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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홍상수, 2004, 유지태, 성현아, 김태우

Jobs9 2023. 10. 29.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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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홍상수, 2004, 유지태, 성현아, 김태우

 



지금까지의 홍상수 영화 가운데 가장 과소평가된 작품이라면 그건 물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 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21세기 지난 10년간 가장 가공할 만한 충격을 안겨준 최고의 한국영화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개봉 당시 저주받은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기껏해야 망설임 섞인 지지를 받았을 뿐인 이 영화는 홍상수의 영화세계를 논하는 많은 한국 평론가에게 여전히 불편한 대상으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어쩐지 피하고 싶은 심연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홍상수 영화세계를 포괄적으로 다룬 비평들에서조차 매우 사소하게만 다루어지거나 전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한국에서 가장 오해된 홍상수 영화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마땅히 걸작으로 인정되어야 하고 언젠가 반드시 그렇게 될 영화기도 하다”라는 주장(2007년 스페인에서 열린 한국영화특집 카탈로그에 수록된 영화평론가 홍성남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리뷰 중)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예언으로 비칠 뿐이다.  

홍상수 영화에서 서로 대칭/대비되는 두 개의 구조나 요소가 두드러지며 이들의 ‘배열’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적’인 효과가 아니라) 감각 자체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걸 확장하면 우리는 홍상수의 필모그래피 내에도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두 편의 다른 영화를 나란히 세워두어야만 비로소 인식되는 변화의 계기, 새로움의 계기가 있을 것이란 추측을 할 수 있다. <생활의 발견>(2002)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즉 이 둘은 홍상수의 이후 영화들이 종횡무진하게 될 좌표평면의 X축과 Y축이다. 이 두 편의 영화에 등장했던 요소들을 서로 얽혀 들게 하고 뒤바꾸고 재배열하면서, 또 새로운 요소들(예컨대 줌이나 보이스오버)을 삽입하면서 생성되는 감각을 만끽하는 영화가 지금까지의 -<밤과 낮>(2008)과 단편 <첩첩산중>(2009)은 예외로 하고- 홍상수 영화였다. 매번 다른 배우와 작업했던 홍상수가 같은 배우를 거듭 기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두 영화 이후부터다.  

프레임 도처에 감각이 넘실대는 리드미컬한 영화, 서로 마주 보고 있되 결코 맞물리지는 않는 대칭구조의 영화, 그 어긋남이 불러일으키는 인상이 결국 이야기의 구체성을 약화시키고 대신 구조의 형상적(figural) 힘에 활력을 부여하기에 이르는 영화라는 점에서 홍상수의 영화는 일견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와 닮아 있다. 특히 대칭구조의 한쪽 면을 그야말로 문지르고 번지게 함으로써 그 구조가 가까스로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실험해본 영화라는 점에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열대병>(2004) -이 두 영화는 같은 해 나란히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랐다-만큼이나 과감한 작품이었다. 그런데도 홍상수의 이 영화가 질료로 끌어들인 단어의, 이미지의, 상황의 ‘불편함’과 ‘외설성’은 평론가들로 하여금 그러한 구조적 과감함에 깊이 주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반면 아피찻퐁의 애니미즘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수용되었다.) 

일부 평론가는 홍상수 자신의 말을 근거로 그의 영화와 세잔 회화 사이의 감각적 유사성을 지적하고픈 충동을 느껴왔던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영화적 방법론에 더 어울리는 것은 베이컨의 회화 쪽이다. 덧붙이자면 홍상수의 영화를 논할 때 도움이 되는 들뢰즈의 저서는 <차이와 반복>이 아니라 세잔의 언어를 빌린 제목으로 베이컨의 회화에 대해 논하고 있는 <감각의 논리>다. 비단 ‘감각’이라는 단어 때문이 아니라 구상과 추상 사이에 형상성을 자리매김하는 것, 상투적인 것과의 대결, ‘다루어진’ 우연, 생명의 관점에서 판단되는 죽음의 의미, 구조와 힘 등에 관한 유용한 비평적 논의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들뢰즈가 지적한바 베이컨 회화에서의 폭력이 감각적인 폭력이 아니라 감각의 폭력이라면, 홍상수 영화에서의 음란함은 (성교의 재현이 주는) 감각적인 음란함이 아니라 (구조의 유희에서 비롯된) 감각의 음란함이다. 감각적인 음란함은 성(性)을 들뜨게 하는 반면, 감각의 음란함은 생(生) 자체를 뒤흔든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진정 음란한 영화인 것은 여기서의 성교란 것이 (뒤엉킨 남녀의) 몸짓과 (그들이 내뱉는 듣기 민망한) 언어 사이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현실과 꿈 사이에서, 장면과 장면 사이에서, 나아가 구조의 수준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루이스 부뉴엘의 <세브린느>(1967)처럼 음란하기 짝이 없는 감각을 거의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간 영화다. 선화(성현아)의 아파트 장면, 그리고 문호(유지태)가 ‘우연히’ 그의 제자들을 한 학교운동장에서 만나게 되는 장면 이후 영화는 별안간 거의 식별 불가능한 지경에 이를 만큼 - 예컨대 제자와 여인숙에 투숙한 문호의 에피소드는 현실인가 꿈인가, 만일 꿈이라면 그는 선화의 집에서 잠들어 있는 중인가, 운동장에서 꿈꾸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술집에서 곯아떨어진 중인가 - 구조적 난교(orgy)에 빠져들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더할 나위 없이 명징하고 현실적이며 대칭의 구조도 은밀히 견지하고 있다. 인물들이 모두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오히려 영화의 구조는 자유를 향한 출구를 발견한다. (이 영화가 개봉되었던 당시 대부분의 평론가는 모든 인물이 막다른 골목에 처한 그 상황을 홍상수의 영화적 형식이 마침내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말할 때 들먹이기 좋은 메타포처럼 써먹었다. 어떻게 이야기적 상황이 형식을 비난하기 위한 구실이 될 수 있는가?) 

최근의 홍상수 영화가 예전과 달라졌다고, 한결 자유로워졌다고들 말한다. (에세이적 형식으로서 홍상수 영화의 또 다른 축이 될지 아직은 분명치 않은 <밤과 낮>을 제외하면) 나는 그 변화가 반드시 ‘좋은’ 것이기만 했었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과감하고 모험적인 첫 시도였던 <여자의 남자의 미래다>가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할 걸작이라는 사실만은 확신한다. 




7년 전, 두 남자와 ‘선화’는 이런 관계였다

선화(성현아)는 헌준(김태우)의 연인이었고, 문호(유지태)는 헌준의 후배였다.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선화에 대한 마음이 소원해진 헌준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고...
선배의 연인인 선화를 짝사랑해온 문호는 헌준의 유학을 계기로 그녀와 연인이 된다.
그러나 결국 문호도 선화와 헤어지게 되고, 세 남녀는 연락이 끊긴 채 각자의 삶을 살아갔다.

7년 후, “우리의 선화는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오랜만에 만난 대학 선후배 문호와 헌준.
선배인 헌준은 유학을 다녀 온 예비 영화감독이 되었고, 후배인 문호는 아름다운 부인과 딸을 둔 서울 유명 대학 강사가 되었다.
두 남자는 동네 중국집에서 낮술을 마시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중,

“우리의 선화는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취기가 적당히 오른 둘 사이에 그들의 연인이었던 선화가 갑자기 화제가 되고, 그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남아있는 선화와의 추억에 잠긴다.
낮술에 힘을 얻은 두 남자는 그래도 선화가 반겨줄 거라는 기대감과 내심 불안감을 갖고 선화를 만나기 위해 부천으로 떠나는 돌발행동을 하게 된다.

막상 선화의 얼굴을 본 두 남자는 ‘7년 전 선화’를 되찾고 싶다는 욕망이 일고 선화와 오직 단둘이 있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선화는 이런 두 남자의 행동을 일단 즐겨보기로 하는데...

7년 만에 다시 만난 ‘선화’는 과연 두 남자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유운성(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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