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역대 왕조 - 앵글로 색슨 왕조, 노르만 왕조, 플랜테지넷 왕조, 랭카스터 요크 왕조 , 튜더 왕조, 스튜어트 왕조, 하노버 왕조, 윈저 왕조
◈ 케르딕(Cerdic)왕가 - (829~1016) 서색슨족
▶ 엑버트 Egbert (829~839) : 켄트족 출신, 웨섹스 왕가
▶ 애델울프 Aethelwulf (839~858)
▶ 애델발드 Aethelbald (858~861)
▶ 애델베르트 Aethelbert (861~866)
▶ 애델레드 1세 Aethelred I (866~871)
▶ 알프레드대왕 Alfred the Great (871~899) : 해군의 아버지
▶ 대 에드워드 Edward the Elder (899~925)
▶ 아델스탄 Athelstan (925~939)
▶ 에드문드 1세 Edmund I (939)
▶ 에드레드 Edred (939~940)
▶ 에드위 Edwy (940~941)
▶ 에드가르 Edgar (941~975)
▶ 에드워드순교왕 Edward the Younger (975~978)
▶ 에델레드 2세 Aethelred Unrede (978~1016) : 에드워드 왕의 동생
▶ 에드문드 Edmund Ironside (1016)
◈ 덴마크(Denmark)계 왕조 - (1016~1042)
▶ 크누트 Knuts (1016~1035) : 덴마크 왕 스웨인 1세의 둘째 아들
▶ 하랄드 크누트손 Harald Knutsson (1035~1040) : 크누트의 아들
▶ 하르디 카누테 Hardicanute (1042) : 크누트의 아들
◈ 색슨(Saxon)계 왕조 - (1042~1066)
▶ 에드워드 참회왕 Edward the Confessor (1042~1066) : 에델레드 2세의 아들, 윌리엄 정복왕의 종형(從兄)
▶ 해럴드 2세 Harold Godwinsson (1066) : 웨섹스伯 고드윈의 아들
◈ 노르만(Norman) 왕조 - (1066~1154)
▶ 월리엄 1세 (1066~1087) : 정복왕. 에드워드 참회왕의 종제(從弟)
▶ 월리엄 2세 (1087~1100) : 윌리엄 1세(정복왕)의 둘째 아들
▶ 헨리 1세 (1100~1135) : 윌리엄 1세의 막내아들
▶ 스티븐 (1135~1154) :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의 왕위 계승을 찬탈
◈ 플랜타지네트(Plantagenet) 왕조 - (1154~1399)
▶ 헨리 2세 (1154~1189) : 앙주 백 제오프르와와 마틸다의 아들
▶ 리처드 1세 (사자왕,1189~1199) : 헨리 2세의 셋째 아들
▶ 존 왕 (1199~1216) : 헨리 2세의 넷째 아들. 리처드 1세의 동생
▶ 헨리 3세 (1216~1272) : 존 왕의 큰아들
▶ 에드워드 1세 (1272~1307) : 헨리 3세의 아들
▶ 에드워드 2세 (1307~1327) : 에드워드 1세의 넷째 아들
▶ 에드워드 3세 (1327~1377) : 에드워드 2세의 맏아들
▶ 리처드 2세 (1377~1399) : 에드워드 흑태자의 아들
◈ 랭커스터(Lancaster) 왕조 - (1399~1461)
▶ 헨리 4세 (1399~1413) : 랭카스터 왕조의 창시자
존 오브 고트의 아들, 리처드 2세의 종제(從弟)
▶ 헨리 5세 (1413~1422) : 헨리 4세의 맏아들
▶ 헨리 6세 (1422~1461) : 헨리 5세와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 요크(York) 왕조 - (1461~1485)
▶ 에드워드 4세 (1461~1483) : 요오크公 리처드의 아들
▶ 에드워드 5세 (1483.4~6) : 에드워드 4세의 맏아들
▶ 리처드 3세 (1483~1485) : 에드워드 4세의 동생
◈ 튜더(Tudor) 왕조 - (1485~1603)
▶ 헨리 7세 (1485~1509) : 랭커스터가의 리치먼드 백작(헨리 튜더)
▶ 헨리 8세 (1509~1547) : 헨리 7세의 차남. 형 아아더 일찍 죽음
▶ 에드워드 6세 (1547~1553) : 헨리 8세와 제3 비 제인시이모어의 아들
▶ 제인 그레이 (1553.7.10~7.19) : 헨리 7세의 증손녀. 9일 만에 폐위
▶ 메리 1세 (1553~1558) : 헨리 8세와 제1 비 캐더린의 딸
▶ 엘리자베스 1세 (1558~1603) : 헨리 8세와 제2 비 앤불린의 딸
◈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Stuart) 왕조 - (1306~1567)
▶ 로버트 1세 (1306~1329) : 로버트 브루스, 스코틀랜드의 해방자
▶ 데이비드 2세 (1329~1371) : 로버트 1세(브루스)의 아들
▶ 로버트 2세 (1371~1390) : 스코틀랜드 시종 월터 스튜어트와
로버트 1세의 딸 마조리 사이에서 태어남
▶ 로버트 3세 (1390~1406) : 로버트 2세와 엘리자베스 뮤어의 맏아들
▶ 제임스 1세 (1406~1437) : 로버트 3세의 아들
▶ 제임스 2세 (1437~1460) : 제임스 1세의 아들
▶ 제임스 3세 (1460~1488) : 제임스 2세의 아들
▶ 제임스 4세 (1488~1513) : 제임스 3세의 아들
▶ 제임스 5세 (1513~1542) : 제임스 4세의 아들
▶ 메리 스튜어트 (1542~1567) : 제임스 5세의 딸
◈ 스튜어트(Stuart) 왕조 - (1603~1714)
▶ 제임스 1세 (1603~1625) :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 찰스 1세 (1625~1649) : 제임스 1세의 둘째 아들
※ 호국경(護國卿) 시대(1653~1659) : 크롬웰 부자
▶ 찰스 2세 (1660~1685) : 찰스 1세의 아들
▶ 제임스 2세 (1685~1688) : 찰스 1세의 아들, 찰스2세의 동생
▶ 윌리엄 3세 (1689~1702) : 찰스1세의 외손자, 메리 2세의 남편
▶ 메리 2세 (1689~1694) : 제임스 2세의 큰딸
▶ 앤 여왕 (1702~1714) : 제임스2세의 딸
◈ 하노버(Hanover) 왕조 - (1714~1901)
▶ 조지 1세 (1714~1727) : 하노버 공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아들
▶ 조지 2세 (1727~1760) : 조지 1세의 아들
▶ 조지 3세 (1760~1820) : 조지 2세의 아들
▶ 조지 4세 (1820~1830) : 조지 3세의 큰아들
▶ 윌리엄 4세 (1830~1837) : 조지 3세의 셋째 아들
▶ 빅토리아 여왕 (1837~1901) : 조지 3세의 넷째 아들 켄트 공의 딸
◈ 윈저(Windsor) 왕조 - (1901~ )
▶ 에드워드 7세 (1901~1910) : 빅토리아 여왕의 큰아들
▶ 조지 5세 (1910~936) : 에드워드 7세의 둘째 아들
▶ 에드워드 8세 (1936) : 조지 5세의 큰아들, 심프슨 부인 문제로 퇴위
▶ 조지 6세 (1936~952) : 조지 5세의 둘째 아들
▶ 엘리자베스 2세 (1952~ ) : 조지 6세의 맏딸
▶ 찰스 3세 (2022~ ) :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비의 장남
영국 왕조 시대 순서
고대 시대
중세 시대 - 앵글로. 색슨 7 왕국 시대 시작 - 앵글로 색슨 왕조 - 노르만 왕조 - 플랜테지넷 왕조
근세 시대 - 랭카스터 . 요크 왕조 - 튜더 왕조 - 스튜어트 왕조 - 하노버 왕조
현대 시대 - 윈저 왕조
<1> 고대시대: 켈트(Celt) 족의 정착과 로마제국의 지배
☞ 켈트 족 거주, 카이사르의 원정(B.C. 55) - 로마의 통치를 받음.
기원전 4세기경부터 영국 땅에는 켈트족이 거주한다.
영국 땅에 자리 잡은 켈트족은 씨족들이 모여 사는 부족 국가로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55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자르의 침략으로 영국의 남쪽은 로마제국의 영토에 속하게 된다. 로마 군대는 템스강가 평야에 요새를 세우고 영국을 지배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수송하는 기지로 쓰게 되는데 이 항구의 이름을 ‘론디니움(Londinium)’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뒷날 영국의 수도 ‘London’이 된다.
켈트족은 로마의 앞선 문명을 접하자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자 애썼고 차츰 켈트족과 로마인은 섞이게 되어 영국에는 라틴문화가 일찍이 뿌리내렸다. 로마의 정복 후에 약 300년 동안은 전쟁 없는 로마의 평화 태평성대(Pax Romana)가 지속되었다.
<2> 중세 시대: 앵글로 색슨(Anglo Saxon) 시대
♣ 앵글로 색슨 왕조
◈ 웨섹스가(Wessex 家)
(1) 엑버트 (829 ∼ 839)
(2) 에델 울프(839 ∼ 858)
(3) 에델 볼드(858 ∼ 860)
(4) 에델버트(860 ∼ 866)
(5) 에델 레드 1세(866 ∼ 871)
(6) 알프레드 대왕 (871 ∼ 899)
(7) 에드워드 1세(899 ∼ 924)
(8) 에델 스탄(924 ∼ 940)
(9) 에드먼드 1세(940 ∼ 946)
(10) 에드 레드(946 ∼ 955)
(11) 에드위(955 ∼ 959)
(12) 에드거(959 ∼ 975)
(13) 에드워드(975 ∼ 978)
(14) 에델 레드 2세(978 ∼ 1016)
(15) 에드먼드 2세(1016)
◈ 댄가(Dane 家)
(16) 카 누트 대왕(1016 ∼ 1035)
(17) 하롤드 1세(1035 ∼ 1040)
(18) 하르디 카 누트(1040 ∼ 1042)
(19) 에드워드(1042 ∼ 1066)
(20) 하롤드 2세 (1066)
4세기 초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함께 영국을 지키던 로마 군대는 본국을 지키기 위해 돌아갔다.
그러자 켈트족의 일파인 스코트(Scot) 족은 옛 조상의 땅을 되찾는다는 명목 하에 살기 좋은 남쪽으로 대대적인 침략을 시작했다. 로마인과 어울려 살던 남쪽의 켈트족은 색슨족(현재 독일의 북쪽 작센지방에 거주하는 민족)에게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색슨족은 켈트족을 돕기는커녕 살기 좋은 영국 땅을 보자 욕심을 내어 침략을 시작했고, 이에 앵글로 족도 가세하여 켈트족은 대부분 지금의 스코틀랜드(Scotland), 웨일스(Wales), 아일랜드(Ireland)로 도망쳐 그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평야지대인 잉글랜드 지방엔 지금도 앵글로색슨 족의 자손이 살고 있으며, England라는 지명은 이들 종족의 이름에서 비롯된다.
앵글로색슨족이 지배하던 시기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실이다.
577년 그레고리 교황은 영국의 선교를 위해 Sir. Augustine를 파견하였고, 8세기 이후 영국 전 지역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 귀속되었고, 왕들은 로마 교회의 제도와 조직 등을 받아들였다.
이 시기에 배출된 유명한 역사가이자 신학자인 비드(672년 경~735)는 노섬브리아(Northumbria) 동쪽 해안의 재로 수도원에서 살았다. 고대 잉글랜드의 서사시 <Beowulf>는 이 시기에 써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정확한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영국은 783년부터 덴마크 바이킹(Viking) 족의 침략에 시달리게 된다.
그때 앵글로색슨족은 몇몇 작은 나라로 갈라져 싸우고 있었는데 바이킹의 침략을 계기로 단결하였고 단결된 영국의 지도자로 나선 이가 바로 전설적인 Alfred 대왕이다.
이후 웨섹스(Wessex)가 데인(Danes)족의 지배하에 들어간 적은 없었으며, 그다음 세기에는 웨섹스가 데인족이 점거했던 영토를 되찾았다.
928년에 알프레드의 손자 애덜스턴이 노섬브리아를 차지해 전 잉글랜드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가진 최초의 국왕이 되었다. 이로써 영국 역사에 처음으로 나라다운 나라 즉 '영국 왕국'이 태어났고, 이것이 앵글로색슨족의 첫 통일 국가이다.
<3> 노르만 족의 정복 : 노르만 공국이 왕위 계승
♣ 노르만 왕조(1066 ∼ 1154)
롤로(조대 노르망디 공) - 윌리엄 - 리처드 1세 - 리처드 2세 - 로버트
(1) 윌리엄 1세 (정복왕 1066 ∼ 1087)
(2) 윌리엄 2세 (1087 ∼ 1100)
(3) 헨리 1세(1100 ∼ 1135)
(4) 스티븐(1135 ∼ 1154)
바이킹 족이 프랑스 왕에게 신하임을 맹세하고 노르망디(Normandy)에 자리 잡은 것은 911년.
그 후 100년이 지난 뒤 노르망디 왕에 오른 이가 William이었다.
노르만 족은 100년이 흐르는 사이 완전히 프랑스화 되어 있었고, 1066년 노르망디 공 윌리엄의 영국 정복은 프랑스의 영국 정복이나 다름없었다.
덴마크도 영국을 침략했으나 그들은 앵글로색슨족과 비슷해 영국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으나, 노르만 족의 영국 정복은 로마제국에 이은 라틴문화의 두 번째 정복이었다.
이때 영국은 언어, 풍습, 정치, 문화 등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윌리엄은 영국 정복 후에 William Ⅰ세로 노르만 왕조를 열었고, 영국의 모든 권력은 노르망디에서 건너온 귀족들의 손에 들어간다. 그러면서 왕실과 귀족들은 자연히 프랑스 말을 쓰고, 라틴어가 교회와 행정기관의 용어가 되었다.
영어는 평민과 농민들이 쓰는 말로 구분되어 영어는 이때 프랑스어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정복왕 윌리엄 1세(William the Conqueror)는 영국 왕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왕의 신하였다.
그러나 노르만 족의 왕들은 프랑스 내에 영토를 계속 넓혀가 프랑스 왕보다도 더 넓은 땅을 차지하기에 이르고 이것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윌리엄 1세는 왕이 된 후 반란을 진압하고, 몰수한 땅을 기사에게 나누어주는 노르만식 봉건 제도로 통치하였고, 중세 영국의 특징인 집권적 봉건 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자문회는 왕의 의견을 청취하고 승인할 뿐, 법률과 재판은 왕이 직접 관장하였으며, 경제 체제도 마찬가지로 왕 중심이었다.
정복왕 윌리엄 1세의 두 아들인 William 2세(1087~1100 재위)와 Henry 1세(1100~35 재위) 때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가 계속되었으며,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와의 유대가 강화되었다.
전반적인 견지에서 볼 때 노르만 시대는 건설적인 시대였다. 경제는 본질적으로 농업을 위주로 했고, 도시들이, 그중에서도 특히 런던이 번성했다. 교회는 대륙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럼 대성당이나 런던탑 같은 훌륭한 건물, 윈체스터의 성서와 〈시편〉의 장식 글씨는 이 시대의 뛰어난 건축과 미술 솜씨를 보여준다
<4> 플랜태저넷 왕가 <House of Plantagenet> (1154~1399) : 프랑스 앙주의 백작 출신 왕
영국 왕은 영국,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 가스코뉴, 오르베뉴, 툴루즈를 다스리게 되어 프랑스 왕보다 더 큰 영토를 소유했지만 법적으로 프랑스의 신하였다
♣ 플랜테지넷 왕조(1154 ∼ 1399)
(1) 헨리 2세(1154 ∼ 1189)
(2) 리처드 1세(1189 ∼ 1199)
(3) 존(無領王 1199 ∼ 1216)
(4) 헨리 3세(1216 ∼ 1272)-막내아들인 '곱사등이' 에드먼드가 1267년 랭커스터 공
다섯 번째 아들인 요크 공작 1세 랭리의 에드먼드(요크 공)
(5) 에드워드 1세(1272 ∼ 1307)
(6) 에드워드 2세(1307 ∼ 1327)
(7) 에드워드 3세(1327 ∼ 1377) - 에드워드 흑태자 1376 死/존(랭커스터 공)=리처드 2세의 삼촌
(8) 리처드 2세(1377 ∼ 1399)=> 존(랭커스터 공)의 아들 헨리 4세(랭커스터 가) 왕위 계승
=> 이후 장미전쟁을 거쳐
=> 요크 공작 1세 랭리의 에드먼드의 후손.. 요크 공작 3세의 아들이 요크가 왕위 계승 에드워드 4세
=> 이후 랭커스터의 혈통은 존의 서자인 "보퍼트 가문"의 후손 헨리 7세로 이어져 튜더 왕조(웨일스 출신)
1) Henry 2세 (1154-1189) :프랑스 루이 7세의 왕비 엘리노아(29세) 와 재혼
플랜테저넷왕가의 시초이다.
19세 때 프랑스 루이 7세의 왕비 엘리노아(29세)와 사랑하게 되어 루이와 이혼하고 둘이 결혼하면서 엘리노아가 지참금으로 프랑스 남쪽의 큰 영토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헨리 2세는 영국,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 가스코뉴, 오르베뉴, 툴루즈를 다스리게 되어 프랑스 왕보다 더 큰 영토를 다스렸다. 그는 영국 역사에 처음으로 통일된 영국을 이룩하였고, 국내의 정치를 안정시키고 법과 재판제도도 마련하여 현군으로 존경받았다.
2) Richard 1세(1189-1199)
헨리 2세의 셋째 아들이다. 아버지가 동생(존 왕자)을 사랑하여 가장 좋은 프랑스 남부를 주려고 하자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냈다.
십자군 3차 원정 시에 사자왕으로 이름을 날리고 영화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왕이 바로 리처드 1세이다. 예루살렘 근교에서 살라딘과 싸워 물리쳤고 그의 용맹성은 ‘사자왕 리처드’라는 별명을 갖게 하였다. 그는 온갖 파란만장한 모험 끝에 프랑스에서 필립스 2세와 싸우다가 1199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10년 재위 중에 1/2년만 영국에 있었고, 나머지는 전쟁터에서 살았다. 정치에는 무능하였으나 전형적인 기사로서 존경을 받은 왕이었다.
노르망디 공작과 앙주 백작(1189~99)이기도 했다.
제3차 십자군 원정(1189~92)에서 기사다운 풍모와 무용(武勇)을 과시해 당대의 인기를 얻었고, 무수한 낭만적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근세로 올수록 역사가와 학자들에게서는 옛날만큼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초기 생애
리처드는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사이에 난 셋째 아들로서 11살 때 어머니의 상속재산인 아키텐 공작령을 받았고 1172년 푸아티에 공작이 되었다.
리처드는 일찍이 정치적·군사적 능력을 보여 기사다운 무용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푸아투와 가스코뉴의 사나운 귀족들을 다루는 법을 빠르게 터득했다. 헨리 2세의 적자들이 모두 그랬듯이 그는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나 심려 및 책임감이 전혀 없었다. 형제들과 합세해 아버지에게 대반란(1173~74)을 일으켰으며, 아버지는 아키텐을 2차례나 침공해 리처드를 굴복시키고 용서를 빌게 만들었다.
그 후 리처드는 자신의 영지 내에서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몰두했다. 그의 가혹한 통치에 분격한 가스코뉴 사람들은 1183년 반란을 일으키고 리처드의 형 헨리(Young King Henry)와 그 동생인 브르타뉴의 제프리(조프루아)에게 도움을 청해 리처드를 공작령에서 아주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자 자기 제국이 해체 위험에 처한 것에 경각심을 느낀 헨리 2세는 유럽 대륙에 있던 자기 영지의 봉건영주들을 동원해 리처드를 돕도록 했으며, 1183년 6월 11일 리처드의 형 헨리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반란군은 무너졌다(→ 색인 : 앙주 제국).
형이 죽었으므로 리처드는 이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및 앙주(노르망디와 앙주는 뗄 수 없는 하나로 간주되었음)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막내 동생 존에게 아키텐을 양도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남부 토박이였던 리처드는 자기가 자란 곳인 공작령을 양도하지 않으려 했으며, 심지어는 프랑스의 젊은 존엄 왕 필리프 2세에게 아버지 헨리 2세에 대항할 것을 청원했다.
1188년 11월 리처드는 프랑스 땅에 있는 잉글랜드의 보유지 전체를 걸고 필리프에게 충성을 서약했으며, 1189년에는 필리프와 합세해 헨리 2세에게 공공연하게 항복을 요구했다. 그들은 르망에서 소뮈르까지 헨리를 추격해 리처드를 후계자로 인정하도록 강요하고 핍박하여 끝내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1189. 7. 6).
잉글랜드 왕
리처드는 7월 20일 노르망디를 얻고 9월 30일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필리프와 달리 리처드에게는 오직 한 가지 야망만 있었는데, 그것은 1187년 살라딘의 예루살렘 점령으로 야기된 십자군 원정을 이끄는 것이었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의 장래에 대한 계획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무기를 사들이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았다. 하지만 그는 돈을 위해 앙주 제국을 해체하는 데는 앞장서지 않았다.
그는 필리프와 결별했으며 유럽 대륙에서 앙주 방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은 것은 단지 필리프도 십자군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처드는 자기 아버지의 보물들을 많이 처분하고 몇몇 직책들을 팔아넘겼다. 이렇게 해서 그는 강력한 병력을 마련해 1190년 시칠리아를 경유하는 성지(聖地) 항해를 출발했다.
시칠리아
시칠리아 인들이 잉글랜드를 적대적으로 대하자 리처드는 10월 4일 메시나를 기습 점령했다. 시칠리아 인들은 독일 황제 하인리히 6세의 통치를 막기 위해 이미 시칠리아 출신인 레체의 탕크레드를 왕으로 뽑아 놓았고, 탕크레드는 리처드의 누이이자 전왕(前王)의 부인인 잉글랜드의 조운을 감금했으며 그녀 몫의 유산상속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메시나 조약을 맺어 리처드는 조운에게 그녀 몫의 유산과 자유를 찾아주고, 탕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승인했으며 조카인 브르타뉴의 아서(아르튀르)를 후계자로 선언하여 탕크레드의 딸과 아서를 결혼시키도록 했다.
이 조약은 제3차 십자군에 참가하고 있던 독일인들을 화나게 했고 또한 이에 자극받은 리처드의 동생 존에게는 배신과 반역을 저지르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 리처드는 키프로스를 정복하여 키프로스의 리마솔에 머무는 동안 나바르의 베렝가리아와 1191년 5월 12일 혼례를 올리고, 6월 8일 아크레에서 다른 십자군들과 합류했다.
성지
십자군은 1191년 7월 아크레를 함락했으며 9월 7일에는 아르수프에서 리처드가 큰 승리를 거둔 데 힘입어 요파를 점령했다. 리처드는 2차례에 걸쳐 예루살렘 수㎞ 이내까지 진격했으나 제3차 십자군의 주목표였던 예루살렘 탈환 공적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또한 프랑스·독일·잉글랜드 군대들은 서로 격렬한 분쟁을 벌였다.
리처드는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의 깃발을 찢어 그에게 모욕을 가했으며, 존엄 왕 필리프와 분쟁을 일으켜 필리프는 결국 아크레 함락 뒤 프랑스로 돌아갔다. 리처드는 또 자기 봉신인 기 드 뤼지냥을 예루살렘 왕의 후보자로 내세워 독일 측 후보자인 몬페라토의 코라도와 경쟁하게 했다. 리처드가 코라도의 살해를 공모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1년간 성과 없는 접전을 계속 벌인 끝에 1192년 9월 리처드는 살라딘과 3년간의 휴전협정을 맺었다. 협정 내용은 십자군이 아크레와 좁은 해안 지역을 계속 보유하고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성지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감금
리처드는 프랑스의 적대적인 태도 때문에 배를 타고 아드리아 해를 통해 잉글랜드로 돌아가야만 했는데, 도중에 폭풍을 만나 베네치아 부근 해변에 상륙하게 되었다. 그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던 레오폴트 공작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는 자기 신분을 위장했으나, 1192년 12월 빈에서 발각되어 도나우 강변 뒤른슈타인에 있는 공작의 성에 갇혔다.
이후 그는 하인리히 6세에게 넘겨져 신성 로마 제국의 여러 성을 전전하며 갇히는 몸이 되었다.
13세기에 지어진 유명한 블롱델의 모험담은 잉글랜드에 전혀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채 성곽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리처드에 관한 이야기이다.
필리프 2세에게 넘기겠다는 협박에 못 이긴 리처드는 하인리히 6세가 제기하는 가혹한 조건들을 모두 받아들여 15만 마르크의 막대한 몸값을 지불함과 아울러 왕국을 일단 신성 로마 제국에 양도했다가 봉토(封土)로 되돌려 받기로 했다. 이 몸값 조달은 12세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재정지출에 속하며 당시 잉글랜드의 번영을 입증해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몸값의 대부분이 지불되어 1194년 2월 리처드는 석방되었다.
잉글랜드 귀환
리처드는 즉시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며 왕권의 독립성이 손상된 것을 우려한 나머지 4월 17일 다시 한번 즉위식을 올렸다. 그러나 채 1개월도 되기 전에 그는 노르망디로 갔으며 남은 5년 동안 다시는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여생을 필리프 2세와 싸우는 데 소비했으며 중간중간에 잠깐씩 휴전을 맺었고, 잉글랜드 통치는 유능한 최고 사법관이며 캔터베리 대주교인 휴버트 월터에게 맡겼다.
리처드는 자신의 조급성 때문에 42세라는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한 농부가 리모주 자작의 영지에서 묻혀 있던 황금을 발견했는데, 자작은 이것을 리처드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리처드는 샬뤼에 있는 자작의 성을 포위 공격하다가 운 나쁘게 부상을 입었고 1199년에 죽었다. 그는 부모인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왕비가 묻혀 있는 퐁트브르 대수도원에 매장되었고, 그의 조상(彫像)은 아직까지 그곳에 보존되어 있다.
평가
리처드는 전형적인 앙주 가문 사람으로 무책임하고 성질이 급하며, 엄청난 정력가인 데다가 매우 잔혹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앙주 가문의 대부분 사람들에 비해 완벽성을 갖춘 인물로서, 탁월한 군인이자 능숙한 정치가였으며 사람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상당한 표현력을 지닌 서정시인이기도 했는데, 음유시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묘사했다. 아버지나 존 왕과는 달리 그는 동성연애자였던 것이 분명한데, 베렝가리아 왕비와는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한 듯하며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십자군 전쟁에서 아랍의 쿠르드 족 영웅 살라딘과 잉글랜드 왕 리처드는 중세 기사도의 전설을 창조하며 서로를 존중하게 된다. 리처드가 말을 잃고 싸우는 것을 본 살라딘은 왕의 품위를 지켜 준다는 뜻으로 말을 보내기도 했고, 리처드가 고열로 고생할 때에는 과일과 얼음을 가져다주는 호의를 베풀기도 한다. 멧돼지 같은 리처드도 살라딘에게 존경의 념을 품게 된다.
일진일퇴를 반복했지만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했고 살라딘과 평화 협상을 맺는다.
이슬람이 예루살렘을 차지하되 기독교 순례자들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협상의 골자였다. 살라딘은 “두 백성의 기쁨은 신만이 아실 것”이라고 이 협상을 기뻐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빈털터리로 돌아가야 했다. 이 십자군 원정을 위해서 “런던도 팔아치울 기세”로 전비를 마련했던 그는 별반 전리품도 없이 귀향선을 타야 했다.
그래도 명색이 사자왕 아닌가.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전한다. “3년이다. 3년의 휴전 후에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되찾고 말 것이다.” 그러자 살라딘은 답을 보낸다. “내가 예루살렘을 잃는다면 당신에게 잃을 것이다.”
폼나긴 하지만 얻은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원정을 끝내고 오는 리처드의 길은 험난했다. 일찍이 자신이 “어딜 공작의 깃발이 국왕의 깃발과 나란히 하는고?”라고 부르짖으면서 그 깃발을 진흙탕에 처박은 바 있던 바로 그 백작, 레오폴드에게 사로잡혀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포로가 되어 감옥에 처박혔다.
막대한 몸값을 주고 풀려난 그는 반역을 꾀한 동생 존을 무릎 꿇렸고 이어서 또 프랑스 왕과 전투를 치르다가 허무하게 가슴에 화살이 꿰뚫려 죽고 만다. 1199년 4월 6일이었다.
그런데 사실 리처드는 거의 영어를 구사하지 않았던 영국 왕이었다. 그는 프랑스 땅에서 평생을 보냈고, “춥고 비 오는” 영국 땅에는 딱 반년 정도 머물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멋진 기사도를 발휘하기 위해 나간 전쟁의 모든 전비는 대개 영국인들의 몫이었고,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지불했던 몸값도 결국은 백성들의 피땀을 짜낸 돈이었다. 평생을 싸움박질만 했지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젬병이었던 왕이 바로 리처드 1세였다. 그런데도 십자군 참전의 휘광, 그리고 살라딘과의 영웅담, 중세 기사도의 전설 등등으로 인해 리처드 1세는 영국 역사에서 사랑받는 왕으로 남아 있다.
영화 <로빈 훗>에서 막판에 카리스마 한칼로 등장하며,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왕이 바로 리처드 1세이며, 영국인들은 무슬림들도 “사상 최고의 용사”라며 두려워했던 리처드 1세에 대해 애정을 쏟았다.
전혀 백성에게 이롭지 않았고 되레 실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혔으면서도 리처드 1세는 영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용맹 무쌍한 중세 기사의 대표로, 결국은 돌아와 간신배들을 물리치고 정의를 회복하는 왕으로 남아 있다. 중세 기사의 전형으로서 쌓아 올려진 이미지 덕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더욱 멍청했고 결국 영국 왕실이 그 이름을 쓰는 것을 영원히 포기한 실지 왕(失地王) 동생 존과 상대적으로 비교되었기 때문이었다.
신기루 같은 이미지, 그리고 상대적으로 낫다는 비교우위 속에서 영어는 거의 쓰지도 않았을 영국 왕이자 프랑스의 귀족 리처드는 그 실정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위대한 신화로 남아 있다.
3) John 왕(1199-1216)
리처드 1세의 아들 아서가 왕위 계승권자였기 때문에 그를 살해하고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형이 아버지를 배반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강한 형님 편을 들어 아버지를 배반한 불효자이며 비겁자로 낙인찍힌 그는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왕답지 못한 왕으로부터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귀족들은 1215년에 49개 조로 된 마그나카르타 대헌장에 서명하게 하였다. 존 왕은 자신의 이름조차 쓸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하여 대헌장의 서명을 할 수 없어 대신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것은 민주주의의 뿌리가 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마그나 카르타"의 목적은 봉건 제후들의 권력 확인이 목적이지만, 런던과 자유도시의 시민의 특권을 인정하고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어 자유주의의 기원으로 여기고 있다.
4) Henry 3세 (1216-1272)
존 왕의 맏아들이다. 1207년에 Winchester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이때에는 선대 왕 존의 패배로 인해 영국의 남서쪽 지역이 프랑스의 지배 아래 있었던 시기이다.
그는 때때로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며 영국의 경제를 부흥시키려고 노력도 했지만 후에 처남의 반역으로 인해 사로잡혔다가 아들 에드워드 I세가 반역자들을 패배시키는 바람에 왕권을 에드워드 I세에게 넘겨주게 된다.
백성들이 어려움으로 소리치는 시대였었고 약하고 까다롭고 낭비하는 왕으로 이름나 있었지만 건축과 예술에 학식이 깊은 것으로 봐서는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리 모자란 왕은 아니었다고 한다.
5) Edward I세 (1272-1307)
군인이라고 이름난 에드워드 I 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1239년 7월 17일에 Henry 3세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Eleanor Castile이라는 여자와 1254년에 결혼하여 왕위를 지켰는데 왕의 권위를 없애려고 한 남작들의 반란을 없애고 왕의 권위를 되찾았으며 법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웨일스를 정복하였고 스코틀랜드를 합치기 위해 스코틀랜드 공주와 자신의 아들을 결혼시켰지만 스코틀랜드의 왕권을 노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실패하고 만다.
또한 성지를 되찾기 위하여 십자군 전쟁에도 참여하였지만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다음의 인생은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다. 유대인을 영국에서 추방하였고 그의 신하들과 많이 충돌하였지만 그래도 영국에서는 왕권을 되차지한 사람으로서 영국 역사에 한 부분을 차지한 사람으로 일컫는다.
6) Edward 2세 (1307-1302) : 마누라(왕비인 이자벨라)에게 쫓겨난 왕
별칭은 카나번의 에드워드(Edward of Caernarvon). 1284. 4. 25 웨일스 카나번셔 카나번~ 1327. 9
글로스터셔 버클리.
강력한 권한을 가진 귀족들에 대항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오랫동안 노력했으나 능력이 부족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에드워드 1세의 넷째 아들인 그는 부왕이 죽자(1307. 7. 7) 왕위에 오른 뒤 곧바로 에드워드 1세를 반대하던 이들을 최고의 관직에 앉혔다. 자신이 총애하는(아마도 그의 동성연애 상대였던 듯함) 천박한 피어스 개버스턴에게 콘월 백작 작위를 내려 귀족들의 미움을 샀다.
1311년 21명의 귀족위원회는 문서를 제출해(후에 '칙령'으로 알려짐) 개버스턴을 몰아내고 재정과 인사 문제에 관한 왕권 축소를 요구했다. 에드워드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개버스턴을 추방했다가 곧 돌아오도록 허용했다. 그 보복으로 귀족들은 개버스턴을 잡아다가 처형해버렸다(1312. 6). 그는 그 칙령을 무효로 하고 개버스턴의 원수를 갚기 위해 11년을 기다려야 했다.
한편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1세 브루스는 잉글랜드의 속박에서 벗어나겠다고 계속 위협했다. 에드워드는 1314년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갔으나 6월 24일 배넉번에서 브루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스코틀랜드는 단번에 사실상의 독립을 이룩했으며 에드워드는 그의 사촌 랭커스터의 토머스가 이끄는 귀족들의 처분을 바라는 신세가 되었다. 토머스는 1315년경 자신이야말로 잉글랜드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주장했으나 그의 위세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임이 드러났다.
1318년경 펨브로크 백작인 에이머 드 발랑스가 이끄는 중도파 귀족들이 토머스와 에드워드 사이에 중재 역할을 맡고 나섰는데 이때 에드워드는 더스펜서 부자(父子)를 새로이 총애하게 되었다. 에드워드가 웨일스를 차지하려는 아들 더스펜서의 야심을 지지하자 토머스는 더스펜서 부자를 추방해버렸다. 그러자 에드워드는 그들 부자를 위해 군사를 일으켜, 자체 내분으로 결속이 약화된 반대세력을 패배시키고 1322년 3월 요크셔의 버러브리지에서 토머스를 사로잡은 뒤 곧 처형했다.
마침내 귀족들의 간섭에서 벗어난 그는 칙령을 파기했다. 그러나 그가 더스펜서 부자에게 의존하는 것을 왕비인 이자벨라는 불쾌하게 여겼다.
이자벨라는 1325년 외교사절로 파리에 갔다가 에드워드를 반대하고 망명한 귀족 로저 모티머와 사랑하게 되었다. 1326년 9월 이자벨라는 로저와 함께 잉글랜드로 쳐들어와 더스펜서 부자를 처형하고 에드워드를 폐위한 뒤 아들을 에드워드 3세로 왕위에 오르게 했다(1327. 1).
에드워드 2세는 투옥되었다가 1327년 9월에 죽었는데 폭행으로 숨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일대기는 힐다 존스턴의 〈카나번의 에드워드 Edward of Caernarvon〉(1946)에 자세히 나와 있다.
7) Edward 3세 (1327-1377)
1312 년에 윈저(Windsor)에서 에드워드 2세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인인 어머니 이사벨라 (Isabella)의 음모로 아버지를 제치고 1327년에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모든 권력은 어머니 이사벨라가 가지고 있어 어머니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다음 스코틀랜드를 점령시키고 프랑스와 100 년의 전쟁(1337~1453)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당시 프랑스의 왕 필립 VI세 (Phillip VI)를 물리치고 또한 John II세를 사로잡는 등 몇 번에 걸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이기지만 마지막 전쟁에서는 실패하고 결국 노년에는 첩 Alice Perrers라는 여인에게 지배당하다가 Alice는 추방당하고 에드워드는 1377년에 세상을 뜨고 만다.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을 주도했다. 그에게서 난 일곱 아들과 다섯 딸의 후손들은 몇 세대에 걸쳐 왕위 분쟁을 벌였으며, 장미전쟁(1455~85)이 그 절정이었다.
초기 생애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의 이자벨라 사이의 큰아들인 그는 체스트 백작의 직함으로 의회에 등원했으며 아키텐 공작의 작위를 받았으나(1325) 관례와는 반대로 웨일스 공의 칭호는 받지 못했다. 그는 부왕이 왕권을 제한하려는 귀족들과 분쟁을 벌이는 와중에서 성장했다.
그의 어머니는 귀족들에 대한 남편의 처우에 반발하는 한편 남편의 지지자들이 잉글랜드에 있는 그녀의 영지를 몰수한 데 불만을 품고 그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25년에 그녀는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서 남편의 프랑스 영지인 기옌·가스코뉴·퐁티 외의 문제에 대해 친정 동생인 프랑스의 샤를 4세와 남편 사이에 벌어진 분쟁에 개입하여 이 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잉글랜드 왕이 샤를에게 충성의 예를 바치는 조건으로 그 영지는 잉글랜드 영토로 확보되었다. 아직 어렸던 그가 아버지를 대신해 이 협상을 수행했다. 잉글랜드 왕의 법정상속인인 그는 확실하게 그의 어머니 편이었다.
1323년 프랑스로 피신한 이자벨라는 연인이 된 로저 모티머와 함께 남편을 폐위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침공할 준비를 시작했다. 이 계획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에드워드 3세를 에노 및 홀란트의 백작 빌렘의 딸 필리파와 약혼시켰다. 이자벨라 왕비와 귀족들은 잉글랜드를 침공한 지 5개월 만에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에 힘입어 국왕의 세력을 제압했다.
에드워드 2세는 무능력과 대관식 서약을 어긴 잘못에 대해 탄핵받고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1327년 1월 29일 15살의 에드워드 3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명목상으로 그의 후견인은 랭커스터 백작 헨리였지만 뒤이은 4년 동안 이자벨라와 모티머가 실질적인 통치를 맡았다.
1327년 여름 그는 실패로 끝난 스코틀랜드인과의 전쟁에 참가했다. 이 전쟁의 결과 노샘프턴 조약이 체결되고(1328) 스코틀랜드는 독립왕국이 되었다. 에드워드는 그 협상에 대해 깊이 고민했으나 이자벨라와 모티머의 설득을 듣고서야 그 조약에 서명했다.
그는 1328년 1월 24일 요크에서 필리파와 결혼했으며 그 직후부터 자기 어머니와 모티머에 대한 불명예스러운 종속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해 성공을 거두었다. 노팅엄에서 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그는 밤을 틈타 지하통로로 성에 잠입해 모티머를 체포·감금한 뒤 처형했다(1330. 11). 에드워드는 사려 깊은 태도로 자기 어머니와 모티머의 연애관계를 모른 체하고 모든 면에서 어머니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대했으나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끝이 났다.
이제 에드워드 3세는 군림할 뿐 아니라 통치하기 시작했다. 젊고 열정적이며 활발한 성품이었던 그는 잉글랜드를 에드워드 1세 때 같은 강대국으로 재건하려고 했다. 노샘프턴 조약으로 스코틀랜드 독립을 허용한 데 대해 여전히 한을 품고 있던 그는 1329년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1세가 죽자 자기 지위를 회복할 기회를 얻었다.
스코틀랜드의 새 왕인 그의 매제 데이비드 2세는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했는데 에드워드는 그 약점을 이용해 로버트 1세에게 쫓겨났던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자신들의 우두머리 에드워드 베일리얼을 스코틀랜드 왕위에 앉히도록 도왔다.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로 달아났으나 베일리얼이 잉글랜드 왕의 꼭두각시로 경멸받게 되자 1341년에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백년전쟁
1330년대에 잉글랜드는 점차 프랑스와 적대관계에 빠져들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잉글랜드의 가스코뉴 통치를 둘러싼 분쟁이었다. 또 다른 부수적인 이유는 프랑스의 새 왕 필리프 6세가 스코틀랜드를 지원하고 에드워드는 당시 프랑스의 군주와 사이가 나빴던 플랑드르의 도시들과 동맹을 맺은 데다 또한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1337년에 재개한 데 있었다(처음에 주장한 것은 1328년이었음).
에드워드는 1339, 1340년 2차례에 걸쳐 북쪽으로 프랑스 침공을 시도했으며 그 결과 파산상태로 전락했을 뿐이었다. 1340년 1월 그는 프랑스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처음에 그것은 플랑드르 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플랑드르 인들은 에드워드가 정당한 프랑스 왕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프랑스 왕과 싸우는 데 주저하는 마음을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점점 왕위에 대한 권리 주장이 더욱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와 그의 후계자들이 끈질기게 그런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100년이 넘도록 평화정착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백년전쟁이었다. 1801년까지 모든 잉글랜드 왕들은 프랑스 왕의 칭호를 겸해서 사용했다.
에드워드는 1340년 6월 플랑드르의 슬뤼스 시 근해에서 벌어진 대해전에 몸소 참전해 프랑스 해군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색인 : 슬뤼스 전쟁). 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상전에서 자금이 고갈되어 휴전협정을 맺은(2년 뒤에 깨졌음) 뒤 잉글랜드로 돌아와야 했다.
1342년 이후의 시기에 그는 윈저 성을 재건하고 가장 서열이 높은 가터 훈장을 제정해 많은 시간과 돈을 소비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1346년 7월 에드워드 3세가, 이후 흑세자로 알려진 큰아들 에드워드 왕자((Edward, Black Prince 흑태자)1330 태어남)를 대동하고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처음에 그는 전략적인 목적을 분명히 하지 못한 채 대규모 약탈전을 전개하는 데 그쳤다. 그러다가 그해 8월 26일 퐁티외의 크레시에서 프랑스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는 필리프 6세가 북동부로의 퇴각로를 차단하기 위해 배치했던 군대를 격파하면서 기념할 만한 전과를 올렸다.
에드워드는 1346년 9월 프랑스의 칼레 항을 포위해 1347년 8월에 항복을 받아냈다. 또한 가스코뉴와 브르타뉴에서 승리를 거두고 더럼 근처 네빌스크로스에서 데이비드 2세를 제압해 생포함으로써(1346. 10) 에드워드는 한층 더 힘을 과시했으나 지속적인 정복지로 남은 것은 단지 칼레뿐이었다(→ 색인 : 네빌스크로스 전투). 그는 칼레의 프랑스 주민들을 대부분 추방하고 잉글랜드인들을 정착시켜 프랑스 침공의 전진기지를 마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창 승전의 기세를 올리던 중에 자금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1347년 9월 또다시 휴전협정을 맺어야 했다.
에드워드는 1347년 10월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며 일련의 호화로운 마상시합을 열어 승리를 기념했다.
1348년에는 신성 로마 제위를 거절했다. 같은 해에 흑사병이라고 알려진 선(腺)페스트가 잉글랜드에 처음 발병해 1349년 말까지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흑사병의 공포에도 아랑곳없이 에드워드의 궁정에서는 요란한 주연이 끊이지 않았고 전염병이나 휴전협정에 상관없이, 부분적이고 소규모이기는 했지만 프랑스와의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뒤이은 수 년 간 에드워드는 책임 있는 장수라기보다는 호방한 기사로서 군사적 공적을 올렸다. 잉글랜드 하원(House of Commons)도 이제는 전쟁에 싫증을 냈지만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은 아무 결실도 없었고 1355년 또다시 대규모 군사행동이 개시되었다. 이 작전에서 에드워드는 칼레 외곽지역을 공격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불에 탄 성촉절(聖燭節)'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원정을 벌여(1356. 1~2) 스코틀랜드 남동부에 있는 로디언 지방을 약탈했으며 같은 해에 베일리얼에게서 스코틀랜드 왕국의 정식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아들 에드워드 왕자(Edward, Black Prince 흑태자)의 공적이 그를 훨씬 능가했다. 그의 아들은 푸아티에에서 승전을 거두어(1356. 9. 19) 프랑스 왕 장 2세(1350년에 필리프 6세를 계승)를 포로로 잡고 프랑스로 하여금 새로운 휴전협정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에드워드는 포로가 된 프랑스 왕을 융숭하게 대접했으나 런던 조약(1359)에서 너무나 많은 영토를 양도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며 프랑스는 이 협정을 거부했다.
프랑스로 하여금 협정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기 위해 에드워드는 칼레에 상륙해(1359. 10. 28) 랭스를 포위했으며 그곳에서 프랑스 왕위에 오르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이 계획은 무산되고 그는 부르고뉴로 진격했다가 결국에는 파리로 돌아왔다. 이러한 한 차례의 원정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는 브르타뉴에서 예비적인 평화조약을 맺는 데 기꺼이 동의했다(1360. 5. 8). 런던 조약보다는 프랑스에 덜 불리한 내용을 담은 이 조약은 칼레 조약으로 최종 타결되어 양국 왕의 비준을 받았다(1360. 10).
그 결과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자신의 권리 주장을 철회하고 그 대가로 프랑스 남서부의 비옥한 땅 아키텐을 전부 차지했다.
몰락기(1360~77년)
칼레 조약은 잉글랜드·프랑스 모두에 안정이나 번영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1361, 1369년 잉글랜드에 또다시 흑사병이 발생해 사회적·경제적 혼란이 심해졌으며 물가와 임금을 발병 이전 수준으로 묶어두기 위해 절박하게 노동자 법령(1351)을 시행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1350년대에 제정된 그 밖의 유명한 법령으로는 외국 성직자들에 대한 대중적 적대감을 반영한 1351년의 후임성직자규제법(Statute of Provisors)과 1353년의 교황존중처벌법(Statute of Praemunire) 등이 있었다. 이들 법령은 빈번하게 다시 제정되었으며 에드워드는 1366년에 잉글랜드에 대해 교황청이 주장하는 봉건적 우월권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장 2세의 아들인 프랑스 왕 샤를 5세가 칼레 조약을 파기하자 에드워드는 다시 프랑스 왕의 칭호를 썼으나 이 문제에 대해 전과 같은 열성을 보이지는 않았고 대부분의 전투와 외국영지의 관리를 자신의 아들인 흑세자 에드워드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게 맡겼다.
프랑스에 민족의식이 고조되면서 그들이 싸움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반면 에드워드는 자금이 부족해 자발적으로 교회의 부와 특권을 공격하는 데 가담했다. 한편 아키텐은 점차 프랑스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에드워드 왕자는 건강이 나빠져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며(1371)
곤트의 존은 프랑스를 가로질러 칼레에서 보르도까지 행군했으나(1373)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친히 마지막으로 해외 출정을 시도했으나(1372) 역풍이 불어 그의 군대는 프랑스에 상륙조차 하지 못했다. 1375년에 그는 기꺼이 휴전협정을 맺었으며 이 협정은 그가 죽을 때까지 유효했다. 그 협정에 따라 잉글랜드의 수중에 남은 중요한 영지는 칼레·보르도·바욘·브레스트로 줄어들었다.
에드워드는 1369년 필리파 왕비가 죽은 뒤 탐욕스러운 정부 앨리스 페러스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에드워드 왕자(Edward, Black Prince 흑태자)와 곤트의 존은 각기 자기 세력을 이끌고 왕실과 추밀원에서 날카롭게 대립했다.
곤트의 존은 1374년 4월 잉글랜드로 돌아와 앨리스 페러스의 도움으로 아버지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그의 통치는 명예롭지도 못했고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다. 1376년의 유명한 이른바 선린의회(Good Parliament)에서 지배세력인 곤트의 존 일파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마침내 전면에 터져 나왔다. 앨리스 페러스는 축출되었고 곤트의 추종자 일부는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의회가 일을 다 마무리 짓기 전에 에드워드 왕자(Edward, Black Prince 흑태자)가 죽음으로써(1376. 6. 8) 하원은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을 잃게 되었다.
곤트의 존이 다시 권력을 잡았고 에드워드 3세가 죽자 선린의회가 제정한 조례는 번복되었다.
에드워드의 성품
에드워드 3세는 남다른 활력과 열정적 기질을 지닌 인물로서 탁월한 전술가였고 완벽한 기사였다. 그의 궁정은 당대 유럽에서 가장 화려했으며 그 자신도 프랑스 전쟁에서 명성을 얻은 용맹한 기사단의 우두머리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의 야망은 주로 군사적 영예를 얻는 데 치우쳤지만 잉글랜드에서 그는 나쁜 군주가 아니었고 관용적이고 친절하고 호의적이며 가까이하기 쉬웠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보급물자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백성들의 청원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의회의 힘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약점은 부당한 배신행위, 낭비벽, 경솔함, 방종한 생활 등이었다. 그의 야망은 결국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며 그가 죽기 전에 백성들까지도 그의 실패를 느낄 정도였다.
7) Richard 2세 (1377-1399)
플랜태저넷 왕조의 마지막 왕. => 랭커스터 왕가 헨리 4세 패배
1367년에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태어나지만 아버지 에드워드(Edward, Black Prince 흑태자)가 죽으므로 삼촌 John of Gaunt 밑에서 자란다.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의 뒤를 이어 역병과 세금으로 시달리는 시대에 왕위에 올라 독립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국회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는다.
Anne of Bohemia라는 로마 황제의 딸과 결혼하지만 1394년에 부인이 죽으므로 1396년에 프랑스의 공주 Isabella와 결혼하기로 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삼촌 John of Gaunt의 아들 Henry Bolingbroke을 망명 보내지만 그가 돌아와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을 사로잡는 바람에 결국 왕위를 내려놓고 폰태프락트 성 (Pontefract Castle)에 유폐되었다가 암살당하고 만다.
존(John of Gaunt)이 죽은 뒤 그의 아들 헨리는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헨리 4세로 왕위에 올라 랭커스터 왕가(1399-1461년)를 이루다가 요크 왕조(1461년-1485년)에 이어지고 그 뒤 랭커스터의 혈통은 존의 서자가 창시한 보퍼트 가문의 후손인 헨리 7세로 이어져 튜더 왕조(1485 ∼ 1603)를 이룬다
강력한 반대파 귀족계급과 싸워 패배·사망했으며, 이 때문에 이후 85년간 잉글랜드의 왕권은 약해지고 불안정하게 되었다.
흑세자(黑世子) 에드워드의 아들이며 에드워드 3세의 손자로 1377년 6월 할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숙부였던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을 비롯해 에드워드 3세 재위 말년에 권력을 잡은 귀족들이 계속 나라를 다스렸다.
곤트의 실정(失政)은 흑사병과 백년전쟁(1337~1453)으로 일어난 경제난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 결과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나 리처드는 최초로 큰 위기를 맞았다. 이때 그는 고문관들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기는 한 듯하지만 대단히 침착하게 거짓 약속을 제시하여 반란세력을 무마시켰다(1381. 6. 14~15).
1382년 보헤미아의 앤 공주(1394 죽음)와 결혼했으며 아내를 매우 사랑했다.
1385년에 이르러 그는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비어 같은 대수롭지 않은 정신(廷臣)들로 개인적 추종세력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그와 동시에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애런들 백작 리처드 피철런, 워릭 백작 토머스 드 비첨 등이 이끄는 반대세력들도 등장했다.
곤트는 줄곧 파벌들 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다가 1386년 7월 카스티야에 자신의 왕조를 세우겠다는 개인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나면서 리처드를 적들의 수중에 내버려 두었다.
리처드의 적들에게 부추김을 받은 의회는 리처드의 비서인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을 탄핵하고(1386) 11인 위원회를 만들어 1년간 국왕의 활동을 감시하도록 했다. 리처드가 이 같은 조치에 대해 왕권을 침해하는 반역적인 위법행위라고 선언하자 그의 적들은 이에 맞서 1388년 의회를 열어 리처드의 가장 가까운 측근들을 범법자로 몰았고, 일부를 처형하기까지 했다. 궁지에 몰린 국왕은 청원파(appellants)라고 불리는 5명의 반대파 주요 지도자들에게 굴복했지만 1389년 5월에 이르러 성년이 된 군주로서 독자적인 통치를 하겠다는 의사를 공표했다.
1389년 말 곤트가 스페인에서 돌아와 상황을 진정시킴에 따라 리처드는 이후 8년간 곤트 및 청원파들과 외견상 화목한 관계로 지냈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국왕은 줄곧 이전의 적들에게 보복할 기회를 기다렸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다시 더욱 강력한 국왕 지지파를 결속해나갔으며 1397년 무렵에는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그는 애런들을 반역죄로 기소해 처형시켰으며 워릭을 추방하고 글로스터를 투옥·살해했다.
청원파였던 곤트의 아들 헨리 볼링브룩과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가 1398년 9월 분쟁을 일으키자 국왕은 이 기회를 틈타 두 사람을 모두 추방했다. 뒤이어 1399년 2월 곤트가 죽자 리처드는 볼링브룩에게 넘어갈 랭커스터 가문의 막대한 영지를 몰수했다. 그러고 나서 같은 해 5월 그는 아일랜드로 떠났는데 이것은 큰 실수였다. 그가 없는 동안 헨리 볼링브룩이 잉글랜드를 침공해 귀족들을 규합했고, 리처드는 8월에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싸워보지도 못하고 헨리 볼링브룩에게 항복했다.
그는 9월 30일 폐위되고 볼링브룩이 국왕 헨리 4세로 왕위에 올랐다. 리처드는 10월에 폰티프랙트 성에 감금되어 4개월 뒤 그곳에서 죽었는데 아마도 스스로 굶어 죽은 듯하다.
셰익스피어가 〈리처드 2세 Richard Ⅱ〉에서 그가 살해당했다고 이야기한 것은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 리처드는 예민한 문학적 감식안을 지녀 제프리 초서, 존 가워, 장 프루아사르 같은 문인들을 후원했다. A. B. 스틸이 쓴 전기 〈리처드 2세 Richard Ⅱ〉가 1941년 출판되었다.
<4-1> 랭커스터 왕가 The House of Lancaster : 빨간 장미
♣ 랭커스터
◈ 랭커스터가(Lancaster 家)
(1) 헨리 4세(1399 ∼ 1413)
(2) 헨리 5세(1413 ∼ 1422)
(3) 헨리 6세(1422 ∼ 1461)
플랜태저넷 왕가의 한 분가이다. 15세기에는 잉글랜드 왕 헨리 4세와 헨리 5세, 헨리 6세를 배출했으나 요크 왕가에 패배한 뒤 왕위를 튜더 왕조에 넘겼다.
랭커스터라는 성은 헨리 3세의 막내아들인 '곱사등이' 에드먼드가 1267년 랭커스터 백작위를 받았을 때 생겨났고,그의 2 번째 부인인 아르투아의 블랑슈가 낳은 두 아들 토머스와 헨리는 작위를 이어 받았다. 헨리 백작의 아들 헨리는 랭커스터 공작위를 얻었는데 그는 2명의 딸밖에 없었다. 큰 딸 모드는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과 결혼했지만 헨리가 죽은 이듬해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둘째 딸 블랜치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이며 그녀의 남편인 곤트의 존이 가문을 이었다. 존이 죽은 뒤 그의 아들 헨리는 리처드 2세를 폐위 시키고 헨리 4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 뒤부터 랭커스터 공작령은 왕령에 포함되었고 랭커스터 가문 출신 왕인 헨리 4세, 5세, 6세가 60년 동안 잉글랜드를 통치하였다.
그 가운데 헨리 5세만이 나라를 다스릴 능력을 갖고 있었으나 그가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헨리 6세)은 왕위계승에 있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 4세는 랭커스터 가문의 조상이 헨리 3세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헨리 4세라고 칭했는데, 그 이유는 존의 형으로서 왕위 계승 서열이 더 높은 클래런스 공작 라이어넬의 후손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결국 존의 동생이자 요크의 공작인 에드먼드의 후손과 클래런스 공작의 후손들이 헨리 6세를 몰아냈고 에드먼드의 후손인 요크 공작이 에드워드 4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 뒤 랭커스터의 혈통은 존의 서자가 창시한 보퍼트 가문의 후손인 헨리 7세로 이어졌다.
헨리 7세에 의해 튜더 왕조가 시작되면서부터 랭커스터의 모든 영지는 왕령에 속하게 되었다.
1) Henry 4세 (1399-1413)
랭커스터왕가의 시조. 랭커스터공 존 오브 곤트의 맏아들. 에드워드 3세의 손자.
청년시절에 사촌형인 당시의 국왕 리처드 2세에 반항하는 귀족일당에 가담하였으나 뒤에 왕과 화해하고, 1397년 헤리퍼드 공작에 봉작되었다. 그 동안 대륙의 독일기사단의 군대에 참가하여 기사도적 행위에 열중하였으며, 1398년 대역을 저지른 혐의로 프랑스에 추방되었다.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리처드 2세가 랭커스터 공령(公領)을 몰수하였기 때문에 급히 귀국하여 거병하여 왕군을 무찌르고 리처드 2세를 체포, 퇴위시킨 뒤 의회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의 치세는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대내적으로는 웨일스의 반란, 이단(異端) 롤라드파의 봉기 등의 진압에 분망하였고, 많은 어려움과 맞서야 했다. 그러나 의회를 존중하여 어려움을 잘 극복함으로써 의회 발달사상 주목할 만한 획기적인 시기를 구축하였다.
2) Henry 5세 (재위기간: 1413-1422)
1387 년에 Monmouth 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웨일즈의 반란을 막으려고 힘쓴 왕이다.
왕자였을 때도 많은 권력을 차지한 왕으로서 영국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하여 성공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버건디 사람들과 오를레앙 사람들과의 내란 때문에 결국 프랑스는 영국과 화해를 하고 공주 Catherine of Valois를 내주어 영국의 왕비로 삼았고 Henery 5세는 큰 권력을 잡는다.
<4-2> 요크 왕가 The House of York : 흰장미
◈ 요크가(York 家) : 짧디 짧았던 25년간의 요크가 왕조
(4) 에드워드 4세(1461 ∼ 1483)
(5) 에드워드 5세(1483)
(6) 리처드 3세(1483 ∼ 1485)
플랜태저넷 왕가의 손아래 분가(랭커스터가 존의 동생이자 요크의 공작인 에드먼드의 후손).
랭커스터가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15세기에 에드워드 4세와 에드워드 5세 및 리처드 3세 등 세 명의 잉글랜드 왕을 배출했으며, 뒤이어 튜더 왕조에 패해 왕위계승권을 넘겨주었다.
이 가문의 창시자는 에드워드 3세의 다섯 번 째 아들인 요크공작 1세 랭리의 에드먼드인데, 에드먼드와 그의 아들 요크 공작 2세 에드워드는 별로 출중한 인물이 못되었다.
자식이 없던 에드워드는 죽기 전에 조카인 리처드에게 공작위를 물려주었다.
요크 공작 3세가 된 리처드는 랭커스터 출신의 헨리 6세에 맞서 왕위 계승권을 처음으로 주장한 요크가의 인물이었다.
랭커스터가에서 3대째 왕권을 행사해 오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요크 공작 3세가 주장한 왕위 계승권 요구는 거부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주장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앙주 출신인 마거릿 왕비와 그녀의 총신들의 실정 탓이었다. 그러나 요크 공작 3세의 왕권 주장은 혈통에 의거한 엄격한 법칙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는 요크 공작 3세의 둘째 아들로 클래런스 공작 라이어넬 후손이었으며, 반면 랭커스터가는 라이어넬의 동생인 곤트의 존에서 비롯했다.
요크 공작 3세의 주장에서 약점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모계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점이었는데, 사실 재판장 포테스큐는 이 점을 들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엄격한 법적 정통성 문제를 떠나 요크 공작 3세는 모계 혈통 못지 않게 부계 혈통을 통해서도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라는 사실로 인해 그의 왕위 주장이 국민들에게서 지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수 년 간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헨리 6세 정부의 혈통의 취약성을 바로 잡고자 노력을 기울이던 요크 공작 3세는 처음에는 무력을 사용했다가 나중에는 의회에서 자신의 왕위 계승권이 정당한 것임을 역설했다.
상원은 그의 왕권 주장이 무리한 것이 아님을 인정했으며, 대신 하나의 절충안으로 헨리 4세의 왕위를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그의 사후에 요크 공작 3세와 그의 후손들에게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다.
이 같은 타협안은 요크 공작 3세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헨리 6세 자신도 동의했다. 그러나 앙주의 마거릿 왕비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에 반발했으며, 요크 공작 3세는 웨이크필드에서 이들과 맞서 전투를 벌이다 죽었다.
그러나 2개월 쯤 지나 요크 공작 3세의 아들이 런던에서 왕으로 선포되어 에드워드 4세가 되었다.
에드워드 4세는 곧이어 벌어진 타우턴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적대세력을 국외로 몰아냄으로써 대관식의 길을 열었다.
1471년 왕권을 회복한 후,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가로부터의 도전을 우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요크가 내부에 불신의 씨앗이 이미 뿌려져 있었는데, 1478년 그의 동생 클래런스가 반역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 클래런스의 처형은 런던 탑에서 비밀리에 행해졌지만 에드워드 4세 자신과 의회의 재가를 받은 것이었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죽자 그의 큰 아들이 에드워드 5세가 즉위했으나, 2개월 반가량 명목상의 왕권을 유지하다 삼촌인 그로스터 공작에 의해 왕위에서 밀려났다.글로스터 공작은 리처드 3세로 즉위했는데,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인 요크 공작 리처드가 리처드 3세 때문에 살해당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한편 리처드 3세는 즉위 후 2년 쯤 되었을 때 보즈워스필드에서 리치먼드의 튜더 백작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튜더 백작은 헨리 7세가 된 후 에드워드 4세의 장녀와 혼인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함으로써 요크가와 랭커스터 가문을 결합시켰다.
이 때부터 요크가의 왕위 주장은 튜더가의 왕위 계승권 주장에 흡수됨으로써 사실상 요크가의 왕조로서의 역사는 끝이 났다.
1) Richard 3세 (1483-1485) 칼로서 왕위 찬탈 후 2년만에 칼맞어 죽음
요크 왕조의 마지막 왕.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며 글로스터공으로, 형이 죽은 후 어린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이 되었다.
몸이 불구인 탓도 있어 의심이 많고 음흉한 야심가였으며, 음모로 정적을 처형하고 어린 왕과 왕의 아우를 런던탑에 유폐시켜 왕위를 찬탈하였다.그러나 전왕 형제를 런던탑 내에서 살해하였다는 소문이 퍼져 신망을 잃었고, 이 기회를 포착한 랭커스터파의 리치먼드 백작 헨리가 1485년 망명지인 프랑스로부터 영국에 상륙하자 유력한 귀족들이 다수 백작을 도왔으며, 왕은 보즈워스에서 헨리백작과 싸우다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
장미전쟁을 다룬 셰익스피어의 사극 4부작 중 그 마지막에 해당되는 희곡이자, 장미 전쟁의 끝을 장식하는 희곡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초기극이지만, 또한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추대되는 희곡입니다. 덤으로 <햄릿>과 더불어 셰익스피어의 가장 긴 희곡입니다.
<리처드 3세>에서의 리처드는 실제 역사속 인물이지만, 희곡 속 리처드는 순수한 셰익스피어의 창작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몇몇 행동의 공통점을 제외하면, 리처드의 성격부터 거의 모든 행위는 셰익스피어의 상상 아래 쓰인 것입니다.
이 희곡은 기존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유사한 점들이 많습니다.
가장 유사한 희곡은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일 것입니다.
두 희곡 모두, 선인이 아닌 악인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을 가지고 있으며, 양쪽 주인공 모두 권력을 추구하다 파멸합니다.
또한 맥베스나 리처드 모두 왕위를 찬탈하고요.
그러나 맥베스와 리처드의 차이점은, 맥베스의 경우, 스스로의 의지보단, 레이디 맥베스와 같은 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반면, 리처드의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입니다.
개인적으론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모든 악인 중 이아고와 더불어 가장 뛰어난 악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극의 시작은 리처드의 독백으로 시작됩니다. 실제 역사와 달리, 셰익스피어는 리처드를 '''곱추'''로 설정했습니다.
리처드는 이런 추한 자신의 모습때문에 평범한 삶을 누리지 못했고, 그렇기에 무한한 권력을 추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독백은 앞으로 이 희곡이 나아갈 방향을 보여줍니다.
"나는 기형이고, 미완성이며, 반도 만들어지지 않은 채
너무 일찍이 이 생동하는 세계로 보내져 쩔뚝거리고 추한 나의 모습에
곁에만 지나면 개들도 짖는다.
피리소리 요란한 평화의 나날에서 나는 어떤 즐거움도 느낄 수 없구나.
고작해야 햇볕 아래 내 추악한 그림자를 바라보며, 노래하는 것 밖에는.
그러므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날을 즐기는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없기에,
나는 악인이 되어, 이 세상의 헛된 쾌락을 증오해 주겠다.
모든 음모는 이미 준비됐다."
그 후론 모든 것이 리처드의 계획대로 움직입니다.
이미 그의 형 에드워드 4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은 무너집니다.
에드워드 4세의 왕비와 그녀의 측근들은 리처드를 막으려하지만, 모두 역부족입니다.
리처드는 자신의 형제를 암살하고, 자신의 어린 조카들을 내쫓고, 왕이 되며, 다시 자신의 조카들을 살해하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신하들을 모두 죽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숨깁니다.
암살당한 자신의 형제조차 죽기 직전까지 리처드를 믿었으며, 심지어 리처드의 조카들조차 리처드가 암살범일 것이라 생각조차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측근들을 모으며, 자신이 죽였던 자의 아내까지 자신의 아내로 만듭니다. 그러나 이런 악인 리처드에게도 결국 운명의 심판은 찾아옵니다.
하나둘씩, 자신의 살육에 대한 원망이 높아지며, 훗날 헨리 7세가 될 리치먼드 공이 군사를 이끌고, 왕위를 빼앗으러 온 것입니다.
그는 싸움 전날, 자신의 죽였던 자들의 유령들을 만나고, 자신의 패배할 것이란 예언을 듣습니다.
두려워하면서도, 그는 결국 자신의 의지대로 맞서 싸웁니다. 그리고 결국 패배합니다.
리처드의 죽음과 함께, 헨리 7세는 왕으로 등극하며, 붉은 장미와 흰 장미의 조화, 즉 장미 전쟁의 끝을 선고합니다.
겉모습은 추악해도, 권모술수에 능했던 악인 리처드는 어찌보면 자신의 죄와 운명에 의해 패배하는 결말을 맞이합니다.
리처드 3세는 비록, 악인이지만, 명실상부한 이 희곡의 주인공이며, 가장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리차드 3 세' 서문에서
<5>튜더 왕조 The House of Tudor (1485-1603) :웨일즈 출신의 잉글랜드 왕가
♣ 튜더 왕조(1485 ∼ 1603)
리처드 3세(요크가) = 마거릿(랭카스터가)
(1) 헨리 7세(1485 ∼ 1509) = 엘리자베스(에드워드 4세의 딸)
(2) 헨리 8세(1509 ∼ 1547)
(3) 에드워드 6세(1547 ∼ 1553)(시모어의 아들)
(4) 메리 여왕(1553 ∼ 1558)(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캐서린의 딸)
(5) 엘리자베스 여왕(1558 ∼ 1603)(앤불린의 딸)
랭커스터 가문 존의 서자가 창시한 보퍼트 가문의 후손 웨일즈 출신의 잉글랜드 왕가이다.
튜더가에 속하는 잉글랜드 왕으로는 헨리 7세와 그의 아들인 헨리 8세, 그리고 그의 자식들인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가 있다.
튜더 가문의 기원은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왕가로서 등장하게 된 것은 장미 전쟁 당시 헨리 5세 및 헨리 6세와 함께 랭커스터 가문 편에서 싸웠던 웨일즈 사람 오언 튜더에 의해서였다.
그는 헨리 5세의 미망인으로 랭커스터 가문 편이었던 발루아의 캐서린과 결혼했으나,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에서 요크가가 승리한 뒤 참수당했다.
그의 맏아들인 에드먼드는 헨리 6세에게서 리치먼드 백작위를 받고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했으며 마거릿은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곤트의 존의 증손녀로서 아득한 서열이지만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에드먼드가 죽은 뒤에 태어난 외아들 헨리 튜더는 1485년 요크 가문 출신 왕 리처드 3세를 보즈워스에서 공격해 무찔렀다.그는 Henry 7세로서 왕위를 요구했는데, 이는 정당한 권리에 의한 것이며 전투에서 승리를 내려준 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에드워드 4세의 딸이며 요크가의 계승자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자신의 주장을 더욱 확고히 했다.
튜더가의 장미 문장은 랭커스터가의 빨간 장미를 요크가의 흰 장미 위에 포개어놓은 것으로 양가의 결속을 상징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튜더 왕조는 헨리 7세가 장미전쟁을 승리로 이끎으로써 시작되게 된다.
1) Henry 7세(1485-1509)
헨리 7세는 지루하던 30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1485년 튜더 왕조를 열게 된다.
장미전쟁은 의원이었던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에 충분했고, 헨리 7세 또한 귀족들의 반란을 막고자 하였다.따라서 이때부터 의회는 이름뿐이었고 나라의 권력은 오로지 왕에게만 돌아가게 된다. 즉 튜더왕조는 영국 역사에 다시금 절대군주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 귀족의 빈자리를 메울 새로운 계급 젠트리와 요먼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실력과 재산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 귀족은 아니었지만 존경받는 계급이었다.
이러한 젠틀맨과 요먼의 등장은 영국이 민주주의로 갈 수 있는 길을 자연스럽게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튜더가의 첫 번째 왕인 헨리 7세는 절대왕조를 엶과 동시에 영국에 민주주의가 일어설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셈이기도 했다.
2) Henry 8세(1509-1547)
영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긴 왕이 있다면 바로 헨리 8세일 것이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영국에 성공회를 만들고 자신이 수장이 되었으며, 6명의 아내를 두었고 그 중 2명을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는 죽은 그의 형의 아내, 에스파냐 왕의 딸인 ‘캐서린’공주였다. 그는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훗날 피의 메리라 불리우는 메리1세를 두게 된다. 그러나 사랑없이 결혼한 헨리 8세는 시녀였던 앤 볼레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결국은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로마 교황청에 캐서린과의 이혼을 요구하게 된다.
이혼을 금하는 카톨릭 교로서, 그리고 유럽 제 1의 강대국인 에스파냐의 압력도 있고 하여 교황은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분한 헨리 8세는 스스로 이혼을 선언하고 앤과 결혼하게 되었다.
결국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헨리 8세는 로마의 카톨릭과 인연을 끊고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은 종교로 인한 숱한 피비린내나는 투쟁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렇듯 힘겹게 결혼한 2왕후 앤 볼레인. 그러나 그녀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한 헨리 8세는 같은 이유로 캐서린을 몰아냈기 때문에 그녀를 봐줄수가 없었다.결국 왕으로서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그는 앤을 사형에 처하게 된다.그러나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1세는 후에 영국 역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업적을 기록하게 된다.
3왕후는 제인시머로 에드워드 6세를 낳은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또 홀아비 신세가 된 헨리 8세에게 루터파 신하들은 도이칠란트 루터파 왕족인 앤 공주를 왕비로 추천하고 결국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무뚝뚝한 그녀에게 곧 싫증을 느끼게 되고 다섯 번째로 ‘캐서린 하워즈’를 왕비로 맞는다. 하지만 그녀는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다. 결국 그는 여섯 번째로 ‘캐서린 파아’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렇듯 헨리 8세는 로마 교황과 손을 끊고 영국에 성공회를 세운 다음(1534) 성공회로 믿음을 바꾸지 않는 카톨릭 교도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154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년 동안 카톨릭 교도를 처형하는 화형장에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그의 통치는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피의 통치였다고 할 수 있다.
3) 에드워드 6세(1547-1553)
1537년에 태어나, 12일만에 어머니를 잃고, 10살 되던 해에 아버지 헨리 8세가 죽으면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그러나 몸이 약해 불과 6년만에 폐결핵으로 죽음을 맞는다.
4) 제인 그레이(1553.7.10~1553.7.19)
그는 '9일간의 여왕' 또는 '런던 탑의 비극'이라는 애절한 이야기로 전하여진다. 제인은 헨리 7세의 증손녀로 매우 아름답고 영리하여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 능하여 학자 아스캄도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의 비극은 파렴치한 시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에드워드 6세가 결핵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안 워릭백작은 그녀를 며느리로 맞이하여 왕위를 이어가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결국 에드워드 6세가 16살의 나이로 숨지자, 왕위계승권자 장녀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를 배제하고 제인을 왕위 계승자로 선언하였다.
이에 귀족(추밀원)과 국민은 반대했고, 반대자의 지지를 받은 메리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였다.그리고 워릭백작과 그의 아들 그리고 며느리 제인을 런던 탑에 가두었다.
1954년 2월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처형당한 제인 그레이는 이렇게 생을 마친다.
5) Mary 1세(1553-1558): 피의 메리
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 캐서린에게서 태어난 메리는, 1553년에 제인을 가두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녀를 항상 괴롭게 한 것은 그의 어머니 캐서린의 억울한 운명이었다. 공주이긴 하나 아버지 헨리 8세의 무관심으로 에스파냐 사람 유모의 손에 자라난 메리는 에스파냐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에스파냐의 피를 이어받은 몸이었으며 에스파냐의 믿음인 카톨릭에 완전히 젖어 자라난 열렬한 카톨릭 신자였다.
결국 메리 여왕의 영향으로 영국은 갑자기 성공회가 금지되고 카톨릭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녀는 개혁자들의 책이나 카톨릭에 어긋난 책을 가지고 들어오는 자는 지위나 출신을 가리지 않고 엄벌에 처하였다. 이단 처벌법을 부활시켜 300명을 화형에 처하고, 3년 동안 쉴새없이 수만 명이 교수형과 처벌을 당하였다. 그 뒤로 메리 1세는 Bloody Mary라 불리었다.
6) Elizabeth 1세(1558-1603)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인 앤 볼레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바다와 강력한 함대의 중요성을 깨닫고 세계의 바다를 지배할 강력한 함대의 건설을 이룩한 것이었다.
영국은 이 함대를 뒷받침으로 뒷날 온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세계제 1의 대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새로 발견된 대륙에서 각종 보물을 확보하고 있었고, 영국은 이를 빼앗아 도망치는 해적질을 강행하게 된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리란걸 깨달은 엘리자베스 1세는 이를 격려하였고, 따라서 대담무쌍한 해적질을 감행한 Francis Drake에게 귀족 작위를 내리게까지 된다.
에스파냐가 이를 묵인할리 없었고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는 그동안 종교적인 영향이 큰 것으로 엘리자베스가 영국의 국교를 다시 성공회로 정함으로써 이미 두 나라 사이는 종교적으로도 크게 갈라져 있었다.
강력한 함대를 거느리고 식민지의 보물과 황금을 차지하려고 하는 에스파냐와, 새로 해외로 손을 뻗으려는 영국 사이의 힘의 충돌은 결국 전쟁을 초래했다.
엘리자베스는 영국 해군 사령관에 임명한 해적 Drake에게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을 당부했다.
결국 뛰어난 전술을 이용해 영국은 에스파냐를 꺾고 아메리카와 그 밖의 동양과 아프리카 등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독점하여 무역하던 지역에 손을 뻗게 된다.
그리고 1600년에는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군대를 등에 업은 무역, 즉 무력을 이용한 무역을 함으로써 식민지를 철저히 착취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는 국민들에게 큰 세금을 거두지 않고도 무역에서 생긴 이익금으로 훌륭히 나라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의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왕의 위선과 권위는 더욱 당당해졌다.
나라 안과 밖으로 태평성대가 계속되고 나라 살림이 윤택해지면서 영국의 문화는 크게 꽃을 피워 ‘William Shakespear'같은 위대한 작가가 태어난 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
<6> 스튜어트 왕조(1603 ~1714) : 스코틀랜드 출신 왕위 계승
♣ 스튜어트 왕조(1603 ∼ 1714)
(1) 제임스 1세(1603 ∼ 1625)
(2) 찰스 1세(1625 ∼ 1649) - (청교도 혁명<1649>. 공화정 시대<1649 ∼1660> ) - (왕정복고<1660>)
(3) 찰스 2세(1660 ∼ 1685)
(4) 제임스 2세(1685 ∼ 1688)
(5) 메리 여왕(1688 ∼ 1694)와 윌리엄 3세(1688 ∼ 1702)의 공동 통치
(6) 앤 여왕(1702 ∼ 1714)
1603년 영국의 Elizabeth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절대주의는 엘리자베스시대를 정점으로 하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여왕은 독신으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는 스코틀랜드왕 제임스가 혈연에 따라 잉글랜드왕을 겸하여 제임스 1세가 되고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1605년의 가이 포크스 등 카톨릭 교도의 화약음모사건을 계기로 카톨릭을 탄압하였으며, 엘리자베스시대부터 세력을 키워온 칼뱅파(派) 청교도도 박해하였다.
청교도가 많은 의회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의 제임스의 대립은 뒤를 이은 찰스 1세 시대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1628년 의회가 공채(公債)나 조세(租稅)는 의회의 찬성을 요한다는 것, 함부로 백성을 체포 ·투옥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청원을 통과시키자 왕은 의회를 해산시켰다. 왕은 재원조달을 위해 1640년에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선출된 청교도가 이를 반대하자 곧 해산해 버렸다. 이것이 단기의회이다. 같은 해에 소집된 장기의회에서는 왕과 의회의 반목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1642년부터는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국내전쟁이 일어났다. 이 내전은 1647년에 이르러 의회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청교도는 온건주의 장로파와 급진주의 독립파 및 평등파로 분열하였다.
왕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파와 결속하고 각지의 왕당파의 지지를 얻어 다시 국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2차 내전은 독립파와 평등파의 승리로 끝나 1649년(조선시대 효종1년) 찰스는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을 지도자로 하는 공화정부가 성립하였다.(크롬웰의 청교도 혁명
이 청교도 혁명으로 상원은 폐지되고, 장로파와 토지배분을 요구하는 빈농·군인·직인 등 평등파도 탄압되었다. 크롬웰의 정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원정, 해운법에 의한 네덜란드의 제해권에 대한 도전, 에스파냐 함대의 타파 등 대외정책에서는 성공하였으나, 대내적으로는 엄격한 종교정책과 군사독재로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
그가 죽자 1660년 의회는 신교의 자유, 마그나 카르타와 권리청원의 존중을 브레다 선언에서 맹세한 선왕의 아들 찰스를 망명처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이고 왕정을 부활시켰다.
새 의회는 소수의 장로파와 다수의 왕당파로 이루어졌으며, 다수파는 국교도만이 국왕이 될 수 있다는 심사율(審査律)의 제정을 비롯하여 국교주의의 재건에 주력하였으나,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은 찰스 2세와의 대립이 표면화하였다.
이윽고 의회는 카톨릭 교도인 왕제(王弟) 제임스의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휘그와 토리의 두 파로 분열·항쟁하였는데, 찰스가 죽자 신왕 제임스 2세는 카톨릭주의와 절대주의 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휘그뿐만 아니라 토리와도 적대하였다.
두 파는 협정하여 1688년 제임스의 딸 메리와 그 남편 윌리엄을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여 여왕과 왕으로 만들었다(메리 여왕과 윌리엄 3세).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이에 이른바 의회 내 국왕을 원칙으로 하는 명예혁명이 성립하였다. 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 법의 정지 또는 면제, 금전의 징수, 상비군의 유지 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장전(權利章典)이 이듬해 1689년(조선시대 숙종)에 의회를 통과하였으며, 그때부터 이는 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과 함께 영국헌법의 근간을 이루었다.
영국의 정치혁명의 시대는 끝나고, 윌리엄 3세는 제임스가 프랑스의 지원으로 복위(復位)를 꾀하자 1690년 네덜란드·독일·에스파냐와 협력하여 1697년의 강화 때까지 프랑스와 싸웠다. 전비조달 방법으로 1692년에는 국채제도가 시작되었으며, 1694년에는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었다. 또 전비재원·화폐개주(貨幣改鑄)·무역차액·법정이자율 등의 문제를 두고 중상주의 논객들 사이에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윌리엄 치세의 말기인 1702년부터 의매(義妹) 앤의 치세인 1714년까지의 에스파냐 계승전쟁의 결과 영국은 에스파냐와 프랑스로부터 뉴펀들랜드·노바스코샤·허드슨만(灣) 지방·지브롤터·미노르카 등을 획득하였으며, 절대왕정 이래의 식민지체제를 확대하여 국내 상공업자의 이익을 증진하였다.
1714년 Ann 여왕의 죽음으로 Stuart 왕조는 끝나고 하노버 왕조로 바뀌었다
또 그 동안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와 합동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1) James 1세(1603 ~1625)
Mary Stuart의 아들로 스코틀랜드왕 James 6세가 되었으나, 1603년 Elizabeth 여왕이 죽자 영국 왕위를 겸하며, Stuart가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전제정치를 행하였고, 왕권은 신이 준 것이라 하여 번번히 의회의 결정을 어겼다.
제임스 1세는 덴마크 공주 앤과 결혼하여 찰스 1세를 낳았다.
그는 복잡한 종교를 해결하고 영국의 국익을 위하여 성공회를 영국국교로 하였다. 자신의 어머니가 카톨릭이고 영국 평민들 사이에도 많은 신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의 메리’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신앙의 자유는 허락하였으며, 교황 대신에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명령하였다.
청교도는 국회를 장악하고 있었고 또한 자신이 지배하는 스코틀랜드가 신교임을 감안하여 신앙의 자유를 주는 대신 예배는 국교인 성공회식을 다를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것이 오히려 청교도와 카톨릭을 반발하게 한다. 결국 청교도는 성공회 예배방식을 거절하여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또 카톨릭은 그를 암살하려다 적발되어 심한 탄압을 받게 된다.
왕권신수설을 강조하고 절대왕정을 강화하려 하여 1622년 의회와 대립한 그는 처음부터 위대한 여왕의 뒤를 이었다는 부담감과 이를 현명하게 극복하지 못한 채 자기 멋대로의 정책을 꾀하다 생을 마치게 된다.
2) Charles 1세(1625 ~ 1649)
아버지의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여, 하원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청교도들을 탄압하여 국민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의회는 탄압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하여 법적으로 ‘국왕을 상대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라는 권리청원을 하여 1628년 왕을 굴복시키고 승인을 받아냈다.
그러나 1629년에 권리청원을 폐지하였고 이는 청교도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찰스 1세는 프랑스의 루이 13세의 누이 앙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하였다. 카톨릭 신자인 왕비가 의회에서 탄핵될 것을 두려워한 그는 먼저 의회 의원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회 의원의 체포는 실패로 돌아갔고 청교도 전쟁이 시작되었다.
청교도 전쟁은 의회파와 왕당파로 나뉘어 싸웠으며, 초반에는 왕당파가 승리하였으나 나중에는 크롬웰의 새로운 군대에 의해 패배한다. 이것을 청교도 혁명(1642 -51)이라고 한다.
크롬웰에 의해 포로가 된 찰스 1세는 결국 영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법정에서 왕은 신에게만 심판받을 의무가 있고, 인간에 의하여 심판받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으나 살인, 반역, 폭정, 사회에 해를 끼친 죄로 1649년 사형 당하였다.
3) Cromwell의 공화정 시대
그는 탁월한 재능과 강인한 성품, 그리고 경건한 칼뱅주의 신앙으로 사치를 금하였고 엄격한 정치를 펼쳤다.그러나 이는 국민의 불만을 가져오게 된다.
그는 Elizabeth 1세가 죽은 후에 쇠퇴의 길을 가던 영국을 잘 훈련된 군대와 엄격한 청교도식의 독재 정치로 부흥시켰으며 영국과 북아메리카 등에 청교도적 사고방식을 확대하여 유지하는데 기여하였다. 그의 청교도적 사고방식은 최근까지도 정치사회생활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는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려고 항해조례를 만들었다.
또 1653년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다스리는 호국경에 취임하였으나 1658년에 죽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1661년 Charles 2세가 송장을 복고하면서 아버지의 복수로 그의 시신을 꺼내어 죄수들의 처형장소 타이변에 내걸었다가 교수대 밑에 매장하였고, 해골은 웨스트민스터 사원 꼭대기에 그의 집권 말기까지 걸어두었다고 한다.
4) Charles 2세(1660~1685)
찰스 1세의 장남으로 아버지를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으나 1649년에 아버지가 처형되자 저항하는 스코틀랜드인들에 의하여 찰스 2세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프랑스로의 망명생활이 시작되었다.
크롬웰의 엄격한 청교도식 정치에 지쳐있던 민심은 다시 왕정복고를 부르게 되어 찰스 2세는 영국으로 돌아와 왕정을 복구하였다.
훤칠한 키에 재치가 있어 모든 것을 즐겼는데, 그 중에 왕을 위하여 의사 콘돔 대령이 콘돔을 만들었다고 한다.
왕은 침착하지 못하고 의회를 무시하였고 청교도들을 억압하였다.
이때 의회는 1673년 ‘심사율’이란 법을 통과시켰다.
또 1679년에는 ‘인신보호율’이란 것을 만들어 왕은 이유없이 국민을 체포하는 것을 제한하여 국민들의 자유를 지켰다.
이때 왕위 계승자인 제임스가 카톨릭신자이며 독재 스타일이라 의회에서는 법을 고쳐서 왕위 계승을 막아야 한다는 쪽과 전통과 법은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쪽이 맞서게 되어 정당이라는 것이 생기는 원인이 되었다.
제임스 편을 드는 왕당파(귀족, 목사, 지주)를 자유파들이 아일랜드의 해적같은 무리라는 뜻으로 토리즈(Tories)라고 불러 ‘토리당’이 되었으나 후에 보수당으로 바꾸었다.
제임스를 반대한 자유파(부호 상인, 청교도)를 왕당파들이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무리라는 뜻으로 휘거모어즈(Whigamores)라고 불러 이것을 줄여 ‘휘그당’이 되었으나 후에 자유당으로 바꾸었다. 자유당은 1차 대전 후에는 인기를 잃어 없어지고 노동당이 대체하여 2대 정당이 되었다.
그가 영국 정부에 물려준 값진 유산 중 하나는 행정 통제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James 2세(1685 ~1688)
1664년 그가 보낸 함대가 미국의 ‘뉴 암스테르담’을 점령하여 그의 이름을 따라 암스테르담을 빼고 ‘뉴(New) 요크(York)'라고 바꾸었다.
그는 1673년 이른바 심사율에 의하여 위반하는 카톨릭 서약을 거부하며 모든 직책을 사임하여 자신의 입장을 공공연하게 밝혔다.
카톨릭신자인 그는 1660년 백작의 딸 앤과 결혼하였다.
국민과 지배자의 종교가 다른 모순은 항상 영국의 문제가 되었다.
그는 1688년에 신앙자유령을 재공포하였다.
이에 성공회의 켄터베리 대주교와 주교 6명이 신앙자유형의 철회에 대한 탄원서를 보내고 공개하였으나 왕은 이들을 선동죄로 고발하여 구속하였다.풀려난 7명은 왕위 계승권을 가진 메리의 남편 빌헴 공에게 군대를 이끌고 오라고 서한을 보냈다.
당시 네덜란드의 빌헴 공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견제세력으로 있을 만큼 강하였다.
1688년 그의 군대가 영국에 상륙하였고, 영국의 개신교 장교들과 딸 메리도 빌헴의 편이 되었다.
제임스는 전쟁을 할 의욕을 잃었고 이듬해에 아일랜드로 가서 항거하였으나, 1690년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연합군이 패하여 복위의 꿈은 사라졌다.
1689년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의 빌헴 공은 영국국왕(월리엄 3세)이 되었다.
그는 의회가 제출한 권리장전에 승인하였고 이에 의회는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과 같은 영국 의회를 만들었으며 명예혁명으로 의회와 국왕의 마찰은 끝났다.
6) Mary 2세(1689-94)와 William 3세(1689-1702)
제임스 2세의 딸 메리는 아버지와 종교에서, 종교 쪽을 택하여 남편이 영국을 침공하는 것을 허락하여 아버지를 쫓아냈다.
왕위에 오를 때에 혼자 오르기를 거절하여 남편과 함께 오르게 되어 영국 최초로 두 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영국 내에서 결정은 메리가 하였고 조언은 남편 네덜란드의 빌헴 공이 하였다.
임신이 불가능한 그녀는 남편의 외도에도 사이좋은 부부였다. 아버지 문제로 고민하였으며, 국민에게는 인기있는 여왕으로 32세에 천연두로 죽었다.
7) Ann 여왕(1705 ~1714)
언니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가 후계자가 없어 앤이 스튜어트 왕조 마지막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는 큰아버지의 권유로 프로테스탄트 교육을 받았다.
앤은 덴마크의 게오르공과 결혼하여 18번의 임신에도 5명만 태어났고 모두 어려서 죽어 후계자가 없었다.그녀는 온건주의자 플벗에게 후계자를 위임하고 죽었다.
플벗의 권장 하에 하노버 가문의 게오르크 루드비히(조지 1세)가 평화롭게 즉위하게 된다.
재위 동안 에스파냐 계승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1707년에는 스코틀랜드를 병합하여 대 브리튼 왕국을 성립하였다.그러나 전통과 역사가 완전히 합쳐지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자기의 조국을 분리하여 말하기도 한다.
지금의 국기인 Union Jack은 잉글랜드의 국기인 직사각형 안에 바른 십자가(+)와 스코틀랜드 국기인 직사각형 안에 성 안드레 십자가(X)가 합쳐진 것이다.
그 처세는 영국 사상 빛나는 시대였으며 여왕은 평화주의자, 공공복지의 증진자로서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7> 하노버 왕조(1715-1916) : 독일 출신 왕위 계승
♣ 하노버 왕조(1714 ∼ 1917)
(1) 조지 1세(1714 ∼ 1727)
(2) 조지 2세(1727 ∼ 1760)
(3) 조지 3세(1760 ∼ 1820)
(4) 조지 4세(1820 ∼ 1830)
(5) 윌리엄 4세(1830 ∼ 1837)
(6) 빅토리아 여왕(1837 ∼ 1901)
(7) 에드워드 7세(1901 ∼ 1910)
1701년의 왕위계승법에 의하여 앤 여왕이 죽은 뒤, 독일의 하노버가(家)에서 영입한 조지 1세에서 시작된다. 동왕(同王)과 조지 2세는 독일 출생으로, 영국의 정치에는 관심이 적어 의회정치 및 책임내각제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다음의 조지 3세는 왕권의 회복을 도모하여 의회를 조종하였으나, 결국 미국독립의 실태(失態)를 초래하였다.
그 뒤 조지 4세, 윌리엄 4세를 거쳐 빅토리아여왕이 즉위하여, 64년의 치세 중에 영국의 최번영기를 맞이하였다.
다음 에드워드 7세의 즉위와 함께 색스 코버그 고타왕조라 개칭하였으나, 그것은 독일계의 명칭이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적국이 됨에 따라 조지 5세 시대인 1917년 윈저왕조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년 가까운 치세기간 중에 왕권은 국정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관행(慣行)이 점차 강하여져서 "국왕은 군림하나 통치는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1)조지 1세(1714-27)
독일태생이라 영어를 몰라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그는 결국 정치를 국회에 일임하게 되고 이때부터 현재 세계 여러 나라가 본받고 있는 ‘내각책임제’가 출발한 것으로 본다.
이는 국왕은 나라의 주인이되 사실상 정치의 뒷전에 물러나 있고 권력은 국회와 선출된 수상이 쥐게 되어 ‘국왕은 군림하나 지배하지 않는 입헌군주국’의 기초가 되는 셈이다.
결국 국민이 뽑아낸 대표 가운데 가장 똑똑하고 덕망 있는 사람이 정권을 쥐고 이 사람이 잘못하면 언제든 새로운 수상으로 교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힘찬 발전을 해나가게 된다.
2)조지 2세(1729-1760)
조지 1세의 아들이다. 독일의 하노버가(家)에서 태어나 부모가 이혼한 이래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고 조부 밑에서 지내다가 1714년에 아버지가 영국의 왕위를 계승할 때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서 부왕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1727년에 즉위하였다.
즉위 후 부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휘그당(黨)을 지지하고 부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R.월폴을 중용하였다. 1743년의 오스트리아계승전쟁 때에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당시 영국은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지배하고 해외의 식민지를 확장하였으며, 7년전쟁에 참가하는 등 중요한 사건도 많았으나 그가 기여한 바는 별다른 것이 없다.
정치는, 치세 전반에는 월폴에게 맡기고, 후반에는 대(大)피트에게 맡겨 책임내각제를 발달시킨 결과가 되었다.
3)조지 3세(1760-1820)
조지 2세의 손자로, 1760년에 즉위하여 앞의 2대의 왕과는 달리 왕권의 회복을 꾀하였다. 그래서 왕실비용을 줄인 돈으로 의원을 매수하여 어용당을 만들어, 이를 조종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국정의 지도력을 강화하였다.그러나 그 결과 미국의 독립이라는 뼈아픈 실패를 초래하였다.
더욱이 그의 치세는 초기의 토리당(黨) 어용화 시대 등, 전후 수년간을 제하고는 소(小)피트가 주도하는 토리당의 지배 시대가 되었다.
그의 치세 동안에 유럽대륙은 나폴레옹(1800-15)의 시대로 1805년 넬슨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이따금 정신에 이상을 보였고, 특히 1811년 이후에는 폐인 같은 만년을 보냈다. 결국은 정신이상으로 아들 조지 4세가 국사를 대행하였다.
4)조지 4세(1820-1830)
정신이상자가 된 아버지 조지 3세를 대신하여 사실상 군주노릇을 하였다.
'포도주와 여자를 다소 지나치게 좋아하였다'라고 자신이 말할 정도로 방탕한 생활태도와 휘그당 정치가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 때문에 조지 3세는 그를 경멸하였다.
부왕의 정신이상 탓으로 섭정을 맡을 때(1788~1789, 1811~1820)부터 1820년의 즉위 후의 치세 동안에는 토리당(黨)에 호의를 보이고, 여러 가지 개혁에 반대하였으나, 왕의 의사와는 달리 가톨릭교도 해방령(1829)의 성립 등으로 권위를 잃었다.
5)윌리엄 4세(1830-1837)
런던 출생으로 조지 3세의 셋째 아들이다.
1779년 이래 해군에서 근무하였으며 나폴레옹전쟁에서 활약하였다.
1828년 해군총사령관이 되었고, 형 조지 4세의 죽음으로 즉위하였다.
이미 나이가 많아 정치도 우유부단하다는 빈축을 샀으며, 선거법 개정문제에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동요하였다.그러나 세론의 움직임에 놀라, 1832년 새 귀족의 서임(敍任)에 동의하고 상원에 압력을 가하여,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뒤에도 자주 휘그당과 마찰을 일으켰지만,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여배우 D.조던과 동거하여 이미 10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1818년 작센의 마이닝겐 공작의 딸 애딜레이드와 결혼하였다.
그 사이에서 난 두 공주는 모두 요절하여, 조카딸 빅토리아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6)빅토리아 여왕(1837-1901)
아버지는 조지 3세의 4남인 켄트공이다.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독일 출신의 어머니와 독일계 보모(保姆)의 손에서 엄하게 자랐다.
백부(伯父)인 윌리엄 4세가 죽자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하노버왕가에서는 여자의 상속권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노버왕가가 성립한 이후로 계속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일군주 관계는 끝나고, 그녀는 영국 왕위만을 계승하였다.
즉위 당시의 총리 W.L.멜번이 어진 아버지와 같은 태도로 그녀를 지도해주고, 또 아버지가 생전에 휘그당과 가까웠던 관계도 있어서, 초기에는 자유당에 호의적이고 보수당 내각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1840년 사촌인 색스코버그 고터가(家)의 앨버트공(公)과 결혼하였다.
독일 출신인 앨버트공은 영국에서 백안시(白眼視)되고 그녀도 애정을 가지지 않았으나, 고결한 인격과 풍부한 교양으로써 여왕에게 좋은 조언자와 이해자가 되어, 공사(公事)와 가정생활에서 그녀를 두루 뒷받침하였다.
이기적인 데가 있던 그녀가 국민이 자랑하고 존경하는 여왕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공에게 힘입은 바가 컸으며, 그녀도 차차 공의 인품에 감화되어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1861년 공이 42세의 나이로 죽자 그녀는 비탄에 잠기어, 버킹엄 궁전에 틀어박힌 채 모든 국무(國務)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나 B.디즈레일리의 설득으로 차차 마음을 바로잡고 동시에 그가 거느리는 보수당에 동조하였으며, 1877년 그가 바치는 인도 여제(女帝)의 제관(帝冠)을 받았다.
9명의 자녀를 두었고 독일 ․러시아 등과 친척 관계를 맺었으며, 행복한 말년을 보낸 뒤 보어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 64년간의 치세(治世)를 마쳤다.
여왕의 치세는 빅토리아시대로서 영국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자본주의의 선두 선진국이 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디즈레일리와 W.글래드스턴으로 대표되는 2대정당제(二大政黨制) 의회정치가 전형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외교면에서도 영광스런 고립을 지키면서 그 동향(動向)이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빛나는 시대에 살면서도 그녀는 “군림(君臨)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랐다.
보수주의로 기운 후반기에는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본분을 지킬 뿐 자신의 의사를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영국 군주의 패턴을 확립하였다.
1901년 세상을 떠났고 영국에서 가장 긴 통치를 하였고 영국을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든 빅토리아는 국왕이 잃어버렸던 위엄과 인기를 되찾았으며 높은 의무감, 정직함, 소박함이 국민들의 애정을 얻었다.
그녀는 해가 지지않는 대영제국을 다스렸는데 본토보다 80배가 넘는 식민지를 다스렸다고 한다.
특히 이 시기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 산업혁명이 절정에 달했다.
1830년에 Liverpool과 Manchester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었고, 1837년에 전화, 전신, 무선 등이 개설되었으며, 1838년에는 대서양에 큰 증기선이 운항하게 되었다.
이러한 산업의 발달로 국가는 더욱 부강해졌고 국민의 의식은 물질주의화되었다.
또한 여러 곳에 학교가 설립되었고 값싼 책들이 출판되어 일반 교양교육이 확대되었다.
7)에드워드 7세(1901-10)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이다. 청년시절부터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를 여행하여 견문을 넓혔으며, 스포츠 ․문화 ․사회문제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60세에 즉위하였는데, 당시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앞두고 긴장사태가 고조되어가고 있었다.
영국 헌법상 국왕은 국정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며 그도 그 관례에 따랐으나, 외교면에서는 여러 나라 제왕들과 인척관계에 있었고, 황태자 시절부터 어머니인 여왕을 대신하여 여러 차례 공식 석상에 나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국제 외교계에도 능통하여, 그 는 각국을 순방하면서 영국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특히, 영국-프랑스 협상(1904), 영국-러시아 협상(1907)의 체결로 말미암은 3국협상의 성립에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조지 3세 시대의 영국의 발전은 조지 4세, 윌리엄 4세 시대를 거쳐 1837~1901년에 이르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절정에 달하였다.
국내적으로는 글래드스턴의 자유당과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등 2대 정당간의 정권교체에 의한 전형적 의회정치가 행해지고, 선거법 개정과 1871년의 노동조합법 제정 외에 교육·군사·사법 제도의 개정 등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등 백인식민지의 자치령화를 실현시키면서도 한쪽에서는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아편전쟁과 애로호(號) 사건을 계기로 중국시장에도 진출하였으며, 기타 수에즈운하를 매입하고 이집트를 보호령화하는 등, 영국 제국주의를 발전시켰다.
☞ 현대 시대
<8> 윈저 왕조(1917 ~현재) : 1차대전으로 독일계 작위 칭호를 버리고, 윈저왕가로 변경
(1) 조지 5세(1910 ∼ 1936) : 에드워드 7세의 둘째 아들
(2) 에드워드 8세(1936) : 조지 5세의 큰아들, 심프슨 부인 문제로 퇴위
(3) 조지 6세(1936 ∼1952) : 조지 5세의 둘째 아들
(4) 엘리자베스 여왕(1952 ∼ ): 조지 6세의 맏딸
(5) 찰스 3세 (2022~ ) :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비의 장남
1901년 하노버왕가의 여왕 빅토리아가 죽자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에서 왕위를 이었으며,
1917년에 윈저왕가로 이름을 바꾸었다.
작센-코부르크-고타는 빅토리아의 남편 앨버트 공(1819~1861)의 성이다.
1)조지 5세(1910-36)
1892년 형 빅토리아 남편 앨버트의 사망으로 왕위 계승권자가 되어, 1901년 프린스 오브 웨일스로 서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1817년, 모든 독일계 작위 칭호를 버리고, 가명(家名)을 윈저왕가로 변경하였다.
1821년에는 아일랜드 자유국의 승인에 기여하는 등, 근대사에서 성공한 입헌군주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그의 위신은 크게 높아졌으며 그는 몇 차례에 걸쳐 프랑스의 전선을 방문하였다.
1928년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1936년에 죽었다.
1차 대전 중에 싸운 독일의 빌헬름 2세와는 고종(4촌)이다.
2)에드워드 8세(1936.1.20-12.10)
조부 에드워드 7세를 닮아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황태자 시절에 세계 각지를 여행하여 상하 각층의 사람들과 널리 사귀었으며, 사회문제에도 조예가 깊어 인망이 높았다. 그는 세계의 화제가 된 인물로 그의 사랑은 세기적 로맨스로 불리운다.
그는 2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인 월리스 워필드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퇴위하였다.
영국 왕 가운데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난 유일한 인물인 그는 12월11일 저녁 라디오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없고 그 무거운 책임을 짊어질 수도 없음을 알았다'.
결국 1937년 에드워드는 프랑스 샤토드캉데에서 영국 국교회 신부의 주례로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항상 패션 감각과 품위를 잃지 않았으며 '사람은 부유할수록 좋고 몸은 날씬할수록 좋다'는 말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3)조지 6세(1936-52, 인도의 황제:1936-1947. 8. 15)
조지 5세의 차남이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이다.
해군사관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 때 함대에 근무하였고, 전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36년에 형 에드워드 8세가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문제로 왕위에서 물러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프랑스 ․캐나다 ․미국 등을 역방하여 국제 친선에 힘을 기울였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런던을 떠나지 않고 시민과 위험을 함께 하면서 때때로 군대 ․공장 ․공습피해지역 등을 시찰하여 사기 앙양에 힘썼다.
책임감이 강하고 중후하며, 왕실의 규범을 준수하여 국왕으로서의 중책을 훌륭히 수행하여 국민의 신뢰를 받았다.
4)엘리자베스 2세(1952-현재)
본명 Elizabeth Alexandra Mary. 1926년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윈저왕가의 조지 6세의 장녀이다.
1947년 에든버러공(公) 필립과 결혼하여, 이듬해 11월 큰아들 찰스(찰스 필립 아서 조지)를 낳았다.
1952년 2월 뉴질랜드 방문 중 아버지 조지 6세의 급서로 귀국 왕위를 계승하였다. 조지 6세의 서거는 자동으로 그의 맏딸이자 1순위 왕위계승권자인 엘리자베스에게 왕위가 돌아감을 의미했다 .
1953년 6월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戴冠式)이 거행되었는데, 연합왕국(聯合王國)의 왕이자 자치령 각국의 왕이며 나아가 구제국(舊帝國)에 속한 독립국들의 결합체인 코먼웰스의 수장(首長)으로서 대관한 최초의 왕이 되었다. 이후 영국 국왕으로서의 다망한 정무를 처리하는 한편, 수많은 외국방문으로 세계 각국과의 우의를 다졌다.
슬하에 황태자인 찰스와 차남 앤드류(1960~), 3남 에드워드(1964~)와 장녀 앤(1950~) 등 3남 1녀를 두었다.
2002년 2월 6일 즉위 50주년 축하행사로 황금마차 퍼레이드, 기념주화 및 축하복권 발행, 여왕부부의 영연방 국가 순방 등을 가졌으며, 역대 왕 중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엘리자베스 1세에 이어 영국민에게 신뢰와 인기도가 높다.
5) 찰스 3세 (2022~ ) :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비의 장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