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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맥(濊貊), 예(濊)족, 맥(貊)족,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옥저, 동예

Jobs 9 2025. 5. 2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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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맥(濊貊)

 

남만주·한반도 중북부에 살던 민족이다. 한반도 남부에 살던 한(韓)족과 융합되어 현대 한민족의 직계 조상이 되었다. 예맥족은 원래는 요서 지역에 있었으나 근방의 한족(漢族) 및 유목민족 세력에 밀려 점점 동진했다.

 

'예맥(濊貊)족' 자체가 원래부터 하나의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과, '예(濊)족'과 '맥(貊)족' 두 민족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는 설이 있다. 만약 후자의 설을 지지할 경우에도 고구려가 두 민족을 본격적으로 융합시킨 것이 되니 결론적으로는 두 가지 설이 다 맞을 수도 있다. 

 

고구려(7세기)와 발해(10세기)가 멸망한 뒤 예맥족은 돌궐·중원·거란·여진 등으로 일부 동화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한반도 내의 세력이 되어 지금의 한민족 계보로 이어졌다.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우세를 차지한 예맥족이 원삼국시대~삼국시대부터 자칭·타칭 삼한(三韓)이라 불린 것으로 보아 크게 보면 서로의 정체성이 하나의 세력권으로 점차 동화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 한국인을 이루는 한민족은 예맥족이 중심 국가였던 고조선과 부여, 이들의 후손인 고구려, 백제, 그리고 옥저와 동예를 모두 계승했지만 중국의 한족과 만주족은 해당 국가들을 계승하지 않았다. 부여와는 별개로 예맥족이 근간을 이루던 고조선도 멸망 이후 그 유민들이 삼한 지역으로 뿔뿔히 흩어지게 되는데, 이때 이들이 건국한 나라들 가운데 사로국이 있었다.

 

요동과 만주에 거주하던 예맥인들은 유목민이 아니었지만 요나라 이전까지 유목 제국이 만주에 출몰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강력한 유목민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을 통제했을 정도로 고대 만주의 예맥인들은 사나운 전투민족이었고, 북중국을 자주 약탈했기 때문에 고대 중국에서는 북방의 5호 다음으로 이를 갈았다. 중국이 긴 세월에 걸쳐 대대적으로 예맥인들의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정벌을 시도했고,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것은 성공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발해가 건국되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발해는 고구려만큼 유목민족을 통제하지는 못했고 결국 만주의 예맥을 몰락시킨 주체는 중국이 아닌 북방유목민들이었고, 이들이 만주의 주도권을 쥐게된 이후로 요나라, 금나라, 몽골 제국, 청나라 등의 제국을 건설하여 중국의 한족 왕조에게 더 큰 악몽을 안겨주었다.

 

 

명칭과 지칭

 

일찍이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은 '맥'이 종족의 명칭이고, '예'는 지역 또는 강의 이름이라고 보아, '예맥'은 맥족의 아홉 갈래(九貊, 구맥) 중의 하나를 지칭한 것이라고 했다. 능순성(凌純聲)도 '예'는 예수(濊水) 지역에 거주했던 맥족이라고 하여 동일하게 이해했다.

 

일본인 학자인 미지나 아키히데(三品彰英)는 선진(先秦)문헌에 보이는 '맥'은 북방 민족에 대한 범칭이며, '예'는 진대(秦代)의 문헌에서 처음 보이는데, 한대(漢代)에 범칭되는 '예'는 고구려·부여·동예를 포괄하는 민족명이라고 봤다. '예맥'이라는 호칭은 현실적인 민족명인 '예'와 고전적인 북방 민족에 대한 범칭인 '맥'을 결합시키고, 편의적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고구려를 지칭한 '맥'은 민족명인 예족 내의 특정한 부족명이라고 했다. 그리고 한대 이후의 '맥'은 '예'와 동일한 계통의 실체라고 봤다.

 

윤무병(尹武炳)의 경우, '예맥'이라는 명칭은 사마천이 저술한《사기》(史記)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예족과 맥족을 합친 범칭이 아니라 맥족인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봤으며, 한대 이후의 예와 (예)맥은 동일계통 내에서 각각 구분되어졌던 실체였다고 주장했다.

 

한편, 대만의 학자 예일부(芮逸夫)는 한민족이 예맥과 한(韓)의 양계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예맥족 중 '예족'은 한반도 중북부와 송화강·길림·눈강(嫩江) 지역 등에 살았고, '맥족'은 산동·요동·발해만 연안 등에 거주하여, 그 거주지역의 분포에 따라 예와 맥이 구분되었다고 봤다. 김정배(金貞培)도 예·맥·한은 동일계 족속으로서, 그 분포지역의 차이에 따라 각각 구분되어졌다고 봤다.

 

이종설(異種說)의 대표적인 주장자는 미카미(三上次男)인데, 그는 예족이 유문토기문화(有文土器文化)를 영위하며, 생활방식에 있어서 수렵 및 어로의 비중이 컸던 고아시아족(古Asia族) 계통이고, 맥족의 경우 무문토기문화(無文土器文化)를 남겼기에 퉁구스족 계통인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미카미의 주장은 빗살문토기문화와 무문토기문화가 같은 시기의 것이 아니라, 시대를 선•후하는 문화였다는 사실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되었다.

 

한편, 이옥(李玉)은 맥족과 예족이 원래 중국의 산시성과 허베이성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동쪽으로 이동해왔는데, 기원전 3세기 무렵 장춘 및 농안 방면에 먼저 정착해 있었던 예족이 이어서 이동해온 맥족에게 밀려 남쪽으로 왔다가 고조선에게 쫓겨 요동군(遼東郡)에 예속하게 되었고, 이것이 예군(濊君) 남려(南閭)의 집단이었으며, 이 예의 일부가 맥족에 흡수되어 기원전 2세기경 새로운 종족인 예맥이 성립되었으니 이것이 '고구려족'(高句麗族)이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백가쟁명식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어 왔다. 현재 학계에서는 예맥이 예와 맥으로 구분되지만, 서로 다른 계통이 아닌 하나의 계통이더라도 다른 갈래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예와 맥은 사회적·정치적으로 서로 구분이 되지만 종족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예맥(濊貊)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접한다.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삼국지》<위서> - 동이전- 고구려 편

... '예왕의 도장'이라 하니 나라의 옛성에 예성이 있다. 대개 근본은 예맥의 땅이다.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노릇을 하고, ...

–《삼국지》<위서> - 동이전 - 부여 편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다에 임하여 거한다. 그 땅의 형태는 동쪽과 북쪽은 좁고, 서쪽과 남쪽은 길다. 가히 1,000리이다.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에 접하고, 남쪽으로 예맥에 접한다.

–《삼국지》<위서> - 동이전 - 옥저 편

실상 예맥이라는 명칭은 고대 사서에서 매우 넓은 범위로 제시되는 일반적인 종족명이다. 예맥족의 범위는 남만주~한반도 중북부에 퍼져 있었다. 위의 - 동이전 -이라는 하나의 사료 내에서도 예맥은 고구려와 동옥저의 남쪽, 즉 한반도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하며(일반적으로 언급하는 동예) 혹은 부여와 같은 송화강 일대에 있었던 고대 국가와도 연관을 가진다. 또한 고구려가 있었던 때는 이미 고조선이 멸망한 후였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이 언급되는 것을 보니 고조선의 유민들이 마한과 변한에 세운 소국을 조선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에서 종족 명칭이 아니라 국가 명칭으로서의 “예맥”은 동예를 지칭하는데, 동예도 예맥족이다. 항목 참고. 한편으로 예맥은 예+맥이라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이는 아래 항목들을 참고할 것.

 

《삼국지》<위지> - 동이전 -에 따르면 예족은 호랑이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곽박의《이아》(爾雅)와 도네리 친왕의《일본서기》 등을 근거로 '맥'(貊)이 곰을 의미했고, 예족과 맥족의 관계가 단군신화에 반영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즉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天神族)이 곰을 토템(Totem)으로 하는 맥족(貊族)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예족(濊族)을 평정하고, 복속시키는 과정이 신화(神話)로 남았다는 것이다. 삼한인들이 곰을 토템으로 했다는 설도 있다.

 

 

 

예(濊): 부여, 옥저, 동예

 

일단 아래의 모든 항목은 학문적으로 현재 완전히 정립된 관점은 아니다. 예는 다양한 형태로 사서에 제시되는데, 동예라고 흔히 한국사 교육과정에서 알려진 영동 지역의 예(濊)가 예족의 대표적인 일파이다.

당나라 가탐(賈耽)은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지금 신라 북계인 명주(강릉)는 예(濊)의 고국’이라고 썼다.

또 다른 하나의 예와 관련해서는 예 세력을 말한다. 이 '예' 세력은 위만조선의 북부, 한사군 중 현도군 등의 고대 집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다가 전한 세종 무제 시기에 있었던 창해군 복속 사업과 당시의 군주였던 예군 남려와 관련된 기록으로 인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위만조선과 느슨한 형태의 연맹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한무제에 의한 별도의 창해군 복속사업은 실패했고, 이후 위만조선 멸망(BC 108) 당시 현도군의 일부로 편입되었다가 고구려 등의 기반 지역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명확한 구분 기준은 아직 알 수 없다. 위만조선 멸망 이후 기록된 《후한서》와 《삼국지》에 나오는 동예의 역사 파트는 《사기》와 《한서》의 <조선열전>을 복붙해놓았다.

 

 

 

맥(貊): 고조선, 고구려, 백제

 

맥이라는 민족에 관해서는 조선시대 실학자들 이후 다양한 가설들이 나왔으나 근래의 가설은 맥을 주로 고구려와 연관지어 이해하고 있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고구려를 맥과 관련하여 '무크리'(Moukri)라고 불렀는데 이는 '맥+고려'라는 의미이다. 돌궐 역시 '맥고려'라는 의미의 '뵈퀼리'(Böküli)라고 고구려를 칭했는데, 고대 튀르크어에서 b와 m의 발음은 통용되므로 정확한 발음은 '뫼퀼리(Möküli)'가 된다.

 

여호규, 송호정, 김현숙 등의 고대사 사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가설은 '예맥'으로 분류되는 지린성과 랴오닝성 일대의 집단 중에서 기원전 3세기 이후 구별되어 구려, 고구려 등으로 분류되는 집단이 주변의 '예'와 구별되는 '맥'의 정체성을 발현시켰다는 것이다.

 

맥계는 이와 같이 고구려 건국 및 확장시에 보다 확실하게 대두된다. 물론 고구려 세력이 유일한 맥계 공동체는 아니었고, 고구려 통합 과정에서 대수맥(大水貊), 소수맥(小水貊), 양맥(梁貊) 등이 편입된 것이다. 중원 입장에서는 영 껄끄러운 세력이었기 때문인지, '맥'을 고구려 세력의 비칭으로 사용한 예가 많다. 대표적으로 북송 시대에 고려 사신의 행패를 소식이 비난할 때 비칭으로 '맥적'이라 부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근대 사학자들의 경우, 과거 《맹자》 등의 중국 고서에 나오는 '맥적' 내지 '맥'을 예맥과 연관시켜 왔지만 《맹자》나 《한서》가 저술되던 시대에 이민족의 족보를 따져 가면서 종족 명칭을 기술하지는 않아 역사학계에서는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대체로 선진시대 문헌의 '맥'은 북방민족의 범칭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게다가 '맥'이라는 명칭은 예맥 외에도 '호맥, 만맥' 등 매우 많으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맥'은 이민족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에 가깝다고 인지해야지 아무 맥이나 다 '예맥'에 갖다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현대적 관점이다. 이 “일반적인 이민족을 뜻하는 호칭”으로서 쓰인 것 때문에 위말갈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三國史)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인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濊王之印: 예왕지인)을 발견해 바쳤다.”

“춘주(春州)는 예전의 우수주(牛首州)인데 옛날의 맥국(貊國)이다.”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도 하고, 혹은 평양성이 맥국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마한- 中.

 

《삼국유사》의 지역 인식은 이러한 변화를 잘 반영한다. 여기에 나오는 명주는 영동이며, 삭주는 영서 지방을 의미하는데, 현대의 영동 지방은 '예'로 불렸으며 춘천을 중심으로 한 영서 세력과 평양성 등 고구려계 세력을 주로 '맥'으로 칭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였고, 일찍부터 뛰어난 용모를 지녔으니, 그 기세가 삼한(三韓)을 압도하였고, 그 이름이 양맥(兩貊)에 드날렸다.

《부여융 묘지명》, 682년

 

《부여융 묘지명》의 '양맥'은 '두 맥족'이란 뜻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예맥을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느 시점에서는 단순히 예와 맥을 영동/영서로 구분하지 않기도 하며, 이러한 인식은 예맥이 예+맥으로서, 또는 예맥이라는 삼한 일통 이후의 단일민족적 관점에서도 동시에 인지될 수 있음을 드러내는 바이다.

 

이후에도 맥은 예와 함께 고구려 세력을 의미했다. 고유 풍습과 관련된 말로 '맥궁'(貊弓)이나 '맥적'(貊炙) 등을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맥적은 한국 요리인 너비아니와 맥적구이의 기반으로 추측되고 있다. 참고로 백제 기록에서도 '맥'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책계왕 때 낙랑군이 주동이 되어 맥인과 함께 백제에 쳐들어가서 책계왕이 맞서 싸웠으나 전사했다고 한다. 이것 역시 낙랑군이 주동이 되어 고구려계 용병과 함께 백제(한성백제)와 대결했다고 하면 해석이 매우 부드럽다.

 

백제에서는 숙적 고구려에 대한 멸칭으로 '박적'(狛賊)을 사용했는데, 외관에서 알 수 있듯이, '박(狛) = 맥(貊)'에서 유래했으며, 곰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고구려를 맥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일본어에서 고구려=고려의 훈독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일본어에서는 고려를 Koma라고 부르며, Kuma는 곰이라는 뜻이다. 狛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일본어 훈독은 Koma이며, 안장왕의 후손들이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 그들의 성씨를 狛으로 개칭했다. 백제의 경우, 웅진을 《일본서기》에서는 '고마나리'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고마'는 백제어로 '웅'(熊)에 해당하는 단어로, 마찬가지로 곰을 뜻한다.

 

한편 백제부흥운동기 일본으로 이주한 장수인 답본춘초(答㶱春初)가 고조선 준왕의 후손이었단 기록이 《신찬성씨록》에 있다. 특이한 게 '백제국 조선왕 준'의 후손이라 하여 조선왕이 백제에 종속되었던 듯한 모양새로 적혀 있다. 이후 자손 혹은 친척으로 보이는 답본양춘(答本陽春)이 724년 아사다노무라지(麻田連)씨를 받았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한편 준왕이 위만에게 찬탈당한 뒤 마한에 정착하여 생성된 나라가 2024년 행정구역 기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일대에 있던 건마국으로 추정된다.

 

 

 

한(韓): 삼한

 

예맥(濊貊)은 고대 만주 지방과 한반도 북부에 거주했던 종족명으로, 삼한계 민족들과 함께 한민족(韓民族)의 근간이 되는 민족들 중 하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동안 예족과 맥족을 사실상 동질적인 민족들로 보는 견해가 주류였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 이에 관한 다양한 이설들이 제시되고 있다.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但取吾躬率所略來韓穢, 令備洒掃言教如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에서.

 

'한예'(韓穢)를 '한'과 '예'가 섞인 별도의 집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한'과 '예'를 연칭한 것으로 봄이 일반적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예'는 동예, 옥저와 같이 고구려 이외의 한반도 북부인을 지칭하는 언급이며, '한'은 당연히 '삼한' 즉 한반도 남부 지역의 제 부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봄이 매우 타당하다.

 

북쪽의 한민족과 남쪽의 한민족, 즉 예인(穢人)과 한인(韓人)들의 차이에 대해서는 백제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간의 언어 차이를 하나의 단서로 들 수 있다.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 -백제조-에 의하면

"왕의 성은 부여씨(夫餘氏)이고, 이름은 '어라하'(於羅瑕)라 하는데 백성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른다. 이것은 한자어로 왕(王)과 같다. 처는 '어륙'(於陸)이라 하는데 한자로 비(妃)가 된다."

고 하여 부여계 언어와 한계(韓系) 토착 언어와의 차이를 드러내주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지배층 언어와 일반민의 용어 차이로도 해석할 수 있으므로 확실한 근거가 되지는 못하나 동시대 신라 사회나 고구려 사회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왕을 서로 달리 부른 적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확실히 '백제만의 특징적인 차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바로 그 점에서 의혹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백제어 문서의 '이중언어체계' 문단과 반도 일본어설을 참고. 다만 특기할 점은 ~지 계통의 존칭접미사는 고구려(막리지 등)부터 가야(한기 등)까지 당시 한반도 전체에서 확인된다는 점에서 반도 일본어설과는 다소 궤를 달리 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 가야, 탐라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반도 일본어설과 관련해 미국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 교수에 의한 비슷한 지적이 있다. 위처럼 명시적으로 차이가 있는 단어가 있었다고 기록된 건 아니지만 각국의 인명, 지명 등으로 파편처럼 남아있는 각종 단어의 연대에 따른 변천을 근거로 정체불명의 토착어를 예맥계로 보이는 고대 한국어가 대체해나간 것이 아니냐는 가설을 제시했다. 다만 보빈의 경우, 일본어족이 상당히 늦게까지 한반도 남부에 잔류해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여러모로 고고학적 연구결과와 대응관계가 발견되지 않는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보빈은 이에 대해 튀르키예 등의 사례를 언급하며 언어적 변동과 고고학적 물적 변동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고 방어하나, 이는 따지자면 물적 증거를 언어학적 추정을 통해 일방적으로 기각하는 접근이므로 보빈의 시각도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또한, '맥=고구려'라는 관점을 보강해서 설명하자면, 광개토대왕릉비의 저 구절만으로는 고구려가 같은 예맥계인 예족까지 아예 다른 민족으로 인식했다는 근거로 삼기 힘들다. 우선 고구려가 예족을 동질적으로 인식했든, 이질적으로 인식했든, 기존 고구려 영토의 바깥에 거주하다가 잡혀온 예족 계통 속민들을 "약취해온 예인" 외에 달리 뭐라 표현하겠는가. 게다가 애초에 고대에는 같은 민족끼리도 부족별로, 또는 다른 나라들로 나뉘어서 싸우는 경우가 많았기에 서로를 별개의 집단으로 구분하고, 더 나아가 대우를 달리 하는 경우가 많았다. 비유하자면 6.25 전쟁 때 북한이 "약취한 남조선 포로들"을 노역에 동원했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한국과 북한이 서로 다른 민족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그 당시 고구려 또한 전쟁 포로들을 활용했다고 해서 같은 부여계인 예족과 맥족이 서로 아예 다른 별개의 민족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맥인'인 광개토대왕이 수많은 민족들 중에서 굳이 '한인'과 '예인'만을 골라 언급한 점으로 보았을 때, "예, 맥, 한을 고구려 천하관으로 포함해서 생각한 사례가 아니냐"고 해석하기도 한다. 진시황이 당시의 중원 천하관에 해당하는 나라들만 통일 대상으로 삼고, 이와 관련이 없는 이민족 국가인 고조선은 제외한 것처럼 말이다.

 

'맥'이 백제를 지칭하는 경우도 많았다.「大周故指節嶲州都督陸府君(仁儉)墓志銘幷序」의 '소제예맥(掃除濊貊)' 및「大唐故騎都尉張君(德)墓志」의 '한맥(韓貊)' 등은 백제를 일컫는 표현으로 예맥 또는 한맥이 쓰였다. 백제 건국세력이 부여와 고구려에서 나왔으며, 마한의 건국세력도 북쪽 예맥조선에서 나온 것에서 연유한다.

 

애초에 전근대에는 혈통과 언어가 비슷한 같은 민족들을 부족이 서로 다르고 나라가 다르다는 이유로 침략해서 노예로 삼는 경우가 매우 흔했었다. 대표적인 예로 조선 시대 당시 여진족들만 해도 서로 부족별로 나뉘어서 치열하게 싸웠었고, 정복한 타 부족민들을 전부 노예로 만든 경우가 많았었다. 극단적으로는 같은 계통의 부족들을 아예 대규모 인신공양과 식인의 대상으로 삼았던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이 있다.

 

또한 앞서 명기했듯이 예맥이 항시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동등한 존재로서 나타날 필요는 없으며, 이것이 인류유전학적 관점이나 고고학과 반드시 조응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인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 왜곡되며, 이를 후대에 압축해서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편향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근대사학이나 현대의 재야사학의 대표적 오류이다.

 

예맥의 뿌리는 같으나 시대에 따라 예와 맥으로 분류되어 호칭되기도 했으며, 다만 그 기준이 과학적이고 혈통적인 것이 아니라 고구려, 동예/옥저 등 영동계열, 후대 백제 등으로 이주한 북방계 한반도 남부인, 부여인 등이 뒤섞여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표기 문제

 

이들 세력이나 종족을 '예맥족'이라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표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문헌상으로 예와 맥은 예(濊), 맥(貊)으로만 존재할 뿐 '예족', '맥족'으로 기록된 적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반대로 예맥을 예와 맥이라는 특정 혈연 민족으로 보는 경우, 이들을 '예맥족'이라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헌상에는 羌(강), 氐(저), 凶奴(흉노)라고 나타나는 민족을 강족, 저족, 흉노족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신라본기> 극 초반에 등장하여 충돌하는 영서, 영동의 말갈 세력을 활동 영역과 기록 시기로 보아, 한반도 중남부에서 활동하던 이질적인 예맥 집단으로 보기도 한다.

 

 

 

 

 

 

북방 예맥족과 남방 韓族 합쳐 한민족 형성


오늘의 한민족(韓民族)은 북방의 예맥족(濊貊族)과 남방의 한족(韓族)이 합쳐서 형성된 것이다.

만주 중부와 서남부, 한반도 북부에 살고 있던 예맥족은 다시 고조선을 세운 조선족과 부여·고구려·옥저·동예를 세운 부여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들은 결국 기원후 5세기 말 고구려로 통일된다. 한편 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했던 한족은 독자적인 신석기 및 청동기 문화를 갖고 있었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마한·진한·변한 등 3개 집단으로 분립(分立)한 한족은 결국 백제와 신라로 양분된다. 

예맥족과 한족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특히 기원전 2세기 말 중국에서 이주해 온 위만(衛滿)에 나라를 빼았긴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자신의 지지세력과 함께 한반도 남부로 이주한 후에는 두 집단이 뒤섞이게 됐다. 

그리고 이 같은 혼합은 신라의 삼국통일로 1차 완성되고, 다시 고려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고 발해가 멸망한 후 고구려계 발해인들이 고려에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최종 완성된다.  

이런 한민족의 형성 과정은 민족의 가장 뚜렷한 지표인 언어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어의 뿌리는 예맥족과 한족이 함께 사용하던 ‘부여한조어(夫餘韓祖語)’로 이것이 발전한 고구려·백제·신라의 언어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 따라 경주 중심의 신라어로 통합된 언어는 고려 초기 한민족이 최종 완성된 후 개성 지방의 언어를 중심으로 집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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