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CAIVS IVLIVS CAESAR
로마 공화국 독재관
출생
기원전 100년 7월 12일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
기원전 44년 3월 15일 (향년 55세)
로마 공화국 로마
Vēnī. Vīdī. Vīcī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기원전 47년 젤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가 원로원에 보낸 편지의 전문.
고대 로마의 정치인이자 군인. 후기 공화정 로마를 근본적으로 뒤엎고 제정의 기틀을 마련하여 사실상 제정 로마의 시조의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쇠락한 유력 가문의 일원으로 출발하였으나 공화정 로마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며 정계에서의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당시 유력한 정치인들인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손잡고 삼두정치 체제를 구축하여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를 통해 사실상 원로원을 무력화하였다. 이후 갈리아 원정을 단행하여 갈리아 전체를 로마의 속주로 편입하는 군공과 명성을 쌓았다.
이어진 폼페이우스 및 로마 원로원파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스스로 종신독재관에 취임하여 공화정 체제에 대한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그 끝을 보지 못하고 암살되었고, 후계자로 지명한 옥타비아누스가 본격적인 로마 제정을 열게 된다.
뛰어난 정치인, 군인의 자질뿐 아니라 문인으로써 남긴 《갈리아 전기》, 《내전기》와 같은 저술은 오늘날에도 라틴어 저작물의 클래식으로 읽힌다. 그 외에도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브루투스, 너마저"와 같은 명언 또는 발언도 자주 인용된다.
한편으로는 매우 유능하고 인기 많은 정치가(혹은 장군)가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어떻게 공화정체를 무너뜨리는지에 대한 반면교사로서 스테레오 타입과도 같은 인물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그와 비슷한 사례는 많았으나, 부정할 수 없는 개인적인 매력과 드라마틱한 생애, 그리고 로마 제정의 사실상 창건자라는 유명세 때문에 후세에도 독재자 혹은 독재적인 야심을 가진 인물을 논할 때 끊임없이 인용된다.
이름의 어원
고대 로마의 초기 알파벳 체계는 그리스 문자가 에트루리아에서 변형된 것이 로마로 전해진 것인데, 에트루리아 언어에서는 /k/와 /g/ 발음이 구분되지 않아 /g/ 발음을 표기했던 감마가 C로 변형되어 /k/ 발음에 쓰였다. 그래서 초기 로마자에는 G가 없고 C로 /k/와 /g/를 모두 나타냈다. 추후 G가 추가되었지만, 인명을 표기할 때는 초기 용법에 따라 CAIVS, CNAEVS 등으로 표기된다.
카이사르 생전에는 고전 라틴어가 사용되어서 카이사르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이름을 표기할 때 사용한 카르투쉬에 분명히 '카'이사르로 표기되는 등 사료가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로제타 석에서도 "KAISRS"라는 발음표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라틴어 'Caesar'의 그리스식 표기 'Καισαρος(카이사로스)'를 다시 상형문자로 옮긴 것.
현재 국립국어원에서 인정한 표기는 카이사르다.15 하지만 1990년대까지는 '케사르’가 표준적인 표기여서 당시의 교과서나 출판물에는 ‘케사르’라고 쓰였으며, 대중적으로는 영어식 표기인 ‘줄리어스 시저’가 더 널리 쓰이기도 했으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대중적으로도 '카이사르'라는 표기가 정착되었다. 한국어 개신교 성경 표준본인 개역한글판에는 '가이사'로 표기된다.
카이사르의 어원에 대한 설은 당대부터 많이 퍼져 있었다. 대다수 역사가는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카이사리에스(Caesaries)'의 변형으로 본다. 저 단어의 뜻은 "풍성한 머리를 가진"이란 뜻으로, 아마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상 중 한 명이 태어났을 때부터 풍성한 배냇머리를 가지고 있어서 붙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집안 남자들에게 계속 대머리가 유전되다 보니 희망 사항으로 저런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도 있다. 카이사르가 대머리였다는 걸 보면 꽤 신빙성이 높은 설이다.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가문의 씨족 중 한 개의 이름, 즉 코그노멘(Cognomen)이고 주로 먼 조상 중 한 명의 별명에서 유래된 성씨다. 그리고 코그노멘에는 주로 그 시조뻘 되는 사람의 신체적 특징을 담고 있는 게 유난히 많아서 더 신빙성이 가는 설이다.
다른 속설에 따르면 '카이사르'라는 단어는 본래 카르타고어로 '코끼리'를 뜻하는 카이사이(Caesai)의 변형이라는 '썰'이 당대부터 퍼져 있었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에서 한 병사가 전투 중 단신으로 코끼리를 죽이는 대활약을 해서 이런 별명을 얻었는데, 이 별명이 가문명으로 정착되었고 카이사르는 그의 후손이다. 이 '썰'이 맞는다고 가정한다면, 어찌 보면 로마인에게 멸망한 카르타고의 '코끼리'라는 낱말이 한 로마 병사를 거쳐서 카이사르에게 전달되고 마침내 황제를 뜻하는 대단한 말까지 승격되어 현대19까지 생명력이 남은 셈이다. 카이사르 개인은 이름이 코끼리에서 왔다는 설을 굉장히 좋아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어마어마한 전공을 세운 전쟁 영웅의 일화가 더 폼도 나고, 정작 이름과는 달리 자신은 대머리라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위 사진처럼 본인을 새긴 주화에 코끼리를 넣기도 했다. 참고로 현재에는 돈에 많은 위인들이 들어가지만 최초로 돈에 사람을 새겨 넣은 것은 카이사르라는 낭설이 존재하는데, 실존 인물의 초상화가 새겨진 주화는 아케메네스 왕조나 알렉산드로스 3세, 셀레우코스 제국 등 고대 시대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로마로 한정하면 최초가 맞다.
가문 및 시대 배경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율리우스 씨족은 당대 로마에서 유서 깊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습 귀족22 가문이었다. 율리우스 씨족은 원래 도시국가 알바롱가의 귀족이었다가 로마의 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때 로마로 강제 편입되었다. 이 알바롱가가 로마 건국 세력의 발상지임을 감안하면, 율리우스 가문의 역사는 거의 로마 자체의 역사나 다름없었다. 카이사르는 한술 더 떠 마리우스의 배우자였던 고모 율리아의 장례식에서 율리우스 씨족의 시조가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알바롱가의 개국시조 율루스이며 자신은 여신 베누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허구성 짙고 대담한 주장을 공공연히 하고도 빈축을 사지 않을24 정도로 유서깊은 가문임은 분명했다. 실제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후손 중 한 명을 시조로 둔 아이밀리우스 씨족과 칼푸르니우스 씨족, 로마와 이탈리아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씨족들로 꼽히는 파비우스, 유니우스, 만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씨족, 건국 당시부터 합류해 꾸준히 평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발레리우스와 코르넬리우스 씨족 정도를 제외한다면 율리우스 씨족의 역사와 맞먹을만한 로마의 세습 귀족 가문은 거의 없었다. 하다못해 시조 클라우수스가 자기 부족을 통째로 끌고 와서 로마의 귀족으로 편입된 이래 한 번도 몰락해 본 적이 없었던 굴지의 명문 클라우디우스 씨족도 율리우스 씨족에 비하면 까마득한 후배(?)였다.
당시 율리우스 씨족은 족보 하나는 끝내주기는 했어도 왕정 폐지 이후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으로 이행되는 시점에서 이미 권력 핵심에서는 밀려나게 된다. 율리우스 씨족은 내부 지파로 루키우스 율리우스의 직계손들인 아울루스 가문을 비롯하여 리보, 카이사르 등이 있었다. 이중 가장 유명하고 율리우스 가문 전체를 상징하는 집안은 사실 아울루스 가문이었다. 이 집안은 공화정 초기 14명 정도의 집정관과 1명의 독재관을 배출했는데, 유명한 인물로는 율리우스 가문 내 중시조 정도로 찬사받은 대정치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울루스가 있었다. 하지만 종가 격의 아울루스 가문의 경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일찌감치 대가 끊겨 기록만 남은 상태였다. 이는 또 다른 유력 가문 리보 가문도 비슷해, 그나마 알아주는 지파는 카이사르 가문 정도만 있다고 할 정도로 위세가 현저히 꺾여 있었다.
카이사르가 태어나기 직전인 기원전 2세기 무렵, 로마 공화정을 주름잡은 대명문가로는 로마 자체와 맞먹는 역사를 가진 대귀족 가문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배출한 파비우스 씨족, 그리고 이들보다 훨씬 후발 주자(?)로 로마에 귀화한 사비니 혈통의 클라우디우스 씨족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외에도 카이킬리우스나 리키니우스, 셈프로니우스, 도미티우스 씨족과 같은 평민 귀족(Noble plebeians)28 가문들도 이 시기에 다수 출현했다. 역사가 깊으면서도 부, 명성, 공적까지 전부 갖춘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나 파비우스 막시무스, 파울루스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등의 명문대가 앞에서는 한 수 접어야 했다지만, 선두권 신귀족 가문들의 부, 명성은 늦게 원로원에 입성했음에도 율리우스 씨족은 물론이고 그보다 사정이 나았던 여러 세습 귀족 가문들을 훨씬 능가했다.
설상가상 율리우스 씨족은 로마 사회가 변화하며 대두한 신흥 평민 귀족 가문들과 경쟁할 재력도 없는 상황에서, 전 지파에 걸쳐 집정관도30, 전쟁 영웅도 배출하지 못했다. 기원전 2세기 지중해 세계 정복을 주도한 명문대가들은 그 결과로 막대한 재력을 쌓고, 이탈리아를 넘어 지중해 전역의 호족들은 물론 왕가까지 클리엔텔라 관계로 끌어들였다. 애당초 공화정 로마에서는 출세하려면 선거에 엄청난 정치 자금을 쓰고 후원 회원도 많이 동원해야 했고, 재벌급 재력과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가문이 아니라면 고위공직을 연이어 역임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집정관도 전쟁 영웅도 배출하지 못한 율리우스 씨족은 기원전 2세기 이후부터 재산과 피호민 수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며 고위공직에서 자연스럽게 밀려난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카이사르의 조상들이 무능해서 율리우스 씨족이 정계의 중심에서 밀려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세계 제국으로 도약한 로마에서 가문의 족보와 실제 영향력이 점차 별개가 되고 신진 세력들이 대두하는 가운데 기존 세습 귀족들도 여러 분가로 나뉘면서, 가문 간 경쟁이 치열해진 당시 원로원의 분위기에서 벌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따라서 유서 깊은 가문들은 이런 상황에서 밀려나지 않고 가문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했다. 상호 입양과 혼인을 통한 인척관계, 공통의 이해관계에 기반한 붕당 형성은 공화국 초기부터 볼 수 있는 현상이었으나, 이제는 치열해진 귀족가문 간 경쟁으로 인해 자신의 붕당 외의 다른 가문들을 적극적으로 배척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카이사르 가문은 아예 잔반 수준으로까지 몰락하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카이사르가 활동하던 시절 그가 한때 유피테르를 모시는 최고 사제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34 였으며, 그의 사촌 섹스투스가 퀴리누스를 모시는 고위 사제 플라멘 퀴리누스(Flamen Quirinalis)가 되고 팔촌 루키우스는 조점관이었던 등 모든 가문 구성원이 국가적 종교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종교에서의 율리우스 씨족의 막강한 위상은 마리우스 이후 가문의 부상과도 관련이 있겠으나, 원래 고위 사제는 실권은 없을지언정 가장 폐쇄적인 공직으로 노부스 호모에게는 거의 개방되지 않았으며 플라멘 디알리스를 비롯한 몇몇 신관직은 아예 평민이 맡을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세력유무야 어쨌건 역사가 오래된 씨족이 태고적부터 로마를 수호해 온 신들을 모시는 사제직에 적합하다고 여겼고, 때문에 고위 사제직은 족보만큼은 짱짱한 가문의 자제들을 뽑는 게 관례였다. 고위 사제는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었으며, 훗날 최고 제사장 자리를 카이사르가 잘 활용했던 것처럼 종교적 휴일을 선포하는 식으로 민회나 원로원 회의 등 정치 일정을 조절하고, 사면권을 행사하기도 했으며, 점괘가 불길하다는 등의 이유로 민회나 원로원의 결정을 무력화하거나 반대로 그런 시도를 막아낼 수 있는 권능이 있었다. 현대 공화정에 대입하면 헌법재판관이나 선관위원, 국회 운영위원, 가처분 판사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랬던지라 카이사르 가문은 권력의 중심에서는 밀려난 상황에서도, 세습 귀족가문들이 고위 사제 등을 세습하며 암암리에 맡아온 국가의 종교와 전통을 수호하는 역할을 통해 권위와 신망을 유지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변화의 흐름 속에서 카이사르 가문 역시 원로원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는데, 그들이 택한 방법은 자신들의 신분에 맞는 결혼 상대 대신 부유하고 유능해 장래가 기대되는 신진 세력을 찾아나서는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할아버지는 깡촌 아르피눔 출신의 듣보잡 라틴 평민으로 씨족이라는 '간판'이 없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사위로 맞았다. 비록 젊을 때부터 군인으로서 전도유망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때는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전이라 군 복무가 직업이 아니라 병역 의무였던 걸 생각하면 귀천상혼으로 집안 몰락 인증했다는 소리듣기 딱 좋은 혼사였다. 그런데 이후 마리우스는 당시 귀족들의 지리멸렬한 지휘에 더해 이제는 전쟁만 터지면 몇 년 동안 교대도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군 생활을 하는 로마 평민들의 불만을 교묘히 이용해 별 선거 운동도 안 하고 집정관 선거에 깜짝 출마해 당선되고 유구르타 전쟁을 빠른 승전으로 종결지었다. 거기에 더해 20만에 가까운 로마군을 학살하며 2차 포에니 전쟁 이래 최악의 위기를 가져온 게르만족의 대침공을 신묘한 전술로 멋지게 막아내는 일까지 이루어냈다. 결국 마리우스는 건국왕 로물루스와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에 이은 로마 제3의 건국자로 불리고 남들은 한두 번 지내기도 힘든 집정관직을 일곱 차례나 역임하는 위업을 세운다.
카이사르가 태어난 기원전 100년은, 개선식을 치르고 집정관을 연임하며 마리우스의 권세와 인기가 절정에 오른 시점이었다. 그의 인기와 방대한 인맥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40 인척 카이사르 가문에게도 마침내 고위직 진출의 길이 열렸다. 카이사르의 삼촌인 섹스투스는 기원전 91년 집정관, 카이사르의 칠촌당숙 루키우스는 기원전 90년 집정관을 지내게 된다. 카이사르의 아버지 가이우스 역시 법무관과 아시아 총독을 역임했으나, 집정관이 되기 전, BC 85년에 사망했다. 거기 더해 옵티마테스였던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가문은 카이사르의 외삼촌 셋이 나란히 집정관을 지내면서 로마 정치를 좌우하는 핵심 명문가로 발돋움한 상태였다. 한동안 집정관을 내지 못하던 카이사르 가문에서 드디어 삼촌 섹스투스와 칠촌당숙 루키우스가 집정관을 지냈고, 외가에서도 외삼촌 셋이 집정관을 지냈으며, 아버지도 법무관까지는 출세했으니 카이사르 가문은 다시 로마의 최상층에 진입한 셈이었다. 이런 든든한 가문배경은 정치를 막 시작하는 카이사르에게 큰 힘이 되었다. 아버지가 끝내 집정관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일은 카이사르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마리우스와 킨나로 이어지는 포풀라레스 정권에서 아버지 가이우스가 집정관을 지냈으면 그는 마리우스파 핵심인사로 분류되었을 것이고, 그의 아들인 카이사르 역시 술라의 숙청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의 성공이 가문 전통이 되어 내려온 것인지, 카이사르 역시 출신 지역과 가문에 얽매이는 대신 개방적으로 혼맥을 맺고 인재를 기용했다. 카이사르 본인은 코르넬리아 킨나, 폼페이아 술라, 칼푸르니아처럼 명문대가 출신 배우자를 맞으면서도, 가문의 여성들은 명문 귀족 대신 성장 가능성이 있고 확고한 동맹이 되어줄 지방 유력자와 맺어주게 된다. 카이사르는 퀸투스 페디우스나 아티우스 발부스 같은 지방 명문가 출신들과 혼맥을 맺고 이들을 중용한 것을 넘어, 포로와 유랑민 출신이었던 벤티디우스, 신체에 결함이 있던 바티니우스, 이탈리아 유력자는커녕 속주로 이주한 로마인의 후예조차도 아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같은 외국인까지 폭넓게 중용했다. 물론 옵티마테스 진영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린 반면, 카이사르는 정실주의 없이 능력만 고려했다는 식으로 카이사르의 인재 기용을 단순하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옵티마테스 진영도 잠재력 있는 신진세력이 눈에 띄면 기용을 망설이지 않았고, 카이사르 역시 기존 명문귀족들을 더 우대했다. 카이사르 진영에도 레피두스나 돌라벨라,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데키무스 브루투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같은 명문귀족들이 즐비했고, 이들은 신진 세력보다 우선적으로 주요 관직에 기용되었다. 다만 기존 귀족들은 선을 긋고 미관말직에나 머물게 했을, 벤티디우스나 발부스 같은 무명 인사나 외국인까지도 카이사르는 군대 지휘를 맡기고 이후 집정관직을 역임하며 로마 정계의 정점에 오를 수 있도록 파격적으로 중용한 것이 큰 차이였다. 결국 이런 카이사르의 개방성과 능력 중심의 인재 기용은 마리우스를 뛰어넘는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라는 두 번의 대박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가문의 입지가 부침을 겪은 데 개인의 행운과 불운뿐 아니라 시대상황이 크게 작용했던 만큼, 카이사르 가문이 특이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카이사르 가문처럼 한때 경쟁력을 잃고 밀려났던 세습 귀족들은 당시 로마에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술라, 카틸리나인데 이들은 원로원 의석은 유지한 카이사르 가문이 애교로 보일 만큼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진짜 명문 귀족의 후예였다. 이렇게 공화정 후기 로마 정치의 최상층부에서 밀려났던 명문귀족들 중 일부가 로마의 영역이 크게 팽창하고, 기존 명문대가의 일원이 아니었으나 정복지에서의 군사와 상업활동을 통해 권력과 부를 거머쥔 신진 세력들과의 연대를 통해 로마 정치의 중심에 다시 진입하는 일도 당시에는 드물지 않았다. 돈과 영향력에 비해 부족한 가문의 족보는 늘 신진 세력의 약점이었고 익숙한 '브랜드'를 선호하는 유권자와 동료 정치인들의 지지를 얻는 데는 명문 귀족들과의 인척관계와 정치적 연대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인척 마리우스 덕을 봤던 카이사르 가문과 마찬가지로 마리우스의 휘하에서 활약하면서 로마 귀족사회로 돌아올 기회를 잡았던 술라가 그런 경우였고, 본인의 혈통이 진짜 세습 귀족이기는 했어도 맨주먹으로 태어나 신진세력이나 다름없었던 술라와의 연대로 원로원에서 영향력을 키운 카틸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들은 고위직으로 진출할 길이 열렸을지언정 다른 가문들처럼 정치 자금을 소모할 만큼 부유하지는 않았던지라, 출세의 과정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카이사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의 출생지와 자택은 로마의 대표적인 서민 주거지로, 귀족들이 선호하지 않은 수부라 구역이었다. 이처럼 카이사르 가문은 지금으로 치면 재산 규모가 평범한 영세 자산가 수준인 귀족에 불과했다. 지금으로 치면 유명한 조상들을 둔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강북의 다세대주택 밀집지역에서 나고 자란 정치인이었던 셈이다. 더욱이 원로원 의원은 플라미니우스 법에 따라 상공업과 임대업도 할 수 없었던지라, 건국 이래 대대로 귀족이었던 카이사르 가문은 지방에서 은행업을 통해 중견기업 정도 규모의 재산을 일군 옥타비우스 같은 신참 원로원 의원 집안보다도 재산이 현저히 적었다. 때문에 카이사르는 경력을 쌓는 과정에서 큰 빚을 지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세계제국으로 도약한 로마에서 공직에는 엄청난 이권이 걸려 있었고, 때문에 후보자는 당선되기 위해 큰돈을 들여 공공사업을 벌이고 유권자들에게 뇌물을 뿌려야 했다. 따라서 혼맥과 인맥 덕에 출세에 도움이 될 연줄과 인지도가 있었음에도,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때문에 카이사르의 정치 경력은 거의 끝장날 뻔했다. 크라수스와 같은 유력한 사업가들의 보증이 아니었으면, 비슷한 처지였던 카틸리나처럼 빚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리우스와의 연대로 카이사르 가문의 출세길이 다시 열리기는 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카이사르 가문은 당시 로마를 장악한 옵티마테스 고위 귀족들과 온전히 한 편이 될 수 없었다. 마리우스는 씨족 이름조차 없는 그야말로 촌구석의 듣보잡 평민으로서 원로원 의석을 오랫동안 차지해 온 귀족들과 대립하는 입장이었고, 마리우스의 붕당은 민중파, 혹은 포풀라레스로 불리게 된다. 때문에 카이사르 가문은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혈통으로는 옵티마테스에 속하는 게 당연했으나, 공화정 로마의 부유한 명문 귀족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마리우스와 포풀라레스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뒤를 이어 포풀라레스 정권의 수장이 된 킨나의 딸과 결혼하면서,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가 되며 마리우스파와의 연대를 더욱 확고히 하게 된다. 또한 카이사르 가문은 술라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술라의 첫 부인이 율리우스 가문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리우스의 처가로서 마리우스 붕당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카이사르 가문이 술라의 숙청에서 살아남아 로마 정치의 중심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데는 술라와의 인척관계가 유리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술라의 첫 결혼에서 태어난 딸인 코르넬리아 술라는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결혼해 폼페이아를 낳았는데, 이후 그녀는 카이사르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와의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그의 숙적이었던 옵티마테스의 대표 주자 술라파와의 관계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것이다.
카이사르 가문이 포풀라레스와 옵티마테스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는 점은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가계만 봐도 드러난다.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문은 비록 성향이 온건하긴 했지만 엄연히 옵티마테스의 중진으로 간주되었고 덕분에 술라의 숙청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 다만 코타 가문은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나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처럼 원로원의 특권만을 앞세우는 강경한 옵티마테스 인사들은 아니었고, 카이사르의 외삼촌인 루키우스는 원로원이 독점하던 배심원 역할을 기사계급과 함께 수행하는 법률을 입안하기도 했다. 다만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이 민중파라는 것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전혀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술라의 숙청 이후에도 마리우스는 서민들에게 전쟁 영웅이자 민중의 편으로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내전과 술라의 무자비한 숙청으로 마리우스의 친족들은 남김없이 살해당했기 때문에 남은 인척은 마리우스의 처조카인 카이사르뿐이었고, 거기에 킨나의 사위임을 내세워 그는 젊은 나이부터 포풀라레스 붕당의 영수가 된다.
포풀라레스와 옵티마테스 양 쪽과 전부 밀접하고, 고귀하지만 부침을 겪은 가문 출신으로서 빈민가에서 경력을 시작한 카이사르의 특별한 배경은 카이사르의 정치적 행적과 성공의 비결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이다. 이런 배경 덕에 정치 입문 시점부터 카이사르는 로마 건국까지 올라가는 유서 깊은 세습 귀족으로서 그들이 독점하던 특권을 온전히 향유하면서도, 포풀라레스 붕당의 수장으로서 평민과 기사계급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양쪽의 이점을 전부 취할 수 있었다. 이를 이용해 카이사르는 법무관도 지내기 전에 집정관을 여러 차례 지낸 원로에게 어울리는 자리인 최고 제사장에 당선되고,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대등한 입장에서 삼두연합을 맺을 수 있었다. 삼두연합을 통해 권력을 얻은 카이사르는 마리우스나 폼페이우스 같은 평민 야심가들과는 달리 명문귀족들의 인정을 갈구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대대로 물려받았고 최고 제사장이 되며 더 강화된 종교적 권능까지 이용해 원하는 바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그런 추진력으로 그는 토지개혁 등 그라쿠스 형제가 못 이룬 꿈을 일부분이나마 이루고, 갈리아 전쟁을 통해 얻은 막강한 무력과 지지자들을 등에 업고 옵티마테스 붕당을 해체해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열 수 있는 기반을 닦게 되었다.
정치적 평가
내전기 이후로 혼란에 빠진 공화정 로마를 종결시키고 제정의 길을 연 인물이다. 카이사르 개인의 정치적 능력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으나, 그가 끼친 영향이 결과적으로 로마에 긍정적인 것이었는지는 평가가 갈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가 낳은 걸출한 인재로서 포에니 전쟁 이후 표류하기 시작한 로마 제국의 체제를 재정비하려고 했던 개혁가인 동시에, 공화정을 파멸시킨 독재자라는 양극의 평가가 존재하는 인물이다. 공화정만으로 로마가 결코 유지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개혁을 꿈꾸던 인물이라는 평과 그저 최고가 아니면 참지 못 했던 성격 때문에 최고 권력자 자리에 도전했던 사람이라는 평이 갈린다. 사실 둘 다였을 가능성이 높다. 카이사르 정도의 머리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야망이 로마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중심 체제의 문제점을 잘 파악했으며 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 또한 잘 제시했다. 물론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신체제의 한계와 부작용 역시 잘 알았겠지만 엄청나게 유능한 거물이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하튼 훗날 몽테스키외는 카이사르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카이사르가 행운을 타고났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비범한 인물이 뛰어난 자질을 많이 지녔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결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어떤 군대를 지휘했어도 승리자가 되었을 것이고,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도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다.
로마인의 위대성과 쇠퇴의 원인에 관한 고찰 11장 中프랑스어영어
긍정적 평가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
역사가 테오도르 몸젠
기본적으로 카이사르는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고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그야말로 동서고금을 통틀어서도 탑 오브 탑에 들어갈 만큼 뛰어났던 정치가였다. 광활한 고대 로마 영토를 볼 때, 당시의 포로 로마노에서 정치를 논하는 식의 공화정은 한계가 분명했다. 게다가 공화국 말기에 들어서는 공화정과는 거리가 멀어져 과두정으로 변질되었는데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공화정 체제가 한계에 달해 과두화되었다 볼 수 있다. 그 증거로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지만, 결국 황제는 탄생한 점을 들 수 있다. 더군다나 이미 그라쿠스 형제의 실패, 술라와 마리우스의 내전 등을 통해 평민 계급과 원로원 계급의 골은 깊어져 있었다. 즉, 강대한 카리스마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이 점은 사라질 수 없고 장기적으로 로마를 잠식했을 것이다. 이 같은 점으로 볼 때, 개인의 야욕이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나, 단순히 사욕에만 불탄 것이 아니라 당대 시스템적인 한계점과 이를 해결하는 방법도 역시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카이사르의 정치 체제는 1인이 독재를 하되 민중의 뜻을 존중하는 체제였다. 원로원의 부패한 기득권 세력을 청산하고 시민들에게 권리를 일부 되돌려주는 방식인 것이다. 카이사르가 시행한 개혁들은 무산자를 비롯한 빈민, 해방 노예, 속주민들을 구제하고 원로원과 기사의 세력을 억제하여 민중에게 실익이 되는 개혁이었다. 그런 까닭에 민중이 카이사르를 지지한 것이지만.
출생도 성격도 누구보다 귀족적이었던 카이사르가 민중의 숙원이었던 그라쿠스의 정책을 독재 권력으로 시행한 것은 언뜻 모순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에 대해 포퓰리즘 정책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은 너무 현대적 관점에서 2,000년 전 활약한 인물을 폄하하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젊을 때부터 마지막까지 민중 파였다. 자신의 고모부이자 민중파의 상징이었던 마리우스의 장례식, 그것도 술라의 지배하인 로마 한가운데서 10대의 나이에 대놓고 민중파를 지지하는 조문을 읊어서 술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이미 간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타고난 정치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학계는 제정의 수립 여부를 떠나 "수백 년간 대립해 온 평민-귀족 간의 대결과 로마의 모순을 해결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선 이견이 없다.
카이사르는 술라에 의해 침탈당한 공적 소유를 복원하여 성장과 팽창에서 분배를 지향해 막대한 부를 지닌 귀족과 경제적으로 몰락한 평민과의 양극화를 효과적으로 해결했다. 그라쿠스 형제를 시작으로 민중파는 이러한 개혁을 실시하려 했으나 원로원의 보수 귀족 세력에 의해 늘 저지되었는데 카이사르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국가 개혁을 성공적으로 실시함으로써 거의 100년간 이어지던 민중과 민중파의 숙원을 해결한 셈이다. 호민관 그라쿠스가 이루지 못했던 문제를 역설적이게도 독재관 카이사르가 이루어낸 것.
부정적 평가 문단에서 로마 공화정이 문제가 많기는 해도 민주정이기에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원로원도 민중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말하며 그라쿠스 형제와 폼페이우스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데, 이 주장과 그 예시들이 모두 오류가 심각한 부분으로, 특히 예시로 든 두 가지는 오히려 원로원이 민중의 요구를 절대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반증사례에 불과하다. 1차적으로 당시 로마 공화정은 민주정이 아닌 귀족 공화정으로 변질되어 버린 지 오래된 국가였다. 그라쿠스 형제는 그 요구를 들어주려다가 원로원한테 찍혀서 원로원의 친위 쿠데타로 죽었으며 폼페이우스의 개혁책 역시 카이사르의 인기를 조금이라도 깎아내기 위한 기만책이라는 것이 대세다. 이는 억측이 아닌 게 당장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당시, 원로원에서 드루수스라는 인물을 내세워 더 급진적이고 민중 친화적인 개혁안을 내세우게 해서 가이우스 그라쿠스(동생)를 낙선시킨 뒤 가이우스의 법안을 철폐시키고 자기네가 내세웠던 개혁안을 모조리 엎어버리고 여기에 반발하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 지지자들을 원로원 최종선고로 학살해 버린다.
또한, 공화정의 몰락하지 않는 IF 시나리오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은 의미가 없다. 애당초 역사에 가정은 필요가 없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당시 로마의 공화제는 모순이 너무 많이 쌓여서 설령 공화제를 유지하려고 해도 한 번은 몰락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우선적으로 로마 공화정은 그냥 민주 공화정이 아닌 귀족 공화정이기 때문에, 아예 민주 공화정으로 한 번에 갈아엎지 않는 이상, 원로원은 귀족 공화정의 집정관도, 호민관도 비교될 수 없는 로마의 정치 체계를 구축하는 핵심 축에 해당한다. 그런데 로마 공화정의 정치 시스템의 핵심 축인 원로원이 기득권이자 타파 대상이라는 게 결정적인 문제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원로원을 타파하는 순간 로마 공화정은 무너진다.
그리고 민중파의 요구는 국가의 근간이 되는 중산층의 빈민화라는 치명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로마 공화정의 건전성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해결되어야 했다는 것에 대체로 다 동의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화정을 망가트리지 않은 채 이런 모순들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을지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이미 농지법이 정식 법안으로 통과되었는데도 원로원 최종권고를 통해 민중파들을 다 죽인 뒤 원로원파가 농지법을 무력화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민중파의 합법적인 요구는 원로원의 불법적인 탄압으로 틀어막히는 것이 로마 공화정 말기의 현실이었다
우선적으로 합법적이고 비교적 평화로운 수단으로 정당한 수단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가장 합리적인 시도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시도들을 그라쿠스 형제 같은 민중파가 감행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길거리에서 대놓고 때려죽인다거나,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하여 수도에서 지지자 3,000여 명을 학살한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똑같은 합법적이고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면 카이사르도 같은 꼴이 났을 거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 경우 우리는 역사책에서 로마의 사실상 첫 황제 취급받는 카이사르가 아니라, 그라쿠스처럼 개혁하다가 죽은 카이사르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민중파의 요구는 필연적으로 다시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개혁이 성공하거나 로마가 망할 때까지 제 2, 3, 4의 카이사르를 보게 되었을 것이고, 원로원의 과격한 대응에 살아남아 맞서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제2, 3, 4의 카이사르는 더 강경해져야 했을 것이다. 실제 그라쿠스 형제도 제일 먼저 그나마 온건한 형이 죽고, 동생은 더 강경해졌고, 마리우스 시절에는 휘하의 사투르니누스가 그라쿠스 형제보다도 더더욱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카이사르가 일으킨 내전은 결국 원로원의 대응에 의해 살아남기 위해 마리우스 시절보다도 한 단계 더 강경해진 모습이라고 보는 게 맞다.
그렇다고 원로원 없이 새로운 로마 공화정을 꾸려간다는 시나리오를 본다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도시국가를 넘어서서 지역의 패권을 좌지우지하는 국가 중에서 공화정으로 운영되던 나라는 로마 이전에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당장 공화정은 세계 역사에서 로마 공화정 이후에는 한참 동안 찾아보기도 힘든 정치 체계이다. 1,800년쯤 뒤의 영국이나 미국 정도는 되어야지 말을 꺼내 볼 만한데, 영국의 입헌 군주정은 긴 시간 왕정과 귀족, 부르주아 층간의 갈등을 계기로 긴 시간에 만들어진 타협의 결과물에 가까운 것이고, 왕정도 아니었던 로마에서 단시간에 따라 할 수 있던 게 아니었다. 그나마 비교 대상으로 미국을 정치 시스템을 로마가 취할 수 있었을지 살펴본다면 당대의 최고위 지식인 및 지도자층 55명이 모여 지금까지의 공화정 시스템의 장점을 최대한 취합해서 수개월간의 긴 회의와 극적인 타협으로 간신히 만든 시스템이 미국 정치 시스템이란 걸 감안하면 매우 어렵다.
이렇게 보면 공화정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기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위업인지 알 수 있다. 무려 1,800년의 세월을 넘어야 하며, 세계 역사적으로 또다시 최초로 기존의 원로원 기반 귀족 공화정이 아닌 또 다른 공화정의 새 패러다임을 그 당시에 제시한다는 것은 시간여행물이나 이세계물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의 비현실적인 시나리오이다. 또한 통신 기술과 투표 시스템의 비효율성 등 여러 가지 기술적 한계까지 감안하면 당시 소수의 귀족 공화정으로도 의견을 모으기 힘들어서 넓은 영토를 관리하기 힘들었던 게 로마였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는, 이상적인 민주 공화정에 가까운 형태로 변화한다는 건 한층 더 비현실적인 시나리오며 그렇다고 원로원이 민중파에 양보를 할 수 있을까? 이 양보를 할 생각이 있었다면 이미 그라쿠스 형제 시기에 양보했을 것이다. 이미 최악의 수단으로 최소 3번 이상 민중파를 탄압한 원로원이 갑자기 민중파의 요구를 들어줄 정도로 급변한다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당장 수백 명 단위의 타락한 기득권층을 단체로 개과천선시킨다는 사례는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결국 종합해 보자면, 원로원의 무력화 및 기득권의 소실이 사실상 로마 공화정의 종말에 가까운 형태라고 본다면 원로원이 양보하지 않는 당시의 로마의 상황을 감안하면 로마 공화정의 종말은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걸 단순한 결과론이라고 보긴 힘든 게, 원로원 자신이 초래한 결과물이므로 사실상 자업자득에 가까운 전개이며, 무려 그라쿠스 형제와 마리우스까지 포함해서 최소한 3번의 해결 찬스까지 자기 손으로 엎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이만한 규모의 민중의 요구를 무려 3번이나 무시하고도 멸망 안 당한 시나리오가 드물다는 걸 감안할 때, 그들에게는 이미 충분히 많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스스로 져버린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더군다나, 초기 로마면 몰라도 당시 로마를 권력이 쪼개진 체제라고 주장하며 "폭주하는 집정관은 탄핵으로 어루만져주면 되지만, 폭주하는 황제에게는 칼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라는 주장은 로마 공화정의 정치상황을 하나도 모르면서 그야말로 문제의 본질에서 눈을 돌리는 헛소리인데, 공화정 말기 로마의 최대의 문제는 탄핵할 수 있는 집정관이 아니라 바로 원로원 최종권고였기 때문이다.
이 원로원 최종 권고가 발동되어 집정관에게 권한이 부여되면 거부권이나 탄핵을 모조리 무시하므로, 그야말로 칼 말고는 해결책이 없는 수단이자 그 자체가 자국민 정적을 향한 재판 없는 절대 무력 행사 선언이나 다름없다. 발동되면 천 단위 이상의 자국민 학살조차 정당화하고, 이게 발동된 순간 항복한 정적조차 죽어야 끝났으며 물론 재판 따윈 없었다. 어지간한 절대왕정 체제의 왕도 단체 학살을 해버리면 반란이 일어나므로 함부로 휘두르기 힘든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하는 이 최악의 수단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문제지만, 초기 로마에는 이게 발동되지 않는 선에서 로마의 권력 체계가 잘 유지되어 왔다라기보다는 초기 로마에는 아예 이런 수단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제도는 사실상 민중파를 억누르기 위해 고안된 제도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로마 공화정 말기에는 이 원로원 최종권고가 남용되었으며, 무엇보다 국가의 이득이 아니라 자기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남용되었다는 것이 로마 공화정 말기의 결정적인 문제점 중 하나이다. 건강한 국가 시스템에 권력 견제가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이 이것이다. 권력자나 권력 집단이 사익을 포기하고 오로지 국가를 위해서만 결정을 내린다면, 독재의 폐해는 현저히 줄어든다. 하지만 권력자나 권력자가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견제가 필요한 것인데 로마 역사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원로원 최종권고가 발동된 안건이 바로 민중의 요구를 주장하던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 지지자들을 학살하는 것이었으며, 심지어 그라쿠스 1명도 아니고 그 지지자 약 3,250여 명을 싹 다 죽여버린다. 권력 분리가 잘 되지 않은 건강하지 않은 정치 시스템이 일으키는 폐해의 대표적인 예시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원로원 최종권고는 로마에 내려오던 무슨 전통적인 방법 같은 것도 아니다. 원래 로마에 내려오던 제도는 원로원 권고로, 집정관이 도를 넘을 가능성이 있으면 원로원의 권고로 이를 바로잡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느새 원로원 최종 권고가 되어 사람을 마구 학살해도 용납되는 어처구니없는 제도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제도는 결국 대(對) 민중파 최종병기로, 민중파를 때려잡기 위해 원로원에서 고안된 제도로 봐도 무방하다. 전술하였듯 최초로 발동한 것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를 때려잡기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오늘날 정확한 표결 수는 알 수 없지만 로마에서는 한번 투표하면 수천에서 수만 명 정도 투표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오늘날의 투표 시스템과 로마 공화정의 투표 시스템이 다르므로 투표 수와 지지자 수를 일대일로 대입할 수는 없지만 무려 3,000명 단위로 지지자를 학살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특정 지지자의 정치 지지 기반을 추후에도 씨도 안 남기고 학살하려고 한 뒤, 도망치거나 숨지 못한 사람들 빼곤 다 죽였다고 봐도 될 정도의 학살이다. 공화정이라는 시스템이 투표로 인해 돌아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권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수단이 군주정의 권력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그나마 상시 발동이 아니라는 점이겠지만, 대신에 상시 발동이 아니므로 한번 발동이 걸리면 군주정에서조차 반란이 무서워서 함부로 못 하는 짓을 끝까지 해버릴 수 있다.
또한 키케로와 카토는 개인적으로는 청렴했을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절대 민주적이라고 할 수가 없는 인물들이었다. 당장 키케로가 자신의 최고 업적이라고 내세웠던 카틸리나 탄핵부터가 문학사적으로는 걸작 소리를 듣지만, 그 내막을 뜯어보면 유력한 정치인과 그 지지자들을 재판도 없이 처형해 놓고는 그것이 로마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며 정당화하며 법치주의를 완전히 무시한 연설이었다. 당장 키케로는 이 사건에서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시킨 뒤 카틸리나와 그 지지자들을 학살했다. 그라쿠스 때처럼, 약 3,000명의 지지자들도 학살시켰으며, 이는 카틸리나의 지지자들을 보이는 족족 다 죽여버렸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31 참고로 이게 처음도 아니고, 뭘 잘못 먹고 실언을 한 것도 아닌 게 키케로는 그라쿠스를 죽이는데 앞장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를 옹호하는 걸로도 모자라 이런 걸 명대사랍시고 남길 정도로 극단적인 반민주적인 인사였다.
누만티아를 파괴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훌륭한 인물로 뛰어난 군인이지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죽인 평범한 개인 푸블리우스 나시카보다 공화국에 더 유익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카토 역시 필리버스터를 남발하며 카이사르를 견제했다며 고평가 받지만, 이 인간이 필리버스터로 반대한 안건이라는 게 바로 민중에게 토지를 재분배하는 법안이었다. 그리고 그걸로도 모자라 카토는 앞서 언급한 키케로의 카틸리나 탄핵 때 누구보다도 키케로에게 찬성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카이사르까지 카틸리나랑 한 패라고 묶어서 보내버리려들었다는 기록이 버젓이 남아있을 정도로 법치주의나 공정함과는 거리가 먼 인사였다. 참고로 이게 그나마 원로원파 중에서 나은 인물들로 언급되는 인물들인데도 이런 수준이었다.
심지어 술라가 카이사르보다 낫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데, 술라가 사욕을 위하지 않았다는 부분을 아무리 높게 평가하더라도 기득권인 원로원을 위해서 내전을 일으킨 뒤, 내전 이후에도 수천 명 단위로 정적을 학살했다. 사욕으로 움직이진 않았지만 기득권층을 위해서 내전을 벌이고, 정적을 학살하고 독재를 하다가 내려온 사람이 낫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술라는 군사적 능력과 권력을 잡는 능력은 빼어났을지 몰라도 당시 로마체계의 문제의 본질조차 이해하지 못해서 결국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성과는 전무했으며, 개혁을 일으키긴 했지만 긍정적인 영향은 없는 반면 내전으로 국내를 피폐화시킨 이후에도 민중파를 학살하고 원로원 최종 권고 발동 등으로 국가 시스템의 불안정성만 키우는 퇴보나 다름없는 개악이었다. "무능한 리더가 열심히 일해서 열심히 말아먹었지만 의도는 좋았다."는 건데, 카이사르가 민중에게 가져온 긍정적인 부분은 "독재를 정당화할 순 없다."라며 전부 무시한 뒤, 술라가 말아먹은 것에 대한 평가는 다 건너뛰고, 그 좋았던 의도에 대한 평가만 하면 전혀 공평한 비교가 못 된다.
결정적으로 일부 공화정 말기의 원로원이 청렴한 사람이었다, 훌륭한 사람이었다, 아니었다를 논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과도 거리가 멀다. 원로원이 비판받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악이라서가 아니다. 단순히 그들이 부나 권력을 많이 가져서도 아니다. 로마는 중산층까지 무너져가는 상황에 있고 심지어 로마의 근간을 이루는 시민병조차 은퇴하면 퇴직금으로 땅도 못 받고, 벌어둔 돈은 부족하기 짝이 없어서 깡통차는 상황이다 보니 내전이나 반란 일어나기 딱 좋은 상황을 만들어 놓았는데, 원로원은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해결하지 않은 채로 부를 독점하고, 해결하라고 뽑아놓은 호민관들이 이 점을 개선하려 들면 원로원 최종권고를 통해 박살 내 버렸다. 그게 악이잖아 하다못해 원로원이 부를 쓸어 담더라도 시민병이 입에 풀칠할 정도의 환경이라도 만들어주고 나서 벌어진 빈부격차라면 그래도 공화정을 유지하는 것이 독재보단 낫다고 주장할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반란이나 내전을 부르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국정운영을 진행한 것이다. 이런 시스템 하에서는 설령 내전이나 반란이 진압되더라도 얼마 안 가서 다시 발발할 게 뻔하고, 다시금 진압되더라도 무한반복될 게 뻔하다. 그 원로원 의원 중 몇 명이 개인적으로 청렴했다고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셈이다. 더군다나 그 상황을 수습할 의지조차 없었고, 그 해결을 하려는 민중파의 의견을 묵살하기 위해, 원로원 최종 권고를 남발하거나 필리버스터로 토지 재분배를 막는 데 앞장서기까지 한 모습을 보인다면 더더욱 옹호의 여지가 없다.
카이사르가 정적을 숙청한 뒤, 절대 권력을 구축한 것이 민주주의에 악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동시에 당시의 원로원이 이끌어가던 공화정은 민중을 위한 법을 만들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가 없다. 때문에 원로원한테서 권력을 뺏은 것 자체는 잘못한 일이라고 볼 수가 없으머, 카이사르의 오점을 찾는다면 그렇게 획득한 권력을 독점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권력을 손에 넣은 자의 인간적 한계이자 당시 시대 그 자체의 한계라고 봐야지, 카이사르가 야망이 넘치는 폭군이라서 그랬다고 보는 것은 심한 처사다. 그리고 전제정은 고대와 중세 기준으로 봤을 때 매우 효율적인 정치 체제이다. 오늘날에야 교육의 질 상승, 계몽주의와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둔 인권 의식의 상승, 정보통신기술과 교통수단의 발달 등을 통해 민주주의가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자리 잡았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그러질 못했으며 영역이 넓어지고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진 로마 입장에서 민주정이든 과두정이든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한 사람이 모든 정권을 위임받아 일을 처리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빠르다. 전제정에는 무능한 한 사람에 의해 나라가 기우는 형세를 만들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마저도 민주정 혹은 과두정에서의 지지부진한 일처리와 다수라는 명목하에 개혁 의지를 없애버리는 것보단 낫다. 전자는 유능한 한 사람이 나오면 나라가 개혁될 수 있지만 후자는 그 다수가 전부 바뀌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바라본 것이지만 카이사르는 유능했고, 불안한 정세를 바로잡고 다수의 의견을 수용할 능력이 있었다.
애당초 당시 공화정이 망하고 원수정으로 간 것도 공화정이 시대적, 시스템적 한계 때문에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지 공화정 그 자체의 비효율성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사실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파괴했다고들 흔히 이야기하지만, 카이사르가 살아 있을 당시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로마의 공화정은 명목상으로나마 계속 존속했다. 로마가 황제정이 된 것은 그 후임자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직위였던 임페라토르(총사령관)가 절대 권력을 지닌 채로 그 후계자들에게 세습되면서 왕과 같은 권위를 갖추며 종국에는 엠퍼러(황제)의 어원이 되는 지경에 이르면서 공식화된 거지, 당장 아우구스투스도 자신을 부를 때는 프린켑스(제1시민)라고 불렀고, 공식적인 직함은 어디까지나 그전부터 있던 호민관이었다. 정확히는 국가의 대표가 모든 권력을 잡고 정국을 다스리는 전제정이라는 개념 자체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있다.
더불어 무엇보다 로마 공화정의 본질이 귀족 과두정인 것이 현실인 시점에서 귀족 과두정을 무너뜨리고 1인 독재정을 만들었다고 한들 그것이 민주주의의 파괴로 비판받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현실이다.
물론 이 시점에 이미 로마의 공화정이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아우구스투스가 한 일이지 카이사르가 한 일이 아니다. 카이사르는 왕과 다를 바 없는 권력을 누리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왕에 취임한 적이 없으며, 기존의 임시직이었던 독재관직을 종신화하는 것에서 그쳤다. 그리고 이마저도 원로원의 거두였던 술라가 먼저 한 짓이지 딱히 카이사르가 오리지널인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앉은자리에서 1년도 안 되어 암살로 숨을 거두었기에, 그가 평생 독재자로 살았을지, 아니면 술라처럼 2년 만에 은퇴하고 내려왔을지조차 판단할 수가 없게 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당대 로마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실천했다는 점이다. 당시 로마는 포에니 전쟁을 겪으면서 이로 인해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환경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전쟁의 승리로 인해 일개 도시국가가 아닌 거대 제국으로 변모했고 내부적으로는 거대 제국으로 변화한 상태에서 현 체제는 이를 수용하기에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공화제 자체가 비효율적인 제도는 아니지만 당시 사회 발전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고 거기에 더해 로마의 공화제는 귀족과 평민 간 차별이 존재하고 로마인과 외부인 간 신분상 차이가 있는 등 불완전했다는 점도 문제였다. 그런데 기존의 원로원파들은 이런 변화에 대한 대처를 소홀히 하고 오히려 포에니 전쟁으로 인한 과실을 독점하는 데만 급급했으나 카이사르는 이 변화를 읽고 민중의 편에 서서 기득권과 싸웠다. 이 점만 놓고 봐도 카이사르는 쉽게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는 인물이다.
부정적 평가
독재자들이 제정한 법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하다는 말인가? 아테네에서 저 유명한 30인(三十人) 독재자가 법률을 부과하려고 한다면, 또 설령 아테네인들 전부가 독재자의 법률을 좋아한다면, 그것만으로 그 법률을 정당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법률론」 1.15.42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여! (중략) 제가 염려하는 바는 당신이 영예의 참된 길을 망각한 채, 당신 혼자가 우리 모두보다 강한 것을 영예로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며, 동료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그들을 두렵게 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영예의 길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소중한 시민이 되는 것, 국가에 공헌하는 것, 칭송받는 것, 존경받는 것, 사랑받는 것이야말로 영예의 길입니다. 실로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반감과 혐오와 미약하고 덧없는 길입니다.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나를 증오해도 상관없다." 극 중에서도 이렇게 말했던 사람은 파멸의 길을 걸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몰락을 보고서도 사랑받기가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여전히 원한다면, 누가 무슨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카이사르가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가련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살해자에게 처벌이 아니라 최고의 명예를 안겨 주게 될 그런 삶은 결코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필리피카이」 中
역사서를 읽었고 고대에 벌어진 일들의 기록을 잘 활용한다면, 공화국에서 개인 시민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분간을 반드시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시민 자격으로서는 카이사르나 스키피오 같이 될 수 있다면 차라리 스키피오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중략) 또 고대의 저술가들이 카이사르를 아무리 칭송하여도 그 영광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를 칭송한 사람들은 그의 좋은 운명에 현혹되었거나, 카이사르(황제)의 이름으로 운영된 제국이 너무 오래 지속하여 그에 대하여 자유롭게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겁먹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저술가들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카이사르에 대하여 어떤 글을 했겠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그 저술가들이 카틸리나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지 살펴보면 된다. 카이사르는 이 사람과 비해 보면 더욱더 혐오스러운 자이다. 카틸리나는 고작 국가를 전복하려는 생각을 품었을 뿐이지만, 카이사르는 그런 생각을 실천했으니 더욱 비난받아 마땅하다. 또 독자들은 저술가들이 카이사르 암살자인 브루투스를 어떻게 칭송하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카이사르의 권세에 눌려 그를 비난하지 못하니까 그 적수를 높이 칭송했던 것이다.
(중략)
그리고 그가 그다음으로 암군들의 시대를 자세히 검토해 본다면, 전쟁으로 적개심이 가득한 시대, 소요 사태로 의견 분열로 가득 찬 시대, 전시나 평시나 가리지 않고 잔인한 시대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중략) 그는 카이사르가 로마, 이탈리아, 그리고 온 세상에 얼마나 많은 혼란을 초래했는지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1-10 中
후일 이 파당의 지도자로 올라선 카이사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렸고 그리하여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목에다 멍에를 얹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1-17 中
지금껏 역사가들은 카이사르에게 지나친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자격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이사르는 - 비록 불완전했지만 - 합법적으로 선출된 행정관들을 군사 독재관으로 대체했다. 게다가 단지 자신의 야심을 위해 100만이 넘는 갈리아인을 죽였고, 그만큼의 수를 노예로 팔았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 로마는 또 한 차례의 내전을 겪었고, 이어서 제정 시대로 넘어갔다. 카이사르가 죽은 지 100년 뒤에 그의 전기를 집필한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는 암살될 만한 인물이었다"라고 평가했다.
필립 마티작, 「로마 공화정」 율리우스 카이사르 中
우리나라에선《로마인 이야기》의 영향으로 무슨 결함이 없는 완벽한 체제를 그린 영웅으로만 통하지만, 정작 서양에서는 그렇지 않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카이사르라고 까면 독재적 야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의미로도 통한다.
로마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혼합정의 형태를 한 공화정 체제이다. 즉, 왕정의 요소를 지닌 행정관, 귀족정의 요소를 지닌 원로원, 민주정의 요소를 지닌 민회가 상호견제를 하면서 권력이 쪼개진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근현대의 국가들에 비하면 문제점이 많으며, 실상은 원로원 위주의 체제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에서는 폭주하는 집정관과 호민관을 탄핵할 수 있었고, 허튼짓 하는 원로원 의원을 제명할 수 있었고, 민회는 집정관, 법무관, 호민관, 조영관 등 행정관들을 선출했다. 반면 카이사르로부터 비롯된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에 대한 합법적인 견제 장치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고 최고 권력자의 폭정에 대항할 수단은 군사 쿠데타와 암살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마키아벨리가《로마사론》에서 쓴 표현을 빌리자면, 폭주하는 집정관은 탄핵으로 어루만져주면 되지만, 폭주하는 황제에게는 칼 말고는 해결책이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카이사르 본인부터가 칼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탄핵이 아니라 암살로 정치 커리어가 끝나버렸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파괴해 버린 로마 공화정은 훗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전제정까지 이어진다. 로마 황제의 형식적인 견제 및 권고 기관인 원로원은 시간이 지날수록 힘을 잃어갔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사후 로마의 정세는 황제를 꿈꾸는 군인 야망가들의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제정을 성립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카이사르가 민중을 존중했네 어쩌네 하는 것은 결국 부차적인 문제이다. 그러한 존중은 어디까지나 최고 권력자 한 명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 의지가 돌변해 버린다면 칼이라는 선택지만 남아버리는 것이다. 카이사르에게 한참 이후의 디오클레티아누스를 거론하며 비판하는 게 가혹하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가 공화정의 권력 견제 장치를 파괴해 버린 것은 분명하고,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카이사르 본인부터가 잘 알았을 것이다. 만약 몰랐다면, 그건 공화정 로마의 정치가로서 무능한 것이고.
게다가 "공화정 체제는 답이 없었고, 원로원은 부패했고, 따라서 군주정으로의 복귀는 필연이었다."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 입장이다. 카이사르의 옹호자들 일부는 카이사르 암살 후의 로마가 아우구스투스의 체제로 쇄도한 것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필연성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비판이다. 이미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유린하고 파괴하여 원로원의 권위를 박살 내버린 상황이었는데, 이걸 토대로 공화정의 필멸성을 논하는 것은 당대의 공화정 지지자들에게 너무 억울한 평가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돌이켜보면, 공화정의 몰락을 거의 예정된 일처럼, 즉 마치 버틸 수 없는 늪에서 어쩔 수 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으로 보기 쉽다. 사태의 전개에 어떠한 외부 위험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갈등은 내부에서 비롯되었다. 제국을 통치하는 데 필요한 요구들에 공화정 시기의 사회와 정부가 대응하는 과정에서 빚어졌고, 로마의 팽창 동력이었던 귀족 간의 경쟁 그리고 '영광'과 '위엄'의 압박에서 비롯되었다. 사병화된 군대들, 점점 늘어가는 부로 인해 경쟁은 더욱 격화되었고, 결국 한 사람의 수중에 위엄, 부, 군사적 지배권이 집중될 때까지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떠한 역사도 진정으로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 시점에서조차 사람들은 공화정과 이상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공화정의 몰락은 불가피한 운명이 아니었다. 이것은 야망과 자기희생, 천재성과 어리석음이 섞여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이다.
데이비드 M. 귄, 「로마 공화정」 中
결국 부정적 평가를 요약하자면, "카이사르가 제아무리 민중을 위해줬다고 하더라도, 그 본질이 독재자라는 것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일 것이다. 민중의 지지는 결코 독재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독재의 반대말은 다수의 지지가 아니라 권력의 분립과 상호 견제이다. 카이사르는 결국 권력을 좋아하던 탐욕스러운 개인에 불과했으며, 인민의 것(Res populi)인 공공재산(Res publica, 의역하면 공화국)을 박탈하여 자신의 사유재산(Res privata)으로 만들어버렸다. 카이사르의 패악질에 비한다면, 차라리 술라는 잔혹했을지언정 "공화정을 지켜야 한다."라는 신념이라도 있었다. 물론 술라의 개혁에는 구체적인 여러 문제점이 있고, 무엇보다 그 스스로가 군벌이었기에 모순이 가득했으나, 술라는 마지막에 스스로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개인의 생활로 은퇴함으로써 자신의 의도가 진심이었음을 입증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결국 로마 역사에 쿠데타라는 굉장히 안 좋은 선례를 남겼다는 오점은 있지만.
또한 카이사르의 일부 옹호자들은, 카이사르의 적들을 구시대적인 기득권층으로 모조리 몰고 가는데, 이는 너무나 부당한 평가이다. 키케로는 이상주의자이고 원칙주의자였으며 카이사르가 유린한 공화정을 수호하느라 인생을, 그리고 최후에는 목숨을 바쳤다. 소(小) 카토는 깨끗하고 검소하며 총독으로서의 내정도 마찬가지였다는 평이 대다수였고 내전이 사실상 카이사르의 승리로 결착나자 자살로 생에 마침표를 찍었으며,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개인적 호의에 힘입어 자신에게 보장된 장래의 공직을 뿌리치고 가시밭길의 모험에 나섰다.
카이사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먹이는 카이사르의 관용 또한, 진심으로 용서하고 관용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회유책이었음을 드러내는 사건이《안티 카토》집필이다. 이 글은 소 카토의 자결을 찬양하는 키케로의《카토》라는 글이 카토에 대한 동정론을 불러일으키자 이를 차단하기 위해 쓰였다고 전해지는데, 본문은 현존하지 않지만 다른 문헌에 전해지는 내용에 의하면 카토가 아내를 잃은 친구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에게 아내를 얻어주기 위해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호르텐시우스와 재혼시켰다가 호르텐시우스가 몇 년 만에 사망하자 다시 자기 아내와 재결합하면서 호르텐시우스의 유산을 꿀꺽한 일이나 카토가 술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을 아내 팔아먹은 주정꾼이라는 식으로 디스하는 내용이어서 오히려 카이사르의 쪼잔함만 드러낸 결과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의외로 측근들의 배반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인망 높은 이미지가 사실은 거짓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가 후하게 대우하여 측근으로 삼았는데도 그를 배반한 네임드 측근만 해도 갈리아 전쟁 당시 아트레바테스 족장인 콤미우스, 갈리아 전쟁 당시 오른팔이었던 라비에누스, 역시 핵심 참모였던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제2 상속자로 삼을 정도의 측근이었던 데키무스 브루투스, 아들처럼 대했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이 있고, 친위대처럼 아끼고 혜택을 베풀어준 10군단이 파업을 벌이는 사건도 겪었다. 폼페이우스의 측근들 중 폼페이우스 사후에도 이탈자가 거의 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카이사르는 겉으로는 인망 높은 지도자 이미지로 한껏 자신을 포장했지만 막상 아랫사람들의 불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이기적인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군사적 평가: 기적의 반전 전술가
카이사르가 얼마나 훌륭한 장군이었는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그가 싸운 곳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한 곳이었고, 그가 정복한 지역도 매우 광대했다. 또한 그는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민족들을 너그럽게 다스렸고 포로들에게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부하들에게도 누구보다 따뜻한 장군이었다. 그는 갈리아 지방에서 크고 작은 전쟁들을 치르면서 10년 동안 무려 800개의 도시를 점령하였으며 300개의 나라를 무찔렀다. 그래서 300만 명의 적과 싸워 100만 명을 죽이고57 100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카이사르> 中
군사적 영웅으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업적은 상당히 특이하다. 역사상 대부분의 명장들은 알고 보면 전투 이전에 이미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대승리를 거뒀다. 예를 들어 한니발 바르카의 경우 자신이 싸우고 싶을 때만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고 언제나 승리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오히려 정상적인 전투에서는 곤경에 처하는 일도 적지 않았지만, 상황이 궁지에 몰렸을 때는 예상외로 승리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 대표적으로 다음 전투들이 있다.
사비스 전투: 숲길을 지나던 중 두 배에 달하는 네르비족의 매복에 걸려 장기인 로마군의 조직력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싸워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놓였지만 결국 승리한다.
알레시아 전투: 공성전에서 갈리아 구원병에게 역포위를 당하는 치명적인 상황에 놓였지만 오히려 역전에 성공한다.
파르살루스 전투: 정석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을 펼친 폼페이우스 군을 상대로 하여, 기병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보조병으로 기병을 맞받아치는 변칙 전술로 승리한다. 망치와 모루 전술의 변칙 기술을 사용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점이다. 망치와 모루 전술이 불후의 전술임에도 이를 그대로 답습했던 폼페이우스가 이 회전에서 카이사르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한 것을 생각하면 카이사르의 변칙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알 수 있다.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가장 중요한 기병의 열세(1:7의 비율)를 만회하기 위해서 기병을 뒤에 투석병을 매달고 뛰면서 잠시 정차 후 투석, 다시 질주를 무한 반복함으로써 폼페이우스의 기병을 견제하게 한 후 정예 중보병을 이용하여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를 섬멸한 것은 탁월한 임기응변이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과 같은 선배와 달리 기병의 전력이 열세인 점에서 '정석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에 기인하긴 하지만, 결과가 말해주듯이 유효하며 훌륭한 변칙이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면 카이사르는 정석적인 길을 걸어간 지휘관이 아니라 타고난 임기응변과 재치가 뛰어난 타입의 지휘관이었다. 바꿔 말하면 개인의 자질에 의존하는 인물로서 후세의 장군들이 배워 따라 하기 어려운 타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알렉산더나 한니발과 달리 군사적인 정석을 세우지는 못했다. 사실 카이사르는 타고난 정치가로 무력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면을 보충하기 위해 사용한 것에 가깝다. 물론 드넓은 갈리아 지역을 단 10년 만에 평정하고, 여러 위기 상황을 기가 막힌 임기응변으로 돌파했으며 나아가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폼페이우스를 격파했으며 내전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휘하 군단병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카이사르의 군사적 자질을 낮게 평가할 이유는 없다. 다만 카이사르의 군사적 자질 자체가 지극히 입체적이어서 누구도 배워서 따라 할 수 없는 것일 뿐.
애초에 그가 이렇게 독특한 전술을 쓸 수 있었던 이유도 상황의 유불리를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과 병사들에게서 거의 광적인 충성심을 이끌어낼 정도의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사를 통솔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고 그 휘하에서 종군했던 로마 군단병들 역시 전투력 수준이 남달랐다. 물론 카이사르의 군단병의 수준은 수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을 치르면서 다져진 것이지 처음부터 뛰어난 병사들을 통솔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갈리아 전쟁기 초반에는 경험 없고 우왕좌왕하는 군단의 모습이 나오다가 베테랑이 되어간다. 같은 군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갈리아 전쟁기 초반과 후반의 군단들은 질적, 경험적으로 엄청나게 차이나는 역량을 보여주는데, 갈리아 전쟁 후반기에는 현지 동맹부족들까지 하나 빼고 모조리 배신하고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보급이 완전히 차단되어 쫄쫄 굶는 와중에서도 총사령관에 대한 무한 신뢰 하나만 가지고 풀뿌리를 캐 먹으면서 버티는 고참병들의 모습을 보면 카이사르의 지도력이 거의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에 비견할만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갈리아 전쟁기》를 읽는 재미 요소 중 하나가 이렇게 오합지졸에서 역전의 용사로 변해가는 군단의 모습이다. 이는 항상 수적으로 열세였던 카이사르가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자 자신의 부대를 무적의 군대로 키워낸 그의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이 훌륭했음을 나타내준다. 예컨대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그와 그의 병사들이 보여준 전략은 독창적이다 못해 잘 단련된 병사가 훌륭한 지휘관을 만나면 어떻게 유기적으로 움직이는지를 보여준다. 이때 당시 반대파의 지휘관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수년간 갈리아에서 생존한 카이사르의 베테랑 부대를 맞아 양 진영 간의 거리를 정석의 두 배쯤으로 늘린 후 휘하 병사들에게 돌격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이는 카이사르 측 병사가 먼 거리를 달려오느라 지치는 것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카이사르 측 병사들은 절반쯤 뛰다가 상대편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는 중간에 잠깐 숨을 고른 후 다시 뛰었다. 당시 카이사르는 그쪽에 없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시켜서가 아니라 군단병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멈춘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전략가로서는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략가로서는 뛰어나지 않지만 돌발 상황이 닥쳤을 때 임기응변으로 수습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보는 것이 그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쓴《전쟁의 역사》다. 하지만 엘 알라메인 전투를 에르빈 롬멜과 자신의 대결로 미화하고, 조지 S. 패튼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고,59 마켓 가든 작전마저도 억지로 변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신뢰도가 좀 떨어진다. 어쨌든 몽고메리는 철저한 계획이 아닌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것을 유달리 싫어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전후 서술 과정을 보면, 감히 브리튼을 침공한 괘씸죄로 카이사르를 깎아내리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든다는 말도 있는데, 이건 억측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다수의 영국인들은 로만 브리튼 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며, 몽고메리가 교육받았던 시대에는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사실 이건 당연한 게, 로마한테 털리고 점령당한 당시의 영국 민족은 켈트족이고, 지금의 영국을 구성하는 앵글로색슨족은 로마가 물러난 뒤에 켈트족이 용병으로 끌어들인 거다. 그 뒤 앵글로색슨족이 고용주를 스코틀랜드 쪽으로 내쫓고 잉글랜드를 먹고 퍼진 것이 현대의 영미 계열 국가다. 민족적으로 볼 때는 로마와 척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
사례를 보아도 위의 두 전투도 궁지에 몰리지 않을 수 있는데 일부러 찾아 들어간 것이다. 카이사르가 워낙 전술가로서 능력이 뛰어나고 기회를 찾아내는 데 탁월하다 보니까 순간적인 판단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카이사르만 아니고 전술가로 이름을 날리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경향인데 기회를 포착하고 밀어붙이는 성향상 위험한 작전을 선택하는 모험주의에 전술가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한 방에 모든 것을 거는 대결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본인 스스로도 실수를 만회하려 하거나 단점을 고치려 하기보단 대역전승의 기회를 찾고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을 정도니 그 성향이 이해된다. 본래 병법에선 이렇게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승리를 구하려 하는 건 무능한 장수나 하는 짓이라고 경고하는데, 카이사르는 이것의 반례라 할 수 있다.
베르킨게토릭스와 폼페이우스를 상대해서 카이사르가 패배한 두 전투인 게르고비아 공격과 디라키움 포위전을 볼 때, 카이사르는 너무 공세적인 작전을 선택했고 이게 패배의 원인이었다. 전략적인 열세에서 강대한 적을 공격하는데, 상대방은 전략적 우세를 이용해 카이사르의 병참을 끊으면서 자신은 병참선을 확보한 뒤에 요새화한 진지에 틀어박혀 소모전을 펼친다. 당연히 결전을 벌이려는 카이사르는 군량 부족과 포위의 위협 때문에 장기전에서 불리해진다. 카이사르의 군대가 회전 이외의 전투 경험도 풍부하다지만 로마군의 장점은 조직력에서 나오고 방어전에서는 조직력과 전투력의 격차를 상쇄할 수 있다. 거기다 수적으로 밀리면서 꼭 일부 병력을 떼어놓아 다른 쪽을 견제한다는 식의 작전을 구사한다. 자신의 전술적 역량에 자신을 가지니까 하는 것이지만 직접 전투를 회피하고 소모전을 강요하는 전략에 스스로 걸려들어가는 식의 전투를 벌임으로써 쓸데없이 패배하고 만다는 면도 있다.
요컨대 카이사르는 공세일변도 전술 때문에 위기를 자초하는 면이 강한 만큼 상대가 판짜기를 잘하는 방어적인 장군이면 살짝 휘둘리는 경향이 존재한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전략적 식견은 군사적인 면보다 정략적인 측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갈리아 전쟁 때는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서 게르만족과 대결상황에서 충분히 갈리아에 동맹군을 만들어냈고 이후에도 갈리아가 통일되지 않은 상황을 잘 활용했다. 그러다가 베르킨게토릭스라는 걸물이 나타나 갈리아 전체의 동맹을 이끌어내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하게 고립되었다. 내전에서도 원래대로라면 북아프리카부터 차분하게 공략하려는 당초 계획이 무너지자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한 뒤에 가한 공세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전략적으로 주도적인 위치를 가질 수 있는 경우가 없었고 항상 적지에서 혼자 싸우는 상황이 연출되었다는 환경적 문제도 감안해야 한다. 갈리아 전쟁도 사전에 치밀한 계획 아래에 대군을 조직적으로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고, 내전도 예상치 못한 싸움에 동족과의 전쟁이라는 면에서 제약이 있었다.
가장 큰 불운이라면 카이사르의 장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소모전을 벌이려는 우수한 지휘관을 두 번이나 연달아 상대한 것이고 가장 큰 행운이라면 둘 다 소모전을 하면 더 유리할 상황에서 승기를 탔다고 섣불리 전투를 걸었다가 카이사르에게 회생과 승리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카이사르 본인의 전투 실력이라면 의외로 모자라기는커녕 뛰어난 편이었다. 카이사르는 젊을 때부터 마르고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는데 의외로 뛰어난 검술과 기마술, 격한 전투에도 지치지 않는 강한 체력을 가져 군단병들이 처음엔 무시하다가 나중엔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말을 잘 타서 등자가 없었기에 허벅지에 힘을 주고 버텨야 하는 승마 자체가 매우 힘든 시대에 경기장에서 안장도 고삐도 없는 말을 그것도 양손을 뒤통수에 짚고 타는 기행을 벌이는 바람에 어머니인 아우렐리아를 기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폭주족이나 바이커 갱이 하는 핸들 놓고 오토바이 타기 수준의 서커스인데 그러다 낙마하면 절대로 곱게 안끝난다. 서양에서 등자가 보급된 시기가 중세쯤인데 이 정도 기행을 보일 정도면 카이사르가 말을 잘 탔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나 여느 기마 민족들이 말을 태어날 때부터 타고 자랐듯이 본인이 말을 계속 타고 지냈다면 이런 묘기를 부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이래저래 대단하기는 하다 갈리아 전쟁 중에서는 하루 동안 말을 타고 무려 100km를 돌파하는 고대 최고 속도의 진군을 한 적이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맏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스페인에서 치른 문다 전투에서는 직접 전투에 앞장서서 싸운 기록이 나온다. 높은 지형에 있던 적군의 공격에 고전하자 직접 선두로 나섰고 선봉에 선 카이사르에게 적군의 공격이 집중됐다. 아피아노스는 “카이사르에게 날아온 투창이 200개나 됐다”라고 기록했다. 카이사르는 투창을 피하기도 했고 일부는 방패로 막기도 했다. 투창 몇 개는 방패에 매달려 덜렁거리기도 했다. ‘운이 좋게도’ 카이사르는 상처 하나 없었다. 카이사르는 투구를 벗어 자신이 누구인지 병사들이 쉽게 알아보도록 했다. 그러고는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정예 10군단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 “그대들은 그대의 장군이 고작 아이들에게 패배하도록 놔두면 수치스럽지도 않은가?”(플루타르코스) 주춤하던 병사들은 다시 전진했고 끝내 승리를 거둔다. 후에 카이사르는 “나는 항상 승리를 위해 싸웠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살기 위해 싸웠다”라고 토로했다. 수십, 수백 명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운빨과 실력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배짱이 군인들에게 신뢰를 받아서 나중에 군인들이 파업을 해도 카이사르가 타이르면 곧장 귀담아듣거나 전쟁 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해주는 리더십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반론
리델 하트는 카이사르를 단순히 부관형 지휘관이라 평가하고 있다. 이는 카이사르의 전공이 일레르다 전투와 파르살루스 전투 외엔 잘쳐봐야 능력 좋은 부관급 지휘관 수준이고, 여기서 두 전투를 더해봤자 결국 일급 지휘관급은 아니라는 평가이다. 다만, 리델 하트는 극성 스키피오빠이며, 리델 하트의 평가와 별개로 압도적으로 불리한 갈리아 전쟁이나 카이사르의 내전을 모두 성공적으로 승리한 시점에서 그의 지휘력 자체는 최정상급이라고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기에, 리델 하트의 주장이 주류는 아니다.
다만, 이를 빼놓고 보더라도 카이사르가 전술적인 임기응변 능력은 뛰어나지만, 전략적인 식견은 떨어진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갈리아 전쟁 말기에 일어난 암비오릭스의 난이나 카이사르의 전략적 실책으로 지적되는 게르고비아 공방전 및 디라키움 공방전이 대표적인 예시로 꼽힌다. 실제로 3개 사례는 모두 상대측의 실수와 이를 포착한 카이사르의 대처가 맞물리지 못했으면 그대로 전략적으로 패배할 뻔 했던, 매우 위험한 상황들이었다.
암비오릭스의 난의 경우, 뒤에 이어진 베르킨게토릭스의 난이 워낙 커서 묻혔을 뿐, 실제론 굉장히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암비오릭스의 난 때문에 로마는 14군단을 포함해 9,000여 명의 군단병을 초기에 손실했기 때문. 물론 카이사르는 이를 이자까지 쳐서 갚아주긴 했으나, 문제는 이때 독단적으로 로마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석연찮은 죄목으로 세노네스족의 지도자 아코를 처형한 결과, 갈리아족의 이탈을 부추기며 결국 베르킨게토릭스의 휘하에 갈리아 연합이 등장해 로마에 반기를 드는 상황을 초래하게 됐다.
게르고비아 공방전 역시 카이사르 실책의 대표였다. 물론 반(反) 로마 연합의 수장인 베르킨게토릭스의 거점을 치는건 중요했다곤 하지만, 카이사르는 보급을 비롯해 여러 불안점이 있었기에 공방전을 하기 적합하지 못했고, 결국 퇴각 전 무리한 공격을 지시한 결과 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함에 따라 하이두이족까지 반란에 가담하며 전 갈리아가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갈리아가 부족 연립 체제가 아니라, 강력한 중앙 권력으로 통제하는 체제였거나, 베르킨게토릭스가 부족장들을 제어하고 청야전술을 계속 밀어붙여서 빈게네 전투와 같은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난 6 ~ 7년 간의 갈리아 원정 자체가 수포로 돌아갔을 정도로 전략적으로도 매우 뼈 아픈 패배였다.
디라키움 공방전 역시 카이사르의 전략적 실책이었는데, 폼페이우스의 세력을 빠르게 정리하고 싶어서 조급해한 결과 숫자상 열세임에도 폼페이우스군을 무리하게 포위한 결과 패배했었다. 만약 폼페이우스가 적극적으로 추격해 카이사르에게 큰 피해를 줬다면 파르살루스 전투가 일어나지도 못하고, 최악의 상황에선 카이사르가 전사하여 내전기가 폼페이우스의 승리로 돌아갔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런 의미에선 리스크와 리턴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시각도 일리는 있다.
총평
카이사르의 전술적 평가가 갈리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기존 장수들이 보여주지 않은 도박적인 행보를 자주 벌였고, 본래라면 실패할 경우 그대로 주저앉을 수 있었음에도 이를 타파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컸다. 대표적으로 암비오릭스의 난과 게르고비아 공방전도 결국 빈게네 전투와 알레시아 공방전으로 대역전극을 벌이고 갈리아 전체를 완전히 복속시켰고, 디라키움 공방전 역시 이후 파르살루스 전투로 대역전극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카이사르의 경력에서 그 문제를 찾기도 하지만, 오히려 카이사르의 경력은 흔히 명예로운 경력으로 대표되는 통상적인 로마 장군들의 경력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며, 오히려 마리우스의 군제 개편 이후 세대였던 탓에, 과거 짧은 기간만 군 사령관을 맡거나, 당시 군권을 장악하던 술라파들과 달리, 정통적인 경로를 가장 빠르게 밟던 카이사르는 과거 로마 장군들에 더욱 가까운 존재라고 볼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전략적 판단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정치적 기반이 약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비록 카이사르가 민중파의 거두로 우뚝 서긴 했으나, 그라쿠스 형제를 필두로 민중파 의원 다수가 원로원과 술라파의 집요한 공작으로 암살당하거나 쫓겨났기에 당시 민중파는 궤멸에 가까운 상태였으며, 오히려 술라파의 후계자인 폼페이우스와 기성 원로원파의 알력 다툼이 주류일 정도로 민중파는 저 멀리 밀려나있던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어디까지나 '원로원파의 견제자가 될 민중파의 거두가 될 재목' 외엔 아무것도 없었으며, 이 탓에 오히려 명분은 없지만 실리는 컸던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해 삼두정이 이뤄질 수 있던 것이다.
여하튼, 삼두정을 이룬 것은 좋지만, 그것이 영원할 수 없던 만큼, 카이사르는 삼두정이 유지되는 동안 자신의 기반을 다져야만 했고, 실제로 삼두정이 유지되는 내내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를 등에 업고 민중파의 재건에 집중했다. 그 마지막 방점이 바로 갈리아 전쟁이었고, 이 전쟁을 완수하기만 한다면 휘황찬란한 개선식과 동시에 민중파의 완벽한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로원은 기를 쓰고 이를 견제하려 했었고, 그 때문에 카이사르는 최대한 본국의 도움을 최소화하며 갈리아 전쟁을 완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 갈리아 전쟁을 최대한 완벽하게 완수하고 이것이 로마의 국익에 큰 이득이 되어야 자신의 입지가 더더욱 굳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 탓에 카이사르는 현지 보급을 위해 군단을 분산배치하거나 하는 등, 다소 위험천만한 도박수를 감행했고, 이 탓에 벌어진 게 바로 암비오릭스의 난이었으며, 이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불씨를 남겨 생긴 게 바로 베르킨게토릭스의 등장과 갈리아 대반란이었다. 문제는 베르킨게토릭스가 난을 일으킨 시기가 크라수스 사망 이후 삼두정의 균열이 일어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로원도 이를 놓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폼페이우스를 회유하던 시기였다.
그 탓에 카이사르 입장에선 최대한 빨리 갈리아 전쟁을 종결시키고 다시금 폼페이우스를 설득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다소 위험한 도박수를 감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게르고비아 공방전이었다. 거기다 폼페이우스가 아니더라도 민중파의 수장급인 카이사르 특성상 최대한 빠르게 반란을 진압하고 새 민중파 의원들을 집정관이나 법무관, 호민관에 대거 등록시켜 자신의 정치 세력을 유지시킬 필요도 있었다. 즉, 카이사르는 어느 정도 조급한 마음이 있었던 탓에 이를 실행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디라키움 공방전 역시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내전 이후 원로원이 급하게 로마를 비우면서 로마에 무혈입성한 건 좋았으나, 문제는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 및 근교의 섬들과 카이사르 자신이 복속시킨 갈리아 지방을 제외하면 고대 경제의 핵심 지역이던 그리스와 소아시아는 폼페이우스 아래에 있었고, 이집트 역시 폼페이우스와 파트로누스-클리엔테스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친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까웠고, 히스파니아(스페인) 역시 폼페이우스가 총독으로 부임했던 지역이라 마찬가지로 친 폼페이우스 진영이었다. 즉 이탈리아 외에 거의 모든 땅이 적지였던 셈이다. 한마디로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 해지는 건 카이사르였던 셈이다.
그 과정에서 카이사르가 지닌 것은 수도 로마를 가지고 있다는 정통성과 더불어, 근 7~8년간 갈리아 전장에서 갈리아 및 게르만, 브리타니아와의 숱한 전투로 잔뼈가 굵어질 대로 굵어진 베테랑 군단병 다수를 보유하고 있다는 강점뿐이었기에, 결과적으로 폼페이우스가 전력을 완비하기 전까지 속전속결로 내전을 진압해야 했다. 실제로 원로원파의 오판으로 수도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 지방은 빠르게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고대 경제의 중심지인 그리스 지역을 공략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만큼 빠르게 그리스에 도착했고, 전쟁을 빠르게 종식시킬 수 있는 폼페이우스의 본대를 제압하기 위해 무리해서 벌인 것이 바로 디라키움 공방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카이사르에겐 높은 인간심리에 대한 이해도와 이를 바탕으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이 공존했다는 차이점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군단의 핵심인 군단장 ~ 백인대장의 중간 지휘책에 유능한 인물들을 다수 배치했고, 그 덕분에 패배하더라도 최소한의 피해로 후퇴할 수 있었고, 반대로 높은 인간심리에 대한 이해도를 기반으로 상대를 자신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움직임을 제한시키도록 묘수를 두는 능력이 탁월했으며, 이러한 점들이 그가 기적의 역전을 가능케 하는 전술가라는 이명을 얻을 수 있던 원동력으로 꼽힌다.
가령 게르고비아 공방전을 패배했으나, 이후 그는 갈리아 지역의 상황을 역이용해 오히려 불리한 상황에서도 세콰니족을 친다는 도박을 감행했고, 그 결과 '불패의 군단을 패배시킨 자만심'을 지니고 있던 베르킨게토릭스를 회전으로 유인해 박살내버린 후, 이어지는 알레시아 전투로 갈리아 전쟁의 쐐기를 박을 수 있었다.
디라키움 공방전 역시 이와 비슷한데, 패퇴한 자신들을 쫓지 않는 폼페이우스를 보고, 그의 신중한 성격을 역이용해 그는 아예 테살리아 지역으로 쭉 빠지는 도박수를 감행한다. 이로써 그가 디라키움에 가만히 있으면 그리스 지역과 소아시아 지역을 잇는 교두보를 모조리 끊어 그를 앙면에서 포위해 고사시킬 수 있음을 은연 중에 드러내어 폼페이우스로 하여금 억지로 자신을 추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실제로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카이사르를 패퇴시킨 폼페이우스는 자신감에 넘쳐 그것이 함정임을 알아도 기꺼이 응했으나, 천재적인 카이사르의 임기응변과 노련한 군단병의 역량에 밀려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허망하게 패배하고 카이사르가 내전의 승자가 되는 발판을 마련해주게 됐다.
총평하자면, 카이사르의 군사적 역량은 분명 뛰어난 것이 맞다. 실제로 그가 벌인 전투들을 보면, 아무리 부차적인 이점이 있더라도 결국 절대적인 숫적 우위를 차지한 적이 별로 없었음에도, 휘황찬란한 대승을 거둘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군사적 역량'만' 따지자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처럼 당대에도 그와 비교 가능한 명장은 이미 존재했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가 바로 높은 인간심리에 대한 이해도였다. 카이사르는 상대의 심리를 분석하고 이를 예측해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전장으로 불러들이는 능력이 탁월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회전으로 역전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보통의 명장들이 상대가 내밀만한 수를 대처하는데 집중하여 결과적으로 변수를 차단했다면, 카이사르는 역으로 상대의 심리를 이용해 상대방이 함정임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도 걸릴 수밖에 없도록 상대의 수를 유도하여 변수가 아닌 예측 가능한 수로 상대가 움직이게끔 유도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셈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원로원-술라의 집요한 견제로 궤멸 직전에 놓인 민중파의 수장으로써 정치 생활을 시작했던 탓에 정치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 탓에 초창기에는 도박적인 수를 감행해야할 정도로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략적 오판에 가까운 수라도 도박적으로 감행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던 것이며, 자신이 유리한 위치가 되고 시행될 뻔했던 파르티아 원정은 카이사르가 암살되면서 무위로 돌아감으로써 결국 그의 모습이 도박사적인 면모를 지닌 장수로써의 일면만 부각된 것이 컸다. 실제로 폼페이우스의 사망 이후 내전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나온 탑수스 전투나 문다 전투를 보면 카이사르는 섣불리 포위전을 걸기보단, 유리한 상황이 되기까지 여유롭게 기다리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한 고제와 비슷한 타입의 전략가였다고 볼 수 있다. 고제의 경우, 인간 심리 분석은 조금 떨어졌을 수 있으나, 인재를 보고 배치하는 능력은 매우 탁월했고, 무엇보다 카이사르와 다른 장기였던 아무리 고까운 소리라도 기꺼이 듣고 행할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71 그 결과 고제는 실질적인 최초의 통일 국가인 한나라를 세우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고, 카이사르 역시 역대 최고의 제국 중 하나라는 로마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인간적인 평가
잘 알려져 있듯이 인간적인 능력과 매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계자처럼 눈에 띄는 미남은 아니었으나, 풍부한 교양, 일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먼저 나서는 카리스마, 뛰어난 언변과 유머 감각, 사적으로는 관대하고 여유로운 성품 등으로 많은 이들을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었다. 수많은 유부녀들과 염문을 뿌리면서도 그 남편들에게조차 사적인 원한을 샀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천성적인 매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부분 중 하나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었다. 민중파로서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 관군인지 반란군인지 애매한 입장에서 수년 간 치른 내전에서도 부하들이 그를 믿고 따른 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매력만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다. 카이사르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그것을 특유의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이는 여러 일화를 통해 드러난다.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자신의 최정예 10군단이 제대를 요구(본 목적은 임금 인상)하며 파업하자 그 즉시 '전우 여러분(Commilites)'이 아닌 '시민 여러분(Quirites)'이라 불러 파업을 철회하게 만들었다는 일화였다.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책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지만 다소 야사로 여겨진다. 허나 이후 탑수스 전투에서 10군단이 유별나게 용맹하고 괴물같이 싸웠다는 이야기는 다른 책에서도 언급되는 사실이다.
키케로와는 죽을 때까지 원로원에서 싸워 댄 정적이었지만, 사적으로는 그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까딱하면 피를 보았던 고대 시대의 정적 치고는 우호적으로 지낸 편이다. 오히려 카이사르는 지속적으로 키케로의 정치적 지원을 원하며 우호적 제스쳐를 보냈고, 키케로 또한 카이사르가 인간적으로 싫다기보단 정치적 신념의 차이 때문에 제안을 거절하는 모양새였다. 실제로 내전 발발 직전 키케로가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인간적으로 나쁘지 않고 유능하기까지 한 카이사르" 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지만 정치적 신념이 일치하는 폼페이우스"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물론 결과적으로 폼페이우스를 선택한 것은 키케로 답다면 다운 일이고, 카이사르도 이를 문제삼아 그를 박대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본인도 덕을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카토가 로마인이 같은 로마인을 "관용" 해주는 것은 공화정 정신에 어긋난다며 맹비난한 카이사르의 관용을 키케로는 "그래도 피를 보지 않는 것이 더욱 현명한 행동이다" 라는 취지에서 칭찬하고 지지해주기도 했다.73 물론 카이사르도 키케로의 드물지만 값진 지지 선언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독재관이 된 뒤 키케로의 별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키케로가 카이사르와 밤새 술을 마신 뒤 내린 평가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길 바라지만, 솔직히 즐거웠다는 점은 인정한다" 였던 것을 보면 서로간 개인적인 감정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루종일 정치 이야기는 제치고 문학과 철학에 관한 담화만 나누었다는데, 로마 최고의 석학인 키케로가 "마치 그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와있는 것 같았다" 라는 높은 평가를 내린 것은 덤. 내전 말기 폼페이우스가 패망한 후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카이사르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 키케로를, 로마로 개선한 카이사르가 보자마자 말에서 내려 그에게 먼저 다가가 친근하게 대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
키케로가 친구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일화도 있다. 본래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집무실도 제집 드나들듯 편히 방문하고는 했는데, 카이사르가 독재관이 된 후 업무량이 늘어나 새로 충원된 비서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키케로를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 한때는 자신이 선배 정치인이자 대등한 사이였는데 이젠 이런 처지라니 굴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굴욕감은 곧 말끔히 해소되었는데, 마침 볼일이 있어 잠시 집무실을 나왔던 카이사르가 대기실에 있는 키케로를 보고는 "이래서야 내가 미움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거짓말이라고 말할 수 있나? 그 마르쿠스 키케로조차도 자유롭게 내 집무실에 들어오지 못하고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하는 게 현실이라면..." 이라고 비서들을 갈군 것이다. 키케로는 당연하겠지만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키케로의 자뻑하는 성격을 감안한 카이사르의 의도적인 오버액션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이런 일화를 친구에게 편지로 보냈다는 사실에서 키케로의 성격 또한 엿볼 수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사람 보는 안목이다. 다음 세 사람만 보아도 카이사르의 사람 보는 안목을 엿볼 수 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용맹한 장군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의 한계를 정확히 꿰뚫어 봤다. 일선 지휘관으로는 용맹하지만 최고사령관으로는 부족하다는 카이사르 생전의 평가는 그 이상 정확할 수 없었다.74 사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부재 시 로마의 정치를 담당했다가 이미 많은 실책으로 카이사르를 실망시킨 바 있기 때문에 애초에 후계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유언장에서 자신이 후계자로 지명되지 않자 실망하여 시간을 끌다 오히려 옥타비아누스의 입지만 더 강화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카이사르 사후 당장의 표면적인 세력은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이후로도 숱한 실책을 저지르며 끝내 몰락했다.
옥타비아누스
말 그대로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는 수준이다. 적자가 없었던 카이사르에게는 누나의 손자라 그저 가까운 혈육이라는 이유도 있었겠으나, 미리 아그리파를 붙여 주는 등 확실한 후계자로 키울 생각을 일찍부터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카이사르 개인에게뿐 아니라 로마 역사상 가장 탁월한 선택 중 하나가 되었다. 카이사르의 때이른 죽음으로 십대의 나이에 급작스레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아 입지조차 불안정했으나, 뛰어난 능력으로 로마 내전을 평정하고 로마 제국 최초의 황제가 되어 제국의 기틀을 닦음으로서 종조부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위 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카이사르의 천재적인 안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옥타비아누스는 뛰어난 정치력과 권모술수에 비해 군사적 능력은 꽝이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해 주기 위해 아그리파를 붙여준 것인데, 과연 기대에 완벽하게 부합하여 옥타비아누스를 제위에 올린 일등 공신이 되었다. 역사 속의 공신들이 흔히 저지르던 사소한 실책 하나 저지르지 않아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친구로 남았을 뿐 아니라 수많은 업적도 남겼다. 심지어 옥타비아누스는 건강이 나쁜 자신이 단명할 거라고 예상하여, 자신이 죽고나면 후계자가 성장할 때까지 죽마고우 아그리파에게 임시이지만 황제위를 넘기려고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둘 사이의 믿음과 신뢰는 엄청났다. 거기에 더해 아그리파는 평민 출신이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즉, 평민인 데다가 카이사르의 후원을 받았던 아그리파는 철저히 옥타비아누스에게 종속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 실제로 아그리파는 단 한 번도 옥타비아누스에게 거역하지 않고 철저히 그의 명령을 받들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처음부터 이를 염두에 두고 그를 붙여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의 선택에 있어 더욱 대단한 부분은 당시 둘은 아직 십대였다는 것이다. 즉 딱히 어떤 전공이나 실적을 보여준 적도 없는데 카이사르는 그들의 잠재력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쯤 되면 가히 천재적인 안목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런 카이사르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람 보는 안목이 유일하게, 그리고 가장 치명적으로 어긋난 것은 자신의 암살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쇠락한 명가의 소년가장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로마 공화국이 혼란하던 시절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렐리아 코타의 아들로 태어났다.1
카이사르가 10대일 때의 로마는 옵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의 대립이 격화되던 시점이었다. 어린 시절 가정교사는 웅변가이자 문법학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니포였다. 그니포는 갈리아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로마 귀족들이 고용하는 가정교사는 모두 그리스인인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카이사르 가문의 입지를 짐작할 수있다.
이 외에도 카이사르의 어린 시절 기록은 생각보다 적은데 이는 당대 쓰인 카이사르 관련 역사책 중 어린 시절 부분이 죄다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고(기원전 85년) 16세에 유피테르(제우스)의 고위 사제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로 선출되었다(기원전 85년). 그리고 원래 기사계급의 코수티아라는 여성과 약혼을 깨고 당시 반 술라파의 수장이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 킨나와 결혼한다. 이때까지는 가문 좋고 성공가도를 달리는 평범한 로마 청소년의 일대기인데, 문제는 장인인 루키우스 킨나가 기원전 84년에 죽고 2년 뒤에 고모부와 장인과 대립하던 술라가 로마로 군대를 끌고 돌아와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독재관에게 찍힌 새신랑
술라는 돌아오자마자 살생부로 대표되는 마리우스 일파의 대 숙청을 시작한다. 카이사르의 입지는 당시 미묘했는데 카이사르의 고모부는 마리우스고 장인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인지라 민중파에 가깝다고 여겨졌지만, 근본 원조 귀족인데다 문중의 7촌 당숙 아저씨가 원로원파라는 이유로 마리우스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처우에 대해 동정여론이 컸다. 술라는 여러 사람의 만류에 아직 10대(19세)였던 카이사르를 처음부터 숙청 대상으로 지목하지는 않고 카이사르에게 코르넬리아와 이혼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는 민중파와의 인연을 끊지 않으면 다른 민중파 인사 9천명처럼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이었지만 놀랍게도 카이사르는 거부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철부지 시절의 카이사르가 내전의 승리자이자 사실상 로마의 지배자였던 술라를 상대로 배짱을 부린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뜬금 아무 잘못도 없는 마누라를 쫓아내 죽게 버려두라는 꼬장에는 거부감이 들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대노한 술라의 척살령을 피해 달아난 카이사르는 우선 모든 가산과 아내의 지참금이 몰수당하고 플라멘 디알레스 직위도 박탈당한다. 그렇게 숨어지내던 와중에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와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탄원, 그리고 로마에서 존경의 대상이던 베스타 신전의 여성 신관들이 율리우스 가문의 대를 끊을 셈이냐고 항의하는 통에 결국 술라도 카이사르를 사면해 준다. 특히 원로원의 유력 가문이었던 외가의 강력한 영향력이 카이사르의 목숨을 살려주는 데 큰 몫을 했다. 당장 카이사르의 외할아버지인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만 하더라도 집정관 출신이며 명망 높은 법률가이자 온건파의 거두로서 처갓집 사람(카이사르의 7촌 당숙)도 죽일 만큼 폭주한 마리우스에게도 대놓고 저항할 수 있을 만큼 인망과 입지가 큰 인물로, 당시 옵티마테스에 대한 지지율을 담당하는 핵심인사였다.
이때 술라의 숙청이 얼마나 지독했냐면, 위에서 언급한 '살생부'에 이름이 오르면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자손들이 다시는 공직에 진출할 수 없게 되는 정도가 가장 가벼운 벌이고 십중팔구는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물론 이때도 재산 몰수는 덤. 게다가 술라는 단순히 자신의 부하들을 동원하는 수준이 아니라 피살자의 재산을 현상금으로 수여하는 제도를 도입해서 살생부에 오른 자가 도망간다고 해도 현상금을 노린 사람들이 피살자를 추적, 살해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아예 로마에서는 훗날 대규모 살생부로 숙청이 일어나면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와 함께 얼마나 야만적이고 잔인했는지 비교되는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카이사르는 이 도피 생활 때 추적을 피하느라 큰 고생을 한다.
수에토니우스와 플루타르코스가 쓴 기록에 따르면 술라는 카이사르를 살려달라는 탄원을 마지못해 수락하면서 "그 젊은이의 머리엔 백 명의 마리우스가 들어 있건만..."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도피성 군입대와 해외유학
카이사르는 비록 술라가 사면해 주었지만 안전을 확신하지 못해 로마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때 사제직 박탈이 전화위복이 된다. 로마의 플라멘 디알레스는 살생과 로마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 쿠르수스 호노룸에 필수적인 군복무를 할 수 없었는데 플라멘 직위가 박탈된 카이사르는 해외에서 잠수도 탈 겸 해서 군단에 장교로 입대한다. 기원전 81년부터 카이사르는 아시아 속주 총독이던 마르쿠스 테르무스의 부관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서 카이사르의 평생을 따라다닌 비티니아 국왕 니코메데스 4세와의 동성애 스캔들이 시작되었다. 소문의 배경은 카이사르가 함대 차출을 요청하러 동맹국 비티니아에 사신으로 파견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니코메데스의 궁전에서 오랜 시간을 지체했다. 그리고 다시 복귀한 뒤 또 비티니아를 찾아갔다. 일단 수에토니우스가 (앞의 루머들도 같이 쓴 뒤) 기록한 카이사르가 비티니아에서 머문 공식적인 이유는 채무 관계 청산.
당시 로마는 그리스 문화를 굉장히 존중했고 상류층의 경우 그리스에 유학을 갔다 오는 것이 당연한 관례일 정도였지만 그리스의 동성애 문화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로마인들은 동성애를 죽을 죄로 여긴 것은 아니어도 '남자답지 못한'7 행동으로 여겼으며 특히 성관계에서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런 역할은 보통 어린 노예들이 담당했으나 하필이면 꽃다운 미청년 시절의 카이사르는 수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소문이 났다.
훗날 니코메데스 4세는 죽을 때 비티니아 국토 전체를 유증의 형태로 공화국 로마 정부에 넘겨주었는데 당시 로마인들은 카이사르가 남색으로 늙은 니코메데스 4세를 홀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진실이야 어쨌든 몇몇 사람들만 빼고 다 그 루머를 믿었다. 심지어 카이사르의 병사들조차 그랬다. 농담과 장난을 좋아하던 카이사르도 M자 탈모와 동성애 루머로 놀리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래도 그와 친했던 병사들은 개선식 등에서 구호로 써먹어가며 잘도 놀려먹었다.
"갈리아는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했고, 카이사르는 니코메데스 왕에게 정복당했다네. 갈리아를 무찌르고 개선하신 카이사르가 납신다! 셋 중에서 가장 위대한데도 니코메데스 왕은 월계관을 쓰지 못했다네. 대머리 난봉꾼 카이사르가 납시니, 로마인들이여, 어서 마누라를 숨겨라! 그는 금덩어리를 빌려 쓰고는, 고작 갈리아 창녀로 갚는다네."
<카이사르의 생애> 中 "로마 군단의 개선행진가" 필립 마타작 저 "로마 공화정"에서
그렇게 군인 시절 동성애 루머에 시달리던 카이사르는 미틸레네(아나톨리아 반도 동쪽에 인접한 섬) 전투에서 동료의 목숨을 구해서 오크나무 시민관을 받은 일로 이미지가 회복되었으며 킬리키아 전투 등 아시아 인근에서 활동하다가 기원전 78년 술라가 죽자 안전을 확신하고 로마로 돌아온다. 이후 로마에서 현직 집정관인 마르쿠스 레피두스가 반란을 벌일 때 참여를 요청받았지만 참여하지 않았다.
귀국한 카이사르는 민중파를 내부적으로 결집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고는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등 술라파 원로들을 부정부패 비리 혐의로 고발했다. 비록 두뇌가 비상한 카이사르의 고발문은 원로원 최종권고의 위헌성과 술라가 저지른 악행의 불법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키케로도 립서비스를 해줄 정도였지만 의외로 다 늙어버려 어찌되도 좋을 원로들에 대한 동정여론 때문에 그 키케로가 피고발인 측 변호인으로 가세하자 깨끗하게 포기하고 술라파로부터 끌린 어그로를 풀기 위해 유학 명목으로 출국한다.
카이사르는 로도스의 아폴로니우스 몰론의 수사학 강의를 듣기 위해 에게 해를 건너다 해적들에게 납치되었는데, 두목이 카이사르에게 "몸값으로 은 20 탤런트를 받겠다"라고 하자 카이사르는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대뜸 화를 내며 "이 고귀한 나의 몸값이 고작 은 20탈렌트라니 납득할 수 없다!'"라고 항의하며 스스로 몸값을 50탈렌트로 올렸다. 물론 은 50탈렌트는커녕 20탈렌트조차 당장 가지고 있지는 않던 카이사르는 하인을 시켜 돈을 꿔오라고 한다. 해적 두목은 이 거물을 후대했고, 본인도 귀빈이라도 된 듯이 해적들에게 주눅들지 않는 모습으로 다녔다. 혹여나 자는데 해적들이 시끄럽게 떠들면 조용히 하라며 호통을 쳤고, 심기가 상한 해적이 인질 주제에 어디서 반항하느냐고 화내면 "꼬우면 죽여보든가"라며 오히려 자신의 몸값을 인질삼아 역으로 해적을 협박했다고 하며, 또한 자신의 자작시를 낭송하는데 그걸 듣다가 잠들어버린 해적들을 야만인이라고 욕하는 패기를 내뿜는가 하면, 나중에 해적들을 싹 잡아들여 십자가형에 처하겠다고 공언했다. 나포된지 38일 만에 하인이 돈을 가지고 돌아와 카이사르는 석방되었는데, 카이사르는 로도스가 아니라 가까운 아시아 속주의 항구로 가서 무장선과 사람을 모집한 뒤 해적들을 싹 쓸어버렸다. 자신이 내준 은 50탈렌트를 남김없이 되찾아온 건 덤. 카이사르는 해적들을 아시아 총독 마르쿠스 융크투스에게 인계했는데, 융크투스는 카이사르의 요구대로 이들을 처형하는 대신 노예로 팔고 싶어했지만, 카이사르는 기어이 그들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는 것으로 약속을 지켰다. 이 당시 활개치던 킬리키아 해적들은 에게 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까지 기어들어오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기원전 67년에 돼서야 폼페이우스에 의해 소탕된다.
그러나 BC 74년 카이사르가 로도스에서 유학하던 시기에, 폰투스 왕국이 소아시아를 다시 침략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자비를 들여 군대를 모아 소아시아 도시들을 도왔고, 그동안 로마에서 루쿨루스가 파견되어 폰투스 왕국을 물리친다.
희대의 날먹 및 배째라 행각과 출세
BC 73년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왔고, BC 72년에는 선거를 통해서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선출된다. '명예로운 경력'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이 당시에는 돈이 없어서 하층민들이 사는 수부라의 빌라에서 사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BC68년~BC69년 카이사르는 안찰관(Aedilis)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 덕분에 원로원의 한 자리를 얻게 된다. 이 시절에 아내인 코르넬리아와, 카이사르의 고모이자 민중파의 우두머리였던 마리우스의 아내 율리아가 죽는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BC 69년에 아내와 고모인 율리아의 장례식을 주관한다. 그리고 로스트라(공공연단)에서 추모연설을 하는데 여기서 카이사르는 본인이 마리우스파임을 천명하며, 자신은 베누스 여신과 고대 로마 왕가의 후손이지만 마리우스의 유지를 이어받아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다. 이쯤에서 그는 술라파 인물들에게 견제를 받기 시작한다. 술라파 의원이자 현직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레피두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자신의 반란에 참여하라고 카이사르에게 권유했지만 카이사르는 이 제안을 거절한다. 이때 불안해하는 술라파 정치인들을 안심시키 위해서 카이사르는 술라의 외손녀 폼페이아와 결혼한다. 정치적으로는 폼페이우스를 지지하였으며, 안찰관으로서 폼페이우스가 지중해 해적들을 토벌할 수 있도록 원로원에서 그를 위해서 법안을 자주 발의하였다. 그 뒤 히스파니아의 속주를 다스리기 위해서 히스파니아로 출발한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시절 카이사르가 스페인의 도시인 가데스(카디스)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석상을 보고 알렉산더는 나와 같은 33세에 세계를 정벌했지만 나는 아직 역사가 기억할 만한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로마에 돌아온 카이사르는 BC 65년 재무관으로 선출된다. 이때 온갖 축제와 이벤트들로 로마 시민들의 환심을 사는데, 문제는 이 비용의 일부분을 자신의 돈으로 대버리는 바람에 빚이 엄청나게 많아졌고 그 빚의 대부분은 크라수스에게 빌린 돈이었다. 이때 폼페이우스의 부인 및 여러 정치인들의 부인들과 온갖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기이한 점은 로마의 귀족 부인들을 몽땅 섭렵해나가면서도 누구와도 결정적으로 관계를 끊지 않았고, 그럼에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로부터도 원한을 사지 않았다는 점이다.
BC 63년 카이사르는 공석이 된 폰티펙스 막시무스 선거에 출마한다. 워낙 돈이 많이 들었고, 경쟁자들이 워낙 쟁쟁한 인사들이라서 카이사르 본인도 선거에 이길지 확신을 못했다. 이 때문에 카이사르는 선거 당일 자신의 어머니에게 선거에서 이겨서 돌아오든지 아니면 아예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카이사르에게는 다행히도 다른 두 후보들이 표를 나눠먹는 통에 카이사르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선거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 로마 종교 최고사제직은 단순히 뽀대나는 근사한 명함으로써 역할을 해줬을 뿐만 아니라, 점술 및 종교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로마의 정치문제에 대해서 카이사르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서 키케로에 앙심을 품고 호민관이 되기 위해서 일부러 평민의 양자가 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같은 경우, 스스로 평민으로 강등되기 위해서 종교적 절차가 필요했는데 카이사르가 최고사제로서 이를 승인하여 법적인 문제를 해결해 준다. 이때 카틸리나 음모가 발각됐는데, 카이사르는 이에 연관되었다는 강한 의혹을 받았고, 카토를 비롯한 보수파 인사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카이사르를 실각시키고자 했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실패했다. 또한 카이사르는 카틸리나의 동조자라는 죄목으로 체포된 전직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 등 로마 시민 5명을 키케로가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해 재판 없이 사형에 처할 때 끝까지 반대하고 종신형을 주장해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후 친구인 호민관 티투스 라비에누스를 시켜 37년 전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재판 없이 살해해 로마 시민을 무고하게 죽인 혐의로 전직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라비리우스를 살인죄로 기소하여 원로원 최종 권고의 부당함을 여론에 호소하려고 했다. 집정관 키케로가 몸소 나서서 라비리우스를 변호함에도 여론이 라비리우스의 사형을 요구하자, 재판장이던 법무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는 민회를 소집한 뒤 당시 상황상 라비리우스가 그들을 죽인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설명해 여론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러나 민회에서도 사형을 당장 집행하려는 분위기가 일자, 켈레르는 야니쿨룸 언덕에 걸려있던 붉은 기가 내려졌다는 핑계를 대며 재판을 해산했다. 이후 재판은 두 번 다시 재개되지 않았고, 라비리우스는 목숨을 건졌다.
BC 62년 카이사르는 법무관(Praetor)으로 선출된다. 이미 마리우스 공적비, 마리우스의 아내인 율리아의 장례식 때 한 발언 등으로 이미 술라파 인사들에게 찍힌 카이사르는 법무관으로 선출되면서 더더욱 경계를 받게 된다. 그런 와중에 호민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가 폭력 시위를 일으키자 이를 지지하는 분별 없는 행동으로 직위를 시작하고 몇 주만에 법무관에서 해임당했다가 반성하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보여 며칠만에 복직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한편 보나 데아 여신에게 바치는 여자들로만 이뤄진 종교행사가 최고사제였던 카이사르의 집에서 이뤄지는데, 클로디우스가 카이사르의 아내를 유혹하기 위해서 여장을 하고 숨어들어갔다가 걸려서 망신을 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키케로는 본인 특유의 말빨을 사용하여 클로디우스를 조롱하고 맹비판했고, 장래가 유망했던 귀족 클로디우스는 젊은 나이에 정치 커리어가 완전히 개박살난다. 이에 앙심을 품은 클로디우스는 민중파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보다 젊은 평민의 양자로 들어갔고. 호민관에 당선된다. 그리고 재판 없이 로마 시민을 처벌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안을 내놨는데 당연히 이 법안은 키케로를 노린 것이었다. 이 때문에 키케로는 카틸리나 음모 이후 전직 집정관인데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1년간 로마에서 추방당한다. 법무관 임기를 마친 이후 히스파니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된 카이사르는 현재 포르투갈 지역에서 지역 부족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했고, 이 덕택에 소규모 개선식을 열 권리를 얻게 된다.
이 당시 카이사르는 '명예로운 경력'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었고,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는 폼페이우스와 키케로를 제외한 젊은 세대에서 성공적인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법무관이 되어 직무를 수행한 뒤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스페인 서쪽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현재 포르투갈 지역을 제패하는 군사적 업적을 쌓았다. 이로써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개선식을 거행할 권리를 인정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