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 여운형 암살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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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경기도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지회를 설립하여 활동하였으며, 이 무렵 개신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Clark. C. A) 목사의 조수로 있으면서 기호학회에 참여하여 평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당시 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승동교회(勝洞敎會)를 출입하였다. 1911년 강원도 강릉에서 남궁억(南宮檍)의 후원으로 운영되던 초당의숙(草堂義塾)의 교사가 되어 청년교육에 힘썼다.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에서 활동하다가 1917년 상하이[上海]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8년에 상해고려민친목회(上海高麗民親睦會)를 조직하였으며, 같은 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조직을 주도하고 총무간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재일유학생의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관여하고, 김규식(金奎植)을 상하이로 초빙하여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결정하였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힘썼으며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하였다. 상하이에서 아동들에게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교육시키기 위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일본을 방문하여 일제 고위관리들과 여러 차례 회담하면서 일제의 자치제 제안을 반박하고 즉시 독립을 주장하였다.
1920년 사회주의 계열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極東被壓迫民族大會)에 참석하였다. 같은 해 김구(金九)·손정도(孫貞道) 등과 함께 한인노병회(韓人勞兵會)를 조직하여 노농병 양성과 군비 조달에 힘썼다.
1923년 임시정부의 진로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였으며, 1925년 쑨원(孫文)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고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하였다. 1926년 중국혁명운동이 실패한 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9년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32년 출옥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직에 취임하였으며, 1934년 조선체육회 회장직을 맡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2년 치안유지법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44년 8월 일제의 패전을 예상하고 독립운동과 국가건설을 위하여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건국동맹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농민동맹(農民同盟)·부인동맹 등을 조직하였으며, 옌안(延安)의 독립동맹(獨立同盟)과 제휴하여 연합작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건국 준비를 위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의 결성을 주도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해소되고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의 부주석(副主席)이 되었으며, 김구·이승만·안재홍·송진우 등과 만나 국가건설 방안 등을 협의하였다. 11월에 건국동맹을 모태로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을 결성하여 당수직에 맡았으며, 미군정 장관의 고문을 맡기도 하였다.
1946년 2월 북한을 방문하여 조만식(曺晩植)과 김일성(金日成)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의 대처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좌파 세력의 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의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후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에 기반을 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와 성공을 목표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8월 조선인민당 당수직을 사임하였으며, 9월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3당 합당문제를 포함한 남한 현안에 대한 의견교환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였다. 11월 사회노동당(社會勞動黨) 준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과 합동을 제의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1947년 1월 우파 세력의 반탁운동과 좌파 세력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정계에 복귀하였다. 3월 신당 결성을 위한 준비 활동에 착수하여 5월에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을 창당하고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김규식·김창숙(金昌淑)과 함께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십여 차례 테러를 당하였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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