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 해체는 존 레논 탓"..반세기 만에 폭로한 폴 매카트니 전설적인 영국 록 밴드 비틀즈가 지난 1970년 해체하자 팬들은 폴 매카트니를 탓했다. 그러나 밴드의 분열을 부추긴 사람은 존 레논이었다고 매카트니가 폭로했다. 매카트니는 12일(이하 현지시간) 방송 예정인 BBC 라디오4 프로그램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CNN이 11일 보도했다. 미리 공개된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매카트니는 “하루는 존이 방에 들어오더니 ‘난 비틀즈를 떠난다’고 하면서 ‘정말 짜릿하다. 마치 이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레논이 비틀즈를 떠나기로 한 이유는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해서였다고 매카트니는 전했다. 레논은 아내 오노 요코와 함께 사회적 편견을 없애기 위해 가방 안에 들어가 생활하는 ‘배기즘’ 운동을 하는가 하면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호텔 침대에 누워 있는 ‘베드 인 포 피스’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매카트니는 “존은 요코와 새로운 삶을 만들고 있었다는 게 핵심이다. 그는 평화를 위해 가방 안에 들어가고 싶었으며, 암스테르담에서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누워 있고 싶었던 것”이라며 “그것에 대해 논쟁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해체에 대해 “내 인생애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며 레논이 해체를 부추기지 않았더라면 비틀즈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는 “비틀즈는 해체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나의 밴드이자 나의 직업이며 나의 삶이었다. 나는 지속하고 싶었다. 난 우리가 꽤 좋은 곡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며 “‘애비 로드’, ‘렛 잇 비’ 등은 나쁘지 않았다는 걸 알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매카트니와 레논이 비틀즈를 시작하기 전 ‘키친 싱크’ 장르의 네 페이지 짜리 연극 극본을 쓴 적이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
일본의 설치미술가이자 행위예술가. 대중적으로는 존 레넌의 아내로 유명하며, 현대 예술에 많은 업적을 남긴 예술가이기도 하지만 후기 비틀스의 불화에 영향을 끼쳐서 비틀스의 팬들에게는 '일본에서 온 희대의 마녀'라고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플럭서스 계열에 속한 유명한 아방가르드 행위예술가로 플럭서스의 창시자인 조지 마치우나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같은 계열의 존 케이지와 백남준과도 친분이 있었다.
오노 요코는 오노 에이스케와 야스다 이소코의 장녀로 태어났다. 증조 할아버지는 훗날 메이지 유신으로 발전한 반 도쿠가와막부 운동에 참여한 자작이었다고 한다. 부친은 황실 혈통의 전도유망한 은행가, 모친은 야스다 재벌을 일으킨 명문 권세가의 딸이었다. 오노 요코는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부터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의 도시와 일본을 오가며 살았지만 유년기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보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도쿄 대공습을 겪었고 이후 피난길에서 기아에 시달리며 어려운 시기를 지냈다. 상황이 진정되자 가쿠슈인 여자 중・고등과를 거쳐 가쿠슈인 대학 철학과에 진학했지만 1년을 보낸 후 다시 부친의 부임지인 뉴욕으로 이주하여 이후 계속 미국에서 거주했다. 그녀 스스로는 이민자로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 모양으로, 자신을 '오렌지도 레몬도 아닌 자몽'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오노 요코는 비틀즈의 멤버 존 레넌의 두 번째 아내이다. 또한 둘이 결혼할 때 즈음 비틀스의 불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비틀스 해체의 원인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존 레넌과 오노 요코의 만남 사이에 화이트 앨범을 녹음했는데 결과물과 이후 내부의 상황을 말하는 인터뷰를 보면 당시 밴드가 화합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녀가 비틀스의 일원이 되기를 바랐던 레논 부부와 다른 멤버 사이의 갈등이 비틀스 해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당시 비틀스에는 그녀 이외의 내・외부적인 문제가 존재하고 있었다.
요코는 비틀즈의 해체는 보다 내부적인 이유에서 기인했다고 말한다. 폴 매카트니도 인터뷰를 통해 그녀는 분명히 비틀스의 해체에 책임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오노 요코가 존 레넌을 삶을 다른 방식으로 끌어들여 존이 성공적인 음악 커리어 2막을 시작하게 된 것 같다고 밝혔다.
비틀스 해체에 여러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이제 와서는 꽤나 복잡한 문제였다고 보인다. 직접적으로 드러난 이유로는 상기한 오노 요코를 둘러싼 갈등을 비롯해 매니저인 브라이언 앱스타인의 사망과 그들이 세웠던 회사인 애플의 경영을 두고 벌인 불화, 멤버들의 솔로 커리어에 대한 의지 등을 꼽을 수 있다. 비틀스의 해체를 다룬 롤링스톤의 특집 기사.
존 레논과 자식으로 션 레논을 두고 있다. 일본식 이름은 오노 타로. 션도 아버지를 따라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 전범행위와 욱일기를 옹호하는 과격한 발언으로 유명하다.
오노 요코는 존 케이지의 작업 Notations에 참여하면서 존 레넌과 관련되기 시작한다. 이후 둘의 만남은 불륜으로 번졌다. 존 레넌은 아이가 있는 유부남이었고 오노 요코 또한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이혼하지 않은 기혼자였다. 불륜으로 시작한 둘의 결혼에는 계속해서 불륜을 비롯한 문제가 있었고 둘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했다고 알려졌다. 불륜에 더해 존 레넌이 마약 혐의로 미국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자 영주권자였던 오노 요코는 자신의 커리어를 중시해 미국에 남기를 택했고 둘은 결별했다. 존 레넌은 결국 승소해 추방당하지 않았지만 둘은 18개월 동안 해어졌고 이것이 유명한 잃어버린 휴일 기간이다. 이때 존 레넌은 오노 요코의 제안으로 레논 부부의 비서였던 메이 팡과 만남을 가졌다. 오노 요코는 존 레넌이 사망한 이후 예전부터 불륜 상대였던 유명 디자이너 샘 허배토이와 1981년 결혼했다. 존 레넌도 생전 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오픈 릴레이션십에 가까운 결혼 생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틀스의 관계자들은 대체로 비틀스 팬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다. 조지 마틴,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물론이고, 비틀스 멤버들의 아내들도 비틀스 팬들에게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유독 오노 요코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는 싸늘한 편이다. 오노 요코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은 다음과 같다.
존 레넌의 유산으로 줄리안 레넌과 오노 요코는 소송을 벌여야 했다. 존 레논의 유언장에서 줄리안 레논의 몫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줄리안은 기나긴 소송 끝에 유산의 일부를 찾았다. 이후 줄리안 레논은 아버지의 유품이 흩어진 상황과 자신이 존 레논과 관련된 모임에서 의도적으로 제외되는 것에 대해서 오노 요코를 비판한 적이 있다. 반면 줄리안 레논은 션 레논과 비교적 가까운 사이라고 알려져 있다.
레논-매카트니의 표기와 관련하여 폴 매카트니와 논쟁이 있었다. 폴 매카트니가 Yesterday를 비롯한 자신이 작곡한 몇 곡에 대하여 작곡자 표기를 반대로 하기를 원하자 오노 요코는 반대했다. 이후 폴 매카트니가 자신은 지금의 표기에도 만족한다고 말하면서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또한 유부남과 불륜을 저질러 신시아 레논에게 큰 고통을 준 일이 비판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