kokhba)의 반란(제 2차 유대 전쟁)도 있었으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AD 70년의 예루살렘 함락으로 종막을 내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 이래 유대인은 고국을 갖지 않은 유망민(流亡民)으로 되었으며, 그들은 전 세계 각지에서 구약성경을 지키고 유대교도로서의 단결을 유지하면서, 각국의 종교˙문화 속에 묻히지 않고,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살아나간 것이다. 그들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로의 귀환의 비원은 1948년 이스라엘 공화국의 수립에 의해결실되었지만, 이스라엘 전통의 강함은 시조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의 신앙을 국가존망의 파란 속에서도 지속하여, 특히 유망민이 되고서부터 2,000년간 잃은 일이 없는 이 민족 그 자체에서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⑧이스라엘 공화국 - 이스라엘이라는이름은 현재도 아직 `이스라엘 공화국'으로 남아 있다.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국외로 추방되고서부터 여러 나라로 유랑하고 있던유대인은 1880년 경 고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팔레스틴에 있는 아랍인과의 분쟁은 격화하였다. 팔레스틴 문제 처리에 골머리를 앓은 영국은 유엔(UN)에 그 문제의 해결을 맡기고 위임 통치를 포기하였다. 유엔은 팔레스틴을 유대지구와 아랍지구로 분할하였다. 아랍측은 이를 거부하였지만, 유대측은 그 안에 따라 1948년 5월 14일독립을 선언하고 와이즈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수도를 텔 아비브에 두었다가후에 고도 예루살렘으로 옮겼다.그 후 수차에 걸쳐 국경 분쟁이 있었고, 지금도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영토는 남은 아랍 연합(애굽 지역)에 접하여 아가바만에 이르고, 동부는 사해 중부에서 서쪽으로 비껴 헤브론 지구를 피하여 예루살렘에 이르고, 또 중부 산지를 피하여갈멜 산맥에 이르고, 거기서 동쪽으로 굽어 요단 강에 이르는 선으로 요단에 접하고다시 북상하여 갈릴리 바다에 이르러 그 동안을 통하여 북부는 아랍 연합(시리아 지역)과 레바논에 접한다. 그 면적은 20,700㎟이다. 인구는 1990년 현재 약 461만명이며,그중유대인은 4/5이고, 아랍인은 1/6정도이다. 그들의 종교는 물론 유대교이다. 이스라엘 거주 아랍인의 8할은 회교도이고, 나머지는 기독교(희랍 가톨릭 또는 희랍 정교)이다. 이스라엘의 국어는 현대 히브리어이나 아랍인을 위해 아랍어가 공용어로 인정되고 있다.
(3). 사회
a. 셈족 시대:
① 셈족
노아의 아들 셈을 시조로 하는 민족을 말하는데 그렇다고 그가 중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 셈족은 널리 아라비아 반도에서 지중해 동안을 거쳐 이란 고원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분포하고 인종적으로 유사하고 그의 문화, 종교에서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언어에 대해 말하면 이른바 셈어주(예를 들면 악갓ㅇ, 우가리트어, 유대어 따위)은 상호 영향을 주거나, 혼합 하거나 하여 순수하게 제각기를 한 언어로서 끄집어낼 수는 어렵다. 셈어족의 모체로서 원 셈어를 이론상 가정할 수 있을 뿐이다. 셈족은 무엇보다도 종교적 천분이 있어 그들에게서 우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나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종학상 이 말은 아랍인과 유대인을 대표하는 특수한 인종을 말하며 그 피부는 약간 회고 모발과 눈은 검고, 코는 높고 꼬불아졌고, 얼굴은 계란형을 하고, 수염이 많고, 두골이 긴 것이 이인종의 특징이다. 그러나 잡혼 때문에 이 특징은 점차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세미틱어는 통상 앗수르, 바벨론어, 히브리어(또는 가나안어), 아랍어, 아랍어, 남아랍어, 이디오피아어 등으로 구분된다. 앗수르, 바벨론어는 BC 4000년 이전에 소급한다. 히브리어는 구약 성경의말로서 가나안말과 같다. 모압, 암몬, 애돔 사람들도 역시 히브리어를 말했다. 아랍어는 바벨론의 경계에서 북부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의 지방에서 쓴 말이다. 아랍어는 가나안 사람과 아랍인과의혼합 내지는 접촉 결과 양자의 중간 지대에서 발달한 말이다. 그리하여 이 말은 마침내 동방 제국의 통상 및 외교어로 되어 앗수르에서는 앗수르어에 대신하고, 발레스틴에서는 바벨론어와 히브리어에 대신하게 되었다. 이 말은 기독교회에서 쓰이고 특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라비아어는 원래 메카에 거주하던 코라이슈(Koreish)족의 언어인데 회교의 확장과 더불어 동방 일대의 제국에 퍼져 마침내 아랍어를 물리치고 이를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아라비아어와 달리 옛 미네안 사람, 사비안 사람 그리고 지금의 에키리인이 쓰는 말을 남아라비아어라고 한다. 남아라비아로부터의 이민은 대안의 아프리카에 이말을 전하여 옛 아비시니야 교화와 지금의 아마하리크인이 쓰는 이디오피아어로 되었다.
② 셈족의 고향
셈족은 서남 아시아에서 방형의 땅을 점유하는데 북아라비아는 그 방형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 인종의 요람은 대략 북부 또는 중앙알비아에 두고 있다. 그것은 ① 그들은 이 중심의 사위(四位)에 균등하게 분포되어 있다는 것, ②바벨론, 애굽의 고비(古碑)에 기록된 이 지방의가장 초기의주민이 셈족인 것, ③아라비아는 볼모의 땅이기 때문에 거기서 많은 이주가 행해져야할 땅인 것, ④중앙 아라비아의, 지금의 베다윈(Bedawin)인은 원시 셈족의 최량(最良)의 전형이라는 것 등이 그 이유이다.
③ 원시 셈족의 직업
초기에, 현금보다 훨씬 습윤(濕潤)하고 사냥 짐승도 많았을 때에는 많은 부족은 수렵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창세기에도 나온다. 니므롯은 여호와 앞에 특이한 사냥군이며(창 10:9,→니므룻) 에서와 그 자손은 사냥을 주로 했고 모피를 입고 있었다(창 25:27,27:3-39). 오늘날의 어떤 베다윈족에는 생활의일부를 수렵으로 하고 있는 것도 있다. 어렵(漁獵)은 아라비아 연안에서 일찍부터 행해졌다. 그리고 고기와 어렵을 가리키는 말은 전부 셈 방언과 동일하다. 셈족은 이산하기 훨씬 이전에 대부분 수럽 생활을 포기하고 유목생활로 옮겼다. 이와 같이 유목 생활에 대한 토착 아라비아어는 베다위(Bedawi)인데 복수는 베두(Bedu)이다. 베다윈(Bedawin), 베두윈(Bedouin)은 정규 복수이지만 보통 토착 용어는 아니다. 이 명칭은 휄라힌(Fellahin), 즉 「땅을 가는 자」(농부)에 대비하여 사용된다. 가장 중요한 가축은 중앙 아라비아의 토착 단본 낙타(單?駱駝)였다. 그리고 이것 없이 이 지방에서의 생활은 불가능하였다. 나귀도 일찍부터 사육되었다. 일찍부터 굵은 꼬리 양(Broad-tailed sheep), 흑염소(Black-haired goat)가 아라비아의 주민들에게 사육되었다. 대가축은 아라비아 본토에서 발견되지 않고 물이 많은 반도의 주변에서만 발견된다. 이것들은 농경 생활을 채용하기 시작한 반유목민에 속한 것이다. 말도 또한 고대 아라비아인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이것은 유브라데의 부근 또는 다른 비옥한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부족에 알려져 있을 뿐이다. 알려져 있던 유일한 농경은 오아시스에서의 대추야자(Date-palm)의 재배였다. 고대 셈족 사이에 있어서는 현금의 베다윈에서와 같이 공예는 대장일을 제외하고는 저부 가정 공업이었다. 여자는 필요한 토기를 빚어 굽고,바구니를 결고, 수피를 익이고, 털로 실을 자아내고 또 짜서 천막이나 의복에 사용하였다. 금속 가공 기술만은 부족에서 부족으로 일을 구하여 돌아다니는 한 씨족의 기밀(機密) 직업(Trade-secret)이었다. 고대 아라비아에서 상업은 그히 단순하여 주로 물물 교환이었다. 그러나 비교언어학은 그들이 분리하기 이전에 셈족은 그들이 금, 은, 놋 등을 저울에 달아 통화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 또 환전상 금화 등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사실은 대상 무역이 외국과도 매우 일찍부터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④ 아랍에서의 음식물
물은 생존의 제일 요건이다. 광야에는 샘물이 적고 물줄기도 거의 없다. 가뭄에 샘물이 마르는 경우에는 다른샘물을 ㅜ하여 멀리 이동하던가, 또는 물이 있는 가까운 지방에서 물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된다. 수렵시대에 고대 셈족은 야생 과실, 특히 대추야자의 열매, 곤충, 특히 메뚜기, 꿀, 물고기, 도마뱀, 야금과 그알, 야수 등 아라비아 토착산의 것을 식용으로 하였다. 이런 것들은 지금도 베다윈의 식용으로 되고 있다. 소금은 일찍부터 조미료로서 쓰여졌다. 불도 알려져 있었다. 요리는 세개의 돌로 만든 원시적인 노(爐)에서 만들어 졌다. 낙타, 양, 염소가 사욕된 시대에는 밀크와 그 가공품이 셈족의 주요 식물이 되었다. 가축의 고기는 희생이나 또는 축젱일의 성찬(盛饌) 외에는 식용으로 되지 않았다. 곡물은 광야세서 만들지 못하였으나 초기의 셈인은 현금의 베다윈과마찬가지로 곡물 없이는 생존 할 었었으므로 그들은 물물 교환에 의하든가, 또 약탈에 의해 근접지의 휄라힌에서 밀, 보리를 얻어 빵을 만들었다. 커피나 담배는 오늘날 광야의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고대에는 물론 알려져 있지않다.
⑤ 의복
수렵시대에 있어서 유일한 의복은 나무 잎으로 만든 요댜나 또는 수피였다. 유목시대에는 털의 여대나 모직을 착용하였다. 여기서 발달하여 현금의 베다윈의 톱(tob) 비슷한 게소네스(tn,toK]), 즉 속옷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 위에 현금의 베다윈인의아바예('abaye) 비슷한 스이므라(hl;m]ci), 즉 윗도리로 머리칼을 잡아매는 외에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발은 여행 때 산달을 신는 외에는 맨발이었다.
⑥ 주거
수렵시대에 있어서 셈족의 조기 주거는 동굴이나 나무 가지로 만든 움막이었다. 유목시대에는 검은 염소의 모직으로 만든 천막이 그들의 일정한 주거로 되었다. 씨족의 천막은 원진형(圓陳形)으로 집결되었다.
⑦ 가족 조직
셈족 사회의 최초 형태는 모권제(母權制)였다. 결혼은 일시적인 결합이며 남자가 그의 씨족을 떠나 그 아내의 씨족에 연결되었다. 이런 사정 하에서 아이들은 어머니의 부족에 속하여 그 자손은 완전히 모친에 속하는 것이었다. 모친은 씨족의 장(長)으로서 전시와 평시를 불문하고 그 씨족의 지도자였다. 다음 사회는 형제다부혼시대(兄第多夫婚時代. Fraternal Polyandrous Sta.ge)로 들어갔다. 이것은 일단(一團)의 형제가 한 아내를 공유(共有)한 것이다. 이 조직에서는 여자는 영원히 나마자의 씨족에 속한다. 그러나 일단의 형제 중에서 자녀의 아버지가 누구인가하는 거슬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아이들은 여전히 모친에 속하였다. 모친의 여러 남편, 그가 아버지이건, 큰아버지이건, 아이들에게는 암(![')로서 알려져 있었다. 셈족은 그들의 분리 훨씬 이전에 가족 조직의 부권시대(Patriarchal stage)로 도달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처 다부가 일부 다처로 바꾸어졌으므로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로 되고 아이들은 아버지를 아게 되었다. 종형제자매 이상의 근친자와의 결혼은 습관에 따라 금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 이외는 가족의 자산을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한 근친자와 결혼을 바람직하게 생각하였다. 또 다처. 축첩, 창녀를 사는 것은 남자에게 허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엄격히 정조가 요구되었다. 남편은 바알(l['B'), 즉 아내의 「소유자」였다. 남편은 자유로 아내를 이혼할 수 없었다. 부친은 자녀의 생사 여탈의 절대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기업(基業)에 관한 외에 아버지에 대하여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하였다. 노예는 보편적인 셈족의 제도였다. 그리고 노예의 지위는 자녀와 대략 변함이 없었다.
⑧ 정치 조직
극히 초기부터 셈족은 그들의 물 공급의 원천이 되고 있는 오아시스를 보호하기 위해 그들 자신에게 소씨족을 조직하고 있었다. 이 씨족들은 실제상 또는 가정의 혈족 관계 위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그리고 공동의 이익. 습관, 종교 등에 의해 결합되고 있었던 것이다. 씨족의 율법은 습관이 었다. 이것은 생명, 자유, 자산, 진리의 권리 및 상호가 형제로 간주되는 모든 씨족원에 대한 친절한 행위의 보증으로 되었다. 씨족의 정치는 장로의 장중에 있었다. 그리고 장로는 자유민에 의해 선출된 것인데 또 그들의 의지에 따라 폐지되는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거기에다 완전한 데모크라시가 있었다. 혈연 씨족은 또 종종 보다 커다란 정치적 구성인 부족으로 결합되었다. 타씨족 성원(成員)에 대한 태도는 일률적으로 적대적이어서 전투가 끊임 없었다. 피의 복수 제도는 광야의 기본적 율법이었다. 그것은 만일 씨족원이 피살되었을 경우는 피해자의 근친자가 살인자의 씨족원의 아무개라도 죽여 복수하는 것을 요구하는것이다. 다른 한편 이와 마찬가지로 언격히 지켜진 율법은 이방인 또는 대적이 탄원자로서 그들의 천막 문에 왔을 경우는 이를 불쌍히 대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⑨ 경제 조직
원시 셈 사회의 경제 조직은 현대의 베다윈과 마찬가지로 공산적이었다. 토지, 목장, 물, 대추 야자의 오아시스, 사냥짐승, 기타 우리가 「공익」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씨족에 의해 공유로 되고 있었다 다만 천막과 가구, 의류, 가축만이 사유 재산이었다. 이와 같은 사태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거대한 부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어떤 사나이는 달른 사나이보다도 낙타, 염소, 양 등을 다소 많이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측을 조금 가지고 있는 사나이와 같은 천막에 살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믈을 먹은 것이다. 정치적 평등은 물론 경제적 평등은 이렇게 원시 셈 사회의 특색을 이루고 있었다.
⑩ 종교
셈족의 최초 종교는 바알 숭배였다. 바알은 태양신으로서 태양처럼 치유자이며 동시에 파괴자이다. 그리햐여 바알은 이를 숭배하는 종족 또는 이를 숭배하기 위해 바쳐진 신당 수만큼이나 많다. 그러나 그 숭배자에게 있어서는 자기가 숭배하는 바알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이로써 가족 또는 종족의 신으로 하여 경배하였다. 바알은 아내를 가졌으며 또 아버지의 봉사자와 그의지의 설명자로서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셈족의 종교는 그 기원이 종족적이었으며 종족적 성질은 오래토록 이를 지니고 있었다. 이밖에 셈족은 인자적(仁慈的)인가. 우정적인가, 또는 악의적인가. 비우정적인가. 또는 예배자에 대한 그들의 불안정하고 변하기 쉬운 관계에 준하여 이쪽인가, 아니면 저쪽인가였다. 제사가 확립되어 있는 신들의 대부분은 마지막에 든 계급에 속한 것이었다. 거기는 태양신 외에 월신, 하닷(Hadad)과 같은 대기(大氣)의 신들, 폭풍우나 우뢰의 신들그리고 대지, 해양, 하계(下界)의 많은 개개의 신들, 마신(魔神)들이 있었다. 잘 계통 세워진 바벨론의 만신전(萬神殿, Pantheon)에는 하늘의 지상신은 아누(Anu), 바다의 지상신은 에아(Ea), 대지, 즉 인류의 지상신은 벨(Bel)이었다. 셈족 사이에는 또 거주지 또는 생산지가 분류되지 않는 신들, 광야의 신들(혹은 악귀), 산의 신들, 골짜기의 신들이 있었다(왕상 20:23,28). 또 거기는 사람을 닮은 본래의 신들(gods proper)과 짐승에 유사한 아라비아인의 진(Jinn)과 같은 마신이 있었는데 후자는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또 부족, 민족, 국민의 독특한 신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여호와, 모압의 그모스, 수리아인의 바알, 앗수르인의 아수르와 같은 것, 또 각 성읍의 신들로서 두로의 바알인 멜가르드(Melqart)닙불(Nippur)의 벨(Bel), 바벨론의 므로닥(Marduk), 불싶파(Borsippa)의 느보 따위와 같은 것이 있었다.
b. 히브리 유목 시대(BC 1200년 이전):
① 초기 이스라엘의 유목 생활
히브리 전설은 족장들을 유목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낙타, 나귀, 산양, 양 등 대가ㅜㄱ을 사육하고 장막에서 살면서 물과 목초를 찾아 유랑, 샘물을 가장 귀중한 소유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애굽으로 이주했을 때, 초원인 고센 땅에 살았으며 역시 목축 생홀을 계속하였다(창 45:10,46:28,47:27; 출 8:22,9:26). 출애굽에 즈음하여 그들은 다시 광야의 베다윈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사실 유목 생활을 완전히 포기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있어서 그들의 생활은 상기 셈족 시대의 항목에서 기술한 생활과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고 생각된다. 애굽에 거주시는, 그들은 바로의 한사람, 아마 라메세스 II세(Rameses II, BC 1292-1225)에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이 재앙에서 그들은 모세에게 구출되어 애굽을 떠나 원시 셈시대의 공유제와 경계적 평등으로 회복되었다.
② 여호와 종교
애굽의 기반에서의 이스라엘 석방의 주 원동력은 여호와 종교였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조상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대사건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장소를 제공한 것이다. 그 대사건의 최초의 것은 출애굽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처음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 또 시내산에서의 율법 제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의 종교 연합(Amphiktyonie)으로서 단결하여 유대교가 성립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 종교의 형태가 결정적이된 것은 모세 시대부터이다. 모세는 여호와로부터 이스라엘 사람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은 (a) 다른 모든 신들보다 뛰어난 여호와의 이 새로운 개념에서 모세 종교의 기본적인 교리가 나온다. 그것은 (1)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에 의해 예베되어야 하는 것, (2)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고난을 긍흘히 여기셨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역시 모든 학대 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한다는 것, (3) 여호와께서는 애굽이나 가나안의 우상 숭배와 전제적 문화를 증오하고 민주적 생활을 기뻐하신다는 것 등이다. 이와 같은 관념은 후대에 있어서의 이스라엘의 사회진화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다.
c. 농경 시대(BC 1200-1000)
① 가나안 정복
히브리인에 위한 가나안 정복은 200년 이상이나 걸친 정진적 과정이었다. 발레스틴 침입에 관한 우리의 최고 기록인 사사기 1장에 따르면 레아의 제지파가 먼저 침입하고 다음엔 라헬의 제지파가 침입했다. 가지파는 가나안 사람의 주거를 뚫고 들어가 시골 지방을 점령했다. 또 한편 성벽을 구축한 성읍은 대부분 선주민의 장ㅈ2nd에 머물러 히브리 왕국 건설 시대까지 이르렀다.
② 농경의 채용
정복 후에도 어떤 지파는 장기간 목축 생활을 여위하고 가축 사육은 항상 주요한 산업의 하나였다.그러나 국민의 대부분은 점차 유목 생활을 포기하고 선주하고 있던 가나안 사람처럼 농경민으로 되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소유한다는 옛 베다윈의 이상은 「각 사람이 자기 포도 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라는 훼라힌(농부)의 이상으로 변햇다. 사사와 초기 왕조의 지도적 인물은 농부 출신들이었다.
③ 농경시대의 의식주
농경의 채용은 종래의 광야 식물 외에 많은 식물을 부가하였다. 의복에 있어서는 속옷과 외투 사이에 웃저고리와 같은 것을 입게 된 것 외에 광야의 원시적 복장에 변화는 없었다. 이 시대의 주거에 있어서 장막은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에 석조 또는 점토조 가옥이 세워졌다. 이와 같은 가옥은 동리나 성읍에 많이 들어 섰다. 성벽을 두른 도시는 아직 가나안 사람의 소유였다.
④ 가족 조직
농경의 채용은 이스라엘 지파 조직에는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았다. 가족은 그 가장 제도를 지속하고 있었다. 동일 씨족의 성원은 동일 촌락에 거주하였다. 족장은 사사 또는 군사적 지휘자로서의 고대의 기능를 유지하고 다만 「친족 장로」라고 불리우던 것이 「성읍 장로」로 되게 된 것 뿐이다. 정치적 평등도 사사시대를 통하여 지속되고 있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기드온은 왕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이것은 자유인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적당하며 여호와께 다스리게 하라고 단호히 거절했다. 또 요담은 왕를 택한 나무의 비유를 들고 왕이 될 것을 좋아하는 자는 아비멜렉과 같이 멸시 받은 가나안 사람의 혼혈아에게만 어울린다고 가르쳤다(삿 8:23,9:7-21).
⑤ 경제 조직:
광야의 경제적 평등은 이 시대에도 계속하였다. 토지, 물, 목장 기타 공익물(公益物)은 그들이 정복전에 있어서와 같이 공도의 소유였다. 전설에 다르면 가나안 땅은 추첨으로 분배되고 있었다. 거기는 토지의 영대(永代) 사유권은 없고 종종 재분배되었다. 제비(Lot)란 말은 토지의 소구분의 이름으로서 쓰인다. 안식년 제도는 본래 7년마다의 토지 재분배와 관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공동 토지 소유법은 오늘날 발레스틴의 많은 촌락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광야에서 장막이 그러했듯이 다만 가옥과 가구만이 사유재산이었다. 화폐는 이 시대에 근소하였다. 에브라임 사람 미가는 모세의 손자인 므낫세를 연봉 10세겔에 제사장으로 고용하였다(삿 17:10). 아비멜렉은 은 70세겔에 방탕한 무리를 고용하여 그들에 의해 왕으로 되고 그들을 호위병으로 하였다(사 9:4). 나라에 부자는 없고 국민은 모두 농부였다.
⑥ 농경시대의 종교
가나안의 정주는 그들의 경제적, 사회적 생활보다도 그 종교 생활에 더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가나안의 바알은 농경의 시늘이 었는데 파종과 수확을 통할하고 있었다. 히브리인이 농경의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그와 동시에 그 토착 신들의 제사를 습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기 자료는 모두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사람이 「바알을 섬겼다」는데 일치하고 있다(삿 2:10,13,3:5). 이 증언은 또 후대의 예언자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여호와가 명목상 바알에 승리를 거둔 때에도 그 자신들은 그들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종교는 바알 제사에서 파생한 요소에 침투되었다. 이와 같이 가나안 정복은 광야의 신인 여호와 예배의 실제적 소실을 가져오게 하였다.
d. 상고시대(BC 1000-586)
① 사무엘과선지자의 제자들의 노력에의해 사울은 히브리 최초의 왕조를 건설하고 그 국가 조직은 BC 586년의 예루살렘 멸망으로 끝났다. 왕국은 법제를 펴고, 국내의질서를 수립하고, 가나안의 산성을 정복 점령하고, 다윗에 의해 근접 열방을 정복 점령하고, 종래 이스라엘에 속해 있지 않은 통상로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것은 통상상의 커다란 발전을 초래하였다. 상업은 필연적으로 공업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왕조시대에 고대 세계의 모든 기술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국산(國産)으로 되었다. 대장장이, 주조사(鑄造師), 금장색, 은장색, 석수장이, 보석 조각가, 목수, 조각가, 도기공, 화가, 직포공, 표백공제, 빵인, 요리인, 이발사, 향료 제조인, 약제사, 의사등이 있었다.
② 지파 조직의 해체
군주 정체는 가장적 가족 제도에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이것은 친족과 지파 조직의 해체를 유도하였다. 열왕은 지파의 독립적 권위에 반대하여 정권의 중앙 집권을 꾀하였다. 고대의 지파적 민병(民兵)은 왕실 직할의 상비군으로 점차 변경되고 지파 장로를 대신하여 「방백」(Princes)을 낳게 하였다. 그들은 왕에 의하여 호의 있는 선임(選任)을 받은 관료였다. 상업, 공업, 도시 생활등은 또 지파적 유대를 이완(弛緩)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③ 공유 조직의 해체
정승, 상업, 산업을 통하여 왕국시대의 이스라엘의 부는 크게 증가하였다. 왕상 10:27에 의하면 솔로몬은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 같이 흔하게 하였다」고 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북왕국의 말로서 「나는 시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호 12:8)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사야는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사 2:7)라고 말하고 있다. 이 부의 증가와 동시에 소유의 공유권은 소멸하고 재산의 사유권이 이에 대신하여 왔다. 나봇은 아합에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찌로다」(왕상 21:1-4)라고 말했다. 조기의 법전, 예언자, 지헤문학은 전부 재산 사유권의 호가정을 사실로서 주장하고 있다. 사유권과 더불어 불법 수단으로개인의 수블 증가시키려 하는 투쟁도 이렁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①절도(호 4:2,3:9,7:1; 렘 7:9), ②거짓 도량형(암 8:5;호 12:7;미 6:10-), ③상거래에서의 기만(호 4:1-;미 6:12; 렘 9:3-6,23:14), ④위약(호 4:2,10:4; 렘 4:2,7:9), ⑤나쁜 물건의 판매(암 8:6하,), ⑥곡물의 매점(암 8:4-;호 7:14하), ⑦빈민의 저당(암 2:8하, 미 2:8;겔 18:7,12,33:15), ⑧과대한 금리(암 2:8하, 5:11상 ;렘 15:10;겔 18:8-13,17,22:12), ⑨채무자의 노예화(왕하 4:1; 암 2:6,8:6), ⑩불의한 법과 말(사 10:1-;렘 8:8), ⑪과중한 과세(왕상 4:7-19; 삼상 8:15,17; 암 5:11,7:1), ⑫무역 독점(왕상 9:26-28), ⑬강제노동(왕상 9:20-과 5:13,15- 비교. 12:1-20; 삼상 8:11-18), ⑭정의를 굽히고(암 5:7,6:12; 사 1:23; 미 3:9-; 렘 5:5), ⑮수희(암 5:12; 사 5:23; 믹 3:12, 7:3)등등의 부정 행위로 치부를 꾀하였다.
e. 포로 후 시대
① 국가
생활의 소실. 바벨론 포로(BC 586)sms 이스라엘의 국가 생활을 종식시켰다. 유대인은 점차 고대 세계의 각지로 이산되었다. 그리고그들은 벌써 국민 생활이 아니고 종교 생활로 넘어 갔다. 발레스틴에 남아 있던 미약한 잔류자는 바벨론, 바사, 로마의 지배를 연이어 받았다. 그리고 하스몬의 단기간의 치세를 제외하고는 독립하지 못하였다. 이 시대의 문제는 내면적인 사회 상태의 개조보다는 오히려 포로 귀환과 국가의 회복이라는 것이었다.
② 윤리적 종교의 쇠퇴
이 시대의 제사장은 윤질적 율법 부여자로서의 기능을 잃고 단순히 제사의 집행자로 되었다. BC 500년경, 바벨론에서 조직적으로 편술되고 1세기 후에 발레스티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공포된 제사전은 윤리적 교훈이 결여되어 있는 감이 있다. 그 자체는 전부 정확한 제사에 관련되어 있다. 제사장의 교사로서의 권능은 학사(Scribes)로 대체되었다. 학사의 목적은 포로 전의 관례를 수집하여 그것을 지키고 또 그것을 준행하도록 남에게 가르쳐 주는 데 있었다(스 7:10). 포로 후의 예언자도 또한 그들의 윤리적 사명을 상실한 것 같다. 예루살렘 함락 후 에스겔은 회개의 전파를 그만두고 오로지 유다의 회복에 열중하였다. 겔 40:48절에 그는 회복된 성전에서 쓸 순수한 의례전(儀禮典)을 기록하고 있다. 스가랴, 학개의 사명은 「여호와의 전율 건립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은총을 가지고 돌아오리라」였다. 말라기는 옛날의 윤리적 사명의 반향을 가지고 있었지만(말 3:5) 그의 주요 흥미는 제물을 가지고 오는 것과 이방인 여자와의 결혼 방지에 집중되고 있었다. 이사야서는 몇 절의 윤리적 장구(章句)를 가지고 있다(사 56:1,10-12,58:6-,59:2-8, 61:8, 64:5-7). 그러나 이것들은 성전, 제물, 금식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수다한 장구(章句)로 상쇄(相殺)되고 있다. BC 500년 후 곧 예언은 중지되었다. 그것은 이미 윤리적 사명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묵시 문학 운동이 이를 대신하였다.이것은 유대인 세계 제국(帝國)의 건설과 이스라엘의 대적 궤멸을 소신으로 하는것이었다. 지혜자파는 이 시대에도 존속하였으며 욥기, 전도서, 잠언 등 정경과 솔로몬의 지혜 등은 고난과 불멸의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빛을 던진다. 그러나 그들은 잠언의 사회적 윤리적인 고대의 부분에 아무 겆도 부가하지 않았다. 후대의 경향은 지혜와 율법을 동일시하고 지혜자와 학사를 동일시하게 되었다. 따라서 포로 후의 시대는 포로 전 시대보다 나은 아무런 사회적 진화도 보지 못하고 또 그 문하가은 포로전의 사회문제 해결에 대한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한 것 같다.
③ 세례 요한과 예수.
세례 요한과예수는 포로 전 예언자의 윤리적 사명을 부흥시켰던 것이다. 두 사람은 다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선포하엿다. 예수는 예언자들과 같이 세계는 물질적 조건의 어떠한 변혁으로서도 구원 받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또 율법 제돋, 교육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것들은 인간의 성질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그의 방법은 하나님과 개인적 경험을 통한 인성의 변화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우주적 부성(父性)의 계시와 하나님의 아들로 되는 새로운 능력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그를 믿는 신앙을 통하여 신생할 때 하나님께 대하여 아들처럼 행하고, 모든 사람을 자기 형제로서 대하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들 자신의 최고의 가능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데 이르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며, 그 나라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