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독일 북부에 위치한 도시주. 한국의 광역시처럼 한 도시가 그대로 주(State)이기도 한 곳이다. 독일어로는 der Stadtstaat.
북해 연안에서 독일 최대의 항구이며 엘베강 하구 110km 상류 양안에 걸쳐 위치해 있다. 베를린에 이어 독일 제2의 도시이다. 유럽 전체로 따지면 6번째로 큰 도시이다.
독일 전체에서 1인당 주민소득 1위를 달릴 정도로 부촌이다. 2014년 기준으로 함부르크에 거주하는 이른바 '백만장자'의 숫자만 4만 2천 명에 달하는데, 독일에서 가장 많은 숫자이다. 2014년 기준으로 함부르크에 거주하며 1년 연봉이 백만 유로(약 십여 억 원)를 넘는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1천 명이 넘는다. 이는 독일에서 가장 많은 숫자이다.
그 밖에 세계 각국에서 온 3천여 곳이 넘는 회사들이 수입과 수출 거래를 위해 함부르크에 상주하고, 한국을 비롯해 각국의 영사관도 95개가 넘게 있다.
함부르크는 일찍부터 개방되고 자유로운 도시라는 명성이 있었다. 역사학자 에크하르트 클레스만이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유입이 없었다면 함부르크는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함부르크는 옛날부터 외국인이 많은 도시였다. 그러한 역사를 비추듯, 1952년에 제정된 함부르크 헌법 전문은 명시적으로 도시의 세계개방성을 규정한다. "자유 한자도시 함부르크는 역사와 지리를 통해 주어진 세계 항구도시로서의 특별한 임무를 독일 인민을 위해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자유의 정신 속에서 세계의 모든 나라, 모든 인민간의 매개자가 되는 것이다."가 그것이다.
함부르크
햄버거(Hamburger) 어원, 독일 북부 고기 다진 후 구운 요리
전 세계인이 즐겨찾는 음식 햄버거(Hamburger)의 어원이 된 도시이기도 하다. 함부르크를 비롯한 독일 북부에 고기를 다진 후 빚어서 구운 요리가 있었는데, 19세기에 독일 이민자들이 미국에 정착하면서 '함부르크의 스테이크'라는 뜻으로 햄버그(Hamburg) 스테이크라고 불렀고, 이후에 햄버그 스테이크와 채소를 빵 사이에 끼운 샌드위치가 개발되어 현재의 햄버거가 되었다.
북해 연안에서 독일 최대의 항구이며 엘베 강 하구 110 km 상류의 양안에 걸쳐 위치하고 있다. 인구 규모로는 베를린에 이어 독일 제 2의 대도시이다. 유럽 전체로 따지면 7번째로 큰 도시이다.
그 밖에 세계 각국에서 온 3천여 곳이 넘는 회사들이 수입과 수출 거래를 위해 함부르크에 상주하고, 한국을 포함해 영사관도 95개가 넘게 있다.
함부르크는 일찍부터 개방되고 자유로운 도시라는 명성이 있었다. 역사학자 에크하르트 클레스만이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유입이 없었다면 함부르크는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함부르크는 옛날부터 외국인이 많은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함부르크가 그의 역사에 빚지고 있는 것처럼, 1952년에 제정된 함부르크 헌법 전문은 명시적으로 도시의 세계개방성을 규정하고 있다. "자유 한자도시 함부르크는 역사와 지리를 통해 주어진 세계 항구도시로서의 특별한 임무를 독일 인민을 위해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자유의 정신 속에서 세계의 모든 나라, 모든 인민간의 매개자가 되는 것이다."가 그것이다
북유럽 물류허브 도약
함부르크는 베를린에 이어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엘베 강과 알스터 강이 만나는 곳에 카를 대제가 811년 쌓은 하마부르크성이, 오늘날 독일을 대표하는 항구도시 함부르크로 성장했다. 함부르크는 최신 컨테이너 터미널을 갖추고 있지만 바다가 아니라 북해에서 엘베 강을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 자리했다. 그러나 북해로 곧장 연결되면서 큰 배가 드나들 수 있기에 함부르크는 중세시대부터 번영을 누려왔다. 오늘날에도 물자의 집산지이자 무역의 교두보 구실을 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반도, 동유럽, 서유럽 등과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한 함부르크항은 네덜란드 로테르담항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 규모다. 특히 바다가 아닌 강기슭에 자리한 덕분에 조수간만차가 적고, 파도가 거의 없어 안전한 상하역이 가능하다. 항만으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항만 외에 국제공항도 갖추었고 철도 및 도로망도 발달됐다.
함부르크항에선 컨테이너를 비롯해 액체화물, 농수산식품, 목재, 석유화학제품, 자동차 등 거의 모든 화물을 상하역할 수 있다. 육해공 교통의 요지이자 유럽 각지와 연결되는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함부르크항은 유럽의 물류 허브로 자리 잡았다. 배후지역뿐 아니라 스칸디나비아 반도, 동유럽, 중유럽, 남유럽으로 오고가는 화물의 환적항 구실도 하고 있다.
2010년 함부르크항의 컨테이너 처리실적은 전년 대비 12.7% 증가한 789만600TEU였으며, 2011년에는 902만TEU를 처리했다. 함부르크항의 컨테이너 물동량은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연평균 6.4%의 증가율을 보였다. 2008년까지의 증가율은 연평균 10.9%에 달했지만, 2008년 하반기 시작된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2008년 함부르크항의 컨테이너 물동량은 전년 대비 2.0% 줄어들었다(2008년 세계항만 순위 11위). 2009년 이후 늘어나는 추세다.
화물이 함부르크항에 하역되면 철도와 고속도로를 통해 신속하게 주변지역으로 전달된다. 특히 북해, 발트해, 엘베강과 운하를 운항하는 선박을 통해 내륙지역과 발트해 연안 국가들로 화물을 보낼 수 있다. 선박을 비롯한 철도, 도로를 활용해 필요한 물자의 손쉬운 운송이 가능한 것이다.
항만시설과 컨테이너 터미널 규모
2011년 기준으로 최대 수심이 16.7m인 함부르크항의 면적은 약 9148㎡, 선석은 총 34개다. 모두 7개 컨테이너 터미널을 갖추었으며, HHLA(Hamburger Hafen & Logistik AG), 유로게이트(Eurogate), 유니카이(Unikai) 등 전문 터미널 운영업체들이 맡고 있다. 7개 컨테이너 터미널 가운데 유로게이트 컨테이너 터미널, HHLA CTA(Container Terminal Altenwerder), HHLA CTB(Container Terminal Burchardkai), HHLA CTT(Container Terminal Tollerort)는 컨테이너 전용, 나머지는 다목적 터미널이다.
컨테이너 전용 터미널 중에서도 함부르크시가 약 20억 마르크를 투입해 2003년 준공된 HHLA CTA는 네덜란드 로테르담항의 ECT(Europe Combined Terminal)와 함께 무인 자동화 터미널로 유명하다. 연간 190만TEU의 처리능력을 갖춘 이 터미널의 면적당 생산성은 기존 터미널에 비해 최대 6배 이상 높다. 장비 생산성은 평균 32개 처리, 피크타임의 경우 시간당 41개까지 처리할 수 있다.
함부르크항에서 가장 큰 컨테이너 터미널인 HHLA CTB에는 매년 5000척이 넘는 컨테이너선이 입항하고 있다. HHLA CTT는 초대형선을 처리하기 위한 컨테이너 터미널이다. HHLA는 이 터미널의 새로운 선석에 슈퍼 포스트 파나막스 갠트리(Super Post Panamax Gantry) 크레인을 5대 설치했다. 2011년 7월 아시아-유럽 노선을 운행하는 1만3000TEU급 컨테이너선 코스코 글로리(Cosco Glory)가 처음 이 터미널에 입항했으며, 이후 정기입항 중이다.
유로게이트에서 운영하는 7선석 규모의 컨테이너 터미널은 함부르크 중앙고속도로인 ‘A7’과 바로 연결된다. 유로게이트는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이 터미널을 확장할 계획을 세웠다. 확장을 마친 뒤 이 터미널의 컨테이너 처리능력은 600만TEU로 증가될 예정이다.
북독일 해운산업클러스터 선도
함부르크는 브레멘과 함께 북부 독일 해운산업클러스터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함부르크와 브레멘은 13세기 조직돼 300년 동안 북유럽 바닷길을 장악하며 무역의 중심이었던 한자 동맹의 전통을 자랑하는 항구도시들이다. 독일은 100㎞ 이내에 자리한 함부르크항과 브레멘항을 중심항만으로 발전시켜왔다. 양대 중심항만 사이의 치열한 경쟁은 독일 항만개발정책의 축이기도 핵심이기도 하다.
지난 6월27일 코트라 함부르크무역관 보고에 따르면, 북독일 해운산업클러스터는 함부르크와 브레멘 외에 부룬스뷰텔, 스타드, 쿡스하펜 등이 포함된다. 모두 오랜 전통을 가진 항구도시들로, 바다와 가까워 수자원이 풍부한 게 특징이다. 이 가운데 함부르크는 해양물류를 비롯해 선박 및 선박장비 제조 등의 분야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니더작센 주도 파트너로 북독일 해운산업클러스터에 참여하고 있다.
함부르크는 독일의 대외무역 거점으로 연간 무역규모가 1조 유로를 넘는다. 수많은 무역 관련회사가 함부르크에서 활동 중이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무역 중개상과 은행, 보험회사, 운송 및 컨설팅 회사들이 함부르크를 동북부 유럽의 대외무역 거점으로 성장시켰다.국제 무역회사들을 포함해 함부르크에 자리 잡은 무역회사는 3만2000개에 이른다. 함부르크항은 유럽연합(EU) 국가들과의 교역 비중이 약 50%를 차지한다. 그러나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무역규모도 비중이 크다.
북부 독일에는 약 3700개 회사가 해양경제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이 회사들의 총 직원 수는 14만여명에 달한다. 현재 함부르크에는 세계적인 해양 교육시설과 연구기관이 위치해 있다. 독일 로이드, 뷰로베리타스, 노르웨이 베리타스 등 유명 선급회사들도 함부르크에 주재하고 있다.
경제정책의 특징 클러스터
함부르크의 경제정책의 가장 큰 특징은 클러스터다. 해운뿐 아니라 함부르크에선 항공산업도 클러스터를 이루고 있다. 함부르크무역관에 따르면, 함부르크의 항공산업은 세계 세 번째 규모로 총 4만명 이상의 전문 인력이 항공산업에 종사한다. 에어버스와 루프트한자 테크닉, 함부르크 공항을 포함해 300여개가 넘는 항공 관련 중소기업이 긴밀한 협업체계를 갖추었다.
함부르크의 또다른 클러스터는 바이오산업이다. 함부르크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는 미래 신성장 동력으로 바이오클러스터를 육성하고 있다. 북독일 지역은 이식의학과 외과기술, 원격 의료, 영상치료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유럽 올림푸스 외과수술 테크놀리지, 필립스 메디컬 시스템, 드래거 매디컬, 존슨 & 존슨 메디컬 등 바이오 대기업은 물론 300개가 넘는 바이오 중소기업이 함부르크에 자리하고 있다.
함부르크는 재생에너지산업의 클러스터이기도 하다. 약 1500개 재생에너지회사들이 함부르크와 인근지역에 설립됐다. 이 가운데 함부르크 시내에 자리 잡은 절반 이상의 회사들은 풍력에너지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독일의 에너지 공급업체뿐 아니라 동 에너지(Dong Energy), 바텐팔, 아레바 윈드, 가메사, 제너럴 일렉트릭, 유럽 미쯔비시 파워 시스템, 노덱스 등의 글로벌 전력공급업체와 에너지 대기업이 본사 또는 지사(연구센터)를 함부르크에 설립했다.
그밖에 함부르크에는 출판사와 방송국 등 미디어와 IT 관련 회사들도 많이 활동하고 있다. 최근엔 엔터테인먼트 소프트웨어 분야가 눈에 띄게 발전했다. 특히 세계 게이머들 사이에 게임시티로 불릴 정도로 함부르크의 게임산업이 발달하는 중이라고 한다.
전통과 다양성의 조화가 강점
북부 독일의 중심도시 함부르크의 강점은 한자 동맹으로 대변되는 전통과 항만·항공·바이오·재생에너지 등 다양한 산업이 어우러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북유럽 교통의 요지이자 발트해로 이어지는 강가에 위치했다는 환경을 밑거름 삼아 세계적 항구도시로 발달했다. 또 다양한 클러스터를 구축함으로써 항만 기능을 더욱 활성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함부르크는 최신 항만시설과 잘 갖춰진 철도 및 고속도로망을 활용한 물류산업을 비롯해 항공·바이오·재생에너지 같은 혁신적인 성장산업을 선도한다. 이에 따라 함부르크의 국내 총생산 지수는 독일에서 가장 높다. 가용 소득은 독일연방의 다른 주들에 비해 평균 25% 높고, 구매력에서도 단연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인구가 줄어드는 다른 연방 주들과 달리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최근 풍력산업이 발달 중인 함부르크는 EU가 ‘2011년 유럽의 환경 수도’로 선정했을 만큼 환경문제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함부르크는 유럽 도시 가운데 녹색공간이 가장 많은 곳으로 꼽힌다. 녹색공간은 풍력산업과 함께 친환경 관광자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항만을 가꾸면서 산업을 발전시키고, 관광자원으로까지 활용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항만에서 북유럽 각지로 연결되는 교통망을 갖춰 물류 허브로 발전한 함부르크는 전통과 다양성을 무기로 유럽 해양 경제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최근엔 녹색교역을 통해 새로운 성장을 이어나갈 기세다. 한편,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적 항구도시답게 함부르크에선 2년(짝수해)에 한 번씩 국제 조선 및 해양 박람회(SMM)가 열린다. SMM은 노르웨이의 노르쉬핑(Nor-Shipping), 그리스의 포시도니아(Posidonia)와 함께 세계 조선 3대 박람회로 꼽힌다.
한국기업의 함부르크 진출
함부르크무역관은 함부르크 경제의 미래와 한국 기업의 함부르크 진출 사례 등을 소개했다. 함부르크무역관 보고를 보면, 함부르크는 물류산업을 비롯해 신재생에너지, 바이오, 항공(민수) 등의 산업이 발달돼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이들 분야에 속한 현지기업이 한국에 직접투자를 하는 사례가 있어 현재까지 국내 지방자치단체와 기업들이 투자를 유치하려 노력 중이다.
한국 기업의 함부르크 진출 사례도 적지 않다. 함부르크에 진출한 국내 기업은 20개 남짓인데 현대로지스틱스, 한진해운, 삼성중공업 등 물류 및 조선 분야가 대부분이다. 최근엔 효성 등 풍력산업 육성을 위해 진출하는 기업이 나오고 있다.
엘베강
독일, 체코, 폴란드를 지나는 총 길이 1,091km의 강. 다만 폴란드를 흐르는 본류의 길이는 전체의 1%가 안 되고 독일 영토를 관통하는 길이가 전체의 70% 정도이고 체코가 30% 정도다. 폴란드와 체코의 국경지대에 있는 스테티 산지를 수원으로 하여 체코 북부, 독일 동부를 흘러 하류에서 함부르크를 지나 북해로 흘러들어간다.
이름의 어원은 '강'을 뜻하는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Elfr'이다. 'Elfr'가 중세 저지 독일어 단어 'Elve'를 거쳐 'Elbe'로 정착된 것이다. 정작 엘베강 유역에 거주하던 고대 게르만족은 이 강을 'Albis(알비스)'라고 불렀다. 'Albis'라는 단어의 흔적은 엘베강을 가리키는 고지 독일어 단어 'Albiz'에 남아 있다.
독일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강으로, 독일의 주요 도시들인 드레스덴, 마그데부르크, 함부르크가 엘베강을 끼고 발전한 도시들이다. 독일 내에서 독일의 주요 강을 거론할 때 라인강, 도나우(다뉴브)강과 함께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강이다. 오데르강과 베저강도 보통 같이 거론되나, 오데르강의 경우엔 2차세계 대전 이후 강 동편과 하류가 모두 폴란드의 땅이 되면서, '독일 내'라고 말하기 애매해졌고, 베저강은 다른 나라 영토를 거치지 않고 온전히 독일에서 시작해서 독일의 북해에서 끝나는 강이지만 앞선 강들과 비교하며 그 크기가 많이 작은 편이다.
체코에서도 보헤미아 분지 북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젖줄인 만큼 중요한 강이지만, 아무레도 민족-낭만주의적 입장에서는 국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프라하도 거치는 블타바강이 더 중요시 된다. 물론 블타바강도 결국엔 엘베강에 합류하는 지류이기는 하다. 체코의 또다른 중요 강으로는 모라비아 지역의 모라바강이 있으며, 이 강에 의해 형성된 모라바 계곡의 존재 덕분에 오스트리아의 다뉴브강역과 폴란드 남부를 연결해주는 평탄한 무역로가 생겨날 수 있었다.
독일어
Elbe(엘베)
체코어
Labe(라베)
폴란드어
Łaba(와바)
엘베강이 기록에 등장하는 최초의 사례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서인데 이 저서에서 엘베강은 Albis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프톨레마이오스와 동시대를 살아간 로마인들도 이 강을 Albis라고 불렀으며 서기 1세기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엘베강을 로마 제국의 동쪽 국경으로 삼으려고 시도했다. 20년에 걸친 정복 사업 끝에 성공하는 듯이 보였던 엘베강 이서지역 제패는 서기 9년 아르미니우스에 의하여 로마군이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토이토부르크 전투 이후 로마 제국은 라인강 너머로 국경을 물렸고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라인강이 로마의 동북지역 국경으로 유지되었다. 중간중간에 로마군이 라인강을 건너 군사작전을 진행한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방전쟁 차원에서 게르만족들을 억누르려고 넘어간 거지 게르만족을 로마의 속주민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없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붕괴 후 무주공산이 된 이 일대는 슬라브족들의 차지가 되었다.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이 9세기 경 이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시켰지만 카롤루스 대제는 슬라브족들을 억누르는 대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자치권을 허용하는 온건한 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다시 혼란기가 찾아오고 북부의 색슨족이 남하하여 슬라브족들을 축출했다. 그나마 잔존해 있던 슬라브족 주민들도 10세기 무렵 진행된 북방 십자군과 동방식민운동으로 인해 게르만족에게 동화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해운 무역이 중심이 된 중세 시기에 엘베강은 중요한 무역 루트 중 하나였고 엘베강을 따라 자리잡은 한자동맹 소속의 도시들이 번영을 누렸다. 중세를 지나 근대에 들어서도 엘베강의 중요성은 변하지 않았고 1842년에는 서쪽의 베저강과 북쪽의 발트해를 이어주는 상업용 운하가 개설되었는데 이 상업용 운하를 통해 독일 서부의 공업 지대와 독일 동부의 농업 지대가 교역이 더 활발히 진행되면서 독일의 경제 성장이 빨라진 것은 덤이다. 덧붙여서 내륙지방에 위치한 체코슬로바키아(당시 오스트리아의 속령)도 이 운하 덕분에 상공업이 크게 번성했는데 이 운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목숨줄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할 때 연합국은 체코슬로바키아를 보호할 목적으로 북해와 만나는 운하의 초입 지역(함부르크 일대)을 체코슬로바키아의 소유로 할 것을 명시한 조항을 베르사유 조약에 넣어 버렸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할된 후에는 체코에 소유권이 넘어갔으며 2029년에 소유권이 종료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르던 1945년 4월 29일에는 이 강 유역에 위치한 작은 도시 토르가우(Torgau)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최초로 조우하기도 했으며 종전 후 독일이 분단되면서 엘베강은 동독과 서독을 가르는 국경선이 되기도 해 전술한 상업용 운하가 직격탄을 맞았다. 운하의 일부분이 동독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마음대로 상선이 들락날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서독은 운하를 다시 팠다. 다만 독일 재통일 후에는 기존의 운하를 다시 사용한다고 한다.
유럽에서 홍수가 잦은 지역이 바로 이 강의 유역이다. 당장 21세기 들어와서만 세 차례(2002, 2006, 2013)의 대형 홍수가 일어났다. 특히 2013년의 홍수는 근처의 대도시인 마그데부르크와 라이프치히를 직격해서 대피령이 떨어지고 해외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어졌다.
미국과 러시아 양국 참전용사들의 후손들과 군 관계자들은 매년 이곳에 모여서 엘베강의 날(ELBE DAY)을 기념하고 있다. 대전 당시 미국과 소련의 군복을 입고 그 당시 만남의 장면을 재현하거나 T-34-76, M4 셔먼 등을 몰고 오는 리인액트먼트 행사를 볼 수 있으며, 현지 시민들도 이를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대전 당시를 그대로 기념하기 위해서인지 러시아측은 현재 러시아 국기가 아니라 소련 국기를 들고 나온다.
이날 양국 국인과 시민들은 기념비에 모여 참전용사들에 대한 헌화와 묵념을 진행한다.
엘베강 동안은 10세기의 동방식민운동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슬라브인들의 영토였기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의 전간기에서 극단적인 폴란드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엘베강까지 영토를 확장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물론 워낙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라 반독 감정이 극심한 폴란드 내부에서조차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대체로 냉담했다. 애초에 이 지역은 슬라브인들이 처음 동부에서 이주해오기 전엔 다시 원래 게르만족들의 땅이었기 때문.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이 엘베강까지의 독일 영토를 폴란드에 할양하는 방안을 잠시 고려한 적이 있었다.[ 실제 엘베강을 독일-폴란드 국경선으로 삼았다면 독일은 그야말로 동방식민운동 이전의 동프랑크 영토로 축소되는데 수도 베를린과 제2도시 함부르크마저 폴란드 영토가 된다. 덤으로 현재 폴란드 영토가 독일보다 더 넓어졌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잠시 고려된 것 뿐이지 이런 무리한 주장은 힘을 얻지 못하고 금방 철회되었다.
히틀러의 최후를 둘러싼 무수한 카더라 가운데 소련이 히틀러의 시신을 화장해 그 재를 엘베강에 뿌렸다는 썰도 있다. 물론 진실은 저 너머에.
근세 이후 독일어권은 엘베강을 기준으로 동부와 서부로 나뉘곤 했는데 서부 지역은 자유주의, 상공업이 발달하여 부르주아 위주의 사회가 성립한 반면 동부 지역은 보수주의,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융커들이 장악했다. 근대 독일 역사에서 승자는 융커였지만 그 대가로 엘베강 동부 지역은 산업화된 서부 지역에 비해 낙후되고 말았으며 융커가 몰락한 후에도 이 일대를 통치한 것이 동독이라 서독의 통치 아래로 들어간 경우가 많았던 서부와의 격차는 더 벌어진다. 애초에 엘베강 동부 지역의 대표적인 산업지역은 슐레지엔 지역이었으나 이 쪽은 폴란드로 완전히 이양되었기 때문에 2차세계 대전 이후 독일 입장에선 완전히 깡촌밖에 남지 않는 지역이 되버렸다. 이후 동독에서도 문화, 산업 중심지는 엘베강 서쪽에 있던 라이프치히가 차지하고 있었다.
구간이 넓은 곳과 좁은 곳이 존재하는데 특히 독일 쪽 넓은 구간에선 유럽 최대 높이의 227m 높이의 송전탑이 설치되어 있다. 가다가 보면 소름끼치게 크다는 의견이 많다.
강바닥에 '기근의 돌'이라는 것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기록은 1616년으로 이후 강이 마를 때마다 그 시점을 기록해 두었다.'나를 보게 된다면 울어라(Wenn du mich siehst, dann weine)'라는 섬뜩한 경고문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자동맹, 발트-북해 무역 장악
뤼베크 중심으로 함부르크, 브레멘 등 백여개 도시 참여…자치권 확보
신성로마제국은 봉건제도를 토대로 농촌경제 시스템이었다. 황제도 대영주였고, 지역마다 영주들이 할거하며 더 많은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영토전쟁을 벌였다. 영주들은 토지를 농민에게 나눠 주어 소작료를 받아 거대한 부를 형성했다.
하지만 13세기에 접어들어 상업이 발달하면서 봉건질서에 변화가 생겼다. 상인들은 토지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를 형성했고, 도시들은 봉건영주들로부터 독립해 황제 직할령으로 전환해 상대적으로 자치권을 누렸다. 독일 북부의 상인들은 무역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발트해와 북해를 누비며 교약활동을 하며 이윤을 불려 나갔다.
독일인들이 해상무역에 나서기 앞서 발트해에선 스칸디나비아의 비이킹족들이 약탈무역을 시작했다. 약탈 무역은 점차 상거래로 전환되었고, 해안지대에 무역거점들이 형성되었다.
게르만족이 발트해 무역을 장악한 것은 작센과 바이에른에 영지를 갖고 있는 하인리히 공작이 1159년 홀스타인(덴마크)의 아돌프 2세에게서 뤼베크(Lübeck)를 빼앗아 도시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3세기에 독일 북부의 도시들이 발트해 무역에 나섰고, 뤼베크는 거점 도시가 되었다.
뤼베크는 점차 성장해 작센과 베스트팔렌지역의 무역 중심지가 되었고, 1226년에는 작센으로부터 독립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면허장을 얻어 자유도시가 되었다. 그에 앞서 함부르크가 1189년에 자유도시가 되었다. 자유도시는 영주에게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영주의 간섭을 받지 않고 무역거래를 할수 있었다.
독일 북부의 도시들은 스칸디나비아 무역상과 경쟁하기 위해 동맹을 체결했는데, 이를 한자 동맹(Hanz League)이라고 한다. 한자동맹이 언제 결성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문서상으로는 1267년에 처음 등장하고, 역사학자들의 견해로는 1100년대말에 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자동맹의 중심은 뤼베크이고, 함브르크, 브레멘, 쾰른 등 독일 도시와 단치히(폴란드 그다니스크), 라트비아의 리가, 에스토니아 등 100여개 도시를 포함했다. 동맹 소속 무역상들은 상인길드를 조직해 발트해와 북해를 누비면서 스칸디나비아, 러시아, 플랜더스, 영국에 가서 상품을 거래했다. 주요 거래품목은 모피 벌꿀 생선 곡물 타르 목재 호박(琥珀) 모직물 양모 등이었고, 밀과 귀리 등 곡물도 사고 팔았다.
독일 무역상들은 처음에는 발트해에서 스칸디나비아 상인들이 견제를 받았다. 키에프 루스(러시아)의 거점도시 노브고르드에선 스칸디나비아 무역상들이 상거래를 독점하고 있었는데, 독일 무역상들이 진출해 콘토르(Kontor)라는 상관(商館)을 설치하고 발을 들여다 놓았다. 동맹은 이어 브뤼헤(Bruges, 벨기에), 런던, 베르겐(노르웨이)에도 콘도르를 설치했다. 콘도르는 일종의 조차지 개념이다. 현지 국왕으로부터 특허장을 받아 주재원을 파견하고 그곳에서 상품을 거래하고 결제했다. 런던에 설치된 콘도르는 런던브리지 근처에 있었는데, 울타리를 쳐 경계를 표시하고 일종의 치외법권을 형성했다. 콘도르에는 뤼베크의 법이 적용되었다.
거래품목이 늘어나면서 한자 무역상들은 철과 구리제품도 거래했다. 독일산 철제갑옷은 다른 어떤 제품보다 강해 중세기사들이 애용했다. 염장어류, 목가공품, 비단 등도 거래되었다. 한자 상인들은 영국에서 모직물을 수입해 완성품으로 가공했고 그 결과로 독일 북부 지역에 수공업이 발전했다.
12~13세기에 한자 무역상들은 발트해 연안에 수십개의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폴란드의 엘블룸크과 토룬, 에스토니아의 탈린과 타르투, 라트비아의 리가 등은 한자 무역상들이 건설한 도시다. 이들 도시에는 아직도 한자동맹 시대의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한자동맹이 전성기를 구가한 14세기 후반에는 군대도 확보했다. 상인들은 이 군대를 통해 그들의 무역 독점에 대항하는 왕국을 군사적으로 공격하고 해적들을 소탕했다.
1368년에 한자동맹 소속 도시들은 연합 해군을 조직해 덴마크의 코펜하겐과 스웨덴의 헬싱보리를 공격해 덴마크와 노르웨이 왕에게서 발트해 무역의 독점적 지위와 무역거래에서 얻은 이익 15%를 세금으로 내는 조건을 얻어냈다.
1428년에는 동맹 소속 군대가 260척의 선박과 1만2천명의 용병을 이끌고 두차례나 코펜하겐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 왕실에서 덴마크 왕실로 시집간 필리파 왕비(Queen Philippa)의 전설적 투쟁의 스토리가 전해진다. 한자동맹군이 코펜하겐을 쳐들어 갔을 때 덴마크의 에릭 국왕은 피난을 갔는데 왕비가 남아 끝까지 투쟁해 한자동맹 해군을 무찔렀다고 한다. 필리파 왕비는 덴마크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영국에서 장미전쟁(1455–1487)이 벌어졌을 때 한자동맹은 요크가문에게 자금 지원을 하며 편을 들기도 했다.
하지만 한자 동맹은 구체적인 정치조직으로 확대하거나 연방체를 형성하지 못했다. 도시들이 자유롭게 가입하고 탈퇴하는 연맹체에 불과했다. 도시들이 신성로마제국에 충성을 했지만, 도시간 연합은 약했다. 이런 느슨한 조직이 동맹을 약화시켰다.
15세기 들어 유럽 곳곳에 중앙집권적 국가가 형성되면서 한자동맹은 현지 상권의 도전을 받게 된다. 러시아의 이반 대제는 노브고로드 콘토르의 영업에 제한을 가하다가 1496년에 문을 닫게 했다. 이탈리아에서 복식부기가 사용되면서 한자동맹의 회계는 경쟁력을 잃게 되었고 은(銀)이 화폐로 통용되면서 동맹의 어음 거래가 빛을 잃었다.
독일 북부 프로이센이 튜턴기사단의 영지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무역거점이 독립성이 약화되고, 폴란드의 영토 확장도 동맹의 주요도시인 단치히를 위협했다. 또 브뤼헤, 앤트워프 등의 도시가 부르고뉴 공작의 소유가 되면서 동맹에서 이탈해 독자적인 영업에 나섰고 네덜란드 상인들은 한자동맹의 독점체제를 피해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직교역을 추진했다.
16세기엔 한자동맹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스웨덴 왕국이 발트해를 장악한후 신성로마제국 내에 영지를 확보하고 덴마크 상인들도 독자적인 영업망을 구축하면서 한자동맹의 발트해 독점권은 사실상 무너졌다. 브뤼헤의 콘도르는 불능의 상태로 빠졌고 동맹 소속 도시들이 각자 이기주의에 빠져 들었다.
1556년 동맹 도시들은 행정체계를 정비해 쾰른 출신의 하인리히 수더만(Heinrich Sudermann)을 종신총독으로 선임했다. 하인리히는 회원 도시를 위해 외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각 도시에 의무를 부과하는 등 안간힘을 썼으나 쇠퇴하는 동맹의 기력을 회복시키는데 실패했다. 브뤼헤 콘도르는 안트워프로 이전했지만 결국 1593년에 문을 닫았고, 런던 콘도르도 1598년 폐쇄했다. 노르웨이의 베르겐 콘도르만 남아 활동했지만 1754년에 문을 닫고 말았다.
1563~70년에 덴마크-노르웨이 왕국과 스웨덴 왕국이 7년전쟁을 벌일 때 한자동맹은 당대 최대인 2천~3천 톤급의 대형 전함 아들러호(Adler von Lübeck)을 건조해 덴마크를 지원했지만 한번도 써보지 못하고 전쟁은 끝나고 말았다.
17세기 들어 한자동맹은 내부 싸움으로 연맹체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독일이 종교전쟁에 휘말리고, 오스만 투르크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도시 동맹은 사실상 멈춰 버렸다. 1669년 한자동맹은 그때까지 남아 있는 9개 도시로 마지막 회의를 열었다. 뤼베크, 함부르크, 브레멘은 신성로마제국이 멸망하고 1862년 빌헬름 2세에 의해 독일 제2제국이 탄생할 때까지도 동맹을 이어갔다.
한자동맹, Hansa 同盟, 독일어 Hanse, 친구, 발트 해, 신항로 개척으로 쇠퇴, Hanseatic League
한자(Hansa)는 13세기 초에서 17세기까지 독일 북부 도시들을 중심으로 여러 도시들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무역 공동체이다. 본래 한제(Hanse)는 중세 독일의 도시에서 활동하던 상회(商會, 상인 조합)를 이르며, 이들은 서쪽으로는 영국, 동쪽으로는 발트 해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자체적인 해군을 보유하여 교역로을 독점하면서 대항해시대 이전 중세 유럽의 유력자로 자리잡았다. |
한자동맹 [Hansa, ― 同盟]
(영) Hanseatic League. Hansa는 Hanse라고도 씀.
독일 북부의 도시들과 외국에 있는 독일의 상업집단이 상호교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창설한 조직.
13~15세기에 북유럽의 중요한 경제적·정치적 세력이었다(독일어 Hanse는 '무리'나 '친구'라는 뜻의 고트어에서 유래한 중세 독일어로서, '길드'나 '조합'을 의미했음). 한자 동맹의 전신은 독일 상인들이 활동한 2개의 주요지역, 즉 북해 연안의 저지대 및 브리튼 섬과 교역 관계를 갖고 있던 라인란트, 독일인들이 유럽 북동부의 방대한 배후지와 서유럽 및 지중해 지역 사이에서 중개상 노릇을 한 발트 해 연안지역에 있던 지방의 상인단체들이었다. 1280년대에 이미 라인 지방의 다양한 상인 집단들은 그들의 공통된 이익을 지키기 위해 협력했고, 발트 해 무역을 지배한 뤼베크 및 그밖의 독일 북부 도시들과 동맹을 맺었다. 동맹의 목적은 해적 및 산적을 진압하고, 등대를 세워 항해의 안전을 촉진하며, 수로 안내인 등을 훈련시키고, 무역기지와 독점권을 확립함으로써 교역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많은 외국 도시(예를 들면 노르웨이의 베르겐, 러시아의 노브고로트, 영국의 런던)에 상업 지역(kontore)을 세웠다. 수십 년 뒤 한자 동맹의 공격적인 보호무역정책은 현지 상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1368~70년에 한자 동맹은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의 단호한 저항에 부딪쳤다. 발데마르는 발트 해 남서부지역을 지배하여, 그곳에서 한자 동맹이 장악한 경제적 지배력을 종식시키려고 애썼다.
한자 동맹은 특별 회의를 소집하여 군대를 모집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군대가 그후 덴마크군을 결정적으로 무찔렀기 때문에 한자 동맹은 잠시 덴마크를 지배하게 되었다. 14세기에 한자 동맹은 대부분 독일 도시인 100여 개의 도시를 회원으로 거느렸다. 한자 동맹에는 정관도 없었고, 육군이나 해군의 상비군도 없었으며, 정기 집회(의회)를 제외하고는 관리기구도 없었다. 각 도시의 특유한 이해관계와 지역적인 이익이 공통된 관심사보다 비중이 커지기 시작하자, 15세기초부터는 정기 집회를 소집하는 일도 점점 뜸해졌다. 비(非)게르만족이 세운 발트 해 국가들의 세력이 점점 커진 것도 한자 동맹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리투아니아·폴란드는 1368년에 통일되었다.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는 1400년경에 연방을 결성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1478년에 노브고로트를 점령하고, 그곳의 독일 상인들을 추방했다. 16세기 중엽에 이르자 네덜란드인이 발트 해에서 서쪽으로 상품을 수송하는 해운업을 장악하게 되어 뤼베크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독일 자체에서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같은 군주국 통합체가 한자 동맹을 약화시켜, 한자 동맹은 신대륙 발견 시대에 서서히 사라졌다. 한자 동맹의 집회가 마지막으로 열린 것은 1669년이었다.
설립 과정
한자(Hanse)라는 용어가 1267년 문서에 등장하기 이전에, 발전이 더디었던 발틱해 주변의 상인들은 도시 간 상호 교류하려고 길드나 한자(Hansa)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14세기 초에 플랜더스가 영방으로 대두하자, 독일의 상인은 그 압력을 막고자 독일 여러 도시가 연합해야 했다. 뤼베크를 맹주로 해 쾰른, 브레멘, 베를린 등지에서 정치 동맹이 설립되었다. 그래서 플랜더스를 대상으로 상업 봉쇄를 선언하였다. 이 동맹은 함대와 요새를 가지고 있었으며, 마치 연합국가로서 인상을 띠었다.
가맹한 여러 도시
뤼베크를 비롯하여 함부르크, 비스마르, 로스토크, 단치히 등 북해 연안과 엘베 강 동안에 있는 독일 여러 도시가 최초에 가맹하였고 후에 가맹한 여러 도시가 90개를 넘었다.
활동과 전성기
1370년에 전성기를 맞는 한자동맹은 북유럽의 무역권을 지배하고 런던, 브뤼헤, 노브고로트 등에도 재외 상관을 두었다. 라인 강에서 발트 해, 북해에 걸쳐서 수상 교통과 운수, 무역에 종사하였으며, 갑판이 넓고 가운데가 큰 대형 선박을 이용해 북해와 발트해 방면에서 목재, 모피, 철 따위와 대구 같은 수산물, 곡식과 맥주 등을 저지대와 서부 독일로 운송하고 동양의 향료와 영국의 양모나 기타 가공품을 북방으로 운반했다. 후에는 동유럽의 산업 원료를 중계하여 서유럽의 수공업자에게 공급하였다. 이러한 무역 발전에 따라 해상운송의 확보와 독점을 취해 군사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15세기 이후 신항로 개척으로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여 17세기에 소멸되었다.