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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축적이 신의 축복, 유대교, 칼뱅주의, 청교도,프로테스탄트(개신교),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Jobs 9 2025. 4. 2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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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대부분 종교는 무소유와 청빈을 강조한다. 그런데 유독 부의 축적이 신의 축복으로 여기는 종교가 두 개 있다. 바로 유대교와 칼뱅주의에 뿌리를 둔 청교도이다. 당시 네덜란드 경제의 주축이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과 영국에서 박해를 피해 건너온 칼뱅주의자들이었다.

 

“칼뱅주의자들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곧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증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는 이같이 이들 청교도로부터 자본주의가 유래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베르너 좀바르트는 “자본주의는 유대인을 따라 들어왔다.”고 이를 반박했다.

 

유대교와 칼뱅주의 정신과 자본이 네덜란드를 세계의 무역, 금융, 산업 중심지로 만들었다. 스페인에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마라노들도 암스테르담의 자유로운 종교 환경 덕분에 다시 자신들의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이름을 다시 히브리어로 바꾸고 남자는 할례를 행하면서 유대교로 되돌아갔다.

 



노동·절제로 富 축적하는 것은 신의 축복"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노동·절제로 富 축적하는 것은 신의 축복"“프로테스탄트(개신교)는 세속적인 직업에서 거둔 성공을 구원의 증표로 삼았고, 이윤 획득과 물질적인 성공을 신(神)의 축복으로 여겼다. 이런 새로운 사고방식이 전통주의적 경제 체제를 허물어버리고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는 평생에 걸쳐 산업사회의 새로운 발전 방식과 구조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특히 큰 경제적 번영을 가져온 자본주의 발전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 개신교가 들어선 나라가 이탈리아 스페인 등 가톨릭 영향이 강한 나라에 비해 경제 성장이 빠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에 대한 답을 담아 1920년 출간한 책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베버는 자본주의를 단순한 경제 체제로 보지 않고 인간의 생활양식이나 가치관, 신념 등과 연관된 문화 현상의 하나로 보았다. 그는 “금욕적 개신교의 직업 윤리관이 합리적 생활을 중시하는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탄생시킨 핵심이었다”며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면서 증명했다.

 

다시 읽는 명저 "노동·절제로 富 축적하는 것은 신의 축복"베버는 “과거 가톨릭은 필요 이상으로 돈을 벌거나 저축해 자본을 축적하는 것을 죄악시했고, 노동을 인간의 원죄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봤다”고 했다. 그러나 개신교가 등장하면서 모든 게 변했다고 베버는 설명했다. 직업 노동과 금욕적 절제를 통해 부(富)를 축적하는 것을 신의 축복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개신교 금욕주의, 자본 형성에 기여"

 

베버는 개신교, 특히 칼뱅파의 교리에 주목했다. 종교개혁가 장 칼뱅은 구원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의 운명이 신에 의해 미리 정해졌다는 예정설(豫定說)을 내세워 현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 지침을 체계적으로 세웠다. 신자도 수도사처럼 엄격한 금욕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침으로써 신앙과 윤리를 결합했다. 베버는 이런 금욕주의를 ‘세속적 금욕주의’라고 불렀다.

 

베버에 따르면 칼뱅파는 세속적인 직업 노동을 통한 부의 획득은 신의 축복이라고 여겼다. 또 지속적인 직업 노동을 금욕을 위한 최고의 수단이자 신앙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증표로 삼았다. 풍요로운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사치를 배격하고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구원 가능성에 대한 불안은 금욕적인 생활을 낳고, 이런 절제와 검약이 자본 형성에 기여하게 됐다.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이며 신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졌다. 개신교 신자들은 더 이상 돈 버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이들은 열심히 벌어 축적한 부를 투자했다.” 베버는 이를 자본주의 태동으로 보았다.

 

이런 개신교의 윤리가 널리 퍼지면서 기업과 상업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탐욕적이며 이기적인 자들로 여겨지지 않게 됐다. 오히려 하느님이 맡긴 일을 성실하게 해내는 사람들로 평가됐다. 베버는 “직업 노동을 통해 자본을 증식하고, 창출한 부를 또 다른 부를 창출하는 데 사용하는 개신교의 윤리와 그 윤리를 기반으로 한 생활양식이 자본주의 정신을 출현시켰다”고 강조했다.




"자본주의, 탐욕을 합리적으로 억제"

 

베버는 이런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탐욕’ 자체와 동일시하는 기존 통념에 대해 ‘천진난만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자본주의는 무제한의 탐욕을 동력으로 삼아 나아가는 체제가 아니라, 그 탐욕을 합리적으로 억제하고 조절하는 체제라는 것이 베버의 관점이다.

 

베버가 미국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런과 벌인 논쟁은 유명하다. 베블런이 자본주의를 착취의 대표적 사례라고 하자,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이야말로 약탈을 막고 건전한 소비생활을 촉진시킨다”고 반박했다.

 

 

주목되는 점은 베버가 자본주의의 장래를 걱정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세속화하면서 금욕주의를 비롯한 개신교 윤리의 퇴색과 기업의 관료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이는 결국 자본주의의 활력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버의 이 책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비판론자들은 “종교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장했다”며 베버를 관념론적인 결정론자라고 화살을 날렸다. 논쟁은 근래에도 이어졌다. 대런 애스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번영을 좌우하는 것은 종교적 믿음, 윤리 등이 아니라 국가가 만드는 제도”라고 했다.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근대 자본주의 출현을 분석한 탁월한 전범(典範)이라는 데는 이견이 별로 없다. 특히 베버의 우수성은 자신의 견해를 풍부한 사례 등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설명한 데 있다. 예를 들어 당시 상공업이 발달한 국가나 도시에서 개신교 신자 비율이 다른 곳보다 높았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제시해 증명했다. 이 때문에 베버는 그때까지 일반적인 학문 영역에서 분화되지 않았던 사회학을 창시한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막스 베버가 1904년(1부)과 1905년(2부) 두 번에 걸쳐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총론』에 발표한 논문. 1920년에 1부와 2부를 합쳐서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내용

 

문제 의식

독일 지방의 직업 통계 연구에 따르면, 기업가와 숙련노동자층에 가톨릭교도보다 프로테스탄트가 눈에 띄게 많이 보인다. 실제로 수공업 도제들 가운데 가톨릭교도들은 수공업에 머물려는 경향이 보다 크며, 따라서 수공업의 장인이 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들은 공장으로 유입되어 숙련노동자층이나 경영관리층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더 강하다. 따라서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톨릭교도는 보다 정적이고 영리 충동이 적기 때문에, 위험하고 자극적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명예와 부를 가져다주는 삶보다는 비록 보다 적은 수입일지라도 가능한 한 안전한 생애를 택하기 때문이라고. 이는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긴 하지만 과거를 살펴보면 가톨릭교도 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도 '세속적인 쾌락'에 정반대되는 삶을 살아왔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즉 프로테스탄트들은 세속적 쾌락를 강렬한 신앙심으로 규제하면서, 사업 감각 및 성공 정신 ㅡ '자본주의 정신'을 매우 강력히 발달시켰던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는 중국, 인도, 바빌로니아에도 그리고 고대와 중세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 자본주의에는 바로 서구적 근대 자본주의에 있는 독특한 에토스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 에토스란, 벤저민 프랭클린이 "시간은 돈"이라고 말하며 지켰던 생활양식, 즉 모든 적나라한 향락을 아주 엄격히 억제하면서, 순수한 자기 목적에서 돈을 벌고 더욱더 많은 돈을 버는 일을 개인의 의무로까지 여기는 사고방식 ㅡ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하나의 '윤리'로서 설교되는 저 '자본주의 정신'을 가리킨다. 합법적인 방식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근대적 경제질서 아래에서 유능함의 결과인 동시에 표현이다. 이런 윤리 하에서 돈을 벌지 않고 노는 것은 일종의 의무 망각으로 여겨진다.

 

과거의 '전통주의'적 생활양식에서 이러한 생각들은 가장 추잡한 탐욕으로 여겨져 품위가 전혀 없는 것으로서 배척당했을 것이다. 이른바 '전통주의'적 태도에서 노동자들은 성경의 말씀처럼 '지족(知足)했기' 때문에 많이 버는 것보다 적게 일하는 것을 택했다. 기업가들도 경쟁보다는 소규모 재산이 충족되기만 하면 적당히 일했고 삶의 템포는 전반적으로 느긋했다. 그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살기를,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기를, 그리하여 그에 필요한 만큼만 벌기를 원했다. 그러나 '전통주의'적 생활양식의 안락함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 도래하자 한순간에 파괴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어떻게 하면 되도록 편하고 적게 일하면서도 통상적인 임금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서 적어도 작업하는 동안만이라도 벗어나 마치 노동 자체가 절대적인 자기 목적 ㅡ '소명' ㅡ인 양 여기고 일하는 정신적 태도가 필수불가결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신적 태도는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기간 지속되는 교육 과정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어떤 교육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 시대의 많은 사례들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종교적 계기가 그러한 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초기 발전 단계에서 어떤 종교적 계기가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금욕주의적 직업윤리

 

우선 근대 생활양식의 변화에 있어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루터의 영향을 제일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루터는 그리스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집회서 11장 20-21절의 πόνος(노동), ἔργον(일)이라는 단어들을 'Beruf(부름)'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그 후로부터 '소명'이라는 뜻을 지닌 이 단어는 독일과 프로테스탄트적 민족들 사이에서 '직업'이라는 의미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노동과 일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과업이라는 개념은 성서 번역에서, 그것도 원전의 정신이 아니라 번역자의 정신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세속적 일상 노동이 종교적 의미를 가진다는 표상을 초래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의 근대적 의미의 직업 개념을 최초로 산출했다. 이는 은총은 정해져 있는 것이지 인간이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확고한 의식과 결부되어 있었다. 세속적 의무의 이행이 모든 상황에서 신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오직 그것만이 신의 의지이며, 따라서 허용된 모든 직업은 '소명'으로서 신 앞에서 절대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열광주의자들'과 농민폭동에 맞서 투쟁한 후로부터 루터는 현실정치적으로 되어감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관철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칼뱅에게는 그 사태가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그는 교리상의 적대자들과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자신의 논리적 일관성을 끝까지 고수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신의 결단을 인간이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고도 불경한 일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인간의 일부는 구원받을 것이고 나머지는 저주받을 것이라는 사실 뿐'이라는 예정론의 교리가 일관된 논리로서 매우 중요해졌다. 그런데 이 비장함을 불러일으킬 만큼 비인간적인 교리는 개인 각자에게 전대미문의 내적 고독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왜냐하면 예정론의 논리에 따르면 설교자도, 성례전도, 교회도, 심지어 신조차도 그들을 도울 수 없는데, 신의 은총 또는 저주는 영원으로부터 전혀 측량할 길 없는 신의 결단에 따라 각 개인에게 그 확고하고 불변한 운명을 배당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공로나 죄과가 이러한 운명을 변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영원으로부터 확정된 운명을 따라 고독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인간의 내적인 고립은 문화와 주관적 종교성에 내재하는 모든 감각적ㆍ감정적인 요소에 대한 청교주의의 절대적인 부정적 태도의 근거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즉 교회적ㆍ성례전적 구원의 절대적 폐지야말로 가톨릭과의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고대 유대교의 예언과 더불어 시작되고 헬레니즘의 과학적 사고와 결합되어 모든 주술적 구원 추구 수단을 미신과 독신이라고 비난했던 저 위대한 종교사적 과정, 즉 세계의 탈주술화 과정이 여기에서 완결되었다. 진정한 청교도들은 심지어 장례식에서도 일체의 종교적 의식의 흔적을 배척했고 노래도 예식도 없이 가까운 사람의 장례를 치렀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그 어떠한 종류의 '미신', 즉 주술적ㆍ성례전적 방식의 구원 효과에 대한 그 어떠한 신뢰심도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이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감정적으로 강화된 죄의식을 정기적으로 '방출하는' 수단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들에게 즉각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고, 그와 더불어 다른 모든 관심사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과연 선택되었는가? 그리고 나는 내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ㅡ 스스로를 신의 '도구'라고 여겼던 칼뱅 자신에게는 이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의 후계자들과 특히 광범위한 계층의 평신도들에게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죄의식을 방출하는 수단이 사라진 그들에게는 은총 상태의 인식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의 '구원의 확실성'이 절대적으로 중대한 의미로 격상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예정론을 고수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선택된 자들'의 일원임을 인식할 수 있는 확실한 표지의 존재 여부에 대한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도대체 '선택된 자들'의 일원임을 인식할 수 있는 확실한 표지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신의 영광을 증대하는 데 봉사하는 기독교인의 생활양식이라는 열매를 통해서 인식될 수 있다라고 말이다. 자신의 품행이 신의 영광을 증대하기 위한 자신의 내부에 살아 있는 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품행은 신이 원한 것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신이 역사한 것이라는 점을 의식함으로써, 그는 이 신앙이 추구하는 저 최고의 선, 즉 구원의 확실성을 획득한다. 요컨대 부단한 직업노동(선행)은 신으로부터 구원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는 절대적으로 부적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는 선택의 표지로서는 불가결하다. 그러므로 칼뱅주의자들은, 실제로도 종종 표현되고 있는 대로, 자신의 구원 ㅡ 정확히는 구원의 확실성이라고 해야 하지만 ㅡ을 스스로 '창조한다'는 것이며, 그러나 이러한 창조는 가톨릭에서처럼 개별적인 공로를 하나씩 쌓아감으로써가 아니라, 매 순간 선택되었는가 아니면 버림받았는가의 냉혹한 양자택일에 직면해 행해지는 체계적인 자기통제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실천적인 차원의 '행위구원주의'18가 갖는 결정적인 의미는 이것이 중세의 평균적 가톨릭교도들의 일상적 삶과 구별짓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가톨릭에서는 죄, 회개, 속죄, 평안 그리고 또다시 죄로 이어지는 참으로 인간적인 기복이 나타나지만, 칼뱅주의에서는 그러한 무계획적이고 비체계적인 성격을 벗어나 일상의 윤리적 실천으로서 생활양식 전체를 일관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형성하는 일이 나타났다. 이들이 '엄격주의자들'이라고 불려졌던 것은 모두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자연적인 상태에서 은총받은 상태로 승화시키는 은총의 역사는 오직 매 순간과 모든 행위에서 삶 전체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만 보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삶은 오로지 초월적인 목표, 즉 구원에 지향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세속적 삶은 철저히 합리화되었고 지상에서 신의 영광을 증대한다는 오로지 한 가지 관점에 의해 지배되었다. ㅡ 그 결과 세속적인 직업 생활에서 "모든 것은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라는 관점이 이보다 통렬하고 진지하게 고수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로써 칼뱅주의는 종교를 지향하는 광범위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금욕주의에 대한 매우 적극적인 심리학적 동인을 제공했다. 그리고 이러한 금욕주의 생활양식의 조직적 체계화는, '꼼꼼한' 청교도가 자신의 은총 상태를 부단히 점검하는 방식에서는 이미 순전히 외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개별적 덕목에서 자신이 이룩한 발전을 개괄적ㆍ통계적으로 신앙일기에 기록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맥박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삶의 성화(聖化)는 거의 사업 경영의 성격을 띨 수 있게 되었다.

 

 

세속적 금욕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 정신으로

 

청교주의를 대표하는 리처드 박스터의 저술을 검토해보자. 그에 따르면 재산이 있는 자라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설사 그가 재산이 많아서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노동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할지라도, 그가 가난한 자와 똑같이 복종해야 하는 신의 계명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즉, 직업은 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라는 신의 명령이다. 신의 섭리는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직업(소명)을 예비하는 바, 각 개인은 부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것 자체를 위해서 노동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 하에서 사교, 쓸모없는 잡담, 사치를 통한 시간 낭비 그리고 심지어 건강 유지에 필요한 시간 이상의 수면에 따른 시간 낭비도 신의 영광에 봉사하는 노동의 기회를 상실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보다 더 많은 이윤을 획득할 수 있는 합법적인 기회가 있다면, 그 기회를 이용함으로써 신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더 적은 이윤을 창출하는 방법을 따른다면, 신에게 받은 소명의 목적 가운데 하나를 방해하는 것이 되고, 신의 청지기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물론 그것이 자신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죄를 짓는 것이겠지만, "진정 신을 위한 것이라면 너희는 부자가 되기 위해 노동해도 좋다." 직업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서의 부의 추구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또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이처럼 프로테스탄티즘의 세속적 금욕주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재산의 무절제한 향락에 맞서 싸웠으며 소비, 특히 사치성 소비를 억압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금욕주의는 이윤 추구를 합법화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신이 그것을 직접 원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전통주의적 경제윤리가 주장했던 재화 획득의 부도덕성에서 해방되는 심리학적 결과를 낳았다. 목적으로서의 부의 추구는 무엇보다 먼저 배척해야 할 태도로 보면서도 직업노동의 열매로서의 부의 획득은 신의 축복으로 보는 이러한 삶의 태도는 사경제적 부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순전히 충동적인 소유욕에 대항해서 자본주의 '정신'이 확장되는 데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지렛대로 작용하였다. 이로부터 나타나는 외적인 결과는 자명하다. 즉 금욕적 절약 강박에 의한 자본형성이 바로 그것이다. 획득한 부의 소비적 사용이 제어되면서 그 부의 생산적 사용, 다시 말해 투자자본으로서의 사용이 촉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청교주의적 인생관은 그 영향력이 미치는 한 모든 상황에서 시민계층적이고 합리적인 경제적 생활양식으로의 발전 경향을 촉진했다. 그 생활양식은 근대적 '경제인간'의 요람이었다. 특히 무산계급에 강요한 엄격한 금욕이 자본주의적 의미에서의 노동'생산성'을 강력히 촉진할 수밖에 없었음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귀족이나 졸부가 아니라 자수성가한 시민계층이 최상의 윤리적 평가를 받았으며, 신의 섭리를 따라 이윤 창출에 성공한 성도가 있으면 언제나 그를 가리켜 "신이 그의 사업을 축복하신다"고 말했다. 그런데 부가 증가함에 따라 역설적이게도 그 부를 만들었던 '금욕주의 정신'은 그에 비례해 부의 유혹에 굴복하는 빈도가 많아진다. 엄격히 규제된 삶과 억제된 소비를 통해 한번 부유해지게 되면, 그로부터 획득된 재산으로 인해 모든 형태의 자만심과 번뇌 그리고 세상에 대한 애착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교의 형식은 그대로 남으나 그 금욕주의 정신은 점차 사라져간다. 일반적으로 신의 왕국에 대한 열렬한 추구가 점차 냉정한 직업적 덕목으로 해체되기 시작함으로써 종교적 뿌리는 서서히 말라죽고 그 자리에 공리주의적 현세성이 확립된다. 단지 남은 것은 이윤 추구 행위가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에토스 ㅡ 이를 통해 마침내 전형적인 시민계층적 직업 에토스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직업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금욕주의가 세계를 변형하고 세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이 세계의 외적인 재화는 점증하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재화 자체의 힘만으로도 인간을 그 체계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게끔 만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그 추진력에 편입된 모든 개인들의 생활양식을 엄청난 강제력으로 규정하며 아마도 그 마지막 톤의 화석연료가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인간을 그 쇠우리 안에 가두어 놓을 것이다. 아무튼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는 기계적 토대 위에 존립하게 된 이래로 금욕주의 정신이라는 버팀목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종교적ㆍ윤리적 의미가 없어져버린 영리 추구 행위는 오늘날 그것이 가장 자유로운 지역인 미국에서 경쟁적 열정과 결합하여 일종의 스포츠적인 특성을 띠기까지 한다. 미래에 누가 저 쇠우리 안에서 살게 될는지,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발전 과정의 끝자락에 전혀 새로운 예언자들이 등장하게 될는지, 혹은 옛 사상과 이상이 강력하게 부활하게 될는지, 아니면 일종의 발작적인 자기 중시로 치장된 기계화된 화석화가 도래하게 될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만약 기계화된 화석화가 도래하게 된다면, 그러한 문화 발전의 '마지막 인간들'에게는 물론 다음의 명제가 진리가 될 것이다. "정신 없는 전문인, 가슴 없는 향락인 ㅡ 이 무가치한 인간들은 그들이 인류가 지금껏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올랐다고 공상한다."

 

 

 

비판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적 축적에 대해 의도하지 않은 친화력이 있었다는 베버의 설명은, 무엇보다도 "실증적 근거가 없다"는 치명적인 문제로 오늘날에는 많은 반박이 쌓여있는 상태이다. 이는 역사학계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사학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조지프 슘페터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베버의 주장과 달리 자본주의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것이며, 베버가 말하는 그런 종류의 직업윤리는 중세 초 가톨릭 교회에서부터 존재하던 것이라며 비판하기도 한다.

 

202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런 애쓰모글루는 저서 <왜 국가는 실패하는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어떠한가? 네덜란드와 영국과 같은 주로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근대 시대의 첫 경제적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일 수 있지만, 종교와 경제적 성공 사이에는 큰 관계가 없다. 가톨릭이 주류인 프랑스도 19세기에 네덜란드와 영국의 경제 성과를 빠르게 따라잡았으며, 오늘날 이탈리아 역시 이들 국가만큼 번영하고 있다. 더 동쪽을 바라보면, 동아시아의 경제적 성공 사례들 중 어느 것도 기독교의 어떤 형태와도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경제적 성공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뒷받침할 근거는 많지 않다.

Daron Acemoglu and James A. Robinson, 왜 국가는 실패하는가, 최완규 역, 시공사, 2012

 

가령 영국의 역사학자 Peter Marshall은 자신의 책 『종교개혁』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베버의 사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잘못 전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는 하지만, 19세기 후반 독일 사회학자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뱅주의자와 청교도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고무했다는 영향력 있는 이론을 내놓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불안한 칼뱅파는 물질적 성공을 예정된 구원을 받을 가능성의 표지로 해석했다. 17세기와 18세기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의 명백한 경제적 발전은 베버의 테제를 얼마간 뒷받침하지만, 근래 역사가들은 대체로 이 테제에 설득력이 없다고 보면서 거리를 둔다. 경건한 스코틀랜드의 경제가 낙후되었던 사실로 알 수 있듯이, 칼뱅주의 문화와 자본주의적 번영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성은 없었다. 자본주의적 번영은 오스만 제국이 팽창한 15세기 이래 경제적·정치적 우위가 지중해에서 (가톨릭권 프랑스를 포함하는) 대서양 세력들로 넘어간 더 장기적인 추세의 일부였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어 보인다.

-Peter Marshall, 〈종교개혁〉The Reforma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 (12009, Oxford University Press), 이재반 번역, 교유서가, 2016, ebook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요인은 '개신교 윤리'보다는 '지리적 이유'에서 찾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Marshall과 유사하게, Jacques Delacroix과 François Nielsen은 19세기 유럽 국가들을 비교한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베버의 주장에 실증적 근거가 없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개신교가 산업 자본주의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막스 베버에게 크게 빚지고 있는 논지를 조사했다. 프로테스탄트 비율과 19세기 중후반 유럽 국가의 산업 자본주의 발달을 비교하면서. 발달은 5개의 변수를 이용하여 측정되었다. 이 변수는 부와 저축, 주요 주식 거래의 설립 데이터, 철도 네트워크의 확장, 농업과 산업에서의 남성 노동력 분포, 유아 사망률을 포함한다. 이 증거를 기반으로 할 때,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대한 "공통 해석"(곧 국가에서의 개신교 세력이 산업 자본주의의 초기 발달과 관련되었다는 아이디어)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에 대한 실증적 증거는 거의 없다.

-Jacques Delacroix and François Nielsen, 〈The Beloved Myth: Protestantism and the Rise of Industrial Capitalism in Nineteenth-Century Europe〉, 2001

 

더군다나 '네덜란드와 이베리아' 같은 전혀 다른 지역 간이 아닌, '독일 내부 가톨릭권과 개신교권' 같은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지역 간 비교의 경우, 베버의 주장은 주장은 더욱 취약해진다.

 

Davide Cantoni는 AD 1300~1900년 동안 독일 내부의 272개 도시들을 비교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개신교 윤리"에 관한 막스 베버의 에세이로 가장 유명한 ㅡ 많은 이론들이 개신교가 경제 발전을 도왔다는 가설을 세웠다. 19세기까지 상당한 종교적 이질성과 교파 소속의 안정성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영토는 이 가설에 대한 이상적인 시험장을 제공한다. 1300년에서 1900년 사이에 272개 도시로 구성된 데이터 집합에서 인구 수치를 사용했을 때, 나는 경제 성장에 대한 개신교의 영향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결론은 다양한 대조군을 포함할 정도로 강력하며, 데이터 선택이나 작은 표본 크기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개신교는 경제발전의 다른 그럴싸한 결정요인들과 상호작용해 보았을 때 아무런 영향이 없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결과는 개신교(루터교와 칼뱅주의)와 가톨릭 도시가 1300년에서 1900년 동안 매우 유사한 성장 궤적을 따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일련의 데이터 하위 집합을 보유하기에 확고하며, 데이터 집합의 선택이거나 작은 표본 크기 때문일 가능성은 없다.

-Davide Cantoni, 〈The Economic Effects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Testing the Weber Hypothesis in the German Lands〉, 2010

 

오히려 후기 근대에 접어들게 되면, 독일 내부에서 산업화 지역은 (농촌의 가톨릭, 도시의 개신교라는 통념과 정반대로) 거의가 가톨릭 지역이 된다.

역사적 환경상 독일의 산업화 지역은 거의가 가톨릭이었고, 특히 라인-루르 지역과 슐레지엔이었다. 부분적으로 이는 왜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 교회들보다 산업 프롤레타리아트 문제에 더 빨리 깨어있었는지 설명해줄 수 있다.

Thomas Knapp, 「The Catholic Labor Movement in Germany 1850–1933: A Survey and a Commentary」, 2008

 

결국 베버의 주장을 뒷받침해야 할 기초적인 사실관계의 실증부터가 실패한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다음과 같이 최근 연구사를 요약했다:

영국의 경제사학자 R. H. 터니(Tawney, 1880-1962)는 명저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한길사 역간)에서 산업 자본주의는 남유럽의 가톨릭 도시들에서 잉태되었으며 북부에 자본주의가 출현했을 때에도 초기에는 남부 출신의 가톨릭 은행가들이 주도했다는 것을 훨씬 상세하게 재기술했다. 터니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새로운 관점을 추가했다. "태동기의 자본주의가 … 칼빈의 사업(enterprise)과 부의증식에 대한 태도를 형성했으며 그 역순이 아니다."

 

1933년 다른 영국인 사학자 H.M. 로버슨(1905-84)은 다시금 시기상 자본주의의 발흥이 종교개혁을 한참 앞서며그 모태가 가톨릭임을 입증했다. '개신교 윤리'는 이미 자분주의 마인드를 가진 중산층의 산물이었다.

 

1940년대와 50년대 초까지 이렇게 베버를 배격하는 주장들이 나오다가 드디어 중대한 연구가 등장했다. 바로 커트 사무엘슨(Kurt Samuelsson, 1921-2005)이 1957년 스웨덴어로 출간하고 1961년에 영역본이 발간된 《종교와 경제 행동: 개신교 윤리, 자본주의 발흥, 학문의 남용》(Religion and Economic Action: The Protestant Ethic, the Rise of Capitalism, and the Abuses of Scholarship)이다. 이 책의 서평에서 하버드대학교 교수인 사회학자 조지 호만스(1910-89)는 저자가 "베버의 가설을 단지 여기저기 뜯어고친 게 아니라 박살을 냈다"고 표현했다.36 사무엘슨은 시기적으로 볼 때 산업 자본주의의 발흥이 종교개혁에 선행했다는 풍성한 증거를 재차 거론했다.

 

그러나 베버의 논제는 여러 교과서에서 소소한 '적용 사례'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1969년 유명한 영국인 사학자 휴 트레보-로퍼(1914-2003)는 "대규모 산업 자본주의가 종교개혁 이전에는 이념적으로 불가능했다는 발상은 그것이 실제 가능했다는 단순한 사실로 초토화된다""고 일부러 지적한 것이다. 10년 후 프랑스 사학자 페르난드 브라우델(1902-85)은 이렇게 성토했다:

모든 역사학자가 이 끈질긴 개신교 윤리 이론을 반대해 왔지만, 완전히 제거하진 못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명백히 틀렸다.38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Reformation Myths: Five centuries of misconceptions and some misfortunes (2017) ,손현선 옮김, 헤르몬, 2018, pp.106-108

 

 

 

가톨릭과 루터의 방식은 인간적으로 묘사하고 칼뱅의 방식은 비인간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칼뱅계열이 많은 한국 교회에서 이 책은 그 유명세에 비해 드물게 인용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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